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목적에 일치시킴으로써 얻을 생존과 생명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목적, 신세]과 ··· 은혜[과분한 친절, 신세]대로 하심이라.”—디모데 후 1:8, 9.
1. 무엇이 현재 인류를 부르고 있으며, 거기에 호응한 사람들은 어떠한 인생의 목적을 가지게 되었읍니까?
언뜻 생각하기에는 그것이 너무나 좋아서 사실일 수 없을 것 같지만 충분한 능력을 가진 분이 마련한 웅대한 장래가 현재 인류를 초대하여 부르고 있읍니다.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온갖 선전에도 불구하고 예리한 귀를 가진 많은 사람들은 이 부름을 듣고 거기에 호응하였읍니다. 그들은 그렇게 한 것을 기뻐하고 있읍니다. 이제 그들은 인생에 있어서 가치 있는 것을 갖게 되었읍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인생의 목적을 알려줍니다. 그렇습니다. 찬란한 희망이 실현되는 것을 보기 위해 계속 살아서 생존할 참다운 이유를 갖게 합니다. 이제 그들에게 있어서 인생이란 단조롭고 목적이 없는 것, 죽음이라는 막다른 골목을 향해 가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다가오는 의로운 새 사물의 제도를 위하여 살고 있읍니다.
2. 이것은 무슨 종류의 부름이며, 왜 그것을 받아들이면 실망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까?
2 많은 사람들은 그들 나름 대로 어떤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부름은 다릅니다. 이 부름은 단순히 어떤 사람에게 특정한 행동을 하도록 자극하는 강력한 내적 충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순히 어떤 강력한 종교적 충동, 곧 어떤 종교적 봉사를 천직으로 삼고자 하는 충동과 같은 신성한 영향을 확신하는 어떤 충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본인도 자세히 묘사하지 못하는 내적 자극, 한 사람은 가지고 있고 다른 사람은 가지고 있지 않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설명할 수 없고 흔히 감상적이기까지한 그러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이 부름 곧 초대는 구체적인 말로 설명되어 있으며, 사람들은 그것이 자기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기 앞에 열려져 있음을 알고 있읍니다. 그것은 단순히 훌륭한 기회가 있는 장래에 대한 매력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고, 그것은 권위와 책임이 있는 어떤 분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름을 받은 것은 상상적인 것이 아니라 충분히 보증이 있는 것입니다. 이 훌륭한 부름에 응하면 실망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3. 초대는 보통 무엇의 표현이며, 이 점은 오늘날 초대를 하시는 분의 경우에 어떻게 사실입니까?
3 무엇 때문에 이 부름 곧 초대는 그렇게 특별합니까? 대부분의 경우, 초대는 관대함과 호의를 나타내는 행동입니다. 그 배후에는 좋은 목적이 있읍니다. 사물을 올바로 인식할 줄 아는 그 많은 사람들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오늘날 받아들이고 있는 그 특정한 초대도 그러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초대한 도량이 넓은 분은 바로 오래 전에 인류가 영원히 즐기도록 지상에 낙원을 만드신 분입니다. 그 일은 지구상에 인간이 존재를 시작했던 초기의 일이었읍니다. 그분이 그렇게 한 것은 커다란 호의가 아니었읍니까? 그것은 그분에게서 기대할 만한 일이었읍니다. 그분은 다른 분이 아니라 하나님 곧 천지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사람을 이 지구상에 살게 하신 분이며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부족함이 없이 마련해 주신 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과분한 친절을 베푸신 것이었으며,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계셨읍니다. 그것은 좋은 목적이었읍니다.
4, 5.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두번째 편지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목적과 과분한 친절이 관련되어 있음을 어떻게 설명하였읍니까?
4 하나님께서 탁월한 목표를 달성하시는 데 있어서 목적과 과분한 친절이 어떻게 관련되는가에 대해, 통용 기원 제1세기에 어느 좋은 소식의 전달자가 우리의 주의를 이끌었읍니다. 그는 ‘바울’이라는 사람으로서 자기의 친한 벗이자 동료 일군인 ‘디모데’에게 두 통의 편지를 쓴 사람이었읍니다. ‘바울’이 쓴 이 두통의 편지가 성서 뒷부분에 보존되어 있읍니다. 그가 두번째 편지를 쓴 것은 ‘로마’ 제국의 ‘네로’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한 직후였읍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참 그리스도교를 위하여 ‘로마’에 감금되어 있었읍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입장에 대하여 하나님께나 참 그리스도교의 창시자이며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불평하지 않았읍니다. ‘바울’은 자기의 감금 상태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이렇게 썼읍니다.
5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목적, 신세]과 ··· 은혜[과분한 친절, 신세]대로 하심이라.”—디모데 후 1:8, 9.
6, 7. ‘바울’의 부름은 특정한 행동 혹은 임무를 행하도록 하는 강력한 내적 충동의 형태였읍니까, 아니면 무엇이었읍니까?
6 이상과 같은 말로, 사도 ‘바울’은, 자신이 거룩한 부름으로 부름받은 것은, 자기 행위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과 과분한 친절’에 의한 것임을 인정하였읍니다. ‘디모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읍니다. ‘바울’과 ‘디모데’의 경우에 있어서 그 부름은 특정한 행동 혹은 임무에 대한 강력한 내적 충동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았읍니다. ‘바울’은 부활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직접 부름을 받았읍니다. ‘수리아 다메섹’으로 가던 ‘바울’에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셔서 그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다메섹’에서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읍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침례를 받은 다음, 즉시 부름을 받고 지시받은 일을 하기 시작하였읍니다. (사도 9:1-30; 22:1-16) 그러므로, ‘가이사랴’의 ‘로마’ 법정에서 ‘헤롯 아그립바’ 왕에게 증언하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7 “그러므로 ‘아그립바’ 왕이시여, 나는 하늘로부터 오는 환상을 거스리지 않고 먼저는 ‘다메섹’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음은 ‘예루살렘’과 ‘유대’ 온 지방 사람들에게, 나아가서는 이방 사람들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고 전했읍니다.”—사도 26:12-20, 새번역.
8. 사도 ‘바울’은 ‘디모데’의 부름에 어떤 역할을 하였읍니까?
8 ‘디모데’의 경우도, 하나님의 힘을 받고 있다고 확신하는 단순한 내적 충동의 형태로 부름 곧 초대를 받은 것이 아니었읍니다. 거기에는 감상적인 것이 전연 없었읍니다. ‘디모데’는 사도 ‘바울’이 ‘루스드라’ 회중에서 전도하는 것을 듣고 왕국 소식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인으로서 침례를 받았읍니다. (사도 14:6-23)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안수하여 영의 선물을 전해 줌으로써 그리스도인 부름을 확인하였읍니다. 그래서 ‘디모데’에게 쓴 마지막 편지에서 ‘바울’은 “내 안수를 통하여 그대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을 불일듯 일으키”기 위하여 그를 깨우친다고 말하였읍니다. (디모데 후 1:6, 새번역) 침례받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부름에 응하였기 때문에 ‘디모데’는 선교 사업에서 사도 ‘바울’의 신뢰받은 친밀한 동료가 되었읍니다. ‘바울’과 ‘디모데’는 하나님의 영을 받고 그 증거를 봄으로써 자기들이 하나님의 목적과 과분한 친절에 의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읍니다.
9, 10. (ㄱ) 부름을 받았음을 아는 것 자체가 ‘바울’의 생애에 무엇을 부여하였읍니까? (ㄴ) 따라서, ‘바울’은 자기가 무슨 경기를 하는 것같이, 무엇에 자기 눈을 고정시켰읍니까?
9 어떤 사람이 부름 곧 초대를 받았다는 것을 확정적으로 아는 것 자체가 인생에 있어서의 목적을 부여합니다. ‘바울’은 두 번째 편지에서 ‘디모데’에게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목적, 신세]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를 잘 따랐다고 말하였을 때 그 사실을 지적한 것입니다. (디모데 후 3:10, 신세) ‘바울’은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오래 참음으로 인내하였고 그러한 생활 행로에 고착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목적을 똑바로 바라보았읍니다. 그는 목적(目的)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처럼 “눈의 표적”을 가지고 있었읍니다. 그는 자신을 경주자로 비유하여, 승리자에게 상을 주는 목적지에 자기의 눈을 고정시키고 있다고 하였읍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 대하여 이렇게 썼읍니다.
10 “다만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는 것 뿐입니다. 그것을 얻게 하시려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잡으셨읍니다. 형제들이여, 나는 아직 그것을 잡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한 가지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온 몸을 앞으로 기울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 향하여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얻으려고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 뿐입니다.”—빌립보 3:12-14, 새번역.
11. (ㄱ)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 생활 행로를 무엇에 일치시켰읍니까? (ㄴ) ‘바울’은 자기 앞에 놓인 상을 어떻게 여겼읍니까?
11 사도 ‘바울’의 이런 말을 보면, 그를 부르신 분은 하나님으로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름은 목적이 있었읍니다. ‘바울’은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이러한 과분한 친절을 인식하고 자기의 생활 행로를 하나님의 목적에 일치시켰읍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 앞에 목표를 정해 주셨기 때문에 어느 길로 가야 할 것인가를 명백히 알고 있었읍니다. 만일 그가 그 목표에 성공적으로 도달한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을 것이었읍니다. ‘바울’은 그 상을 비웃지 않았읍니다. 그것을 비웃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과분한 친절을 거절하는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감탄할 만한 상이었으며, 그것은 하나님께서 비상하게 관대하시고 도량이 넓으심을 나타내는 것이었읍니다. 그것은 사실상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에게 주실 수 있는 가장 높고 가장 큰 상으로서 하늘의 왕국에서 영화롭게 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합동 후사가 되는 것이었읍니다. (빌립보 3:7-11; 2:9-11) ‘바울’이 자기에게 이득이 될 만한 지상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던 것도 당연합니다! 그는 자기 눈을 그 상에 고착시켰던 것입니다.
지금 일치시켜야 할 하나님의 목적
12, 13. (ㄱ) 지난 19세기 동안 ‘바울’과 같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활을 무엇에 일치시켰읍니까? (ㄴ) 근년에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무엇을 자기들의 목표로 삼았읍니까?
12 지난 19세기 동안 사도 ‘바울’과 ‘디모데’와 같은 사람들은 자기 생활을 천적 희망 곧 인류에게 축복을 내려 줄 하늘 왕국에서 드높여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할 하나님의 부름에 일치시켜 왔읍니다. 그 사람들은 “그의 나라와 영광에로 여러분을 부르시는 하나님께 합당한 생활을 하게 하려는” ‘바울’의 권면과 격려를 따랐읍니다.—데살로니가 전 2:11, 12, 새번역.
13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왕국 반열에 대하여만 목적을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라 그 하늘 왕국 아래서 행복하게 살 인류에 대하여도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전체적 인류를 자기의 목적 밖으로 내어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은 기쁜 일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인류 앞에 놓아 두신 것, 하나님께서 현재 특별한 주의를 불러 일으키고 계시는 것은, 인류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아래서 얻을 만한 웅대한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 인식이 좋은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얻으려고 노력하는 목표가 되었읍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손짓하는 상과 같으며, 나아와서 참여하도록 권고하는 고귀한 것과 같습니다.
14. (ㄱ) 계시록 22:17에 친절한 초대의 말이 어떻게 나타나 있읍니까? (ㄴ) 이 초대에서 말한 생명은 인류에 대한 어떠한 생명입니까?
14 계시록 22:17의 영감받은 말 가운데 친절한 초대가 있읍니다. “성령과 신부가 ‘오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듣는 자는 또한 ‘오라’하고 외치시오. 목마른 사람도 오시오. 생명의 물을 원하는 사람은 거저 받으시오.” (새번역) 여기서 말한 생명은, 현 세상 상태 때문에 그리고 나면서부터 물려받은 상태 때문에 현재 마지못해 살아가고 있는 재미없는 생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어느 인간 정부도 인류에게 주지 못했던 생명,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하나님의 왕국만이 그의 백성인 인류에게 줄 수 있는 생명입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지구상의 최초의 남녀를 ‘에덴’ 동산이라고 불리우는 그 영화롭고 아름다운 낙원에 두시던 때에, 하나님께서 지상의 거민들에게 주려고 하셨던 생명입니다.
15, 16. (ㄱ) 땅의 낙원은 ‘아담’과 ‘하와’에 대하여 왜 일시적인 거처로 끝났읍니까? (ㄴ) 그들에 대한 목적을 말씀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한 하늘의 거처에 관하여 말씀하셨읍니까? 아니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읍니까?
15 인자하신 창조주께서 첫 남녀를 ‘에덴’ 동산에 두셨을 때 그 낙원이 그들을 위한 일시적인 거처가 되도록, 자녀가 없이 잠간 동안 그들만의 “사랑의 보금자리”가 되도록 하신 것이 아니었읍니다. 지상의 그 낙원이 그들에게 일시적인 거처로 끝나버린 이유는 그들이 자기들의 행로를 하나님의 인자하신 목적에 일치시키지 않았기 때문이었읍니다.
16 하나님의 목적은 그들을 이곳 지구상에서 얼마 동안 시험하고 검토한 다음 하늘로 데려가는 것이 전혀 아니었읍니다. 그들은 완전히 행복하고 만족스럽게 되기 위하여 하늘로 가야 할 필요가 없었읍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도 완전히 행복하고 만족스럽게 되시기 위하여 하늘에서 그들을 필요로 하지 않았읍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한 자신의 목적을 밝히셨을 때 하늘의 거처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시지 않고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세 1:28.
17. (ㄱ) 하나님께서는 이 봉사의 특권을 완수하는 기간을 얼마로 정하셨읍니까? (ㄴ) 인간 역사의 6,000년이 흐른 지금 지구의 상태는 무엇 때문에 이러합니까?
17 성서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이 봉사의 특권이 완수되는 기간을 7,000년으로 정하셨읍니다. 오늘날 우리는 인류 역사가 거의 6,000년이 된 때에 살고 있는데, 이 지구는 아직 낙원이 되지 않았읍니다. 현재 지상에는 거의 40억에 달하는 인간이 살고 있으나 지상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무덤들은 ‘아담’과 ‘하와’의 자손들 중 대다수가 죽었음과 오늘날의 온 인류가 죽음의 단죄 아래 있음을 증언합니다. 하늘의 새와 지상의 짐승들과 바다의 물고기는 지금까지 인류에게 복종해 왔지만 그들의 수효는 위험할 만치 감소되었으며, 어떤 경우는 거의 멸절 상태에 있읍니다. 우리가 밟고 서 있는 땅은 오염되어 있읍니다. 도시와 공장의 폐기물 때문만이 아니라, 더욱 심각한 것으로 개인적인 살인과, 종교, 인종, 상업, 정치 등의 문제로 인한 전쟁에서의 대량 살상으로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읍니까? 분명히 인류가 하나님의 목적에 일치하게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8. 하나님의 본래 목적의 상태는 어떠한 것 같이 보이며, 무슨 질문이 생깁니까?
18 인간과 지구에 대한 하나님의 본래 목적은 좌절된 것처럼 보입니다. 적어도 심각하게 위협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남은 시간 여유로 볼 때 이러한 질문이 생깁니다.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본래의 인자하신 목적은 실패할 것인가, 아니면, 희망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포기하셨는가?
19. 이사야 55:10, 11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공표하신 목적이 실패될 것인가의 여부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읍니까?
19 전능하신 하나님께는 실현 불가능한 일이 없읍니다. 하나님의 목적에 있어서는 오랜 세월이 흘렀다고 해도 문제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발표하신 목적을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어기시는 일이 없읍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서 완전한 인간 ‘아담’과 ‘하와’를 축복하시면서 그 약속을 하셨는데, 거의 3,300년 후에 예언자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이사야 55:10, 11.
20, 21. (ㄱ) 예수께서는 지상에 낙원이 회복될 것이라는 희망을 언제 제시하셨읍니까? (ㄴ) 부활된 다음 그는 무엇을 하실 때를 바라보셨읍니까?
20 또한 하나님께서 이렇게 선언하신지 7세기 이상이 지난 다음, 곧 통용 기원 33년 유월절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를 위한 낙원의 회복에 대한 희망을 제시하셨읍니다. 그날 예수께서 ‘로마’ 군인들에 의해 형주에 못박히시어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목적이 좌절된 것같이 보였을 때 그의 곁에서 달렸던 행악자가 죽은 자의 부활과 하나님의 메시야 왕국에 믿음을 나타냈읍니다.
21 “유대인의 왕”이라는 예수의 죄목을 심중히 생각하고, 그 죽어가던 행악자는 예수께 정중한 태도로 “예수여 당신이 당신의 왕국에 들어 가시면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읍니다. 예수께서도 부활에 대하여 그리고 그 당시에는 오랜 후에 있을 하나님의 왕국에 대해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계셨으므로 그 행악자에게 “진실로 내가 오늘 당신에게 말하는 데, 당신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셨읍니다. (누가 23:39-43, 신세) 그 후 세째날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으로부터 영광스런 영으로 부활되셨으며,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메시야 왕국을 주시고 자신이 그 동정적인 행악자와 나머지 대속받은 인류를 위해 지구를 낙원으로 회복시킬 때를 바라보셨읍니다.—히브리 10:12, 13.
22. (ㄱ) 히브리서 13:8은 인류에 관한 하나님의 목적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것을 어떻게 확증합니까? (ㄴ) 이 성취는 무엇과 관련되어 있읍니까?
22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의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의 본래 목적, 곧 인류와 그들의 거처인 지구에 대한 목적을 더욱 확증하셨읍니다. 예수에 관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고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어 있읍니다. (히브리 13:8) 그러므로, 그분은 자기의 말씀을 결코 어기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비록 그 약속의 말씀이 단죄받은 행악자에게 한 것이라도 그렇습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본래 목적을 ‘아담’과 ‘하와’의 자손들에게 성공적으로 실현할 것을 확증합니다. 그러나 그 사실은 그 하나님의 목적의 성취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집권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야 왕국과 관련시킵니다. 이렇게 하여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본래 목적은 메시야 왕국에 관한 하나님의 목적과 관련이 있읍니다.
23. 누가 “장차 오는 세상”을 기업으로 받았으며, 그는 땅에 대하여 어떤 의무감을 느낍니까?
23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지상에 살았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온유한 분이었으며 심지어 예언자 ‘모세’보다 더 온유하였읍니다. (민수 12:3)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제자들에게,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읍니다. (마태 5:5; 시 37:11) 이 영감받은 말씀과 일치하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에서 가장 온유한 분으로서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되었읍니다. 이 사실과 부합되게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 2장 5절부터 9절에는 이렇게 언급되어 있읍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말한 바 장차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는 복종케 하심이 아니라 ···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영광스럽게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땅을 기업으로 받으셨기 때문에, 지구 전체를 하나님께서 목적하셨던 상태 곧 인류의 영원하고 행복한 안식처로서, ‘에덴’ 동산과 같은 낙원 상태로 만드실 의무감을 느끼고 계십니다. 예수께서는 기업으로 받으신 지구를 완전히 복구시키실 것입니다.
생존해서 맛볼 만한 가치 있는 것
24. 현재 지상에서 누가 살아간다는 것이 의문시되고 있으며, 이유는 무엇입니까?
24 그것은 올바른 인식을 가진 남녀들이 생존해서 맛보고 싶어할 만한 가치있는 것이 아닙니까?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들은 만족이 없는 이 사물의 제도하에서 조금만이라도 더 살기 위하여 이기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읍니다. (야고보 4:13, 14) 악화 일로에 있는 세상 상태 하에서 인간 살이는 더욱 더 어려워지고 있읍니다. 지금도 세계 상태가 험악한데, 멀리 내다보는 사람들은 세계적인 기근이 접근하고 있는 것을 보고 앞으로 더욱 험한 상태가 올 것을 예견하고 있읍니다. 가공할 위력을 지닌 대륙간 탄도 유도탄과 짐승이나 전 인류를 송두리째 멸절시키고도 남을 만한 양의 살륙 무기를 저장해 놓고 있으니 전 인류가 무한정 살아간다는 것은 현재 크게 의문시되고 있읍니다.
25, 26. (ㄱ) 지상의 현 상태는 창조주께 영예가 됩니까?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는 것이 당연합니까? (ㄴ) 하나님께서 조치를 취하는 것이 왜 수천년 전보다는 지금이 더욱 정당합니까?
25 하나님께서 인간을 완전한 상태로 존재하게 하신 시초에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 동산에서 축복하셨을 때에는 인류가 오늘날과 같은 상태로 될 것을 계획하지 않으셨읍니다. 오늘날과 같은 서글픈 상태에 처해 있는 지구는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영예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하시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읍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이 지구를 기업으로 받으신 분께서도 자기의 토지를 개선할 조치를 취하려고 하지 않으시겠읍니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과거에 행하신 일로 보건데, 그분들이 현 상태에 직접 개입하셔서 어떤 조치를 취하시리라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오래 전에, 그러나 선사 시대가 아니고 역사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시대처럼 악하지는 않았으나 우리 시대와 비슷한 상태를 보고 거기에 개입하셨었읍니다. 그때는 인간이 창조된지 1,656년 밖에 되지 않은 때였읍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인간이 창조되고 타락한지 거의 6,000년이 되는 때입니다.
26 인간의 행동이 꾸준히 타락되고 있으니만큼 인류의 부도덕하고 이기적인 타락상은 4,300년 전보다는 지금이 훨씬 더 심합니다. 이 사실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오래 전보다도 지금 합당한 조치를 취해야 할 정당한 이유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실 때가 되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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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남녀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은 그들과 그들의 자손들이 ‘에덴’ 동산을 온 땅에 확장하고 낙원을 영원히 즐기도록 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