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여호와의 생각을 알았겠는가?’
“사실, 누가 여호와의 생각[또는 정신]을 알았겠읍니까? 또, 누가 그분의 고문이 되었겠읍니까?”—로마 11:34, 신세; 이사야 40:13, 희랍어 칠십인역.
1. (ㄱ) ‘바울’은 이사야 40:13로부터 무슨 도전적인 질문을 인용하고 있읍니까? (ㄴ) 그의 인용문의 중심 단어는 ‘히브리’어 원문과 어떻게 다릅니까?
2,700여년 전에 고대 ‘이스라엘’ 민족 앞에 도전적인 질문이 제시된 일이 있었읍니다. 한때 ‘바리새’인이었던 한 ‘유대’인은 자기 편지 로마서 11:34에서 그 질문을 이렇게 인용하였읍니다. “사실, 누가 여호와의 생각[또는 정신: mind]을 알았겠읍니까? 또, 누가 그분의 고문이 되었겠읍니까?” (신세) 사도 ‘바울’이 인용한 그 질문은 고대 희랍어 「칠십인역」 이사야 40:13의 번역문을 발췌한 것입니다. 그 번역판은 그 귀절에서 ‘히브리’어 원문에 나오는 “영”(spirit)에 해당하는 단어 대신에 “생각” 또는 “정신”(mind)이라는 말(‘누스’)을 사용하고 있읍니다.
2. 사람의 “생각” 또는 “정신”이라는 말을 무엇으로 이해해야 합니까? 설명하십시오.
2 이제, “여호와의 생각” 또는 “정신”이라는 표현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간 피조물인 우리의 경우에 있어서 생각 또는 정신이란, 사고 과정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께서 가지셨던” 동일한 “정신 태도”를 가지려고 정신에서 결정할 수 있읍니다. (빌립보 2:5, 신세, 또한 창세 11:6, 신세 참조) 우리의 정신 기능은 어느 동물의 것보다 우월합니다.
3-5. (ㄱ) 이사야 55:8, 9에서는 여호와의 “생각” 또는 “정신”에 대하여 무엇을 알려 줍니까? (ㄴ) ‘바울’이 로마서 11:33에 기록된 것처럼 외친 것을 이해할 만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ㄷ) 로마서 11:34에 나오는 그 사도의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ㄹ) 그리스도교 이전 필자들이 여호와의 “생각” 또는 “정신”을 알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3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품고 계신 생각 또는 정신은 우리 불완전한 인간 피조물들이 품을 수 있는 생각이나, 우리가 자신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우월합니다. 그분은 이사야 55:8, 9에 나오는 예언에서 이 중대한 사실로 주의를 이끄십니다. 그 귀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읍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thought]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그러므로, 그분은 인간들을 위하여, 특히 자신과의 언약 관계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위하여, 이곳 지상의 우리 피조물들이 짜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목적을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마련의 특징과 그것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논한 후에 “이방인의 사도”는, 이해할 만하게도, 다음과 같이 외치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로마 11:13, 33) 확실히 하나님의 길을 그분보다 먼저 찾아낸 사람은 없읍니다. 그러므로 영감받은 사도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합니다. “사실, 누가 여호와의 생각[또는 정신; ‘누운’]을 알았겠읍니까? 또, 누가 그분의 고문이 되었겠읍니까?” (로마 11:34, 신세) 「예루살렘 성서」에는 그 귀절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읍니다. “과연 누가 주의 생각[또는 정신]을 알 수 있겠읍니까? 과연 누가 그분의 고문이 될 수 있겠읍니까?”
4 이 사도의 이러한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정신에 품은 것이 무엇인가를 밝혀주신 후에도 인간이 그분의 생각 또는 정신을 알 수 없거나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생각 또는 정신을 우리 인간에게 영감받은 말씀, 곧 성경의 지면을 통하여 밝혀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사도의 말의 의미는 어떠한 인간도, 자신의 창작력으로는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각 곧 목적을 틀잡으시기보다 앞서서는, 그분의 사고 기능과 동일한 것을 산출해 내거나 개발해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밝혀주시기 전에는 어떠한 사람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하나님께서 성서에 밝혀 주시기 전에는 아무도 “여호와의 생각” 또는 “정신”을 알지 못하였읍니다. 성경의 처음 39권을 쓴 그리스도교 이전의 필자들도 그러하였고, 심지어 율법의 수여자인 ‘모세’도 그러하였읍니다.
5 예를 들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 및 그의 씨와 관련하여 생각 또는 정신에 무엇을 품고 계신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아무도 그 모든 것이 기원 제 1세기의 사건들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였읍니다.
“감람나무”에 대한 여호와의 “생각”
6. (ㄱ)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무슨 약속에 관해 논하였읍니까? (ㄴ) ‘아브라함’은 어떠한 큰 은총을 받았으며, 무엇 때문이었읍니까?
6 이 사도는 로마서 11장에서 34절에 이르기까지, 예언된 “‘아브라함’의 씨”를 논했읍니다. 창세기 12:3과 22:17, 18에 들어 있는 ‘모세’의 기록에 의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연로한 족장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 즉 “씨”를 통하여 축복하실 것을 약속하셨읍니다. 이 씨 안에서 또는 그 씨를 통하여 ‘아브라함’의 하나님께서는 정하신 때에 지상의 모든 족속과 민족들을 축복하시게 되어 있었읍니다. 그 약속의 상속인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매혹적인 일입니까! 그리고 ‘아브라함’이 그 약속의 상속인이 된다는 것은 믿음과 순종에 대한 얼마나 큰 상이었읍니까!
7. (ㄱ) 그 상징적 “감람나무”의 부분들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ㄴ) “가지”들은 무슨 대열에 있었읍니까? (ㄷ) “씨”와 관련하여 여호와의 “생각” 또는 “정신” 가운데 무엇이 아직도 밝혀져야 하였읍니까?
7 이 사도는 여호와께서 원래 품으신 생각을 감람나무의 발달 과정에 비합니다. 그 나무는 그의 고토인 ‘이스라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읍니다. 그러한 배경과 일치하게 이 상징적 감람나무의 뿌리는 ‘아브라함’ 자신이었읍니다. 상징적 뿌리인 ‘아브라함’에게서 나온 나무 줄기는 그의 사랑하는 아들 ‘이삭’과, 그의 손자 ‘야곱’ 즉 ‘이스라엘’, 그리고 ‘이스라엘’ 12지파의 원조가 된 ‘야곱’의 열 두 아들들로 구성되어 있었읍니다. 이들 12 족장의 후손들은 모두 날 때부터 그 상징적 감람나무의 가지들이었읍니다. 그러한 신분으로 그들은 여호와의 인자한 목적 곧 “생각”에 따라, 지상의 모든 부족과 민족들이 축복을 받는 통로가 될 약속된 “‘아브라함’의 씨”가 될 수 있는 직계 대열에 있게 되었읍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 “씨”에 관하여 몰랐던 점은 그 씨가 족장 ‘아브라함’의 혈통에 의한 육적인 씨가 아닐 것이라는 점이었읍니다. 사실, 그 씨는 영적인 “씨”가 될 것이었읍니다. 그러므로 그 씨의 아버지는 ‘아브라함’보다 더 위대하고 더 높은 분일 것입니다. 이분은 바로 다름아닌 위대하신 생명의 수여자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었읍니다. 그러면 이제 누가 그 “씨”의 첫째가는 분이 될 것입니까?
8. (ㄱ) 예수께서는 어떻게 ‘이삭’보다 더 큰 분이 되셨읍니까? (ㄴ) 지상의 모든 족속들을 축복하기 위해 예수의 희생과 천적 부활이 필요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8 이분은 ‘아브라함’이 노령에 낳은 아들 ‘이삭’보다 더 큰 분이었읍니다. 그분은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였읍니다. 그분은 ‘이삭’의 후손이었지만 ‘이삭’과 그의 아들 ‘야곱’ 즉 ‘이스라엘’,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의 12 기초인 ‘야곱’의 열 두 아들들보다 더 큰 분이었읍니다. (디모데 전 2:5) 예수라 이름하게 될 아기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읍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처녀 어머니 ‘마리아’의 태에서 출생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그의 생명은 영계로부터 ‘마리아’의 태로 옮겨졌으며,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지상에서 예수의 양 아버지에 불과하였읍니다. (누가 1-3장) 그러나 밝혀진 사실들에 의하면 예수께서 지상의 인간으로서는 지상의 모든 부족과 민족들을 축복하는 자가 되시지 않았읍니다. 물론, 예수께서는 기원 33년에 ‘예루살렘’ 밖의 ‘갈보리’에서 자신의 완전하고 죄없는 인간 희생 제물을 바치심으로 온 인류의 축복을 위해 봉사하실 수 있었읍니다. 그러나 기원 33년에 그분이 죽으신 지 삼일째 되던 날 하늘에 계신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자로부터 부활시키셨으며, 그 후 그분은 하나님의 영의 아들로서 하늘로 돌아가셨읍니다. 바로 그곳으로부터 그분은 땅의 모든 족속과 민족들을 축복하고 계십니다.
9. (ㄱ) 상징적 감람나무는 이제 무슨 더 넓은 의미를 지니게 됩니까? (ㄴ) 영적 가지의 수는 얼마나 되며, 어떻게 알 수 있읍니까? (ㄷ) 갈라디아서 3:28, 29은 이 “가지들”에 관하여 우리를 어떻게 계몽시켜 줍니까?
9 이러한 관점에서 그 사도의 감람나무의 비유는 새롭고 훨씬 더 넓은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그 영적 감람나무의 “뿌리”는 위대하신 만민의 생명의 수여자로서 족장 ‘아브라함’보다 더 큰 분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 더 큰 ‘아브라함’의 독생자는 ‘이삭’보다 더 큰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더 큰 ‘이삭’은 더 큰 ‘아브라함’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영으로 출생한 그리스도인 회중의 머리가 되십니다. 그리스도인 회중의 성원들은 이 신권적 감람나무에서 나오는 영적 가지들이며, 계시록 7:1-8과 14:1-3에 의하면 그 성원들의 수는 최종적으로 144,000이 되게 되어 있읍니다. 그러한 이유로 갈라디아서 3:28, 29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씨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난외주)
10. (ㄱ) 누가 영적 가지들이 될 수 있는 일차적 대열에 있었읍니까? (ㄴ) 이들 중 누가 “구원을 받”았으며, ‘바울’은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하여 어떻게 예언을 인용하였읍니까?
10 예수 시대의 육적 ‘유대’인들은 그분의 육적 형제들이었으므로, 족장 ‘아브라함’으로부터 내려오는 혈통에 의해 그 영적 감람나무의 “가지”들이 될 수 있는 일차적 대열에 있었읍니다. 그들은 중보 ‘모세’를 통하여 더 큰 ‘아브라함’과 맺은 율법 언약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의 다른 누구에게가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오신 것입니다. (마태 10:6) 여호와 하나님을 뿌리로 하는 그 영적 감람나무의 “가지”들이 될 최초의 사람들은 육적 ‘유대’인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충실한 12사도와 그 외의 수천명의 육적 ‘유대’인들이었읍니다. 그러나 육적 ‘유대’인들의 소수의 남은 자들만이 “구원을 받”아 더 큰 ‘아브라함’의 씨가 되고 그분의 “약속”의 상속자들이 되었읍니다. 그것은 이사야 10:22에 예언된 대로였읍니다. ‘바울’은 그 예언을 로마서 9:27에서 인용하고 있읍니다.
11. (ㄱ) “가지” 후보들은 언제 잘려나갔읍니까? (ㄴ) 돌감람나무의 “가지”들이 이제 어떻게, 그리고 무슨 감람나무로 접붙여지게 되었읍니까?
11 “‘아브라함’의 씨”의 “가지” 후보들을 잘라내는 일은 할례받은 ‘사마리아’인들의 개종과 더불어 시작되었읍니다. 그리고 그 일이 온전한 규모에 이른 것은 더 큰 ‘이삭’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부활되시고 나서 삼년 반이 지난 후였읍니다. 그때 할례받지 않은 최초의 비‘유대’인 신자들인 ‘로마’ 백부장 ‘고넬료’와 그의 가족 및 신자가 된 벗들이 사도 ‘베드로’에 의해 개종하였고 여호와의 영으로 출생하여 기름부음받은 후에 침례를 받은 것입니다. (사도 10장) 그러므로 돌감람나무의 “가지”들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는 “뿌리” 역할을 하시는 영적 감람나무에 접붙여진 것입니다.
12. (ㄱ) 잘려나간 “가지”가 회개할 경우에는 어떻게 될 것입니까? 설명하십시오. (ㄴ) 이것은 무엇을 예시하였읍니까? (ㄷ) 여호와의 “생각”이 밝혀지므로 우리는 ‘바울’처럼 어떠한 반응을 나타내야 합니까?
12 그러나, 잘려나간 육적 ‘유대’인들 중 어떤 사람들은 문제들을 재검토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처럼 회개한다면, 그들은 ‘유대’ 민족이 더 큰 ‘이삭’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함으로 상실하였던 영적 특권 안으로 다시 접붙여지게 되어 있었읍니다. (사도 18:1-4, 26; 로마 16:3; 고린도 전 16:19) 이것은 더 큰 ‘아브라함’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친절을 예시하는 것입니다. 조상들로 인하여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던 육적 ‘유대’인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처럼 감복할 만한 관대함을 나타내신 것 때문에 그 사도는 “깊도다,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의 부요함이여!” 하고 외치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이처럼 여호와의 “생각” 또는 “정신”이 밝혀지므로 우리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인식의 감정을 갖게 되지 않습니까?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함
13, 14. (ㄱ)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율법을 마련해 주셨으며, 그 목적은 무엇이었읍니까? (ㄴ) 예수께서는 그 율법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여기에서 그분은 “마음(heart)”이라는 말을 무슨 뜻으로 사용하신 것입니까? (ㄷ) 예수께서는 무슨 두 가지 계명을 인용하셨으며, 우리는 왜 그것들을 지켜야 합니까?
13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모세’를 중보로 하여, 족장 ‘아브라함’의 육적 씨인 ‘이스라엘’ 민족과 언약을 맺으셨읍니다. 그 일은 과거로 소급하여 기원전 1513년에 ‘시내’ 반도 광야에 있는 ‘시내’ 산에서 있었읍니다. 거기서 그분은 자신의 율법을 그들에게 주셨읍니다. 그 율법에 관하여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술하였읍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 3:24) 그러면 이제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율법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읍니까? 율법에서 어느 것이 ‘가장 큰 계명’이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읍니다. “네 마음[희랍어: 카르디아]을 다하고 목숨[프쉬케(영혼)]을 다하고 뜻[정신(mind), 신세; 디아노이아]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태 22:35-40, 새번역 참조) 여기에서 마음(heart)이 정신(mind)과 관련하여 언급됨으로 그것은 문자적 심장이 아니라 “마음”을 의미하는 것임에 틀림없음을 알려 줍니다.
14 예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은 신명기 6:5을 인용하신 것이었읍니다. “너는 마음[‘히브리’어: 레바브]을 다하고 성품[네페슈(영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또한 레위기 19:18도 인용하셨읍니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이처럼 예수께서는 이 두 가지 계명을 ‘모세’의 율법 언약에서 가장 큰 계명과 다음으로 큰 계명으로 분류하셨읍니다. 오늘날 우리는 ‘모세’의 율법 아래 있지 않지만, 그 근본적인 요구 조건들은 변함없이 적용됩니다. 우리는 그 계명들을 지켜야 합니다.
15. (ㄱ) 심장을 박동시키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작용합니까? (ㄴ) 심장은 두뇌 및 정신과 무슨 관계가 있읍니까?
15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심장을 움직이는 것은 “생명의 영”입니다. (계시 11:11; 창세 7:22, 신세 참조) 이 생명력이 살아 있는 육체의 심장을 박동시킴으로 두뇌를 포함한 인체의 모든 부분들로 생명의 피를 뿜어 보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네페슈(영혼)]과 일체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어느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하였나니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 피인즉 무릇 피를 먹는 자는 끊쳐지리라.” (레위 17:14) 전체 몸이 살기 위해서는 심장이 신체의 모든 부분으로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피를 뿜어 보내야 합니다. 이 점은 그러한 피의 순환이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 자신의 타고난 심장에 의해 행해지든지, 다른 누군가의 신체에서 이식받은 심장에 의해 행해지든지, 또는 무감정한 육체가 아니라 기계인 인공 심장에 의해 행해지든지 마찬가지입니다. 그처럼, 피가 두뇌로 뿜어져 보내지면, 사고 기능은 자극을 받고 생각 또는 정신(mind)은 활동하게 됩니다. 이처럼 심장은 두뇌에 활동적인 생명력, 즉 “생명의 영”이 들어 있는 피를 공급함으로 두뇌에 힘을 주고 있음이 명백합니다. 사람이 의식하든 못하든 심장은 두뇌와 기타 모든 신체 부분에 피를 계속 뿜어 보내고 있읍니다.
16. (ㄱ) 성서에 의하면 상징적 심장 곧 마음은 무엇입니까? (ㄴ) 우리가 여호와를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ㄷ)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정신”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할 수 있읍니까?
16 그러나 이제 살아 있는 조직인 심장의 이면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성서에서 사용된 바와 같이 마음(heart)은 동기와 감정의 바탕입니다. 그것은 상징적 심장 곧 마음입니다. 그것은 사실상 가장 깊숙한 곳의 자신을 의미합니다. 베드로 전서 3:4에서 그것은 “마음의 은밀한 사람”(신세), “마음에 숨은 사람”(개역 한글판), “여러분 내부의 자신”(your inner self)(신국제역)으로 묘사되어 있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명령 아래 있읍니다. 우리는 또한 여호와 하나님을 우리의 영혼을 다하여, 즉 우리의 존재 전체로 사랑하라는 명령도 받고 있읍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는 유일하시고 살아 계신 참 하나님, 곧 전능하신 분을 우리의 생명력을 다하여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행하고 “사물의 제도의 종결” 중에 그분의 일을 온전히 수행하는 데 우리의 정력을 다 바쳐야 합니다. (마태 24:3, 신세) 그에 더하여 성서의 하나님을 우리의 “정신”(mind) 곧 우리의 정신 기능을 다하여 사랑해야 합니다.—마가 12:29-31, 신세 참조.
17. (ㄱ) 우리가 여호와를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사랑한다면, 우리는 무슨 보증을 받게 됩니까? (ㄴ) 빌립보서 4:7에 의하면 우리의 마음과 정신은 하나님의 평화에 의해 어떠한 영향을 받게 될 것입니까?
17 물론, 우리가 여호와를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사랑한다는 것을 나타내면, 그분은 기꺼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실 것이며 이러한 확신은 우리가 염려에서 벗어나 있게 해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소란스러운 세상이 즐기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그러합니까? 사도 ‘바울’이 고대 희랍의 ‘빌립보’에 있는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증하였듯이, “모든 생각[희랍어: ‘누운’]보다 뛰어난 하나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여러분의 마음[‘카르디아스’]과 정신적 힘[‘노에마타’: “정신”(mind), 흠정역; 개역 표준역]을 지켜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빌립보 4:7, 신세)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은 경솔한 나쁜 동기 및 감정적 불안으로 흥분하지 않을 것이며 정신적 힘 곧 정신은 혼란을 일으키거나 뒤틀리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인도자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도움을 받는 가운데 하나님의 영감받은 성서에 따르는 자신의 행로를 계속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
대답하실 수 있읍니까?
◻ 여호와의 “생각” 또는 “정신”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 ‘바울’은 여호와의 “생각”을 설명하기 위해 신권적 감람나무를 어떻게 사용하였읍니까?
◻ “마음”이란 무엇입니까?
◻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마음”과 “정신”이 어떻게 관련되어 있읍니까?
[8면 삽화]
신권적 감람나무: 불순종하는 ‘유대’인 “가지”들은 찍혀 나가고 ‘사마리아’인 개종자들과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로 대치되었다
[10면 삽화]
심장은 두뇌로 생명을 유지시키는 피를 뿜어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