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구출하신 목적에 어긋나게 행동하지 말라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과분한 친절, 신세]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린도 후 6:1.
1. 사도 ‘바울’은 어떻게 여호와의 과분한 친절을 받게 되었으며, 그는 왜 그것을 감사하였읍니까?
사도 ‘바울’이 여호와의 과분한 친절에 대하여 말하였을 때에 그것은 자기의 체험에서 나온 말이었읍니다. ‘바울’은 여호와로부터 과분한 친절을 받았으며, 그것을 그는 대단히 감사하였읍니다. ‘바울’이 여호와의 참된 종들을 박해하러 가는 도중에 여호와의 과분한 친절이 그에게 미쳤읍니다. 그러나 ‘바울’은 좋은 마음 곧 감수성이 있는 마음을 가졌었기 때문에 여호와의 과분한 친절을 받아들였읍니다. (사도 9:1-30) ‘바울’은 ‘갈라디아’ 회중에 편지할 때에 자기의 이전 행로를 다음과 같이 약술하였읍니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느니라].” (갈라디아 1:13, 14) 그러나 그는 여호와의 과분한 친절의 혜택으로 자기 조상들의 비성경적인 전통에서 구출되었읍니다. 그는 자기의 과거 인생 행로를 회개하고 새로운 행로를 출발하였읍니다.
2. 과분한 친절로 말미암아 ‘바울’에게 무슨 특권이 열렸읍니까? 그는 어떻게 응하였읍니까?
2 갈라디아 1:15, 16에 보면, ‘바울’이 여호와 하나님의 과분한 친절을 통하여 그리스도인 봉사에 불리움을 받았음을 알 수 있읍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과분한 친절]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그는 또한 자기가 전도 봉사에 불리움을 받은 것이 과분한 친절로 말미암은 것임을 ‘에베소’ 사람들에게 확인하였읍니다.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과분한 친절]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군이 되었노라.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과분한 친절]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 3:7, 8) ‘바울’은 주어진 봉사에서 열심히 일함으로써 그에 대한 감사를 나타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도 그리스도인 봉사에서 자기의 본을 따르도록 권하였읍니다.—고린도 전 11:1.
변화된 견해가 필요하였던 ‘고린도’
3, 4.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여호와의 과분한 친절에 어긋나게 행동하지 말라고 편지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는지 설명하십시오.
3 ‘바울’에게는 ‘고린도’인들에게 여호와께서 구출하신 일과 여호와의 과분한 친절에 관하여 편지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읍니다. ‘고린도’의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여호와의 과분한 친절의 목적에 어긋나게 행동하였던 것 같습니다. 고대 ‘고린도’ 시는 부패한 도시로서 이름이 나 있었으며, 부도덕한 성숭배를 포함한 거짓 여신 ‘아프로디테’ 숭배로 악명을 떨쳤읍니다. 물론,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부분의 큰 ‘바벨론’으로부터 구출되어 나왔었읍니다. 그러나 회중 내의 어떤 사람들은 다시 부도덕한 상태로 빠져들어갔으며 여호와께서 구출하신 목적에 어긋나게 행동하였읍니다. 그들은 주위의 영향을 받아 그릇된 행동을 시작하였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고린도 전 5:1, 2.
4 ‘고린도’ 회중의 또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따르기 시작하였읍니다. 그리하여 회중 내에 분열 곧 분파가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바울’의 말로 보아 그 사실이 분명합니다.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고린도 전 1:11) 주의 회중을 분열시키는 이러한 그리스도인들도 여호와께서 구출하신 목적과 여호와의 과분한 친절의 목적에 어긋나게 행동하는 것이었읍니다.
5. ‘고린도’ 회중은 사도의 충고를 어떻게 받아들였읍니까?
5 ‘바울’이 ‘고린도’ 회중에 보낸 첫째 편지는 확실히 회중을 깨끗이 하는 데 도움이 되었읍니다. 부도덕한 사람들은 제명되었읍니다. 회중 밖으로 추방당하였읍니다. (고린도 전 5:5, 11) 훌륭한 충고가 주어졌으며, 모두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라 연합과 사랑 가운데 함께 일하라는 권고를 받았읍니다. (고린도 전 1:10) 그 회중은 ‘바울’의 충고를 깊이 받아들였던 것같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회중에 보낸 그의 둘째 편지에서 훌륭하게 칭찬하고 격려하였읍니다. ‘바울’은 고린도 후서 13:11에서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케 되며[재조정을 받으며, 신세]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 하며 평안할찌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현시대의 구출
6.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여호와의 과분한 친절의 목적에 어긋나게 행동하지 말라는 ‘바울’의 충고를 깊이 생각해야 할 이유를 설명하십시오.
6 하나님의 과분한 친절을 받아들이되 그의 목적에 어긋나게 행동하지 말라는 ‘바울’의 충고를 오늘날 우리도 깊이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이 주위로부터 나쁜 영향을 받고 있었던 바와 같이, 우리도 대부분 나쁜 환경 가운데서 생활하고 있읍니다. 우리 주위에는, 부도덕, 도둑질, 거짓말, 속임수 등등 여호와 하나님 앞에 가증한 일을 자행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참 그리스도인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참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러한 일들을 버렸읍니다. 진리가 우리를 악한 것들로부터 자유케 하였읍니다. “여러분 중에도 이런 사람이 더러 있었읍니다. 그러나 ··· 씻음을 받[았읍니다]” 하고 ‘바울’이 말한 바와 같습니다. (고린도 전 6:11, 새번역)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인 우리는 큰 ‘바벨론’으로부터 그리고 그의 거짓 교리와 전통으로부터, 이 낡은 사물의 제도의 악행으로부터 구출을 받았읍니다. 그러한 구출과 거기에 수반되는 자유는 참으로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과분한 친절입니다.
7.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그리스도인 봉사를 ‘바리새’인으로서의 명성과 재산과 비교해서 어떻게 평가하였읍니까?
7 ‘바울’이 여호와의 과분한 친절을 통하여 그 시대의 물질주의로부터 구출된 바와 같이 우리도 이 낡은 사물의 제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물질주의적인 경향으로부터 구출을 받았읍니다. 전에 ‘바리새’인이었던 ‘바울’ 자신은 올바른 인식을 나타냈던 훌륭한 본이 됩니다. 그는 ‘바리새’인으로서의 명성과 재산을 버렸읍니다. ‘바울’은 자기가 이 면에 있어서의 구출과 여호와의 과분한 친절을 소홀히 여기지 않았음을 나타냈읍니다. 그는 명성과 재물과 세상적인 물건들을, 여호와의 과분한 친절로 말미암은 축복들과 비교할 때에 단순한 배설물 곧 오물로 여겼읍니다. 그는 이렇게 썼읍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함이라].” (빌립보 3:7, 8) 그렇습니다. ‘바울’은 그의 그리스도인 자유를 잘 활용하였읍니다.
목적에 어긋나게 행동하지 말라
8. (ㄱ) 여기서 무엇을 자문해 보는 것이 적절합니까? (ㄴ) 어떤 사람들은 아마 어떻게 반문할 것입니까?
8 ‘바울’의 충고와 그가 세운 훌륭한 본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자문해 볼 만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가지고 무슨 일을 하는가? 우리는 ‘바울’의 훌륭한 본을 따르는가, 아니면, 여호와께서 구출하신 목적에 어긋나게 행동하는가? 아마 어떤 사람은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께서 구출하신 목적에 어긋나게 행동할 수 있겠읍니까?” 하고 반문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주장할 것입니다. “나는 깨끗한 생활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나는 아무런 부도덕에도 관련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대부분의 집회에 참석하고 하나님의 왕국을 정기적으로 선포합니다. 나는 매월 야외 봉사에 나갑니다.”
9, 10. (ㄱ) 얼마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잘못을 저지르는 수가 있읍니까? 이것은 그들의 영적 상태에 영향을 줍니까? (ㄴ) 두 주인을 섬기려고 할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예를 들어 설명하십시오.
9 그러나 다음과 같은 면을 생각해봅시다. 설사 자신이 여호와의 증인들의 회중과 연합해 있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이 낡은 사물의 제도에 대한 유대가 얼마나 강합니까? 당신은 거기에 얼마나 밀접히 연결되어 있읍니까? 어떤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기려고 노력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 하의 새로운 제도를 좋아하며 그것을 위하여 기꺼이 얼마의 일을 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실제 ‘사단’ 마귀 하의 낡은 사물의 제도를 위하여는 실제로 훨씬 더 열심히 합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예수께서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읍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읍니다. (마태 6:24) 만일 우리가 낡은 사물의 제도와 강한 유대를 견지하고 있다면, 새로운 사물의 제도와는 유대가 대단히 약하다는 의미입니다. 만일 낡은 사물의 제도에 대한 유대가 강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약하고, 봉사의 특권을 위하여 노력하지 않으며, 오늘날 여호와의 조직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발전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됩니다.
10 자기 직장에서 훌륭한 일군으로 인정받고 있는 어느 그리스도인의 예를 생각해봅시다. 고용주는 그를 좋아하고 그의 근면한 작업을 높이 인정해 줍니다. 고용주는 그가 정직하고 믿음성 있음을 알고 있으며, 그러기 때문에 보수도 많이 줍니다. 그 형제는 자기가 하는 일을 좋아하며, 신뢰받고 있음을 좋게 여기며, 디모데 전서 3:7에 있는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어야 한다는 ‘바울’의 말을 기억하면서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좋은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됩니까? 그 형제는 진급하라는 제안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책임이 더 많아집니다. 이제 그 일은 시간 외 근무를 요구합니다. 그렇게 되면 회중 집회 참석이나 야외 봉사 시간이 줄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 연구와 가족 연구는 어떻습니까? 고용주가 제시하는 더 많은 책임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을 완전히 희생해버리는 예가 많습니다.
11. 재물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위험이 닥칠 수 있읍니까?
11 당신에게도 이와 비슷한 일이 발생하였읍니까? 직장 때문에 당신이 여호와를 마땅히 섬겨야 하는 정도 만큼 섬기지 못합니까? 여호와의 칭찬보다 고용주의 칭찬을 더 소중히 여깁니까? 내일이라도 큰 ‘바벨론’이 멸망되고 이어서 나머지 이 사물의 제도가 멸망된다면 당신은 어디에 서 있게 되겠읍니까? 당신은 그러한 멸망을 피하겠읍니까? 그 멸망에 휩쓸려 들어가겠읍니까? 당신은 여호와의 봉사에 관련하여 양심이 떳떳합니까?
12. (ㄱ) 물질적 소유물을 가지는 것이 반드시 나쁩니까? 그렇게 대답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데마’는 무슨 잘못을 저질렀읍니까?
12 ‘사단’은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사랑을 이용하여 음흉하게 작용합니다. 훌륭한 자동차, 좋은 ‘텔레비전’, 훌륭한 가옥, 가구 등등을 소유하는 것은, 만일 우리가 그러한 것을 갖고도 우리 생활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첫째로 둘 수 있다면, 그것 자체가 나쁠 것은 조금도 없읍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사람들이 자기 생활에서 물질적인 것들을 첫째로 두고 여호와를 둘째로 둔다는 것입니다. ‘바울’ 시대에 어떤 사람들에게 이러한 일이 있었읍니다. ‘데마’는 ‘바울’과 함께 그리스도인 봉사를 하였던 동료였읍니다. 그는 ‘골로새’인들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를 통하여 ‘골로새’에 있던 그리스도인 회중에게 ‘누가’와 함께 인사를 보내기도 하였읍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 ‘데마’는 ‘바울’과 그리고 그리스도인 봉사를 떠나버렸읍니다. 왜 그랬읍니까?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하였읍니다. (디모데 후 4:10) 그러므로 ‘바울’ 시대에도 물질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쾌락을 그리스도인 봉사보다 더 사랑하여 여호와의 과분한 친절의 목적에 완전히 어긋난 행동을 한 사람들이 있었읍니다.
13. (ㄱ) 그리스도교국이 문제들을 당하고 있는 한 가지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우리는 이 사실로부터 교훈을 받을 수 있읍니까?
13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사랑이 여호와께 대한 사랑보다 앞선다면, 우리는 분명히 여호와께서 이 낡은 제도로부터 구출하신 목적에 어긋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 안가서 오늘날 그리스도교국 가운데서 볼 수 있는 배도한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될 수 있읍니다. 그들이 그리스도교 사상을 조금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재물과 세상적 쾌락에 대한 사랑 때문에 밀려나버리고 맙니다. 그리스도교국의 교회들이 직면하고 있는 제반 문제에 대하여 유명한 한 잡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읍니다. “종교 조직들이 직면하고 있는 것들은 적대감이나 분열이 아니라, ··· 물질적 귀중품들과 고민에 점점 빠져들어가는 세상에서의 막심한 무관심이다.” (「유. 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지 1970년 3월 23일호 44면) 그러므로 이들 배도한 그리스도인들은 물질적인 것으로 하나님을 대신해 버렸으며, 그러한 것들을 자기네 신으로 만들었고 재물을 숭배하고 있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여호와 하나님과 그분께 대한 사랑이 식어지도록 하고 낡은 사물의 제도로부터 재물에 대한 사랑의 영향을 받는다면 금방 그렇게 될 것입니다.
고대의 본을 보고 교훈을 받다
14. (ㄱ) 기원전 537년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바벨론’에서 구출하신 목적은 무엇이었읍니까? (ㄴ) 그 당시 충실한 ‘유대’인들은 무엇을 해야 하였읍니까?
14 육적 ‘이스라엘’이 고대 ‘바벨론’으로부터 구출된 사실을 고려해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 구출은 목적이 있었읍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참 숭배가 다시 설립되고 자기의 성전이 재건될 것을 원하셨읍니다. 사실 ‘고레스’의 조서 곧 ‘에스라’가 기록해 놓은 그 조서는 특별히 ‘예루살렘’과 그의 성전을 재건하는 문제를 언급하였읍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 (에스라 1:3) 그러므로 충실한 ‘유대’인들은 옛 ‘바벨론’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여호와의 전과 그 도시를 재건하고 여호와의 율법을 백성들에게 읽어 주어야 하였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명령한 바에 따라 다시 여호와께 희생을 바쳐야 하였읍니다. 그들은 참 숭배의 모든 요구 조건들을 배우고 거기에 순응해야 하였읍니다.
15, 16. (ㄱ) ‘유대’인 남은 자들이 ‘예루살렘’과 ‘유다’로 돌아가는 일이 용이한 일이었었는지 설명하십시오. (ㄴ) 어떠한 것들이 많은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에 돌아가지 못하도록 막았을 것입니까?
15 이 일은 충실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용이한 과업이었읍니까? 결코 그렇지 않았읍니다. 이 모든 일에는 노력과 힘든 노동이 필요하였읍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는 거의 사막과 같은 길을 통해 장거리 여행을 해야 하였으며, ‘바벨론’에 있는 훌륭한 집을, 또는 더러 좋은 직장까지도 떠나야 하였읍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그들은 파괴된 도시에 돌아가서 자기들이 살 집을 지어야 하였읍니다. 그러한 집은 분명히 현대화된 ‘바벨론’ 도시에서 자기들이 즐겼던 집들만큼 안락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음식물은 귀하고 종류도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생활은 그리 평탄치 않았을 것입니다. 참 숭배를 첫째로 두는 ‘유대’인들은 고난을 겪었을 것입니다.
16 반면에 어떤 ‘유대’인들은 옛 ‘바벨론’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여호와께서 구출하신 진정한 목적을 인식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아마 훌륭한 직업과 웅대한 도시 ‘바벨론’에 있는 자기들의 안락한 집을 좋아하였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을 지나치게 좋아하여 그러한 것들을 버리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옛 ‘바벨론’에서의 자기 생활에 너무 만족하였기 때문에 이사할 생각을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 외에도 어떤 사람들은 사업 관계로 ‘바벨론’ 사람들과 훌륭한 교우 관계를 맺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는 그들은 오래 걸려 기반을 닦아놓은 좋은 사업을 가지고 있어서 그러한 것을 버리고 ‘예루살렘’에 가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 숭배가 ‘예루살렘’에 회복되는 것을 보는 특권보다 물질적인 것들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전망이 실로 암담하였을 것입니다.
17. (ㄱ) ‘유다’와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충실한 남은 자들을 누가 도왔읍니까? (ㄴ) 이들 충실한 ‘유대’인들은 무슨 축복과 특권을 즐겼읍니까?
17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벨론’으로부터 구출하신 사실을 올바로 인식한 사람들은 여호와의 도움을 받았읍니다. ‘에스라’는 이렇게 알려 줍니다.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무릇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을 건축코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니[라].” (에스라 1:5) 그렇습니다. 여호와께서 ‘바벨론’에서 구출하신 사실과 그분의 과분한 친절을 올바로 인식한 충실한 사람들은 여호와의 도움을 받았읍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도움을 받아 ‘예루살렘’에 참 숭배를 회복할 수 있었으며, 이 일은 그들에게 놀라운 축복이었읍니다. 그들은 참 숭배가 회복되는 것을 보고 실로 즐거워하였읍니다.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전 지대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족장들 중에 여러 노인은 첫 성전을 보았던고로 이제 이 전 지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며 여러 사람은 기뻐하여 즐거이 부르니[라].” (에스라 3:11, 12) 그러나 ‘바벨론’에 있는 자기 집들과 좋은 직장을 참 숭배의 회복보다 더 사랑하였던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참 숭배를 회복하는 이 훌륭한 특권을 상실하였읍니다.
18. 오늘날은 무엇이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문제가 더욱 심각합니까? 그리고 어떠한 질문이 생깁니까?
18 그러나 오늘날은 문제가 그 보다 더 심각합니다. 봉사의 특권을 상실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관련되어 있읍니다. 오늘날은 생명이 관련되어 있읍니다. 큰 ‘바벨론’이 멸망되면, 거기서 나온다는 일이 너무 늦을 것입니다. 큰 ‘바벨론’과 나머지 낡은 제도를 의지하는 자들은 그것과 함께 무너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당신의 입장은 어떠합니까? 당신은 여호와를 섬기면서도 세속적인 일이나 재물을 참 숭배 앞에 둘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19. 고린도 후서 13:5에 있는 ‘바울’의 교훈을 어떻게 따를 수 있는지 설명하십시오. 이 일을 통하여 무엇이 밝혀집니까?
19 지금이야 말로 고린도 후서 13:5에 있는 ‘바울’의 교훈, 즉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는 말을 따를 때입니다. 잠간 앉아서 당신의 활동 계획을 분석해 보십시오. 당신의 시간에 대하여 어떠한 사실이 밝혀집니까? 대부분의 시간이 세속적인 일을 위하여 그리고 물질을 얻기 위하여 사용됩니까? 만일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라고 요구하신다면, 당신은 당신의 재물을 당장 버리기가 어렵겠읍니까? 만일 당신이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당신은 대단히 위험한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생명이 지금 위험에 처해 있읍니다!
20. (ㄱ) 이 점에 있어서 예수의 무슨 충고가 대단히 적절합니까? (ㄴ)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적절합니까?
20 지금은 분명히 여호와의 조직에 대한 우리의 좋은 입장을 상실할 때가 아닙니다. 언제 “큰 환난”이 돌발하여 이 악한 제도를 멸할 것인지는 아무도 정확하게 모릅니다. 우리는 대비하고 있지 않으면 안됩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누가 21:34-36) 그러므로 잠간 멈추어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여, 믿음이 강한지, 영적으로 깨어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만일 필요하다면, 우리는 자신의 사고방식을 고쳐서 여호와의 구출과 그분의 과분한 친절에 대해 인식을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368면 삽화]
여호와의 성전을 재건하라는 ‘고레스’ 왕의 칙령에 호응하였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구출의 목적을 인식하였다. 그들은 참 숭배를 재물보다 앞세웠다. 당신의 입장은 어떠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