당신은 왜 자신과 다른 사람을 위하여 생명을 원하는가?
“우리 주[여호와]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계시 4:11.
1. 여호와의 증인 한 사람은 한 여인으로 하여금 어떻게 새로운 인생관을 갖도록 도울 수 있었읍니까?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독일 ‘베를린’에서 깊은 실의에 잠긴 한 여인이 약을 과량으로 먹고 자살하려는 순간, 초인종이 울렸읍니다. 그는 방문한 사람을 급히 보낼 생각으로 나갔으나 실패하였읍니다. 방문한 사람은 여호와의 증인 봉사자였으며 실의에 찬 그의 모습을 보고 성서 귀절을 사용하여 그를 위로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생명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을 열심히 듣고 나서 그는 안으로 들어가 약을 버렸읍니다. 잠깐 사이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새로운 인생관과 삶의 이유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2. (ㄱ) 생명의 근원은 누구입니까? (ㄴ) 생명은 어떠한 책임을 수반합니까?
2 생명이란 무엇입니까? 영국의 법학자 ‘윌리암 블랙스톤’은 생명이 “하나님의 직접적 선물”이라고 하였읍니다. 성서에서는 생명의 근원을 명시하여 “생명의 원천이 주[하나님]께 있”다고 하였읍니다. (시 36:9) 물론 우리가 이 거룩한 선물을 요청하지 않고 출생과 더불어 소유하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이 선물에 대하여 책임이 있읍니다. 우리는 그 거룩한 선물에 합당하게 살아야 할 책임이 있읍니다. 그러나 현재까지 인류의 대다수는 그 책임을 이행하지 못하였읍니다.
3. (ㄱ) 인간은 어떠한 종류의 삶을 동경합니까? (ㄴ) 삶은 어떻게 가치있게 됩니까?
3 살고 싶어하는 것은 기본적이고 자연스러운 욕망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단지 살고 있는 것 이상을 원합니다.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의미있고 목적있는 생활입니다. 산다는 것은 단순히 호흡을 하는 것 뿐 아니라 행동하고 일하고 놀고 우리의 기관과 모든 감각과 기능을 활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충실하고 신념에 감응하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생활과 관련을 가질 때에, 우리가 책임이 있고 관련이 되어 있을 때 비로소 사는 것입니다. 건축을 하고 희망을 걸고 계획을 세우고 즐거워하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달성하는 일을 통하여, 그리고 경험을 통하여 삶은 가치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최상의 생을 누린 사람은 가장 오래 산 사람이라기보다 생명을 잘 사용하고 생명을 온전히 즐긴 사람입니다.
4. 생명의 참 가치는 어디에 있읍니까? 예를 들어 보십시오.
4 성서는 생명의 참 가치는 양에보다 질에 있다고 알려줍니다. 단순히 지내온 햇수는 온전한 의미의 삶이 아닙니다. 우주 비행사들은 수십억년이나 되었다는 돌을 달에서 가져왔지만 그 돌들이 살아 온 것은 아닙니다. 만일 사람이 백 살이나 이백 살을 살았다면 어떠합니까? 만일 그가 유익한 일은 하나도 한 일이 없거나 그보다 더 나쁘다면, 만일 그가 자기의 생명을 오용 혹은 남용하여 다른 사람을 해치는 생활을 해왔다면, 그가 태어나지 않은 것이 더 낫지 않았겠읍니까? (마가 14:21) 오늘날 수백만의 사람들은 부도덕을 갈망하고 비오는 일요일 오후에는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읍니다. 반면에, 생명을 사랑하고 생명을 현명하게 온전히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하신 완전한 본이십니다. 그는 단지 삼십 삼년 반 동안 사셨지만 그의 활동이 자세하고 완전하게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안다고 사도 ‘요한’은 말하였읍니다. (요한 21:25) 분명히 예수의 생애는 풍요한 생애였읍니다. 그러므로 생명이 길다 짧다 하는 말은 그릇된 생각을 전달합니다. 생명이 흥미있는가 지루한가, 무의미한가 보람있는가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분명히 더 나을 것입니다.
삶에는 의미가 있어야 한다
5, 6. (ㄱ) 삶이 실속있으려면 무엇을 지녀야 합니까? (ㄴ) 진화론은 어떻게 생명의 가치를 떨어뜨리며,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읍니까?
5 그러므로 단순히 살아 있다는 것만은 온전한 의미에서 생명이 아닙니다. 심리 요법사 ‘시드니 저러드’는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사람은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는 생활을 경험하는 동안에만, 그리고 삶의 목적이 있는 동안에만 살아 있다.” 그러나 절대 다수의 선생들이 생명이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 자연속의 우연이라고 믿고 있는 이 세상은 생명에 어떠한 의미 혹은 의의를 부여합니까? 그들의 이론은 분명히 생명을 존경하지 않습니다. 진화론과 같은 사상은 인간이 일종의 짐승이며 진화의 산물이라고 가르침으로써 인간 생명에 불명예를 가져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존엄성을 부인함으로써 인간의 품위를 떨어뜨립니다. 이러한 사상의 영향을 받아 많은 사람들은 생명을 경시하게 되었읍니다. 세상에 만연하는 범죄, 폭력, 전쟁 및 부도덕은 사람들이 생명의 거룩함에 대하여 나타내는 불경을 반영합니다.
6 사람 자체의 기원에 대한 깎아 내리는 여러가지 이론들은 전능하신 창조주께 대한 모독입니다. 시편 필자는 “여호와여 ··· 원수가 주를 비방하며 우매한 백성이 주의 이름을 능욕하였나이다” 하고 선언하였읍니다. (시 74:18, 22) 그러한 견해는 인류의 도덕을 문란케 하였읍니다.
7. 우리는 생명의 참 의미에 대한 설명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장래에 대한 어떠한 전망이 있읍니까?
7 그러나 성서에서는 우리에게 생명의 참 의미를 알려줍니다. 성서는 결코 사람을 낮추지 않으며, 인간에 대한 감동적인 진리 곧 인간이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유일하고 독특한 창조물이라는 진리를 알림으로써 인간에게 존엄성을 부여합니다. (창세 1:26-28) 이 사실로부터 인간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도록, 자신의 생명과 다른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도록,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인간의 전망은 진화론자들이 가르치는 것처럼 죽음만이 기다리는 답답한 것이 아닙니다. 성서에 의하면 인간 앞에는 영원한 생명이 가로놓여 있어 전망이 광대합니다. (요한 3:16) 성서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장래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람이 낙원이 된 땅에서 하나님의 완전한 아들 딸이 될 전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의에 잠겼던 독일 여인이 생명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에서 위안을 발견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한 지식은 생명에 대한 존경심을 불러일으키고 계속 살고 싶어하는 그리고 생명의 수여자에게 영광을 돌리고 싶어하는 욕망을 솟아나게 합니다.
삶에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
8. 삶이 의미있으려면 또 무엇을 지녀야 하며,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그것을 발견하려고 노력하였읍니까?
8 그러나 삶에 의미가 있으려면 삶에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생에 대한 여러 가지 철학의 영향을 받아 방황하는 한 학생은 이에 대한 필요성을 인정하였읍니다. “나에게 난처한 일은 나에게 삶의 이유가 없다는 점이다 ··· 사람에게는 이유가 필요하다. 그런데 나에게는 이유가 없다”고 그는 말하였읍니다. 그러한 서글픈 곤경에 처한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그러면 삶의 참다운 목적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인생의 으뜸가는 목적이 행복을 찾는 데 있다고 주장하여 왔읍니다. 그러나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어떻게 어디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읍니까? 일부 사람들은 행복을 육체적 쾌락과 혼동하여 관능을 만족시킴으로 그 행복을 찾으려고 합니다. 어떤 형태의 예술에 대한 전념에서 혹은 대의명분에서, 심지어는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에서 삶의 목적을 발견하려는 사람들도 있읍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목적을 발견하려는 이러한 모든 노력은 사람을 오랫동안 만족시켜주지 못하였읍니다.
9. 오늘날 커다란 거짓은 무엇이며, 왜 그것은 망상입니까?
9 오늘날의 커다란 거짓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 수 있다는, 순수한 유물론적 철학이 인간의 모든 삶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켜 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집과 자동차와 ‘텔레비전’과 보수가 좋은 직장만 있으면 나는 행복할 것이다” 하는 생각은 몰이해한 망상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별로 받아들이지 않는 계몽적인 사실은 부유한 사람들이 자기들의 재산에서 기쁨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 하면 그들은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행복과 만족을 얻지 못하고 있다고 시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빵’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삶의 목적을 찾고 있읍니다.
10. 우리는 참으로 어디에서 삶의 이유를 발견할 수 있이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10 하나님의 영감받은 말씀인 성서는 만족을 얻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삶의 이유를 알려줍니다. 「시편」 필자는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하고 선언하였읍니다. (시 40:8)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읍니다.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히브리 10:9; 요한 4:34) 그리스도의 사도 ‘바울’도 삶에 대한 바로 이러한 이유를 강조하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한다고 말하였읍니다. (로마 12:2) 그리고 성서 마지막 책도 이 점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읍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계시 4:11) 이와 같이 성서는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를 명백히 알려 줍니다. 생명을 다른 목적에 사용하는 것은 본래의 목적에 어긋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는가?
삶에는 또한 성과가 있어야 한다
11. 삶이 의미있으려면 무엇을 포함해야 하며, 성경에서는 이것을 어떻게 지지합니까?
11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은 일부 사람들이 상상하듯이 소극적이 아니라 진취적입니다. 그것은 또한 보람이 있읍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남자 ‘아담’과 그의 아내를 창조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니라.]” (창세 1:28; 2:15) 이 모든 것은 일해야 함을 의미하였으며, 의미있는 일, 땅을 정복하고 낙원으로 만드는 일을 해야 함을 의미하였읍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 분주한한 그의 삶은 보람이 있었읍니다. 그가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것을 이기적으로 추구하였을 때에 비로소 그의 삶은 불행하게 되었읍니다.—창세 3:8-24.
12. 불완전한 상태하에서도 삶은 의미있고 성과로 충만할 수 있읍니까? 예를 드십시오.
12 ‘에덴’ 밖에서의 불완전한 환경 하에서도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데 정직하게 종사한다면 삶은 의미있을 수 있고 보람있는 일로 채워질 수 있읍니다. 이것은 역사가 주는 교훈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노아’는 방주를 건축하였으며, 방주를 통하여 인류는 멸종을 면하였읍니다. (베드로 후 2:5; 3:5, 6) 그것은 참으로 훌륭한 공적이었읍니다! 그리고 믿음이 강하였기 때문에 백 살 때에 아들을 낳은 ‘아브라함’을 생각하여 보십시오. 또한 ‘모세’의 생애를 간단히 고려하여 보십시오. 그는 보통 사람 열두 명이 일생 동안에 수행할 일보다 더 많은 일을 여든 살 넘어서 수행하였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용하여 ‘애굽’의 ‘바로’에게 도전하게 하셨으며 그 결과 ‘이스라엘’인 노예들이 해방되었읍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나라인 육적 ‘이스라엘’의 탄생을 목격하였고 사십년 동안 그 나라를 인도하였읍니다. 그의 생애가 참으로 풍요하였던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길을 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성서에는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사람으로 부하게 하시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신다는 것을 증명한 많은 다른 사람들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읍니다.—잠언 10:22.
13. 그리스도인 봉사는 어떻게 성과를 거두어 왔읍니까? 예를 들어 설명하십시오.
13 그리스도인 봉사는 초기의 충실한 사람들의 봉사가 그러했듯이 여러 가지 성과로 특징을 이루고 있읍니다. 예수의 생활은 이에 대한 본입니다. 그의 생활은 의미가 있었읍니다. 그의 삶은 목적이 있었읍니다. 그는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는 목적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마태 20:28) 인류를 구원하여 죄와 죄의 삯인 사망으로부터 구출하는 길을 여는 성과를 거두었읍니다. 그분이 하신 일은 보람이 있었읍니다. 그에 대한 상으로 그는 하늘에서의 불멸성을 획득하였기 때문입니다. (히브리 12:1-3; 빌립보 2:5-11) 그리고 예수의 발자취를 따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보람이 있음을 발견하였읍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지중해 연안 전역에서 그리스도인 회중들을 설립하였읍니다. 그가 쓴 편지들이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읍니다. 이러한 것은 참으로 훌륭한 성과였읍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그가 그리스도인 생활을 추천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고린도 전 11:1.
오늘날 그리스도인 봉사의 보람있는 면들
14. (ㄱ) 그리스도인 봉사를 추구하는 것이 오늘날의 생활에서 보람이 있읍니까? (ㄴ) 예를 드십시오.
14 그러나 오늘날은 시대가 달라졌다고 일부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들은 종교 생활이 모험과 흥분이 없는, 혹은 일을 달성하는 데서 오는 만족감이 없는 빈혈적 생활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들의 생활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 봉사에 종사하는 것이 생활에서 가장 보람있는 일임을 발견하였읍니다. 그들은 집에 앉아서 우리가 사는 위험한 때를 한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일을 합니다. 복음 전도자로 여호와의 왕국을 선포하고 모든 나라 사람들을 제자로 삼습니다. (마태 24:14; 28:19, 20) 예를 들면, ‘덴마아크’에서 여호와의 증인 전도인들은 성서를 연구하고 싶다고 말하는 부부를 만났읍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읍니다. 그 사람은 자기는 ‘알코홀’ 중독자라고 말하고 자기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말하였읍니다. 의사들도 노력을 해 보았지만 실패하였다는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아내는 마약 중독자였읍니다. 상태는 참으로 절망적으로 보였읍니다! 그러나 그들은 비슷한 환경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의 악습에서 벗어났음을 성서에서 읽고 용기를 얻었읍니다. (고린도 전 6:9-11)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읍니다. 이년 후에 그들은 ‘알코홀’ 중독, 마약 중독 및 흡연 습관에서 완전히 벗어나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으로 침례를 받았읍니다. 이러한 경험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생각하여 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오늘날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활을 조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골로새 3:8-10) 이러한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돕는 일에 하나님의 동료 일군으로 도구가 되는 것은 참으로 큰 즐거움입니다! 이러한 증인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아낌없이 주는 자진성으로 인하여 놀라운 행복을 경험하고 있읍니다!—사도 20:35; 시 110:3.
15, 16. (ㄱ) 봉사의 어떠한 다른 면으로 볼 때 봉사를 추구하는 것이 보람있는 일임이 분명합니까? (ㄴ) 베드로 후서 1:5-8은 이 점에 대해서 무엇을 알려줍니까?
15 그리스도인 봉사에서 오는 또 다른 부가적인 보람이 있읍니다. 많은 청소년들은 일에서 벗어날 때 진정한 생활이 시작된다고 믿고 있읍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두팔을 벌리고 누워서 ‘아, 이것이 사는 것이다!’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얼마 동안이나 ‘사는 것’입니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곧 불만이 생깁니다. 지루해집니다. 그 뿐아니라 침울한 권태 속에서 산다는 것은 피로하고 건강이 좋지않은 상태에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쯤 죽은 상태로 기동하게 됩니다. 반면에 그러한 청소년들은 연로한 그들의 부모가 관심가진 사람들을 재방문하고 성서 연구를 사회하고 그리스도인 집회에 서둘러 가는 것을 보아도 이러한 방법으로 신체와 정신을 사용하는 것이 몸을 강건하게 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행복감을 줍니다. 분명히, 사도 ‘바울’의 이러한 충고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유익이 있읍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로마 12:11.
16 일에서, 의미있는 일에서 손을 떼는 사람은 삶에서도 손을 떼는 사람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느리기는 하지만 확실한 자살 행위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몸은 아무 짝에도 쓰지 못하는 고장난 침대 ‘스프링’과 같으며, 그들의 정신은 비어 있는 방과 같이 생각과 관심사가 없읍니다. 이러한 상태를 방지하는 최선의 방책은 하나님의 말씀을 착실히 연구하고 하나님의 사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봉사는 일거 양득이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수행할 때 사람의 생각은 건설적인 생각과 활동으로 채워집니다. 그리하여 비활동적이고 비생산적이 되지 않도록, 쓸모없다고 느끼는 일이 없도록 하여 줍니다. 그것은 얼마나 큰 성과이며 축복입니까!—빌립보 4:6-9; 베드로 후 1:5-8.
그러나 삶이 만족하려면 영원해야 한다
17. (ㄱ) 완전히 만족한 삶을 위해서는 또한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ㄴ) 요한 복음 17:3에 의하면 어떻게 그것을 얻을 수 있읍니까?
17 하나님의 봉사에 종사하면 즉시 삶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아름답고 귀중하게 되지만—그리고 그것이 충분한 상으로 보이지만—죽음만을 바라보고 사는 것은 참으로 만족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죽음은 원수이지 친구가 아닙니다. (고린도 전 15:26) 예수께서는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이 필요함을 이렇게 강조하셨읍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마태 16:26) 죽음을 앞에 둔 물질적 성과는 성과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려면 살아있어야 합니다. 죽은 자는 하나님께 영광를 돌리지 못합니다. (시 115:17) 그리스도인 봉사에서 추구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사람을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합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좋은 소식입니다. (요한 17:3)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알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어야 합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의 은사는” 수명이 제한된 생명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기 때문입니다. (로마 6:23) 여호와의 증인으로서의 그리스도인 생활이 지금도 매우 즐겁고 매우 의미있고 매우 만족스러운 이유는 그들이 이 선물을 얻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8. 영원한 생명이 왜 가장 바람직한 것인지 설명하십시오.
18 그러나 영원한 생명은 바람직할 것입니까? 완전한 상태하에서는 물론 그럴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약속된 장래를 ‘풍성한’ 생명이라고 부르셨읍니다. (요한 10:10) ‘바울’은 그것을 “참된 생명”이라고 불렀읍니다. (디모데 전 6:19) 그리고 그 이유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영원한 시간은 창의적인 활동과 건설적 활동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제공합니다. 끝나지 않은 하나님의 일 즉 이 땅을 낙원으로 만드는 일이 틀림없이 하나님의 새로운 사물의 제도에서 인류의 주의를 이끌 우선적인 일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이사야 65:17-25; 베드로 후 3:13; 계시 21:1-5) 백성들의 정신은 여호와에 대하여 배우고 생활 전반에 관한 사실과 통계와 의견을 수집하는 일을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두뇌의 저장 능력은 무진장이며 많이 저장할수록 두뇌는 더 유용하여집니다. 발명가이며 과학자인 ‘토마스 에디슨’은 한 때 우주 만상을 이해할 수 없는 두뇌의 현 상태를 슬퍼하였읍니다. 그는 어떠한 사물에 대해서도 백만분의 일밖에 알지 못한다고 말하였읍니다. 그러나 두뇌를 최대한으로 사용할 때의 기쁨을 생각하여 보십시오! 오늘날의 현재와 같은 생명으로는, 일을 끝까지 해내는 것이 극히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을 조금 하고는 최종 완성품이 자기들의 바라는 욕망 근처 어디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새로운 제도에서는 생각을 구체적으로 하여 완성할 수 있는 시간과 능력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영원무궁토록 행복을 누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언명된 목적입니다.—이사야 55:10, 11.
19. 우리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선물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읍니까?
19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생명을 하나님의 선물로 소중하게 간직하십시오.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의 유일한 근원과 생명의 참 의미와 보람있는 목적을 알려줌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에 대한 존경심을 심어 주십시오. 사람들을 도와서 여호와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 생도가 되게 하십시오. 그렇게 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을 모두 가르치십시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의 유일한 이유를 지적해 줄 때 우리는 삶의 목적이 우리 속에 항상 새롭게 기억될 것입니다. 왜냐 하면 생명은 사랑과 같이 자체의 테두리 안에서는 번영할 수 없고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날 때에 새로와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장 크고 가장 보람있는 봉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의 궁극적인 희망을 「시편」 필자는 이러한 말로 표현하였읍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찌어다. 할렐루야!”—시 1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