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라].”—고린도 전 15:22, 23.
1. ‘마르다’가 예수께서 자기 오라비의 죽을 병을 고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음을 어떻게 나타냈읍니까?
잘 알려진 ‘나사로’의 무덤 입구의 돌문이 굴려 제쳐지기 전까지 ‘베다니’의 날씨는 슬픔에 잠겨 있는 겨울 날씨였읍니다. 그의 유족인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유족의 친구들은 이것이 이 사물의 제도에서는 ‘나사로’를 다시 만날 수 없는 마지막 이별이라고 생각하였읍니다. ‘나사로’의 사랑하는 친구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곳에 도착하신 것은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째되는 날이었으니 너무나 늦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 뻔한 일이었읍니다. 예수를 마중 나간 ‘마르다’는 예수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고 말하였읍니다.
2, 3. (ㄱ) ‘마르다’는 이미 장사된 자기 오라비의 부활이 언제 있을 것을 기대하였읍니까? (ㄴ) 부활에 관하여 ‘마르다’는 자기의 조상인 누구의 믿음을 나타냈읍니까?
2 예수께서는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말씀하셨읍니다. ‘마르다’는 부활(復活)에 대한 믿음을 가졌음을 나타내어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하고 대답하였읍니다.—요한 11:1-24.
3 ‘마르다’는 하나님의 메시야 즉 그리스도를 통한 그분의 왕국 아래 이곳 땅으로 살아 돌아올 모든 인간 죽은 자들의 부활을 생각하고 있었읍니다. ‘마르다’는 바로 그 메시야가 이 예수라는 것을 믿었으며, 이분이 여러 세기 전에 예언자 ‘엘리야’와 ‘엘리사’가 한 바와 같이 이미 다른 사람들을 살리신 일이 있는 분입니다. (요한 11:27) 부활에 대한 ‘마르다’의 믿음은 “여호와의 벗”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던 그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과 같았읍니다. (야고보 2:21-23, 신세) ‘마르다’의 오라비 ‘나사로’는 이미 죽어 장사되었지만, ‘아브라함’의 경우에 있어서 그의 아들 ‘이삭’은 이제 막 인간 희생으로 바쳐지려는 순간 아직 살아 있었읍니다. ‘이삭’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읍니다. ‘아브라함’은 그를 희생으로 바치라는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어려웠던 이 때의 ‘아브라함’의 믿음에 관하여 ‘아브라함’의 후손인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읍니다.
4. ‘아브라함’은 어떻게 “비유”적인 방법으로 자기 아들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받았읍니까?
4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씨, 난외주]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브리 11:17-19; 창세 22:1-18; 이사야 41:8; 역대 하 20:7.
5, 6. (ㄱ) ‘아브라함’은 인간 죽은 자들의 부활이 언제 있을 것을 기대하였읍니까? (ㄴ)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고 죽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죽음은 하나님의 메시야 통치에 관한 그들의 믿음을 손상시켰읍니까?
5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그리스도의 왕국하에 인간 죽은 자들의 다가오는 부활을 믿었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이삭’의 비유적인 부활로 전영되었었는데 바로 그분은 ‘아브라함’의 ‘유대’인 후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일이 있었읍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요한 8:56) ‘이삭’의 부친이요 ‘야곱’의 조부인 ‘아브라함’에 관한 예수의 말씀과 일치하게 우리는 이러한 기록을 볼 수 있읍니다.
6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그리스도께서 즉위하신 하늘의 왕국]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브리 11:13-16.
7, 8. (ㄱ)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관하여 예수께서 ‘사두개’인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어떻게 그들에게 부활을 확약하신 것이 됩니까? (ㄴ) 시편 45:16과 일치하게 하늘 정부의 메시야 통치자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위하여 어떠한 일을 할 것입니까?
7 하나님께서 오랫 동안 죽어 있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위하여 준비해 놓으셨으므로 이들 고대 충신자들은 영광스럽게 되신 메시야 즉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성” 즉 정부 아래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될 것이 확실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부활을 믿지 않는 ‘유대’인 ‘사두개’인들과 이야기하실 때 그 점을 지적하셨읍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천사니라가 아님]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찐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마태 22:30-32.
8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죽기 전에도 그들의 하나님이었읍니다. 그분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시키심으로써만 살아 있는 ‘아브라함’, 살아 있는 ‘이삭’, 살아 있는 ‘야곱’의 하나님이 되실 수 있읍니다. 그들은 여호와이신 그들의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준비하신 “성” 즉 하늘 정부 아래 이 땅에서 사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성”의 통치자이신 영광스럽게 되신 메시야 예수께서 그들을 “온 세계의 군왕”으로 임명하심으로 시편 45:16이 성취될 것입니다. 하늘의 메시야께서 이사야 9:6에 예언된 ‘영원하신 아버지’라는 칭호를 포함한 자기의 모든 칭호가 그들에 대하여 성취되게 하실 것입니다.
9. 예언자 ‘이사야’는 인간 죽은 자들의 부활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무엇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가 있은 후에 있을 것입니까?
9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기타 고대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께서 ‘마르다’의 오라비 ‘나사로’를 지상 생명으로 일으키시기 바로 전에 ‘마르다’가 예수께 말한 “마지막 날”에 일으킴을 받을 것입니다. (요한 11:24-44) 부활을 받을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희생으로 말미암아 구속(救贖)된 사람들이며, 이들에 관하여 예언자 ‘이사야’는 영감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읍니다. “그 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메마른 시체와는 대조적으로]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 (이사야 26:1, 19) 그러므로 땅의 죽은 자들이 재생하는 일, 갱생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이 일은 여호와께서 유혈의 죄를 범한 세계에게, 무죄한 모든 사람들을 비명(非命)으로 ‘스올’ 즉 무덤으로 들어가게 한 데 대하여 분노를 쏟으신 후에 있을 것입니다. 즉 성서에서 ‘아마겟돈’이라고 하는 세계 상태에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이 있은 후에 있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계시 16:14, 16; 19:11-21.
10. 그러므로 그 “마지막 날”에 이 땅은 왜 더는 공동 묘지의 땅이 아닐 것입니까?
10 그러므로 ‘마르다’가 말한 그 “마지막 날”에 인간 죽은 자들이 땅 속에 묻혀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생명으로 일으킴을 받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이사야 26:20, 21) 그 “마지막 날”이 구속(救贖)받은 인간의 죽은 자들에게 가져다 줄 새롭게 된 인간 생명의 신선함은 참으로 아침 이슬 같을 것입니다! 땅은 더는 공동 묘지의 땅이 아닐 것입니다.
11, 12. 얼마 전에 출생한 “‘유대’인의 왕”을 죽이려는 ‘헤롯’ 대왕의 잔인한 계획이 어떻게 실패하였읍니까?
11 심지어 아기로 죽은 자들과 의무 이행의 책임이 없는 어린이들까지도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젊음을 즐기게 될 나이로 자라나는 새로운 기회를 갖기 위하여 돌아오는 혜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죽음을 가져오게 한 ‘헤롯’ 대왕의 행위는 역전될 것입니다. 그는 동방으로부터 와서 묻는 점성술자들에게 얼마 전에 출생한 “‘유대’인의 왕”을 찾아 내서 자기에게 알려 달라고 부탁했읍니다. 그는 ‘유대’인 처녀 ‘마리아’의 아들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장차 “‘유대’인의 왕”이 될 아기를 찾을 수 없게 되어 자기의 계략이 좌절되었음을 알게 되자 ‘헤롯’은 자기의 군사를 보내서 두살된 아이들과 그 아래의 아이들을 모두 죽이게 했읍니다. ‘베들레헴’과 그 근방에서 아기를 잃은 어머니들의 슬픔이 부활에 관한 위안의 소식과 함께 성서 예언에 기록되어 있읍니다.
12 복음서의 필자인 ‘마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마태 2:1-18) 그러나 ‘마리아’는 슬퍼하고 통곡하는 어머니에 끼지 않았읍니다. 왜냐 하면 그는 어린 아들 예수를 데리고 피신하여 ‘애굽’으로 내려가서 거기서 ‘헤롯’이 죽을 때까지 있었기 때문입니다.
13. ‘예레미야’의 예언을 ‘마태’가 적용시킨 것에 의하면 죽임을 당한 무죄한 어린 아이들이 돌아오게 될 “대적의 땅”이란 무엇이었읍니까?
13 그러나 아기를 여읜 이 어머니들의 경우에 있어서 전혀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었읍니다. ‘마태’가 인용한 ‘예레미야’의 예언서에는 이어 이런 말이 있읍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 소리를 금하여 울지 말며 네 눈을 금하여 눈물을 흘리지 말라. 네 일에 갚음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 대적(對敵)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야 31:15, 16) ‘마태’가 영감으로 ‘예레미야’의 예언을 적용시킨 방법에 의하면 그 “대적의 땅”이 ‘예레미야’ 시대의 고대 ‘바벨론’일 수가 없읍니다. 그것은 대적 ‘헤롯’ 대왕이 비명으로 무죄한 아기들을 죽여 매장한 죽음의 땅을 말하는 것이었읍니다. 죽음 역시 “대적” 즉 “원수”입니다. 고린도 전서 15:26은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14. (ㄱ) ‘바벨론’ 땅은 ‘예레미야’ 시대에 어떻게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죽음의 땅이 되었읍니까? (ㄴ) ‘베들레헴’의 무죄한 아기들이 어떻게 ‘돌아 올’ 것이며, 무슨 날에 ‘돌아 올’ 것입니까?
14 그리스도교 전 ‘바벨론’ 땅은 유배 당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체포자들이 그들을 “죽이기로 정한 자”들의 땅이었읍니다. 그들 유배자들 중 많은 사람들은 그 땅에서 외국인으로서 죽었읍니다. (시 79:11; 102:20; 이사야 14:17) 기원전 537년과 그 후에 수천명의 ‘유대’인 “포로”들은 대적 ‘바벨론’ 땅으로부터 “돌아왔”읍니다. ‘베들레헴’의 무죄한 아기들이 돌아오는 일은 아직 앞으로 있을 일입니다. 그것은 ‘베다니’의 ‘마르다’가 말한 “마지막 날”의 부활에 의하여 돌아오게 될 것이며, 그 “마지막 날”은 ‘아마겟돈’에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의 큰 날에 전쟁”이 있은 후 그리고 ‘사단’ 마귀와 그의 악귀들이 속박되어 감금된 후에 시작될 것입니다.—계시 20:1-3, 11-15.
심판 날
15. 예수께서는 “마지막 날”이 어떻게 부활된 죽은 자들의 심판 날이 될 것을 시사하셨읍니까?
15 이 “마지막 날”은 또한 예수를 배척하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부활된 인류의 심판 날이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심으로 그 점을 알려 주셨읍니다. “나를 배척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심판할 자가 따로 있다. 내가 말한 이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요한 12:48, 새번역) 예수께서는 인류 세계를 심판하는 때를 부활과 연결시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읍니다. “또 인자(人子)됨을 인하여 [하나님께서]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한 5:27-29; 「파수대」 1979년 1월호 12-15면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 기사 참조) 물론 이 “마지막 날”은 스물 네시간의 하루가 아닐 것입니다. 이 날의 길이는 1,000년의 기간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1,000년 통치와 겹치는 기간일 것입니다.—베드로 후 3:8; 계시 20:4, 6.
16. 고린도 전서 15:25, 26에 시사된 바와 같이 어떠한 이유로 다가오는 심판 “날”은 영광스러운 날이 될 것입니까?
16 그 “날”은 영광스러운 날이 될 것입니다. 왜냐 하면 그 날은 우리 모두가 ‘아담’과 ‘하와’에게 선고된 죽음의 선언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서 유전받은 죽음의 모든 결과를 일소하는 날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1,000년 통치는 우리 모두가 바라보아야 할 만한 날입니다. 고린도 전서 15:25, 26에 이러한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아담’으로부터 우리에게 유전된] 사망이니라.”
17. 이 심판 “날” 후에 죽는 사람이 있다면 왜 그러한 일이 있게 될 것이며, 그 죽음은 어떠한 것이 될 것입니까?
17 우리에게 유전된 ‘아담’으로부터의 죽음에 대한 죽음의 강타가 예수께서 사도 ‘요한’에게 쓰게 하신 내용 가운데 잘 그려져 있읍니다. 인류의 부활이 있을 “마지막 날”을 설명하면서 계시록 20:13, 14은 이렇게 말합니다. “바다가 그 가운데 있는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사망과 ‘하데스’도 그 가운데 있는 죽은 자들을 내어 놓았읍니다. 그들이 각각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았읍니다. 그리고 사망과 ‘하데스’가 불바다에 던져졌읍니다. 이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새번역) 그러므로 지상에 있는 사람으로 이 후에 죽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담’으로부터 유전받은 죽음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는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죄를 범함으로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의 죽음은 “둘째 사망”이 될 것이며, 그것으로부터 그는 결코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를 어떠한 사망과 결과로부터 해방시키시며, 그러므로 그분은 그들에게 무엇이 되십니까?
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담’으로부터의 죽음과 우리의 일반 무덤인 ‘하데스’로부터만 인류를 석방시키십니다. 예수께서 “나는 처음과 나중이요 살아 있는 자다. ··· 나는 ··· 죽음과 ‘하데스’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셨을 때 이 점을 우리에게 확약하셨읍니다. (계시 1:17, 18, 새번역)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실 만하였던 것입니다.—요한 11:25.
19. 부활받은 사람들 가운데는 참을성으로 유명했던 어떤 사람이 있을 것이며, 그는 언제까지 ‘스올’에 매장되어 있기를 원하였읍니까?
19 다스리는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데스’(‘히브리’어로는 ‘스올’)의 열쇠를 사용하여 내어 놓으실 사람들 중에는 참을성으로 유명한 한 사람이 들어 있읍니다. 이 사람은 고대 중동 지방 ‘우스’ 땅에 살던 ‘욥’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재난이 겹쳐 일어나기 때문에 ‘욥’의 심정과 같이 ‘하데스’나 ‘스올’에 매장된 죽은 자가 되었으면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읍니다. 그러나 우리도 ‘욥’이 가졌던 부활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는 “마지막 날”에 이 부활이 있게 되면 현재 인류가 당하는 모든 문제로부터 해방될 것임을 알고 있었읍니다. 그가 죽음 가운데 잠들어 매장되면 그는 현재 인류를 지배하는 “하늘” 즉 초인간적인 힘이 지나갈 때까지 쉬게 될 것입니다. 그것들이 지나간다는 것은 이 땅의 상태를 놀랍게 변화시키는 시초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은 여호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였읍니다.
20. 욥기 14:12-15에 의하면 ‘욥’은 하나님께 무엇을 기도하였읍니까?
20 “사람이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 눈을 뜨지 못하며 잠을 깨지 못하느니라. 주는 나를 음부[‘스올’, 신세]에 감추시며 주의 진노가 쉴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하여 기한을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옵소서!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하나님께서 악을 허락하심으로 말미암아] 나의 싸우는 모든 날 [강제적 봉사] 동안을 참고 놓이기를 기다렸겠나이다. [기다리겠나이다] 주께서는 나를 부르셨겠고 [부르시겠고] 나는 대답하였겠나이다. [대답하겠나이다] 주께서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아껴 보셨겠나이다. [보시겠나이다].”—욥 14:12-15, 신세 참조.
21. ‘욥’이 보기를 원한 바뀌인 얼굴은 무엇이었으며, 그는 “구속자”가 자기를 위하여 어떻게 하기를 기대하였읍니까?
21 ‘욥’이 고통을 당하는 동안 그는 자기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했읍니다. 오늘날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고통당하는 것을 허락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를 승인하시지 않는 것 같이 느껴지고 우리에 대한 얼굴의 표현이 바뀌어지기를 원할 때가 있읍니까? 다가오는 “마지막 날”에 ‘스올’ 혹은 ‘하데스’에서의 인간 죽은 자들의 부활이 있을 것이며, 바로 이 사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속받은 인류를 은혜롭게 보신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욥’은 “구속자”(救贖者) 즉 자기가 팔리운 “강제적 봉사”로부터 자기를 사낼 대가를 마련할 분이 있기 때문에 자기와 인류 가운데 다른 사람들을 위한 부활이 있을 것임을 믿었읍니다.
22, 23. (ㄱ) ‘욥’은 무엇을 확신하기 때문에 그의 부활을 마련하실 분이 있을 것을 믿었읍니까? (ㄴ) ‘욥’은 이 “구속자”가 언제 올 것을 기대하였으며, ‘욥’은 누구의 은혜로운 얼굴을 볼 것을 기대하였읍니까?
22 ‘욥’은 자기를 거짓 고발하는 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 대한 자기의 개인적 성실을 확신하였읍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를 위한 “구속자”가 있음을 확신했읍니다. 이 “구속자”는 ‘욥’이 사망한 후에 일어날 것이지만 ‘욥’은 자기의 “구속자”가 고려하도록 좋은 기록을 남겨야 하였읍니다. ‘욥’은 장차 올 “구속자”가 부활의 기초를 마련해 줄 것을 확신하고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23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그들이 베낀 가죽, [가죽을 베낌으로 인하여] 내 살이 빠진 상태로, 신세]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크게 부풀은 기대 때문에] 내 마음이 조급하구나.”—욥 19:25-27.
24.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속자”는 어떻게 인류에게 친척이 되었으며, 이분은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무엇을 주셨읍니까?
24 ‘사단’ 마귀는 인류 가운데 하나님께 성실을 지킬 남녀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부활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 없다고 계속 헐뜯을 것입니다. ‘베다니’의 ‘마르다’가 말한 “마지막 날”에 죽은 인류의 부활이 있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불가능이 없는 하나님께서 “구속자” 즉 완전한 인간으로 태어나 인류와 친척 관계를 갖게 하신 자기의 독생자를 생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인간) 영혼을, 신세]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일시적으로 땅에 오신 것입니다. (마태 20:28; 마가 10:45)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으로 말미암아 대속(代贖) 혹은 구속(救贖)되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을 부활시키실 수 있는 길을 닦아 놓았읍니다.
25. 이 “마지막 날”이 왜 인간 존재의 종말의 날이 아닐 것이며, 그 “날”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하실 것입니까?
25 결과적으로 “마지막 날”은 인간 존재의 종말의 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 아래 있는 그 “날”에 구속받은 인간의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와 죽음이 수없이 많은 사람을 ‘스올’ 혹은 ‘하데스’로 들어가게 하는 것을 묵인하신 기간이 모두 지나간 후의 “마지막 날”일 것입니다. 그 날은 하나님께서 구속받은 인류를 과거의 모든 죄로부터 해방된 것으로 간주하고 그들에게 지상의 회복된 낙원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그들이 갖추어야 할 하나님의 요구 사항을 그들에게 가르치는 “날”이 될 것입니다.—이사야 26:9; 로마 6:7.
26. (ㄱ) 부활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자기 차례”는 어떠합니까? (ㄴ) 데살로니가 전서 4:16은 순위 혹은 지위 혹은 중요성의 차례가 있음을 어떻게 알려줍니까?
26 그러므로 구속이 필요한 인류의 부활이 있으려면 먼저 “구속자”의 죽음과 부활이 있어야 하였읍니다. 그리하여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순위상 먼저 있게 되었읍니다. 그분은 중요성에 있어서도 “자기 차례대로” 부활되셨읍니다. 또한 ‘욥’의 부활과 ‘베들레헴’에서 죽임을 당한 아기들의 부활 그리고 다른 죽은 자들의 부활이 있기 전에 순위 혹은 지위 혹은 중요성의 차례에 따라 부활받을 다른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 점에 우리의 주의를 이끄는 영감받은 말씀이 데살로니가 전서 4:16에 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리라.]” 먼저 부활을 받게 될 이들은 누구이며, 언제 그리고 어떻게 이 부활이 있을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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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들 가운데서 돌아오는 고대 충신자들을 환영하는 즐거움과, ‘헤롯’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던 어린이들이 살아 돌아오는 것을 맞이할 어머니들의 기쁨을 상상해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