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분을 보는 것 같이 계속 확고부동하라
“믿음으로 그는 왕의 분노를 두려워하지 않고 ‘애굽’을 떠났읍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그 분을 보는 것 같이 하여 꾸준히 참았기 때문입니다.”—히브리 11:27, 새번역.
1. (ㄱ) 어떠한 증거가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확증해 줍니까? (ㄴ)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왜 그분의 존재에 대해 의심을 일으키지 않습니까?
현재나 과거를 불문하고 지상에 사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육안으로 본 사람은 없읍니다. 여호와는 너무나 영광스럽기 때문에 연약한 인간으로서는 그분을 보고 견딜 수가 없읍니다. 그러나, 그분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우리가 그분의 존재를 의심하게 되어서는 안됩니다. 또한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믿음의 눈으로 그분이 인격체임을 “보”는 것이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그분의 특성이나 능력은 알아 볼 수 있읍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창조물을 통하여 그분의 성품을 어느 정도 알아 볼 수 있읍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라].” (로마 1:20) 그분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그분의 존재 사실에 의심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며, 우리가 그분을 인격자로서 존경하고, 그분의 특성, 방법 및 자기 백성을 대하는 점등을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그분의 특성과 표준의 불변성도 역시 뚜렷합니다. 이것은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한다고 친히 하신 말씀으로도 확증됩니다. (말라기 3:6) 여호와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그분의 특성, 그분의 활동,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그분의 태도 등에 대한 믿음이 약해져서는 안됩니다.
2, 3. 믿음은 여호와의 백성의 생활을 변화시키는 면에 있어서 어떤 일을 이룩하였읍니까?
2 여호와의 백성은 그분을 육안으로 보지 않고도 하나님께 강한 믿음을 나타냈기 때문에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생활을 완전히 변화시켰읍니다. 여호와의 증인들 중 상당수가 증인이 되기 전에 부도덕하였고 부정직하였고 폭력을 사용하였고 세속적 쾌락을 사랑하였고 물질적 이득을 추구하였고 자신의 명예를 높이는 데 몰두하였었다는 사실을 볼 때 그 점은 분명합니다.—고린도 전 6:9-11.
3 진실성이 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분을 “보”았기 때문에 인생 행로와 생활 방식을 변화시켰으며, 이제 완전히 ‘돌아서’서 하나님께서 세워놓으신 표준에 따라 살아가고 있읍니다. 따라서 그들은 정직해졌고 영적인 것에 대한 인식을 나타내고 마음 속에 여호와의 뜻을 행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읍니다.—사도 3:19; 베드로 전 4:3, 4.
4. 하나님의 백성은 무엇 때문에 그분의 길로 걷게 되었읍니까?
4 그러면, 왜 그러한 변화를 하였읍니까? 왜냐 하면, 분별의 눈으로 여호와가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보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그들에게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길로 걷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깊고 꿋꿋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여러 해를 쉬지 않고 “좋은 소식”을 전파하였으며, 박해를 당하기도 하고 또 대다수의 사람들이 들으려하지 않기 때문에 실망을 느낄 때도 있지만 그 일을 계속하였읍니다. 우리는 그분을 “보”았기 때문에 그분을 철두철미 확신하고 있으며, 그분의 봉사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있읍니다.—에베소 1:18; 사도 5:42; 마태 5:8, 10-12.
믿음 가운데서 충성을 나타냄
5. 여호와의 봉사를 오래 계속해 온 사람들의 태도는 어떠합니까?
5 좋은 소식을 전세계에 전파하라는 여호와의 명령에 순응한 많은 사람들은 그 일을 20년, 30년, 40년 혹은 그 이상 계속해 왔읍니다. 이 봉사를 오래 할수록 하나님의 영광스럽고 웅대한 사업에 대한 인식이 깊어 갑니다.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견해는 더 밝습니다. 여호와의 봉사를 오래 계속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 임무에서 중단하거나 늦출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약속된 보상을 받을 때까지 계속할 것을 결심하고 있읍니다.—야고보 1:12.
6.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백성은 무엇을 인내하였으며, 그들은 이러한 시련을 어떻게 간주하였읍니까?
6 그들이 극심한 박해를 당하였을지라도 그들의 믿음은 계속 튼튼합니다. 그들은 반대를 인내하였으며 앞으로도 계속 인내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께 성실을 지킬 것을 굳게 결심하고 있읍니다. 세계 각처에서 여호와의 충실한 백성에게 박해가 있었읍니다. 특히, 악마적인 ‘나치’ 정권 하의 독일에서, 좀 더 최근에는 ‘말라위’의 잔인하고 무자비한 독재자 아래서 박해를 당하고 있읍니다. 그리스도인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천적 아버지께 충성을 지켰으며, 제1세기 그리스도인들처럼 그들은 박해 아래서도 즐거워하였읍니다. 그들은 우주의 주권을 가지신 통치자 앞에 충성을 지키는 것을 특권으로 간주하였읍니다.—베드로 전 4:12, 13; 시 145:10.
7-9. (ㄱ) 독일에서와 ‘말라위’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은 믿음을 어떻게 나타내었읍니까? (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인내하게 해 주었읍니까?
7 ‘히틀러’의 사악한 정권 하에서 수많은 여호와의 증인들은 직장을 잃었고 사업과 가정을 상실하였읍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업을 계속할 수 없었읍니다. 그들은 재산을 몰수당하였고 연금이 거절되었고, 다른 것도 많은 손실을 보았읍니다. 부모로부터 강제로 격리당한 아이들이 860명이나 되었으며, 총계 6,019명이 투옥되었으며, 그중 어떤 사람들은 두번, 세번 혹은 그 이상 투옥당하기도 하여 총계 8,917건의 투옥이 기록되었읍니다. 이 사람들이 감옥에서 복역한 기간은 연 13,924년에 달하였읍니다. 이들 중 많은 충실한 남녀들은 강제 수용소에 수감 되었는데 전부 합치면 8,078년간을 강제 수용소에서 극악한 학대를 받았읍니다. 총계 635명이 옥사하였고 253명이 사형 언도를 받아 그중 203명이 실제 사형을 당하였읍니다.
8 좀 더 최근에 ‘아프리카’ ‘말라위’의 이른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독재자는 ‘히틀러’의 악습을 따라 그 나라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박해를 가하였읍니다. 1972년에, 30,000여명의 그리스도인들과 또 그들과 함께 성서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생명을 부지하기 위하여 이웃 나라 ‘모잠비크’로 피하였읍니다. 그러나 1975년 8월과 9월에 ‘모잠비크’에 국가주의가 솟아나서 그들이 ‘말라위’로 “귀국”하게 되었읍니다. 여기서 그들은 또 다시 비인도적 고문과 구타를 당하고, 돈과 재산과 의복을 강탈당하였읍니다. 그들은 발가벗김을 당하고 많은 여자들은 강간을 당하였읍니다. 1975년 10월에 전체 회중의 성인 증인들은 ‘히틀러’식의 강제 수용소에 감금되었읍니다. 부모는 강제로 자녀들과 격리되었으며, 심지어 젖먹이 아이들도 수용소 밖에 남게 되었읍니다! 경찰관에게 ‘말라위’ 대통령이 왜 이러한 명령을 하였는가 질문하였더니 그들은 “당신들은 아이들에게 그릇된 것을 가르친 책임이 있소. 그러니 ‘말라위’가 그 애들을 길러서 ‘말라위’의 국민으로 만들 것이오.”라고 대답하였읍니다. 이보다 더 악귀적인 행동을 당신은 상상할 수 있읍니까? ‘말라위’ 내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고향도 가정도 자녀도 없어졌읍니다. ‘말라위’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에 따라 “세상”에 대하여 그리고 그의 정치 문제에 대하여 중립을 고수한 “죄”밖에 없는 사람들을 박해함으로써 ‘나치’의 잔인한 역사를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까?—요한 17:16.
9 이것은 실로 악마적인 기록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러한 악독한 학대를 견디도록 힘을 준 것은 무엇이었읍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바라보았읍니다. 그들은 성서에서 ‘모세’, ‘여호수아’, 예언자들 및 제1세기 그리스도인들의 충성과 인내에 관한 기록을 보았읍니다. 특히, 그들은 우리의 주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워놓으신 충실성의 본을 기억하였읍니다.—히브리 12:1-3.
믿음의 눈으로 “보”다
10. (ㄱ) ‘모세’는 초기에 어떤 좋은 조건을 누렸읍니까? (ㄴ) 그는 여호와께 어떠한 충성을 나타내었읍니까?
10 세상적인 관점으로 보면 ‘모세’는 물질적으로 극히 유리한 입장이었읍니다. 그는 ‘바로’의 딸의 양자였으며, 그러한 신분이었으므로 그는 호의호식할 수 있었고 호화찬란한 환경 가운데서 왕족 생활을 할 수 있었읍니다. (출애굽 2:1-10) 그는 대단한 지위와 영예를 가질 수 있었고 결국에 가서는 광범한 토지를 유산으로 받을 수 있었읍니다. 그는 고등 교육을 받아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웠으며, “말과 행사가 능하”였읍니다. 그러니, 의심할 것 없이 ‘애굽’ 안에서의 그의 지위는 매우 높았읍니다. (사도 7:20-22)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여호와와 자기와의 관계를 더욱 중요시하였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올바른 본을 보여주었읍니다. 1,900년 전 사람에게나 오늘날의 사람에게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에 대한 충성 때문에 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불리우는 것을 거절하였읍니다. 사도 ‘바울’에 의한 성서 기록은 다음과 같은 말로 ‘모세’의 전망과 이해를 기술하였읍니다.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한 것이며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느니라].”—히브리 11:23-29.
11. ‘모세’는 장래의 임무를 위해 어떻게 훈련을 받았읍니까?
11 ‘모세’의 커다란 욕망은 하나님의 백성을 구출하는 일에 여호와에 의해 사용되는 것이었읍니다. 그는 40년 동안 ‘미디안’에 살면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단련을 받았읍니다. 참을성, 온유함, 겸손, 오래 참음, 유순함, 자제, 여호와를 기다리는 것 등의 특성을 기를 필요가 있었읍니다 그는 광야에서 목자 생활을 하는 동안 장차 당할 실망과 고난을 인내할 수 있도록 훈련받고 준비되었읍니다. 동시에 그는 침착성과 강건함을 나타낼 필요가 있음을 배웠읍니다. 장래에 받을 임명에서 즉 여호와의 백성을 노예의 속박에서 구출해 내는 데 있어서 그러한 성품이 필요하기 때문이었읍니다.—사도 7:29, 30.
12. (ㄱ) ‘모세’와 ‘아론’은 여호와를 의지하는 데 있어서 왜 담대함을 나타내야 하였읍니까? (ㄴ) 여호와께서는 어떻게 ‘이스라엘’ 사람들을 도우셨읍니까?
12 ‘모세’가 ‘바로’ 같은 유명한 왕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을 반드시 내보내야 한다고 최후통첩을 하였을 때에 담대함과 용감성이 필요하지 않았겠읍니까? ‘모세’와 그의 친형 ‘아론’은 이 일을 하였읍니다. 그것도 한번만이 아니라 여러 번하였읍니다. 드디어 ‘바로’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몰아 내었읍니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그는 변심하여 그들을 추격하였읍니다. ‘바로’의 세력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전무한 것처럼 보였읍니다. ‘애굽’ 군대는 뒤를 바짝 추격해 오고 그들 앞에는 거대한 홍해가 가로 막고 있었읍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손을 바다 위로 내밀[라]”고 말씀하셨읍니다. 그렇게 하자 하나님께서는 밤새도록 강한 동풍을 불게하여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고 바다의 밑바닥이 넓은 육지가 되게 하셨읍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마른 땅으로 건너갔읍니다. 그들이 바다의 바닥을 통과해 나가자 ‘애굽’ 사람들은 그들을 추격하였읍니다. 그 때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네 손을 바다 위로 내어밀어 물이 ‘애굽’ 사람들과 그 병거들과 마병들 위에 다시 흐르게 하라”고 말씀하셨읍니다. 이렇게 하여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들의 손에서 구출하셨읍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 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출애굽 14:15-31.
13. (ㄱ)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떻게 여호와를 “보”게 되었읍니까? (ㄴ) ‘여리고’ 내에 살던 누가 여호와를 “보”았으며, 이유는 무엇이었읍니까?
13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도 믿음을 나타내었읍니다. 그도 여호와를 “보”았읍니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 강에 들어섰을 때에 상류의 강물이 기적적으로 멈췄읍니다. 제사장들이 ‘요단’ 강 중앙의 메마른 땅에 서 있는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마른 강바닥을 건너갔읍니다. 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여호와의 임재가 분명하였읍니다. 다음에 ‘여리고’로 전진하였읍니다. 거기서 그들은 엿새 동안 연속하여 그 도시를 한바퀴씩 돌고 일곱 째 날에는 일곱번 돌았읍니다.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고 백성이 함성을 질렀을 때에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벽이 무너졌읍니다.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모든 일에서 여호와를 “볼” 수 있었읍니다. (여호수아 3:15-17; 6:10-16) 그러나 ‘여리고’ 안에 살던 한 사람도 그 때에 여호와를 “보”았읍니다. 그는 ‘라합’이었읍니다. 여호와의 위대하신 능력에 대한 믿음 때문에 그는 생명을 유지하였고 그의 가족도 그러하였읍니다. 그는 ‘여호수아’의 군인들을 숨겨주는 일로 믿음을 나타내었읍니다.—여호수아 2:1-21; 6:25; 야고보 2:25; 히브리 11:30, 31.
14. ‘사르밧’의 과부는 어떻게 여호와를 “보”았읍니까?
14 그 후 예언자 ‘엘리야’가 ‘사르밧’의 어느 과부를 방문한 일이 있었읍니다. 그 여인의 아이가 병들어 죽었읍니다. ‘엘리야’는 그 여인에게 “그 아들을 달라”고 말하였읍니다. 그는 아이를 받아서 “자기의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 가서 자기 침상에” 눞였읍니다. 그 다음 “그 아이 위에 몸을 세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 오게 하옵소서 하니 ···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 오고 살아”났읍니다. 그 과부는 실제로 여호와를 “보”았읍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육안으로 본 것은 아닙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았읍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엘리야’에게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열왕 상 17:7-24; 히브리 11:35.
15. 우리는 ‘구름 같이 허다한 증인들’의 본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읍니까?
15 고대의 충성자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기타 ‘모세’에 이르기까지의 많은 사람들, 그리고 히브리서 11장에 언급된 모든 사람들과 수없이 많은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본” 것을 증거합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12:1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 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자].” 믿음을 나타냄에 있어서 이 사람들은 하나님에 관해 그리고 그분의 불변하는 목적에 관해 뚜렷하게 증거를 하였읍니다. 그들은 실제로 하나님을 “보”았읍니다. 육안으로가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보았읍니다. 당신도 그들 처럼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읍니까?
믿음은 행동하게 한다
16.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어떻게 “봅”니까?
16 우리가 어떤 것을 육안으로 실제 보지는 못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경험이나 업적을 통해 그것을 분별하게 되면 우리는 이러한 믿음의 특성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임박한 새 질서를 인정 혹은 “본”다고 말할 수도 있읍니다. 현재 영적 낙원에서 새 질서를 미리 즐기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문자적인 환상을 본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그것을 보았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1:19, 20에 기록된 ‘바울’의 말은 우리에게 그 점을 깨닫게 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불신자들]가 핑계치 못할 찌니라.” 믿음은 구체적인 증거 위에 구축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신빙성과 하나님의 예언의 정확한 성취는 우리 마음에 확고한 믿음을 심어줍니다.
17. 우리는 어떻게 ‘보이지 않는 분을 보는 데 있어서 꾸준할’ 수 있읍니까?
17 여호와께서는 “모든 사람이 희개하는 데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베드로 후 3:9, 새번역)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일에 확고부동해야 합니다. 우리는 전도 능력이 부족하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그것은 믿음을 강화하는 그 활동을 주저할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생명수”를 받아들인 사람들 모두가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줄 것을 원하십니다. 우리는 ‘모세’와 같이 “보이지 않는 그 분을 보는 것 같이 하여 꾸준히” 행하고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을 “보”도록 도와야겠읍니다. 계시록 22:17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읍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 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강한 믿음을 가지고 우리는 그 초대를 하는 일에 전심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18.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 우리의 약점을 극복할 수 있읍니까?
18 ‘모세’는 자신이 받은 사명을 수행할 만한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였읍니다. 그는 말이 유창하지 못하다고 이유를 대었읍니다. (출애굽 4:10) 그렇지만, 여호와의 후원을 받아서 그는 성공을 거두었읍니다. 우리는 자신의 약점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여호와께서 우리도 도와주실 것을 확신할 수 있읍니다. 많은 사람들은 여러 경우에 이러한 점을 경험하지 않았읍니까? 당신은 여호와의 증인들의 회중 집회에 처음 참석하였을 때에 “나는 도무지 다른 사람들처럼 말을 잘할 수 없어” 하고 생각하였읍니까? 당신은 또한 “나는 청중이 많든 적든 사람들 앞에서 연설은 할 수 없어” 하고 생각하였읍니까? 그렇지만, 당신은 과거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던 그 일들을 지금은 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였고 하나님의 영이 당신과 함께 한다는 것을 알고 또 그 영이 당신에게 힘을 준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고린도 후 12:10.
19. (ㄱ) 우리는 누구의 사업에 참여하고 있읍니까? (ㄴ) 무슨 훌륭한 예가 이 사실을 확증해 줍니까?
19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수행하라고 주신 사업은 사람들의 사업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업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 호응을 하도록 하시는 분도 그분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서 전도하던 때 겪은 일에 잘 나타났읍니다.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여호와]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그렇습니다. 바로 여호와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주셨으며, 그 결과 그 사람과 그 가족이 다 침례를 받았읍니다.—사도 16:14, 15.
20, 21. (ㄱ) 우리는 어떻게 하여 냉담한 구역의 도전을 극복할 수 있읍니까? (ㄴ) 여호와의 이름이 어떻게 관련되어 있읍니까?
20 우리의 재능과 자질이 어떠하든 간에, 우리는 그것을 사용하여, 정직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지위가 어떠하든, 그들에게 호소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느 곳으로부터 힘을 얻어야 합니까?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분은 여호와이십니다. 그분은 ‘모세’와 ‘아론’에게 힘을 주신 바와 같이, 어떤 경우 혹은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용감하고 두려움없이 행동할 수 있도록 해 주실 것입니다. 꾸준히 여호와를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듣지 않더라도 계속 힘을 다하여 “좋은 소식”을 선포할 수 있읍니다. (디모데 전 4:10) 사람들이 아무리 냉담하더라도 우리는 그들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예측할 수 없읍니다. 그들이 변할 수도 있읍니다. 여호와께서는 참을성을 보이시어 그들에게 변화를 받을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주십니다. (베드로 후 3:9) ‘모세’가 ‘바로’ 앞에 여러 차례 나간 것 같이 우리도 냉담한 사람들을 재차 삼차 계속 방문해야 하지 않겠읍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이 관련되어 있음을 기억하고 여호와를 우리 앞에 모시고 있다면 그렇게 할 것입니다.—시 16:8.
21 설사 사람들이 변화받기를 거절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이름은 알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심판이 집행되기 전에 충분한 경고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결국 모든 나라가 하나님이 여호와인줄을 “알” 것입니다.—에스겔 39:7.
22. 지상 도처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이 일로부터 우리는 어떻게 격려를 받아야 합니까?
22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응하는 사람들이 과거 어느 때 보다도 많습니다. (이사야 60:8, 22) 어떤 곳에서는 사람들이 여호와의 증인들을 찾아와 가정 성서 연구를 사회해 달라고 호소합니다. 만일 당신의 구역에서도 이러한 일이 생긴다면, 당신이 더 많은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신의 일을 조절하도록 감동을 받지 않겠읍니까? 그 일은 당신에게 격려가 되어 사람들의 가정을 방문하고 또 그들과 함께 연구하여 계속 돕는 일에 시간을 더 많이 바치도록 하지 않겠읍니까? 이러한 방법으로 당신은 전파하고 제자를 삼는 일을 확장할 수 있읍니다. 아마 그 다음에 당신이 취할 수 있는 단계는 임시 혹은 정규 ‘파이오니아’(전 시간 봉사)를 하여 더 많은 사람들로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도록 돕는 일일 것입니다. 더 많은 일군 그리고 추수 사업에 대한 열심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욱 필요합니다!—누가 10:2, 3.
23, 24. (ㄱ) 구역을 자주 돌면 어떤 일을 성취하게 됩니까? (ㄴ) 여기서 우리에게 어떤 태도를 권면하고 있읍니까?
23 현 시대에 당신이 사는 지방의 상태가 어떠하든 간에, 사람들이 진리를 자주 들으면 들을 수록 그들이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는 지식을 받아들일 기회가 더 많아집니다. (요한 17:3) 우리의 태만 때문에 어떤 사람이 위대하신 생명의 수여자에 관해 더 배우고 연구할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원치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에스겔 33:8, 9.
24 우리는 사람들의 상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그들에게 동정심과 연민의 정신을 나타내야 하지 않겠읍니까? (마태 9:35-38) 우리가 자신의 불편을 무릅쓰고 다른 사람으로 진리를 알도록 돕기 위해 기꺼이 우리의 시간과 노력을 바쳐야 하지 않겠읍니까?—에베소 5:15-17.
반대에 직면해서 확고함
25. (ㄱ) 세계 도처에 사는 많은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은 어떠한 경험을 하였읍니까? (ㄴ) 우리는 이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아야 합니까?
25 세계 여러 곳에 사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극심한 시련을 당하였읍니다. 많은 경우 그 시련은 생명을 잃는 정도에까지 이르렀읍니다. 얼마나 심한 시련이었는가는 앞에서 말한바 있읍니다. 몇십년 전에 독일의 많은 증인들은 생명을 잃었읍니다. 바로 이 순간에도 ‘말라위’와 ‘아프리카’의 기타 나라들, 그리고 공산주의 몇몇 나라들에서 극도의 박해가 진행되고 있읍니다. 우리는 반대를 당할 때에 이들 충성된 사람들의 본으로부터 많은 격려를 받을 수 있읍니다. 그들은 진리를 위하여 그리고 그의 의로운 원칙을 위하여 확고부동하였읍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읍니다.—예레미야 1:19; 15:20, 21.
26, 27. (ㄱ) 과거 여호와의 충실한 종들은 어떤 일을 당하였읍니까? (ㄴ) 우리는 어떤 일을 기대할 수 있으며, 그에 대해 어떤 반응을 나타내야 합니까?
26 여호와의 충실한 종들 중 많은 사람들은 과거에 부당한 조롱을 받았읍니다. ‘욥’이 성실을 유지한다는 이유로 얼마나 비웃음과 조롱을 당하였고 얼마나 웃음거리가 되었던가 생각해 보십시오. (욥 12:4; 17:2) 또한 ‘다윗’도 조롱과 비웃음을 당하였읍니다.—시 22:7; 35:16.
27 ‘예레미야’도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었으며, 그는 여호와에 관하여 말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기까지 하였읍니다. (예레미야 20:8, 9) 그러나 그는 중단하지 않았읍니다. 왜 중단하지 않았읍니까? 왜냐 하면, 그는 여호와의 위대하심과 선하심을 인식하였고, 여호와께서 자기와 함께 하셔서 그의 생명을 찾는 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출해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예레미야’와 같이 꿋꿋함을 유지하면서 그와 동일한 축복을 기대해야 하지 않겠읍니까? 우리는 여호와의 현대적인 증인으로서, 과거에 ‘예레미야’가 그 당시에 미움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도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사실이지, 우리는 한 백성으로서 박해와 치욕을 살아남은 점에 있어서 위안을 받을 수 있읍니다. 여호와께서 이러한 시련을 통하여 자기 백성을 보존해주신 데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20:11, 1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의 지존성을 부인한다거나 진리의 사업을 증진시키는 일에 침체된다면 실로 어리석고 믿음이 없는 행동인 것입니다!
28. (ㄱ) 충실한 세 ‘히브리’인이 당한 시련을 묘사하십시오. (ㄴ) 그들의 경험으로부터 그리고 ‘바울’의 말로부터 우리는 무슨 교훈을 받을 수 있읍니까?
28 가혹한 시련을 당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처지는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처지와 같이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뜨거운 풀무 속에 던지울 입장을 당하여서도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다니엘 3:17) 그리고 그들은 그 말로 그치지 않고 계속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다니엘 3:18) ‘사단’이 우리에게 입힌 손해를 여호와께서 완전히 보상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커다란 위안을 받을 수 있읍니다. 그러니 완전한 상황하에서의 영원한 생명에 비한다면 일시적인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바울’의 말은 매우 위안이 되며, 우리가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를 잘 설명해 줍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오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린도 후 4:17, 18.
29, 30. (ㄱ) 우리는 어떠한 인내의 본을 따라야 합니까? (ㄴ) ‘욥’은 충실성에 있어서 어떠한 본을 보였읍니까?
29 여호와를 섬기는 우리 동료 증인들에 대한 탄압이나 박해 사실은 우리에게 슬픔이 될 수 있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의 손에 가혹한 학대를 받는 것을 보고 ‘모세’도 그러한 느낌을 받았읍니다. (출애굽 5:22, 23) 우리의 형제들이 고난을 당할 때에 우리가 동정심을 느끼기는 하지만, 그것을 듣고 무서워해서는 안됩니다. (고린도 전 12:26) 만일 그러한 고난을 당한다면, 우리도 그들의 인내의 본을 따르며 우리의 믿음이 승리할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베드로 전서 1:6, 7에서 말한 바와 같습니다.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30 시험하에서 믿음을 고수하면 마귀를 거짓말장이로 증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욥’은 이에 대한 훌륭한 본이 됩니다. ‘사단’은 ‘욥’으로 하여금 ‘대면하여 하나님을 욕하게’ 할 수 있다고 도전하였으나 ‘욥’은 온갖 시련을 통하여 ‘그의 성실성을 굳게 지키’었읍니다. 그는 계속하여 참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읍니다.—욥 2:4, 5, 9, 10; 또한 잠언 27:11 참조.
31. 우리는 믿음으로 무엇을 바라볼 수 있읍니까?
31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기대를 가지고 앞을 바라볼 수 있읍니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원수들을 이기신 다음 환난으로부터 백성을 구원해 주시는 것을 상상해 볼 수 있읍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편지할 때에 행악자들과 박해자들에게 어떤 일이 닥칠 것인가를 이렇게 썼읍니다.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데살로니가 후 1:9.
32. 원수가 우리에게 어떠한 난관을 초래하더라도 왜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까?
32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 가운데 기록된 믿음의 본들로부터 커다란 위안을 받을 수 있읍니다. 그러므로, 사람들과 정부들이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에게 어떤 고난을 가져오든 간에 우리는 우리를 구출해 주시는 여호와의 능력에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충성스런 봉사를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웅대한 승리가 가져올 축복을 우리 각자에게 나누어주실 하나님 곧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 같이 하여’ 굳은 결심을 가지고 힘차게 전진해야 합니다.
[227면 삽화]
‘모세’가 홍해 위로 손을 뻗치자 물이 갈라졌으며, 그리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은 마른 땅 위를 통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