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화 재료로 건축하는 일
“어떤이는 이 기초 위에 집을 짓는데 금이나 은이나 보석을 사용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무나 풀이나 짚을 사용할 것입니다.”—고린도 전 3:12, 오늘날의 영어 역본.
1, 2. (ㄱ) 자기 집이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되는 것을 보는 것보다 무엇이 더 고통스러운 일일 수 있읍니까? (ㄴ) 때때로 그리스도인 봉사자들은 그와 비슷한 어떤 실망적인 경험을 합니까?
아름다운 집이 불에 타 잿더미가 되는 것은 확실히 서글픈 장면입니다. 특히 그것이 자신이 지은 집이라면 참으로 슬픈 일일 것입니다! 자신의 시간과 정력이 모조리 연기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세상의 것들을 위해 진리를 버리는 자녀의 그리스도인 부모가 느끼는 아픔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자기 자녀가 그러한 영적 파멸에 이르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2 그러한 부모의 심정은 우리가 그리스도인 봉사자로서 경험했을 수 있는 실망과 다소 비슷할 수 있읍니다. 아마 어떤 사람과 성서 연구를 시작한 후 그 사람이 진리의 지식에 이르도록 여러 달 혹은 여러 해를 바쳤을지 모릅니다. 그가 집회에 참석하고 야외 봉사를 시작하기까지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자 그가 갑자기 영적으로 약해져서 무활동이 되고, 심지어 이전의 악한 습관으로 되돌아가기까지 하는 수가 있읍니다. 얼마나 실망적인 일입니까!
3. 그러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당연히 무슨 질문들이 생기며, 그 대답은 무엇에 달려 있읍니까?
3 불행하게도 때때로 그러한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그 일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각 사람의 마음 상태가 한 가지 요인일 수는 있으나, 어느 정도 그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은 또 다른 질문에 대한 답에 달려 있읍니다.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때 우리는 올바른 기초 위에 내화 재료로 건축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를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가르치는 사람들—우리의 성서 연구생 및 자녀들—이 진리 안에 굳게 서도록 돕는 하나의 비결입니다.
건축자는 누구인가?
4. 고린도 전서 3:10, 11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 봉사자를 무엇으로 비유하며,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4 그 대답으로 고린도 전서 3장을 찾아보면 거기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 봉사자를 건축자로 비유하고 있읍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찌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10, 11절.
5. (ㄱ) 문맥에 의하면 ‘바울’은 무슨 종류의 건축 일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까? (ㄴ) 어떠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 봉사자는 ‘사람들을 건축’합니까?
5 ‘바울’은 무슨 종류의 건축일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읍니까? 다음과 같은 문맥에 유의하십시오. “너희는 ··· 하나님의 집이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니라.]” (고린도 전 3:9, 16) 그러므로 그것은 상징적인 건축 일, 즉 “사람들”이 관련된 건축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 봉사자는 관심가진 사람에게 그리스도인 성품을 심어 줌으로 그들을 제자로 삼으려고 노력한다는 의미에서 ‘사람들을 건축’합니다.—마태 28:19, 20.
6, 7. (ㄱ) 고린도 전서 3:9-15에 나오는 ‘바울’의 말은 누구의 책임에 초점을 맞추고 있읍니까? (ㄴ) 그렇지만, 어떻게 합동 건축 작업이 관련되어 있읍니까? (ㄷ) ‘바울’의 말을 더 고려하는 것은 무엇을 깨닫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까?
6 그것은 그 연구생이 어떻게 발전하느냐에 대한 책임이 가르치는 그리스도인에게만 있음을 시사합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입니다. 고린도 전서 3:9-15에 나오는 ‘바울’의 말은 건축하는 일, 즉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의 책임에 역점을 두고 있지만, 실제로는 연구생 역시 관련되어 있는 합동 건축 작업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전쟁을 위하여 군인을 대비시키는 일에 비할 수 있읍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훈련시키고 자격을 갖추게 해줄지 모르지만, 일단 그가 전쟁터에 나가면 군인은 자기가 배운 것들을 사용하여 싸움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바로 그의 생명이 그것에 달려 있읍니다! 이와 비슷하게 가르치는 사람도 참다운 그리스도인을 건축하기 위하여, 즉 그가 현 제도의 압력과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하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연구생에게도 책임이 있읍니다. 그는 자기 생활에서 자기가 배운 것들을 적용시켜야 합니다.—마태 7:24-27; 빌립보 2:12, 13.
7 그렇지만, 가르치는 사람에게 무거운 책임이 있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읍니다. ‘바울’의 말을 더 고려함에 따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효과적으로 가르침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한 인식을 심어 주는 일의 중요성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올바른 기초를 놓는 일
8. 상징적인 이 건축 작업에 있어서 그 기초는 무엇입니까?
8 건축하는 일에 착수하기에 앞서, 우리는 먼저 기초를 놓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제자를 삼는 건축 작업에 있어서는 무엇이 그 기초입니까? ‘바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고린도 전 3:11) 그렇습니다. 건축하는 일을 위한 올바른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비교 에베소 2:20-22 및 베드로 전 2:4-6.
9. (ㄱ)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기초로 놓는 일에는 무엇이 관련되어 있읍니까? (ㄴ) 우리의 성서 연구생들이 예수에 관한 전체 진리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9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때 어떻게 그리스도를 기초로 놓을 수 있읍니까? 우선, 우리는 예수에 관한 진리를 가르치고 다른 사람들이 그 진리를 중심으로 생활을 틀잡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데에는 예수께서 우리를 ‘돕는 분’이시며 여호와께서는 ‘그분’을 통하여 대속을 마련해 주신다는 것을 그들이 믿도록 돕는 일이 포함됩니다. (마태 20:28; 요한 1서 2:1, 2)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인 회중의 임명된 머리이십니다. (골로새 1:18) 그분은 또한 땅의 정당한 왕이시며, 그 자격으로 곧 ‘아마겟돈’에서 “또 이기”실 것입니다. (계시 6:1, 2) 그러므로, 분명히 그리스도를 기초로 놓는 일에는 그분에 관한 전체 진리를 가르침으로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데 있어서 예수께서 차지하시는 역할을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도록 돕는 일이 관련되어 있읍니다. 그것이 그렇게도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연구생들이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왕 예수를 믿게 된다면, 그들은 세상 상태와 일상 생활의 문제들로 쉽사리 낙담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이사야 28:16; 베드로 전 2:6-8.
10. (ㄱ) 에베소 3:17-19에 의하면, 그리스도를 기초로 놓는 일에는 그 외에 무엇이 관련되어 있읍니까? (ㄴ)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게 하는 것입니까?
10 그러나, 그리스도를 기초로 놓는 일에는 더 많은 것이 관련되어 있읍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은 목표를 가져야 합니다. 그는 ‘에베소’인들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읍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에베소 3:17-19)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게 하는 데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게 하는 것이 관련되어 있음에 유의하십시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분의 본과 가르침들이 우리의 느낌과 행동에 영향을 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는 것입니다.
11, 12. (ㄱ)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게 하도록 어떻게 그들을 도울 수 있읍니까? (ㄴ) 예수에 관하여 배우는 것에 더하여, 또 무엇이 관련되어 있읍니까?
11 우리가 가르치는 사람들의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는 어떻게 도울 수 있읍니까? 지식을 주입시켜 주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및 가르침에 관한 것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의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연구생들이 “그리스도의 정신”을 얻게 되어 그분을 살아 있고 느낌이 있는 분으로 온전히 알게 되기를 원합니다. (고린도 전 2:16, 신세) 이것은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킬 것입니다.
12 그러나, 또한 ‘바울’이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희랍어, ‘그노나이’, “실질적으로, 경험을 통하여” 아는 것]”라고 말한 점에도 유의하십시오. 우리는 성서에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그분이 다른 사람들을 대하신 방법에 관해 알려 주는 것들을 배움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읍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의 느낌들을 진정으로 인식할 수 있으려면 예수의 사람되심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체험을 통해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13, 14. (ㄱ) 연구생들이 예수의 특성들을 본받도록 어떻게 도울 수 있읍니까? (ㄴ) 예수를 닮으려고 하는 것은 연구생이 여호와와의 좋은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될 것입니까? (ㄷ) 올바른 기초에 더하여, 우리는 또 무엇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까?
13 그러므로 기초를 놓으면서, 예수의 특성들에 주의를 이끄십시오. 그 중 몇 가지만 들어도, 그분의 사랑(요한 15:13, 14), 온정과 느낌(마태 11:28-30), 겸손(요한 13:1-15) 및 연민(마가 6:30-34)등이 있읍니다. 연구생들에게 그들의 생활 가운데서 그러한 특성들을 본받도록 격려하십시오. 이것은 다른 중요한 특성들을 건축할 수 있는 훌륭한 기초가 될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예수에 관한 성서 기록을 토론할 때, 잠시 멈추어 이렇게 질문해 보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타내신 특성은 무엇인가? 그 특성을 생활에서 어떻게 더 온전히 나타낼 수 있는가?’ 예수의 성품을 본받는 것은 성서 연구생이 여호와와의 강력하고 친밀한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임을 설명해 주십시오. 어떻게 그러합니까?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자기 아버지의 성품을 매우 완벽하게 반영하셨으므로 우리가 예수를 본받으려고 하는 것은 사실상 바로 여호와를 본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요한 14:9.
14 올바른 기초를 놓는 것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합니까? ‘바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찌니라.” 그렇습니다. 기초 위에 놓일 건물을 세우는 데 있어서 우리가 사용하는 재료는 어떠합니까?
내화 재료
15, 16. (ㄱ) 고린도 전서 3:12에서 ‘바울’은 무엇을 대조시키고 있는 것임이 분명합니까? (ㄴ) ‘바울’의 비유를 적용시킬 때 무슨 질문이 생깁니까?
15 이제 고린도 전서 3장 12절에 이르게 되는데, 거기에서 ‘바울’은 여러 가지 건축 재료에 대하여 논하면서,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참으로 여러 가지 상반된 재료들입니다! ‘바울’은 우리의 연구생들에게 이들 재료를 각각 조금씩 사용하여 건축할 것을 제안하는 것입니까? 분명히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일부 다른 번역판들은 어떻게 번역하였는지 유의하십시오. “어떤이는 이 기초 위에 집을 짓는데 금이나 은이나 보석을 사용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무나 풀이나 짚을 사용할 것입니다.” (「오늘날의 영어 역본」으로부터) “만일 누가 이 기초 위에 금이나 은이나 귀한 돌로 세우든가 또는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세우든가 하면”(새번역). 그러므로 ‘바울’은 두 가지 종류의 건물을 대조시키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한편에는 이를테면, 금과 은과 보석으로 꾸며진 아름다운 궁전이 있읍니다. 다른 편에는 마른 풀과 진흙이 섞인 벽들을 지탱하고 있는 널판 혹은 기둥으로 된 초가 지붕의 오두막이 있읍니다.
16 이제, ‘바울’의 비유를 적용시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생깁니다. 즉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 우리는 “궁전”을 짓고 있읍니까, 아니면 “오두막”을 짓고 있읍니까? 일부 청소년들과 새로운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는 이유는 모두가 동일한 재료로 건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차이는 무엇입니까? 고대 ‘고린도’ 회중의 상황은 내화 재료로 건축하는 것과 가연성 물질로 건축하는 것 사이의 차이를 예시해 줍니다.
17, 18. (ㄱ) 고대 ‘고린도’ 회중에는 무슨 심각한 문제가 있었으며, ‘바울’은 그 문제를 어떻게 바로 잡았읍니까? (ㄴ) 우리가 “금”으로 건축하고 있는지, 아니면 “짚”으로 건축하고 있는지 판정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는 무엇입니까?
17 ‘바울’은 올바른 기초를 놓는 일에 소임을 다했지만 ‘고린도’의 일부 사람들은 그 기초 위에다가 내구력이 없는 특성들을 상징하는 빈약한 재료들인 ‘나무와 풀과 짚’으로 건축한 것 같습니다. (고린도 전 3:12) 그러므로 ‘바울’은 그곳의 형제들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읍니다.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이는 다름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고린도 전 1:11-13) 그러므로 회중 성원들은 여러 조각으로 갈라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읍니까? 그들이 특정한 사람들에게 과도한 중요성을 부여하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은 설명으로 그들을 바로 잡아주었읍니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라.]”—고린도 전 3:5-7.
18 간단히 말해서 문제는 이것이었읍니다. 그들이 인간을 따르는 일에 과도한 중요성을 부여하였기 때문에 ‘고린도’ 회중의 일부 성원들이 여호와와 강력하고 친밀한 관계를 갖지 못했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금”으로 건축하고 있는지 아니면 “짚”으로 건축하고 있는지, 즉 “궁전”을 건축하고 있는지 아니면 “오두막”을 건축하고 있는지 판정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19. (ㄱ) 가르치는 사람은 어떻게 무심결에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과도한 주의를 이끌게 할 수 있읍니까? (ㄴ) 우리가 ‘금과 은과 보석’으로 건축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까?
19 이것으로부터 한 가지 가치있는 교훈을 배울 수 있읍니다. ‘그렇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이 어떤 인간을 따르도록 가르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도와는 달리 그런 일이 쉽게 일어날 수 있읍니다. 예를 들어, 연구생이 질문을 하게 되면, 반복적으로 ‘아무개 형제(혹은 자매)가 그러는데 ···’ 하고 말한다면, 무심결에 불완전한 남자나 여자에게 과도한 주의를 이끄는 것이 되지 않겠읍니까? 혹은 질문하는 사람에게 ‘글쎄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고 말한다면, 무의식 중에 자신에게 과도한 주의를 이끄는 것이 아니겠읍니까? 기억하십시오. 연구생이 자기를 가르치는 사람을 높이 생각하게 되기란 매우 쉬운 일입니다. (비교 사도 10:25, 26 및 계시 19:10) 우리가 “궁전”을 짓기를 원한다면 인간을 따르는 사람들을 건축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연구생들이 여호와와의 친밀한 관계를 발전시키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러한 목적으로 우리는 ‘금과 은과 보석’으로 건축해야 합니다. 이것들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20. ‘금과 은과 보석’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잠언 3:13-15)
20 시편 19:7-11, 잠언 2:1-6 및 베드로 전서 1:6, 7과 같은 성귀들을 비교해 보면 금과 은과 보석들이 때때로 강한 믿음, 거룩한 지혜, 영적 분별력, 충성심, 여호와와 그분의 법에 대한 사랑에 넘친 인식 등과 같은 특성들을 상징하는 데 비유적으로 사용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한 특성들은 여호와 하나님과 튼튼하고 친밀한 관계를 갖는 데 필수적입니다. 이러한 특성들은 우리가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심어 주고자 노력해야 할 성품 구조를 형성합니다. 당신은 그러한 방법으로 건축합니까?
그들은 “불”을 견뎌낼 것인가?
21. (ㄱ) 우리가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내구력 있는 특성들을 심어 주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불”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21 우리가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그토록 내구력 있는 특성들을 세우도록 돕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계속 이렇게 설명합니다.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고린도 전 3:13) 그러므로 “불”은 우리가 과연 어떤 식으로 건축하고 있는지를 “시험”할 것입니다. 여기서 “불”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난폭한 육체적 박해를 의미합니까? 그렇지 않음이 명백합니다. 왜냐하면 “각각 공력”이 불에게 드러날 것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모두가 난폭한 박해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불”은 우리의 영성을 파멸시킬 수 있는 모든 압력과 유혹을 의미합니다.
22.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할 수 있는 불같은 시험들 중에는 어떤 것들이 있읍니까?
22 일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 “불”이 중립 문제의 형태로 올 수 있읍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정치 활동에 참여하든지 아니면 투옥을 당하는 압력을 받을 수 있읍니다. (요한 15:19) 때때로 그 “불”은 보다 교묘한 것일 수 있읍니다. 아마 그것은 성과 폭력을 특징으로 하는 영화나 TV ‘프로그램’을 보려는 유혹일 수 있읍니다. 그리스도인 청소년들에게는 그 “불”이 성적 자극에 노출되는 것, 마약을 사용하게 하려는 권유 혹은 세상의 저속한 오락에 참여하게 하려는 압력 등의 형태로 올 수 있읍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자연스러운 욕망이 그리스도인 청소년들에게 타협하도록 엄청난 압력을 가할 수 있읍니다.—요한 1서 2:16.
23. (ㄱ) 그러한 시험에 직면하는 일과 관련하여 어떠한 질문들이 생기며, 그 대답은 무엇에 달려 있읍니까? (ㄴ) 다음 기사에서는 무엇을 논할 것입니까?
23 대부분의 참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불같은 시험들을 견뎌내는 데 성공하였읍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렇게 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도 있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 볼 필요가 있읍니다. 우리가 가르친 사람들이 “불”에 직면하게 될 때 그들은 어떻게 응할 것인가? 그들은 내화 재료인 금과 은과 보석으로 꾸며진 그 아름다운 궁전과 같아서 굳게 설 것인가? 아니면 나무와 풀과 짚으로 지은 오두막과 같아서 타버리고 말 것인가? 물론 그것은 주로 연구생 자신에게 달려 있읍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가르치는 사람들에 따라서도, 즉 우리가 어떻게 건축하느냐에 따라서도 많이 좌우됩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남게 됩니다. 우리가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그처럼 내구력 있는 특성들을 세워 줄 수 있는가? 바로 이 점이 다음 기사에서 토론될 것입니다.
설명할 수 있읍니까?
◻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에 어떻게 합동 건축 작업이 관련되어 있읍니까?
◻ 어떻게 그리스도를 “기초”로 놓을 수 있읍니까?
◻ 고대 ‘고린도’ 회중에서 일어난 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읍니까?
◻ “불”이란 무엇이며, 이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내구력 있는 특성들을 세워 주는 것의 중요성을 어떻게 강조합니까?
[15면 삽화]
사람들을 가르칠 때 우리는 내화 재료로 건축하고 있는가, 아니면 타기 쉬운 재료로 건축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