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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당신과 얼마나 가까운 분인가?파수대—1984 | 1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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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당신과 얼마나 가까운 분인가?
세 살된 ‘라파엘’은 “여호와, 안녕하세요?”라는 간단한 방법으로 기도를 시작하였다. 어른이 그런 식으로 기도를 시작한다는 것은 옳지 않게 보이겠지만 우리는 이 어린 아이의 어린애다운 천진함에 미소를 지을 수 있다. ‘라파엘’이 하나님을 가까운 분으로 느끼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결코 추상적인 힘 정도가 아니다. 그분은 실재하는 인격체이시다. 독자에게도, 하나님은 그러한 실재하는, 가까운 분이신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분에 관해 더 많이 배우려고 하지 않거나 그분과 가까와지려고 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교만한 태도 때문에 하나님과 가까와지지 못한다. 하나님의 눈은 “교만한 자를 살피”신다고 ‘다윗’ 왕은 말하였다. (사무엘 하 22:28) 다른 사람들은 너무 겸허한 나머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만한 사람들은 어린애 같은 예민한 감수성을 배양할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태 18:2-4) 그리고 지나치게 겸허한 사람들은 아마 ‘라파엘’로 하여금 그처럼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한 어린애같은 태도를 좀더 갖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그러나 올바른 태도를 갖는 것이 좋은 출발이긴 하지만, 진정으로 하나님과 가까와지기 위해서는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그분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 작품들을 바라보면, 마음이 감동되어 시편 필자 ‘다윗’처럼 그분에 관해 생각하게 되고 그분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게 되지 않는가? 그는 이렇게 질문하였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시 8:3, 4) 시간을 내어 하나님의 창조물에 관해 인식 깊은 마음으로 묵상하는 것은 확실히 독자와 하나님 사이의 사랑의 띠를 강화시켜 줄 것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두개의 자석은 올바로 배열하면 서로 끌어당긴다. 참으로, 서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끌어당기는 힘은 더 강해진다. 그와 비슷한 일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다. 제자 ‘야고보’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고 말하기 때문이다.—야고보 4:8.
하나님에 관하여 배우는 것은 그분을 “가까이 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요한 17:3)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연구함으로써만 우리는 그분의 이름인 여호와와, 땅에 대한 그분의 목적에 관한 진리 그리고 사랑, 지혜, 공의 및 능력과 같은 그분의 속성들을 배워 알 수 있다. (시 83:18) ‘하지만, 나는 이미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전적으로 의로우시며 지혜와 사랑이 충만한 분임을 알고 있다’고 독자는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하나님에 관한 정확하고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음을 뜻하는가? 꼭 그런 것은 아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특성에 관한 단순한 진술 자체만으로는, 특히 그것들을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과 연관시켜 설명할 수 없다면 다소 무의미해 보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면서부터 귀머거리인 사람이 “큰 소리”가 무엇이고 “부드러운 소리”가 무엇인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러한 소리들을 비교할 수단이 전혀 없다면 참새의 짹짹거리는 소리와 비둘기의 구구하는 소리의 차이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와 비슷하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진술만으로는 냉혹한 사실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요한 1서 4:8)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정신적으로 감정적으로 온전히 이해하려면, 그 사랑이 인류에게 어떻게 표현되어 왔는가를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요한 3:16) 그는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과 연관시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찌어다”라고 시편 필자는 말하였다. (시 34:8) 개인적으로 그렇게 함에 따라 그는 하나님께 가까와지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아버지를 쳐다보며, 어린 ‘래리’는 이렇게 질문한 일이 있다. “다른 누구보다도 여호와를 사랑해야 한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어떻게 아빠보다 그분을 더 사랑할 수 있지요? 아빠는 볼 수 있고 또 사랑하지만, 여호와는 볼 수가 없는데 말예요.” 아버지는 처음에 그런 감정을 갖는 것이 극히 정상임을 설명함으로써 그 아이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그 어린 아이는 여호와의 놀라운 특성들과 행적에 관한 성서 기록을 배운 후에, 그리고 하나님의 인자하신 돌봄을 개인적으로 체험함으로써 다른 누구에게보다도 여호와께 대한 더 강한 애착을 발전시킬 수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마태 22:37, 38) 시간을 내어 여호와 하나님에 관하여 배우는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의미하는 것
흔히 우리는 조금 아는 사이거나 단순히 어떤 사람을 식별한다는 의미로 “안다”는 말을 사용한다. 우리는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나는 그 사람을 알지요’라고 말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심지어 어딘가에서 흘끗 보았을 뿐이거나 잠깐 소개받았던 사람일 경우에도 그렇게 말할지 모른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분과 대충 알고 지내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는 것을 인식하도록 우리를 돕는다. 하나님의 영감받은 ‘요한’의 첫째 편지에 나오는 얼마의 요점들을 고려해 보도록 하자. 그 일부를 요약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그것은 어두움 가운데로 행하지 않고 진리를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를 따르고 진리에 고착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안다면, 우리는 그분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그 응답으로 우리에게 그분의 뜻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거리낌없이 기도로 그분께 나아갈 것이다.—요한 1서 1:5-7; 2:3, 4, 13, 14; 3:19-24; 4:6-8, 13; 5:3, 14, 15.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소극적인 어떤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누리려면 많은 노력이 요구된다. 확실히, 어떤 명목상의 종교 의식 이상의 일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많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즐긴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어떤 갑작스러운 감정적인 흥분도 아니다. 시편 필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다.” (시 25:4, 5)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생활의 길 전체인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에게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찌어다”라고 권고한 후에 시편 필자는 이렇게 말한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찌어다.” (시 34:8, 14) 어떤 경우에는, “악을 버리”기 위해 단호한 행동을 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1960년대에 ‘히피’였던 ‘마리’는 심하게 마약에 중독되어 있었다. 결국 그것은 도둑질, 부도덕, 낙태, 심지어 매춘 행위로까지 인도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여호와의 증인’을 만나게 되었고 하나님께 가까와지려면 변화를 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나는 하루에 두세갑 피우던 담배와 모든 마약을 끊었으며, 음행에 관한 여호와의 명령을 따르기로 마음에 결심하였읍니다. 나는 꿈, 점성술 및 영매술에 관한 일체의 서적을 내다버리고 우상 숭배에 쓰이는 조상(彫像), 초 및 그림들을 전부 없애버렸읍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께 헌신하였고 지금까지 그분을 섬기고 있다.
그러나 당신도 하나님을 알게 되는 데 필요한 노력을 기울일 것인가? 당신의 생활 방식이 ‘마리’만큼 극단적은 아닐지 모르지만, 진정한 변화를 할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당신은 하나님께서 어린애같은 열망으로 그분의 뜻을 배우고 행하는 가운데 진실하고 겸손하게 그분을 찾는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으실 것을 확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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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자녀들이 하나님과 가까와지도록 도우라파수대—1984 | 1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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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자녀들이 하나님과 가까와지도록 도우라
천개도 안 되는 단어로, 성서 필자들은 예수의 생애의 처음 30년간을 묘사한다. 그러나 그들은 수만 단어를 사용하여 마지막 3년 반에 대해 보고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적인 봉사의 직무—그분의 출생, 어린 시절 및 청년기가 아니라—가 복음서 기록의 지배적인 주제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예수의 초기 생애에 대한 성서의 간단한 언급은 어린 자녀들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과 가까와질 수 있음을 분명히 알려 준다.
성서를 열어 ‘누가’의 기록의 제 2장을 펴보면, 우리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율법 “선생들 중에 앉”으신 12세된 예수를 보게 된다. 그분은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셨으며, 또한 “그 지혜와 대답”으로 그들을 놀라게 하셨다. (누가 2:46, 47) 더우기, 우리는 그분이 신체적으로 성장하시면서 지혜와 이해력도 더하여졌다는 기록을 보게 된다.—누가 2:40, 52.
우리는 예수께서 이처럼 영적 성향을 가지시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가? 적어도 영예의 일부는 그분의 부모에게 돌아가야 한다. ‘유대’인으로서, 그들은 자녀를 양육하면서 여호와의 교훈을 따를 의무 아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예언자 ‘모세’는 이렇게 말했었다.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니라.]” (신명 6:6, 7) 의심의 여지없이,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이 이러한 교훈을 이행할 가정에 태어나게 하셨을 것이다. 오늘날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에게 동일한 관심을 나타내야 한다. 당신은 그들이 여호와를 알고 그분을 섬기기 원하도록 돕고 있는가?
“어려서부터”
영적인 훈련은 자녀들이 더 나이가 들 때까지 미루어도 되는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디모데’는 자라서 탁월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성경으로 교훈을 받았던 것이다. (디모데 후 3:15) 그와 일치하게, 일부 그리스도인 어머니들이 갓난 아기에게 젖병을 물리기 전에 큰 소리로 여호와의 축복을 구하는 것이 관찰되었다. 얼마 안 되어 이러한 유아들이 그러한 기도의 끝에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영적 및 물질적 선물들에 대한 인식을 발전시키도록 돕는 작은 첫 단계인 것이다.
‘미카엘’과 ‘시포라’(각각 일곱 살과 여덟 살)는 부모의 훌륭한 훈련의 결과를 보여주었다. 한번은, 그들이 부모와 함께 여행을 하였는데, 그들이 솔선해서 하나님께 인도와 보호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목적지에 다다르자 자녀들이 무사히 도착한 것에 대해 여호와께 감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크리스티안’과 ‘에릭’(세살과 여섯 살)은 부모와 함께 공원에 나갔다. 때때로 어린 아이들에게 일어나듯이 그들은 길을 잃었다. 부모는 언제 그들을 발견하였는가? 바로 그 어린 아이들이 도와 달라고 여호와께 기도하고 있던 때였다!
자녀들이 아주 어렸을 때에 여러 가지 형태의 훈련을 성공적으로 베풀 수 있다. ‘벨기에’의 큰 그리스도인 대회에서, 세살된 ‘지노’는 연단에 초대되어 높은 걸상에 앉았다. 연사는, 청중 앞에서 성서 66권 전체의 이름을 암송해 볼 것을 그에게 요청하였다. 독자라면 할 수 있겠는가? ‘지노’는 할 수 있었다! 그는 부모의 훈련을 받으며 계속 잘 발전하였고 지금은 ‘여호와의 증인’의 여행하는 감독자로 봉사한다. 물론, 모든 자녀들이 동일한 학습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사실은 그들에게 영적 교훈을 베푸는 것이 유익함을 분명히 예증해 준다.
어린 자녀들에게 심지어 성서 교리도 이해시킬 수 있다. ‘룩셈부르크’의 ‘그랜드 더치’에 있는 한 보육원에서, 네살된 ‘카이’는 다른 어린이들과 함께 기도하기를 거절하였다. 이유를 물었을 때, 그는 “우리는 삼각으로 된 신을 믿지 않아요!”라고 대답하였다. 물론 ‘가톨릭’ 삼위일체 신에 대한 ‘카이’의 개념이 완전히 정확한 것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그가 그 신에게 기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데에는 충분하였다!—마가 12:29.
하나님을 그들의 생활의 일부가 되게 하는 일
자녀들에게는 때때로 문제들이 있다. 자녀들은 이러한 문제들을 혼자만 간직할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 털어놓아야 한다. 그러나 자녀들은 또한 ‘그들의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도록 격려받아야 한다. (시 55:22) 그들은 여호와께서 그들의 요청을 무시하지 않으실 것임을 인식하도록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마가 10:14) 그리고 자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가르침 받아야 한다.—요한 14:6.
자녀들이 도움을 구하기 위해 여호와를 의지하는 법을 배우고 그렇게 한 결과를 보게 될 때, 종종 그것은 그들의 믿음에 극적인 영향을 미친다. 현재 ‘워치 타워 협회’의 한 지부 사무실에서 봉사하는 젊은이인 ‘잭퀴’는 그가 열 네살 때 있었던 경험을 이렇게 말한다. “그 해 우리의 순회 대회는 학기말 시험 전 주말에 계획되었지요. 문제는 선생님이 금요일까지 시험 볼 내용을 알려 주지 않은 것이었읍니다. 부모님과 그 문제를 의논한 후에, 우리는 공부할 시간이 거의 없게 된다 하더라도 내가 대회 ‘프로그램’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결정하였지요. [히브리 10:24, 25] 나는 여호와께 최선을 다해 시험에 대비하는 나의 노력에 도움을 주실 것을 기도하였읍니다.
“월요일 아침이 되었으며, 모든 학생들은 처음으로 하는 구두 시험이었기 때문에 매우 긴장하였지요. 나는 다시 한번 여호와께 함께 해주실 것을 기도하였읍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고요? 나는 그날 다룬 문제들에 대해 어떤 학생보다도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지요. 심사원으로 나온 한 선생님은 ‘얼마나 대답할 수 있는지 보고 싶다’고 말하면서 나에게 더 많은 질문을 하기까지 하였읍니다. 그러나 나는 그 선생님의 질문들에 대답할 수 있었지요.”
‘잭퀴’는 이 훌륭한 결과로부터 무엇을 배웠는가? “여호와의 도움을 경험하는 것은 나로 그분과 더욱더 가까와지게 하였지요. 나는 우리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여러 형태의 기도와 간구로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읍니다.”—빌립보 4:6, 7.
그렇다. 우리가 어린 자녀들이 여호와를 “알”도록, 그분을 그들의 생활의 일부가 되도록 돕는 일은 중요하다. 여호와께서 그들이 관계하는 일들에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지각한다면 그들은 단지 그분에 관해 듣고 읽었을 때보다도 그분을 계속 충실하게 섬기려는 훨씬 더 큰 자극을 받게 되지 않겠는가? 물론, 이런 식으로 그들을 훈련시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어린 자녀들은 부모가 여호와에 관한 영적 지식의 유산과 함께 그들에게 넘겨준 열심과 양심적인 태도를 쉽사리 잊지 않을 것이다. 여호와께서도 그러한 충실한 노력을 잊지 않으실 것이다. (히브리 6:10-12) 그러므로 부모 여러분은 어린 자녀들이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께서, 그분을 알고 그분이 아는 사람들에게 제공하시는 상인 ‘영원한 생명’을 획득하도록 돕는 일을 진력해야 할 것이다.—요한 17:3.
[7면 삽입 성구]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니라.]”—신명 6: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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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흐뭇하게 해준 대답들파수대—1984 | 1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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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흐뭇하게 해준 대답들
아버지는 여덟 살된 딸 ‘데보라’에게 “너 여호와께 기도하니?” 하고 물었다. 딸은 “그럼요, 많이 해요”라고 대답하였다. “언제하지?” “혼자 있을 때요.” “왜 그때 하니?” “방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요!”
어머니는 여섯 살된 ‘로오렌트’에게 “오늘 밤 방의 불을 켜두고 나갈까?” 하고 물었다. (‘로오렌트’는 어두운 것을 무서워하였고 그 점에 관해 여호와께 기도하라는 교훈을 받았었다.) “아니요.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까 이제는 무섭지 않아요.”
여섯 살된 여자 아이는 기도 가운데 이렇게 말하였다. “여호와, 감사해요. 부활의 희망을 주셔서요. 아주 멋진 생각이예요!” 또 다른 기도 가운데서,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여호와, 우리가 낙원에 있을 때 여기 우리 지방에서는 하실 일이 많으실 꺼예요. 여기에는 비가 아주 지독하게 많이 내리거든요.”
세 살된 ‘우도’는 이렇게 기도하였다. “여호와 하나님, 제발 우리 아버지도 성서를 읽고 ‘아마겟돈’에서 죽지 않게 해주세요!” 그 아이의 침실 문은 열려 있었고, 그의 아버지가 그 기도를 들었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그 아버지의 마지막 반대를 무너뜨렸고, 현재 그는 여호와의 충실한 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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