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견해 2
어떻게 율법을 ‘정당하게 다룰’ 수 있는가?
언제나 법이 제정될 때는 목적이 있으며, 보통 그 목적은 사람들을 돕고 보호하는 데 있다. 입법자들은 사람들이 그 법을 어기거나 우롱하거나 그 법에 대해 그릇되게 가르치기를 원치 않는다. 이것은 법을 정당하게 다루는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면서 “법”을 가르칠 자격이 있다고 자처하지만 실제로는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에서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기술하였다. (디모데 전 1:5-7)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위해 ‘모세’의 율법에 의지하도록 유도하려 하였다. 확실히 이것은 율법을 정당하게 다루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히 해로운 결과를 초래하였다.
사도는 율법을 ‘정당하게 다루고’ 적절히 적용할 때 “율법이 올바른 사람들을 위해서 제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 ··· 율법을 어기는 자와 순종하지 않는 자, 불경건한 자와 하느님을 떠난 죄인, 신성을 모독하는 자와 ··· 사람을 죽인 자, 음행하는 자와 ··· 인신 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 등의 사람들을 위해 율법이 있다는 것을 아는 지식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 (디모데 전 1:8-10, 공동번역) 만일 사람들이 이러한 악한 일을 하는 경향이 없다면 사람들에게 그러한 나쁜 일을 하지 말라고 규정하는 법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의롭기 때문에 그러한 법이 필요치 않은 사람이 있었는가?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의로우셨다. 그분에 대해 기록된 내용을 보면, 그분은 지상 생애 초부터 끝까지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셨다. (히브리 7:26) 그분은 의롭고 악의가 없는 분으로서 악행을 하는 경향이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율법의 제약을 받으실 필요가 없었다. 물론 그분은 ‘아담’과 같이 자유 의지가 있었고 악행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사실, 예수께서는 잠시도 악행을 생각조차 하지 않으셨다. 이것은 어떤 형태의 불순종, 자기 만족 혹은 이기적인 능력 혹은 지위의 과시를 생각해 보도록 하려는 ‘사단’의 노력에 대해 그분이 나타낸 즉각적이고도 서슴치 않은 반응을 볼 때 분명하다. (마태 4:1-11) 또한, ‘베드로’의 의미깊은 다음과 같은 말에 대한 예수의 즉각적인 증오와 반대 배척에도 유의하라. “주님, 안됩니다. 결코 그런 일[‘예루살렘’에서의 고통과 사망]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예수께서는 돌아서며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자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마태 16:21-23, 새번역.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어떤 율법을 범하지 않기 위하여 삼가거나 억제할 필요가 없었다. 그분이 의를 행하는 것은 그분의 체질상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천성적인 것이었다. 그분은 자기의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한다고 말씀하셨다.—요한 8:29.
그러므로, 의로운 사람은 의로운 법의 방해, 구속 혹은 제약을 받지 않는다. 그러한 사람은 사랑의 법,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 “자유의 율법”에 따라 산다. 사랑을 반대하는 즉 온전하고 자유로운 사랑의 표현을 억제하는 하나님의 법이 없다. 사도 ‘바울’은 사랑이 포함되는 영의 열매를 언급하고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다고 말하였다. (야고보 1:25; 2:12; 갈라디아 5:22, 23) 예수께서는 자기의 추종자들에게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요한 15:12.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정부의 법 아래 살고 있으며, 그들은 그 법이 정당하고 공동 유익을 도모하는 것임을 알 때 그러한 법에 순종해야 하며 실제로 순종하고 있다. 예외가 있다면, 인간이 제정한 법이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그분의 명령에 배치되고 그리스도인 양심에 위배될 경우 뿐이다. (사도 4:19, 20; 5:29 비교) 그러한 법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모든 인간과의 관계에서 준수해야 할 사랑의 법을 범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의로운 정부의 법 아래 있을지라도, 이러한 법은 그들이 선을 행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타내는 것을 막거나 방해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인류를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믿음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의롭다고 선언’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 그들의 죄는 그리스도의 속죄 희생으로 덮어진다. 사도는 이러한 면에서의 그들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모세’의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로마 8:1-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은 완전히 의로운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불완전한 인간은 그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그 율법은 모든 사람이 스스로 혹은 그들 자신의 공로로는 선한 일을 할 수 없다는 것 즉 모두 죄인이라는 것을 입증하였다. (로마 7:18 비교) 그 율법은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희생을 통하여 마련하시는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이러한 이해와 일치하게 행동하는 것이 그 율법 전체를 정당하게 다루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세’의 율법에 순응하게 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위협으로 사용하게 하려는 것, 그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해 말소된 그 율법하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율법은 어떠한 용도가 있는가? 어떻게 율법을 ‘정당하게 다루’는가? 우선, 그것을 연구하는 것은 유익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히브리 10:1) 더우기, 하나님의 율법 및 그분께서 율법하에 있던 ‘이스라엘’을 다루신 방법을 연구함으로써 우리는 사물에 대한 하나님의 견해, 어떤 일에 대한 그분의 느낌을 알 수 있다. 또한, 지침을 얻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그 원칙을 적용할 뿐, 그 율법으로 돌아가서는 안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이 사랑의 법이나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데 대해 신체적인 처벌을 가할 권위를 가진 재판관들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재판관이시며 공의를 시행하실 분이다. 그러나 그분은 또한 자비로우시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잘못하는 사람을 돕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하였다.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죄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잘못하는 사람의]를 덮을 것이니라.”—야고보 5:20.
만일 잘못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의로운 원칙을 심각하게 범하고 그 행로를 고집하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회중은 그러한 사람을 추방한다. 그 목적은 개인적인 해를 가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회중의 깨끗함을 유지하기 위해 그러한 조치가 필요하고 그것이 성서의 명령이며 하나님의 이름 및 회중에 대한 사랑과 일치되기 때문이다. (고린도 전 5:5, 13)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합당하게 죄인을 벌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목적과 기능을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목적에 비추어 이해하고 인정하고 지지하는 것이 율법을 ‘정당하게 다루’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