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자녀는 선한 것을 본받는다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느니라].”—요한 3서 11.
1. 노유를 막론하고 무슨 일에 예리한 관심을 가지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린 아이로서 화분에 씨를 심고 새로운 생명이 자라는 것을 보고 좋아하지 않는 아이가 어디 있겠읍니까? 아이들은 매일 그 화분을 들여다보고 자라나는 것을 열심히 주시할 것입니다. 성인들도 새로운 생명이 어떻게 생기는가에 관하여 배우는 데 깊은 관심을 기울입니다. 최초의 배자(胚子) 세포는 현미경적이지만, 복잡한 부호 즉 원형을 가지고 있어서 장래 그의 성장을 지배합니다. 성서에서 각 생명 형태에 대하여 말한 바와 같이 그것은 “그 종류대로” 번식합니다. (창세 1:11, 12, 21, 24) 그 미소한 세포 내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저장되어 있으며, 끝없이 갱신될 수 있는 잠재력이 있어서 경탄을 일으킵니다. 생명체가 목적을 향해 성장하며, 설계된 것이라는 등 많은 사실들이 발견되었지만, 생명 그 자체는 아직도 신비입니다. 이것이 인간이든 짐승이든, 아니면 식물이든 간에 우리가 새 생명의 시작을 보기를 좋아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읍니다. 만일 그것이 좋은 씨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것은 동일한 형태로 성장할 것이며 선한 것을 본받을 것입니다.
2. 천사들도 비슷한 관심을 나타내었읍니까? 이것이 어떻게 나타나 있읍니까?
2 천사들도 동일한 태도를 가지고 있음을 성서는 알려줍니다. 창조주 여호와께서 우주에 비하면 미소하기 그지없는 이 지구에 무한히 풍부하고 아름다운 생명체를 살게 하려고 이 지구를 만드실 때에 천사들이 여호와의 일에 예리한 관심을 가졌을 것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읍니다. 그 당시에 천사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다고 기록되어 있읍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절정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이 창조되던 때에 얼마나 기뻐하였겠읍니까!—욥 38:7; 창세 1:27.
3. 하나님의 “우두머리 일군”도 관심을 가졌읍니까? 그 관심이 계속되었읍니까?
3 창조 사업은 “우두머리 일군” 곧 인간으로 오시기 전의 예수를 통하여 수행되었으며, 예수도 또한 그 일에 열열한 관심을 가지셨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그 때에 그가 이렇게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읍니다. ‘내가 그의 땅의 생산적인 토지를 보고 기뻐하였으며,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사람들의 아들들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는 그 후에도 인간 가족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았읍니다. 천사들도 그러하였읍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집중된 하나님의 목적에 대하여 말하면서, ‘베드로’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고 말하였읍니다.—잠언 8:30, 31, 신세; 히브리 13:8; 베드로 전 1:12; 또한 골로새 1:15, 16 참조.
사도 ‘요한’
4. (ㄱ) ‘요한’은 “생명의 말씀”에 대한 그의 관심을 어떻게 피력하였읍니까? (ㄴ) 왜 우리는 ‘요한’에게 친근감을 가져야 합니까?
4 사도 ‘요한’도 비슷한 관심을 보였읍니까? 그의 첫째 편지의 서두를 보십시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그가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실로 친절한 권고가 아닙니까! 그는 우리에게, 바로 당신에게도 그와 함께 그 일에 참여하기를 원합니다. 그는 우리가 그에게 친근감을 갖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그가 가치 있는 일, 곧 자기 마음을 감동시키고 또한 문제를 올바로 처리하는 데 도움이 될 일들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고 그는 말하였읍니다. 그것은 틀림없이 그의 눈을 통하여 우리가 이들 선한 것들을 보도록 도움을 줄 것이며, 우리가 사물을 올바로 평가하도록 하고 선한 것을 본받도록 도움을 줄 것입니다.—요한 1서 1:1-4.
5. 우리는 ‘요한’의 첫째 편지로부터 어떤 면으로 도움을 받을 것을 기대합니까?
5 ‘요한’의 편지는 우리가 여호와와의 관계를 더 깊이 인식하도록 도움을 줄 것입니까? 그 편지는 우리가 외부의 압박과 음흉한 유혹을 받더라도 그 관계를 지속하도록 도움을 줄 것입니까? 조금 전에 인용한 편지의 서두에서 바로 그 사실을 나타내고 있읍니다. 그러나 먼저 필자 자신을 소개하겠읍니다. 그렇게 하면 그가 편지한 내용과 그가 그것을 기록한 이유를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6. (ㄱ) ‘요한’은 그의 문체에 나타난 바와 같이 어떠한 사람이었읍니까? (ㄴ) ‘요한’과 예수는 서로 어떠한 관계였으며, ‘요한’은 어떠한 별명을 받았으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6 ‘요한’은 어떠한 사람이었읍니까? 그는 흔히 사랑의 사도라고 불리우는 데 그것은 지당한 말입니다. 그의 기록 가운데 사랑의 주제가 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의 성격은 온순하고 평온하여 완강한 말을 전혀 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읍니다. 만일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당신은 놀랄 것입니다. ‘요한’은 자기의 마음에 따라, 또한 자기의 정신에 따라 생각하였읍니다. 그는 강력한 견해와 강력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자기 내심을 표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읍니다. 그는 자기의 말을 꾸며대거나 부드럽게 만들지 않았읍니다. 그는 자기 논증을 인상깊게 하기 위하여 그리고 욧점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강력한 대조를 많이 사용하였읍니다. 문제는, 당신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직면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세개의 편지를 기원 98년경 나이 많았을 때에 기록하였기 때문에 장성한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권위 있게 쓸 수 있었읍니다. 그는 과거에 예수의 전체 전도 봉사 기간에 예수와 아주 밀접히 관계하였던 배경도 가지고 있었읍니다. ‘요한’은 어느 누구보다도 예수와 더 가까웠읍니다. (마가 1:19, 20; 5:37; 요한 13:23; 19:26, 27; 21:20) ‘요한’의 천성은 절대로 유순하지가 않았읍니다. 한 때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 받아들이기를 거절하였을 때, ‘요한’과 그의 형제 ‘야고보’는 예수에게,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고 물은 일이 있읍니다. 예수께서 이 두 형제에게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란 별명을 주신 것은 무의미하게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었읍니다. 이것이 서로 모순된 현상이 아닙니다. 참 사랑은 친절하고 오래 참기도 하지만 충성심이 있어야 합니다. ‘요한’은 극도로 충성된 사람이었읍니다. 그는 예언된 바와 같이 불충성한 사람들이 많이 나타난 때에 그의 편지들을 기록하였읍니다.—누가 9:54; 마가 3:17; 마태 13:25; 사도 20:29, 30; 요한 1서 2:18.
하나님은 빛이시다
7. (ㄱ) ‘요한’이 들은 소식은 무엇이었으며, 어디로부터 들었읍니까? (ㄴ) 예수께서는 정죄 곧 심판의 근거로서 빛과 어두움을 어떻게 관계시켜 말하였읍니까?
7 ‘요한’은 서두를 마친 다음에 직접 요점으로 들어가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요한 1서 1:5) ‘요한’은 이 소식을 어떻게 들었읍니까? ‘요한’은 복음서에서 예수에 관하여 증거하기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이기지 못하더라”고 하였고 또한 예수께서 자기에게 믿음을 실천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위를 주셨다고 하였읍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인간에 의하여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출생하였읍니다. (요한 1:5, 난외주; 12, 13) 그리고 나서 ‘요한’은 예수께서 친히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이야기하실 때에 그 사실을 확인하는 내용을 기록하였읍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성령으로 나”는 문제를 이야기하셨고, 또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읍니다. 그는 또한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고 하시고, 계속하여 빛을 미워하고 피하는 자들에 대하여 말한 다음, 그와 대조적으로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고 하였읍니다. 이 말은 ‘니고데모’를 번민케 하였을 것입니다. 그가 분명히 진리를 사랑하기는 하였지만, 그것에 대한 충성은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 압도되었었기 때문입니다.—요한 3:1-8, 19-21.
8. 우리는 ‘요한’의 복음서로부터 빛과 어두움에 대하여 그리고 우리의 구출에 대하여 무엇을 배울 수 있읍니까?
8 이상으로 보아 빛은 진리와 의를 의미하고, 그와 반대로 어두움은 잘못과 거짓 그리고 악하고 부정한 것을 의미함을 배울 수 있읍니다. 우리는 또한 어두움으로부터 구출되어 하나님의 왕국으로, 하나님의 가족으로 옮겨지는 것에 대하여 더 많이 배웠읍니다. 이렇게 옮겨지는 것은 새로운 생활의 시작을 의미합니다.—골로새 1:13.
9. (ㄱ) 요한 1서 1:5에 관하여 ‘요한’은 이것을 자기 시대에 어떻게 적용하였읍니까? (ㄴ) ‘요한’은 무슨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거짓말과 거짓말하는 자들에 대하여 언급하였읍니까?
9 ‘요한’은 요한 1서 1:5에 설정해 둔 원칙에 따라서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움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라고 도전적인 말을 하였읍니다. 그는 또한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다고 요점을 지적하였읍니다. (요한 1서 1:6; 2:4) 요한 1서 1:6, 8, 10; 2:4, 6 등에서 ‘··· 한다 하고’ 또한 ‘··· 한다 하면’ 등의 표현은 그리스도인 회중 내의 악화 상태를 잘 알고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읍니다. 원수는 시간을 놓치지 않고 “곡식” 가운데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가라지”를 덧뿌렸읍니다. (마태 13:25; 사도 20:30; 또한 야고보 4:1-4 참조) 이들은 진리 내에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의 실제 행동과 태도는 그 주장이 거짓임을 들어 내었고, 그들이 거짓, 가짜 그리스도인, 적그리스도였음을 들어 내었읍니다. ‘요한’은 요한 복음 8:44에서 시작하여 계시록 22:15에 이르기까지 “거짓말”과 “거짓말장이”라는 단어를 여러 번 사용하였읍니다. 거짓말장이는 실수로 불의에 거짓된 것을 말하는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거짓말장이란 알면서도 남을 속이고 그릇 인도하기 위하여 참되지 않은 말을 하는 자입니다. 거짓과 참은 섞이지 않습니다. ‘요한’은 진리에 극히 충실하였읍니다. 그는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알고 있었읍니다.—요한 1서 2:21.
10. (ㄱ) 왜 우리는 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대거 이탈하는 일이 있을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까? (ㄴ) 그래도 왜 계속 조심스럽게 살피지 않으면 안됩니까?
10 이러한 것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됩니까? 그리스도교국이 대부분 단순히 말로만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자들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들은 완전히 그리스도교국에 분리되어 서 있으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고 진리와 의의 원칙에 입각하여 서 있읍니다. 예수께서 언급하신 이 추수 때에는 대규모적으로 배교하는 일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약속되어 있읍니다. (마태 13:30, 43; 데살로니가 후 2:3, 8) 그러나 우리는 무관심해서는 안됩니다. 동일한 원수 ‘사단’ 곧 용이 계속 투쟁을 하고 있으며, 과거 어느 때보다도 분을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현대 역사를 보면, “악한 종” 반열을 구성하는 어떤 자들이 여호와의 사업과 백성들을 지배하려고 꾀하였던 사실을 볼 수 있읍니다. 특히 세계 1차 대전 기간에 이런 일이 있었읍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의 조직을 깨끗하게 하시고, 완전히 신권적으로 만드셨읍니다. 이렇게 한 데 대한 영예는 인간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지금도 계속 주의를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기록을 보면, 여러 회중에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경고를 하고 어떤 사람은 근신을 받고, 또 다른 사람들은 제명을 당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읍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 하면 어떤 사람들이 진리 내에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진리를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은 흔히 조그만 것으로부터 시작되어 계속되며, 빛으로부터 바깥 어두움으로 이탈됩니다.—계시 12:17; 마태 24:48; 25:30.
11. 어떻게 하여 여호와께 인정받을 입장을 견지할 수 있읍니까?
11 우리는 경계할 필요가 있읍니다. 우리 중 신체적으로 완전한 사람은 하나도 없읍니다. ‘요한’은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이렇게 깨끗케 하는 일은 ‘아버지 앞에 있는 우리의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곧 천적 희망을 가진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한 1서 1:8-2:2) 그렇습니다. 모든 나라에서 나온 지적 희망을 가진 “큰 무리”도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읍니다. (계시 7:14) 그 다음에 ‘요한’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과 “사망에 이르는 죄”를 구별지었읍니다. 전자를 위하여는 우리가 기도할 수 있지만, 고의적으로 죄를 짓는 자들을 위하여는 우리가 기도하지 않습니다.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이 말은 ‘요한’이 극단주의자가 아니라 잘 균형잡히고 장성한 연로자임을 보여줍니다.—요한 1서 5:16, 17.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12. (ㄱ) 왜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읍니까? (ㄴ) 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위험한 입장에 있읍니까? 그러한 사람은 어떠한 절차를 밟아야 합니까?
12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정의와 대단히 비슷한 표현으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요한’은 말하였읍니다. (요한 1서 4:8, 16) ‘요한’은 이 사실을 전에 언급한 바 동일한 분으로부터 배웠읍니다. 그는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을 이렇게 기록하였읍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 3:16) 요한 1서 4:9, 10에서 동일한 진리가 표현되어 있읍니다. ‘요한’은 전에 한 바와 같이 이 중요한 진리를 적용시켜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그는 다음에 강력한 대조를 이루어 요점을 지적하였읍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라].” (요한 1서 4:11, 20) 바꾸어 말하면, 만일 당신이 형제에게 원한을 품는다든가, 그 형제에게 말하지 않으려고 하거나 고의로 그 형제를 피하려고 하거나, 그를 회중 성원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자신을 대단히 위험한 입장에 놓는 것입니다. 당신은 사실상 회중 위에 올라 서서 회중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만일 여호와께서 그 사람을 자기의 가족으로 인정하신다면, 당신이 그를 제명당한 사람으로 취급하고, 그 사람이 나타날 때 당신의 얼굴이 굳어져서야 되겠읍니까? 여호와께서 당신을 그러한 식으로 대하면 좋겠읍니까? 아마 그 형제가 처음에 당신에게 원한을 품기 시작하였다고 당신은 말할 것입니다. 그것이 가슴아픈 일이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생각된다면, 당신이 먼저 그 사람에게서 원한을 제거해야 할 것입니다. 나쁜 것을 본받지 마십시오. 싫어함이나 악감이 강하다면 기회를 보아서 조그마한 일이라도 우정을 나타내고자 하는 당신의 의향을 나타내십시오. 원통함이 아직 해소되지 않았다면, 마태 18:15-17에 명백히 설명되어 있는 절차를 밟아야 할 것입니다. ‘요한’은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것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좋은 본입니다.—요한 1서 3:16.
13. 예수께서는 제자 중 한 사람에게라도 냉정하셨읍니까? 그러한 경향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읍니까?
13 이 말은 우리가 모든 형제들을 정확히 똑같이 대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았읍니다. 예수와 ‘요한’ 사이는 특별히 가까웠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기의 제자 누구에게도 냉정하시지 않았읍니다. 심지어 ‘가룟 유다’에게도 끝까지 한결같이 하셨읍니다. 이렇게 하셨다는 증거는 제자들이 예수의 태도를 보고서는 누가 예수를 배신할 것인가를 눈치채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너무 성급하게, 지나치게 자기 독선적이 되거나, 자기의 판단에 대하여 지나치게 완고하여서는 안됩니다.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조금이라도 그러한 경향을 막기 위하여, 우리가 철저히 그리고 현실적으로 비이기적이 되도록 우리의 형제가 궁지에 처한 것을 보면 연민의 정을 막지 않고 ‘요한’의 말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한 1서 2:11; 3:17, 18.
14. 사랑 안에 거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며, 이것은 무슨 풍부한 축복을 가져옵니까?
14 자신을 격려하기 위하여 ‘요한’의 이 웅대한 말을 유의해보십시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느니라].” (요한 1서 4:16, 17)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은 항상 참되고, 하나님과 같은 사랑에 따라 행동하기로 결심하고, 그렇게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릇된 욕망과 불완전성 때문에 우리가 실족할 수는 있지만, “악한 자가 그를 다치지 못”하며, 그러한 행로를 포기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한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단호하게 행동함으로써 그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게 됩니다. 얼마나 고무적입니까! 참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과 함께, 당신의 편에 계셔서 당신을 훈련시키고, 당신을 확고하고 강하게 하시며, 끝까지 인도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면, 흔들리지 않는 자신과 용기를 얻게 됩니다.—요한 1서 2:16; 5:18; 또한 요한 10:27-30; 베드로 전 5:9, 10, 새번역 참조.
15. (ㄱ)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나타내기 위하여는 무슨 좋은 성품이 필요합니까? (ㄴ) 예민하다는 것과 쉽게 감정을 상한다는 것은 어떻게 차이가 있읍니까? (ㄷ) 예수와 그의 어머니는 언제 어떻게 그 좋은 성품을 나타내셨읍니까?
15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요한 1서 2:28; 또한 요한 17:20-26 참조) 그 주제는 ‘요한’의 편지 전체를 일관하고 있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우리는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됩니다. (요한 1서 5:2) 이렇게 하는 데는 결심이 필요합니다. 예수께서는 결심하셨읍니다. 그는 또한 매우 예민하셨읍니다. 그는 관찰을 못하고 놓치는 것이 없으셨읍니다. 그는 완전한 정도로 예민하셨지만, 교만하시거나 자기 중심적이 아니셨기 때문에 쉽게 감정을 상하지 않으셨읍니다. 그는 자기 연민의 정도 없으셨읍니다. 이러한 성품은 예수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 의하여 ‘갈릴리 가나’의 어느 결혼 잔치 때에 흥미있게 나타났읍니다. (요한 2:1-11) 포도주가 떨어져 모두가 당황하게 되었읍니다. 예수의 어머니는 그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말하였읍니다. ‘마리아’는 당연한 듯이 말끝을 떨어뜨려 말하지 않았읍니다. ‘마리아’는 틀림없이 의문 형식으로 말끝을 올려서 말을 하였을 것이며, 예수께서는 즉시 ‘마리아’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충분히 이해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네가 어떻게 해 주지 않겠니?”라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시는 일을 지시하려고 함으로써 도에 지나친 말을 하였지만 예수는 그것을 자기 모독 행위라고 생각지 않으셨읍니다. 오히려 그는 단호하게 그러나 친절하게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하고 말하였읍니다. ‘마리아’의 반응은 어떠하였읍니까? 그는 새침해져서 “여러 종들 앞에서 네 어미에게 말하는 태도가 그것이냐?” 하고 말하지 않았읍니다. 오히려 ‘마리아’는 결심을 나타내고 뜻한 그대로 계속하였읍니다. 종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말하였읍니다. 아, 그래서 예수께서 기분을 상하셨읍니까? 그는 화를 내어 자기 어머니에게 “내가 방금 그렇게 행동하지 말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읍니까? 왜 제 말을 듣지 않습니까?” 하고 말하였읍니까? 반대로 그는 놀라운 일을 행하셨읍니다. 비록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지만 그는 어머니가 지시한 그대로 행하였읍니다. 그는 하인들에게 어떻게 하라고 지시하셨읍니다. 그는 분명히 기적을 행하셨으며, 종들에게 말 한마디 하지 않고 필요한 포도주를 다 만들어 내었읍니다.
16. (ㄱ) 왜 ‘마리아’에게는 예수가 기적을 행할 것을 기대할 만한 좋은 이유가 있었읍니까? (ㄴ) ‘마리아’는 어떠한 방법으로 내적 집단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읍니까?
16 그러나, 예수와 ‘마리아’가 쉽게 기분을 상하는 일이 없이 결심과 예민함을 보였다고 그 문제를 생각할 수도 있읍니다. ‘마리아’가 30년 전에 직접 체험한 놀라운 기적을 생각한다면, 예수께서 전도 봉사를 시작하자 마자 기적들을 행할 것이라고 기대할 만한 이유를 가진 사람으로서 ‘마리아’보다 더 강한 이유를 가진 사람은 없으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과거 그 기적은 자기 안에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가져오는 것이었읍니다. 하나님의 천사 ‘가브리엘’이 직접[꿈으로가 아니라] 그를 방문하여, 그가 성령에 의하여 아이를 잉태할 것이며, “나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고 말하였읍니다. (누가 1:26-38) 그 순간부터 ‘마리아’는 자기가 여호와의 “은혜를 받은 자”라는 것을 예민하게 알고 있었읍니다. ‘마리아’는 대단히 독특하고 친근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은혜받는 내적 집단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으며, ‘마리아’는 그 안에 머물기를 결심하였읍니다. ‘마리아’는 예수의 전도 봉사 기간에 그를 딸아 다닐 수는 없었지만, 전도 봉사의 끝이 되어 그의 아들이 잔인하게 형주에 달리게 되었을 때에 예수와 함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었읍니다. 예수께서는 심신이 크게 고통을 받고 있었지만, 대단히 친절하게도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의 가족의 내적 집단에 들어가도록 마련을 하였읍니다. 뿐만 아니라, 수 주일 후에 ‘예루살렘’에 있는 소수의 사람들로 보다 더 훌륭한 내적 집단이 형성되던 때에 ‘마리아’도 거기 있어서 그 수에 포함되어 있었읍니다. 그 소수의 집단은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어 그리스도인 회중의 핵심, “새로운 피조물”의 시초를 형성하였읍니다.—요한 19:25-27; 사도 1:14; 고린도 후 5:17.
17. 어떠한 면으로 결심을 하고 예민한 것이 좋습니까?
17 우리가 가지게 되는 특권에 대하여 결심하고 예민한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나님의 가족 내에 들어 온다는 것은 참으로 영예로운 일이며, 이러한 특권을 견지하기 위하여는 “지각”을 연단받아 예민함을 유지하도록 영적으로 “단단한 식물”을 항상 취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 5:14) 우리가 선교부에서나 ‘벧엘’ 집에서 여호와의 전 시간 종으로 일하는 특권을 가지게 된다면, 가능한 한 거기에 머물도록 겸심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때로는 변화가 필요할 때가 있으며, 그것은 불충성이나 기분이 상했거나 화가 났기 때문이 아닐 것입니다. 예를 들면, 변화의 이유로 그가 결혼하기로 결정한 것이 그 이유가 될 수 있으며, 그것은 기분이 상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읍니다.
18, 19. (ㄱ) ‘요한’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대조합니까? (ㄴ) 하나님의 영과 믿음은 어떻게 씨에 비유할 수 있읍니까? 이것은 우리에게 무슨 확신을 주며, 그러나 우리 시대에 무엇이 필요합니까?
18 ‘요한’은 “마귀에게 속”한 자와 ‘하나님께 속한 자’ 곧 “하나님께로서 난 자”를 날카롭게 대조하였읍니다. 과거에는 우리가 세상에 속하였었고, “악한 자 안에 처”하였을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초대에 응하므로써 하나님의 가족 안으로 옮겨질 수 있읍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갈 줄을” 안다고 ‘요한’은 말하였읍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 그 성령은 작은 씨와도 같이 좋은 마음에 심어지면 새로운 생명이 시작됩니다. ‘요한’은 이렇게 기록하였읍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요한 1서 3:8, 9, 14, 24; 5:19) 여기에는 믿음이 곁들여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께서는 이 믿음을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인 겨자씨에 비유하셨읍니다. 그것이 처음에는 대단히 작지만 적절하게 영향을 섭취한다면, 끝없이 새로운 힘으로 성장할 것이며, 당신은 모든 장애물을 제거 또는 극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면, ‘못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로 하여금 선한 것을 본받게 할 것입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마태 13:31, 32; 17:20; 요한 1서 5:4.
19 이 낡은 사물의 제도의 마지막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 생활에 대한 장애물과 방해거리는 대단히 강합니다. 문제거리가 많이 있읍니다. 여호와께서는 이것을 미리 아시고 그의 말씀 가운데 유익하고 적절한 교훈을 주셨읍니다. 성경에서 할례에 관하여, 특히 전술한 바 마음의 할례에 관하여 설명한 말 가운데서 이 교훈을 고려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473면 삽화]
어느 결혼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에 예수와 그의 어머니는 쉽게 기분을 상하는 일이 없이 결심과 예민함을 보였고, 예수께서는 처음 기적을 행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