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에게 시정을 받는 자들은 행복하다
“오 ‘야’여, 당신에게 시정을 받으며 당신의 율법으로 가르침을 받는 대장부는 행복합니다.”—시 94:12, 신세.
1, 2. 하나님에게 시정을 받는 일을 우리는 어떻게 느껴야 합니까?
최근에 말이나 행실에서 하나님의 의로운 방식이나 표준에 달하지 못한 때는 언제였읍니까? 아마 그리 오래 전까지 소급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을지 모릅니다. 단지 몇시간 전 혹은 며칠 전일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죄를 지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올바르게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열왕 상 8:46; 요한 1서 1:8-10.
2 우리는 여호와께서 인자하신 방법으로 우리를 시정하고자 하시며,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심에 대해 행복하게 생각할 수 있읍니다. “열국 사람들을 시정하시는 분, 심지어 사람들에게 지식을 가르치시는 분께서 책망할 수 없겠읍니까? 오 ‘야’여, 당신에게 시정을 받[는] ··· 대장부는 행복합니다.” 우리가 만일 ‘여호와에게 시정을 받도록 우리 자신을 내맡긴다면’ 우리는 행복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가 그분과 조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시 94:10, 12, 신세.
3. 적절하게도 어떠한 제목들을 고려하게 됩니까?
3 그리스도인들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신다는 성서의 보장을 신뢰할 수 있읍니다. (히브리 12:6, 신세 참조) 그러므로 책망, 회개 및 제명 처분과 관련된 문제들을 성서에 근거하여 고려하게 된 것을 기뻐합니다. 「파수대」 본 호에 연속 두 기사와, 다음 호에 나머지 세 기사가 발행될 것입니다. 이 다섯 기사들은 틀림없이 우리 모두가 관련된 성서의 원칙을 명확하게 이해하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며, “온전케[바로잡게, 신세] [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 하며 평안”히 거하게 할 것입니다.—고린도 후 13:11.
4, 5.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시정하십니까?
4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리가 시정을 받고 있다는 것을 미처 모를 정도로 유순하고 부드러운, 방법으로 우리를 시정하십니다. 아마 우리가 그분의 말씀에서 어떤 점을 읽음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행로로부터 돌이키거나 우리의 사고 방식을 시정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시정이 보다 날카롭고 심지어는 어느 정도 고통을 수반할 수 있읍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에게 가장 유익한 시정의 정도와 방식을 알고 계십니다. (예레미야 30:11) 하나님께서는 마치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하듯 사랑으로써 징계를 베푸시기 때문에 그분의 시정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참으로 잘하는 일입니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제한 혹은 금지 사항이 관련된 시정을 받아들이는 것이 멸절을 당할 정도로 형벌을 받게 되는 것보다 훨씬 더 현명합니다.—예레미야 10:24; 히브리 12:5.
5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통하여 우리를 시정하십니다. 그분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예언자들과 사사들을 보내셨읍니다. 그러나 그분은 한 개인을 통해서도 현명한 시정을 베푸십니다. ‘욥’의 거짓 “안위자” 중 한 사람은 ‘욥’이 ‘여러 사람을 시정한’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욥 4:3, 신세 참조; 16:2) 경건한 전념으로 뛰어난 사람인 ‘욥’으로부터 현명한 시정을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큰 축복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자문해 볼 수 있읍니다. ‘나는 이러한 도움이 되는 시정 즉 그것이 인간으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에 근거한 시정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인가?’
사랑으로써 서로 시정함
6. 우리는 형제로부터 무엇에 근거하여 시정을 받을 수 있읍니까?
6 예수께서는 우리가 사랑에 찬 시정을 주고 받을 것을 기대할 수 있는 기초를 놓으셨읍니다. 예수께서는 심각한 개인적 범법의 경우를 다루는, 그러나 여러 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 원칙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읍니다. “만일 당신의 형제가 잘못을 행하거든 그를 시정하시오. 그가 회개하면 용서하시오.” (누가 17:3, 신 미국어 성서) 또한 사도 ‘바울’은 “주의 종”은 다른 사람들을 “참을성 있고 온유하게 시정”해야 한다고 편지하였읍니다.—디모데 후 2:24, 25, 신 미국어 성서.
7. 심각한 범죄의 경우 어떻게 해야 합니까?
7 목자들 곧 회중의 임명된 감독자들은 각 그리스도인 개개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양떼 전체를 보호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읍니다. (히브리 13:17; 베드로 전 5:2, 3) 그러므로 누군가 심각한 죄에 빠지는 일이 있으면, 그 일은 마땅히 그들의 관심의 대상이 됩니다. 범죄한 사람 자신은 “회중의 연로자들을 불”러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큰 죄에 대해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는 범죄자를 염려하고 회중의 깨끗함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장로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레위 5:1) 그러면, 장로들은 잘못에 빠진 사람들을 도와 돌이키게 함으로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야고보 5:14, 신세, 16, 19, 20.
8. 우리는 형제들의 사소한 잘못을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8 장성한 그리스도인들이 성서에 기초한 시정과 도움을 베풀 수 있는 성질상 덜 심각한 실수나 잘못들이 있읍니다. 물론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사소한 결점에 대하여 지나치게 비평적이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래 참고 서로 인내하도록 권하시기 때문입니다. (골로새 3:12, 13) 우리는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한 정신을 가지고 우리 자신의 일에 대한 개인적 관심만이 아니라 남의 일에 대한 개인적 관심에도 눈을 두’어야 합니다. (빌립보 2:3, 4, 신세 참조) 하나님께서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우리의] 영광”임을 보장하십니다.—잠언 19:11.
9, 10. 어떤 형제가 알지 못하고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읍니까?
9 그래도 우리는 어느 동료 그리스도인이 알지 못하고 잘못된 길을 걷고 있거나 나쁜 형태의 위험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을 보는 경우가 있을 수 있읍니다. 예를 들어, 우리와 친근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형제가 과도한 음주의 경향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읍니다. 그가 술취한 사람으로 보이는 일은 없을지 모르지만 분명히 그는 ‘술에 인박일’ 수 있읍니다. (디모데 전 3:8, 신세) 그러므로 도움이 되는 시정이 주어질 수 있읍니다. 그러나 누가 그렇게 할 수 있읍니까?
10 ‘바울’은 ‘갈라디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편지하였읍니다. “어떤 사람이 알지 못하고 잘못을 저지를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영적 자격을 가진 여러분은 온유한 정신으로 그런 사람을 바로 잡아 주려고 하십시오.” (갈라디아 6:1, 신세) 영적 자격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친절하고 지혜롭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시정해 줄 수 있읍니다. 예로서, 그는 일반적인 대화 가운데서 어떤 점을 말할 수 있읍니다. 그렇게 함으로 일부러 교훈한다는 인상을 갖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잠언 15:23) 혹은 그는 사적으로 조언을 해 줄 수 있읍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의 노력의 동기가 비평적인 정신이 아니라 사랑의 염려에서 우러나온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고린도 전 13:4, 5.
11. ‘빌립보’의 형제 자매들은 그 곳의 문제 있는 자매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었을 것입니까?
11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들이 도울 수 있는 또 다른 경우들이 있읍니다. ‘바울’은 빌립보에 있었던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편지하였읍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도우라.]” (빌립보 4:2, 3)
기름부음받은 이 두 그리스도인 여자들 사이에 문제가 있었거나 현저한 불화가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이 사도가 ‘빌립보’인들에게 이 불화에 대하여 한쪽을 편들라고 권하지 않은 것은 확실합니다. 그것은 회중으로 하여금 양극단에 흐르게 하여 파벌과 질투심 그리고 분쟁을 낳게 할 것입니다. (고린도 전 1:10-13; 3:2-9) 그것은 피해야 할 심각한 위험입니다. 그러므로 이 여자들의 불만이나 견해에 참견하지 않고 ‘빌립보’의 형제 자매들은 ‘참으로 멍에를 같이 한’ 동료들처럼 그리스도인 연합을 위하여 시정이 되는 격려를 주고, 서로 용서하고 사랑 가운데 함께 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마태 5:23-25; 에베소 4:1-6, 31, 32; 디도 2:3-5) 만일 우리가 동료 숭배자로부터 이러한 좋은 동기에서 나온 시정을 받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친절의 표현으로서 받아들여야 합니다.—시 141:5.
확고함을 가지고 행동함
12, 13. 보다 심각한 어떠한 유의 잘못이 회중 안에 있을 수 있읍니까?
12 때로는 하나님의 지시에서 벗어난 행로를 추구하면서, 장로들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변화를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있을 수 있읍니다. 이 경우는 단순히 두 사람 사이에 개성의 차이가 있는 경우가 아닙니다. 그것은 또한 어떤 개인이 그리스도인 장성으로 자라가는 계속적인 성장 과정에 있어서 여러 가지 면에서 그의 부족함을 반영하는 경우도 아닙니다. ‘바울’은 참을성과 사랑으로 그리고 그들이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도와야 할 장성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이 있을 것임을 인정하였읍니다. (로마 14:1; 15:1; 고린도 전 13:11; 빌립보 3:15, 16) 그러나 그런 경우가 아니고, 아직 심각한 죄에 해당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하나님의 충고와 반대되는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읍니다.
13 때때로 이러한 유의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것으로 충격을 받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성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느니라.]” (디모데 후 2:20, 21) 여기에서 회중은 천한 그릇 즉 행실과 영향력이 건전하지 못한 일부 개인들이 있을 수 있는 한 집으로 비유되었읍니다. ‘디모데’와 다른 충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천한 그릇으로부터 ‘떠나 있으라’는 경고를 받았읍니다.—비교 로마 16:17.
14, 15. ‘데살로니가’ 회중에 어떠한 문제가 일어났었으며,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문제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읍니까?
14 ‘바울’의 교훈을 이렇게 이해하고 적용시켜 볼 때, 우리는 고대 ‘데살로니가’에 바로 이러한 경우가 있었음을 알 수 있읍니다. 분명히 건강하고 능력이 있으면서도 일하려 하지 않는 일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회중 전체가 충고를 받았읍니다. 이 일부 사람들은 게으름에 대한 하나님의 교훈을 거스려 남에게 의존하여 살려고 하였읍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편지하였읍니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명령합니다. 게으른 생활을 하거나 우리에게서 받은 교훈을 따르지 않는 모든 형제들을 멀리하시오.”—데살로니가 후 3:6, 새번역; 잠언 20:4; 24:30; 전도 5:12, 18; 10:18.
15 그렇습니다. 회중 장로들의 성경적 교훈을 포함하여 “말로만 하면 고치지 아니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읍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원칙과 반대되는 길을 고집합니다. 그런 경우,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이 교훈한 바와 같이 그를 “멀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느낄 수 있읍니다.—잠언 10:17; 29:19.
‘이 사람을 지목하라’
16.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어떠한 교훈을 하였읍니까?
16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게으른 자, 규모없는 자들에 대하여 계속 다음과 같이 교훈하였읍니다.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같이 권하라.” (데살로니가 후 3:14, 15)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계속 하나님의 원칙을 무시하는 사람을 “지목”할 수 있읍니다.
17. (ㄱ) 이 교훈을 적용하는 데 조심해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이 점에 관해 예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읍니까?
17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이 교훈을 적용하는 데 있어서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불완전성 때문에 옷차림이나 몸단장과 같은 것에 대하여 개인적인 기호에 따라 판단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읍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어떤 자매의 의상이 지나치게 절도를 잃었거나 단정치 않거나 혹은 일반적으로 형제들에게 충격을 주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 자매가 단순히 색다른 취미와 기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창세 37:3, 4; 요한 19:23; 디모데 전 2:9, 10) 우리는 견해, 기호 또는 양심의 차이 등의 그리 중요치 않은 문제에 관해 형제 자매들의 재판관이 된 것이 아닙니다. (로마 14:4, 10-12) 심지어 어떤 사람이 아주 사소한 점에 관해 잘못 생각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예수의 충고를 상기해야 합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니라.] ···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 7:1-3.
18. 어떤 사람이 분명히 하나님의 교훈을 범하는 일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18 그러나 하나님의 원칙으로부터 현저히 벗어나, 아주 심히 게으르거나 비평적인 사람, ‘무익한 말장이’ 즉 ‘자기와 관계없는 일에 [끊임없이] 참견하는 자’가 있다면 어떠합니까? (데살로니가 후 3:11) 또는 문제가 다른 사람을 물질면에서 계획적으로 이용하려는 것이거나 부당함이 분명한 오락에 탐닉하는 일, 혹은 아직 사법적인 행동이 요구되지는 않지만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는 사람의 경우일 수 있읍니다.a 장로들이 그를 도우려고 노력했으나 그가 자기 행동을 고집하고 그리하여 회중의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거나 위험을 줄 수 있읍니다. 장로들은 이 문제를 논의하고 장로들 중 한 사람을 임명하여 회중에게 이 문제에 관해 확고하고도 직접적인 성경 연설을 하게 할 수 있읍니다. 이렇게 하여 장로들은 “규모없는” 자의 이름을 말하지 않고 다루기 힘든 그러한 자의 ‘입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디도 1:10-13.
19. 문제가 계속될 때 회중 성원들은 그를 어떻게 대할 수 있읍니까?
19 회중에 그러한 상황이 있게 될 때 그리스도인 각자는 그 사람을 ‘지목’하지 않을 수 없다고 느낄지 모릅니다.b ‘바울’은 이렇게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일부 설명하면서,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고 말합니다. (데살로니가 후 3:14) 그것은 “지목”받은 자와 사교적으로 어울리는 일을 중단하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결정을 공개적으로 발표하려고 해서는 안 되며,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는 회중 장로들이 준 건전한 교훈에 따라 “지목”받은 사람과 개인적으로 교제하는 일을 피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람을 전적으로 거절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아직도 우리의 형제이고 그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동료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증오”의 씨가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책망”해야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우리 자신이 좋은 본을 세우는 한편 더 나아가서 ‘그와 사귀지 말라’는 지시에 친절하게 그러나 확고하게 순종하는 것이 시정의 한 형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도움을 베풀기 위하여 그 이상의 일을 할 수 있읍니다.—레위 19:17; 디도 2:7, 8.
20. 만일 우리가 규모 없는 어떤 사람을 “지목”한다면, 우리에게는 어떠한 책임이 따릅니까?
20 “지목”받은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회중 집회와 야외 봉사에서 여전히 우리와 함께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지목하는 일’과 관련있는 또 다른 의무 즉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같이 권하라”는 의무를 수행할 기회를 가질 수 있읍니다. (데살로니가 후 3:14, 15) 만일 우리가 이 부면의 하나님의 교훈을 수행해야 할 우리의 책임을 이행하지 않고 “지목”받은 사람을 원수와 같이 대한다면, 우리의 행동 역시 그의 행동만큼이나 무정한 것이 될 수 있읍니다.
21. 이 성서적 마련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민수 35:12; 신명 19:11, 12)
21 우리의 바라는 바는 “지목”받은 사람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가 자기와 교제하지 않는 것이 성경적인 지시에 의한 것임을 인식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징계는 그에게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할 수 있읍니다. 오늘날 방대한 수의 충성스런 형제들이 하나님의 회중과 연합하고 있는 것을 생각할 때, 그리스도인들이 규모 없는 형제를 ‘지목’해야 할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아마 꾸준한 훈계와 함께 시정을 베풀므로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히브리 12:11-13.
장로들의 위원회와 만나는 일
22, 23. 심각한 죄의 경우는 어떻게 다루어집니까?
22 우리가 (7항에서) 이미 살펴 본 바와 같이 ‘심각한 죄를 범한’ 사람은 “회중의 연로자들”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야고보 5:14, 15, 신세) 이 사람들은 비통한 죄에 빠진 사람에게 경건한 시정을 베풀 좋은 위치에 있읍니다. 그들은 그에게 필요한 영적 도움을 베풀 수 있읍니다.—잠언 6:23.
23 보통, 세명의 장로로 된 위원회가 심각한 죄를 다루도록 지명됩니다. 그들은 단순히 재판관 혹은 ‘영적 경찰관’으로서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양떼의 목자들이며, 범죄한 사람을 대할 때 그러한 사람들임을 증명합니다. 문자적인 양의 목자는 앙갚음이나 거칠은 태도나 또는 트집을 잡으려는 정신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장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단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돕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유다 23절) 그들의 목표는 가능하다면 범죄한 자를 그 길에서 돌이키게 하려는 것입니다.—야고보 5:19, 20.
24. 장로들은 죄지은 자에게 어떻게 하려고 해야 합니까?
24 그러나 장로들은 비통한 죄를 다루는 데 있어서 ‘충실한 말씀을 굳게 잡’아야 하며, “건전한 가르침으로 권면하고 거스리는 자들을 책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디도 1:9, 신세) 그러므로 그들은 잘못을 범한 자에게 잘못된 행로와 그 길을 시정해야 할 이유를 성경으로부터 솔직하게 보여 주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그가 회개하고 하나님과 또 다시 평화스런 관계를 갖게 되기를 원합니다.—베드로 전 3:10-12.
25. 아직도 연구해야 할 어떤 문제들이 있읍니까?
25 그러면 장로들은 어떻게 죄를 범한 자를 책망해야 합니까? 경건한 회개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어떻게 나타납니까? 장로들은 심각한 죄를 범한 사람이 회개를 나타낼 경우 어떻게 다루어야 합니까? 범죄자를 전체 회중 앞에서 책망해야 합니까? 이상과 같은 문제들이 다음 기사에서 다루어집니다.
[각주]
a 성서적으로 재혼할 자유가 없는 사람의 ‘데이트’에 관한 예가 「파수대」(영문) 1980년 8월 1일 호 “독자로부터의 질문”란에서 고려되었다.
b ‘지목’한다는 것은 그를 특별히 주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시편 37:37; 빌립보서 3:17 및 히브리서 13:7에서 언급하고 있는 호의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것과 대조적인 것이다.
[10면 네모]
경건한 시정에는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성서나 성서 연구 보조서를 통하여 우리를 시정하신다. 또는 그리스도인 특히 장로가 사랑스럽게 어떤 잘못에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켜 줄 수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규모 없는 행실을 버리고자 하지 않는다면, 장로들은 그러한 행실이나 버릇에 관해 회중에게 경고하고 경계시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그러한 규모없는 자를 개인적으로 ‘지목’해야 한다고 느껴야 한다. (데살로니가 후 3:14, 15).
만일 우리가 ‘지목’한다면 그러한 사람과 교제를 피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아직 그리스도인 형제이기 때문에 그러한 규모없는 자를 도우며 훈계할 의무를 또한 수행해야 한다.
[8면 삽화]
동료 그리스도인이 위험한 곳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을 본다면 당신은 친절하게 충고해 주겠는가?
[9면 삽화]
시정을 위한 격려가 필요한 사람들을 ‘계속 도우라’고 ‘바울’은 교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