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약속의 성취를 기대하며 생활하라
1, 2. (ㄱ)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장차 무슨 일이 있을 것이며, 따라서 어떠한 질문들이 생깁니까? (ㄴ) 사도 ‘베드로’는 현재 질서에 발생할 일을 어떻게 묘사합니까?
전세계 질서는 곧 변화하게 되어 있읍니다. 인간 생활의 모든 부면이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실패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현재의 하늘과 땅의 종말 및 영광스러운 새 하늘과 새 땅으로의 대치를 명하였기 때문에 이 변화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사태 변화는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할 것입니까?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기대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읍니까?
2 사도 ‘베드로’는 ‘노아’ 시대의 세계적인 홍수를 지적한 후에 이렇게 기술하였읍니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베드로 후 3:7) 사도는 이어서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하고 말하였읍니다.—베드로 후 3:10.
3. 「창세기」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지구를 포함한 물질적 우주에 관해 어떠한 논리적 결론을 내려야 합니까?
3 이 영감받은 말씀에 근거하여, 우리는 문자적인 지구와 태양 및 별이 파괴될 것이라고 결론지어야 합니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견해를 고려해야 합니다. 「창세기」는 창조 기간 끝에 대해 이렇게 알려 줍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세 1:31) 첫 인간들 앞에 놓인 전망은 그들이 순종하는 한 지상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읍니다. (창세 2:16, 17; 3:3) 「창세기」 가운데에는 지구가 인간의 임시 거처에 불과하고 미래의 심판 날에 결국 완전히 파괴될 것이라는 암시가 전혀 없읍니다. 따라서 논리적인 결론은, 지구를 포함한 물질적 우주가 무한히 존속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읍니다.
4. (ㄱ) ‘베드로’는 대홍수 전후의 사태와 관련하여 무엇을 구분하였읍니까? (ㄴ) 대홍수는 어떠한 일을 하지 않았읍니까?
4 더우기, 사도 ‘베드로’는 (1) ‘물에서 조밀하게 나와 물 가운데 서 있는 옛적부터의 하늘과 땅’을 (2) ‘지금 있는 하늘과 땅’과 구분하였읍니다. (베드로 후 3:5, 7, 신세 참조.) 그러나 홍수 이전에 존재한 땅은 아직도 존재하는 이 지구입니다. 물론 대홍수는 지구의 실제 특성 몇가지를 변경시켰읍니다. 물은 이제 지구 표면 위로 높이 떠 있지 않으므로, 인간 관측자의 관점에서 볼 때 보이는 우주의 모습이 달라졌읍니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대홍수의 부수적인 영향에 불과하였읍니다. 대홍수의 목적은 문자적인 지구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방주 밖에 있던 불경건한 인간 사회를 멸망시키는 것이었읍니다. 대홍수를 통해, 무신적인 인간 사회가 산출한 모든 결과와 체제가 파괴되었읍니다.
5. 대홍수와 상응하려면 심판 날에 무슨 일이 있어야 합니까?
5 그러므로, 대홍수와 상응하려면, 현재의 악한 사물의 제도와 관련된 모든 것이, 마치 불에 소멸되듯이 소멸되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대홍수 후에 존재하게 된 인간사의 전체 구조는 멸망의 때 그리고 심판 날을 위해 보존되어 왔읍니다.
6. 낡은 질서를 종결시키는 “불”은 문자적입니까?
6 여기에서 “불”이 멸망의 철저함을 상징하는 데 사용되었다는 점은 성서 「계시록」에 확증되어 있읍니다. 거기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는 전쟁하는 왕으로 묘사되어 있읍니다. 그의 전투로 지구상에 시체가 즐비할 것이며, 시체를 먹는 새들에 의해 그 시체들이 없어질 것으로 설명되어 있읍니다. (계시 19:15-18) 그러한 묘사는 이 지구가 문자 그대로 생명없는 숯덩이로 화한다면 도저히 성취될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7. 베드로 후서 3:10의 말씀은 다가오는 멸망에 대해 무엇을 지적합니까?
7 그러므로, 현재의 하늘과 땅의 멸망에 대한 ‘베드로’의 묘사는 불경건한 인간 사회의 멸절과 관련되어 있읍니다. “하늘”과 같이 인간 사회를 지배하여 온 인간이 설립한 정부들은 존재를 그칠 것입니다. (이사야 34:2-5; 미가 1:3, 4 비교.) 그러한 것들이 분해되는 소리는 압축 증기가 빠져 나올 때와 같은 “큰 소리”로 묘사된 바와 같이 강렬할 것입니다. 체질 즉 “요소들”은 불경건한 인류가 하나님을 모독하는 방법으로 생각하고, 계획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하는 영을 의미합니다. 그 영은 분해되어 없어질 것입니다. (사도 9:1; 에베소 2:1-3 비교.) 이것은 지존자로부터 소외된 인류의 영을 반영하는 모든 철학, 이론, 체제 및 계획이 종결될 것을 의미합니다.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즉 멸망에 합당한 것으로 폭로될 것입니다. “땅” 즉 악한 인간 사회의 어떠한 구성원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창세 11:1; 이사야 66:15, 16; 아모스 9:1-3; 스바냐 1:12-18 비교.) 불법적인 사람들의 모든 일—여러 가지 단체와 조직체 및 이러한 것들과 관련하여 구축된 것들—이 하나님의 승인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날 것이며, 무가치한 쓰레기로 처분될 것입니다.
8. 현 제도의 모든 부분이 소멸될 것이므로, ‘베드로’의 어떠한 충고를 우리는 마음에 간직해야 합니까?
8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는 현재의 불경건한 제도의 모든 부분이 영원히 소멸될 것임을 참으로 믿는다는 것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렇게 하라고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이 모든 것이 그와 같이 분해될 것이므로,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행위 안에서 여호와의 날의 임재를 기다리고 항상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그날에 하늘은 불에 타서 분해되고 모든 요소는 극도로 뜨거워져 녹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베드로 후 3:11, 12, 신세.
9. 누구만이 다가오는 멸망을 생존하여 영원한 축복을 받을 것입니까?
9 현 제도의 모든 부분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표현되는 하나님의 진노의 “불”에 분해될 때, 고결한 행실과 경건의 기록을 가진 사람들만 피할 것입니다. 참 숭배란, 특정한 죄를 피하는 것에만 반영되는 소극적인 것이 아닙니다. 도덕적 영적 순결을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긴 하지만, 우리는 또한 기꺼이 그리고 열심히 우리의 동료 인간들을 신체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도와 줌으로써 그들에 대한 사랑을 증명할 의무 아래 있읍니다. 그리고 이것은 기쁨을 크게 더해 줍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사도 20:35.
임박한 종말을 인정하는 행동
10. 임박한 “만물의 마지막”에 비추어, ‘베드로’는 어떠한 충고를 하였읍니까?
10 사도 ‘베드로’의 다음 말은 임박한 “만물의 마지막”에 비추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혀 줍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없이 하[라.]”—베드로 전 4:7-9.
11. ‘건전한 정신’을 유지하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11 이러한 충고와 일치하게,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고결한 행실을 유지하고 다른 사람들의 영적 복지를 촉진하는 일에 활동적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근신 즉 ‘정신이 건전’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감정에 지배되거나 감정에 의해 정신적 균형을 잃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생활 중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들을 인정하고 더 중요한 것에 대한 균형잡힌 지각을 가지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빌립보 1:9, 10.
12. (ㄱ) “정신을 차리고 ··· 기도”하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ㄴ) ‘베드로’는 경험을 통해 이것의 중요성을 어떻게 인식하게 되었읍니까?
12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충실한 종으로서의 신분을 유지하려면,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성공할 것을 기대할 수 없읍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하고 ‘정신 차려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기도와 관련하여 “정신을 차리”는 즉 깨어 살피는 중요성을 배웠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무장 폭도에게 체포되기 직전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격려하셨읍니다. 그러나, 사도 세명 모두 이 중대한 때에 잠이 들었읍니다. (마태 26:36-46; 마가 14:32-42; 누가 22:39-46) 기도와 관련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했기 때문에 약해진 ‘베드로’는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세 차례나 부인하였읍니다. (요한 18:17, 18, 25-27) 그러나, 이보다 앞서 ‘베드로’는 단호히 이렇게 선언하였읍니다.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누가 22:33)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태 26:33.
13. ‘베드로’가 ‘정신 차려 기도’하지 않았을 때에 경험한 일은 우리에게 어떠한 교훈이 될 수 있읍니까?
13 ‘베드로’에게 발생한 일에는 우리를 위한 중대한 교훈이 있읍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과신의 위험성을 인상깊게 깨우치는 교훈이 될 수 있읍니다.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제약과 약점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만 유혹을 성공적으로 물리칠 수 있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 흔들리지 않는 깨어 있는 정신과 마음으로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14. 우리가 그리스도인 책임을 이행하는 동기는 무엇이어야 하며,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동료 신자들을 대하는 일에 어떻게 나타납니까?
14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신분과 관련하여 깨어있고 균형잡힌 상태를 유지하는 외에, 우리가 우리의 책임을 이행하는 동기가 사랑인지의 여부를 고려하는 것이 좋습니다. (고린도 전 13:1-3)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동료 신자들에 대해 ‘뜨겁게 사랑’해야 한다고 권고하였읍니다. 그러한 강렬한 사랑은 용서하는 정신에서 나타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우리 형제들의 결함을 과장하지 않게 되고 그들의 실수에 지나친 관심을 돌리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과오를 찾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가능한 한 나쁜 면으로 생각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와 같이 용서하는 정신을 보일 때 우리의 사랑은 허다한 죄를 다른 사람들이 훤히 볼 수 있도록 노출시키는 것이 아니라 덮어 줄 것입니다.
15. 왜 후대하는 것이 필요할 수 있으며, 그러한 경우에 어떠한 태도를 보여야 할 것입니까?
15 후대하는 것 또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의 양식과 필수품을 다른 사람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누가 14:12-14) 동료 신자들이 천재지변이나 박해를 통해 모든 것을 상실하게 될 때, 이것은 우리의 집을 오랫 동안 그들에게 개방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읍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매우 불편할지 모르며 우리의 자산이나 정력에 가외의 부담이 된다고 불평하기 쉬운 일일 수 있읍니다. 그러한 때에 우리는 이러한 훌륭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사랑을 표시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반복적으로 후대를 보이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대해 불평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16, 17. (ㄱ) 우리는 우리가 가진 선물을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ㄴ) ‘바울’은 어떠한 훌륭한 태도를 추천하고 또 나타냈읍니까?
16 우리 모두에게는,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재능 혹은 자질이 분명히 있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승인받는 종의 신분을 유지하는 것은 우리가 이러한 재능을 열심히 그리고 즐거이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읍니다.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는 것이 현명합니다. 비교하지 말아야 다른 사람의 능력이 우리의 능력보다 훨씬 나을 때 실망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어떤 활동 분야에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일을 달성할 수 있을 때 우월감을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갈라디아 6:3, 4) 사도 ‘베드로’가 한 말에 유의하십시오.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베드로 전 4:10)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은사를 온전히 사용할 책임이 있읍니다. 우리의 신분과 우리의 소유는 하나님의 과분하신 친절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정력, 능력 그리고 재능은 모두 여호와의 과분하신 친절에 의해 우리에게 부여된 선물로 생각하고 지존자께 찬양과 영예를 돌리는 데 사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17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올바른 태도를 강조하였읍니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고린도 전 4:7) ‘바울’ 자신은 다른 모든 사도들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고 말할 수 있었으나, 그 영예를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부언하였읍니다.—고린도 전 15:10.
18. 우리는 우리의 재능을 어떠한 방법으로 사용해야 합니까?
18 충실한 청지기로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영적으로 그리고 물질적으로 돕는 일에 우리가 가진 모든 재능을 온전히 사용하기를 원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방법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이에 관하여 ‘베드로’는 이렇게 기술하였읍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베드로 전 4:11.
19.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영적으로 그리고 물질적으로 도울 때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읍니까?
19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영적으로 돕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전하는 위안과 사랑의 말의 근원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말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전파하고 가르치는 일은 세워 주는 것이 될 것이며 우리가 돕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열등감과 수치감을 불러 일으키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동일하게, 만일 물질적 도움을 베풀 때 우리의 시간과 정력을 사용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힘을 구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능력을 강조하지 않게 될 것이며 우리가 선을 행하도록 우리의 역량을 하나님이 사용하신다는 점을 강조할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의 천적 아버지께 영예가 돌아갈 것입니다. (고린도 전 3:5-7)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제자이기 때문에 그러한 영광 혹은 영예가 아버지께 돌려지는 것이므로,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렇습니다. 지존자 바로 그분이 우리에게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과 힘을 주십니다.
20. 우리는 왜 여호와의 큰 날이 도래하는 것을 기대해야 하며,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어야 합니까?
20 우리의 시간과 자산과 정력을 다른 사람들을 돕는 데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영적으로 준비되어 있는 상태에 있으며, 여호와의 날을 맞이할 태세를 갖추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사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복수의 집행자로서 어느 때라도 오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우리는 자극을 받고 영적으로 항상 깨어 있을 수 있읍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여호와의 큰 날이 틀림없이 임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 날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충성스러운 제자들에게 웅대한 기회를 열어 줄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열렬한 기대를 가지고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여호와의 날이 도래하면 현 사물의 제도의 불의와 압력으로부터 우리가 영원히 해방되어 “새 하늘과 새 땅”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날을 항상 “유의”하고 열렬히 기대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베드로 후 3:12, 13)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은 합당한 태도의 증거가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여호와의 날이 임할 것이며 다른 사람들이 그것에 관해 알고 이 중요한 지식과 일치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는 증거가 됩니다.
21. (ㄱ)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하여 무엇을 확신할 수 있읍니까? (ㄴ) 이것은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을 줄 것입니까?
21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처음 언급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가장 온전한 의미로 성취될 것입니다. (이사야 65:17; 66:22) 하나님의 법에 순응하는 지적 사회를 예수 그리스도 및 그의 보조 왕겸 제사장들이 의롭게 다스리는 일이 반드시 실현될 것입니다. (계시 5:9, 10; 20:6) 이것의 확실성은 우리에게 행동하도록 자극할 수 있으며, 그 결과로 있게 될 축복에 참여하는 사람들 틈에 끼고자 최선을 다하도록 자극할 수 있읍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훈계하였읍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베드로 후 3:14) 하나님의 종들로서 우리의 관심은 세상적인 태도와 길과 행동으로 인한 흠이나 점이 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승인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얼룩이 없기를 바랍니다. 죄가 하나님과의 우리의 평화를 교란하기 때문에, 우리가 속죄받을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함으로써만 우리는 그분의 큰 날이 도래할 때 “평강 가운데”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으심을 인식하라
22. 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에 대해 조급해서는 안됩니까?
22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대하는 것은 합당하지만, 그 약속의 성취에 대해 조급하게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큰 날이 오래 전에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이 가능해졌읍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베드로 후 3:15, 16.
23. (ㄱ) 왜 우리는 하나님의 참으심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까? (ㄴ) 제1세기에 일부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참으시는 이유를 인정하지 않았읍니까?
23 여호와의 참으심을 인식하는 사람들로서 우리는 그 참으심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여 하나님의 큰 날이 아직 멀었을지 모른다는 구실로 특정한 이기적 행로를 정당화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기원 제1세기에, 이렇게 한 신자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들을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명백한 이해가 부족하고 그리스도인 교리와 행실 면에서 불안정한 사람들이라고 묘사하였읍니다. 이 사람들은 영감받은 사도 ‘바울’의 서한의 내용과 기타 성경의 내용을 이용하여 자기들의 그릇된 행위를 정당화하려고까지 하였읍니다. 그들은 양심의 작용에 관하여 그리고 ‘모세’의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의롭다고 선언받는 일에 관하여 ‘바울’이 쓴 내용이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온갖 행동에 대한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라고 지적했을지 모릅니다. (로마 3:5-8; 6:1; 7:4; 8:1, 2; 갈라디아 3:10 비교.) 그들은 다음과 같은 점들을 잘못 사용하였을지 모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라디아 5:1)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니라.]” (고린도 전 6:12)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니라.]” (디도 1:15)
그러나 그들은 ‘바울’이 또한 이렇게 말한 것을 무시하였읍니다.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느니라.]” (갈라디아 5:13, 1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린도 전 10:24.
24. 왜 우리는 회중 내에서도 우리의 교제를 경계해야 합니까?
24 제1세기 회중에서와 같이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 자유의 한계를 넘어 죄의 노예가 되기까지 하는 사람들이 있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건전한 영향을 받아 낙오되지 않도록 우리의 교제를 경계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사실을 지적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읍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데서 떨어질까 삼가라.”—베드로 후 3:17.
그리스도인으로서 진보하라
25, 26. 우리는 믿음을 얻은 후에, 베드로 후서 1:5-7과 일치하게 무엇을 해야 합니까?
25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여 놓으신 축복을 놓치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인 생활과 활동에 있어서 진보하고자 원해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 후 3:18) 그렇게 하는 것은 사도 ‘베드로’의 이러한 격려와 일치합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베드로 후 1:5-7.
26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믿음의 역량을 주셨읍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하여 행해진 일에 대한 반응으로 혹은 그 결과로, 우리는 우리가 진정한 믿음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다른 훌륭한 성품을 발전시키기를 원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영이 우리 생활에서 온전한 영향을 미치도록 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읍니다. (베드로 후 1:1-4) 사도 ‘베드로’는 우리의 천적 아버지께서 우리를 완전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드시기 위해 행하시는 사업에 협조하는 면에서 우리가 가진 힘을 다하여 근면하게 일함으로써 ‘더욱 힘쓰라’고 교훈하였읍니다.—고린도 전 3:6, 7; 야고보 1:2-4 비교.
27. 우리의 믿음에 덕을 더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27 우리가 믿음에 덕을 더한다는 것은 우리의 본이신 그리스도를 본받는 면에서 도덕적으로 우수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덕 혹은 도덕적 우수성은 적극적인 특성입니다. 그것을 소유한 사람은 동료 인간에게 악을 행하거나 해를 입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선을 추구하며 다른 사람들을 영적으로, 신체적으로 그리고 감정적으로 돕는 일에 적극적입니다.
28. 지식에 있어서 자라가는 것은 왜 중요합니까?
28 도덕적 우수성은 지식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읍니다. 우리에게는 선악을 구별할 수 있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히브리 5:14) 지식은 또한 특정 상황에서 얼마나 적극적인 선이 표현되어야 할 것인지를 평가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빌립보 1:9, 10) 지식을 경시하거나 심지어 배척하기까지 하는 경신과 달리, 견고한 기초를 가진 믿음은 지식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항상 지식으로부터 유익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지런히 성경을 적용시키며 여호와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 자라갈 때, 우리의 믿음은 강화될 것입니다.
29. (ㄱ) 자제를 배양하는 데 왜 지식이 필수적입니까? (ㄴ) 자제와 인내와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29 이 지식은 죄의 욕망에 빠지지 않도록, 무절제한 행동을 하지 않도록, 혹은 다른 면으로 태도와 언행에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지 않는 죄를 짓지 않도록 막아 줍니다. 지식은 우리가 자제 즉 자신의 성품과 언행을 제어하는 능력을 가지도록 도와 줍니다. 우리는 계속 자제를 나타냄으로써 인내라는 필수적인 성품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인내에 의해 산출되는 내적인 힘은 또 우리가 죄의 욕망에 굴복하지 않도록, 박해를 받을 때 타협하지 않도록, 혹은 일상의 염려와 쾌락 혹은 물질 추구에 전념하지 않도록 보호해 줄 수 있읍니다. 이러한 인내는 지존자께 힘과 인도를 구할 때 생겨납니다.—빌립보 4:12, 13; 야고보 1:5 비교.
30. (ㄱ) 경건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나타납니까? (ㄴ) 형제애를 떠나서 경건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무엇이 알려 줍니까?
30 경건은 인내에 부가되어야 합니다. 경건한 태도는 진정한 그리스도인 생활 전체의 특징입니다. 그것은 창조주께 대한 건전한 고려와 경의, 부모 및 경건의 합당한 대상인 다른 사람들에 대한 깊은 존경과 관심으로 표현됩니다. (디모데 전 5:4) 그러나, 형제 우애 즉 형제애가 없이는 경건이 존재할 수 없읍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요한 1서 4:20)
경건을 자랑하면서 자기의 형제들에게 사랑과 친절과 우정을 보이지 않는 사람은 아직도 매우 큰 결함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의 형제들에 대해 차가우면서 하나님께 대해 따뜻할 수는 없읍니다.
31. 우리는 누구에게 사랑을 나타내야 하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31 사랑은 우리 생활에서 특히 분명히 나타나야 할 탁월한 특성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우리 그리스도인 형제들에게만 제한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영적 형제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나타내는 한편,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보여야 합니다. 이 사랑은 그 개인의 도덕적 신분에 좌우될 일이 아닙니다. 심지어 원수에게도 사랑을 보여야 하며, 특히 그들을 영적으로 돕고자 하는 욕망에서 그렇게 해야 합니다.—마태 5:43-48.
32. 우리가 베드로 후서 1:5-7의 충고를 적용한다면 어떠한 결과가 있읍니까?
32 믿음에 덕과, 지식, 자제, 인내, 경건, 형제애 및 사랑을 더할 때 어떠한 결과가 있읍니까?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였읍니다.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리라.]” (베드로 후 1:8)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영적으로 정지되고 활동이 없고, 죽은 상태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경건한 특성이 자리잡고 그것이 참으로 우리의 일부가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승인을 받는 식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될 것입니다. (누가 6:43-45 비교.) 참으로 그렇게 된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사를 온전히 관리하시기 위하여 오실 때에 우리가 현재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웅대한 축복을 받기 시작할 것입니다.
33-35.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생활하는 데는 어떠한 유익이 있읍니까?
33 그러므로, 하나님의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중대한 사업을 포함하여 우리의 그리스도인 책임을 이행하는 일과 우리의 행실에 있어서 결코 태만하지 맙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생활을 택하였다면, 우리는 깨끗한 양심과 동료 신자들과 건전한 교제를 즐길 수 있읍니다. 우리는 시련의 때에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힘과 도움을 경험할 수 있으며, 우리가 성서 원칙을 양심적으로 적용시켜 나아갈 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발전할 것입니다.
34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자 노력한다면, 가정 생활, 직장 생활, 모든 계층의 정부 권위자들을 대하는 일 등 생활 모든 부면에서 선한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성서에서 알려주는 위안의 소식을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마음을 다해 알리는 중요성을 더욱 더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동료 인간을 돕는 일, 특히 영적으로 돕는 일에서, 큰 행복과 진정한 성취감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35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로서 생활하는 것이 행복하고 영원한 미래를 약속하는 유일한 행로라는 사실입니다. 확실히, 우리는 우리가 획득한 것을 상실하기를 원치 않을 것입니다. 매일 우리는 완전한 승리의 왕의 자격으로 우리 주께서 오시는 것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충실히 섬기겠다는 우리의 서약에 고착하기로 한 우리의 선택의 결과로 끝없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