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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표준은 우리를 돕는다파수대—1983 |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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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표준을 인식하는 청소년들은 성서에 기초한 충고와 그리스도인 부모들이 베풀어 줄 수 있는 도움으로부터 기꺼이 유익을 얻습니다.—골로새 3:18-21.
여호와의 표준을 순종적으로 받아들이라
20-22. 우리는 하나님의 표준과 관련하여 무엇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읍니까?
20 우리가 논할 수 있는, 하나님의 표준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면들은 그 외에도 많습니다. 당신은 그러한 표준이 당신 개인에게 어떻게 도움이 되었었는지에 대하여 얼마의 특별한 점들이 생각날지 모릅니다. 그것은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그런 것들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대화를 나눌 때에 포함시키기에 유익하고 격려적인 것들입니다.
21 하지만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표준으로부터 이탈되기가 매우 쉽다는 사실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내’ 산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일을 상기해 보십시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리라.]” 그들은 다음과 같은 말로 열렬히 호응하였읍니다.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하지만 그 후에 그들은 정반대의 길을 갔읍니다!—출애굽 19:5, 8; 민수 14:1-4, 10.
22 그러므로 여호와의 표준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고착하도록 합시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우리 생활의 지침이 되도록 마련해 주신, 비할 바 없는 표준에 밀접히 고착하는 것이야말로 지혜와 행복으로 인도하는 행로이기 때문입니다.—시 19: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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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하고 천한 것으로 돌아’가지 말라파수대—1983 |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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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하고 천한 것으로 돌아’가지 말라
“이제 너희가 하나님을 알[게] ···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 ··· 려 하느냐?”—갈라디아 4:9.
1, 2. (ㄱ) 벼락이 어느 실명한 사람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 주었읍니까? (ㄴ) 우리의 생활에서 무슨 더욱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읍니까? (사도 26:18)
1980년 6월에 신문들은 당시 9년 전에 자동차 사고로 실명했던 62세의 ‘에드윈 로빈슨’에 관한 놀라운 사건을 보도한 일이 있었읍니다. 신문들은 폭풍 중에 그가 피신처를 구하기 위해 나무 밑으로 들어갔다고 설명하였읍니다. 벼락이 그 나무를 치는 순간 그는 의식을 잃고 말았읍니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읍니다. 그토록 여러 해 동안 실명해 있던 그에게 그것은 얼마나 감격할 만한 일이었겠는가 상상해 보십시오! 그가 어두움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았을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2 당신이 여호와의 참된 증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면, 당신은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택하신 족속”인 그리스도인들이 ‘어두운데서 불려 나와 그분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기술하였읍니다. (베드로 전 1:1; 2:9) 여호와의 증인이 되기 위해 당신은 어두움과 관련된 불결하고 승인받지 못할 습관들을 버렸을 것입니다. (로마 13:12, 13; 욥 24:14-16) 왜 그렇게 하였읍니까? 당신은 진리의 빛 가운데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승인을 받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3. ‘여호와의 증인’이 됨으로써 당신의 생활의 목표에 무슨 변화가 오게 되었읍니까? (에베소 2:12)
3 참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당신의 생활에는 의미있는 목적이 있었읍니까? (베드로 전 4:15, 16) 만일 누군가가 당신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생활비를 버는 일, 가정을 갖는 일, 특정한 쾌락을 추구하는 일 혹은 노년의 “황혼기”에 대비하는 일 등이라고 대답할 것입니까? 확실히, 이러한 것들은 그릇된 일들이라고 할 수 없읍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활은 태어나 자라고 먹고 잠자고 짝을 찾고 마침내 죽어 없어지는 다람쥐나 참새 혹은 그밖의 동물의 삶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읍니까? (전도 3:18-20; 야고보 4:14; 유다 10) 그러나 참 그리스도인이 되고 난 후에 당신의 생활에는 의미가 있게 되었읍니다. 당신의 목표는 창조주를 섬기는 일에 집중된 것입니다.—전도 12:13.
4. 성서 지식은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읍니까? (시 36:9; 잠언 6:23)
4 우리가 빛 가운데 있는 것과 한때 어두움 가운데 있었던 것의 차이는 우리의 지식과 이해의 면에서 특히 명백하여 집니다. 이전에 우리는 악이 존재하는 이유와 우리 주변의 사태가 점차 악화되는 이유, 죽은 자의 상태는 어떠하며 가까운 장래에 어떠한 일이 발생할 것인지 알지 못하였읍니다. 이제 우리는 그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성서에 근거한 이해를 갖게 되었읍니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말은 과연 참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마음 속을 비추셔서 ···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을 우리에게 주셨[읍니다!]”—고린도 후 4:6, 새번역.
모두가 빛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5. 모두가 빛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님을 알리는 어떠한 증거가 있읍니까?
5 과거에 여호와를 참으로 숭배해 온 자들 모두가 그 신분을 유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 강력한 영물은 떠나가 ‘사단’이 되었읍니다. ‘아담’과 ‘하와’도 빛을 떠났읍니다. 완전한 피조물들의 그와 같은 행동을 고려할 때 우리와 같은 일부 불완전한 인간들이 다시 돌아간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벗어났으나 약속의 땅에 이르기도 전에 이렇게 몹시 불평하기 시작했읍니다.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일이 생각나도다!’ (민수 11:5) 빛과 자유를 누리면서도 그들은 애굽의 어둠과 마늘을 열망했던 것입니다.
6. 우리가 빛으로부터 떠난 자들에 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6 그리스도인들 역시 빛으로부터 떠날 위험이 있읍니다. ‘바울’은 회중에서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제자들을 끌어 내려고 할 것임을 경고하였읍니다. (사도 20:29, 30) 이런 일은 심지어 그가 지상에 있던 동안에도 발생하였읍니다. (빌립보 3:18; 디모데 후 2:16-18) 보다 명확하게, 당신은 우리 시대에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빛에서 떠난 얼마의 사람들을 알고 있읍니까? 그러한 일은 우리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읍니까?
7. ‘바울’은 이 점에 관하여 ‘갈라디아’ 회중에게 무엇이라 충고하였읍니까?
7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자진적으로 빛보다도 어두움을 택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 형제 혹은 자매(우리 자신)로 떠나도록 유혹할 수 있읍니까? ‘바울’이 갈라디아서 4:9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한 내용으로부터 우리는 그 점을 얼마간 인식할 수 있읍니다.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8. 왜 그와 같은 충고가 필요하게 되었으며, 그 충고가 어떻게 율법에 적용되었읍니까?
8 분명히 일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모세’의 율법 또는 적어도 그 일부를 지키는 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읍니다. 하지만 ‘바울’은 참 숭배자들이 율법에서 자유케 되었다고 기술하였읍니다. (갈라디아 5:1-6) 율법은 의를 산출할 수 없기 때문에 어느 의미에서 그것은 약한 것이었으며 “더 좋은 소망” 혹은 마련으로 대치되지 않으면 안 되었읍니다. (히브리 7:18, 19)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려고 되돌아간 사람들은 ‘약한 것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것에게 종노릇하려’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읍니다.
9, 10. “천한 초등 학문”에 대한 경고는 (ㄱ) 희랍인들의 가르침과 (ㄴ) ‘모세’ 율법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읍니까?
9 또한 “천한 초등 학문”으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을 경고하는 것도 적절하였읍니다. 여기에 관련된 희랍어 표현은 연속되는 알파벳 문자들이라는 사상을 지니고 있어 어떤 문제에 대한 초등 지식을 시사하였읍니다. 확실히 당시에 성행했던 이교의 가르침들은 “천한 초등 학문”이었읍니다. 비록 희랍인들은 자기들의 철학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인간의 개념과 그릇된 사상 및 신화에 근거를 두고 있었읍니다. 그러나 심지어 ‘모세’의 율법으로 되돌아가는 것도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는 것’이 될 것이었읍니다. 어떻게 그러합니까?
10 비록 율법이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한 것이기는 하였지만 그것의 많은 부분은 성막 및 그와 관련된 “육체의 예법”과 같은 인간 영역에 속한 사물을 다루고 있었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숭배는 이들 육적 “모형”들로 전영된 영적 사물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읍니다. (히브리 9:6-10, 23)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이들 초등 학문과 같은 기본적인 것들로 되돌아가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읍니까? 만일 당신이 대수학이나 미적분학의 대가가 될 목적으로 수학을 공부하였다면 당신은 손가락과 발가락으로 수를 헤아리는 상태로 되돌아가고자 하겠읍니까?—비교 베드로 후 2:20-22.
오늘날의 약하고 비천한 것들
11. 갈라디아서 4:9은 오늘날 어떠한 위험성에 적용될 수 있읍니까?
11 아마 우리 가운데 희랍 철학이나 율법과 같은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다시 돌아갈 위험에 처해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충고가 성서에 나온 것은 역시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입니다. 예를 들어, 요한 1서 2:16(새번역)에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랑”이라고 부른 것으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12.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요한 1서 2:16에 내포된 위험한 상태에 빠져들 수 있는지 예를 들어 설명하십시오.
12 일부 사람들은 “살림살이에 대한 자랑”이란 유명 제품 회사의 상표가 붙은 의복을 입는 일이나 동시에 네, 다섯 개의 장신구를 걸치는 등의 지나친 보석 치장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야고보 2:2, 3) 그도 그럴 것이, 성서는 “금으로 장식”하는 일과 같은 몸치장에 주력하지 말도록 교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전 3:3, 새번역) 그러나 “살림살이에 대한 자랑”은 다른 방법으로도 행해질 수 있읍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물질적인 것들을 위해 살아가는, 소망 없는 사람들의 생활 방식을 부러워하게 될 수 있읍니다. 어떤 지방에서는 사람들이 ‘컬러 텔레비젼’ 또는 소형 승용차와 같은 지방적으로 고급품에 해당하는 물건을 구하려고 애쓰며 그것을 구하면 자랑하는 일이 있읍니다. 또 다른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최신형 ‘비디오테이프’ 녹화기 또는 호화 승용차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거나 깊은 인상을 주려고 합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좇”은 그리스도인이 그러한 것들을 자랑하는 일에 관심을 발전시킬 것입니까?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 볼 수 있읍니다. 물질적 소유물이, 내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아’ 그것을 나의 생활에 적용했을 때보다도 나에게서 더 많은 시간과 생각을 빼앗아가지는 않는가?—마태 19:16-27; 13:20-22.
13. (ㄱ) ‘바울’의 교훈을 어떻게 주택 문제에도 적용시킬 수 있읍니까? (ㄴ) 그리스도인이 더 큰 주택으로 이사하는 문제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점은 무엇입니까? (누가 12:16-21 읽을 것)
13 혹은 어떤 그리스도인은 주택과 관련하여 천한 초등 학문과 같은 것들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읍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자기 집을 마련하는 데 많은 돈이 듭니다. 따라서 많은 세상 사람들은 재정적으로 심각한 부담이 된다 할지라도 집을 갖는 것이 남에게 주는 인상 때문에 집을 삽니다. 또한 물질주의적인 사람들은 수용할 가족 성원이 불어나지 않는데도 평범한 주택에서 보다 큰 주택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훨씬 더 크고 웅장한 저택으로 이사할지 모릅니다. (누가 17:28 참조) 그러므로, 어떤 그리스도인이 주택을 매입하거나 보다 큰 주택으로 이사할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는 그릇된 동기로 말미암아 ‘초등 학문과 같은 것들로 다시 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의 동기 및 자기의 영성에 끼칠 수 있는 영향에 관해 숙고해 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확실히 우리의 “살림살이”로 다른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줄 만큼 부하게 되려는 욕망이 생기게 하는 여하한 유혹도 저항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요한 1서 2:16, 새번역) 그러한 일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일 없이, 우리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봉사를 우리의 생활에서 계속 첫째로 두도록 합시다. 어떠한 면으로든 환경상 ‘파이오니아’를 할 수 있는 많은 장성한 그리스도인들이 직업에 바치는 시간을 줄임으로 분명히 약하거나 천한 일이 아닌 전 시간 ‘파이오니아’ 봉사를 위해 시간을 할애하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흐뭇한 일입니다!—마태 6:31-34; 7:1-3; 9:36-38.
14. 어떤 사람들은 탁월하게 되는 일과 관련하여 어떻게 ‘다시 돌아갈’ 수 있읍니까?
14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돌아갈’ 수 있는 또 다른 것으로 현 제도에서 탁월하게 되려는 것이 있읍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좋게 생각하기를 바라는 것은 틀림없이 당연한 일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 장로들은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어야 합니다. (디모데 전 3:7)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로마 12:3) 세상이 강조하는 중요한 인물이 되는 일은 얼마의 사람들로 그리스도인 겸손 및 하나님과의 좋은 신분을 계속 추구하는 일을 어렵게 만들 수 있읍니다.
15. 이것이 청소년들이나 부모들에게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어떠한 때입니까?
15 청소년들 역시 흔히 이러한 일을 직면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교사들과 학생들은 ‘스포오츠’, 학생 자치회 혹은 ‘클럽’ 활동에서 탁월하게 되도록 그들을 충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또한 평판이 좋은 직업을 얻기 위해 대학에 진학하도록 압력을 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일부 부모들은 자녀들의 성공을 통하여 명망을 얻으려는 욕심 때문에 그러한 압력을 더욱 가한 것이 사실이었읍니다. 당신은 부모들이 ‘나는 내 아들이 평생 평범한 노동자로 사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을 들어본 일이 있을 것입니다.—비교 마가 6:3.
16. 탁월하게 되는 것이 그리스도인 남자들에게 위험한 것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설명하십시오.
16 직업과 관련하여 탁월해지려고 노력하도록 유혹을 받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내적 동기를 알고 보면, 어떤 사람은 자기가 주로 관련된 명망 때문에 높은 직위에 앉고 싶어하는 것임을 알게 될지 모릅니다. 사실, 재정적으로 안정된 입장에 있어 직업에 바치는 시간을 줄이고 (혹은 퇴직하고) 전 시간 봉사를 할 수도 있을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회사에서 탁월한 혹은 영향력있는 직책에 계속 눌러 있고 싶은 유혹을 받은 것일 수 있지 않겠읍니까? ‘바울’은 참으로 훌륭한 본을 세워놓았읍니다! 그는 재정적인 안정과 더불어 ‘유대’ 제도 내에서 영향력있는 지위에 있었읍니다.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하여 그 모든 것을 버렸읍니다. 그것이야말로 지속적인 가치가 있는 승인을 얻는 길임을 인식한 ‘바울’은 약하고 초등한 것들로 결코 다시 돌아가지 않았읍니다.—빌립보 3:4-11.
17. 오락과 관련하여 어떻게 ‘다시 돌아갈’ 위험성이 있읍니까?
17 오늘날의 많은 오락이 “약하고 천한” 것임을 부인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선택적이 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설사 경건한 원칙에 명백히 저촉되지 않는 오락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소요되는 시간과 재원 때문에 주의가 요구됩니다. 전자 오락이나 그 외의 것을 막론하고 많은 오락은 시간과 금전 면에서 엄청난 낭비를 초래할 수 있읍니다. 개인적으로 혹은 가족적으로 앉아서 일주일 혹은 한 달 평균, 오락에 바치는 시간과 금전이 얼마나 되는지 사실 그대로 계산해 보십시오. 이렇게 하는 데 있어, ‘텔레비젼’에 바치는 시간도 포함시켜야 합니다. ‘프로그램’ 작성자가 더 많은 연속물을—심지어는 기록물이나 역사물 및 운동 경기 실황일지라도—방영함으로 시청자가 거듭 되돌아가게 할 때 그것은 더욱 문제가 됩니다. 확실히 그리스도인들은 약하고 천한 것들로 되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의 제한된 시간과 자원을 사용하는 방법에 있어 자제력을 행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에베소 2:2, 3.
18.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무슨 칭찬받을 만한 행로를 걸어왔읍니까?
18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 대다수가 그런 것들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참 숭배에 고착하고 있는 여호와의 헌신한 증인들이 수천, 수십만 아니 수백만명 있으며, 그 대부분은 여러 해 동안을 그렇게 해왔읍니다. 당신은 아마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 즉 ‘바울’이 언급한 다음과 같은 말로 묘사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 주를 본받은 자가 되[어] ···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데살로니가 전 1:2, 6, 7) 우리 각자도 그와 같이 되어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과 같은 것들로 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한 우리는 되돌아가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읍니다.
영적인 부를 추구하라
19, 20. 순수한 그리스도교는 우리에게 무슨 강력하고 값진 것을 가져다 주었읍니까?
19 순수한 그리스도교는 우리에게 강력하고 값진 많은 것들을 제공해 줍니다. 풍성한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성경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심지어 이 세상 학자들도 성서가 최고 수준의 문헌임을 증언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서가 그 이상의 가치가 있음을 알고 있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또한 믿는 자들 속에서 역사’합니다. (데살로니가 전 2:13)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 속에 인생을 변화시키고 확실한 희망을 심어주며 장차 일어날 일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능력이 있음을 알고 있읍니다. 성서를 읽음으로써 우리는 창조주께서 주시는 소식을 들을 수 있고 그분의 아들이 말씀하신 것과 행하신 것을 배워 알 수 있읍니다.—요한 21:24, 25.
20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의 도움으로, 성서로부터 여호와에 관하여 알게 되어 다음과 같은 말에 동의할 수 있게 되었읍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로마 11:33) 지식 이상으로, 우리는 “건전한 말씀의 본”을 가지게 되었읍니다. (디모데 후 1:13, 신세) 많은 사람들은 성서를 여러 해 동안 읽어 왔으면서도 여전히 그 의미를 모르고 있읍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본적으로 성서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고 있읍니다. 우리는 심지어 신학자들을 능가하는 이해력과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읍니다.—사도 4:13.
21, 22. 우리가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받게 된 또 다른 값진 것들은 무엇입니까?
21 우리는 또한 가장 훌륭한 교제를 즐기고 있읍니다. 물론, 우리의 형제 자매들도 불완전하기 때문에 이따금 언짢은 일을 야기시킬 수 있읍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하나님을 사랑하며 성서 원칙을 적용하려고 노력하고 우리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 특히 믿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선한 일을 하려고’ 힘쓰는 사람들 가운데 있다는 것은 진정한 축복이 아닐 수 없읍니다. (갈라디아 6:10) 최근 ‘뉴우요오크’ 시의 ‘‘시내’ 산 병원’의 한 소아과 의사는 자기의 체험을 이야기한 적이 있읍니다. 그는 자기를 방문한 어느 ‘여호와의 증인’ 전도인에게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이든지 그 일을 계속하십시오. 당신들은 정말 훌륭한 사람들을 만들어냅니다. 당신들과 접촉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신들이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과 참으로 온화하고 상냥한 사람들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디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이든지 그 일을 계속하십시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종류의 교제를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22 우리가 즐거움으로 누릴 수 있는 또 하나의 값지고 강력한 것은 하늘에서의 불멸성이든 혹은 지상 낙원에서의 영원한 생명이든 성서에 기초한 우리의 희망입니다. 건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 이러한 것을 포기할 사람이 그 누구이겠읍니까? 끝으로, 당신이 현재 여호와로부터 임명받은 일을 과소평가하지 않도록 하고 이 일을 위해 그분께서 당신을 강력히 구비시켜 주셨다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하십시오. (고린도 후 10:4; 빌립보 4:13) 제자를 삼는 일은 분명히 노력을 요하지만 그 일은 또한 깊은 만족과 즐거움을 가져다 줍니다. 왜냐하면 그 일은 다른 사람들로 생명의 길을 걷도록 돕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활동은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흡족하게 해줄 수 있읍니다.
23. 갈라디아서 4:9과 관련하여 우리는 어떻게 하기로 굳게 결심해야 합니까?
23 그러므로 순수한 그리스도교가 우리에게 강력하고 값진 많은 것들을 베풀어 준다는 것은 더 할 나위없이 명백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계속 묵상하고 인식함으로써 ‘일반적으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과 같은 것들로 다시 돌아가거나 또 다시 그것들에게 종노릇하는’ 일이 없도록 굳게 결심하십시다.
기억하는가?
◻ ‘갈라디아’인들은 어떻게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과 같은 것들로 다시 돌아갈’ 위험성이 있었는가?
◻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과 관련하여 어떻게 ‘다시 돌아’가게 될 수 있는가?
물질적 소유물
주택
탁월함
오락
◻ 그리스도교는 어떻게 당신에게 강력하고 값진 것들을 베풀어 주었는가?
[19면 삽화]
많은 부부들은 ‘자기들의 살림 살이에 대해 자랑하는 일’을 경계함으로써 그리스도인 활동을 증가시키도록 도움을 받았다
[21면 삽화]
당신은 개인적으로 오락에 시간과 금전을 얼마나 바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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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로부터의 질문파수대—1983 |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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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로부터의 질문
◼ 피에 관한 성서의 금지령에는 사람이 죽인 것의 피만 적용되고, 피가 빠지지 않은 스스로 죽은 동물의 고기나 또는 산 동물이나 산 사람의 피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외견상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몇몇 성귀들을 지적하면서 그런 식으로 추리하는 사람들이 얼마 있읍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살아있는 공혈자의 피를 수혈받는 것은 잘못이 아니라고 주장하였읍니다. 그러한 추리가 타당한 것 같이 들릴지 모르지만, 사용된 성귀들과 그외 관련된 성귀들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백성이 살아있는 것의 피이든 죽은 것의 피이든, 피를 몸에 받아들이고 피로 생명을 연장시키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기대하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다음과 같은 명령을 받았읍니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무릇 스스로 죽은 것은 먹지 말 것이니 그것을 성 중에 우거하는 객[외국인 거주자, 신세]에게 주어 먹게 하거나 이방인[외국인, 신세]에게 팔아도 가하니라.” (신명 14:21) 그들은, 사체에서 피가 빠지지 않았을지라도 외국인 거주자에게 그것을 팔 수 있었읍니다. 외견상 그와 모순되는 것 같이 보이는 레위기 17:10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무릇 ‘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그들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외국인 거주자, 신세] 중에 어떤 피든지 먹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피 먹는 사람에게 진노하여 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라.]” 이 두 가지 귀절 사이에 이러한 차이가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일부 사람들은 그들의 견해를 내세우면서, 신명기 14:21은 사람이 죽인 동물의 경우가 아니라면 외국인 거주자가 피가 빠지지 않은 고기를 먹는 것을 허락한다고 주장하였읍니다. 그 경우에는 사람이 그 동물의 (생명을 대표하는) 피를 하나님께 돌려드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레위기 17:15은 이런 견해를 지지하는 것 같이 보일지 모릅니다. 그 성귀는 본국인이든 외국인이든, “스스로 죽은 것이나 들짐승에게 찢겨 죽은 것을 먹은” 사람은 단순히 “씻[고] ··· 저녁까지 부정”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인 것이 아니라면 피를 먹는다고 해서 어떤 실질적인 죄가 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읍니다. 그리하여 일부 사람들은 살아있는 것으로부터 피를 취하여 식품이나 수혈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신명기 14:21과 레위기 17:10, 15 사이의 근본 차이점은 동물이 죽은 방법의 문제입니까? 성경은 확실하게 그렇지 않다고 대답해 줍니다.
‘이스라엘’인들은 그들이 스스로 죽은 동물이든 짐승이 죽인 동물이든 피가 빠지지 않은 동물의 고기는 결코 먹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읍니다. 그들은 ‘시내’ 산에 있는 동안에 그러한 사체들을 처분하는 일에 관한 지시를 받았었읍니다. (출애굽 22:31) 신명기 14:21은 그와 일치하게,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백성이 그처럼 피가 빠지지 않은 사체들을 없앨 것을 지시하는 한편, 그러한 것들을 외국인들에게 파는 것을 허용한 것입니다.
이제 레위기 17:10을 주의깊이 검토해 보도록 합시다. 그곳에서는 “‘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그들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외국인 거주자, 신세] 중에” 누구도 피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그 동물을 죽였고 따라서 그 피를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했기 때문입니까?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그 귀절을 그 내용 이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더우기, 사람이 죽인 것의 피일 경우에만 죄가 된다면, 신명기 14:21과 출애굽기 22:31에서 사람이 죽이지 않은, 피가 빠지지 않은 동물의 고기를 ‘이스라엘’인들이 먹는 것을 금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인들은 그러한 고기를 그들이 먹을 수 없다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었읍니다. ‘에스겔’은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나는 영혼을 더럽힌 일이 없었나이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스스로 죽은 것이나 짐승에게 찢긴 것을 먹지 아니하였[나이다.]”—에스겔 4:14; 비교 44:31.
그러면, 신명기 14:21에서는 “외국인 거주자”에게 피가 빠지지 않은 고기를 팔 수 있다고 말하는 한편, 레위기 17:10에서는 “외국인 거주자”가 피를 먹는 것을 금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백성과 성서 주석가들은 모두 그 차이가 관련된 외국인들의 종교적 신분이었을 것임을 인정하였읍니다. 「성서 이해를 위한 보조서」(51면)는 “외국인 거주자”라는 말이 때로는 ‘이스라엘’인들 가운데 있지만 온전히 개종하지는 않은 사람을 의미하였음을 알려 줍니다. 신명기 14:21에서는 바로 그러한 사람 즉 하나님의 법을 전부 지키려고 하지 않고 ‘이스라엘’인들과 개종자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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