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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생활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파수대—1985 | 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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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생활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제발 저를 도와 주세요. 제 남편은 저를 학대하고 저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읍니다. 호소할 사람도 없읍니다. 제게는 한살 난 아들 아이 외엔 아무도 없읍니다. 제 남편은 완전히 난폭한 기질이 되어 버렸고 제 팔은 종종 그의 구타로 인해서 시퍼렇게 멍들곤 합니다. 2주 전엔 그가 제 코를 들이받아서 코피를 지독히 흘렸읍니다. 그 후 어느 날 잠자리에서, 그는 저를 질식시키기 시작했죠. 그리고 제가 기절한 후에야 자기가 한 일을 깨달은 것이었읍니다. 수일 동안 저는 무엇이든 삼키는 것이 어려웠어요. ···
“제 남편은 집에서 고함을 지르고 물건을 부수고 아기를 겁에 질리게 합니다. 어느 날 밤 남편이 저를 마루에 때려 눕히자, 아기가 겁을 먹고 큰 소리로 울었지만 저는 상처를 입은데다 너무 겁에 질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읍니다. ··· 저는 그에게 이혼하고 싶다고 말했어요. 이제는 떠나고 싶다는 말도 감히 못합니다. 그러면 또 시작할 테니까요. 저나 아들 아이의 생명이 위태롭게 될까봐 두려워요.”—‘에린 프리지’ 저, 「조용히 소리 지르라, 그렇지 않으면 이웃에 들릴 것이다」(Scream Quietly or the Neighbours Will Hear)에서.
이례적인 경우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추산에 의하면, 미국에서만도 해마다 약 180만명의 아내들이 남편에게 구타당한다. 즉 발길질당하고 물어 뜯기고 주먹으로 맞고 물건으로 얻어 맞고 칼이나 총으로 위협을 당하거나 공격을 받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자녀에 대한 성적 학대와 감정적 무관심, 부모나 조부모 학대 등이 있다. 그리고 상황은 더욱 통탄스러워지고 있다. 이로 인해 이와 같은 질문이 생긴다. 가정 생활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독자가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있다. ‘내가 왜?’라고 물을지 모른다. ‘내 가정에는 그런 일이 없다고 보증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독자는 그러한 가정 문제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왜? 성서는 오래 전에, 그러한 가정 혼란의 만연 상태가 현 세상의 전체 사물의 제도의 “마지막 날”에 살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의 일부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기 때문이다.a 사도 ‘바울’이 이처럼 예언한 바에 유의하라. “이것을 알라. 말세[마지막 날, 신세]에 고통하는 때[처신하기 어려운 위험한 때, 신세]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불충성스러우며, 신세] 무정[혈육간의 애정이 없(을 것이요), 신세][하리라.]”—디모데 후 3:1-3.
‘바울’의 말은 참으로 오늘날 성취되고 있는가? 그러한 가정 불화의 범위는 정확히 어느 정도인가? 그것은 ‘바울’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음을 뒷받침함으로 우리가 참으로 “마지막 날”에 살고 있음을 알려 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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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위험한 때”—우리의 가정은 어떠한 영향을 받고 있는가?파수대—1985 | 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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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위험한 때”—우리의 가정은 어떠한 영향을 받고 있는가?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작사가인 ‘존 하워드 패인’은 그렇게 읊었다. 그러나 그것은 160년 전의 일이다. 오늘의 세상에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즐거운 나의 집”은 흔히 싸움터가 되고 있다. 가족 내에서 마땅히 찾아볼 수 있어야 할 혈육간의 사랑과 애정을 볼 수 없는 가정이 너무도 많다. 그러나 왜? 우리 시대의 이런 가정 문제들에는 과연 독특한 점이 있는가?
20세기의 가정
이전 세기들에는 가정은 흔히 경제적 생산 단위였다. 즉, 모두—부모와 자녀들—는 집을 짓는 일, 가구를 만드는 일, 밭을 경작하는 일, 가축을 돌보는 일을 협동하여 행하였다. (창세 37:2; 잠언 31:16) 그러나 산업 혁명이 시작되면서, 사정은 변했다.
특히 서구 국가들이 더욱 산업화됨에 따라 많은 가족들은 공장 일을 찾아서 도시로 이주했다. 이제 사람들은 매일 가정을 떠나 일하러 가야 했다. 가족들이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점점 더 줄어들게 되었다. 옷이나 가구와 같은 물건들은 만드는 대신, 구입하게 되었다. 「가정, 사회 그리고 개인」(The Family, Society, and the Individual)이란 책이 이처럼 기술한 바와 같다.
“이러한 변화들은 예상대로, ··· 가정 생활에 ··· 현저한 영향을 끼쳐 왔다. 가정은 더 이상 경제적 단위로서 아무 것도 생산하지 못한다. 의무 교육 법안과 미성년 근로법이 통과된 이래, 자녀들은 자산이 아니라 경제적인 부담이 되었다.” 자녀 양육 방식에 어떤 영향이 미치게 되었는가? “가족 집단의 가장의 자질이 변했다. 그리고 징계와 권위에 대한 존경은 건전한 생활의 기초가 못 되는 가치가 적은 것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20세기의 가정은 독특한, 어떤 경우에는 더 큰 긴장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서구 세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식민지화와 그로 인한 산업화는 소위 제삼세계 국가들에서도 전통적인 가족의 역할을 뒤집어 놓았다. 어떤 경우에 아내들은 동반자로서 간주되지 못하는 것을 분개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프리카’에 사는 한 아내는 이처럼 한탄했다. “도대체 왜 남자들은 우리만 짐을 나르게 합니까? 나는 어깨에 괭이를 메고 등엔 아이를 업고 밭에 나갑니다. 남편은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않습니다. 돌아올 때는 나는 괭이와 아이 그리고 머리에는 큰 물동이를 이고 옵니다. 여전히 남편에게는 아무 짐도 없읍니다. 돈은 술마시는 데 쓰면서, 아내나 자녀들에겐 안 씁니다. 아내들은 일을 함께 하지요. 아니 더 많이 할겁니다. 하지만 남편은 돈은 자기 것이라며 전부 가져갑니다. 자기가 벌었다는 겁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다.”
20세기의 가정은 역사상 이전엔 전혀 경험하지 못한 그 무엇인가의 강한 영향을 받아왔다. 바로 ‘텔레비젼’이다. 추산에 의하면 청소년이 18세가 될 때까지는 약 15,000시간이나 ‘텔레비젼’을 시청하게 된다고 한다. 그에 비해 교실에서 보내는 시간은 약 11,000시간이라고 한다. 14세가 될 때까지는, 미국 아이들은 평균 TV 화면에서 약 18,000명 가량이 죽는 장면을 구경한다고 한다. 어떤 영향이 있는가? ‘M. S. 밀러’ 저 「어린이 압박감!」(Childstress!)이라는 책은 이렇게 대답한다. “많은 심리학자들과 판사들은 청소년들이 폭력을 열심히 흉내내는 것에 대해서 ‘텔레비젼’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홉살된 아이가 장난감 권총으로 ‘뉴우요오크’ 시의 어느 은행에서 백 ‘달러’를 강탈하면서, ‘TV에서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가정 조정자」(The Family Coordinator)란 잡지는 이렇게 부언한다. “이러한 노출이 청소년에 주는 직접적 영향은 실제 관찰에 의해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많은 가치 기준이 그 매체에서 생생히 묘사되므로, 청소년의 생활과 훗날의 생활 방식에 반드시 어떤 강한 영향을 줄 것임에는 분명하다.”
의문의 여지없이, 20세기의 가정은 역사상 전에 결코 겪지 못한 긴장과 영향을 받게 만드는 매우 독특한 생활 조건을 경험해 왔다. 그러나 이런 결과로 인해서 생긴 가정 문제들은 실로 우리가 “마지막 날”에 살고 있음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될 만한가?
사도 ‘바울’은 놀라리만큼 자세하게 “마지막 날”은 “처신하기 어려운 위험한 때”로 특징지워질 것이라고 예언했다.a 이러한 “위험한 때”가 가정 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어떠할 것인가? ‘바울’은 이처럼 대답한다. “사람들은 ···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불충성스러우며, 신세] 무정[혈육간의 애정이 없(을 것이요), 신세][하리라.]”—디모데 후 3:1-3.
‘부모를 거역함’
자녀들은 부모의 혈육이요, 셀 수 없는 축복을 부모에게 빚지고 있다. 청소년들이 부모가 받기에 합당한 영예나 존경, 관심을 부모에게 나타내지 않을 때 그것은 충격적인 논평거리가 된다. 한 성서 학자가 이렇게 말한 바와 같다. “청소년이 노인에 대한 존경심이 전혀 없고, 생명을 준 부모에게 지고 있는 헤아릴 수 없는 빚과 기본적인 의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극도로 쇠퇴하는 문명의 표징이 된다.” 과연 20세기의 가정이 그러한가?
“나는 내 아이가 두려워요” 하고 한 어머니는 부모에 대한 자녀의 반항의 증거들 가운데 가장 침울케 하는 것—부모 학대—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한탄했다. 한번은 난폭하게 울화를 터뜨리면서 이 여인의 17세된 아들은 사정 없이 걷어차서 어머니의 어깨 관절을 삐게 하였다. 부모에 대한 그러한 폭력은 과연 어느 정도나 보편화되었는가? 미국에서의 가정 폭력에 관한 조사 결과를 보고하는 가운데 「잠겨진 문 뒤에서」(Behind Closed Doors)라는 책은 이렇게 기술했다. “매년 삼세에서 십 칠세 사이의 어린이 세명 중 한명은 자기 부모를 때린다.” 자녀가 부모에게 손찌검을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엄청나게 존경심이 결핍된 것이 아니겠는가?—비교 에베소 6:1-3.
자녀들은 보다 덜 폭력적인 방법으로도 부모에게 반항하고 있다. 1960년대의 ‘히피’ 옷차림과 긴 머리가 그 일례이다. 그러나 성인들이 이런 경향을 본뜨자 청소년들은 새로운 반항 방법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린이 압박감!」이라는 책은 이처럼 설명한다. “모든 창의 재능에 의해서, 시험으로 확증된 반항 수단들—마약, 음주, 무단 결석, 가출—이 격렬해지고 있다. 조부모의 세대가 이처럼 외칠 정도이다. ‘나는 요즈음 세대 같아선 정말 애들을 키우고 싶지 않습니다.’”
어린 자녀들만 자기 부모에게 드려야 할 사랑과 존경을 나타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또 다른 집단이 있다. 연로한 사람들을 학대하는 성인들이다. 어떤 방식으로 학대하는가? 「오늘의 심리학」(Psychology Today)은 이렇게 설명한다. “노인 학대는 신체적인 것, 착취하는 것(예, 부모의 저금을 몰수하는 일), 냉담한 것(음식이나 약물 치료를 베풀지 않는 것), 또한 심리적인 것(욕설)일 수 있다. 학대자들은 또한, 부모가 학대에 대해 불평하면 종종 부모를 거리로 내쫓거나 정신 병원 혹은 요양소에 맡기겠다고 위협한다.”
많은 성인 자녀들이 연로한 부모에 대한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특히 통탄할 일이다. 예를 들면 ‘F. 아이반 나이’는 「결혼 생활과 가정지」(Journal of Marriage and the Family)에 발표된 한 조사서에서 이처럼 기술했다. “[이 조사 연구에서] 과반수의 응답자들은 친척들과 계속 접촉하면서 재정적으로 위급할 때 조력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인정하지만, 30‘퍼센트’ 이상은 그런 의무(재정적인)가 있다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사람들을 강력히 비난하는 사람들은 남녀 중에서 40‘퍼센트’도 못 되었다.” 이로 인해서 ‘나이’ 씨는 “친족 관계”는 “표준 구조에서 점점 사라져 가는 과정에 있으며 아마도 임의적 가족 기능이 되고 말”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것은 “극도로 쇠퇴하는 문명의 표징”이 아닌가?—비교 디모데 전 5:3-8.
모든 자녀들이 부모의 권위를 업신여기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부모에 대한 청소년의 반항 기록은 만연해 있어서, 사도 ‘바울’이 예언한 것이 오늘날 적중하고 있음을 의문의 여지없이 확증해 준다. “사람들은 ···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불충성스러(울 것이요), 신세][하리라.]”
‘혈육간의 애정이 없음’
“처신하기 어려운” 현 시대의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자녀들만이 아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은 예언도 하였다. “사람들은 ··· 무정[혈육간의 애정이 없(을 것이요.), 신세][하리라.]”—디모데 후 3:2, 3.
여러 집단들 가운데 가족이, 자신을 가장 지원해 주는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즐거운 나의 집”은 사랑—배우자와 자녀에 대한 사랑의 분위기를 발산해야 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혈육간의 애정”b의 결핍이 “마지막 날”의 특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의 말이 참되게도 너무도 많은 경우에 “즐거운 나의 집”은 “즐거운” 것과는 거리가 멀다. 어떻게 그러한가?
전 기사에서 우리는 혈육간의 애정이 놀라리만큼 결핍된 것, 곧 아내 학대가 만연해 있음에 유의했다. 확실히 발길질당하고, 주먹으로 맞고, 다른 방법으로 학대받아야 할 아내는 없다. 남편들이 아내를 “제 몸 같이” 사랑하라—이것이 혈육간의 애정이다!—는 성경의 권고와는 얼마나 거리가 먼가! 아내 구타는 그런 것이 결코 아니다!—에베소 5:28-33.
아마 훨씬 더 놀라운 것은 남편을 구타하는 경우로 보고된 건수들이다. 어떤 남편은 “항상 상처와 멍투성”이였는데, 그것은 “병적인 흥분과 외마디를 지르며 터뜨리는 울화, 악의적인 신체적 폭행으로 남편을 괴롭혀” 온 그의 아내가 입힌 것이다. 얼마의 사회학자들은 미국에서만도 매년 약 282,000명의 남자들이 아내에게 구타당한다고 추산한다. 이것 역시 20세기의 많은 가정에서 혈육간의 애정이 결핍되어 있다는 충격적인 예가 아닌가?—비교 에베소 5:22-24, 33.
그러한 보도만큼이나 침울케 하며,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자녀 학대가 늘어가고 있다는 보도이다. 다음과 같은 표제들을 읽는 것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학대받은 아이가 성인이 되어 이야기하는 상처.”
“여인이 네 자녀가 잠들었을 때 익사시켰음을 자백.”
“어린이 학대, 사망률이 ‘덴버’ 시와 주에서 치솟다.”
“자녀에 대한 무관심이 ‘영국의 사랑의 ‘이미지’를 망치고 있다.’”
더 소름끼치는 예들은 독자를 위해 접어 둔다.
그러한 자녀 학대는 과연 얼마나 만연해 있는가? 가정 폭력에 관해 조사 결과를 보도하면서 「잠겨진 문 뒤에서」란 책의 추산에 의하면 “[미국에서] 310만 내지 400만의 자녀들이 생활하는 가운데 언젠가 부모에게 발길질당하거나, 물어뜯기거나, 주먹으로 구타당했다. ··· 3세 내지 17세 사이 자녀 90만 내지 180만명이 언젠가 부모가 총기나 칼을 그들에게 들이대는 일을 겪었다.”
자녀들 특히 유아들이 함부로 다루기 쉽고 때때로 보채는 것은 사실이지만, 확실히 학대받는 것—신체적으로, 감정적으로 어떤 면으로든지—이 당연한 자녀는 없다. 결국 성서가 이렇게 말하는 바와 같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시 127:3.
20세기의 가정이 인간 역사상 이전에 전혀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압력 및 긴장 요소들로 에워싸여져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U. S. 뉴우스 앤드 워얼드 리포오트」지는 이처럼 기술한다. “가정 불화가 왜 급증하는가? ‘뉴우요오크’ 의과 대학 ‘웨스트 체스터 의료 센터’의 정신병 학자인 ‘버트란드 뉴우’ 박사는 일신상의 좌절과 경제적 좌절, ‘알코올’ 중독, 그리고 현대 사회가 많은 가정들에 가하는 더 큰 긴장 요소들을 열거한다.”—‘고딕’체로는 본지에서.
이러한 가정 불화의 급증은 “마지막 날”임을 증거하는 복합적 표징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앞으로 나올 「파수대」지 다음 호들에선 디모데 후서 3:1-5에 있는 ‘바울’의 말의 다른 부면들을 상세히 논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자녀들이 부모의 권위에 대해 반항하는 것, 혈육간의 애정의 쇠퇴에 대한 보도들은 ‘바울’이 예언한 대로, 우리가 현 사물의 제도의 “마지막 날”에 살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의 일부가 될 만큼 만연해 있다.
실로 우리는 “처신하기 어려운 위험한 때”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이 “위험한 때”로 인해서 우리의 가정의 행복이 침해될 필요는 없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성서에 실용적인 지침들을 마련해 놓으셨다. 그것들을 따르기만 하면 지금도 행복하고 성공적인 가정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그 교훈들을 밀접히 따른다면, 우리의 가정도 임박한, 하나님께서 만드실 의로운 새 질서에서 영원한 생명을 즐기게 될 행복한 가정들 가운데 끼게 될 것이다.—베드로 후 3:13; 잠언 3: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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