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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례—믿음의 표현파수대—1980 |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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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과 일치하게 우리는 우리의 믿음에 관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 주는 데 한 달도 빠지지 않고 참여하도록 단호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까? 증거 활동뿐 아니라 그리스도인 생활에서 나타내는 훌륭한 본을 통하여 믿지 않는 친척들과 친지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도록 노력하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하여 타협하지 않는 한편 그들과 생일, 축일 및 그와 같은 날들에 대하여 불필요하게 큰 쟁점이 되게 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만일 기회가 주어진다면, 성귀를 사용하여 적극적이고 격려적인 생각을 그들에게 심어주는 데 주력하는 것이 훨씬 좋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친절과 진정한 관심 그리고 베푸는 도움은 종종 많은 말보다도 더욱 강력한 증거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로마 12:17-21 비교.
18.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신분이 보람있는 것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18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신분은 실로 중대한 책임을 수반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활은 얼마나 보람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심지어 지금도 우리의 천적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의 승인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앎으로 정신과 마음의 평화를 누립니다. 우리의 생활은 동료 인간들의 영원한 복지를 증진시키는 노력에 바쳐지고 있으며 이것은 보람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내세”를 기대하며, 하나님의 의로운 새 질서에서 행복한 삶을 누리는 영원한 장래를 기대합니다. (디모데 전 4:8)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하고 침례받은 제자가 되는 데 매우 중요한 우리의 믿음은 그 웅대한 장래로 우리를 인도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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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얻은 후에 계속 진보하는 일파수대—1980 |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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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얻은 후에 계속 진보하는 일
“여러분의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자제를, 자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한 전념을, 경건한 전념에 형제애를,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시오.”—베드로 후 1:5-7, 신세.
1. 보물이 어떠할 때 진정으로 가치가 있으며, 이 점을 어떠한 예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땅에 묻혀 있는 값진 보물은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그것은 지층에 묻혀 있는 바위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보물은 그 소유자와 심지어 다른 사람에게까지 유익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환자나 궁핍한 자를 돕는 데 사용될 수 있으며 혹은 그것을 현명하게 투자할 수도 있습니다. 거액의 금전이 관련된 보물이라면 직업을 갖게 하여 많은 사람들의 생계의 길을 열어 줄 수도 있습니다. 보물이 생산적인 방법으로 사용될 때 그것은 실로 더욱 가치있는 것이 됩니다.
2. 베드로 후서 1:1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소중한 것을 소유하게 되었습니까?
2 하나님의 종들이 소유하는 보물은 선을 달성하는 데 더 큰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에서 이 소중한 보물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서두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베드로 후 1:1) 영원한 생명을 위해 필수적인 “믿음”은 그 사도의 편지에서 언급된 자들에게 속한 값진 보물이었습니다.
믿음—보물
3. 베드로가 편지한 사람들의 믿음을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이라고 묘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3 이 믿음은 전적으로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 혹은 베드로와 같이 그리스도인이 된 모든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이나 비유대인이나를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전체 신자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지존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이 이러한 믿음을 갖는 일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좋은 소식”의 전파에 의하여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통하여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이끄셨습니다. (요한 6:44) 그분께서는 개개인의 마음을 열어 그들로 하여금 자기 “말씀” 혹은 소식에 반응을 나타내게 하셨습니다.—사도 16:14; 로마 10:8.
4.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믿음을 얻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4 사도 베드로가 말한 바와 같이 이 믿음은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얻어진 것입니다. 전능하신 분께서 모든 부족, 민족, 국가 및 인종의 사람들이 이 값진 것을 소유하는 일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의 희생을 근거로 해서 죄를 용서하고 회개한 자들을 자기 백성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어떤 개인에게도 편애를 나타내시지 않음으로 의로움과 공평함과 편벽되지 않으심을 표현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이달리야 군대 백부장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 및 친지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을 때 이 점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사도 10:34, 35) 우리의 구주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 동일한 공평한 영을 반영하셨습니다. 그분은 차별없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바치셨습니다.—디모데 전 2:5, 6.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 계속 진보하는 일
5. 믿음을 얻은 다음에 우리는 어떠한 책임을 지게 되며, 이 책임을 수행하는 데 무엇이 필수적입니까?
5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믿음”을 얻은 다음에 자기들에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뜻을 더욱 밀접히 따라야 할 책임을 지게 됩니다. 이렇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정확한 지식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정확하고 온전한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정확한 지식으로, 신세]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베드로 후 1:2.
6. (ㄱ)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얻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ㄴ) 우리는 어떻게 그러한 지식을 갖게 됩니까?
6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갖는다는 것은 그분들을 인격체로서—그분들의 특성들, 교훈들, 우리를 대하시는 방법들을—알고 그분들의 결함없는 본들을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교 예레미야 22:15, 16; 마태 7:21-23; 요한 1서 2:3-6; 3:5, 6) 하나님의 말씀에 들어 있는 원칙들을 배우고 적용하는 일에서 계속 진보함으로써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을 더욱더 잘 알게 됩니다. 그 결과, 우리는 과분하신 친절과 평화를 더욱더 누리게 됩니다.
7. ‘하나님과 예수에 대한 정확한 지식으로’ 어떻게 ‘과분하신 친절’이 증가합니까?
7 오직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함으로써 우리는 계속 하나님의 도움과 인도를 받게 됩니다. 우리는 죄인들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에게 아무런 공로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창조주께서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은 모두 그분의 과분하신 친절의 표현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과분하신 친절을 받는 자가 되느냐 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과 같이 되려고 노력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고 있다면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구에 응답하신다는 온전한 확신을 가지고 그분에게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한 1서 3:22-24.
8. ‘하나님과 예수에 대한 정확한 지식으로’ 어떻게 ‘평화’가 증가됩니까?
8 우리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에 대한 깊고 온전한 지식을 가질 때 그분들이 기뻐하시는 일을 명확하게 보게 됩니다. 우리는 그분들과 연합하고 그분들과의 평화의 길을 걷게 되며 그분들의 벗들로서 친밀한 관계를 즐기게 됩니다. 그 결과, 여호와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을 더욱 온전히 아는 면에서 계속 발전하는 것은 우리를 증가된 평화를 즐기는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본들과 반대되는 태도와 언행을 더욱더 피하기 때문입니다.
9. 죄짓는 일은 하나님과의 우리의 평화에 어떠한 영향을 미칩니까?
9 그와는 반대로 우리가 죄를 지으면 그분의 뜻에 거슬러 행동하는 것이므로 지존자와의 평화가 깨뜨러질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진실한 회개와 그리스도의 대속의 혜택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하나님의 용서를 통해서만 평화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요한 1서 2:1, 2.
활동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에 순응하라
10. 증가된 분량으로 과분하신 친절과 평화를 즐기는 데 무엇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까?
10 물론,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증가된 분량으로 과분하신 친절과 평화를 즐기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분들을 더 잘 알려고 단호한 노력을 함으로 그분들과 협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통해 우리의 유익을 위해 행해 오신 일을 올바른 인식을 가지고 반영하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정확한 지식, 신세]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베드로 후 1:3, 4.
11, 12. (ㄱ) ‘하나님의 능력’이 “정확한 지식”과 관련되어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이 점이 어떻게 데살로니가의 그리스도인들의 경우에서 예시됩니까?
11 베드로가 ‘하나님의 능력’을 “정확한 지식”과 관련시킨 점에 유의하십시오. 이것은 참으로 적절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 혹은 소식 즉 “좋은 소식”이 사람들의 생활에 강력한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이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보낸 사도 바울의 편지 가운데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우리 복음[좋은 소식, 신세]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 ··· 으로 된 것이니[라.]” (데살로니가 전 1:5) 데살로니가에 전파된 “좋은 소식”은 성과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는 데 그치는,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즉 “말로만” 그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활동하도록 감동을 받았으며 “좋은 소식”이 활동케 하는 힘이 있음을 나타냈습니다. 이 그리스도인들은 의를 위해 박해하에서 충실하게 인내하는 면에 있어서 그리고 누구에게나 “좋은 소식”을 계속 증거하는 면에 있어서 다른 믿는 사람들에게 본이 되었습니다.
12 데살로니가가 항구였기 때문에 그 곳의 신자들은 먼 곳으로부터의 선원들과 상인들과 같은 사람들을 접촉할 수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파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믿음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다른 도시들에서 진리를 공개적으로 전파하고 가르쳤을 때 데살로니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듣게 되었습니다. 그 사도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습니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고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데살로니가 전 1:8-10.
13. 우리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미치는 영향을 어떻게 체험해 왔으며,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 어떻게 해야 합니까?
13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우리 믿는 자들도 “좋은 소식” 즉 하나님의 말씀 혹은 소식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우리 가운데 활동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느껴 왔습니다. 그 “좋은 소식”은 우리 생활을 변화시켜 왔으며 하나님의 뜻에 우리 자신을 순응케 하였습니다. 우리는 또한 감동을 받아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선포해 왔습니다. “좋은 소식”에 담긴 “정확한 지식”을 통한 활동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생명과 경건한 전념’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우리는 영원한 전망을 가지고 곧게 생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실과 활동에서 더욱더 그리스도인답게 되도록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계속 돕게 해야 합니다.
14.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영광과 덕”을 통하여 어떻게 부르는 일을 하십니까?
14 여호와 하나님께서 개개인을 자기에게로 부르시거나 이끄시는 방법은 그리스도인 생활에서 발전케 하는 강한 격려의 역할을 함에 틀림없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에 대한 정확한 지식”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통하여 ‘부르시는 일’ 혹은 ‘이끄시는 일’을 하십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과 덕”이 인간들에게 표현됩니다. 그리스도의 사도 요한은 아들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과분하신 친절, 신세]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 1:14)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에서 요한과 그의 사도들은 오직 하늘의 아버지의 형상을 완전하게 반영할 수 있는 분만이 나타낼 수 있는 영광, 찬란함, 장엄함을 보았습니다. 더우기 사도 요한은 야고보와 베드로와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의 변형을 목격하였습니다. 그 때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마태 17:2) 영광이 하나님의 아들과 연관된 것처럼 덕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덕성이 뛰어나셨으며, 도덕 면에서 탁월하셨습니다. 심지어 배신자 가룟 유다까지도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다고 시인하였습니다. (마태 27:4)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자기 아들 가운데 반영된 “영광과 덕”을 통하여 부르는 일을 해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진보를 위한 자극제
15.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들이 “보배롭고 지극히 큰” 이유는 무엇입니까?
15 “좋은 소식”에 나타나 있는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마련에는 제1세기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 약속들은 보배롭고 값진 것이었으며 세상의 증오를 받는 그들에게 위안과 격려와 인내할 수 있는 힘을 주었습니다. 베드로의 편지를 받는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공동 후사들로서 그분의 영광에 참여할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들이 “지극히 큰 약속”을 받았다고 한 그 사도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베드로 후 1:4ㄱ.
16, 17. 하나님의 약속들은 믿는 자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칩니까?
16 이 약속들은 제1세기 신자들에게 어떤 역할을 하였습니까? 베드로의 대답은 이러합니다.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베드로 후 1:4ㄴ)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약속들은 그들로 하여금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는 기초를 제공하였습니다. 제1세기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 왕국에 참여하고 그분과 같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로마 8:17) 아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모든 사람들은 또한 아버지와 같이 될 것입니다. (히브리 1:3)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한 1서 3:2, 3.
17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에 참여함으로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들에 근거한 이 웅대한 희망은 그들이 세상의 모든 더러운 것으로부터 스스로 순결케 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게 하는 강한 자극제가 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들이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했다는 것을 말한 것으로 보아 깨끗함에 관한 동일한 점을 지적하였습니다. “정욕” 즉 사람에게 당연한 것으로 허용되지 않는 정욕은 세상의 부패와 더러운 것의 뿌리입니다.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마련을 적용하여 거룩함과 깨끗함과 순결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표준에 자신들을 순응시켰을 때 바로 이 더러움에서 빠져 나온 것입니다. 제1세기 신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성경에 들어 있는 약속들은 우리 자신을 움직여 계속 순결하게 해줄 수 있습니다.
믿음에 더하여 필요한 특성들
18, 19. 믿음을 얻은 다음에 우리는 베드로 후서 1:5-7과 일치하게 어떻게 해야 하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18 오늘날 하나님의 참된 모든 종들은 “좋은 소식”을 통하여 활동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좋은 소식”과 관련이 있는 놀라운 약속들로부터 유익을 받아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자신들이 그리스도인 특성을 반영하고 다른 사람들을 특히 영적으로 돕는 데 활동적인 사람임을 증명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여러분이 성실한 온갖 노력으로 응답하는 일에 기여함으로써 여러분의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자제를, 자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한 전념을, 경건한 전념에 형제애를,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시오.”—베드로 후 1:5-7, 신세.
19 우리는 단순한 믿음 혹은 신앙을 갖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는 우리의 천적 아버지로부터 받은 믿음의 잠재력에 응하여 혹은 그 결과로서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를 나타내는 다른 훌륭한 특성들을 발전시켜 나가고자 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더욱더 하나님의 아들과 같이 되기 위하여 ‘성실한 온갖 노력으로 기여’할 것을 즉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다하여 부지런히 노력할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20. 우리의 믿음에 덕을 더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20 믿음에 덕을 더한다는 것은 우리의 본이신 그리스도의 뒤를 좇아 도덕적으로 탁월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덕 즉 탁월한 도덕성은 적극적인 특성입니다. 덕의 소유자는 동료를 해치는 일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영적, 육적 및 감정적 필요에 응하여 선행을 하도록 노력합니다. 덕은 사실상 활동적인 착함입니다. 그러므로 덕성있는 사람의 생활은 단지 하나님께서 승인하시지 않는 성적 부도덕이나 불결함, 부정직과 기타 행실 등을 삼가는 소극적인 일에 의해 식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1세기의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않다고 자랑하였습니다. (누가 18:11) 그러나 그들은 덕성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일반 사람들을 멸시하고 자비나 연민이나 동정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마가 3:1-6; 요한 7:47-49.
21.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21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에 예증된 바와 같이 덕은 지식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기 위하여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히브리 5:14) 지식은 또한 일정한 환경에서 어떻게 적극적인 선을 표현해야 하는가를 판단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빌립보 1:9, 10) 경신(輕信)과는 달리 건전한 기초에 근거한 믿음은 지식에 의하여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말씀을 열심히 적용한다면 여호와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에 대한 지식 면에서 계속 자라감에 따라 우리의 믿음은 강해질 것입니다.
22. (ㄱ) 자제를 배양하는 데 지식이 필수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자제와 인내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22 이 지식은 정죄된 정욕에 빠지거나 행실에 있어서 무절제하게 되거나 혹은 그 외에도 태도와 말과 행동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데 심각하게 실패한 범죄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억제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지식은 사람의 언행을 억제하는 능력인 자제를 행사하도록 도와줍니다. 계속 자제를 나타냄으로 우리는 필수적인 특성인 인내를 갖게 됩니다. 나날의 걱정이나 박해나 혹은 쾌락 및 물질적 소유물의 유혹의 형태로 세상으로부터 압력을 받을 때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종들로서의 입장을 벗어나 자기의 욕망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자제를 나타내게 될 것입니다.
23. (ㄱ) 인내는 어떻게 얻어집니까? (ㄴ) 경건한 전념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표현됩니까?
23 인내가 맺는 내적 힘은 또한 정죄된 정욕에 굴복하지 않고, 박해에 직면하여 타협하지 않고, 그리고 나날의 걱정이나 쾌락이나 물질적 소유에 몰두하지 않고, 저항해 나가도록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인내는 힘과 인도를 지존자께 의뢰함으로 얻어지게 됩니다. (비교 빌립보 4:12, 13; 야고보 1:2-8) 인내에 더해져야 할 것은 경건한 전념 즉 경건한 생활입니다. 이러한 경건한 전념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생활 전체를 식별케 해줍니다. 경건한 전념은 창조주께 대한 건전한 관심과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진 인간에 대한 합당한 존경과 염려를 나타내게 합니다.—디모데 전 5:4.
24. 형제애를 떠나서 왜 경건한 생활이 있을 수 없습니까?
24 형제애를 떠나서는 경건함이나 경건한 생활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요한 1서 4:20) 그러므로 우리는 동료 신자들에게 깊은 애정을 발전시키도록 노력해야 하며 그리하여 ‘경건한 전념에 형제애를 더’해야 합니다.
25. 누구에게 사랑을 나타내야 하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25 사랑은 우리 생활에서 특별히 표현되어야 할 탁월한 특성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그리스도인 형제들에게만 국한시켜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영적 형제들에게 애정을 나타내는 한편, 모든 인류에게 사랑을 나타내야 합니다. 사랑은 개인의 도덕 상태 여하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같이 원수에게까지 표현됩니다. 산상 수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 5:43-48.
26, 27. 베드로가 열거한 필수 요소들을 우리의 믿음에 더할 때 그 결과는 어떠할 것입니까?
26 믿음에 덕, 지식, 자제, 인내, 경건한 전념, 형제애 및 사랑을 더할 때 그 결과는 어떠할 것입니까?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느니라.]”—베드로 후 1:8.
27 그렇습니다. 행함이 수반되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에 그 사도가 열거한 필수 요소들을 더하고 우리 생활에 넘치게 한다면 우리는 제자리에 서 있거나 무활동이거나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 진보는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은 특성의 열매를 맺을 것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성들이 우리 마음에 거하게 함으로, 즉 진실로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되게 함으로, 그 활력에 의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승인하시는 길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활동하게 될 것입니다.—누가 6:43-45 비교.
발전의 중요성
28.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사람이 영적 진보를 나타내지 않고 있다면 그의 상태는 어떠합니까?
28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진보를 나타내지 않고 있다면 그는 영적으로 큰 위험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러한 사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이미 열거된]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베드로 후 1:9.
29.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의 열매를 맺고 있지 않는 사람이 고의적인 맹인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9 믿음이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영적으로 발전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의 열매가 없으므로 영적으로 맹인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의 맹인됨은 고의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좋은 소식”을 받아들인 것은 주, 그리스도를 더욱 밀접히 따르는 데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는 요구 조건이 수반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30. ‘죄를 깨끗하게 함’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하도록 움직여야 합니까?
30 그러한 사람은 또한 예수의 흘리신 피에 기초하여 자기 죄가 씻어졌다는 사실을 잊었을 것입니다. 침례받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받은 씻음과 일치하게 그는 깨끗한 상태에 머물러 있기 위하여 사실상 거룩함의 하나님의 표준에 더욱 가까이 나아가기 위하여 계속 열심히 노력해 왔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쉽게 배교로 인도될 수 있고,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을 완전히 거절하게 될 것입니다.
31, 32. 그리스도인으로 진보하지 못하도록 막는 커다란 위험들이 있기 때문에 베드로의 어떠한 충고에 유의해야 합니까?
31 그리스도인으로서 발전하는 일을 방해하는 영적 위험들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데 진보를 나타내도록 노력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베드로 후 1:10, 11.
32 확실히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그분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그 신분을 지키도록 단호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베드로의 영감받은 기록은 그리스도와 같은 특성들을 믿음에 더하는 일을 계속함으로써 틀림없이 믿음의 목표인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왕국’에 들어가는 길을 아무 것도 막지 못할 것입니다. 왕국에 들어가는 일은 ‘넉넉히 주’어질 것입니다.
33. 그리스도인이 왕국에 들어가는 일이 ‘넉넉히 주어져 있다’는 표현에는 무엇이 내포될 수 있습니까?
33 그리스도와 같은 특성을 밝게 빛내고 왕국에 들어가는 일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넉넉히 주어져 있다’는 표현은 또한 생명을 위한 경주에서 진실로 노력한 사람들이 즐길 최상의 축복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빌립보 3:14.
34. 최상의 축복받은 상태를 어떠한 예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34 생명과 특별한 축복을 수반한 생명은 두 선장에 비교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폭풍 가운데 배를 능숙하게 조종하여 안전하게 육지에 닿게 한 사람이고, 또 하나는 같은 폭풍에 난파하여 단지 자기 생명만을 구출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두 선장이 모두 생명을 건졌지만 그 배가 무사한 선장이 틀림없이 더 큰 행복을 즐기고 영예를 받을 것입니다.—고린도 전 3:12-15 비교.
35. 영원한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선물이긴 하지만 이것을 얻는 데 왜 각자의 노력이 요구됩니까?
35 생명이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선물이지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 그 선물에 대한 성실한 관심을 나타내는 것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정죄된 인간들이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기에 그것은 하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생활 행로에서 이 선물에 대하여 참으로 감사한다는 태도나 이것을 원한다는 마음을 나타내지 않는다면 이 선물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태도와 언어와 행동에 있어서 진실로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틀림없이 성공할 것입니다. 즉 생명을 상실하는 일도 없고 우리의 천적 아버지께서 우리의 열매로 인하여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어떤 부가적인 축복도 잃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36. 베드로가 말한 바와 같이 어떠한 요인들 때문에 우리에게 생각나게 하는 것들이 필요합니까?
36 그러므로, 우리는 충실함을 나타내는 것이 중요함을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바로 이 점이 사도 베드로가 그의 두 번째 편지를 읽는 사람들이 행하기를 바란 점입니다. 그의 편지 내용은 이러합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베드로 후 1:12-15)
제1세기에 베드로가 보낸 말씀을 받는 사람들과 같이 우리는 “좋은 소식”을 전파하고 그리스도와 같은 특성을 나타내는 데 발전해야 할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 진리를 알고 있을 정도로 그 가운데 확고히 세워져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특히 시련이나 아마 거짓 선생들의 교활한 논쟁에 직면할 때 베드로가 말한 생각나게 하는 것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37. 베드로는 생각나게 하는 것들을 남기는 데 어떻게 훌륭한 본이 되었습니까?
37 베드로가 이 생각나게 하는 것들을 써 보낸 이유를 염두에 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 사도는 그가 머지않아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가 순교의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친히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 21:18, 19) 이러한 장래가 베드로를 우울하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고 그는 남은 때를, 형제들을 강화하고 그들로 하여금 활동적이고 열매 맺는 사람들이 되도록 격려하는 데 사용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가 죽은 다음에도 그들은 그의 생각나게 하는 것들로부터 격려를 받을 수 있었으며 서로 세워 주는 데 그것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38. 베드로의 편지에 있는 생각나게 하는 것들을 우리는 어떻게 이용해야 합니까?
38 우리 역시 베드로의 편지에서 훌륭한 격려를 받을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을 강화하는 데 그의 생각나게 하는 것들에 주의를 돌리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여호와의 놀라운 약속들이 성취되기를 바라보면서 “좋은 소식”을 계속 선포하고 더욱더 우리의 천적 아버지와 그의 아들과 같이 되는 면에서 발전하기를 바랍니다.
[19면 삽화]
‘여러분의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더하시오’
[20면 삽화]
‘여러분의 인내에 경건한 전념을 더하시오’
[22면 삽화]
‘여러분의 경건한 전념에 형제애를 더하시오’
[24면 삽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은즉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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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복종”하는가?파수대—1980 |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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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복종”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에 반복되어 있는 여러 가지 명령 중에 “복종하라”는 명령이 있다. 로마서 13:1에는 이러한 말이 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즉, 정부]들에게 굴복[“복종”, 새번역]하라.” 젊은이들은 “장로들에게 복종하”라는 충고를 받고 있다. (베드로 전 5:5, 새번역) 그리고 또 사도 바울은 이렇게 훈계한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라.]”—에베소 5:22.
복종하는 것은 많은 불완전한 인간들의 성향 생리에 맞지 않는 것으로서, 사실상 거의 사회 운동의 모든 형태가 복종하는 것에 대한, 종종 폭력적인 반항의 형태로 나타날 정도이다. 예로서 얼마 전의 「뉴우요오크 타임즈」지는 그날 하루의 권위에 대한 다음과 같은 폭력적인 반항의 예들을 보도하였다. “오늘 아침 런던 중심부에서 두 개의 폭탄이 터뜨려졌다.” 맨체스터, 리버풀, 커벤트리, 브리스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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