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넓힘
1.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같이 동료 인간에게 사랑을 나타내는 일에 온전하려면 무엇이 관련되어 있읍니까?
당신은 동료 인간에 대한 사랑의 표현을 넓히고 있읍니까? 당신은 사랑을 완전하게 나타내는 면에서 진보하고 있읍니까? 이것은 당신에게 호의를 가진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관대한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평판 나쁜 사람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의수히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리느니라.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누가 6:32-35.
2. 여호와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들에게 어떻게 친절과 사랑을 나타내 오셨읍니까?
2 여호와 하나님께서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 얼마나 친절을 베풀어오셨는가를 고려해 보십시오. 그들은 지상의 생명체가 살아가도록 그 분이 마련해 놓으신 여러 가지 순환으로부터 유익을 얻고 있읍니다. 그 분은 그들에게서 생존에 필요한 것들 즉 공기, 햇빛, 비를 빼앗지 않으십니다. 그 분은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십니다. (사도 17:25)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태 5:45.
3. 여호와께서 과거에 하신 일은 햇빛과 비를 주지 않으실 수 있는 그분의 능력에 대하여 무엇을 알려 줍니까?
3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의(自意)로 친절과 관대함을 나타내십니다. 창조주로서 그분은 생명에 필요한 모든 것에 대한 전적인 관리권을 가지고 계시며 선택에 의하여 자신의 선물을 거두실 수 있읍니다. 이 사실은 과거에 그분이 하신 일에서 분명히 알 수 있읍니다. ‘모세’ 시대에 그 분은 애굽인들에게 사흘 동안 햇빛을 주지 않으셨지만 동시에 ‘이스라엘’인들에게는 빛을 주셨읍니다. (출애굽 10:23) 여러 세기 후에 ‘이스라엘’인들이 여호와께 불충실하였을 때 그분은 비를 내리지 않으셨읍니다. 그는 그의 예언자 ‘아모스’를 통하여 그들에게 이렇게 상기시키셨읍니다. “또 추수하기 석달 전에 내가 너희에게 비를 멈추어 어떤 성읍에는 내리고 어떤 성읍에는 내리지 않게 하였더니 땅 한 부분은 비를 얻고 한 부분은 비를 얻지 못하여 말랐[느니라].”—아모스 4:7.
4. (ㄱ)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 생명에 필요한 것들을 왜 빼앗지 않으셨읍니까? (ㄴ) 여호와께서는 어떻게 사랑의 표현으로 생명에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시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하셨읍니까?
4 그러나 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능력이 있으신데도 악인들에게서 햇빛과 비를 빼앗지 않으셨읍니까? 왜 그분은 선물에 대한 인식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친절과 사랑을 보여 오셨읍니까? 그분은 그들에게 변화할 기회를 주기 위하여, 그분을 섬기는 길을 택할 기회를 주기 위하여 그렇게 하셨읍니다. 사실 그분은 그들이 생명에 꼭 필요한 것을 받도록 허락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해주셨읍니다. 그분은 그들을 포함한 인류가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케 될 수 있는 마련을 하셨읍니다. 자신의 큰 희생을 감수하시면서 즉 자기의 독생자를 희생하시기까지 하시면서 이 일을 하셨읍니다. (요한 3:16)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성서는 알려 줍니다. (로마 5:8) 사랑에 대한 이러한 행동은 ‘아담’이 자신과 아직 출생하지 않은 그의 후손들을 위한 완전한 인간 생명을 상실하였을 때 인류에게 임하게 된 죄의 노예 상태로부터 인류를 구속할 법적 기초가 되었읍니다.
5. 인류는 누구에게 속해 있으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5 대속(代贖)의 값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간 생명이었읍니다. 그의 생명이 그 값이므로 예수께서는 그 마련의 창안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인류의 소유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두 분이 인류를 사셨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회중, 즉 그가 그 자신의 아들의 피로 사신 것”이라는 말이 있읍니다. (사도 20:28, 신세)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계시록 5:9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셨도다.]” 단지 하나님의 회중 성원들만을 하나님께서 사신 것이 아니라는 것은 디모데 전서 2:6(새번역)에 분명히 나타나 있읍니다. 이 귀절에서는 예수께서 자신을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자신을 주신 분으로 언급되어 있읍니다. 동료 인간에 대한 당신의 사랑은 모든 인간이 참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사실에 대한 당신의 인식 때문에 계속 넓어지고 있읍니까?
6.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6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대단히 가치있는 것으로 생각하십니다. 그분은 자기 아들의 고귀한 피로 사신 사람들이 죽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곳에 있는 사람들이 진리를 배우고 그의 마련을 받아들이고 생명을 얻는 것을 그분은 원하십니다. (디모데 전 2:1-4) 그분은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사도 ‘베드로’는 기록하였읍니다.—베드로 후 3:9.
하나님을 본받음
7, 8. 우리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반영하는지의 여부를 고려하기 위하여 우리는 어떻게 자문해 볼 수 있읍니까?
7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반영합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악을 미워하시지만 그 분은 인간들을 자기의 소유로 사랑하시고 그들에게 최상의 이익이 있기만을 원하십니다. 당신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소유로 대하고 그 분의 소유권을 존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그분이 준비해 두신 축복에 참여하기를 바랍니까? 만일 우리가 인류에 대하여 하나님과 같은 견해를 갖는다면 우리가 친절과 관대함과 사랑을 나타내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한다는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8 이 문제를 더욱 검토하기 위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자문해 볼 수 있읍니다. 나는 내가 좌우할 수 있는 나의 시간과 자산과 능력을 거의 전적으로 나 자신과 나의 가족과 나의 친구들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고 있는가? 혹은 나는 불행한 환경에 있는 사람들이나 외로운 사람들을 위하여 비록 그들이 나의 마음에 그리 맞지 않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하는가?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이 고맙게 여김을 받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가? 나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아무런 보답을 바라는 일 없이 기꺼이 수고하고자 하는가? 나에게 매우 불친절했던 사람이 신체적으로 큰 곤란에 처하게 될 때 나는 어떠한 반응을 나타내는가? 나는 그를 동정하는가? 나는 그 사람을 돕고자 노력하는가? 나는 그의 집안 일, 이를테면 식사를 준비하는 일, 장보는 일, 세탁하는 일, 집안을 청소하는 일을 기꺼이 도울 것인가? 나는 그의 재정 능력이 매우 빈약하여 도저히 갚지 못할 것 같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그에게 돈을 꾸어 주려고 하는가?—출애굽 23:4, 5, 비교.
9.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가복음 14:12-14에서 지적하신 바와 같이 우리가 관대함에 있어서 하나님을 본받을 때 우리는 무엇을 확신할 수 있읍니까?
9 기대 이상으로 그리고 불행한 사람들과 당신에게 친절히 대하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도 당신이 관대함과 친절과 사랑을 나타낼 때 당신은 여호와 하나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당신은 동료 인간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넓히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인류를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사셨다는 사실과 일치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하나님께 상받을 것을 확신할 수 있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말로 그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키셨읍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평소 습관대로, 전적으로]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누가 14:12-14.
10. 친절은 불친절하고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 어떠한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읍니까?
10 더욱이, 불친절하고 사랑이 없는 정신을 나타내는 사람들에게 친절과 사랑을 가지고 대하면 그들도 자기들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할 필요성을 깨닫게 될 수 있읍니다. 로마 12:20이 이에 관하여 알리는 바에 유의하십시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불이 쇠를 녹이듯이 당신의 친절은 당신에 대한 그러한 사람의 무정한 태도를 부드럽게 할 수 있으며,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생각하고 자기가 당신을 대해 온 태도에 대하여 후회하고 감동을 받아 자기의 태도를 변화하게 될 수 있읍니다. 그리하여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눈을 뜨고 당신과 함께 참 숭배에 가담하는 단계를 밟게 될 수 있읍니다.
11. 우리가 사랑과 관대함과 친절을 나타내는 면에서 온전한가의 여부를 무엇이 결정합니까?
11 물론 우리 각자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선을 베풀 수 있는 범위는 환경의 제약을 받습니다. 신체적 면과 경제적 면 혹은 그 중 한 가지 면의 제약이 있을 수 있읍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기가 다른 사람만큼 좋은 일을 할 수 없다고 하여 실망할 필요는 없읍니다. 우리가 사랑과 관대함과 친절을 나타내는 면에서 온전한가를 결정하는 요인은 양에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관대함과 친절과 사랑의 지배적인 정신을 가지고 우리의 재능과 자산을 다른 사람들에게 격려와 축복의 근원이 되도록 온전히 사용하는 것입니다.
12.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인류 세계에 대한 책임이 그리스도인의 주된 책임입니까?
12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가족과 동료신자들에 대하여 우선적인 의무를 가지고 있읍니다. 성경은 이렇게 알려 줍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디모데 전 5:8)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찌니라.” (갈라디아 6:10) 그러므로 인류 세상의 다른 사람들을 돕고자 노력하는 한편 가족 성원들과 동료 신자들을 소홀히 하는 것은 잘못일 것입니다. 우리가 육적으로 그리고 영적 의미로 친척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대하는 방법은 친절과 사랑과 그들의 복지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내는 면에서 탁월해야 할 것입니다.
13. 어떤 사람에게 물질적인 것을 주지 않는 것이 언제 그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 될 것입니까?
13 그러나 관대함의 표현이 받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있읍니다. 일부 사람들은, 때때로 동료 그리스도인들까지도 책임감이 없고, 게으르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는데도 그 일을 기꺼이 하려고 하지 않는 수가 있읍니다. 만일 그들이 물질적 도움을 받는다면 그들은 일에 대한 그들의 그릇된 견해를 시정하도록 격려받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들의 경우에 데살로니가 후서 3:10에 있는 성서의 훈령이 적용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또한 도움받은 물질을, 하나님께서 단죄하시는 행동이나 습관을 위해 사용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사람들을 돕는 일을 마땅히 거절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어떤 일을 해 주지 않는 것이 실제로 그에 대한 사랑과 염려의 표현이 될 수 있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정신과 마음에 깊은 인상을 받아 변화할 필요를 느끼게 하고 다른 사람들이 열심히 일해서 얻은 자산을 오용하는 일이 없게 합니다.
왕국을 전파하고 제자를 삼는 중요한 일
14. 영적 도움을 베푸는 것이 왜 특히 오늘날 긴급합니까?
14 물질적으로 주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이 영적인 면으로 베풀 수 있는 도움입니다. 특히 오늘날 이것은 생사가 관련된 중요한 일입니다. 어떻게 그러합니까? 성서 예언과 그 예언대로 성취되는 실제 사건들은 1914년 이래 현 세대가 “마지막 때”에 살고 있음을 증명합니다. (마태 24:3-14, 32-34; 누가 21:25, 26; 디모데 후 3:1-5; 계시 6:2-8)a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의 헌신한 제자로서 그분의 종들이 아닌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생명을 상실할 위험에 처하여 있음을 의미합니다.
15. 오늘날 사람들의 입장은 전에 하나님의 심판 기간 중에 집행을 당한 사람들의 입장과 어떠한 면에서 다릅니까?
15 어느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든지 이 위험성을 알릴 필요가 있읍니다. 그들의 입장은 이전에 하나님의 심판 기간 중에 집행을 당한 사람들의 입장과 다릅니다. 예를 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벨론’인들을 사용하여 불충실한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심판을 집행하셨을 때 죽은 수천명은 심판 집행을 당하지 않았더라도 결국은 죽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죽음은 완전한 멸절을 의미하지 않았읍니다. 그러나 현세대에 하나님을 알기를 거절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좋은 소식”을 청종하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에게 표현되는 심판은 최종적입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알려 줍니다.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데살로니가 후 1:9) “저희는 영벌[영원한 끊어짐, 신세]에 ··· 들어 가리라.” (마태 25:46) 그 멸망을 생존한 자들은 몇년 더 살다가 죽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 앞에는 질병과 슬픔과 고통이 없는 영원한 생명의 전망이 놓여 있읍니다.—계시 7:14-17; 21:3-5.
16.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시대에 불충실한 ‘유다’와 ‘예루살렘’에게 심판을 집행하시기 전에 어떻게 하셨읍니까?
16 당면한 위험을 고려할 때 오늘날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이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의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정확한 지식과 일치하게 생활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합당한 존경을 표시하는 행동일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인들이 와서 ‘예루살렘’을 멸망하고 ‘유다’ 땅을 황폐시키도록 허락하시기 전에 그들에게 경고의 소식이 전달되게 하셨읍니다. 그분은 경고를 청종한 사람들이 몇년간을 더 살도록 배려하셨읍니다. 그분은 전쟁의 결과 혹은 영향으로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끔찍한 죽임을 당하는 일을 피하기를 바라셨읍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예언자 ‘에스겔’에게 무거운 책임을 주셨읍니다.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에스겔 3:17-19.
17. ‘에스겔’이 받은 사명은 전파하고 제자를 삼아야 할 우리의 사명에 대하여 무엇을 인식하도록 도움이 되게 해야 합니까?
17 오늘날 사람들이 훨씬 더 큰 위험에 처하여 있음을 고려할 때 우리는 사람들의 생명에 대한 우리의 책임이 ‘에스겔’ 시대보다 줄어 들었다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까? 분명히 그렇지 않습니다! 천구백여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여하신 전파하고 제자를 삼으라는 사명은 “사물의 제도의 결말”까지 계속 유효하게 되어 있었읍니다. (마태 28:19, 20, 신세) 당신은 이 사명을 수행해야 할 당신의 책임을 예리하게 느낍니까?
18. 경고가 발해지게 하려는 하나님의 목적은 왜 개인들의 불충실로 인하여 실패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까?
18 이것은 당신 개인이 임무를 수행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영원히 멸망될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그 일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개인들의 마음을 여시며 그분의 “동역자”가 되는 것은 우리의 웅대한 특권입니다. (사도 16:14; 고린도 전 3:9) 경고를 발하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돌로 소리치게’ 하실 수도 있읍니다. (누가 19:40) 그러므로 어떤 개인이 이행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현 사물의 제도의 멸망 전에 그 분이 원하시는 정도로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할 하나님의 목적이 방해를 받을 수는 없읍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은 하나의 단체로서 경고를 발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분과 동료 인간에 대한 그들의 사랑은 강하기 때문에 그들은 너무 늦기 전에 사람들이 구원의 길을 발견하도록 돕습니다. 그들은 기꺼이 그들 개인 생활을 심지어는 그들의 환경을 조절하여 이 일을 수행합니다. 결코 돌들이 외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19. 왜 불충실한 사람들은 유혈죄를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까?
19 그러나 이것은 동료 인간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염려를 나타내지 않는 개인들이 유혈죄에서 벗어나게 될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설명한다면, 만일 아버지가 자녀를 돌보는 일을 등한히 하여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면, 어떤 다른 사람이 그 자녀를 죽음에서 구출하였을지라도, 아버지는 죄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종이라고 공언하면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자기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사람은 죄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사랑이 없고 염려하지 않는 태도는 살인과 동등할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얼마의 전파 활동을 하였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변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나태한 정도를 아시며 그에 따라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로마 14:12.
20. 지금은 왜 명목상의 봉사를 할 때가 아닙니까? 설명하십시오.
20 지금은 누구나 단순히 명목상의 봉사로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려고 하거나 사람들을 위하여 시간을 낼 수 없을 정도로 생활의 염려에 빠지거나 사업에 바쁠 때가 아닙니다. 인류 사상 최대의 구명(救命) 사업은 급속도로 그 끝에 이르고 있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희생적이 되어 개인적 쾌락이나 욕망을 제쳐놓는 것이 올바르지 않습니까? 그것이 사람들이 재난을 당할 때에 하는 일이 아닙니까? 그들은 시계가 그들의 구조 사업을 지배하게 하지 않고 필요한 한 그리고 그들이 이치적인 분량의 힘이 있는 한 최선의 노력을 계속 기울입니다.
21. 우리가 왕국 전파에 대하여 느끼는 바에 관하여 어떠한 질문을 해 볼 수 있읍니까?
21 당신도 왕국을 전파하는 중요한 일에 대하여 그와 같이 느낍니까? 당신이 사람들의 가정을 방문할 때 휴식과 활력의 회복 및 당신의 다른 성경적 의무를 이행할 필요성을 망각하지 않으면서도 당신으로 하여금 이치적으로 가능한 한 계속하도록 당신의 마음에 감동을 줍니까? 아니면 봉사를 빨리 마치고 어떤 형태의 오락이나 기분 전환을 할 것을 고대합니까? 또한 당신은 학교에서, 직장에서 혹은 다른 일로 만나는 사람들에게 진리에 대하여 이야기하도록 기회를 사용합니까? 당신은 성서의 소식을 친척들과 친지들에게 전하는 데 진정한 관심을 가지고 있읍니까? 당신은 또한 입의 말보다 훌륭한 행실로 증거하는 것이 더 나은 때가 언제인가를 분별하는 데 기민합니까?
22. 제자를 삼는 일에는 무엇이 포함되어 있읍니까?
22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사명은 단순히 하나님의 진리를 전파 혹은 선포하는 문제만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그 분의 제자가 되도록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당신은 관심을 나타내는 사람들을 다시 방문해서 그들과 가정 성서 연구를 시작하려고 합리적인 노력을 합니까? 사람들은 성서의 내용만이 아니라 그것에 일치하게 생활하는 방법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진리를 가르치는 데 최선을 다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읍니다.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사도 20:26, 27) 당신도 ‘바울’과 같이 당신이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 중요한 면에 대하여 부족함이 없고 당신이 가르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지 확실하게 합니까? 확실히 우리는 다른 사람이 알 필요가 있는 지식을 알려주지 않음으로 그 사람이 범죄하는 데 공헌하기를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23. 고린도 후서 3:2, 3을 사용하여,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과 적절한 가르침의 좋은 영향에 대하여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를 설명하십시오.
23 또한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가르치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염려와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과 동료 일군들에 관하여 ‘고린도’인들에게 이렇게 편지하였읍니다.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고린도 후 3:2, 3) 우리가 가르치는 사람들에 대하여 깊은 사랑과 염려를 가질 때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은 우리의 마음에 쓴 ‘편지’와 같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의 도움에 의존하고 우리의 능력 한계 내에서 최선을 다할 때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마음에 쓴 그리스도의 편지와 같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대한 하나님의 영의 영향은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 성품을 나타내도록 그들을 움직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관찰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그러한 ‘편지들’을 생산해 내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읍니까?
24. 여호와의 종으로서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을 줄 수 있읍니까?
24 당신이 여호와 하나님의 종으로서 한 일들을 생각해 보면 당신은 틀림없이 많은 즐거움을 상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당신은 더 잘 했더라면 하고 생각하고 향상시킬 여지가 있음을 느끼고 있을지 모릅니다. 당신이 살아있는 ‘편지’를 하나도 명확히 지적할 수 없기 때문에 때때로 침울감을 느끼는 일까지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전파하고 가르치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였다면 당신은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전념을 기울인 봉사를 기뻐하실 것을 확신할 수 있읍니다. 우리가 영적 “어린 아이”였을 때보다 지금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더욱 예리하게 느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반면에 만일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이 다소 이기적이었다면 그들은 친절과 관대함과 동료 인간에 대한 사랑을 보이는 면에서 온전함을 넓히는 일을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하여 가지신 사랑과 일치하게 행동하므로 하나님의 신원의 날이 왔을 때 보호를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각주]
a 기원 1914년 이후 기간이 이 제도의 “마지막 날”임을 확증하는 세부점을 알려면 「참다운 평화와 안전—그 근원은 무엇인가?」(영문)라는 책 73-89면을 참조하라.
[260면 삽화]
‘에스겔’이 ‘예루살렘’ 멸망 전에 하나님의 경고를 발한 것과 같이 예수의 제자들은 오늘날 사람들이 직면하고 있는 훨씬 더 큰 위험에 대하여 경고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