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음’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린도 후 5:14, 15.
1. 일반 사람들은 자유와 노예 생활에 대해 어떤 반응을 나타냅니까?
실로 자유는 고귀한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어느 곳에서나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습니다. 자유와 독립의 사상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남의 지시를 받는 것, 곧 다른 자를 위해 살아 간다는 생각에 반발심을 갖습니다. 아마 당신은, 그러한 사람들이,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다’고 말하는 것을 들어 보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누구에게도 종이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 혹은 노예라는 말을 들으면, 과거에 배의 노를 젓거나 채석장에서 일을 하거나 잔인한 주인의 명령에 따라 혹사당하는 노예들을 연상합니다.
2. 노예 제도는 과거 세대의 사람들에게만 영향을 주었읍니까?
2 다른 사람의 사유 재산에 불과한 인간, 곧 노예의 나쁜 영향이 우리 시대에까지 미치고 있읍니다. 1972년 ‘유엔’ 보고서에 의하면, ‘오늘날 많은 나라의 사회적 분규는 여러 가지 형태의 노예 제도에 그 직접적인 원인이 있다. 최근 몇몇 나라에서의 대규모적인 집단 살륙은 이전에 노예였던 사람들이 과거에 자기 상전들에게 대하여 자행한 것들이었다.’
3. 왜 오늘날 노예가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다고 말할 수 있읍니까?
3 ‘하지만, 나에게는 관계가 없어, 나는 노예가 아니니까’ 하고 사람들은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노예 제도를 직접 목격하였던 유명한 한 필자는, 그 제국 내의 모든 사람들이 어떤 의미에 있어서 노예라고 주장하였읍니다. 같은 논리로, 오늘날의 모든 사람들은 노예입니다. 그 유명한 필자 곧 사도 ‘바울’은 자신도 예외로 치지 않고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읍니다.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로마 7:14, 23.
우리는 참으로 자유하고 독립해 있는가?
4, 5. 우리 모두가 예속되어 있다는 어떤 증거가 있읍니까?
4 사도 ‘바울’의 말은 자기 부모가 일부러 그를 죄에게 노예로 팔아넘겼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 부모도 우리를 팔지 않았읍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의 조상인 ‘아담’이 고의로 죄를 선택함으로써 자신과 미래의 모든 자손 곧 온 인류를 불완전과 죄와 사망의 속박으로 팔았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읍니다. (로마 5:12) 부정할 여지 없이 이 일은 우리 시대까지 영향을 미치고, 우리 모두를 포함하고 있읍니다. 우리는 자신의 생활에서, 그리고 주위에서, 이 속박의 증거—심한 실수, 죄 및 질병의 형태로 나타나는 증거—를 보고 있읍니다.
5 그러나 오늘날 당돌하게도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읍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적 자유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활 방식은 그들이 실제로 자유함을 나타내고 있읍니까? 그들이 자기들의 욕정을 만족시키면서 자신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은 그들이 불완전과 죄의 노예임을 강조할 뿐입니다. 탐욕 때문에 돈과 재물과 위신을 얻는 데만 몰두해 있는 사람들은 어떠합니까? 그러한 사람도 늙고 쇠약해져 질병에 걸리고 결국은 죽습니다. 시민의 “권리”, 여성의 “권리”, 소수의 “권리”를 위한 집단 운동의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의 결국은 다 마찬가지, 즉 죽음이며, 그들이 참으로 죄와 사망이라는 왕의 노예임을 입증합니다.—로마 5:21.
6. 이러한 예속 상태는 어떤 질문을 일으킵니까?
6 이 말은 인간의 입장이 절망적이라는 뜻입니까?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될 길이 없읍니까? 해방될 마련이 있다면, 당신은 그래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읍니까? 아니면, 이 마련으로부터 유익을 얻기 위하여 어떤 요구된 것이 있읍니까?
7. 이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어떤 마련이 되어 있읍니까?
7 성서의 기본적인 가르침은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인간을 죄와 사망의 속박으로부터 풀어주실 마련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한 인간 예수가 되신 하나님의 독생자를 통한 마련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자기의 생명을 “모든 사람을 위한 상응하는 대속물”로 희생하셨읍니다. (디모데 전 2:5, 6, 신세) 이렇게 하여 대속물 곧 속가가 모든 사람을 위해 바쳐졌지만, 모든 사람이 그의 유익을 온전히 받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8. 대속의 유익을 모든 인간이 다 받지는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8 대속 마련의 온전한 유익—죄, 질병, 노쇠 및 사망으로부터의 항구적인 해방—을 받는 사람들은 창조주 앞에 승인받은 신분을 가진 자들 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승인받은 신분을 갖도록 초대되기는 하지만, 거기에 수반되는 책임 때문에 모두가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원치는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위해 대속물 곧 속가가 바쳐졌다는 사실에 일치하게 행동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사셨으며, 따라서 그들의 정당한 주인 곧 소유자이며, 그분들께 온전한 순종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계속하여 불순종하고,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소유자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대속 마련의 유익을 상실합니다.—마태 10:33; 요한 3:36; 히브리 10:26, 27; 베드로 후 2:1-3.
9. 모든 인류는 어떤 문제를 선택해야 합니까?
9 그러므로, 모든 인간 앞에 놓여 있는 질문은, ‘나는 누구를 자진적으로 섬기기를 원하는가? 사망을 바라보며 죄를 섬길 것인가? 아니면, 생명을 바라보며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섬길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로마 6:16) ‘그것은 선택조차할 필요가 없다. 나는 영원한 종이 되느니보다는 죽는 편이 낫다.’ 하고 어떤 사람들은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섬기는 문제에 있어서 그러한 논리가 건전합니까? 예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읍니까? (요한 8:32)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대한 봉사가 모든 정직한 사람들이 갈망하는 종류의 자유를 줄 것으로 기대할 수 있지 않겠읍니까? 다음을 고려해 봅시다.
주인의 차이
10.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에 계신 어떤 형태의 “주인들”을 모시고 있읍니까?
10 인간에게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를 원할 만한 훌륭한 이유가 있읍니다. 그분들은 자기 노예들을 잔인하게 혹사하기만 하고 그들의 복지와 행복은 전연 보살펴 주지 않던 과거의 잔인한 주인들과는 다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이 인류를 위해 행하신 일을 보면, 그분들의 관심이 깊고 사랑이 무한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읍니다.
11, 12. 우리는 어떤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읍니까?
11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입니다. 그분이 만물을 창조하셨고, 만물이 그분의 뜻대로 존재하였고 창조되었읍니다. (계시 4:11)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가 자녀를 갖기 전에 그들에게 사형을 집행하실 수 있었읍니다. 그렇게 하셨다면, 우리는 아무도 태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태어나지 않은 후손에 대한 자비로운 배려 때문에 첫 인간 남녀가 계속 살면서 자녀를 낳게 하셨읍니다. 그들의 자손들이 대부분 감사하지 않는 태도를 나타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인류에게서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마련들을 거두시지 않았읍니다. (마태 5:45) 심지어 이교인들도,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는 사도 ‘바울’의 말을 반박할 수 없었읍니다.—사도 14:17; 시 104:13-15, 24.
12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과분한 친절은 이 점에서 그치지 않았읍니다. 죄가 많고 자격이 없는 인간들이 하나님과의 승인된 관계 안에 들어 오고, 죄와 사망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될 길을 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 수치스런 죽음을 당하는 것까지도 막지 않으셨읍니다. (로마 8:32) 대부분의 인류는 죽은 자로부터 부활된 다음에, 이 마련으로 인한, 사망이 없는 생명의 기회를 받게 될 것입니다. (사도 24:15)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도 않는 인간을 위하여 이 일을 하셨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편지하였읍니다.—로마 5:8.
13. 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은혜를 입었읍니까?
13 죄있는 인류를 “보배로운 피”로 사신 것은 또한 예수 자신의 깊은 사랑의 탁월한 증거였읍니다. (베드로 전 1:19, 20) 예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요한 10:15-18)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 (요한 15:13) 예수께서는 사실상 그 이상의 일을 하셨읍니다. 예수께서는 친구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기의 아버지 앞에 아무 책임감을 인정하지 않는 전체적인 인류 세상을 위하여 죽으셨읍니다. (요한 1서 2:2) 자기 아버지에게 존경을 나타내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그러한 일을 해줄 사람이 누구이겠읍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생명을 주고 우리를 사셔서, 우리에게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열어 주셨으므로 우리는 크게 은혜를 입고 있읍니다.
14. 이러한 은혜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합니까?
14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큰 사랑을 생각할 때 당신의 마음은 감동되어 그분들을 섬기고 싶어지지 않습니까? 당신은, 자유를 제공받았지만 거절하고, 자진적으로 관대하고 친절한 ‘히브리’인 주인에게 계속 예속되는 것을 택한 고대의 어떤 사람들과 같이 느끼지 않습니까? (출애굽 21:2-6)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위하여 하신 일을 인식하는 사람들은 진정으로 그러한 반응을 보이고 있읍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한다고 ‘바울’이 쓴 바와 같습니다. (고린도 후 5:14) 그는, 하나님께서나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그분들을 충실히 섬기라고 강권한다고 말하지 않았읍니다. 반대로, 강권하는 힘은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그 아들과 같은 사랑을 가지고 계시므로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의 강권하는 힘을 가지고 있읍니다.
15. 그리스도인들이 갖게 되는 여호와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어떤 성질의 것입니까?
15 만일 당신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지 않았다면, 당신이 그분들과 맺을 수 있는 관계는 형식적이거나 개성이 없는 관계가 아니고 온정이 있는 밀접한 관계입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으로서 제자들과 지낸 마지막 날 밤에 그들에게 온정에 넘치게 이런 말씀을 하셨읍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요한 15:15) 예수의 이 말씀은 그들이 더는 종의 입장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었읍니다. 그들은 아직도 그들의 생명을 하나님께 빚지고 있었으며, 얼마 안가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위해 “속가”를 바칠 것이었읍니다. 그분의 말씀은, 그들을 단순한 종으로 곧 친밀한 내용은 알려 주지 않고 다만 지시만 받게 하는 종으로 취급하시지 않겠다는 뜻이었읍니다. 그들은 신뢰받고 존경받는 “친구”로 취급받을 것이었읍니다.
16. 왜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대한 봉사는 무거운 짐이 아닙니까?
16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종이 되는 것은 무거운 짐이 전연 아닙니다. 그분들의 명령은 사랑에 기초하고 있고, 순종하는 사람들이 해를 받지 않도록 보호해 주고 그들의 영속적인 행복과 복지를 보장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요한 1서 5:3) 사랑에 근거하여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 위해 자신을 부인하기로 선택한 사람들 앞에는 압제적인 멍에가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마태 11:28-30) 그러한 인자하신 주인이므로, 올바른 성품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찌 제멋대로 독립적인 행로를 가고 싶어 하겠읍니까?
종은 누구의 뜻을 먼저 행하는가?
17.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어떤 영향을 주어야 합니까?
17 만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분들을 섬기도록 당신을 강권한다면, 이것은 당신의 생활에 나타날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썼읍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고린도 후 5:15) 여기에는 무엇이 포함됩니까?
18-20. (ㄱ)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더이상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무엇이 첫째로 옵니까? (ㄴ) 예수의 말씀은 우리가 쓸데 없다는 뜻입니까?
18 실제적인 종과 주인의 관계를 생각해 보십시오. 충실하고 믿음성 있는 종이 자기 주인의 일을 뒤로 미루거나 사소한 일로 취급하겠읍니까? 그는 인생에서 자신의 안일이나 개인적인 일을 첫째로 생각하겠읍니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종들은 어떠하겠읍니까?
19 예수께서 사용하신 하나의 비유가 이 질문에 대해 강력한 대답을 줍니다. 예수께서는 그 당시 밭에서 일한 종들이 주인의 저녁 식사 준비도 한다는 사실로부터 결론을 이끌어 내셨읍니다. 주인은 종을 그렇게 부릴 권리가 있는 것으로 그 당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주인이] 저[종]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는 임무를 수행한 후의 태도에 관하여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누가 17:7-10.
20 예수께서는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자신을 업신여기고 얕잡아보며, 자신을 무용지물로 생각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고, 그들에게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과의 관계를 명확히 기억하라고 권고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들의 개인적인 의향이나 안일이 첫째 자리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21. ‘더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는 길이 왜 종종 매우 어렵습니까?
21 물론,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대한 봉사가 항상 용이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봉사가 문제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것 자체가 즐거움과 활기의 근원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인간들과 악한 영물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려움을 일으키는 자들입니다. (에베소 6:11, 12; 데살로니가 후 3:1-3) 현대에 와서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은 그러한 일을 겪어 왔읍니다. 특히 독재 정치하에 있는 나라에서 더욱 그러하였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치라는 예수의 명령에 순종한다는 이유로 왕왕 박해를 받았읍니다. (마태 28:19, 20) 다른 경우에는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충실성에서 나라의 정사와 군사에 간여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박해를 받습니다. (요한 6:15; 17:16) 저항이 가장 적은 길은 그들에게 승복하고, ‘착하고 도덕적인 생활’을 하면서 독재 정부의 요구를 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종들입니다. 그들이 받은 무한한 사랑을 인식하기 때문에 그들은 충실한 봉사를 하면서 기꺼이 고난을 당하고 심지어 죽기까지 합니다.
22, 23. (ㄱ) ‘체코슬로바키아’의 젊은 증인들은 어떤 일들을 견디었읍니까? (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계속 성실하게 해 주었읍니까?
22 「하늘 아래도 지옥이 있다」(1971년판, 117면)라는 책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기자 한 사람은 1951년에 공산 노동 수용소 내에서 잔인한 처우를 받고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에 관하여 기술하였읍니다. “나는 앞으로 두고두고 감탄과 경의를 가지고 여호와의 증인들을 기억할 것이다. 그들은 대부분이 청년들로서 군복무를 거부하여 유죄 선고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곳에서도 믿음을 고수하였다. ··· 그들은 ‘우라늄’ 광산에서 작업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수용소 지휘자들은 그들에게 일을 시키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사용하였지만 그들의 시도는 허사였다. 그들 대부분은 소련의 원자력 무기 생산을 위해 일하느니보다는 오히려 죽음을 택하였다. 수용소 소장 ‘팔라체크’는 겨울철 눈보라가 치는 섭씨 영하 30도의 혹한에 그들을 본부 건물 앞에 여러 날을 세워 놓고 동사할 때까지 그들에게 물을 끼얹었다. 그것은 실로 참혹한 광경이었으며, 나는 죽을 때까지 그 일을 잊지 못할 것이다.”
23 무엇이 이 청년들로 하여금 충실성을 고수하게 하였읍니까? 그들은 자기들이 “보배로운 피”로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을 인식하였으며, 자기들의 소유자 앞에 진실하기를 원하였읍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손에 죽임을 당할지라도,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잊지 않으시고 생명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확신하였읍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영감받은 확약을 믿었읍니다.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을] ··· 잊어버리지 아니 하시느니라.” (히브리 6:10)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라.”—누가 17:33.
24. 어떠한 입장에서 우리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음’을 나타낼 수 있읍니까?
24 당신 개인은 하나님께 대한 성실성에 대해 그만큼 혹심한 시험을 당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렇더라도, 당신은 지금 하나님을 첫째로 둡니까? 당신의 성실성의 시험은 가족과 관련이 있을지 모릅니다. 아마 당신에게 ‘종교를 너무 중요시한다’고 비난할지 모릅니다. 또는 학교 친구나 직장 동료가 당신에게 그리스도인 원칙을 포기하도록 압력을 가할지 모릅니다. 그러한 난관을 당할 때에 당신은 현재 어떻게 하고 있고 앞으로는 어떻게 하겠읍니까? 박해와 압력에 굴복하는 것이 생활을 보다 용이하게 하고 보다 편하게 하는 것같이 보이며, 하나님께 성실을 입증하는 것이 한 동안은 계속적인 혹은 더욱 심한 난관을 가져올지 모릅니다. 만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억한다면, 당신은 올바른 결정을 내릴 것입니다. 당신은 계속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고린도 전 6:20.
자신의 “자유” 시간을 사용함
25.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는 것 가운데에는 박해를 받을 때에 충실히 인내하는 것 외에 무엇이 또 포함됩니까?
25 그러나, 더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는 것에는 우리가 박해받을 때에 충실하게 인내하는 것만이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권고를 받고 있읍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여호와]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여호와]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골로새 3:23, 24) 따라서 우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는 것에는 모든 생활 부면, 곧 도덕,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고 일하는 방법, 아내로서의 복종, 남편의 머리 직분 행사, 부모에 대한 순종 등이 다 포함됩니다.—골로새 3:5-22.
26.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읍니까?
26 그러나 당신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고 있음을 보았을 것입니다. 심지어 어느 정도 단정하게 살아간다고 하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도 교회의 성일과 관련된 축제에서 난잡한 행동—술취함, 부도덕, 재산 파괴 행위—을 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휴가, 한가한 저녁, 주말 등의 경우에도 자기들 좋은 대로 “살”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읍니다.
27, 28. (ㄱ) 휴식을 할 때가 있기는 하지만, 참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하거나 생각지 않습니까? (ㄴ) 그들은 “자유” 시간을 어떤 훌륭한 방법으로 사용합니까?
27 균형잡힌 생활과 성격을 이루기 위해서는 휴식과 기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시간의 일부를 휴식과 즐거움을 얻는 데 사용할 수 있읍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적으로 쾌락을 위해서 살지는 않습니다. 그는 자기 생활의 특정 부분을 떼어 내어, 그 기간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릴 수 있는 “내 시간”을 만들 수 없읍니다.
28 이것이 사실임은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종들이 자기들의 “자유” 시간을 훌륭하게 사용하는 점으로 보아서 알 수 있읍니다. 그들이 행하는 즐거움을 주는 일 중에서 중요한 일은 숭배와 직접 관련이 있는 일들입니다. 그들은 자기 창조주에 관해 이야기하는 일과 그리스도인 집회에 매주 참석하는 일을 즐거워합니다. 건전한 교제를 즐기고 교훈을 받기 때문에 이러한 집회가 매우 즐겁습니다. 가족이 멀리 여행을 할 때에도 그들은 그리스도인 집회들을 계획 가운데 포함시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다른 도시 혹은 다른 나라에 사는 영적 형제 자매들 곧 새로운 벗들을 만나는 기회를 가지며, 부가적인 즐거움을 얻습니다. 왕국회관에서 약간 떨어진 위치에, 아마 숲속에서 ‘캠핑’을 하고 있을 때에는, 가족적으로 창조주에 대해 명상하고 성경 토론을 함으로써 즐거움을 얻습니다. 그리고 또한 많은 여호와의 증인들은, 매년 마련되는 그리스도인 대회에서 온전한 유익을 받을 수 있도록 휴가 기간을 그때로 정합니다.
29. “자유” 시간을 사용할 생각을 할 때에, 무엇을 고려하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까?
29 그러므로, 저녁, 주말, 휴가 등에 대해 생각할 때에 하나님과 그리스도 앞에서의 자신의 신분을 생각하십시오.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생기를 주는 일을 하도록 하십시오. “자유” 시간이 지난 다음 하나님께 봉사를 드리는 데 유용하게 사용할 힘을 얻는 것을 목표로 삼으십시오. 세상은, ‘잠시 정규적인 일을 벗어나서 잊어버리자’고 말하더라도 당신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해주신 일에 대한 인식을 나타내십시오. 당신의 양심을 교란시키고, 달리 했더라면 보람이 있고 생기를 주었을 것이라고 후회할 만한 일을 피하십시오.
30.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쾌락을 위해 생활하는 사람들에 관하여 어떤 질문이 생깁니까?
30 사실, 하나님의 종은 모든 일을 자기 창조주의 영광을 위해 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고린도 전 10:31) 비록 불완전하지만 죄의 경향을 제어하고 “죄의 종”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로마 6:16) 그러나 당신은 창조주와 그분의 아들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현재 이곳에서 자기들이 얻을 수 있는 모든 쾌락을 얻는 일을 중심으로 일상 생활을 해 나가는 사람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무엇이 결핍되어 있읍니까? 그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뚜렷이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까? 당신의 일상 생활은 미래에 대한 견해에 어떤 영향을 받습니까? 이 점을 우리는 다음 기사에서 고려하겠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