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합중국 (제2부)
적들이 즐거워하다
이들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의 투옥은 상징적인 치명타로서 그들의 적들에게 큰 기쁨과 안도감을 주었다. 계시록 11:10의 이러한 말이 성취되었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두 증인”의 종교적, 사법적, 군사적 및 정치적 적들은 자기들을 괴롭히는 자들에 대한 승리를 거두는 데 각각 한몫을 담당하였으며 서로 축하하기 위해 “예물을 보”냈다.
「설교자들이 쌍수로 환영하다」라는 저서에서 ‘레이 에이치. 에이브럼즈’는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와 그 동료들의 재판을 살펴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사건 전체를 분석해 볼 때, ‘러셀파’를 거세하려는 움직임의 배후에는 처음부터 교회들과 교직자들이 있었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
“20년 형의 선고를 받았다는 소식이 종교 출판물의 편집인들에게 전해지자, 크고 작은 출판물 전부가 그 일을 기뻐했다. 전통적 종교 출판물 중 어느 것에서도, 나는 동정적인 말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느 면에서는 그들이 “전통적” 종교 집단의 미움을 샀기 때문에 박해를 ··· 받게 되었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고 ‘업튼 신클레어’는 결론지었다. 교회들이 연합해서 이루려고 했으나 실패해 온 일—그러한 ‘‘바알’의 예언자들’을 영원히 분쇄하는 것—을 이제 정부가 그들을 대신해서 성취한 것으로 보인다.”
‘‘바벨론’적 포로’ 상태에서도 낙관적임
기원전 607년부터 537년까지 ‘유대’인들은 고대 ‘바벨론’에서 포로로 지루한 생활을 하였다. 그와 비슷하게 1914년부터 1918년의 제 1차 세계 대전 중에 성령으로 기름부음받은 헌신한 여호와의 숭배자들은 ‘바벨론’의 포로 상태에 있었다. 특히 협회 본부에 있던 충실한 8명의 형제들이 ‘조오지아’ 주 ‘아틀란타’에 있는 연방교도소에 수감되었을 때 그 포로 상태를 더욱 절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운 기간 전체를 통해서 「파수대」 발행은 한 호도 중단되지 않았다. 임명된 편집 위원들은 그 출판물을 계속 배포하였다. 더우기 그 당시 충실한 ‘성경 연구생’들은 어려움을 직면해서도 훌륭한 태도를 나타내었다. ‘티이. 제이. 설리반’은 이렇게 말하였다. “형제들이 감금되어 있던 1918년 늦은 여름에 나는 ‘브루클린’ ‘벧엘’을 방문할 특권을 가지게 되었다. ‘벧엘’의 활동에 관한 책임을 맡고 있는 형제들은 결코 두려워하거나 낙심하고 있지 않았다. 사실상 그와 반대였다. 그들은 낙관적이었으며 결국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승리를 주실 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나는 월요일 아침 식사를 할 특권을 즐겼는데 그날 아침은 주말 임명을 받고 파견된 형제들이 보고하는 때였다. 아주 훌륭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느 경우에 있어서도 형제들은 확신을 가지고 여호와께서 그들의 활동을 더욱 인도하여 주실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러더포오드’ 형제와 그 동료들이 재판이 끝난 후 어느날 아침, ‘알. 에이치. 바아버’는 흥미롭게도 ‘러더포오드’로부터 ‘펜실베이니아’ 역으로 와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몇 시간 동안 형제들은 그 역에서 ‘아틀란타’행 직행열차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바아버’ 형제와 다른 몇 명의 형제들은 급히 서둘러 그 역으로 갔다. 그곳에서 ‘러더포오드’ 형제는 본부 형제들을 경찰이 너무 심하게 괴롭히면 ‘왙취 타워 협회’는 ‘펜실베이니아’ 주 법인이므로 ‘벧엘’과 ‘브루클린 성막’을 팔고 ‘필라델피아’나 ‘해리스버어그’ 혹은 ‘피츠버어그’로 이전하라고 말하였다. ‘벧엘’은 60,000‘달러’, ‘성막’은 25,000‘달러’라는 값이 제안되었다.
사태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 때 협회의 책임을 맡고 있던 사람들은 많은 문제들을 직면하였다. 예를 들면, 종이와 석탄이 부족하였다. 고조되는 애국심 때문에 부당하게도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을 반역자로 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협회에 대한 적의가 대단했기 때문에 ‘브루클린’에서는 더 이상 협회의 운영을 계속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본부를 책임맡은 집행 위원회는 다른 형제들과 상의하여 ‘브루클린 성막’을 팔고 ‘벧엘’을 폐쇄하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하였다. 결국, ‘성막’은 ‘알. 에이치. 바아버’의 기억으로는 16,000‘달러’에 팔렸다. 그 후 ‘벧엘’은 정부와 매매를 위한 모든 수속을 마치고 현금 인수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휴전이 되는 바람에 그렇게 되지 않았다. 매매는 결코 성립되지 않았다.
하지만 1918년 8월 26일 ‘뉴우요오크’ ‘브루클린’에서 ‘펜실베이니아’ ‘피츠버어그’로 협회 본부의 이전이 시작되었다. ‘해이즐 에릭슨’은 이렇게 얘기한다. “돌이켜 볼 때 형제들이 투옥되었으므로 ‘성경 연구생’들이 크게 놀라긴 했지만 증거하는 일을 결코 중지하지 않았음을 나는 알 수 있다. 단지 그들은 좀 더 조심성을 나타내었을 뿐이다.” ‘에이치. 엠. 에스. 딕슨’ 자매는 “벗들의 믿음은 계속 강하였으며 집회는 정기적으로 열렸다.”고 말하였다.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계속 나타내었다. 그들이 어려움과 박해의 시련 가운데 있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이 그들 위에 있었다. 그들이 인내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박해자들로부터 구해 내시고 ‘‘바벨론’의 포로’ 상태에서 그들을 구출하실 것이 확실하였다!
수감되어 있던 기간
1918년 중반까지도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와 일곱명의 동료들은 ‘조오지아’ 주 ‘아틀란타’ 연방교도소에 있었다. 1918년 8월 30일에 ‘에이. 에이치. 맥밀란’이 쓴 편지를 보면 형무소가 어떻했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멜빈 피이. 사전트’가 제시한 그 편지 사본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여러분은 수감되어 있는 우리의 상태가 어떠한지 매우 궁금하실 것입니다. 저는 우리의 생활이 어떤지 몇 가지를 간단히 말씀드리겠읍니다. ‘우드워드’ 형제와 저는 ‘같은 방에 있읍니다.’ 우리 방은 아주 깨끗하고 통풍과 조명이 잘 되어 있읍니다. 방은 10 x 6 x 7‘피이트’ 크기로서 짚이 덮힌 침대 둘, 얇은 이불이 둘, 담요와 베개들, 의자 둘, 책상 하나, 그리고, 깨끗한 수건과 비누가 많이 있읍니다. 또 화장실 용품을 넣어놓는 장이 있읍니다. ···
“형제들은 양복공장에서 모두 함께 일합니다. 이 방은 60 x 40[피이트] 크기로 통풍이 좋고 조명도 잘 되어 있읍니다. ‘우드워드’ 형제와 저는 단추 구멍을 만들고 ‘샤쓰’와 수감자 복장에 단추 다는 일을 합니다. ‘밴 앰버어’ 형제나 ‘로빈슨’, ‘피셔’, ‘마아틴’, ‘러더포오드’ 형제는 수감자들의 상의나 바지를 만듭니다. 아니, 만드는 것을 거든다는게 맞겠지요. 이 부서에는 전부 약 100명의 남자들이 작업하고 있읍니다. 제가 일하는 곳에서는 모든 형제들을 볼 수 있는데 재봉틀 앞에 앉아서 바지의 이쪽 부분과 저쪽 부분을 서로 이어 주는 솔기를 꿰매고 있는 ‘밴 앰버어’ 형제를 보는 것은 정말 흥미있읍니다. ··· ‘러더포오드’ 형제는 상의 이어맞추기를 거의 포기했나 봅니다. 한 3주일째 일을 한 것 같은데 아직 한 벌도 완성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러더포오드’ 형제를 보면 아주 바쁜 것 같기는 한데 틀림없이 바늘에다 실을 꿰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간수가 너무 심하게 대하였으므로 다른 수감자들이 옷을 완성시켜 주었다. 결국 ‘러더포오드’ 형제는 좀 더 ‘편한’ 곳—도서실로 옮겨졌다.] ···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방에 가서 우리가 첫째로 하는 일은 석간 신문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6시에서 7시까지 한 시간 동안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악기가 무엇이든지 그것을 연주할 수 있읍니다. 참으로 다양합니다. ‘유대’ 수금을 빼놓고는 각종 악기가 다 연주되는가 봅니다. 내가 할 줄 아는 것은 십현금 외에는 그 ‘유대’ 수금이기 때문에 하나 구해볼까 생각 중입니다. 그 시간에 우리는 ‘우드워드’가 ‘단테의 지옥’이라고 부르는 ‘도미노’ 노리를 합니다. 그 후 취침 시간인 저녁 10시까지 「새벽」 책이나 성서를 읽으며 10시가 되면 불이 꺼집니다. 다음날에도 같은 일이 반복되며 토요일까지 계속 그렇습니다. 토요일 오후에는 모든 재소자들이 뜰로 나갑니다. 제법 잘 진행되는 야구 시합도 있는데 남자들이 꽤 관심을 가진 경기이죠. 저는 그날 오후를 보통 정구로 보내죠. 다른 형제들은 거닐면서 담소합니다. 조그만 집단 속에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모여 있읍니다. 즉 무정부주의자, 사회주의자, 위조지폐범, 주류밀수입자, 친독일파, 은행지배인, 변호사, 약종상, 의사, 열차 ‘갱’, 강도, 교역자(상당수가 있읍니다) 등등 그날 오후에 감옥 악단은 몇 가지 특별곡을 연주합니다.”
투옥된 8명의 ‘성경 연구생’들은 다른 재소자들에게 하나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할 기회를 가졌다. 일요일 오전에는 모든 재소자들이 예배에 참석하도록 요구되었고 원하는 사람은 그후에 있게 되는 주일 학교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8명의 형제들은 연구와 친목을 위해 한 반을 구성하였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다른 재소자들도 그들과 함께 하였고 형제들은 교대로 그 집단을 가르친다. 어떤 간수들은 가까이 와서 열심히 듣기도 하였다. 관심이 증가하여 90명까지 참석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진리의 변화시키는 힘은 어떤 재소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면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였다. “일흔 두살이 된 내가 감옥에 있게 된 것은 진리를 듣기 위해서였나보다. 그래서 나는 연방 교도소에 오게 된 것을 기뻐한다. 나는 57년간 교역자들에게 질문하였으나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 사람들[투옥된 ‘성경 연구생’들]은 내가 질문한 모든 것에 만족스러운 답을 해 주었다.”
그 당시 ‘스페인’ 감기가 만연하고 있어서 주일 학교 반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8명의 ‘성경 연구생’들이 ‘아틀란타’ 교도소에서 풀려나오기 바로 전에 그들의 가르침을 받던 사람들 전부가 함께 모여 약 45분간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의 연설을 듣게 되었다. 몇 명의 간수들도 참석하였으며, 왕국 통치 아래 인류가 자유를 누릴 희망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는 재소자들도 많았다. ‘성경 연구생’들이 감금된 상태에서 자유롭게 되었을 때에도 계속 충실한 작은 집단이 감옥에 남아 있었다.
확신을 가진 표현들
1918년 11월 11일 휴전 협정이 조인되고 제 1차 세계 대전은 끝났다. 그러나 8명의 ‘성경 연구생’들은 아직도 감옥에 있었다. 그들의 동료 신자들이 1919년 1월 2-5일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어그’에서 대회를 개최할 때에도 계속 감금되어 있었다. 그 대회는 1919년 1월 4일 토요일에 있을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의 매우 의미 심장한 정기총회와 병행되었다.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는 조직 내부의 반대자들이 그 법인총회에서 자기와 협회의 다른 임원들을 그들이 선택한 사람들로 대치하려고 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1월 4일 바로 그 토요일에 ‘에이. 에이치. 맥밀란’은 교도소 정구장에서 운동을 하고 있었다. ‘러더포오드’가 그에게 다가왔다. ‘맥밀란’에 의하면 그때 이런 일이 있었다.
“‘좀 이야기할 것이 있다’고 ‘러더포오드’가 말하였다.
“‘무슨 이야기신데요?’
“‘‘피츠버어그’에서 진행되고 있을 일에 대해서입니다.’
“‘저는 여기서 이 시합이나 끝내고 싶습니다.’
“‘형님은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관심이 없으십니까? 오늘이 임원들을 선출하는 날이라는 것을 모르시나요? 형님이 무시되고 해임될지도 모르며 우리는 영원히 여기에 있게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러더포오드’ 형님, 형님이 아마도 생각해 보시지 않은 점을 제가 말씀드려야겠어요. 협회가 법인체가 된 이래 이번이야말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회장으로서 누구를 원하시는지 분명히 나타날 수 있는 처음 기회인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러셀’ 형제는 통제할 수 있는 의결권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임원들을 임명하였읍니다. 그렇지만 외면으로 볼 때 더 이상 사용될 수 없는 우리들에 있어서는 문제가 다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때마침 석방되어 그러한 대회나 그러한 법인총회에 참석할 수 있어서 그곳에 입장하게 되면 우리는 ‘러셀’ 형제와 같은 입장에 있게 되고 동일한 존경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업이 아니라 인간의 사업으로 보일 것입니다.’
“‘러더포오드’는 잠간 생각에 잠기는 것 같더니 다른 곳으로 걸어 가버렸다.”
‘피츠버어그’에서는 그날이 파란 많은 날이었다. ‘메어리 해넌’은 이렇게 말한다. “법인 총회를 갖게 될 시간이 되자 잔뜩 긴장감이 감돌았다. 우리는 몇몇 반대자들이 참석한 것을 보았는데 그들은 자기 편 사람이 세력을 잡기를 바랐다.”
‘러더포오드’ 형제가 보낸 편지가 청중에게 낭독되었다. 그 편지 가운데서 그는 모두에게 사랑과 인사를 보내고 ‘사단’의 주 무기인 교만과 야심과 두려움에 대해 경고하였다. 여호와의 뜻에 기꺼이 복종하려는 태도를 보이면서 겸손하게도 다른 적절한 사람들이 협회의 다른 역원들로 선출되도록 제안까지 하였다.
상당한 시간에 걸쳐 토의가 계속되었는데 그때 ‘이이. 디이. 섹스튼’ 형제가 일어나 이렇게 말하였다.
“저는 방금 도착하였읍니다. 제가 탄 열차가 눈에 갇혀 48시간 연착하였읍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점이 있는데 차라리 지금 그것을 얘기하는 것이 마음 편할 것 같습니다. 저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 모두와 마찬가지로 저는 찬성과 반대에 대해 확실한 생각을 가지고 이곳에 왔읍니다. 법적인 요건을 갖춘 우리의 벗들을 합당하게 고려하기 위하여 다른 몇 명의 변호사들에게 문의해 보았읍니다. 저는 그들이 의사들과 매우 흡사하다는 점을 발견하였읍니다. 때로는 그들끼리도 의견이 다릅니다. 그러나 이제 제가 말씀드리려는 점은 그들이 얘기한 바와 완전히 일치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는 데는 법적인 장애가 없읍니다. 남부에 수감되어 있는 우리의 형제들을 어떤 직책에 다시 선출한다 해도 연방 법원이나 공중에 대하여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음을 알 수 있읍니다. 또한 제가 받은 모든 조언으로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저는 사랑하는 ‘러더포오드’ 형제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찬사는 그를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의 회장으로 다시 선출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점에 있어서, 우리가 취하고 있는 입장에 대해 공중은 아무런 의구심도 갖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전문적으로 볼 때 우리의 형제들이 이해하지 못하여 어떤 법을 범했다 할지라도 그들의 동기가 선하다는 것을 알고 있읍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법이나 사람의 법 중 어느 것도 범하지 않았읍니다. 우리가 협회장으로서 ‘러더포오드’ 형제를 다시 선출한다면 그것은 그에 대한 가장 큰 신뢰를 나타내는 것이 될 것입니다.
“저는 법률가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한 입장이 정당한가 하는 문제에 이른다면 충성자들에 관한 법에 대해 저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읍니다. 충성이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선거를 하여 ‘러더포오드’ 형제를 다시 회장으로 선출하는 것보다 더 큰 신뢰를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명이 있었고 투표하여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는 회장으로, ‘시이. 에이. 와이스’를 부회장으로, ‘더불류. 이이. 밴 앰버어’를 총무 겸 재무로 선출하였다. ‘애너 케이. 가드너’는 이렇게 회고한다. “그 총회가 끝난 뒤 자기 백성에 대한 여호와의 보이는 인도를 다시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리는 참으로 행복하였다.”
장면은 ‘아틀란타’ 형무소로 바꿔진다. 때는 1919년 1월 5일이었다.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가 ‘맥밀란’ 형제의 방벽을 톡톡 두들기면서 “손을 내밀어 보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때 그는 ‘맥밀란’에게 한 장의 전문을 건네 주었다. 그 소식은? ‘러더포오드’가 회장으로 재선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날 얼마 후 ‘러더포오드’는 ‘에이. 에이치. 맥밀란’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형님께 이야기할 것이 있읍니다. 어제 형님은 우리가 ‘피츠버어그’에 있다면 우리는 ‘러셀’ 형제와 같은 위치에 있게 되며 그 선거에 영향을 주게 될 것이고 따라서 주께서 누구를 원하시는지 볼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내 머리에 지금도 생동하는 말을 하셨읍니다. 형님, 이제 내가 만일 이곳을 나가게 된다면 나는 하나님의 은총으로써 피조물 숭배와 관련된 이 모든 것을 타파하겠읍니다. 더우기 나는 진리의 칼을 휘둘러 오래된 ‘바벨론’의 내부를 파헤쳐 놓겠읍니다. 그들은 우리를 이곳에 넣었지만 우리는 나가게 될 것입니다.” ‘러더포오드’는 농담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석방된 후 1942년 사망할 때까지 그는 거짓 종교의 악을 폭로함으로써 그 약속을 이행하였던 것이다.
석방을 위한 노력
1919년 2월 일부 신문들이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와 투옥된 동료들의 석방 문제를 제기하여 전국적으로 동요를 일으켰다. ‘성경 연구생들’은 신문 편집인, 상, 하원 의원, 주지사들에게 수천통의 편지를 내어 투옥된 8명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조처를 취해줄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한 요청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석방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도움이 되어 주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버지니아’ 주 하원의원 ‘이이. 더불류. 손더’가 보내온 편지는 이러하였다. “나는 ‘아틀란타’에 감금되어 있는 ‘성경 연구생’들의 입장을 언급한 편지를 받았읍니다. 나는 그들의 사면에 호의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추천하는 데 기꺼이 참여할 것을 삼가 아뢰는 바입니다. 전문적인 각도에서 보면 모르거니와 일반적인 견지에서는 그들이 결코 범죄자일 수는 없읍니다. 이제 전쟁이 끝났으며 우리는 가능한 한, 신속히 전력을 다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 시장 ‘헨리 더불류. 키엘’은 미합중국 대통령 ‘우드로우 윌슨’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상급 법원의 최종 판결이 계류 중인 ‘만국 성경 연구회’의 ‘러더포오드’ 씨와 그 일행 모두에게 보석을 허락해 주시오며 또한 가능하다면 사면을 허용해 주실 것을 이미 각하에게 청원한 사람들과 함께 본인은 개인적인 요청을 하고자 합니다.”
1919년 3월에는 ‘러더포오드’ 형제와 그의 동료들을 석방하기 위한 새로운 노력이 있었다. 전국적으로 청원서를 돌려 짧은 기간에 70만명의 서명을 받았다. 그 당시 청원서에 서명한 수로서는 가장 많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 청원서는 ‘윌슨’ 대통령이나 정부에 제출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하기 전에 8명의 ‘성경 연구생’들에 대한 석방 조치가 취해졌던 것이다. 그렇지만 청원서로 두드러진 증거가 수행되었었다.
그 청원서와 관련된 활동을 ‘아더 엘. 클라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물론 갖가지 종류의 경험을 하였다. 어떤 사람은 기꺼이 서명을 했으며 우리가 증거할 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적의를 가지고 ‘감옥 속에서 푹 썩게 내버려두라!’고 말하였다. 보통 그런 일은 모욕적인 것이었으나 여호와의 영이 우리를 지도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래서 우리는 즐겁게 그 모든 일을 하였으며 끝까지 그렇게 계속하였다.”
감옥에서 석방되다
1919년 3월 2일 예심판사인 연방 지방법원 판사 ‘할런드 비이. 하우’는 ‘와싱턴’에 있는 검찰총장 ‘그레고리’에게 전문을 보내어 투옥된 8명의 ‘성경 연구생’에 대한 “즉각적인 감형”을 추천하였다. ‘그레고리’는 ‘하우’에게 그러한 조처를 취할 것을 요청하는 전문을 보냈었다. 투옥된 형제들이 상소하였으며, 검찰총장이나 ‘하우’는 이 사건이 상급법원으로 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조처가 취해진 것으로 보인다. (‘하우’ 판사와 그리고 나중에 ‘맨튼’ 판사가 보석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상소가 계류 중에 있는 동안 형제들은 감금되어 있었다.) 1919년 3월 3일자로 ‘하우’ 판사가 검찰총장에게 보낸 서신 역시 흥미있다. 그 내용은 이러하였다.
“‘와싱턴 디이. 시이.’
“존경하는 검찰총장 귀하,
“귀하!
“이 달 초하루에 보내신 전문에 답하여 저는 그날 저녁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읍니다.
“‘‘조셉 러더포오드’, ‘윌리암 이이. 밴 앰버어’, ‘로버트 제이. 마아틴’, ‘프레드 에이치. 로빈슨’, ‘조오지 에이치. 피셔’, ‘클레이튼 제이. 우드워드’, ‘지오바니 드체카’, ‘에이. 휴 맥밀란’에 대한 즉각적인 감형을 추천함. 그들은 모두 ‘뉴우요오크’ 동부 지역의 동일 사건의 피고들임. 전쟁이 끝났으므로 본인으로서 관대함을 나타낼 수 있게 됨. 그들은 종교적인 교리를 전파하고 출판함으로써 많은 해를 끼쳤었음.’
“‘드체카’를 제외한 각 피고에게 20년의 중형이 내려졌읍니다. ‘드체카’는 10년형입니다. 본인의 주된 목적은 다른 사람에 대한 경계로서 본보기를 남기고자 하는 것이었으며 전쟁이 끝나면 대통령이 그들을 구제할 것이라고 믿었읍니다. 전문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들은 많은 해를 끼쳤으며 그들이 너무 일찍 자유롭게 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할 만합니다만 이제 더 이상 그들이 해를 끼칠 수 없기 때문에 선고를 내릴 때 제가 엄중했던 것 만큼 관대함을 베풀고자 합니다. 전부는 아닐지 모르지만 그들 대부분은 진실하다고 믿고 있으며 문제를 일으킬 기회가 없어진 후에도 그런 사람들을 감금시켜 둔다는 데에 본인은 찬성할 수 없읍니다. 그 사건은 순회공소원에서 아직 심리되지 않았읍니다.
“돈수
‘할런드 비이. 하우’(서명)
합중국 지방법원 판사.”
1919년 3월 21일 미합중국 대법원 판사 ‘루이스 디이. 브란데이스’는 투옥된 8명의 형제들에 대한 보석을 명했으며 그해 4월 14일에는 그들에게 상소할 권리가 부여되어야 한다는 지시를 내렸다. 즉각 석방된 그들은 3월 25일 화요일에 기차로 ‘아틀란타’ 형무소를 떠났다. 1919년 3월 26일 ‘브루클린’에 돌아왔으며 연방 당국은 재판은 계류 중인채로 두고 각각 10,000‘달러’의 보석금으로 형제들을 석방하였다.
행복한 귀가!
“그들의 석방 소식을 전해들은 형제들은 크게 기뻐하였으며 그들이 돌아오는 것을 막기 위해 ‘벧엘’로 모여왔다”고 ‘루이스 파아쉬’는 말하면서 이렇게 부언한다. “재빨리 형제들은 ‘브루클린’ ‘벧엘’에서 커다란 잔치를 마련하였다. 나의 아버지는 방 준비를 돕고 돌아오는 형제들을 환영하는 즐거움을 나누기 위해 ‘브루클린’으로 가셨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그때는 참으로 행복한 순간이었다! ‘매이블 해이즐릿’은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100개의 ‘도우넛’을 만들었는데 형제들이 그것을 맛있게 먹은 것을 기억한다. ··· ‘러더포오드’ 형제가 그것을 집으려고 손을 뻗치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와 다른 형제들이 경험담을 얘기했을 때 그것은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키가 작은 ‘드체카’ 형제는 모두가 자기를 보고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의자위에 서서 이야기하던 것도 생각난다.” ‘기우스토 바타이노’는 이렇게 말한다. “식사로 닭고기가 준비되었고 사람들이 너무많아서 우리들은 서서 먹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때 형제들의 경험담을 듣는 것은 참으로 흥미진진한 것이었다. ··· ‘드체카’ 형제가 말한 점들 가운데 한 가지는 ‘형제들, 고난이 크면 축복도 큽니다’란 것이었다. 참으로 나는 여호와께서 백성 위에 내리신 풍부한 축복을 볼 수 있었다.”
1919년 4월 1일 저녁에는 ‘왙취 타워’ 사무실 요원들이 ‘피츠버어그’ ‘채덤 호텔’에서 석방된 형제들을 위해 다른 연회가 베풀어졌다. ‘티이. 제이. 설리반’은 이렇게 말하였다. “1919년 3월 25일 화요일 ‘아틀란타’ 연방교도소에서 우리의 형제들이 석방된 것과 아울러 오게 된 여호와의 백성들의 기쁨은 그칠줄 몰랐다. ··· 여호와께 대한 그들의 사랑은 1919년 ‘시다포인트’ 대회를 통해 여호와의 구출을 모든 곳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알릴 수 있도록 즉시 활동을 시작한 사실로 보아 알 수 있다.”
완전 무죄
8명의 ‘성경 연구생’에 관한 사건의 상소심은 1919년 4월 14일에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뉴우요오크’ 시의 연방 제 2순회 공소원에서 심리를 받았다. 1919년 5월 14일 그들에 대한 잘못된 유죄판결이 파기되었다. 그때는 ‘워드’, ‘로저스’, ‘맨튼’ 세 판사가 주재하였다. 그 사건을 재심하도록 되돌려 보내면서 ‘워드’ 판사는 이러한 견해를 밝혔다. “이 사건에서 피고들은 당연히 받았어야 할 적당하고 공평한 재판을 받지 못했으며 그러한 이유로 그 판결을 파기하는 바이다.”
‘마아틴 티이. 맨튼’ 판사는 반대하였다. ‘가톨릭’교인인 이 판사는 1918년 7월 1일 이유도 제시하지 않고 ‘러더포오드’와 동료 피고인들에 대한 보석을 거부하여 상소가 계류되어 있던 9개월 동안 부당하게 감금되어 있게 하였다. 이것은 여담이지만 후에 교황 ‘비오’ 6세는 ‘맨튼’ 판사에게 “성 ‘그레고리’ 대제 기사단의 기사” 자격을 수여하였다. 하지만 마침내 ‘맨튼’이 정의를 무시하였음이 들어났다. 그는 여섯 가지 판결에 있어서 186,000‘달러’의 뇌물을 받고 수치스럽게 자기의 고위 연방 판사직을 남용함으로써 1939년 6월 3일에 10,000‘달러’의 벌금과 장기 2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19년 5월 14일 8명의 ‘성경 연구생’들에 대한 잘못된 판결이 파기된 것은 정부가 재기소하지 않는 한 그들이 무죄임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전쟁은 끝났으며 사실에 근거해서 유죄가 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당국자들은 인식하였다. 그러므로 1920년 5월 5일 ‘브루클린’의 공판정에서 검사는 기소 중지를 선언하였다. 원고의 소송 중지로 기소가 중지되었다. 그렇게 해서 이 그리스도인 여덟명 전원에 대한 불법적인 재판은 완전히 끝났다.
판결의 파기와 기소 중지는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와 7명의 동료들이 전적으로 무죄임을 의미하였다. ‘저지 러더포오드’를 “전과자”라고 한 사람들이 있었으나 그것은 전혀 근거없는 말이었다. 1919년 5월 14일의 법원 판결은 그와 그의 동료들이 불법적인 유죄판결로 투옥되었음을 확증하였다. ‘러더포오드’ 형제가 전과자로 고려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후에 미합중국 대심원 변호를 하였다는 사실로 확실히 증명된다. 그것은 전과자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가 부당하게 투옥된지 20년 후 즉 1939년 가을에 9명의 대심원 판사들은 ‘수나이더’ 대 ‘뉴우저어지’ 주 사건에서 ‘러더포오드’의 변호를 청취하였다. 법정은 8대 1로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의 한 사람이며 ‘러더포오드’에게 변호를 의뢰한 ‘클라라 쉬나이더’에게 승소 판결을 내렸다.
문제가 절정에 이르렀던 1918년과 1919년에 여호와의 백성은 참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었다. 그러나 여호와의 도움으로 그들은 그것을 인내하였다. (로마 5:3-5) ‘사단’은 여러 가지 수단을 사용하였으나 여호와를 찬양하는 그들의 입술을 잠잠하게 만들지 못하였다. ‘성경 연구생’들의 1919년 연표어는 참으로 적절하였다! 그것은 “무릇 너를 치려고 제조된 기계가 날카롭지 못할 것이라. ··· 이는 여호와의 종들의 기업이[니라]”였다.—이사야 54:17.
새로운 전망
1917-1919년의 시련기가 지나간 후에 여호와의 백성은 반성해 보았다. 그들은 여호와의 승인을 받기에 합당하지 못한 일을 했음을 깨닫고 기도로 용서를 구하였으며 이전의 행로를 회개하였다. 그로 인해 여호와의 용서와 축복을 받게 되었다.—잠언 28:13.
한가지 타협은 「종말을 고한 비밀」에서 얼마의 지면을 삭제한 것이었다. 이것은 검열관들을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다른 경우는 1918년 6월 1일호 「파수대」지의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4월 2일 의회 결의안 및 5월 11일의 미합중국 대통령의 선언에 따라 모든 곳에 있는 주의 백성은 5월 30일을 기도와 간구의 날로 정할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잇따른 기사는 미합중국을 찬양하였으며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중립적 입장에 일치한 것이 아니었다.—요한 15:19; 야고보 4:4.
제1차 세제 대전 중 ‘성경 연구생’들 사이에서는 군복무에 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 것인지 여러 가지 질문이 제기되었었다. 어느 면으로든지 참여를 거부한 사람들도 있었고 비전투원으로서의 복무를 받아들인 사람들도 있었다. 전쟁 공채나 우표를 사는 것에 대한 의문도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그것들을 사지 않았다는 이유로 박해와 심지어 잔인한 대우를 받기도 하였다. 국가의 어떤 계획이나 활동을 고려할 때 오늘날의 여호와의 종들은 이사야 2:2-4에 명시된 바와 같은 성서 원칙에 따라 행동한다. 그 성귀는 이러한 말로 결론을 짓고 있다. “무리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
새로운 전망. 이것이 1920년대에 들어서서 여호와의 백성이 가진 것이었다. 어려웠던 몇 해를 지나왔지만 상징적 “두 증인”인 그리스도의 기름부음받은 추종자들은 영적으로 다시 소생하였으며 행동할 준비를 갖추었다. 어떻게 해서인가? ‘러더포오드’ 형제와 7명의 동료들이 감옥에서 석방된 직후 수 개월간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성공적인 시험
‘러더포오드’가 감옥에서 석방되자 그의 머리에는 이러한 커다란 의문이 있었다. 즉 왕국 소식에 대한 관심도가 어느 정도일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약해진 건강을 주로 돌보아야 할 환자였다. 그러나 그는 이 중요한 의문에 대한 답을 얻어야 하였다.
실은 ‘아틀란타’ 교도소에 감금되어 있던 여러 달 동안 ‘러더포오드’ 형제와 ‘밴 앰버어’ 형제는 환풍이 잘 되지 않는 방에 갇혀 있었다. 산소가 충분히 공급되지 않아 그 형제들의 신체 조직에 독소가 누적되었다. 사실상 ‘러더포오드’는 감금되어 있는 동안 약해진 폐가 그의 여생에 계속 영향을 주었다. 석방된지 얼마 안되어 그는 폐렴에 걸렸다. 너무 심해서 그의 생존조차 의문시되었다. 그는 건강 상태 때문에 그리고 그의 가족이 ‘캘리포오니아’ 주에 있었기 때문에 그리로 갔다.
‘러더포오드’ 형제는 1919년 5월 4일 일요일에 ‘로스앤젤레스’의 ‘클룬 오디토리엄’에서 공개 집회를 마련하였다. 그것은 실상 사람들이 왕국 소식에 얼마만한 관심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광범위한 신문 광고를 통해 그는 ‘왙취 타워 협회’ 역원들이 불법적으로 유죄 판결을 받게 된 이유를 그 연설 가운데서 설명할 것을 약속하였다.
지방 교직자들은 ‘성경 연구생’들과 그 협회는 이제 끝났기 때문에 광고된 “고난받는 인류를 위한 희망”이란 강연에 아무도 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잘못이었다. 3,500명이 참석하였고 장소가 부족하여 약 600명이 장내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 사람들에게 ‘러더포오드’는 월요일 저녁에 연설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온종일 몸이 아팠지만 1,500명의 청중에게 그 연설을 하였다. 그러나 신병이 몹시 심해서 약 한 시간 후에는 동료가 대신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렇지만 ‘로스앤젤레스’에서의 시험은 성공적이었다. 왕국 소식에 대한 관심이 대단하였던 것이다.
“‘벧엘’이 회복될 것인가?”
이것은 또 다른 큰 의문이었다. ‘브루클린 성막’은 이미 처분되었었다. ‘벧엘’은 아직 협회의 소유였으나 그곳에는 설비가 거의 없었으며 본부 기능은 ‘피츠버어그’로 이전되었다. 게다가 형제들에게 돈이 별로 없었고 ‘패더럴 스트리트’ 지구는 결코 확장을 위해서 적절한 곳이 못되었다. 인쇄 시설은 부족하고 협회의 출판물 인쇄에 사용한 동판도 많이 부숴졌다. 암담한 처지였다.
그런데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가 ‘캘리포오니아’에 머물러 있는 동안 ‘피츠버어그’ 협회 본부에서는 흥미있는 일이 발생하였다. 어느날 아침 재산이 있는 ‘조오지 버터필드’라는 그리스도인이 사무실로 찾아왔다. 응접실에서 그와 대화하는 중에 ‘에이. 에이치. 맥밀란’은 ‘러더포오드’ 형제가 ‘캘리포오니아’ 주에 가 있다고 얘기해 줬으며, 그러자 ‘맥밀란’ 자신의 보고에 의하면 이런 일이 있었다.
“그는 ‘이곳에 조용히 얘기할 수 있는 곳이 있읍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면 이 방문을 잠그죠. 이곳은 조용한 장소입니다. 형님 왜 그러십니까?’
“내가 그에게 대답하는 동안 그는 ‘샤쓰’를 벗고 있었다. 나는 그가 정신이 이상하지 않나 생각했다. 평상시에 그는 말쑥하고 단정한 사람이었는데 좀 누추하고 지쳐있는 사람 같았다. 그의 내의가 나오자 칼을 달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거기에 꿰맨 주머니를 뜯고 돈 꾸러미를 끄집어냈다. 그것은 10,000‘달러’나 되는 현금이었다.
“그것을 내 놓고 나서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은 여러분이 사업을 시작하는 데 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곳에 누가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수표를 보내지 않고 직접 가져왔읍니다. 나에게 이 돈이 있는줄 알면 누가 뺏아갈 우려가 있어 침대차를 타지 않고 하루밤을 꼬박 앉아 왔읍니다. 누가 일을 책임맡고 있는지 몰랐는데 제가 알고 있고 신뢰하는 여러 형제들을 여기서 뵙게 되니 제가 이곳에 온 것이 기쁩니다!’ ··· 그것은 뜻밖이면서도 즐거운 일이었으며 확실히 격려적인 것이었다.”
‘러더포오드’ 형제가 ‘피츠버어그’ 협회 사무실에 돌아오자마자 그는 부회장 ‘시이. 에이. 와이스’에게 ‘브루클린’으로 가서 ‘벧엘’을 재개하고 협회가 인쇄활동을 할 수 있는 건물을 빌릴 수 있는지 알아 보도록 지시하였다. 그 대화는 이러했다.
“우리가 ‘브루클린’으로 돌아가는 것이 주의 뜻인지 가서 알아보십시오.”
“돌아가는 것이 주의 뜻인지 아닌지 제가 어떻게 결정할 수 있읍니까?”
“‘브루클린’에서 ‘피츠버어그’로 오게 된 것은 1918년에 석탄 공급을 받을 수 없어서였읍니다. 석탄으로 시험해 봅시다. 형님이 가셔서 얼마의 석탄을 주문해 보십시오.” [전쟁이 끝났지만 ‘뉴우요오크’에서는 아직도 석탄이 배급제였었다.]
“시험을 위해 몇 ‘톤’을 주문하는 것이 좋을까요?”
“아주 단단한 시험을 해 보지요. 500‘톤’을 주문하시죠.”
‘와이스’ 형제는 그렇게 하였다. 당국자들에게 신청을 하자 바로 500‘톤’의 석탄에 대한 허가가 나왔다. 그는 즉시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에게 전보를 쳤다. 그렇게 많은 석탄이면 여러 해 동안 사용하는 데 충분한 양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어디다 둘 것인가? ‘벧엘’ 지하실의 넓은 곳을 석탄 저장소로 개조하였다.
즐거운 재연합
‘벧엘’이 재개되기 얼마 전에 전체적인 여호와의 백성들에게 참으로 특기할 만한 일 즉 즐거운 재연합이 있었다. 1919년 5월 ‘로스앤젤레스’에서 ‘러더포오드’ 형제의 성공적인 공개 집회가 있은지 얼마 후 그는 큰 대회 개최를 결정하였다. 결국 선택된 장소는 ‘오하이오’ 주 ‘시다포인트’였다. 1919년 9월 1-8일에 있었던 이 대회는 특히 영적으로 유익한 대회였다.
‘시다포인트’에 있는 ‘호텔’들은 약 3,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성경 연구생’들은 9월 1일 월요일, 대회 첫날 정오까지는 그러한 모든 시설을 사용하도록 마련하였다. 처음 회기에 단지 1,000명 밖에 참석하지 않자 약간 실망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임시열차를 타거나 다른 마련을 사용하여 계속 오고 있었다. 얼마 있지 않아 의기양양한 대표자들은 숙박 설비를 위해서 장사진을 이루었다. 그러면 숙소를 배정하는 ‘카운터’ 뒤에서 누가 바쁘게 일하였는가? 자! 다른 사람 아닌 이전에 ‘아틀란타’ 교도소에 있었던 두 사람 즉 ‘에이. 에이치. 맥밀란’과 ‘알. 제이. 마아틴’이었다! 이제 저쪽을 보라. ‘러더포오드’ 형제와 다른 여러 형제들이 ‘보이’로 열심히 일하는데 가방을 나르고 대회 참석한 동료들을 도와 방으로 안내하고 있다. 자정이 지난 후까지 분주하였다.
행복에 찬 대표자들은 계속 오고 있었다. 첫날 저녁에 약 3,000명이었던 것이 금요일에는 참석수가 6,000명으로 증가하였다. 일요일 공개 강연에는 약 7,000명이 참석하였다. 이 즐거운 대회에서 200명 이상이 물침례로서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상징하였다.
“고난 받는 인류를 위한 희망”이란 공개 강연에 관해서 ‘아아든 페이트’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공개 강연을 옥외에서 하도록 마련하였고 ‘러더포오드’ 형제가 연설하였다. ··· 수가 얼마 되지 않아 듣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그 궁금한 글자 “GA”
대회 참석자들이 ‘시다포인트’에 도착하자 아주 흥미있는 것이 주의를 끌었다. ‘어어슐러 시이. 시렌코’는 이렇게 말한다. “연단 위로 대회장을 가로 지른 커다란 천에 대문자로 ‘GA’라는 두 글자가 씌여 있었다. 우리 모두는 그 두 머릿 글자가 무슨 의미일까 생각하여 그 주일 전체를 기대 속에 보냈다. ‘맥밀란’ 형제는 연단에서 평상시와 같은 태도로 자기도 역시 ‘GA’라는 두 글자가 무슨 뜻인지 그 주일 내내 궁금하였다고 청중에게 말하였다.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여러분, 저는 이러한 뜻이라고 결론을 내렸읍니다. 즉 “다시 추측해 보라(Guess Again)”는 뜻이라고.’ 청중은 그만 폭소를 터뜨렸다.”
대회 참석자들이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는 9월 5일 금요일 “동역자들의 날”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가 “왕국을 선포함”이란 연설을 할 때, 행복한 청중 가운데 당신이 끼어 있었다고 생각해 보라. 그는 그 연설에서 새로운 잡지 「황금 시대」(The Golden Age)의 발행을 발표하였다.
그 궁금증은 풀렸다. “GA”라는 글자는 「황금 시대」의 약자였던 것이다. ‘러더포오드’ 형제 다음에 ‘알. 제이. 마아틴’이 새로운 활동으로서 「황금 시대」의 예약 맡는 방법을 대충 설명하였다. 격주간이 될 이 32면의 잡지에는 하나님의 예언에 비추어 현시대의 사건들을 설명하는 종교적인 내용이 많이 실릴 것이다. 1919년 10월 1일이라는 날짜가 찍힌 그 첫 호에는 “죽은 자들과 말할 수 있는가?”라는 성서에 근거한 기사를 비롯하여 노동과 경제 제조업과 광업, 재정, 상업과 수송, 농업과 경작, 과학과 발명 및 종교등의 문제를 다루었다.
‘러더포오드’ 형제와 함께 투옥되었던 한 형제가 「황금 시대」의 편집인이 되었다. 그는 ‘클레이튼 제이. 우드워드’였다. 그의 아들 ‘시이. 제임스 우드워드’는 이런 흥미있는 점을 알려 준다. “나의 아버지는 [‘펜실베이니아’] ‘스크랜튼’에 우리를 위해 집을 다시 마련하였다. 그런데 「파수대」의 자매지로서 「황금 시대」가 나오기 시작할 때인 1919년에 협회는 아버지를 그 편집인으로 임명하였다. 사실 아버지는 많은 시간을 ‘브루클린’에서 보내야 하였다. 그래서 협회는 친절하게도 두 주일은 ‘브루클린’에서, 그리고 두 주일은 집에서 일하도록 마련하였다.—상당히 여러 해를 그렇게 하였다. 아침 5시가 되면 아버지의 타자기가 바쁘게 움직이는 경우가 많았는데 지금도 그 기억이 난다—그렇게 해서 「황금 시대」의 기사를 쓰거나 편집하여 ‘브루클린’으로 일찍 우송하였다.”
‘클레이튼 제이. 우드워드’는 「황금 시대」와 그 후에 개명된 「위안」지(1937년 10월 6일부터 1946년 7월 31일까지 발행되었음)의 편집자로서 충실히 일하였다. 1946년 8월 22일호부터 「깨어라!」가 「위안」지를 대신하게 되었을 때 연로해진 그는 그 활동을 쉬게 되었다. 그러나 ‘우드워드’ 형제는 1951년 12월 18일 81세를 일기로 사망할 때까지 하나님께 대한 봉사에서 다른 임무를 계속 충실히 수행하였다.
“우리는 일할 것이다”
1919년 ‘시다포인트’ 대회를 통해 여호와의 백성은 그들이 해야 할 세계적인 전파 활동의 범위를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에이. 에이치. 맥밀란’이 이렇게 말한 바와 같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더 이상 가만히 서서 하늘에 갈 것을 기다리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일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확실히 “일할 것이다.” 참 숭배를 발전시키기 위한 적극적 조치가 취해졌다. 예를 들어 1919년에 ‘콜포처’ 사업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그 해 봄에는 하나님께 대한 봉사의 그 부면에 150명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가을에는 507명이 되었다.
순례자 봉사도 역시 회복되었다. 협회의 전 시간 여행하는 대표자들은 86명으로 증가되어 전쟁 중의 박해로 흩어지게 된 사람들을 함께 모으도록 회중들로 보내졌다. 그들은 또한 여호와의 지적 조직의 본부와 밀접한 접촉을 통해 관심을 자극하게 하였다. 이제 다시 참 숭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야외로!
1919년 8월 1일과 15일호 「파수대」지에 “두려움이 없는 자들은 복되도다”라는 두 부분으로 된 기사가 실렸다. 그 기사는 하나님의 봉사에 있어 충실하고 두려움 없는 활동이 필요함을 명백히 알려 주었다. 두려움 없는 활동에 대한 그러한 부름에 여호와의 백성은 열렬히 그리고 담대히 응하였다. 이제 그들은 앞에 놓인 왕국 전파 사업을 열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여호와의 대사로 그분의 봉사를 활동적으로 하는 데 있어 영적으로 다시 소생하게 되었다. 그렇게 하여 계시록 11:11, 12에 묘사되어 있는 바 하나님의 “두 증인”이 부활되는 예언적인 장면이 성취되었다.
1920년 증거 활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매주 활동 보고를 제출하였을 때 그들은 전파에 대한 개인적 책임을 더 깊이 느끼게 되었다. 1918년 이전에는 ‘콜포처’들만 야외 봉사 보고를 냈었다. 또한 전파 활동을 용이하게 하도록 구역을 지정하여 회중들에게 임명하였다.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1920년에는 8,052명의 “반 사역자”들과 350명의 ‘콜포처’가 있었다. 1922년 미합중국에 있는 1,200여개 회중 가운데서 980개 회중이 야외 봉사에 참여하도록 온전히 재조직되었다. 이 회중들에는 기부를 받고 집주인에게 성서 출판물을 전하는 사역자들이 8,801명 있었다. 매주 평균 2,250명이었다.
「황금 시대」를 사용한 활동이 시작되었을 때 그것은 대략 이러한 방법이었다. “「황금 시대」 활동은 왕국 소식을 가지고 호별 방문을 하여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선포하고 슬퍼하는 자들을 위로하는 권유활동이다. 권유에 부과하여 예약을 맡든지 못맡든지 각 집에 「황금 시대」 한 부를 남겨 둔다. ··· 반 사역자들은 그런 견본 잡지들을 지휘자로부터 구할 것이다.” 참가하기를 원하는 회중은 봉사 조직으로서 ‘왙취 타워 협회’에 등록하였다. 그러면 협회는 지방 회중에 있는 한 사람을 “지휘자”로 일하도록 임명하였다. 그는 임명된 사람이었으므로 그 당시에 장로들을 선출한 바와 같이 지방적으로 매년 선출하지 않았다.
우리가 「황금 시대」 활동에 잠간 참여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엘바 피셔’는 우리에게 이런 점을 알려 준다. “1919년에 새로운 잡지 「황금 시대」를 처음 위탁받았다. ··· 그 때에는 자동차를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의 남편과 그 친 형제인 ‘오디 브래드쇼’는 좌석이 하나 밖에 없는 우리의 조그만 이륜 마차에 잡지를 싣고 마차를 사용해서 좋은 소식을 전하려고 떠났다. 우리 모두가 농장에서 살았으므로 나의 시누이는 가축과 우리 애들을 돌보기 위해 집에 있었다. 각 가정에 「황금 시대」를 전해야 했으므로 이 형제들은 그 잡지 전하는 데 꼬빡 이틀을 보냈다. 우리 모두는 전파 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그러한 기회를 정말 즐거워하였다.”
‘프레드 앤더슨’은 “그 잡지 예약을 맡기 위해 자진하도록 초대되었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부언한다. “나는 응하였고 활동적인 증거를 하는 진정한 즐거움을 처음 느꼈다. 그 이래로 나는 많은 예약을 맡았고 지금은 「깨어라!」라고 부르는 잡지 수백부를 전하였다. 그것은 위험한 시대에 대해서 사람들을 깨우치는 강력한 도구였으며 깨끗해진 지구에서 생명과 평화를 누릴 놀라운 희망을 그들에게 주었다.”
“ZG” 활동
1920년 6월 21일에는 「종말을 고한 비밀」의 잡지판이 배부되도록 발행되었다. 그것은 보통 “ZG”라고 불리웠다. (“Z”는 「파수대」의 원래 명칭인 「‘시온’의 파수대」를 의미하였고 일곱번째 영어 자모인 “G”는 「성경 연구」 제 7권을 가리켰다.) 이 특별호 「파수대」(1918년 3월 1일호)는 서적이 금지된 동안 보관해 두었던 것으로 이제 한 부에 20‘센트’의 기부로 사람들에게 전하게 되었다.
자기의 “ZG” 활동을 생각하면서 ‘뷰울러 이이. 카비’는 이렇게 말한다. “한 손에 총을 들고 다른 손에 연보접시를 들고 복도를 걷고 있는 두 교역자가 ··· 있는 교회 내부의 그림이 한 면 전체에 걸쳐 실려 있었다. 이 “ZG”를 전하기 위해 우리는 그 그림만 보여 주면 되었다. 야외에서 하루에 40부나 50부를 전하는 것이 거의 보통이었다.”
「종말을 고한 비밀」의 이 잡지판을 사용한 활동은 성과가 있었다. 예를 들어 ‘애니 포우젠시’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한 부인을 방문하였는데 그 부인은 ‘ZG’를 받고 문을 닫았다. 그 때는 그것을 전하는 결과가 어떠할지 알지 못하였다. 몇 주일 후에 쪽지 하나가 그 집 문에 놓여 있게 되었다. 그 부인은 이것이 그것이구나 알아차리고 쪽지에 광고된 강연에 참석하였다. 그 부인은 계속 집회에 나왔으며 결국 그 남편과 두 딸이 참석하기 시작했다. 얼마 있지 않아 ‘앤더슨’ 씨 가족 전체가 진리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GA” 27호
때가 되자 「황금 시대」 27호가 나왔다. “그것은 1920년 9월 29일호로서 억압을 받던 기간 중 형제 자매들이 받은 박해와 학대를 자세히 설명한 내용이었다”라고 그 배부에 참가하였던 ‘로이 이이. 헨드릭스’는 기술하고 있다. ‘애밀리아’와 ‘에리자베드 로쉬’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것은 제 1차 세계 대전 중 그리스도교국의 종교 교직자들과 그들의 정치적 및 군사적 연합자들이 ‘만국 성경 연구생’들 위에 퍼부은 불경건한 박해를 폭로한 것이었다. ··· 회중에 있는 9명이 이 활동에 참여하기를 거절하였고 그 활동을 중지하도록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그들은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였다. 그 결과로 다른 세 사람과 함께 우리는 계속 믿음을 가지고 단 2주일 동안에 25,000부를 배부하였다. 그 운동이 끝났을 때 피곤하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빛 가운데 우리가 충실히 걷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행복하였다.”
「황금 시대」 27호는 400만부가 인쇄되었다. 그 잡지는 무료로 주거나 한 부에 10‘센트’의 자진적인 기부를 받고 전하였다. 주로 호별 방문에서 배부하였다.
활동이 해외로
성서 출판물에 대한 수요가 계속 증가하였다. 예를 들어 ‘캐나다’에서는 1920년 1월 1일에 ‘왙취 타워’ 출판물에 대한 검열이 없어지자 그렇게 되었다. 그 나라에서 있었던 박해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참 숭배를 전하고 발전시키는 데 더 많은 열심을 불러 일으킨 것같다.
1920년 8월 12일에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와 동료 몇 사람은 ‘유럽’을 향해 출발하였다. ‘런던’, ‘글라스고우’ 및 다른 영국 도시에서 대회가 개최되었다. 다른 몇 사람과 함께 ‘러더포오드’는 ‘이집트’, ‘팔레스타인’으로 여행하였다. 여러 사무실과 성서 반들을 방문하여 영적으로 힘을 북돋아 주었다. ‘라말라’에 협회의 지부가 설치되었다. 연말 보고에서 ‘러더포오드’ 형제는 ‘스위스’, 불란서, 벨기에, ‘홀랜드’, 독일, ‘오스트리아’, ‘이태리’에서의 전파 활동을 감독하도록 중앙 ‘유럽’ 사무실을 설립하고 있다고 밝혔다.
“수백만 운동”
“수백만 운동”이라는 새로운 전파 활동이 그 당시 제자를 삼는 일에 도움이 되었다. 그 운동은 「지금 살아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128면 서적 배부로 특징을 이루었다. 1부에 25‘센트’의 기부로 전하였다. 그 서적은 1920년 9월 25일에 시작된 공개 강연 계획과 관련해서 사용되었다. 그것은 1918년 2월 24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가 연설하였고 1920년에 새로운 책으로 발행된 바 있는 연설(원 제목은 “세계는 끝났다—지금 살아 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레스터 엘. 로우퍼’는 지난날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을 위하여 깃발을 들라. 지금 살아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제목으로 내가 공개 강연을 할 때가 되었다. 공중을 대하는 것에는 익숙해 있었지만 그 경우는 입장이 달랐다. 나는 마루가 솟아 어느 땐가 내 얼굴을 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때는 진리 안에 있는 사람이 전세계적으로 극소수였는데 그들에게 ‘지금 살아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연설해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 살아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책은 결국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서적을 사람들에게 빌려 주었던 “양치는 일”과는 달리 「수백만」이란 서적은 기부를 받고 전했으며 그 후에 관심자들은 「성서 연구」에 속한 일련의 서적들을 구할 수 있었다. “수백만 운동”은 한 동안 지속되었고 그로 인해 많은 증거를 하였다. 공중이 관심을 갖도록 신문 광고난과 광고 게시판을 사용하여 지금 “살아 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는 말을 널리 알렸다. 그 운동이 대대적이어서 그러한 구호가 몇년이 지나도록 기억에 남아 있었다.
“수백만 운동”의 영향력을 회상하여 ‘러퍼스 채펠’은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일리노이’ 주] ‘시온’과 그 주변에 「지금 살아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란 책을 제공하였는데 그 결과가 흥미로왔다. ‘시온’에서 5‘마일’쯤 되는 ‘노오드 셰리단 로우드’에 ‘워케간 드라이 클리닝’(세탁소) 건물이 있었는데 그 건물 위에 커다란 섬광 전기 간판이 있었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그 간판에는 ‘지금 살아있어 결코 죽지(Die) 않을 수백만을 위하여 염색(Dye)합니다’라고 씌여 있었다. ‘지금 살아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은 그 당시 매우 인기있는 제목이었으며 그 말에 대해 질문하고 그 출판물로부터 진리를 배우게 된 사람이 많았다.”
새로운 서적으로 발전이 더욱 촉진되다
‘성경 연구생’들은 「성경 연구」 여러 책을 여러 해 동안 읽어 왔고 널리 배부하였다. 그런데 1921년에는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가 저술한 「하나님의 거문고」란 새로운 서적이 발행되었다. 결국 그 발행부수는 22개 언어로 5,819,037부에 이르렀다. “「하나님의 거문고」가 발행되었을 때 그것은 진정 축복이었고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다”라고 말하면서 ‘캐리 그린’은 이렇게 계속한다. “그것은 진리, 전체 진리를 하나로 묶어 놓았으며 다른 모든 제목들을 ‘거문고 줄’로 설명하였다.”
그 책은 여호와의 목적을 “성서 즉 ‘하나님의 거문고’의 열 줄”로서 주요점을 설명하였다. 그 책의 ‘열 줄’ 즉 표제들은 다음과 같다: 창조, 공의가 나타나다, ‘아브라함’의 약속, 예수의 탄생, 대속, 부활, 신비가 밝혀지다, 우리 주의 돌아오심, 교회가 영광스럽게 됨, 회복. 처음 배우는 사람을 위한 책으로서 그것에는 개인 및 집단 연구를 위하여 마련된 질문이 들어 있었다. 호별 방문할 때 ‘성경 연구생’들은 그 출판물과 함께 전체 통신 과정을 제안하였다. 그 과정을 이루는 질문 ‘카아드’ 12장을 일주일에 한 장씩 우송하였다. 회중은 보통 그 과정에 대해 매 주 400장 내지 500장의 ‘카아드’를 취급할 수 있었다. 이러한 활동이 여러 해 계속되었고 아주 유익하였다. ‘해이즐 버어포오드’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가정 성서 연구 활동과 비슷한 연구 마련이 관심자들의 집에서 있었다. 다만 회중 서적 연구처럼 전도인들 모두가 참석하는 것이 달랐을 뿐이었다.”
전파 활동을 촉진시키기 위한 설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듬해에 ‘왙취 타워 협회’는 인쇄를 하기 위하여 커다란 윤전기를 구입하려고 했다. 전국에 단지 몇 대 밖에 없었고 그 모두가 쉴새 없이 사용되는 것들이었다. 여러 달 동안 구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여호와의 손은 짧지 않았다. 그리하여 1920년에 커다란 윤전기가 설치되어 본부의 봉사자들에 의해 운영되게 되었다. 애칭으로 “옛 전함”이라 불리웠으며 그것으로 여러 해 동안 수백만부의 잡지, 소책자, 그리고 다른 출판물들을 생산하였다.
“옛 전함”을 구하게 되자 협회는 ‘브루클린’ ‘머틀’ 로 35번지의 공장을 세내었다. ‘더불류. 엘. 펠레’와 ‘더불류. 케슬러’는 1920년 1월 22일 ‘벧엘’에 도착하자마자 그 건물에서 일하도록 임명되었다. ‘펠레’ 형제는 이렇게 말한다. “첫째로 우리가 할 일은 ‘머틀’ 로 35번지 건물 1층 벽을 닦는 일이었다. 그런 더러운 일은 난생 처음이었다. 그렇지만 그 일은 달랐다. 우리는 행복했다. 그것은 주의 사업이며 그러기 때문에 가치있는 일이었다. 청소를 전부 하는 데 약 3일이 걸렸으며 우송부를 만들 준비를 하였다. 아래층 지하실에 윤전기(‘전함’)가 설치되었고 위로는 2층에 평판 인쇄기, 접지 기계, 제본기가 준비되었다.”
곧 장비가 가동되었다. ‘펠레’ 형제는 이렇게 계속한다. “경험있는 기사이며 인쇄공인 두 형제는 평판 인쇄기를, ‘케슬러’는 접지 기계를, 나는 제본기를 돌렸다. 그리하여 우리가 움직이는 인쇄기에서 「파수대」가 처음 나왔을 때—1920년 2월 1일—그것은 감격에 찬 순간이었으며 정말 행복한 때였다! 그후 그리 오래지 않아 「황금 시대」 27호가 지하실에 있는 ‘전함’에서 인쇄되어 나왔다. 시작은 대단치 않았으나 계속 증가되고 있었다!”
전파 활동이 증가하고 있었다. 1922년에 가서 출판물에 대한 수요가 훨씬 더 많아졌다. 그래서 협회는 1922년 3월 1일자로 그 공장을 ‘브루클린’ ‘콘코오드’ 가 18번지 6층 건물로 옮겼다. 처음에는 4층까지만 사용하였으나 결국 6층 전부를 사용하게 되었다. 협회가 자체 내에서 대책 인쇄를 처음 하였던 곳이 바로 그곳이다. ‘머틀’ 로 건물은 종이와 인쇄물 저장소로 사용되었다.
‘머틀’ 로에서 ‘콘코오드’ 가로 이전하는데 “옛 전함”을 옮기는 것이 큰 문제였다. 그 일을 어떻게 했었는지 ‘로이드 버어치’가 언젠가 설명한 내용이 있다.
“1922년 3월 1일 ‘머틀’ 로에서 ‘브루클린’ ‘콘코오드’ 가 18번지의 더 넓은 장소로 우리의 인쇄 시설을 옮겼다. 작은 ‘트럭’을 사용하여 대부분의 무거운 것들을 옮겼다. ‘전함’ 인쇄기의 커다란 ‘실린더’는 너무 무거워서 ‘트럭’으로는 도저히 옮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큰 문제였다. 그것을 이사하는 곳으로 어떻게 운반할 것인지 막막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다음 날 일어났을 때 그 문제가 해결되었다.
“밤중에 예상하지도 않던 눈이 2‘인치’나 내렸다. 그것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이다. 우리는 썰매를 만들어서 ‘실린더’를 굴려 그 위에 실었다. 썰매를 ‘트럭’이 새로 이사하는 곳으로 끌고 갔는데 썰매는 눈위를 잘 미끄러져 갔다. ‘실린더’는 ‘콘코오드’ 가에 있는 건물 지하실 창문을 통해 내려놓았다. 몇년 후 대회에서 그 공장 관리자 ‘알. 제이. 마아틴’은 이사 문제를 해결해 준 예상 밖의 강설에 대해 형제들에게 이야기하는 즐거움을 가졌다.”
오래지 않아 “옛 전함”은 ‘콘코오드’ 가 공장에서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로 인해 낡은 건물이 심히 흔들거렸다. 공장 관리자인 ‘마아틴’은 ‘천사들이 이 건물을 받들고 있다’고 늘 말했다고 한다.
여호와의 도움으로서만
“경험이 별로 없거나 전혀 없는 사람들이 윤전기로 서적이나 성서를 성공적으로 인쇄하게 된 것은 여호와의 감독과 영의 인도에 대한 증거이다.”라고 ‘차알스 제이. 페켈’은 말한다. 그는 1921년 이래 ‘벧엘’ 봉사를 해 왔다. ‘페켈’ 형제는 반세기 동안 협회 본부의 발전에 참여해 왔는데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각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중복되거나 노력을 낭비하는 일이 없었다. 미리 계획된 광대한 임무가 ‘사단’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대로 완료되었다.”
1922년 ‘브루클린’ ‘콘코오드’ 가 18번지로 협회가 공장을 옮꼈을 때 식자기, 전기도금, 인쇄 및 제본기 등의 시설을 완전히, 그것도 대부분 새것으로 갖추었다. 협회의 인쇄를 많이 해왔던 주요 인쇄 공장 사장은 그 시설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이제 여러분은 1급 인쇄 시설을 가지고 있읍니다. 그런데 이 시설을 취급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전혀 없읍니다. 6개월 안에 모든 것이 고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지금까지 여러분의 인쇄를 해 온 사람들이 그 일을 할 사람들이며 그것을 업으로 삼아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엄청난 난제들이 있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움으로 형제들은 놀라운 발전을 하였다. 이러한 예를 생각해 보라. 몇해 전 일로서 협회가 사들인 큰 인쇄기를 독일의 전문 기술자와 몇명의 보조자들이 설치하는 데 두 달이나 걸렸다. 2년도 채 못되어 같은 크기와 구조를 가진 다른 인쇄기를 본부에 ‘벧엘’의 한 형제와 보조자들이 설치하는 데 단지 3주일 밖에 걸리지 않았다.
협회 본부에 있는 형제들은 일에 전념하였다. 그들은 배웠으며, 얼마 안되어 좋은 서적을 만들어 내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하루에 2,000부밖에 제본할 수 없었다. 그러나 1927년에 그들은 매일 10,000부에서 12,000부까지 생산하게 되었다.
‘시다포인트’에서 다시 만남
협회가 ‘뉴우요오크 브루클린 콘코오드’ 가 인쇄 공장을 가동시킨지 얼마 안되어 하나님의 백성은 1922년 9월 5-13일에 국제 대회를 개최하였다. 대회 장소는? 1919년 ‘성경 연구생’들이 대회를 가진 바 있는 ‘오하이오’ 주 ‘시다포인트’였다. 그 사이 3년 동안에 꾸준히 증가되었다. 1922년 대회에는 미합중국, ‘캐나다’, ‘유럽’에서 참석하였다. 매일 평균 참석수는 10,000명이었고 일요일에는 18,000명 내지 20,000명이 참석하였다. 침례받은 자의 수는 361명이었다. 영어와 외국어 집회가 동시에 열려 한번은 11개 집회가 진행되었다.
영적으로 상이 컸던 그 ‘시다포인트’ 대회에 당신이 참석해 있다고 상상해 보라. 여러 곳에 걸려 있는 현수막들, 나무에 달려있는 조그만 나무판들, 기둥이나 다른 여러 곳에 붙여 있는 ‘카아드’들을 볼 수 있다. 그 모든 것들에는 “A D V”라는 글자가 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들이 하늘의 ‘집으로 가는 것’에 아직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죽은 후의 승리 (After Death Victory)”를 의미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런가하면 그 글자가 “마귀에게 사퇴를 권고하라. (Advise the Devil to Vacate)”를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날”로 알려진 9월 8일 금요일까지 그 의문은 계속되었다. 그때 ‘저지 러더포오드’는 “왕국”에 대해서 연설하였다. ‘티이. 제이. 설리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대회에 참석할 특권을 가졌던 사람들은 심한 더위 때문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서성거리던 몇 사람들에게 ‘앉아서’ 어떻게 해서라도 연설을 ‘들으시오’라고 말했을 때 ‘러더포오드’ 형제의 진지함이 지금도 눈에 선할 것이다.” 특히 ‘러더포오드’ 형제는 1914년에 이방인의 때가 끝난 것에 대하여 말하였고 연방 교회 협의회가 국제 연맹을 “지상의 하나님의 왕국의 정치적 표현”이라고 환영한 불경스러운 선언문을 인용하였다. ‘러더포오드’가 극적인 결론을 향해 연설을 진행해 나아갈 때 청중 가운데 당신이 들어 있었다고 상상해 보라. 그의 이러한 말을 당신은 열심히 듣고 있었을 것이다.
“··· 1914년 이래로 영광스럽게 되신 왕께서는 권세와 통치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은 성전 반열의 입술을 깨끗케 하셨고 소식을 전하도록 그들을 보내셨읍니다. 왕국 소식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수 없읍니다. 그 소식은 가장 중요한 소식입니다. 그것은 이 시기에 맞는 소식입니다. 그 소식을 선포하는 것은 주의 백성의 사명입니다. 하늘의 왕국은 가까 왔읍니다. 왕은 통치하십니다. ‘사단’의 제국은 무너지고 있읍니다. 지금 살아있는 수백만은 결코 죽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지존하신 하나님의 아들들이신 여러분, 야외로 돌아가십시오! 여러분의 갑옷을 두르십시오! 근신하고 경계하며 활동적이 되고 용감하십시오. 주를 위하여 충실하고 참된 증인이 되십시오. ‘바벨론’의 흔적이 완전이 없어질 때까지 나아가 싸우십시오. 소식을 널리 전하십시오. 여호와가 하나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가 만왕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이심을 세상은 알아야 합니다. 오늘은 참으로 중요한 날입니다. 보십시오. 왕이 통치하십니다! 여러분은 그의 전파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왕과 그의 왕국을 광고하십시오, 광고하십시오, 광고하십시오.”
바로 그 순간 길이 36‘피이트’의 삼색 현수막이 연사가 있는 연대 위로 펼쳐졌다. 그 중앙에는 커다란 그리스도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왕과 왕국을 광고하라”는 말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제 명백해졌다. 궁금하던 “A D V”라는 글자는 “광고하라(advertise)”를 의미한 것이다. 무엇을 광고하라는 말인가? 물론, “왕과 왕국을 광고하라!”는 것이다. ‘조오지 디이. 갱개스’는 이렇게 힘주어 말한다. “여러분은 형제들의 열광과 즐거움과 흥분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생애에서 그런 일은 처음이었다. ··· 그것은 나의 마음과 생각에 깊이 새겨진 것으로, 내가 살아있는 한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16세된 소년으로서 그 당시 대회 ‘오케스트라’의 일원이었던 ‘시이. 제임스 우드워드’는 이렇게 말한다. “참으로 극적인 순간이었다. 청중은 얼마나 박수갈채를 보냈던가! 정든 ‘페닌베커’ 형제는 ‘바이올린’을 머리 위로 흔들면서 그렇다,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아?’ 하고 외쳤다.”
왕국을 광고하도록 감동됨
그들은 그렇게 했다! 사실 그 이래로 하나님의 종들은 그렇게 해 왔다. 그들은 담대하게 왕과 왕국을 광고해 왔다. ‘성경 연구생’들이 ‘시다포인트’를 떠날 때 그들은 열심으로 가득찼으며 그들 앞에 놓인 전파 사업에 대한 열의로 불탔다. “집에 돌아가서 광고하겠다는 벅찬 감정을 말로써 이루 다 설명할 수 없었다.”고 ‘오러 헷젤’은 말한다. ‘제임스 더불류. 베니코프’ 자매는 이렇게 덧붙인다. “그렇다. 우리 마음 가운데 그전 어느때보다 더 많은 열심과 사랑을 가지고 ‘왕과 그의 왕국을 광고하고, 광고하고, 광고’하도록 격려받았다.”
사실상 대회 참석자들은 ‘시다포인트’를 떠나기 전에 왕국을 광고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1922년 9월 11일 월요일은 “봉사의 날”이었다. 수백대의 자동차가 사용되었으며 한 대에 5명 혹은 그 이상이 상당량의 성서 출판물을 싣고 가게 되었는데 모두가 야외 봉사에서 왕과 왕국을 광고하려는 결의를 가지고 있었다. ‘드와이트 티이. 케년’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가진 ‘사역자들에 대한 지시’ ‘카아드’ 번호는 144번이었다. 내 ‘카아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다. ‘자동차들은 오전 6시 30분 정각에 ‘라디에이터’ 위에 써 있는 번호에 따라 호수 앞(‘시다포인트’)에 줄지어 있을 것이다. 당신이 탈 차 번호는 215번이며 사역자 번호는 5번이다. ···’ 나는 7명의 집단에 속해 있었다. 우리는 ‘콜포처’ 두 사람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갔다. 우리가 임명받은 곳은 몇 ‘마일’ 떨어진 ‘오하이오’ 주 ‘밀란’이었다. ‘러더포오드’ 형제가 그런 이른 시간에 우리를 배웅하러 그 집결 예정지에 나와 있었던 것이 생각난다.”
그렇다.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는 ‘그들을 배웅하러’ 거기에 와 있었다. 그러나 그 일만이 아니었다. “‘러더포오드’ 형제는 그날 아침 출발하는 첫 번째 차에 타고 있었다”라고 ‘사라 시이. 캘린’은 이야기한다. ‘존 펜톤 미키’는 이렇게 부언한다. “‘러더포오드’ 형제가 탄 차는 첫 번째 차였다. 그는 나와 나의 아내, 처제인 ‘클라라 마이어’ 그리고 ‘리처드 존슨’과 그의 부인을 초대했었다. 우리 어린 딸이 병이 나서 나는 갈 수 없었다. ··· 첫 번째 차의 구역은 ‘오하이오’ 주 ‘시다포인트’와 ‘샌더스키’ 사이에 있는 도로였다. ‘러더포오드’ 형제가 첫 집을, 그리고 ‘클라라 마이어’가 다음 집을 방문하였고 그들이 봉사를 끝내고 대회장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렇게 계속하였다.”
더 큰 왕국 봉사를 위한 부름에 응함
여호와의 종들은 여러 해 동안 어느 정도의 호별 방문 전파를 해 왔다. 이제 그 활동이 더 강화되었다. 1922년 10월 이후부터는 매달의 봉사 지시서인 「게시판」지의 내용이 호별 방문 전파에 큰 도움이 되었다.
‘성경 연구생’들의 집회는 풍부한 영적 양식을 계속 공급하였다. 「파수대」의 집단적인 연구는 1922년에 처음으로 조직되었다. 연구를 돕기 위해 질문이 인쇄되었다. 그리스도인 집회들 역시 야외 봉사를 크게 강조하는 데 보조를 맞추었다. 주간 중간에 있었던 기도, 찬양 그리고 증거를 위한 집회가 특히 영향을 많이 받았다. 오랫 동안 그 집회는 노래하고 증거하고 기도하는 기회가 되었었다. 그러나 1920년대 초에 호별 방문 왕국 선포와 관련을 갖도록 변경되었다. 이에 대해 ‘제임스 가드너’는 이렇게 쓰고 있다. “1923년 5월 1일에 중요한 진전이 있게 되었다. 집단 봉사자들이 협회가 임명한 ‘지휘자’와 함께 야외 봉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매월 첫 화요일을 ‘봉사일’로 정하였다. 그 활동을 자극하고 형제들을 더욱 격려하기 위해 그때부터는 매주 수요일 밤에 열리는 회중적인 기도 집회의 반 정도를 야외 활동의 경험담을 하는 데 바치도록 마련하였다.” ‘티이. 에이치. 시벤리스트’는 다음과 같이 부언한다. “후에는 수요일 밤 집회에서 협회에 인쇄물로서 야외 봉사지인 「게시판」을 고려하는 것도 포함되었다. 야외 봉사가 강조되기 시작했을 때 ‘오클라호마’ 주 ‘샤툭’ 부회[회중]는 전파 활동에 바빠지게 되었으며 「게시판」지에 권유들[증거 재료]이 나오면 그것을 암기하였다.”
또한 1923년에 협회는 연중 몇 번의 일요일을 “세계적인 증거”를 위해 지정해 놓았다. 그것에는 전세계적으로 동시에 공개 집회를 갖게 되는 연합적인 노력이 포함되었다. 모든 ‘성경 연구생’들은 “‘사단’의 제국은 무너지고 있다—지금 살아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와 같은 강연들을 광고하도록 격려받았다.
1927년 초에 미합중국에서는 호별 방문에서 기부를 받고 서적과 소책자를 배부하는 활동이 매주 일요일에 있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이 우리를 반대하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 일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의아해했다”고 말하면서 ‘제임스 가드너’는 이렇게 부언한다. “어떤 곳에서는 그로 인해 심한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으로부터의 부름이었는데 어떻게 주저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참으로 기쁘게 나갔으며 어떤 사람은 ‘일요일에 서적을 전하러 다니는 것’ 등에 대해 불평하였지만 여호와께서 전세계에 있는 자기의 백성을 지도하신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오늘날도 일요일은 전도하기 좋은 날이며 우리는 계속 그렇게 하고 있다.”
문 앞에서
그러면 과거의 왕국 선포자 몇 사람과 호별 방문 전파 활동에 참여해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머틀 스트레인’은 그 활동을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대부분 책에 들어 있는 내용을 설명했으며, 외판원의 수완도 상당히 사용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집으로 초대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으며 그때 집주인이 관심을 보이면 ‘아담’의 타락부터 시작하여 인류의 회복에 이르기까지 전체적인 하나님의 목적을 대략 설명하였다. 한 집에 한 시간 정도 있을 때도 있었다.”
‘마아사 호움즈’는 이렇게 알려 준다. “여호와의 백성과 관련되어 있던 그 초기에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 많이 있다. 우리 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작은 집단이 ‘아이오와’ 주 ‘데스 모이네스’ 지역에 있는 외딴 소도시들에서 일하던 생각이 난다. 때때로 날이 새기 전에 떠나서 어두어진 후까지 머물러 있었다. 그 당시 우리 차는 금속제 덮개, 동력 제동 장치, 동력 조종 장치, ‘에어콘’, ‘히이터’ 같은 것들이 없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포장이 되지 않은 길로 운전하고 가야 했다. 진흙 속에 빠졌을 때엔 다시 나오기 위해 바퀴 아래 널판을 대지 않으면 안되었다. 우리 차에는 비나 눈이 내릴 때 사용하는 단추 달린 ‘커튼’이 있었다. 우리는 추운 차 안에서 도시락을 들고 먹었다. 어느날 ‘데스 모이네스’에서 약 30‘마일’ 떨어진 ‘아이오와’ 주 ‘뉴우튼’에서 몇 시간 봉사한 후에 심한 폭풍을 만났다. 바람이 너무 세차서 차를 길 위에 그대로 두는 것이 어려울 지경이었다. 더구나 차 위를 덮은 막이 바람 때문에 이리저리 펄럭거렸다. 결국 ‘데스 모이네스’로 돌아왔는데 우리 모두는 온몸이 흠뻑 젖었다. 구경군들이 ‘정말 미친 녀석들이군!’ 하고 생각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종종 훌륭한 결과로 보답되었다. 예를 들면 ‘줄리아 윌콕스’는 자기가 ‘노오드 캐롤라이나’ 주 ‘와싱턴’에서 새로 왕국 전파자로서 혼자 호별 방문 활동을 하던 때인 1920년대의 어느날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그 자매는 한 부인을 만났는데 그 부인은 「죽은 자들과의 대화」라는 협회 소책자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었고 얼마의 출판물을 받게 되었다. ‘윌콕스’ 자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붙들고 늘어진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아 떠나려고 하는데 그 부인은 나를 못가게 했다. 그 부인은 이렇게 말하였다.
“‘주께서 오늘 당신을 여기에 보내셨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읍니다. 당신이 온 것은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입니다. 저의 어머니와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빛으로 인도해 주실 것을 기도해 오고 있었읍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감리교인이었지만 교회에서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요사이 교회나가는 것을 중단하였읍니다. 우리가 듣는 것이라곤 돈, 돈, 더 많은 돈 뿐이었읍니다. 어느날 어머니는 잡지에서 “영매술”에 관한 책에 대해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과 직접 대화할 수 있는가를 알리는 광고를 보셨읍니다. 어머니께서는 제게 그 책을 주문해서 거기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그 책을 주문하는 편지를 썼으나 어떤 이유로 해서인지 그것을 부치는 것을 잊었읍니다. [그 편지는 결코 우송되지 않았다] 이제, 먼저 당신에게서 받은 이 책들을 읽겠읍니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오셔서 저와 함께 계시게 되면 어머니께서도 그 책들을 읽으실 것입니다. 곧 다시 우리를 방문해 주실 것을 약속하시겠읍니까?’
“물론 나는 약속하였다. 그것이 나의 첫 재방문이었다. 그 당시에는 재방문 사업을 격려하지 않았었다. 구역을 돌고 출판물을 남겨 두는 것이 강조되었었다. 어쨌든 나는 약속한 대로 다시 찾아갔는데 그 부인의 어머니도 거기 있었다. 그들은 처음 방문했을 때 내가 남겨둔 출판물을 ‘탐독하였으며’ 더 많은 것을 원했다. 그 후로 그들은 협회가 발행한 출판물은 무엇이든지 받았다. ··· 내가 처음 재방문했던 이 [‘소피아’] ‘카아티’ 자매가 1963년에 사망할 때까지 봉사와 집회 참석에 충실하였었다고 보고할 수 있는 것은 나에게 큰 기쁨이다.”
일곱 천사가 나팔을 불다
1920년대의 여호와의 종들은 왕과 왕국을 광고하는 데 바빴으며 그 결과는 훌륭하였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당시에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으나 사실상 그들은 「계시록」 예언의 감동적 성취에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일곱 천사가 나팔을 부는데 따라 참 그리스도인들은 지상에서 극적인 사건에 한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일에 계속 참여하고 있다.—계시 8:1-9:21; 11:15-19.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부터 그리스도교국은 황폐케 하는 상징적 우박 즉 성서 진리에 근거한 강력한 폭로로 맹타당하였다. (계시 8:7) 그 모든 일들은 1922년 9월에 있었던 ‘성경 연구생’들의 ‘시다포인트’ 대회에서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 대회에서 “도전”이라는 결의문을 열광적으로 채택하였다. 그 결의문은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그리고 그 후에 국제 연맹이 하나님의 왕국의 정치적 표현이라는 주장을 통해 하나님의 메시야 왕국을 배척함으로써, 교직자들이 하나님께 불충성하였음을 대담하게 폭로하였다. 1922년 10월에 그 결의문과 그것을 지지하는 내용을 담은 인쇄물 45,000,000부가 전세계적으로 배부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그리스도교국(‘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교직자들과 교회 성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참다운 추종자라는 그들의 주장이 거짓됨을 폭로해 왔다.
둘째 천사의 나팔 소리에 따라 ‘성경 연구생’들은 1923년 8월 18-26일에 ‘캘리포오니아’ 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지역적인 대회를 가졌다. 그 대회에서 그들은 “경고”라는 역사적인 결의문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였다. 그 결의문은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이 왕국 소식 선포를 촉진하지 않았음을 폭로하였으며, 교직자들이 국제 연맹을 “국가적 및 개인적 재난에 대한 유일한 구제책”이라고 지지하고 있으나 하나님의 왕국을 의지하라고 양같은 자들에게 호소하였다. 그 점에 있어서 교직자들이 실패한 것은 불안정한 “바다”로 상징된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요소가 일어서게 한 주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몸에서 쏟아진 피가 생명을 주지 못하는 바와 같이 그러한 급진적인 요소도 인류에게 생명을 줄 수 없다. 1923년 12월에는 대회 결의문을 실은 “선언—모든 그리스도인에 대한 경고”라는 전도지가 인쇄되기 시작했다. 해외에서 발행된 수백만매 외에도 미합중국에서만도 13,478,400부가 인쇄되었다. 그러나 그 「선언」을 대량 배부한 것은 시작에 불과하였다. 오늘날까지 예수의 기름부음받은 추종자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옹호하는 선포를 계속해 왔다.—계시 8:8, 9.
세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물 삼분의 일이 쑥이 되었다. (계시 8:10, 11) 1924년 7월 20-27일 ‘오하이오’ 주 ‘콜롬버스’에서 열린 ‘성경 연구생’들의 대회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고발”이라는 결의문을 열광적으로 책택한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그 결의문은 그리스도교국의 배도한 교직자들이 가르치고 있는 바 하나님께 모독이 되는 거짓 교리를 폭로하였고, 그들과 그들의 정치적인 벗들이 사람들을 인도하고 있는 종교적 행로가 치사적임을 지적하였다. 사실, 교직자들은 영적 죽음과 종국에는 멸망을 가져 오게 하는 쑥처럼 쓴 것을 사람들이 마시게 하고 있었다. 대회 결의문은 “교직자들을 고발함”이라는 전도지에 실렸는데 13,545,000부가 미합중국에서 인쇄되었다. 해외에서 외국어로 수백만부가 더 인쇄되었다. 때가 되자 50,000,000부가 배부되었다. ‘고발’은 「파수대」지에도 실렸다. 다시 말하거니와 그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였다. ‘라디오’, 서적, 소책자, 잡지, 입술의 증거를 통해 여호와의 종들은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의 가르침이 생명수가 아니라 멸망케 하는 것임을 계속 지적하였다.
1925년이 되자, 네째 천사가 나팔을 불 준비를 하였다. 그 천사가 나팔을 불자 해와 달 그리고 별이 침을 받아 각각 삼분의 일씩 어두어졌다. (계시 8:12) 1925년 8월 24-31일에 ‘인디애나’ 주 ‘인디애나폴리스’에서 개최된 지역적인 대회에서 하나님의 종들은 “희망의 소식”이라는 결의문에 대해 진심으로 지지를 나타냈다. 그 안에는 사랑으로 가득찬 표현이 들어 있었지만 또한 세상의 영적 빛이라고 자처하는 그리스도교국 사람들이 실상은 어둠 가운데 빠져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파수대」와 「황금 시대」에 결의문을 실었을뿐 아니라 여러 언어로 된 전도지 형태로 수백만부가 배포되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국이 천적 진리의 빛과 하나님의 은총을 즐기고 있지 않다는 점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1926년 봄 다섯째 천사가 그의 나팔을 불었을 때 상징적 메뚜기의 공격이 예고되었다. (계시 9:1-11) 그 해 5월 25-31일에 영국 ‘런던’에서 ‘성경 연구생’들은 국제 대회를 가졌다. 그 대회에서 그들은 “세계 통치자들에 대한 증언”이라는 결의문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그 결의문과 그것을 지지하기 위해 5월 30일 일요일 ‘로열 앨버트 홀’에서 ‘러더포오드’ 형제가 많은 청중에게 연설한 “세계 열강들이 비틀거리는 이유—그 구제책”이라는 공개 강연은 국제 연맹이 ‘사단’에서 기원하였음과 교직자들이 하나님의 왕국을 지지하는 데 실패하였음을 지적하였다. 또한 새로 발행된 책 「구출」과 「만민을 위한 깃발」이라는 소책자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월요일 아침 ‘런던’의 「데일리 뉴스」지는 ‘러더포오드’의 월요일 밤 연설을 광고하면서 그 결의문과 일요일의 공개 연설 개요를 전면 기사로 취급했다. 신문 지면을 상당한 금액으로 샀으며 그 신문 백여만 부가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때가 되어 결의문 “증언”은 여러 언어로 된 전도지 형태로 약 50,000,000부가 전세계에 배부되었다. 종교라는 명목으로 하나님의 왕국에 대항하여 고안된 인간 계획을 그처럼 폭로하는 것은 마치 전갈의 꼬리가 쏘는 것 같았으며 계속해서 그렇게 해오고 있다.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 위해 상징적 네 천사가 놓여나고 상징적인 말 2억이 나타났다. 그 “말들”은 무시무시한 심판의 소식을 전하는 도구 특히 인쇄된 지면에 의해 전하는 것을 상징한다. 그 활동은 1927년의 특이한 사건 즉 ‘캐나다’ ‘온타리오’ 도 ‘터론토’에서 가진 ‘성경 연구생’들의 국제 대회로 시작되었다. (계시 9:13-19) 7월 24일 일요일 대연기장에 모인 15,000명은 인류의 약 삼분의 일을 이루는 “그리스도교국 사람들에게” 제출하는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의 결의문 낭독을 들었다. 그 결의문은 성실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국과 함께 멸망되지 않도록 그리스도교국에서 나올 것을 권고하였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에서 우러나온 헌신과 충성을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왕 및 왕국에 온전히 바치도록 촉구하였다. “만민을 위한 자유”라는 ‘러더포오드’의 결의문 지지 연설이 결론에 이르자 참석자들이 일어서서 결의문에 대한 승인을 외쳤는데 그 찬동하는 소리는 우뢰와 같았다. 53개 방송국을 연결한 것으로 그 당시로서는 가장 거대한 국제적인 방송망을 통해 수백만명이 그 진행과정을 들었다. 1927년 7월 25일 월요일 ‘뉴우요오크’ 「세계」지는 “거대한 방송망을 통해 ‘러더포오드’의 연설이 방송되었다. 조직된 교직자들을 정죄하는 연설이 가장 광범위한 중계방송망을 통해 세계 방방곡곡에 중계되었다”고 보도하였다.
그리스도교국의 지지자들은 그러한 감동적인 결의문이 쏟아놓은 불같이 뜨거운 기운으로 얼마나 괴로움을 당했을 것인가! 결의문 및 그와 함께 행한 공개 연설은 「만민을 위한 자유」라는 소책자로 출판되었다. 시간이 흘러 수백만부가 일반 사람들과 통치자들에게 전해졌다. 그리하여 수백만의 상징적 말들이 그리스도교국을 향해 공격을 개시하였는데 “네 천사” 즉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의 지휘 아래 그렇게 하였다. 여러 해를 통해 그러한 그리스도인 출판물들이 수억부씩 생산되었으며 수천명이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 거짓 종교 세계 제국인 큰 ‘바벨론’을 버리고 나왔다.—계시 9:13-19; 18:2, 4, 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극적인 사태가 발생하였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하시리로다.” 인류 세상의 왕권이 하나님의 정당한 소유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 왕의 기름부음받은 후손에게 주어진 왕권이 기원전 607년 이래로 “일곱 때” 즉 2,520년간 타인에게 넘어가도록 혹은 방해받도록 허락하셨다. 그 기간은 1914년 10월 4/5일 경에 끝났다. 사람들은 그때에 설립된 메시야 왕국을 통해 여호와께서 왕으로 다스리시고 멀지 않아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것이며 그분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이 땅을 낙원으로 만드는 데 여호와의 동역자가 될 것임을 알 필요가 있었다.—계시 11:15-18.
‘일곱째 천사’의 나팔 소리와 같이 그런 사실은 언제 전세계에 전해질 것인가? 지구를 뒤덮은 그러한 선포는 1928년에 시작되었는데 그해 7월 30일부터 8월 6일까지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 대회에 ‘성경 연구생’들이 모였다. 8월 5일 일요일은 특히 주목할 만하였는데 그때에 대표자들은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의 결의문 지지 공개 강연인 “만민을 위한 통치자”와 함께, “‘사단’에 대항하고 하나님을 지지하는 선언”이란 감동적인 결의문을 듣게 되었다. 그 결의문은 특히 ‘사단’이 나라들과 민족들에 대한 악한 지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분의 집행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여호와께서는 마귀와 그의 악한 세력에 대해 심판을 내리셔서 결국 ‘사단’이 온전히 결박당하고 그 조직이 완전히 멸망될 것임을 선언하였다. 더우기 그 결의문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지구에 의를 가져오실 것이며 그를 통해 인류를 악에서 구출하시고 지구상의 모든 나라에 영원한 축복을 가져오실 것을 지적하였다. 그 결의문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러므로 의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끝없는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여호와의 편에 서고 순결한 마음으로 그분을 순종하며 섬길 합당한 때가 도래하였다.”
“‘사단’에 대항하고 하나님을 지지하는 선언”과 그것을 지지하는 공개 강연은 「황금 시대」와 「파수대」지에 실렸다. 더우기 그 결의문과 연설은 「만민의 벗」이라는 소책자로 여러 언어로 수백만부가 배부되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하나님의 왕국을 지지하고 ‘사단’과 그의 도구에 의한 세계 통치에 도전하는 소식은 40여년 전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 소식은 그 이래로 인쇄된 지면과 공개 연설을 통해, 여호와의 종들이 전세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왕국의 소식을 계속 전함에 따라 더욱 더 방범위하게 전세계적으로 울려 퍼졌다.
‘라디오’가 개척자로서 그 소리를 높이다
1922년 4월 17일자 ‘필라델피아’ 「레코드」지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천년기가 오고 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다”라고 선언하면서 다음과 같이 계속하였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로부터 ‘저지 러더포오드’의 강연이 방송되었다. 연설이 송신기로 옮겨졌다. 소식은 ‘마일스 어브 벨 텔리포운 와이어즈’를 타고 ‘하울릿’ 방송국에 전해졌다.”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의 첫 ‘라디오’ 연설—‘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서 1922년 4월 16일 일요일에 행한 연설—에 대한 신문 보도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연제는? “지금 살아 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구식 ‘라디오’를 통해 집에서 그 연설을 들었을 것으로 추산되는 50,000명의 ‘펜실베이니아’, ‘뉴우저어지’, ‘델라웨어’ 주민과 비교할 때 직접 연설로 들은 청중은 소수에 불과하였다.
그 당시는 ‘라디오’ 방송에 있어서 초창기였다. 미합중국에서 ‘피츠버어그’의 방송국 KDKA와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의 WWJ가 정규 상업 방송을 시작한 것은 1920년이었다. 그때는 공장에서 조립한 것으로서 ‘이어폰’이 달린 광석 수신기 밖에 없었다. 확성기와 ‘안테나’가 함께 들어있는 ‘라디오’는 1930년대에 가서야 생산되었다.
1920년대 초에는 여호와의 종들이 비교적 소수였다. 1924년에 미합중국에서 매 주 호별 방문 전파를 하는 ‘성경 연구생’들 수는 평균 1,064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시절에 하나님의 백성은 ‘라디오’가 미치는 큰 영향력을 인식하게 되었고,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왕국 소식을 전할 수 있는 훌륭한 수단이라고 생각하였다.
1922년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와 몇몇 고문들은 우선 ‘뉴우요오크’ 시 ‘리치몬드’ ‘버러우’ ‘스테이튼 아일런드’에 있는 땅 약 24‘에이커’를 구입하였었다. 언젠가 ‘로이드 버이치’가 이런 말을 하였는데 흥미롭던 그 시절을 상상해 보게 한다. “어느 토요일 오후에 협회장 ‘러더포오드’ 형제는 우리 몇 사람을 데리고 ‘스테이튼 아일런드’로 갔다. 사들인 그 토지에 도착하자 그는 숲속의 한 곳을 가리키면서 ‘자, 여러분, 이제 우리는 이곳에서 파기 시작합시다. 여기에 ‘라디오’ 방송국을 세울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흙 파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 해 여름에는 주말마다 그 일을 했다.” 겨울 내내 그리고 1923년 여름까지 건축하는 일은 계속 신속하게 진행되었으며 주말에는 협회의 ‘브루클린’ 본부에서 많은 젊은 형제들이 도우러 왔었다.
1923년 ‘랠프 에이치. 레플러’는 ‘오하이오’ 주 ‘어라이언스’ 고등학교에서 방송 이론을 가르치고 있었다. 어느날 그는 ‘왙취 타워 협회장’ 사무실로부터 편지 한장을 받았다. 그것은 “형님이 방송에 관하여 가르치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 그와 관련하여 주의 봉사를 하는 데 있어서 전 시간 봉사를 고려해 보시지 않겠읍니까?”라는 문의 편지였다. ‘레플러’ 형제는 이점에 있어 여호와의 손길을 분명히 알게 되었으며 그런 기회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10월 중순에 ‘벧엘’에 도착한 그는 접시 닦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는 후에 이렇게 기술하였다. “군대에서도 나는 접시 닦는 일을 싫증이 날 정도로 하지 않았던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런 성귀가 생각났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라.’ (신명 13:3) 그렇다. 나는 이것이 또 하나의 시험이구나 하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한달 후 그는 방송에 관련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레플러’ 형제는 “그 도시에서 500‘와트’짜리 ‘라디오’ 송신기를 발견하게 되었고 방송국을 위해 그것을 구입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그것을 신속히 설치하였으며, 첫 방송을 위해 모든 준비를 완료하였다.
‘레플러’ 형제는 이런 점을 시인하고 있다. “마음이 점점 더 조마조마해졌다. 첫 방송이 성공적이 될 것인가? 우리의 방송이 들릴 것인가? 정부로부터 방송 허가는 이미 받아 놓았다. 호출 부호는 WBBR로 정해졌다. 드디어 첫 방송을 위한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 그 방송은 1924년 2월 24일 일요일 저녁에 있었다. 그 첫 방송을 위하여 출력 ‘스위치’를 넣는 특권이 나에게 주어졌다. 그리고는 잘 되기를 바라면서 우리는 나와 버렸다.”
WBBR의 그 첫 방송은 오후 8:30부터 10:30까지 2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피아노’ 독주, 노래가 있었고, 그 사이에 주요 ‘프로그램’으로서 협회장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의 “‘라디오’와 하나님의 예언”이란 연설이 있었다. 그후 매일 저녁 8:30부터 10:30까지, 일요일에는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좋은 음악과 교육적인 연설을 갖춘 ‘프로그램’이 방송되었다.
WBBR을 통해 ‘드라마’를 할 기회가 있었다. ‘맥스웰 지이. 프랜드’가 그 일에 참여하였다. 그는 유명한 ‘스위스’ ‘쮜리히’ 시립극장에서 많은 연극 훈련을 받은 바 있었다. 여러 해 후 여호와께서는 ‘프랜드’ 형제로 하여금 성서 ‘드라마’를 제작, 감독하고 미국 내에서 교직자들의 영향을 받아 편견을 갖게 된 재판관들, 검찰관들이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에 대해 행한 재판 광경을 생생하게 재생하는 것을 감독하게 하심으로써 예기치 않은 특권을 즐기게 하셨다. 이러한 ‘드라마’로 인하여 그들은 수치를 당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종들의 무죄함이 밝혀졌다. 그러한 연출에 활약하였던 연기자들과 음악가들은 “왕의 극장”을 조직하게 되었다.
1928년 ‘뉴우저어지’ 주 ‘사우드 앰보이’에서는 몇몇 여호와의 종들이 일요일에 좋은 소식을 전파한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그것으로 10년을 끈 “‘뉴우저어지’의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왕의 극장”은 그 점에 한 몫을 담당하였다. 참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재판에서 편견을 나타내고, 상스러운 말을 하고 심지어 표면에 나서지 않으려는 교직자들과 동류임을 드러내는 재판관들은 ‘가톨릭’교인이었던 경우가 많았다. 법정에서 주고 받는 내용이 속기로 기록되었다. 훈련된 연기자가 법정에 가서 판사나 검사 등의 목소리와 억양을 자세히 살폈다. 며칠 후 “왕의 극장”은 놀랄 만큼 생생하게 법정 광경을 재연하였다. 그와 같이 적을 폭로하는 데 전파가 사용되었으며 결국 재판관들은 잘못 인도된 경찰과 검찰관들 뿐만 아니라 자기들도 특히 눈에 띄게 되었으므로 매우 놀라서 여호와의 백성이 관련된 사건을 다루는 데 더 조심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약 33년 동안 WBBR은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널리 성서 진리를 전하였다. 처음에는 500‘와트’짜리 송신기로 방송을 시작하였다. 3년 후에 1,000‘와트’짜리 송신기를 새로 구입하였다. 1947년 연방통신 위원회는 같은 주파수를 가진 미합중국 각지에 산재해 있는 다른 방송국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WBBR 출력을 5,000‘와트’로 증가하도록 허가하였다. 세갈래로 나뉘어진 지향 ‘안테나’ 시설로 그 문제가 해결되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인구가 가장 많은 북동부 지역에 대한 방송에 있어서도 5,000‘와트’를 25,000‘와트’ 이상으로 증가시킬 수 있었다. WBBR은 대도시인 ‘뉴우요오크’ 지구와 인접한 ‘뉴우저어지’ 및 ‘커네티커트’ 주에서 청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프로그램’을 청취한 편지는 영국, ‘알래스카’, ‘캘리포니아’ 주와 다른 먼 곳에서도 왔다.
협회는 1957년 4월 15일에 그 방송국을 팔았다. 그 이유는? 처음 방송국 운영을 시작할 무렵인 1924년에는 ‘롱 아일랜드’와 ‘뉴우저어지’ 주의 일부 및 ‘뉴우요오크’ 시 5개구 전체에 걸쳐 약 200명의 ‘성경 연구생’으로 이루어진 회중 하나 밖에 없었다. 그러나 1957년에는 ‘뉴우요오크’ 시에만도 62개 회중이 있었으며 좋은 소식을 전하는 322명의 전 시간 전도인 외에 최고 7,256명의 왕국 선포자가 있었다. 그러므로 훌륭한 증거가 수행되고 있었다. 또한 각 가정에서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은 그들이 질문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더 많은 교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훨씬 더 효과적인 것이다. 방송과 관련해서 사용하는 비용은 하나님의 왕국 관심사를 발전시키기 위해 어떤 다른 방법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협회의 방송활동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어느날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가 ‘랠프 레플러’의 방에 와서, 책상 위에 미합중국 지도를 펴놓고 자기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기와 여기와 여기에 방송국을 설립할 생각입니다. 이 방송국 설립 공사에 형님이 기술 감독을 하셔도 되겠읍니까?” “기꺼이 그렇게 하겠읍니다”가 그 대답이었다. 그리하여 1924년 11월이 되자 ‘레플러’ 형제는 협회 소유의 다른 ‘라디오’ 방송국 건축을 위해서 ‘시카고’ 지역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 방송국 호출 부호는 WORD였다. ‘레플러’ 형제는 다른 방송국에도 송신기를 설치하였는데 그 방송국들은 협회가 직접 소유하지는 않았지만 협회의 대표자들이 관리하였다.
방송사에 남을 일을 하다
1920년대의 여호와의 백성은 초기 방송국의 가운데 하나인 ‘WBBR’을 세움으로써만 선구자 역할을 한 것은 아니다. 이미 언급된 바와 같이 1927년 7월 24일 일요일에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가 ‘캐나다’ ‘온타리오’ ‘터론토’에서 53개 방송국을 연결한 그 당시로서는 가장 광범위한 방송망을 통해서 연설함으로써 여호와의 종들은 방송사에 남을 일을 하였다.
어떻게 해서 그런 유례없는 방송망을 통해 연설하게 되었는가? 관련된 몇가지 일이 있었다. ‘WBBR’과 ‘뉴우요오크’ 시에 있는 방송국 WJZ의 소유자 사이에 같이 방송하자는 합의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지켜지지 않았다. 후에 ‘WBBR’은 다른 주파수로 방송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나중에 다시 그보다 더 불리한 주파수가 지정되었다. 1927년에 방송 관계법에 의거하여 협회의 방송국은 더 나은 주파수가 허용되도록 연방 방송 위원회에 조정 신청을 냈다. 조사하는 자리에서(1927년 6월 14, 15일) ‘내셔널’ 방송회사 사장 ‘머얼린 홀 아일스워드’는 ‘뉴우요오크’에 있는 방송국 ‘WJZ’와 ‘WEAF’의 공로가 크다고 증언하였는데 ‘WJZ’와 ‘WEAF’는 둘 다 별개의 주파수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WBBR’에 대한 시간 일부 사용 허가가 부당하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한 것이 분명하다. 반문에서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는 ‘아일스워드’ 씨에게 이러한 질문을 제기하였다. “당신의 취지는 세계에서 가장 탁월한 금융업자나 가장 특출한 정치가, 가장 유명한 교직자의 소식을 방송으로 사람들에게 전해 주려는 것이지요?” 그렇다는 대답이었다.
“우주의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지상의 모든 인류와 민족에게 평화, 번영, 생명, 자유, 행복을 베푸시고자 하는 계획이 곧 시행될 것을 당신이 확신한다면 그것을 방송하지 않으시겠읍니까?” ‘않하겠다’고 말하기는 참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그 대답은 ‘하겠읍니다!’였다. 그때 ‘아일스워드’ 씨는 자발적으로 ‘만국 성경 연구회 회장’의 연설을 기꺼이 방송하겠다고 말하였다.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가 그 제안을 수락했음은 물론이다.
1927년 7월 24일 일요일 ‘캐나다’ ‘온타리오’ ‘터론토’에서 ‘러더포오드’ 형제가 약 15,000명의 대회 참석자들에게 연설할 때 그때까지 유래없던 방송망을 통해 수백만명이 더 그 연설을 듣게 된 것은 바로 그렇게 되어서였다. ‘내셔널’ 방송 회사에서 협회에 보낸 편지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어제 오후 ‘저지 러더포오드’는 살아있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더 많은 청취자들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1928년에는 ‘성경 연구생’들이 방송에 있어서 다른 독특한 일에 관련되었다. 8월 5일 일요일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에서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가 12,000명의 청중에게 “만민을 위한 통치자”란 공개 강연을 하였다. 그 강연은 107개의 방송국을 연결한 방송망을 통해 전해졌는데 그 일에는 33,500‘마일’의 전화선과 91,400‘마일’의 전신선이 필요하였으며 단파를 통해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우지일랜드’에 재방송되었다.
‘왙취 타워’ 방송망 즉 “화이트” 방송망이 1928년에 조직되어 특히 ‘디트로이트’ 대회에 공헌하였다. 아주 성공적이었으므로 ‘왙취 타워 협회’는 미합중국과 ‘캐나다’ 전체에 걸쳐 매주 방송망을 활용하기로 결정하였다. 1시간 프로가 마련되어 ‘WBBR’에서 방송하였다. 그것은 생방송으로서 ‘러더포오드’ 형제의 연설이 주요 ‘프로’였으며 시작과 끝에는 협회 ‘오케스트라’가 음악을 연주하였다. 그리하여 1928년 11월 18일부터 1930년까지 매주 일요일에는 청취자들이 “왙취 타워 시간”에 ‘라디오’를 맞출 수 있었다.
‘라디오 프로그램’은 ‘러더포오드’ 형제의 시간을 많이 차지하였다. 훌륭한 증거는 되었으나 그가 여행하거나 지구상의 여러 곳에서 대회를 조직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1931년에 협회는 녹음 방송으로 ‘프로’를 제공하기로 결정하였다. 250개의 방송국이 이들 15분짜리 녹음연설을 제공하도록 조직되었는데 ‘러더포오드’는 자기가 편리한 시간에 제작하였고 방송국 역시 자기들이 편리한 시간에 방송하였다. 1932년에는 그러한 방송에(‘왁스 체인’이라 불리웠음) 사용된 방송국 수가 340개로 늘어났다. 절정을 이룬 1933년에는 408개의 방송국이 여섯개 대륙에 소식을 전하였으며 성경 강연이 23,783회 방송되었는데 그 대부분은 15분 길이의 녹음이었다. 그 당시에 사람들은 ‘다이얼’을 돌려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방송국에서 동시에 흘러나오는 ‘왙취 타워’ 방송을 들을 수 있었다. 전파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진리의 말씀이 가득하였던 때가 자주 있었다.
협회 소유의 공장
여호와의 백성은 일반의 관심을 더욱 더 끌고 있었다. 1920년대 후반의 역사적인 방송 중계를 과소평가할 수 없다. 또한 그들의 호별 방문 전파 활동도 가속화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왕국 전파자들을 가볍게 볼 수 없었다. 성서 출판물에 대한 수요가 더욱 늘어났으므로 협회의 인쇄 시설로 그것과 보조를 맞추지 않으면 안되었다. 1920년대 후반을 돌이켜 보며 ‘시이. 더불류. 바아버’는 이렇게 말한다. “(‘뉴우요오크’ ‘브루클린’) ‘콘코오드’ 가 18번지 공장은 이제 우리의 필요에 비해서 너무나 협소하고 불편하였다.”
확실히 그랬다. ‘성경 연구생’들에게 다른 공장이 필요하였다. 그들은 건축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전세계 여러 곳의 활동을 약화시키지 않고는 공장 건축을 위해 충분한 돈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협회는 협회의 부동산을 담보로 총액이 실제 재산 가치의 절반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채권을 발행하여 자금을 마련하기로 하였다. 발행 채권은 액면이 100‘달러’, 500‘달러’, 1,000‘달러’짜리로서 매년 5‘퍼센트’의 이자를 지불할 수 있도록 하였다. 증권 시장에서 매매하지 않고 「파수대」의 부록을 통해 ‘성경 연구생’들에게 이 채권에 응모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1926년과 1927년에 ‘브루클린’ ‘벧엘’ 가족 성원들은 ‘아담스’ 가 117번지의 공장 건축이 완성되어 가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였다. 오래지 않아 창문이 많이 달린 이 훌륭한 8층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 세워져 곧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현대식 내화 건물로서 연 건평이 70,000평방 ‘피이트’ 이상이었다. 1927년 2월이 되자 ‘콘코오드’ 가 18번지에서 이사할 때가 되었다. “기계를 옮기면서 ‘알. 제이. 마아틴’ 형제(공장 관리인)가 기뻐서 젊은이들과 함께 춤을 추던 것이 기억난다”고 ‘해리 피트러스’는 말한다. ‘마아틴’ 형제가 새로운 공장을 참으로 좋아했다는 것은 1928년 ‘만국 성경 연구회’ 연감에 나온 바와 같이 협회장에게 보낸 그의 보고를 통해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거기서 그는 협회를 비평하는 사람들까지도 이제는 그 공장이 “세계적인 인쇄업의 중심지 즉 ‘뉴우요오크’ 시에서도 가장 훌륭한 인쇄 공장 가운데 하나”임을 인정한다고 말하였다. 그 보고에는 공장 운영에 대한 이러한 설명도 들어 있었다.
“그 건물은 전체적으로 우리의 작업을 위하여 가장 이상적으로 설계되었다. 모든 작업은 그 중요성에 따라 그리고 당연한 순서에 의해 아래 층으로 옮겨간다: 사무실은 당연히 있어야 할 윗층에 있다. 그 밑의 층에 식자기가 있는데 그것 역시 이치적인 순서이다. 그 다음 6층으로 연판이 내려져 거기서 인쇄를 한다. 우송과 소책자는 5층에서 취급한다. 제본은 4층에서, 보관은 3층에서, 발송은 2층에서 한다. 종이 저장소, 차고 및 발전 장치는 1층에 있다. 개선해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본부 직원이 200명에 가까와 오고 있었기 때문에 ‘벧엘’의 확장이 불가피했다. 1926년 12월 중에 협회는 ‘브루클린’ ‘콜롬비아 하이츠’ 124번지에 인접한 땅을 매입하였다. 1927년 1월초에 122번지, 124번지, 126번지의 세 건물이 철거되고 약 80개의 방이 있는 9층 건물이 건축되기 시작하였다. 그 건물은 뒤쪽으로는 1911년에 완성된 협회 건물과 연결되어 있고 앞으로는 ‘풀만’ 가를 향하고 있다.
“여호와의 교훈을 받”음
1920년대에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축복하셨고 그들이 왕국 관심사를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셨음이 확실하다. 또한 그분은 자신이 점진적인 계시의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셨다. 한편 ‘성경 연구생’들은 자기들의 생각을 어느 정도 조정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에 감사하고 열심히 “여호와의 교훈을 받”아들이려고 하였다.—요한 6:45; 이사야 54:13.
예를 들어 하나님의 백성은 1925년에 대한 자기들의 생각을 조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들은 그 해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 50년마다 있었던 70번째의 희년이 끝나는 때라고 생각하였다. 때문에 그 해에 회복과 축복이 있을 것으로 그들은 기대하였던 것이다. (레위 25:1-12) ‘에이. 디이. 쉬로오더’는 이렇게 말한다.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의 남은 자들은 그때 하늘로 가서 왕국의 일부가 될 것이고 고대 충성자들인 ‘아브라함’, ‘다윗’ 기타 사람들은 군왕으로 부활되어 하나님의 왕국의 일부분인 지상의 통치를 떠맡으리라고 생각하였다.”
바야흐로 1925년은 왔고 지나갔다. 기름부음받은 예수의 추종자들은 한 반열로서 그대로 지상에 남아 있었다. 고대 충성자들은 ‘아브라함’, ‘다윗’ 기타 사람들은 지상에서 군왕이 되도록 부활되지 않았다. (시 45:16) 그러므로 ‘애너 맥도널드’가 다음과 같이 말한 바와 같다. “1925년은 많은 형제에게 서글픈 해였다. 그들 중 얼마는 실족하였다. 그들의 희망은 꺾였다. 그들은 고대의 훌륭한 인물들(‘‘아브라함’과 같은 옛날 사람들’) 얼마가 부활되는 것을 보고자 했다. ‘그럴 수도 있다’가 아니라 그들은 그것이 ‘확실하다!’고 곡해하였으며 어떤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부활될 것을 예상하여 그들을 위해 준비하였다. 진리를 나에게 가르쳐 준 자매로부터 나는 개인적으로 편지를 받았다. 그 자매는 자기가 나에게 말해 주었던 것은 잘못이었다고 알려 주었다. ··· (그러나) 나는 ‘바벨론’에서 내가 자유롭게 된 것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다른 어떤 곳으로 갈 수 있겠는가? 나는 여호와를 알고 사랑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충실한 종들은 특정한 해까지만 하나님께 헌신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를 영원히 섬길 결심을 하였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1925년에 관한 기대가 실현되지 않았다 해서 큰 문제가 되거나 그들의 믿음이 약화되지 않았다. ‘제임스 포올러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충실한 사람들에게 1925년은 훌륭한 해였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을 통해 계시록 12장의 의미에 우리의 주의를 기울이게 하였다. 우리는 ‘여자’ 즉 하나님의 우주 조직에 관해 배웠다. 하늘에 전쟁이 있어 ‘사단’과 그의 악귀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거룩한 천사들에게 져서 하늘의 궁정에서 쫓겨나게 된 것과 하나님의 왕국의 탄생에 대해서도 배웠다.” ‘포올러스’ 형제가 1925년 3월 1일호 「파수대」에 나온 “나라의 탄생”이라는 아주 주목할 만한 기사를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 기사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은 상반되는 그러한 거대한 두 조직—여호와와 ‘사단’의—이 어떻게 상징되어 있는가를 확실히 분별하게 되었다. 그때 그들은 1914년에 시작된 ‘하늘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마귀가 하늘로부터 쫓겨났고 그 이래로 자기 활동을 지구에 제한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날을 축하하는 일
‘애너 이이. 지머맨’은 이렇게 기술한다. “초기 대회에서는 회기와 회기 사이에 서로 담소하면서 어떤 벗들은 자기의 「만나」 책[「믿음의 가족을 위한 일용할 천적 만나」]을 건네 주면서 거기다 이름과 주소를 적어 달라고 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러면 자기 생일에 해당하는 날짜 맞은편 빈 지면에 그것을 기록한다. 그들은 일용할 성귀를 읽다가 주소 성명이 기록된 벗의 생일을 알게 되면 생일을 축하하고자 ‘카드’나 편지를 쓰는 것이 보통 있는 일이었다.”
사실이다. 그 당시 초기에는 헌신한 그리스도인들도 생일을 축하하였다. 그렇다면 예수의 생일이라는 날도 축하하지 않을 이유가 있었겠는가? 그들은 여러 해 동안 그것 역시 기념했다. ‘패스터 러셀’ 당시 ‘펜실베이니아’ ‘알레게니’에 있는 옛 ‘성서관’에서 ‘크리스머스’를 기념하였다. ‘러셀’ 형제는 ‘크리스머스’날 ‘성서관’ 성원들에게 5‘달러’ 혹은 10‘달러’짜리 금화를 선물했다고 ‘오러 설리반 웨이크필드’는 말하고 있다. 매이블 피이. 필브릭’은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은 결코 행하지 않는 습관이지만, ‘벧엘’ 식당에 ‘크리스머스 트리’를 장식하여 그날을 기념하였다. 평상시의 ‘모두들 안녕하십니까?’라는 ‘러셀’ 형제의 인사는 ‘모두에게 ‘크리스머스’를 축하합니다.’로 바뀌었다.”
어떻게 해서 ‘성경 연구생’들이 ‘크리스머스’ 축하를 중단하게 되었는가? ‘리차아드 에이치. 바아버’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크리스머스’라는 제목으로 한시간 (라디오) 방송 연설을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 연설은 1928년 12월 12일에 있었고 「황금 시대」 241호에 그리고 일년 후에는 268호에 다시 실리게 되었다. 그 연설은 ‘크리스머스’가 이교에서 기원하였음을 지적하였다. 그후 ‘벧엘’의 형제들이 다시는 ‘크리스머스’를 축하하지 않았다.”
“우리가 그런 이교 습관의 제거를 조금이라도 꺼려했는가?”라고 ‘차알스 존. 브렌들레인’은 묻는다.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런 것을 버리는 것은 바로 새로 배운 것을 적용하는 것이며 전에는 그 습관들이 이교적임을 전혀 몰랐었다. 그것은 마치 더럽혀진 옷을 벗어던지는 것과 같았다.” 그 다음에 피조물 숭배인 생일 축하와 어머니날 지키는 일을 그만두었다. ‘릴리언 캐머루드’ 자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모든 형제들이 그러한 날들을 선뜻 버렸으며 자유롭게 된 것이 기쁘다고 하였다. 새로운 진리는 항상 우리를 즐겁게 해 주었으며 ···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것을 알게 된 특권을 받았다고 우리는 생각하였다.”
견해에 있어서의 다른 변화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되자 그리스도인들의 사고에 있어서도 어떤 다른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그랜트 수우터’에 의하면 그런 면에 있어서 1920년대 후반은 주목할 만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성귀들과 절차 문제 등에 관한 견해의 수정이 그 때에는 항상 있었던 것 같았다. 예를 들어 1927년에는 「파수대」가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로서 잠자고 있는 충실한 자들이 1878년에 부활되지 않았으며, (한 때 그렇게 생각한 바와 같이) 생명이 피에 있다는 것, 그리고 검정 옷에 대한 것은 변경되어야 한다는 점 등을 지적하였다.” (1927년 「파수대」 (영) 150-152, 166-169, 254, 255, 371, 372면 참조) 그 점과 관련된 것으로 그 전해 즉 1926년 5월 25-31일 영국 ‘런던’ 대회에서 ‘러더포오드’ 형제는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 가운데 공개 연사들이 오랫 동안 의례적으로 착용해 왔던 검은 ‘프록코우트’가 아닌 보통 옷을 입고 연단에서 연설하였다.
견해에 있어서 변화된 것에는 1891년 1월호부터 「파수대」 표지에 나오는 “십자가와 면류관” 상징물도 들어 있다. 사실상 많은 ‘성경 연구생’들은 그런 ‘핀’을 여러 해 동안 달고 다녔다. ‘시이. 더불류. 바아버’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것은 사실상 하나의 ‘뱃지’로서 가장자리에는 월계수잎사귀가 둥굴게 둘려있고 그 안에 면류관이 있는데 비스듬이 놓인 십자가에 그 면류관이 걸려 있다. 그것은 상당히 멋있게 보였으며 그 당시에는 정한 때가 되어 승리의 면류관을 쓸 수 있도록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십자가와 면류관 핀”을 달고 다니던 일에 대해 ‘릴리 알. 파아늘’은 이렇게 말한다. “‘러더포오드’ 형제는 그것이 ‘바벨론’적인 것이며 중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우리가 사람들의 집을 방문하여 대화를 시작할 때 그것이 증거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와 일치하게, 1928년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 ‘성경 연구생’의 대회를 회고하여 ‘수우터’ 형제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그 대회에서 십자가와 면류관 상징물은 불필요할 뿐 아니라 불유쾌한 것임이 알려졌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세공물을 버렸다.” 약 3년 후 1931년 10월 15일호부터는 「파수대」 표지에 십자가와 면류관의 상징이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되었다.
몇 년 후 여호와의 백성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T자형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지 않았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1936년 1월 31일에 ‘러더포오드’ 형제는 ‘브루클린’ ‘벧엘’ 가족에게 「부(富)」라는 새로운 서적을 발표하였다. 그 책 27면에서 성서에 근거하여 이렇게 말했는데 그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예수께서는 여러 형상이나 그림에 나오는 바와 같이 나무로 된 십자가에서 고초를 당하신 것이 아니며, 그러한 형상들은 사람들이 만든 것이다. 예수께서는 한 나무에 못박히신 것이다.”
‘너희는 나의 증인이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1929년 10월 29일 “암담한 화요일”에 세계적으로 놀라운 일이 발생하였다. 증권 시장이 붕괴된 것이다. 「뉴우요오크 타임즈」지는 “전국적인 주식 매각 쇄도로 주식가 140억 ‘달러’ 폭락· 금일 은행장들이 시장 지원”이라는 제하로 그 소식을 보도하였다. 1930년대를 휩쓴 경제공황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심각한 경제적 난국에서도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해 풍부한 영적 마련을 해 주셨다. 그리고 역시 그분께서는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는 귀절이 내포하고 있는 깊은 의미를 그들이 이해하게 하셨다.—이사야 43:12.
하나님의 이름이 더욱 강조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몇년 간에 걸친 1월 1일호 「파수대」 주요 기사를 고려해 보자. 그 기사들은 다음과 같았다. “누가 여호와를 영화롭게 할 것인가?”(1926) “여호와와 그의 활동”(1927) “그분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라”(1928) “내가 나의 하나님을 찬양하리라.”(1929) 그리고 “여호와께 노래하라.”(1930)
하지만 여호와의 이름을 높이는 데 있어서 1931년 7월 24-30일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에서 있었던 하나님의 백성의 대회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 대회가 지구 전역의 165개 지역에 연결되도록 계획되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다. 더 의미심장한 요소가 있었다. 그것은 대회 ‘프로그램’과 대회 신문 「사자(使者)」지의 제목란에 나와 있는—사실상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었다—‘JW’라는 수수께끼 같은 글자와 관련되어 있었다. ‘버니스 이이. 윌리암’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대회장에 가까이 가자 여기 저기에 ‘JW’라는 글자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이 ‘JW란게 뭣일까?’ 하고 궁금해 하였다.” ‘허어셀 넬슨’ 자매는 이렇게 말한다. “‘JW’가 무슨 의미인지 여러가지 추측이 떠올랐다.—잠깐만 기다리라(Just Wait), 꼭 살피라(Just Watch), 그리고 정확한 것 등.”
“JW”의 뜻은 1931년 7월 26일 일요일에 밝혀졌는데 그 때 감격에 찬 대회 참석자들은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가 제시한 “새로운 이름”이라는 결의안을 열렬히 채택하였다. 그 내용을 발췌하면 이렇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참된 입장을 알리기 위해서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 말씀에 나와 있는 그분의 뜻과 일치한다고 믿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결의하는 바입니다. 즉:
“우리는 ‘차알스 티이. 러셀’이 행한 활동 때문에 그를 깊이 사랑하며 주께서 그를 사용하셨고 그의 활동을 크게 축복하셨음을 기꺼이 인정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러셀파’라고 불리우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와 ‘만국 성경 연구회’ 그리고 ‘만민의 설교단회’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우리의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의 단체로서 우리가 소유하고 관할하고 사용하는 법인의 명칭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명칭 중 어느 것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의 발자취를 따르는 그리스도인 조직체에 붙이거나 적용하기에 합당하지 않다: 우리는 성경 연구생들이다. 그러나 연합된 그리스도인 조직체로서 우리는 주 앞에서 떳떳한 신분을 나타내는 수단으로서 ‘성경 연구생’ 혹은 그와 비슷한 이름으로 칭하거나 불리워지는 것을 거부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이름을 갖거나 그런 이름으로 불리우는 것을 거절한다.
“우리 주이며 대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값진 피로 사셨으며 여호와 하나님이 의롭게 하시고 낳으셔서 그분의 왕국으로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과 그분의 왕국에 전적인 충성과 사랑을 바칠 것을 주저없이 선언하는 바이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분의 이름으로 활동하도록 그리고 그 명령에 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여호와는 참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사람들에게 알리도록 임명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그 이름을 즐겁게 받아들이고 적용하며 그 이름 즉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알려지고 불리워지기를 원하는 바이다.”
이제 명백해졌다. 그 궁금한 “JW”는 여호와의 증인(Jehovah’s Witnesses)을 의미하였다. “마침내 그 내용을 알게 되었을 때 대회 장소를 진동시킨 엄청난 함성과 박수갈채를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라고 ‘아더 에이. 워슬리’는 선언한다. ‘허어버어드 에이치. 보우크’는 이렇게 부언한다. “‘콜럼버스’ 시 전역에 걸쳐 상점들 창문에 붙여졌던 ‘만국 성경 연구회 환영’이라는 표지는 모두 ‘여호와의 증인 환영’이라는 표지로 바뀌었다.”
‘여호와의 증인’이란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새로운 이름”이라는 결의문이 ‘콜럼버스’에 모인 그리스도의 기름부음 받은 추종자 수천명에 의해서만 기쁘게 채택된 것은 아니었다. 후에 각 회중도 같은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세상의 어떠한 다른 사람도 원치 않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들은 그에 대한 깊은 감사를 느꼈다.—이사야 43:12.
88세의 노인 ‘에이. 에이치. 맥밀란’이 같은 도시에서 열렸던 ‘여호와의 증인’의 “성령의 열매” 대회에 참석하였다. 1964년 8월 1일 그 대회에서 ‘맥밀란’ 형제는 그 이름을 어떻게 채택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이런 흥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새로운 명칭 즉 이름을 ··· 우리가 받았을 때인 1931년에 이곳 ‘콜럼버스’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나의 특권이었다. ··· 나는 그 이름을 채택하는 것에 대해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5명 가운데 들어 있었다. 나는 간단히 이렇게 의견을 피력하였다. 참으로 훌륭한 생각이라고 느낀다. 왜냐 하면, 그 이름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고 있고 우리의 임무가 무엇인지를 세상에 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전에 우리는 ‘성경 연구생’이라고 불리웠다. 그 이유는? 우리가 성경 연구생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연구하기 시작하였을 때 우리는 ‘만국 성경 연구생’들이라고 불리웠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증인이며, 그 명칭은 공중에게 바로 우리의 신분과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알려 주는 것이다. ···
“사실상 그러한 이름을 갖도록 하신 분은 하나님 곧 전능하신 분이라고 나는 믿는다. ‘러더포오드’ 형제는 나에게 이러한 말을 들려 준 일이 있다. 그가 그 대회를 위해 준비하고 있던 어느날 밤 자다가 깼는데 ‘그들을 위해 특별한 연설이나 소식이 없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내가 국제 대회를 제안했는가? 그들 모두 여기에 오게 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생각하기 시작했고 이사야 43장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는 새벽 2시에 일어나서 자기 책상에 앉아 세상의 희망인 왕국에 대해 그리고 새로운 이름에 대해 자기가 연설하려는 골자를 속기하였다. 그때 그가 연설한 내용은 전부 그날밤 즉 새벽 2시에 준비한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이나 그때나 그 점에 있어서 주께서 그를 인도하였음을 나는 조금치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여호와께서 우리가 지니기를 원하시는 이름이며 우리는 그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을 즐겁고 기쁘게 생각한다.”
“왕국, 세상의 희망”
1931년 7월 26일 정오 ‘콜럼버스’ 대회에서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는 매우 의미심장한 “왕국, 세상의 희망”이라는 공개 강연을 시작하였다. ‘내셔널 방송회사’와 ‘콜럼비아 방송회사’ 둘 다 자기네 방송 시설의 사용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여호와의 숭배자들은 ‘콜럼버스’로부터 소식을 전하기 위해 방송망을 마련하였으며 미국 전신 전화 회사는 그에 대해 간단히 이렇게 말하였다. “특별한 이 방송망은 단독적인 것으로는 방송사상 가장 거대한 것이다.” 그 소식은 미합중국, ‘캐나다’, ‘쿠바’, ‘멕시코’, 등지에 있는 163개 방송국을 통해 전해졌다.
방송망을 통해 “왕국, 세상의 희망”이란 연설을 끝낸 직후에 ‘러더포오드’ 형제가 그 방송 내용의 일부로서 “통치자들과 사람들에 대한 여호와로부터의 경고”라 칭한 결의문을 낭독하였다. 특히 그 결의문은 “세상의 희망은 하나님의 왕국이며, 다른 희망이 있을 수 없다.”라고 명백히 선언하였다. 그 결의문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왕국편에 서라고 촉구하였다. ‘러더포오드’ 형제가 직접 보이는 청중 및 보이지 않는 청중들에게 그 결의문 채택을 요구했을 때 대회 참석자들이 함께 일어서서 “네”라고 크게 소리쳤다. 마찬가지로 미국 각지에서 온 전보에 의하면 방송을 통해 들은 많은 청중들이 일어서서 결의문을 지지했음을 알 수 있다.
교직자들을 포함하여 세계 지도자들은 ‘러더포오드’ 형제의 대회 연설 즉 “왕국, 세상의 희망”의 내용을 받아보게 될 것이며 그들은 결의문 “여호와로부터의 경고”의 내용도 알 수 있게 될 것이었다. 더우기 하나님의 참된 종들이 “새로운 이름”이라는 결의문을 채택하였으며 그후부터는 “여호와의 증인”으로 알려질 것임을 그들에게 통고할 필요가 있었다. 「왕국, 세상의 희망」이란 소책자의 배부로 이러한 모든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일반 대중을 방문한 외에 교직자, 정치가, 금융업자 및 군인들을 방문하여 그 출판물을 배부하였다. 2개월 반도 채 못되어 500만부 이상이 배포되었으나 그것으로 그 소책자를 사용한 활동이 완전히 다 끝난 것은 아니었다.
‘프레드 앤더슨’은 그 소책자를 사용한 활동에 대해서 이렇게 기술한다. “나는 ‘라 크로세’에 있는 주교를 방문하였다. 그는 나를 자기 응접실로 아주 극진히 안내하였다. 나는 그에게 방문한 이유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소책자를 제공하였다. 그는 그것을 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감사의 뜻을 표하고 일어섰다. 그는 대단히 노하였다. 내가 현관을 나올 때 그는 나를 항해 그 책을 던졌다. 그것은 마루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그것을 다시 집어 재차 던졌는데 그 때는 내가 덧문을 닫고 있는 순간이었다. 그 소책자는 문에 끼워졌다. 그가 그 소책자를 없애지 못하였으므로 그것을 읽었기를 나는 바랄 뿐이다.” ‘시이. 이이. 바아토우’ 자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어떤 교역자는 자기가 받은 것이 무엇인지 알아 차리자 나에게 화를 내며 ‘이 무식한 것이! 감히 8년된 신학자인 나에게 전도를 하려고 해!’ 하고 소리쳤다. 나는 참 하나님을 섬기게 된 것을 참으로 기뻐하였다!”
봉사에서의 물물교환 방식
1930년대에는 경제 공황으로 커다란 어려움이 발생하게 되었다. 공장들은 문을 닫았다. 1932년에 미합중국에서 10,000,000명이 실직 상태에 있었다. 농부들, 도시 거주자들—서민 전반—이 대공황의 영향을 느끼게 되었다.
돈은 귀했지만 정직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성서 진리의 즐거운 소식이 필요하였다. 성서 출판물을 위해 기부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무료로 그것을 남겨두는 때가 많았다. 그렇지만 항상 그렇게만 할 수는 없었다. 달리 취할 방법은 무엇인가? ‘마아가레트 엠. 브리지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달걀, ‘버터’, 신선한 과일 혹은 통조림한 과일, 닭, 단풍 당밀 등의 농산물과 바꾸었다. 그리고 나는 수예품 즉 이불보나 방석보나 뜨게질 한 것, 수제 융단 등과도 교환하였다. 어떤 때는 이러한 물품 중 어떤 것은 방세를 위해서 팔기도 하였다. ··· (여러 해 후에) 나는 ‘길르앗’(선교인 양성 학교) 졸업식에 참석했는데 거기에 와 있는 한 자매는 바로, 전에 나에게 이불보를 주고 책들을 받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진리를 받았고, 그 때 ‘파이오니아’(전 시간 전도인)를 하고 있었으며 자기 아들은 관심자였다.”
‘아아든 페이트’와 ‘존 시이. 부우스’는 돈이 없는 사람들에게 출판물을 전하고 대신 받게 된 닭을 운반할 수 있도록 차 뒤에 작은 닭장이 있었다고 말한다. 물론 출판물을 닭과 바꾼다는 게 항상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룰러 글로우버’는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알라바마’ 주, ‘조오지아’ 주, ‘플로리다’ 주, 남북 ‘캐롤라이나’ 주 여러 곳과 ‘테네시’ 주와 ‘미시시피’ 주의 일부를 돌았다. ‘그린’ 자매와 내가 닭을 잡으려고 그 큰 농장을 헤매는 모습을 당신은 상상할 수 있는가?”
이기적인 이유로 출판물을 농산물이나 다른 것과 바꾼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좋은 소식을 필요로 했고 인쇄물의 좋은 소식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그것이었다. ‘맥스웰 엘. 루이스’는 “우리를 보살펴 주신 여호와께 항상 감사드렸으며 우리는 의식주에 있어 필요한 것은 언제나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여러 분단으로 나누어 활동함
그때도 역시 왕국 전파 활동에 상당한 반대가 있었다. 1928년에도 여호와의 백성은 일요일에 호별 방문 증거를 하고 있었으며 그에 대한 즉각적인 반대가 일어났다. 1930년대에 ‘여호와의 증인’들은 면허없는 판매원이고 평화를 교란시키며 일요일의 안식일 법을 범한다는 거짓 비난으로 체포되는 수가 늘어났다. ‘왙취 타워 협회’는 조언을 할 수 있도록 법무부를 설치하였고 왕국 선포자들이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할 수 있도록 “재판 규칙”이라는 것을 발행하였다. 불리한 판결은 상소하였다.
그러나 다른 조치도 또한 취해졌다. 1933년에 사람들이 반대하는 지역에 특별한 임무를 띠고 호별 방문 전파를 하도록 하는 간단한 통고에 미합중국에서 12,600명의 증인들이 자진하여 응하였다. 그들은 78개 분단으로 조직되었고 각 분단에 차 여러 대가 배정되어 한 대에 5명의 사역자들이 타게 하였다. 문제 지역에 10대에서 200대의 자동차가 보내졌다. 야외 봉사 중에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체포되면 그것을 협회에 보고하였다. 그러면 소집 통지가 발송되고 그 일이 있은 후 즉시 일요일이 되면 한 분단에 속한 모든 차들이 미리 예정된 집합소—보통 군소재지에 모여서 지시와 구역 임명을 받고 “메뚜기”와 같이 그 도시를 “포위”하여 전체 도시에 증거를 하였는데 30분이나 60분 정도도 못되어 마치는 때도 있었다. (계시 9:7-9) 그 동안 형제들로 된 위원회는 경찰서를 방문하여 그날 거기서 전파하는 모든 증인들의 명단을 그들에게 제출하였다. 어떤 왕국 전도인이 그 활동 중에 체포되면 경찰서에 도착하자마자 특정한 전화 번호로 전화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를 석방케 할 보석금이 준비되어 있었고 변호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버니스 이이. 윌리암’에 의하면 한 번은 그 운동이 처음에는 증인들이 탄차 10대를 구역으로 보냄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는 이렇게 계속한다. “잠시후 구역에 간 사람들로부터 그들이 체포되었다는 전화가 왔다. 그러자 차 10대를 더 보내어 결국 유치장이 가득 차게 되었다. 유치장이 가득 차게 된 후에는 우리는 떼를 지어 구역으로 나갔다. 짐작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우리를 가둘 장소가 없었다. ··· 우리가 그 구역에서 전도하기로 결심하였음을 알게 되자 그들은 곧 포기하였으며 우리는 가서 원하는 대로 봉사하였다. 우리는 항상 성공하였다.”
‘니콜라스 코발락’에 의하면 증인들은 체포될 각오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경찰이 우리를 체포하여 우리의 ‘귀중품’을 조사하면 어느 증인에게나 치솔이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경찰관이 ‘칫솔을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이요?’ 하고 묻곤 했다. 우리 모두는 ‘체포되어 유치장에 들어갈테니까 미리 준비한거죠’ 하고 대답하였다. 그들은 그만 손을 들고 말았다. 그들은 증인들을 협박하거나 그들의 전파 활동을 중단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33년부터 1935년까지의 그런 활동이 있은지도 수십년이 지나갔지만 지나간 그 시절 그 활동에 참가하였던 사람들은 그것을 못내 잊지 못하고 있다. ‘존 덜치노’는 이렇게 말한다. “정말 그때는 ‘드릴’있는 때였으며 그러한 경험은 가치가 있었다. 여호와의 영이 우리를 두려움없게 만들어 주었다.”
방송과 관련된 투쟁
점증하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1930년대 초에 ‘여호와의 증인’들은 호별 방문에서 담대히 왕국 소식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좋은 소식이 방송을 통해서도 수백만에 이르는 가정에 전달되어 교직자들을 심히 놀라게 했다. ‘왙취 타워 협회’는 그 당시 실제적으로 408개 방송국을 사용하고 있었다. 1933년 봄에 미합중국 ‘가톨릭’교인들은 추기경, 주교들, 사제들이 인도하는 전국적인 운동을 시작하였다. 그 목적은? “‘러더포오드’의 방송을 못 듣게” 하려는 것이었다!
교황 ‘비오 11세’는 1933년에 “성년”을 선포하였다. 1933년 4월 23일 ‘러더포오드’ 형제는 55개 방송국을 통해 “평화와 번영에 대한 성년의 의미”란 역사적인 강연을 하였다. 그 연설에서 ‘로마 가톨릭’ 교직체가 사람들에게 제시한 헛된 희망은 약속되어 있는 왕국을 통한 평화와 안전의 모조품이라고 규정하였다. 같은 강연이 1933년 6월 25일에 158개 방송국을 통해 다시 방송될 예정이었다. 그 방송 준비로서 500만매의 강연쪽지가 호별 방문에서 배부되었다. 교직체의 반발이 극심해졌다. ‘가톨릭’측의 협박은 점점 더해갔으며, ‘왙취 타워 프로그램’을 더 이상 방송하지 않겠다는 경영자도 있었다.
1933년 후반과 1934년초에 여호와의 백성은 이러한 ‘가톨릭’측의 소행에 항의하는 청원서를 전국적으로 돌렸다. 의회에 보내는 것으로서 2,416,141명의 서명이 있었다. 1934년 10월 4일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는 연방 통신 위원회에 출두하였다. 그는 ‘가톨릭’의 압력으로 ‘여호와의 증인’들의 숭배의 자유 및 공익을 위하여 방송이 사용되는 일이 심히 손상되었음을 알리는 특정한 예들과 통계를 인용하였다. 증언이 제시된 후 사실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연방 통신 위원회는 별다른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호와의 종들은 미합중국 전역에 또 다른 청원서를 돌렸다. 그것 역시 의회에 보내는 것으로 2,284,128명의 서명이 들어 있었고, 1935년 1월에 제출되었다. 두번째 청원서도 별 효과가 없었다. 잇따른 사태 발전으로 인하여 결국 세번째 청원서를 전국적으로 돌렸다. 서명한 2,630,000명은 위협적인 행동과 거부에 대해 항의하였고 ‘로마 가톨릭’ 교회의 고위층과 ‘저지 러더포오드’ 사이의 공개토론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청원 활동을 할 때 “그러한 토론을 들어 보면 좋겠다고 하는 ‘가톨릭’교인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고 ‘레오널드 유우. 브라운’은 말하고 있다. 그 청원서는 1936년 11월 2일 연방 통신 위원회에 제출되었으나 그것 역시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가톨릭’ 간부들 중 아무도 ‘러더포오드’와 토론을 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1937년에 협회는 “폭로함”이란 소책자를 발행하였다. 그 책은 기본적인 성서 교리를 제시한 것으로 특히 ‘가톨릭’의 거짓 교리를 논박하였다. 집주인이 출판물을 살피는 동안 증인은 ‘러더포오드’ 형제의 연설을 담은 “폭로”라는 제목의 음반을 휴대용 축음기로 틀곤 했다. 질문 소책자 ‘모범 연구’ 1호의 도움으로 성서 연구가 행해질 수 있었다. 그에 대해 ‘멜빈 피이. 사아전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그 연설을 가지고 오도록 어떤 사람의 집으로 초대되었는데 그 사람은 그 연구에 자기 친척들인 다른 세 부부를 초대하였다. 이것과 ‘종교와 그리스도교’와 같은 다른 제목들을 다루는 데 수 주일이 걸렸다. 참석한 8명중 6명이 여호와께 헌신하였다.”
1937년 10월 31일 이후 여호와의 백성은 상업 방송을 자진해서 사용하지 않기로 하였다. 후에도 때때로 협회장은 방송국들을 연결해서 공개 강연을 하였으며, WBBR은 여호와의 영광을 위해 계속 사용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1937년 말에서 1940년대에는 수백만의 가정에 왕국 소식을 전하도록 휴대용 축음기와 성서 연설을 실은 ‘레코오드’판이 점점 많이 사용되었다.
“큰 무리”는 누구인가?
이것은 여호와의 백성 사이에서 여러 해 동안 맹렬히 논의되어 온 문제였다. “큰 무리”는 기름부음 받은 144,000과 하늘에서 연합할 자들로 마치 그리스도의 신부의 “반려자들” 즉 들러리와 같은 이차적인 영적 반열로 오랫 동안 생각해 왔었다. (시 45:14, 15; 계시 7:4-15; 21:2, 9) 이에 부가하여 이미 1923년에는 양과 염소를 가르는 예수의 비유 가운데 나오는 “양”은 ‘아마겟돈’을 생존하여 약속된 하나님의 새 질서로 들어가게 될 현대의 지적 반열로 지적되었다. (마태 25:31-46; 계시 16:14, 16) 1931년판 「입증」(제1권)은 보전되기 위하여 이마에 표를 받은 사람들(에스겔 9장)을 그리스도의 비유 가운데 나오는 “양”으로 지적하였다. 1932년에는 현대적 “양”반열이 ‘예후’의 동료 ‘요나답’으로 전영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1934년 초에 지적인 소망을 가진 이 “‘요나답’ 반열”이 여호와께 헌신하고, 침례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계시록 7장에 언급된 “큰 무리”는 아직 이전에 생각한 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러더포오드’ 형제가 1935년 5월 30일에서 6월 3일까지 ‘와싱턴’ 시에서 열린 ‘여호와의 증인’의 대회에서 그 제목을 토론하였을 때 “큰 무리”에 관한 불분명한 점이 없어졌다. 그 연설은 “큰 무리”가 마지막 때에 “다른 양”과 같다는 사실을 성서적으로 밝혔던 것이다. ‘웹스터 엘. 로우’는 절정에 이르는 순간에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가 이렇게 물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지상에서의 영원한 생명에 소망을 두고 있는 모든 분은 일어나 보시겠읍니까?” ‘로우’ 형제에 의하면 “청중의 반 이상이 일어섰”는데 그때 연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큰 무리를” ‘마일드리드 에이치. 코웁’은 “처음엔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그 다음에 환호성이 있었으며 즐거움에 찬 소리는 크고도 길었다.”라고 말한다.
곧 대회는 끝났으나 중요한 일 즉 찾는 일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고조된 열정과 새로와진 영성을 가지고 아직도 모아들여야 할 이 양같은 사람들을 찾기 위해 구역으로 돌아갔다”고 ‘세이디 카아펜터’는 말한다.
1935년에 있었던 대회 이후에는 이전에 주의 만찬식에서 표상물인 떡과 포도주를 취하던 일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기 시작하였다. 그 이유는? 불충실해져서가 아니라 이제 그들은 그들의 소망이 천적인 것이 아니라 지적인 것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전의 협회 출판물이 주로 예수의 기름부음받은 추종자들을 위하여 마련되었던 것에 반해 1935년 이후로는 「파수대」와 다른 그리스도인 출판물이 기름부음받은 반열과 지적인 소망을 가진 그 동료들 두 반열을 위해 영적 양식을 공급하게 되었다.
진리를 울려 퍼지게 함!
1930년대에 왕국 선포자들은 양같은 자들을 찾기 위하여 녹음 재생기를 사용하였다. ‘헨리 캔트웰’은 그 일에 대해 이러한 점을 말하고 있다. “1933년 협회가 전파 활동을 시작할 때 전국 방방곡곡에서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의 녹음 연설을 들려 주도록 마련하였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협회는 소위 전기 녹음 재생기라는 것을 제작하였다. 그것은 ‘밧테리’를 사용하는 것으로서 전기 ‘픽업’ 혹은 음반과 증폭기, 확성기를 갖춘 태엽을 감는 큰 축음기였다. ··· 우리는 여러 가지 종류의 ‘레코오드’를 가지고 있었다. 어떤 것은 한 장으로도 되었다. 다른 것은 강연 하나를 마치려면 2개 혹은 4개의 음반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15분짜리, 30분짜리, 한 시간짜리 강연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우리가 활동하는 여러 구역에서 공개 집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 활동을 더 설명하면서 ‘줄리아 윌콕스’는 이렇게 기술한다. “가정이나 때로는 공공건물, 낡은 광, 심지어는 교회 등 1시간 강연을 들려줄 장소를 먼저 구했다. 그리고는 그날 대부분 호별 방문을 통해 강연을 광고하고 교통수단이 없는 사람들을 태워다 주도록 마련하는 데 보냈다.”
12회로 이루어진 일련의 녹음 집회가 있는 동안 성서 출판물로 세번, 광고하는 것으로 네번 같은 구역을 돌았다. 상점의 창에 붙인 벽보와 증인들의 차에 붙인 광고판으로 집회를 광고하였다. 훌륭한 결과를 얻게 되었는데 연구에 계속 함께 모이고 심지어 전파 활동에 참여하게 된 사람도 많았다.
‘랠프 에이치. 레플러’에 의하면 왕국 소식을 전하도록 협회는 매분 33 1/3회전하는 음반 수백장을 사용하였다. 그는 이렇게도 말한다. “많은 음반들이 확성기를 장치한 자동차와 ‘트럭’에 의해 사용되었다. ··· ‘왕국 소식’이란 말이 수많은 확성 나팔 옆에 써 있었으며 그것이 주제였음은 물론이다. 거리 여기저기에 그리고 시골 전체에 소식이 전해졌다. ··· 때때로 조용한 저녁 때면 골짜기 아래로 작은 도시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확성기를 장치한 차를 세워놓고 트는데 그 소리가 여러 ‘마일’ 밖에서도 들렸다.”
‘헨리 에이. 캔트웰’은 회고담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는 어떤 지역에 가서 주의를 끌도록 음악판을 얼만큼 틀고 확성기를 통해 간단한 광고를 하고 그 다음에 한가지 연설을 들었다. 그리고는 원하는 사람들에게 더많은 자료를 제시하고자 개개인들이 호별 방문할 것이라고 광고하였다.” 확성기를 장치한 배도 있었으며 그 사용도 이와 비슷하였다.
하지만 ‘여호와의 증인’들의 확성기를 통한 봉사활동에 반대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레나아트 존슨’은 이렇게 쓰고 있다.
“(‘일리노이’ 주) ‘록포오드’ 남쪽 교외 11번가의 어떤 곳에서 한 사람은 확성 장치한 자동차에 의한 활동이나 왕국 소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제할 수 없어서 이 여인은 자기 차를 가지고 확성기 단 차 곁으로 다가와서 연설 소리를 지워버리려고나 하듯이 자기 차의 요란한 경적을 3분 내지 4분간 계속 울렸다. 그 결과는 점점 약해져가는 경적 소리로 알 수 있듯이 자기 차의 ‘밧테리’만 다 닳게 하였을 뿐이었다.”
반면에 그러한 자동차로 활동한 경험담 중에는 약간 익살스러운 것도 있다. “처음에 어떤 사람들은 무서워하였다”고 ‘줄리아 윌콕스’는 말하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그들은 아마 확성차에서 멀리 떨어진 벌판에 나가 일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에 관해서 말하는 소리가 마치 하늘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고 말하였다. 심지어 심판 날이 왔다고 생각하여 농장 일을 집어치우고 자기 집으로 돌아 가버린 가족들도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
축음기를 돌리다!
여러 해 동안 휴대용 축음기가 왕국 전파에 중요할 역할을 하였다. 1937년 9월 15-20일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에서 열린 ‘여호와의 증인’의 대회는 그 활동을 전개하는 데 중요하였다. ‘엘우드 란스트럼’은 그 모임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문간에서 휴대용 축음기를 사용하는 활동이 이 대회에서 처음 소개되었다. 물론 그 전에도 우리는 봉사할 때 축음기를 가지고 다녔다. 그러나 안으로 초대되었을 때만 그것을 틀었다. ···
“문간에서 축음기를 사용하고 관심자를 뒤에 찾아가는 일(그때에는 ‘재방문’을 그렇게 불렀다.)을 하면 ‘모범 연구’의 마련을 통한 성서 연구에 앞장 설 ‘특별 파이오니아’를 조직한다는 것이 ‘콜럼버스’ 대회에서 발표되었다.”
그 대회가 끝난 직후 미합중국 전역에서 특별히 선정된 약 200명의 ‘파이오니아’들이 이미 하나님의 백성의 회중이 있는 대도시로 파견되었다. 이들 전 시간 전도인들은 휴대용 축음기를 가지고 활동하였다. 곧 이어 전체 ‘여호와의 증인’들이 “축음기에 열심”을 가지게 되었고 협회의 ‘브루클린’ 공장에서는 약 이년 동안에 20,000대나 넘는 휴대용 축음기를 생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렇게 했어도 수요가 모자랐는데 수천명의 왕국 복음 선포자들이 축음기를 돌려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진리를 울려 퍼지게 하였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왕국 전도인들이 사용하는 축음기도 변화되었다. 1934년 경에는 ‘스프링’이 감기는 ‘모우터’가 있고 몇 장의 판을 넣을 수 있는 칸이 있는 튼튼한 소형 축음기가 나오게 되었다. 판 6장과 함께 그 무게가 21‘파운드’나 되었다. 전도인들이 그것을 가지고 다니면 상당히 운동이 되었다. 약 2년 후 협회는 더 가벼운 축음기를 제작하였다. 그리고 1940년 대회에서 새로운 수직형 축음기가 소개되었다. 협회 본부에 있는 형제들이 설계, 제작한 것으로 곧 바로 세워놓고 틀 수 있었다. 그것에는 출판물과 조그만 도시락 정도를 넣을 수 있는 작은 공간도 있었다. 이 축음기로 호별 방문 전파 활동이 아주 용이해졌다.
이제 당신이 왕국 선포자로서 약 30여년 전에 야외 봉사를 하고 있었다고 상상해 보라. “집주인이 문을 열면 ‘저는 전해 드릴 소식을 가져 왔읍니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는 축음기 바늘을 판에 대면 ‘러더포오드’ 형제의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고 ‘엘. 이이. 로오쉬’는 말한다. ‘엔젤로 시이. 매니라’는 “그 연설이 끝나면 연사는 우리가 제공하는 책과 그 값이 얼마인지를 언급하였다. 그때 집주인이 관심을 보이면 그 책을 보여주고 전하였다.”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결코 무례하게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모두가 왕국의 좋은 소식을 들을 필요가 있음을 확신했다.”라고 ‘조오지 엘. 맥키이’는 언급한다.
축음기 활동에도 반대는 있었다. ‘어니스트 잰스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심술궂게도 축음기를 우리 목전에서 문자 그대로 박살나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다른 어떤 사람들은 현관에서 축음기를 거칠게 내던져 버렸다. 중서부의 한 형제는 노한 농부가 엽총으로 축음기를 부수는 것을 보고 서 있었다. 그가 그곳을 떠나자 탄환이 차 옆을 스쳐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악의로 가득차 있었고 종교적으로 광신적이었다.” ‘어밀리아’와 ‘엘리자베드 로오쉬’는 어떤 집 현관에서 얼마의 사람들에게 “적”이란 판을 틀어준 일을 술회한다. 연설이 끝나자 한 여인이 축음기에서 판을 꺼내 깨뜨리면서 “우리 교황에 대해 감히 그와 같은 말을 하다니!” 하고 외쳤다.
반대가 있었음에도 축음기 활동은 계속되었다. 1940년대에는 야외 봉사에서 이 축음기 사용이 점차적으로 줄어 들었다. 1944년 이후에는 축음기를 사용한 10여년에 걸친 이 전파 활동이 호별 방문에서의 구두 증거로 대치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과거 여러 해 동안 사용된 증거 방법 중에는 1933년 후반에 소개되어 1940년까지 사용되었던 증거 ‘카드’ 방식이 있다. ‘존’과 ‘헬렌 그로우’는 이렇게 설명한다. “좋은 소식의 전파자 수는 오늘날과 같이 많지 않았으며 훈련도 잘 되어 있지 않았다. 우리의 활동을 돕고 구역을 더 잘 돌 수 있도록 증거 ‘카아드’라는 것을 사용하였다. 그것은 인쇄된 짧은 연설로서 사람들에게 읽어 보도록 권하였다. 읽기를 거절하거나 안경이 옆에 없어 곤란하다면 ‘카아드’에 들어 있는 내용을 그들에게 이야기로 해 주었다.”
왕국을 광고하기 위한 다른 방법
왕과 왕국을 광고하는 데 있어서 여호와의 백성들의 주목을 더 끌게 한 또 한 가지 중요한 활동이 1936년 ‘뉴우저어지’ 주 ‘뉴우와크’ 대회에서 시작되었다. 1938년 왕국 ‘런던’ 대회에서 그것이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여러 해 후에 이 활동은 ‘통보 행진’이라고 불리웠는데 그렇게 부를 만하였다. 1936년 ‘뉴우와크’ 대회를 회상하며 ‘로사 메이 드레이어’는 이렇게 말한다. “어깨에 걸쳐서 앞뒤로 주요 강연을 광고하는 ‘샌드위치 간판’ 혹은 ‘플래카드’가 사용되었다. (전도인은 ‘플래카드’ 사이에 “끼워” 있었다.) 쪽지도 역시 배부되었다.”
1938년 ‘런던’ 대회에서는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의 제안에 따라 ‘통보 행진’을 할 때 판에 생각을 자극하는 글을 써 들고 행진하였다. ‘에이. 디이. 쉬로오더’(그 당시 협회의 영국 지부를 감독하고 있었다)의 회고담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 다음날 저녁 ‘노워’ 형제와 나는 약 6‘마일’에 이르는 첫 번째 장관을 이룬 행진을 인도하게 되었는데 약 1,000명의 형제들이 ‘런던’의 중심가를 행진하였다. 각 행진자들은 한 사람 건너서 (‘로열 앨버트 홀’에서 있을 공개 강연을 광고하는) ‘사실을 보라’는 ‘플래카드’를 메고 있었다. 그 다음 사람은 ‘종교는 올무와 속임수이다’라는 간판을 들었다. 그날밤 그것은 실로 볼 만한 광경이었다!
“다음날 아침 ‘러더포오드’ 형제는 보고를 듣기 위해 자기 사무실로 나를 불렀다. 나는 우리가 크게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많은 사람들이 우리 뒤를 따라 오면서 ‘공산주의자들’이라고 외치더라고 보고하였다. 그 말을 듣고 그는 몇 분간 생각에 잠기더니 ‘펜’으로 글씨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종이 한 장을 떼어 나에게 주었는데 거기에는 ‘하나님과 왕 그리스도를 섬기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그는 세번째 판에는 이러한 구호를 붙이면 그 전날밤과 같은 조롱은 없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그 구호를 써서 이틀밤 후에 있을 다음 행진에 사용하라고 지시하였다. 우리는 그렇게 하여 훌륭한 결과를 얻었다. 그와 같이 세가지 판을 번갈아 들고 9월 9-11일의 대회전에 몇 번의 특이한 행진을 하였다. 영국 정부가 여러 해 동안 우리의 교육적인 ‘프로그램’과 광고를 위한 방송의 사용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이 행진 방법은 공중에게 알리는 데 아주 효과적이었다.”
“‘글래디스 볼튼’에게는 ‘통보 행진’이 “가장 힘든 일이었다”고 말한다. 그 자매는 이렇게 부언한다. “각 ‘플래카드’의 내용이 다 달랐는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종교는 올무이며 속임수이다’인 것 같았다! 교직자들은 그것을 아주 ‘좋아’하였다!” “종교는 올무이며 속임수이다”라는 판에 대하여 ‘어어슬러 시렌코우’는 이렇게 말한다. “그 때는 ‘참 종교’와 ‘거짓 종교’를 구별하지 않았을 때였다. 종교는 무조건 다 나쁜 것으로 생각하였다. 거짓된 것은 ‘종교’라고 하는 반면 참된 것은 ‘숭배’라고 하였다.””
때때로 ‘통보 행진’에 대한 공공연한 적의가 있었다.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턴’과 같은 도시에서는 우리가 환대를 받지 못했다.”고 ‘존 에이치. 소비르다’는 말한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에게 침을 뱉고 갖가지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였으며 우리를 공산주의자라고 하였다. 그들은 우리를 향해 물건들을 던지고 실제 주먹으로 때리기도 하였다.”
그러면 ‘여호와의 증인’들이 ‘통보 행진’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주로, 거짓 숭배와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 활동에 대해 나타내고 있는 반대에 관해서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라고 ‘차알스 시이. 에벌리’는 대답한다. ‘엔젤로 시이. 매니라’는 이렇게 말한다. “앞으로 수행해야 할 것으로 밝혀지는 새로운 봉사 분야를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다른 방도로서, 그분께 대한 우리의 충성을 입증하는 다른 방법으로서, 그리고 우리의 성실에 대한 또 다른 시험으로 생각하였으며, 그분이 요구하시는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기꺼이 그분을 섬기고자 함을 열렬히 증명하고자 했다.”
‘그랜트 수우터’는 「파수대」 발표를 통해 1939년 10월 이후에 ‘통보 행진’이 중단되었다고 알려 준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부언한다. “‘여호와의 증인’의 봉사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었던 이색적이면서도 성공적이었던 이 방법은 그 당시 독특한 것이었다. 그 방식을 사용한 것뿐 아니라 그 방법을 폐지한 데에도 여호와의 인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근래에(1970년대) 와서 온갖 종류의 공중 시위 행동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면으로나 거기에 참여하지 않으며 우리가 행하고 있는 어떤 것도 그러한 시위 행동과 혼돈될 수 없다.”
잡지를 통하여 “참 지혜”를 전함
왕국 전도인들은 호별 방문 전파에서 「파수대」와 「위안」지의 예약을 제공함으로써 “큰 무리”를 모으고 참 지혜를 전하도록 돕는 훌륭한 기회를 가졌다. 「위안」지의 첫 예약 운동 기간인 1938년 4, 5, 6월에 미합중국에서 73,006건의 새로운 예약을 맡았다. 1939년 1월부터 5월까지 처음 있었던 연례 「파수대」 예약 운동 중 미합중국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93,000건 이상에 달하는 새로운 예약을 맡았다.
그러나 「파수대」와 「위안」지는 계속 특별한 방법으로 대중의 관심을 끌어야 하였다. “참 지혜”가 사실상 ‘길거리에서 부’를 것이다. (잠언 1:20) 어떤 방법으로? 1940년 2월에 시작된 바 있는 가두 잡지 봉사를 통해서였다. 이 활동에 참여한 여호와의 종들은 사람이 많이 다니는 가두에 자리를 잡고, 두 잡지에 대해 알리며 한부에 5‘센트’라는 제안된 기부를 지적하도록 글자가 박힌, 특별히 고안된 잡지 주머니를 어깨에 메고 있었다. 왕국 선포자는 「위안」지를 높이 들고 “다른 잡지는 감히 인쇄하지 못하는 사실들을 실린 잡지입니다”고 외치기도 하였다. 다른 구호로서 “종교적인 술책을 폭로합니다” 혹은 “「파수대」는 신권정부에 대해 설명합니다”라는 것도 있었다. 가두에서 잡지 봉사하는 전도인들은 말을 삼가고 품위있는 행동을 하도록 권고받았다. 행인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호의적인 반응을 나타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가두 잡지 봉사가 어떻게 시작되게 되었는지 알고 싶은가? ‘에스. 이이. 존스튼’의 회고에 의하면 1939년에 협회는 「파수대」와 「위안」지를 대중에게 배부하는 데 있어서 다른 방법을 시도해 보도록 요청하는 편지를 모든 지구(地區)의 종(오늘날의 순회 감독자의 전신)에게 보냈다. ‘존스튼’ 형제는 어깨에 주머니를 멘 신문 파는 소년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그와 같이 해 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데이브’와 ‘에마 루시’는 잡지 주머니를 만드는 데 동의하였으며 그 딸인 ‘배라 코우티스’는 그 주머니에 “한 쪽에는 「파수대」, 다른 쪽에는 「위안」”이라고 오린 비단 헝겊을 붙이기로 하였다. ‘존스튼’ 형제가 ‘캘리포니아’ 주 ‘콘코오드’의 작은 회중을 방문했을 때 한 집단이 그와 함께 가두 증거를 하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 다음주 ‘루시’ 가족은 우리에게 더 많은 잡지 주머니를 만들어 줬다. 이번에는 그것을 ‘오클랜드’의 중심가에서 시도해 보았다. 어떤 형제들은 처음에 조금 머뭇거렸으나 가두 봉사는 인기를 끌게 되었으며, 우리는 다른 부회(회중)들로부터 잡지 주머니의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이 때 나는 협회에 보고하면서 견본 주머니를 하나 보냈다. ··· 협회는 나에게 서신을 보내서 그런 시도에 대해 나와 우리 모두에게 감사하였으며, 곧 「통보」에 광고를 내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하였다.”
협회는 잡지 주머니를 공급할 마련을 하였다. ‘니콜라스 코발락’은 이렇게 설명한다. “‘뉴우저어지’ 주 ‘퍼세익’ 회중 전도인들은 협회를 위하여 잡지 주머니를 만드는 특권을 즐겼다. 우리는 천을 잘라 잡지 주머니를 만들었다. 토요일과 일요일에 자격을 갖춘 모든 자진자들이 ‘프랭크 카탄자로’ 형제의 바지 공장에 모여 전국에 있는 우리 형제들을 위해 잡지 주머니를 만드는 특권을 즐겼다. ··· 협회는 글자를 박는 일을 하였다. 그러므로 잡지 주머니를 대할 때마다 우리는 여호와의 왕국을 광고하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다고 느꼈다.”
1940년 2월에 「파수대」와 「위안」지를 가지고 가두에 처음 나섰을 때 어떠했는가? ‘피터 드뮤라’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1940년 2월 1일을 참으로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 우리는 어떤 대우를 받을 것인가? 이웃 사람들과 시민들의 반응은 어떠할 것인가? 우리는 흥분하고 있었다. 그러한 봉사를 두 시간 동안 할 예정이었다. ··· 참으로 놀라웠다. 적당한 구호를 외치며 사람들에게 다가갔을 때 우리는 성공하였다. 우리 각자는 많은 잡지를 전하였다.”
사람들의 반응을 회상하며 ‘그레이스 에이. 이스테프’는 이렇게 말한다. “처음에는 재미와 놀라움이 그리고 때때로 분노가 뒤섞인 그러한 반응이었다. 다음에는 직접 말을 하고 싶지 않고 그렇다고 못본체 할 수도 없는 이웃 사람을 피해서 이쪽 길에서 저쪽 길로 건너가는 당황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처음 몇 주일이 지나자 그들은 포기하고 가두에 있는 전도인들이 접근하면 간단한 대화를 하거나 진열장 구경에 골똘하였다.”
그러한 초기에 여호와의 종들이 가두 잡지 봉사를 하는 동안 폭도들에 의한 폭행이 발생할 때도 있었다. 예를 들어 ‘에이치. 에스. 로빈스’는 상당히 오래 전에 ‘텍사스’ 주 ‘산 안토니오’에서 가두 잡지 봉사를 하던 중 노한 폭도들에 의해 자기와 다른 왕국 전도인들이 공격을 받았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다행히 증인들이 상처를 입지는 않았으나, 체포된 것은 폭도들이 아니라 그들이었다. ‘로빈스’ 형제는 이렇게 부언한다.
“풀려나자마자 우리는 다음에 어떻게 할 것인지를 고려하기 위해 왕국회관으로 갔다. ··· 우리는 다시 조직해서 즉시 되돌아 갔다.
“우리가 번화가로 다시 갔을 때 ‘호외’가 나와 있었고 신문파는 소년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이 도시에는 없어졌다.’고 외치고 있었는데, 우리는 거리마다 다시 퍼져 있었던 것이다. ··· 확실히 우리는 그 도시에서 없어지지 않았고 사라지지 않았다.”
“선출된 장로들”
성서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여호와께서 천적 목자가 되시는 양으로 묘사되어 있다. (시 28:8, 9; 80:1; 에스겔 34:11-16) 그들은 그분의 인자한 돌보심에 더하여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도움과 인도 및 회중 내에 있는 다른 목자들의 도움을 받고 있다. (마태 25:31-46; 누가 12:32; 요한 10:14-16; 베드로 전 5:1-4) 1870년대부터 1932년까지는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회중적으로 선출된 장로들이 회중의 성서 연구와 강연을 보살폈다. 회중적으로 선출된 집사들이 장로들을 보조하였다. ‘시이. 더불류. 바아버’에 의하면 장로들은 “영적인 일을 인도하였으며 집회를 사회하고 강연을 하는 등 전반적인 감독을 하였다.” 반면에 집사들은 “안내인으로 사용되어 좌석을 돌보고 물질적인 일을 도왔다.”
장로와 집사들은 각 회중과 연합한 사람들이 거수 투표로 매년 회중적으로 선출되었다. ‘허버어트 에이치. 에버트’는 이렇게 설명한다. “선거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 당시에는 사도행전 14:23에 나오는 ‘택하다’라고 옮겨진 희랍어가 손을 내미는 것과 관련되며 집단 인도자를 선출하는 일에 투표자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였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사도들이나 통치체에 의해 임명 혹은 지정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몰랐다.”
“회중을 감독하기 위해 선출될 사람들의 영적 자격은 어떻게 결정되었는가?”고 물으면서 ‘헨리 에이. 렙’은 이렇게 대답한다. “물론, 첫째로 초신자는 선출되지 않았으며 그것은 확실히 성서적이었다. 실무적인 회합 전에 디모데 전 3:1-13과 디도 1:5-9에 나오는 그 직책에 관련된 자격을 낭독하였다.” ‘에디스 알. 브레니슨’은 이렇게 말한다. “추천된 사람의 명단이 다 작성되면 우리는 추천된 각자의 자격과 능력을 성서에 따라 주의깊이 그리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고려하도록 간곡히 권고받았으며 결정하는 데 있어 성령의 인도를 구하였다. ··· 추천된 사람들 중에서 선출하려고 지정된 시간에 다시 모였다.”
어떤 곳에서는 장로를 선출하는 데 문제가 생겼다. ‘어베리 브리스토우’ 자매는 “선거 운동과 경쟁”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여 이렇게 말한다. “어떤 회중에서는 그로 인해 형제, 자매들 사이에 분열과 파벌이 생겨났으며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다른 편에 속하는 사람과 말도 하지 않았다.” ‘제임스 리터스’는 “선출되지 못한 자는 매우 분개하는 일도 있었다”고 말한다.
야외 봉사와 관련해서 문제가 일어나는 때도 있었다. ‘어어슬러 시이. 시렌코우’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인쇄물을 가지고 모두가 호별 방문 증거에 특히 일요일 호별 방문 활동에 참여하라는 발표가 있었을 때—그 일은 1927년에 있었다—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왔다. 우리가 선출한 장로들은 그러한 활동을 반대하였으며 조금도 참여하지 못하도록 전체 반의 사기를 꺾으려고 하였다. 반이 편을 들게 되고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호별 방문 전파에 대한 어떤 장로들의 태도가 주로 문제였다. 그래서 대신 선거에서 그 점을 특별히 강조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에이치. 로버어트 도오슨’에 의하면 1929년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어그’의 장로와 집사 후보자들은 이런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당신은 기꺼이 봉사 사업에 참여하겠읍니까?”
어떤 장로들은 우월감을 가지고 있어 단지 연설만 하려고 했다고 ‘제이. 엠. 노리스’ 자매는 말한다. 그 자매는 이렇게 부언한다. “다른 어떤 사람들은 「파수대」 기사를 비평하였으며, 여전히 그것을 하나님의 진리의 통로로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항상 자기들의 사고 방식을 따르도록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선출된 장로들 모두가 다 나쁜 태도 혹은 영을 가지고 있었다고 단정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백성의 그리스도인 목자로서 충실하게 자기의 책임을 수행한 사람들도 많았다. (베드로 전 5:1-4) ‘제임스 에이. 바아튼’은 “전파 사업을 방해한 사람은 항상 소수였다”고 말한다. ‘로이 이이. 헨드릭스’에 의하면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진실하게 헌신한 ‘성경 연구생’ 즉 명실공히 여호와의 증인이었다.” ‘클레런스 에스. 하지이’는 이렇게 말한다. “그 장로들 중 많은 사람들은 장성된 훌륭한 그리스도인 형제들로서 회중의 복지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돌보셨으며 그분은 헌신한 숭배자들의 유익을 위하여 그러한 사람들이 사용되는 것을 기뻐하셨다.
여러 해 동안 “선출된 장로들”이 회중 활동을 관리하였다. 하지만 1932년이 되자 잠정적인 변화가 생겼다. ‘브루클린’ ‘벧엘’ 가족 가운데 연로한 성원들은 1932년 10월 5일 수요일 저녁에 ‘브루클린’ ‘아폴로 홀’에서 가졌던 모임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거기에서 약 300명의 ‘뉴우요오크’ 회중 성원들은 ‘뉴우요오크’ 시에서 장로들이 선거를 폐지하자는 결의문을 통과시켰다. (「파수대」지(영) 1932년 9월 1일호 265, 266면 및 1932년 10월 15일호 319면 참조) 다른 거의 모든 회중들도 비슷한 결의를 하여 신속히 장로 선출을 폐지하였다. 그리하여 1932년에는 “선출된 장로”들이 “봉사 위원회”라는 장성된 그리스도인 남자들의 집단으로 대치되었다. “봉사 위원회”는 “왙취 타워 협회”가 임명한 지방 봉사 지휘자를 보조하도록 회중이 선출하였다.
1932년 새로운 마련이 시행됨에 따라 약간의 문제가 일어나게 되었으며 조직을 떠나게 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회중 및 그들과 연합한 자들은 조직적인 조정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였다.
조직 구조상의 다른 발전
여러 해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기름 부음 받은 추종자들인 형제들만 그리스도인 회중 내의 책임있는 지위를 맡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37년에 변화가 있었다. ‘그랜트 수우터’는 이렇게 기술한다. “조직적인 면에서 1937년 5월 1일호 「파수대」의 교훈이 도움이 되었는데, (지적 소망을 가진) ‘요나답’ 반열에 속한 사람도 회중에서 봉사 지위에 임명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 8월 15일호 「파수대」(영)는 ‘요나답’ 반열도 봉사 위원회의 성원으로서 그리고 부회(회중)에서 다른 비슷한 자격으로 일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파수대」에 의하면 기름부음 받은 남은 자로서 자격있는 성원이 없을 때는 “‘요나답’ 반열”도 “부회의 종” 즉 주임 감독자가 될 수 있었다. ‘노어먼 라슨’은 “장래에 있게 될 커다란 증가를 위해 여호와께서 어떻게 준비하고 계신지 알 수 있었다”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부언한다. “그렇게 해서 지적 반열이었던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도 확실히 새로운 분야가 열려지게 되었다.”
1938년에는 조직적으로 또 다른 중요한 발전이 있었다. “연합하여 행동함”(5월 15일호)과 “조직”(6월 1일호 및 15일호)이라는 「파수대」(영) 기사는 감독자들과 그 보조자들을 임명하는 권한이 각 회중에게 부여된 것이 아님을 밝혔다. 전세계의 회중들은 「파수대」에 나와 있는 결의문을 고려하도록 제안되었는데, 그것은 “협회”가 봉사를 위한 회중을 조직하고 “여러 종들을 임명”하도록 즉 지방적으로 책임있는 지위를 가지는 모든 자를 임명하도록 요청하는 것이었다. (1938년 「파수대」 169, 182, 183면 참조) 대부분의 회중은 그 결의문을 채택하였으며 그렇게 하지 않은 몇몇 회중은 얼마 있지 않아 왕국 봉사와 관련해서 가지고 있던 영적 시력과 특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왕국회관”
천적 목자이신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백성을 위해서 영적으로 풍부한 마련을 해 주신다. 그들을 양육하는 데 있어서 그리스도인 집회는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히브리 10:24, 25) 현대의 하나님의 종들은 종종 가정에서나 공중 건물을 세내어 집회를 가져왔다. 그런데 하늘의 왕국은 1914년에 탄생하였다. 그러므로 때가 되자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들의 주된 집회 장소를 “여호와의 증인의 왕국회관”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도메니코 피넬리’에 의하면 왕국회관이 처음 세워진 것은 1927년 ‘펜실베이니아’ 주 ‘로제토’에서였다고 한다. 그 회관 “봉헌식에 ‘지오바니 드체카’ 형제가 공개 연설을 하였다”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왕국회관”이란 명칭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35년 이후였다. 그해에 ‘왙취 타워 협회장’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는 ‘하와이’ 제도를 방문하여 ‘호놀룰루’에 지부 설립을 착수하도록 마련하였다. 지부 건물과 함께 집회 장소도 마련되었다. 그 강당을 “왕국회관”이라고 불렀다.
1935년 이후 여러 곳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은 건물을 세내었으며 집회를 볼 수 있도록 그것을 손질하여 왕국회관으로 사용하였다. 땅이나 건물을 구입하여 그것을 개조하거나 신축하여 성서 연구와 하나님의 숭배를 위한 집회 장소로 사용하는 회중도 많았다. 그와 관련해서 ‘더불류. 엘. 펠레’는 얼마 전에 이런 말을 하였다.
“왕국회관의 겉모습은 매력적이며 내부는 아늑하고 실용적이다. 또한 회관은 사람의 마음을 끄는 인상을 주므로 새로운 관심자들이 들어오면, ‘편안함’을 느끼게 할 뿐 아니라 말없는 증거를 해 준다. 건축에 있어서 대부분의 일은 우리의 형제들이나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하였다. 우리는 (마귀 세상의) ‘주택’ 조합 등에 의뢰할 필요가 없었다. 자금과 자산은 여호와의 백성이 항상 사용하는 것이다. 오래 전에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에서 ··· 의 장막’도 마찬가지였다. (사도 7:44) 얼마 전에 나는 ‘여러분의 건물을 “왕국회관”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은 일이 있다. 나는 내 사전에 의하면 ‘회관’이란 낱말의 첫째 의미가 ‘공적인 사업에 바쳐진 건물’이라고 답변하였다. 우리의 왕국회관은 전능하신 하나님과 그의 왕국 사업에 전적으로 바쳐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보다 더 적절한 이름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지구 봉사가 여호와의 백성을 강화하다
1930년대에 왕국회관으로 모여드는 “큰 무리”의 수가 증가되면서 하나님의 백성의 회중을 강화하기 위한 한가지 활동이 시작되었다. (계시 7:9) 그것이 지구(地區) 활동으로서 오늘날의 순회 사업에 해당된다. 특정한 지역에 있는 약 20개의 회중이 한 지구를 이루었다. 협회는 각 회중을 방문하여 보통 일주일을 바칠 수 있도록 지구의 종을 임명하였다. 그의 목적은 회중의 조직적인 강화와 전파 사업에 있어서 그들을 돕는 것이었다. 때때로 한 지구에 속하는 회중들이 지구 대회를 위해 모여서 성서의 교훈과 영적인 도움을 받았다. 협회 본부로부터 특별히 파견된 종들이 그러한 대회를 돌보았다. 지구 사업은 1938년 10월 1일에 시작되어 1941년 11월까지 계속되었다.
‘에드가 시이. 케네디’는 그리스도인들이 지구 사업에 어떠한 반응을 나타냈었는지 이렇게 말한다. “그들의 영은 강하였고 우리의 방문에 대해 사랑에 찬 감사를 나타냈다. 모든 부회(회중)가 그 규모는 작았지만 그들 가운데서 생동하는 힘을 엿볼 수 있었다. 그들은 신권적인 교훈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진리를 사랑하고, 집단 봉사 및 모범연구를 통한 활동에 응하였기 때문에 발전의 기미가 보이고 있었다. 새로운 몇 부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다
그 당시 여호와의 증인들은 극심한 박해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확실히 강력한 그리스도인 조직이 필요하였다. 그러한 박해의 대부분이 1935년에 시작되었다. 이유는? 6월 3일 월요일 ‘와싱턴’ 대회에서 ‘러더포오드’ 형제는 기 경배에 대한 어린 학생들의 의문에 대답하였다. 그는 대회 참석자들에게 지상의 상징물에 절하여 그것에 구원을 돌리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충이라고 말하였다. ‘러더포오드’는 자기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에이치. 엘. 필브릭’은 말하기를 ‘러더포오드’의 대답을 “젊은이들이 경청하였음에 틀림없다. 왜냐 하면 그 해 가을 개학이 되자 별안간 ‘보스턴’의 신문들은 ‘마사추우세츠’ 주 ‘린’에 있는 어린 소년에 대하여 대서특필하였다. 그 소년은 학기 초에 학교에서 기 경배를 거부하였던 것이다. 그 이름은 ‘카알튼 니콜스’였다. 같은 날 ‘마사추우세츠’ 주 ‘서드베러’ 학교에서 ‘바바라 메리디스’라는 어린 소녀도 동일한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그 경우는 그 소녀의 선생이 아량이 있어서 그것을 문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문에 보도되지 않았다.
어린 ‘카알튼 비이. 니콜스’가 기 경배를 거부한 것은 1935년 9월 20일이었다. 그 사건은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연합통신은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를 만나 그 문제에 관한 여호와의 증인들의 견해에 대하여 공식적인 성명을 요청하였다. 성명서는 제출되었으나 신문들은 그것을 보도하지 않았다. 그래서 1935년 10월 6일 전국 ‘라디오’ 방송을 통해 ‘러더포오드’는 “기 경배”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그 연설 내용은 32면의 「충성」이란 소책자로 발행되었으며 수백만부가 배부되었다. ‘러더포오드’는 언론계에 대한 그 답변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이 국기를 존중하지만 그들의 성서적인 의무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떠한 형상에도 절하는 것이 엄격히 금해 있음을 밝혔다. 여호와의 종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10계명에 나와 있는 원칙에 위배되는 숭배 행위일 것이다. (출애굽 20:4-6) 그 답변에서 자녀 교육에 대한 책임이 주로 그리스도인 부모들에게 있으며 그 부모가 성서를 이해하고 인식하는 데 따라 자녀들에게 진리를 가르쳐야 한다는 점도 역시 지적하였다.
편견을 갖지 않은 학교 당국자나 선생들도 많았지만 기 경배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여호와의 증인의 자녀를 퇴학시키는 등 독단적으로 행동한 사람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1935년 11월 6일에 증인의 두 자녀가 ‘펜실베이니아’ 주 ‘마이너스 빌’ 공립학교에서 그러한 이유로 퇴학당하였다. 그들의 아버지 ‘월터 고비티스’는 ‘마이너스 빌’ 교육구 교육위원회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다. 그 소송은 미합중국 ‘펜실베이니아’ 동부 지방 법원에서 처음 심리되었는데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유리한 판결이 내려졌다. 그 판결에 대해 공소가 있었으나, 순회 공소원에서도 증인들에게 유리한 판결이 내려졌다. 그러나 다음에 그 사건은 미합중국 대심원으로 가게 되었다. 거기에서 1940년 6월 앞서의 판결을 8대 1로 번복시키는 판결이 내려짐으로써 좋지 않은 결과가 오게 되었다.
기 경례에 대한 성서적인 입장 때문에 각지에서 연달아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았다. 예를 들어 1940년 6월 20일 ‘메릴렌드’ 주 ‘로크빌’에서 성서 집회를 보고 있던 여호와의 증인들은 몇몇 경찰관들이 가담한 폭도들의 공격을 받았다. 왕국회관에 들어서자 폭도 두목은 기를 들고 이렇게 말하였다. “이 기에 절하도록 여러분에게 꼭 2분을 허락하겠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기에서 피를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요.” ‘소우터 케이. 배실’은 이렇게 보고한다. “1분간의 침묵이 흘렀다. 그때 갑자기 처음 집회에 참석했던 한 사람이 몹시 두려워하여 뛰어 일어나 기에 절하고 나가버렸다. ··· 다른 아무도 기에 절하지 않았다. 2분이 다 되자 그 두목은 내 손을 쳐서 손에 들고 있던 것들을 빼앗았으며 폭도들에게 의자나 그 외에 ‘모든 것을 부수라!’고 명령하였다. 기물은 공중으로 던져지기 시작하였다. 뒤에 권총을 찬 경찰관 두명이 그들과 함께 들어와 있었으므로 나는 그들에게 가서 어떻게 할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묵묵부답이었으며 폭동을 중지시키려는 어떠한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 상태는 더 악화되었다. ‘배실’ 형제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악귀의 무리처럼 행동하기 시작했으며 우리를 회관 밖으로 밀어 내었다. 그들은 ‘저놈들을 죽여라! 저놈들을 죽여! 저놈들은 ‘나치스’다’라고 계속 떠들어댔다. 회관에 있는 애들이 울기 시작하자 폭도들 가운데 어떤 자들은 ‘저것들을 창문 밖으로 내던져버려’라고 소리쳤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우리를 발길로 차서 거리로 몰아내더니 이제는 ‘저놈들을 마을에서 쫓아내라! 저놈들을 마을에서 쫓아내라!’고 고함쳤다.”
그 후 폭도들을 피한 ‘배실’ 형제는 지구의 종 ‘차알스 에벌리’와 연락을 취하였고, 즉시 그 ‘에벌리’ 형제는 미합중국 법무장관에게 그 사건을 보고했다. 다음날 연방 수사국은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결국 법정 소송이 있었으며 ‘배실’ 형제는 이렇게 알려 준다. “우리에게 유리한 그리고 여호와께 영광이 되는 판결이 내려졌으며 그 재판 후 ‘로크빌’ 군에서는 그런 일이 또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가 가지는 매 집회 때마다 경찰관 한 사람을 배치하여 왕국회관을 보호하였다. 새로 형성된 회중과 왕국회관을 파괴하려는 ‘사단’의 도구가 이번에도 실패하였다.—이사야 54:17.”
이 이야기는 단지 한 예에 불과하다. 다른 사건들도 많았다. 예를 들어 ‘인디애나’ 주 ‘코너스빌’에서 어떤 증인들의 변호사가 구타를 당한 뒤 시내에서 쫓겨났다. 하나님의 종들은 그러한 폭력적인 박해가 있을 때 인내하고 있었다. 왜냐 하면 그들은 성서에 밀접하게 고착하며 적들과 위험으로부터 그들이 구원되고 구출되는 것은 어떠한 나라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라는 것을 담대하게 계속 옹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구원은 여호와께 있”다.—시 3:8.
왕국 학교
학교에서의 강제적인 기 경배로 말미암아 많은 여호와의 증인 학생들이 퇴학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왙취 타워 협회’는 참 그리스도인들을 도와 자녀들에게 교육을 베풀 수 있게 하였다. 1935년에 “왕국 학교”라는 사립 학교를 세움으로써 그렇게 하였다. 왕국 학교에는 여호와의 증인 가운데서 자격을 갖춘 선생들이 자기 모든 시간과 정력을 바쳐 공립 학교에서 쫓겨난 증인 자녀들을 가르쳤다. 하나님의 백성은 여러 곳에 이러한 사립 학교를 설립하고 그 경비를 공급하였다.
한 왕국 학교가 ‘뉴우저어지’ 주 ‘레이크우드’에 있었다. 이전에 그 학교 학생이었던 ‘시이. 더블류. 얼린마이어’에 의하면 교실, 부엌, 식당을 비롯하여 ‘레익우드’ 회중의 왕국회관이 1층에 있었다. 소녀들을 위한 침실은 2층에, 소년들의 침실은 3층에 있었다. ‘얼린마이어’ 형제는 이렇게 말한다. “물론 우리들 대부분은 그곳에서 숙식하였고 기껏해야 주말에나 집에 갔었다. 자기 집이 더 멀리 떨어져 있는 학생들은 2주에 한번씩 주말에 집에 갔다. 그리고 학교의 마지막 해에는 전쟁 중의 기름 배급으로 인하여 3주일에 한 번씩 주말에 집에 갔었다.”
요리사와 집을 돌보는 사람이 있어서 많은 일을 했다. 그러나 아이들도 역시 맡은 일이 있어서 부엌일을 돕거나, 접시를 씻고 닦는 일 혹은 쓰레기를 갖다 버리는 일 등을 하였다. 아침 식사 때 일용할 성귀 토론이 있었으며 매일의 수업은 30분간의 성서 연구로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영적으로 양육받았다. 더우기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야외 봉사에서 자기들이 배운 것을 사용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다른 왕국 학교가 ‘펜실베이니아’ 주 ‘게이츠’에 설립되었다. 그 학교에서는 ‘그레이스 에이. 이스테프’가 가르치고 있었다. 그 자매는 전에 공립 학교 선생이었는데 교실에서 충성의 서약과 기 경례를 인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해고되었었다. 어떤 이유를 붙여서라도 왕국 학교를 폐쇄하려는 갖가지 “직무상의” 노력으로 그 학교의 첫 해는 “어수선한” 해였다고 ‘이스테프’ 자매는 말한다. 그 자매는 이런 점도 말해 준다. “흠을 잡거나 더 괴롭히기 위해 어떤 공무원이—교육 공무원 혹은 다른—교실로 갑자기 들이닥치는 때가 많았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 사이에 애국심이 강열하였다. 한번은 여러 사람들이 학교를 폭파시키거나 불태우려고 모여, 우리에게 건물을 세놓은 주인에게 노한 목소리로 항의하였다. 그러나 주인이 그 지방의 유지였고 (같은 건물에 있는) 이발소를 폭파시키지 않고서는 학교를 폭파시킬 수 없었으므로 그들은 그 계획을 포기하였다.” 결국 학생들의 수가 증가하였고 유치원, 8년제의 국민학교, 4년제의 고등학교가 필요하게 되었다.
왕국 학교 학생들이 받은 교육은 어떠했는가? ‘마사추우세츠’ 주 ‘사우구스’에 있는 학교에서 가르친 바 있는 ‘로이드 오웬’은 이렇게 보고한다. “어느 만큼 잘 가르쳤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우리는 보통 학력고사를 시행하였다. 예상 외로 대부분의 경우 절반 정도의 학생들이 만점을 받았다. ··· 학생들은 일년에 적어도 두 번 치르게 되는 시험 때마다 매우 높은 점수를 계속 유지하였다.”
왕국 학교에 관련되었던 사람들 사이에 훌륭한 영이 가득하였다. ‘이스테프’ 자매는 이렇게 말한다. “벗들은 참으로 훌륭하였으며 여러 면으로 항상 도움을 베풀었다. 모든 것이 일종의 공동 사회적인 것이었으며 그 ‘공동 사회’는 모두가 어떤 방법으로든지 왕국 학교와 관련을 가지게 되는 그런 것이었다. 그 당시 정다운 벗들이 행한 모든 훌륭한 일 그리고 그칠줄 모르는 여호와께 대한 그들의 사랑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사랑과 감사로 내 마음은 벅차게 된다. 돈이 별로 없었으면서도 그들은 자기 시간과 능력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었다.”
대심원이 번복하다
1942년 6월 8일 ‘존스 대 오펠리카’의 면허세에 대한 소송 사건에서 미합중국 대심원은 5대 4로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그들 사이에 의견이 나누인 것 외에도 ‘블랙’, ‘더글라스’, ‘머피’ 판사는 1940년의 ‘고비티스’ 기 경례 사건에 있어서의 자기들의 결정을 철회하였다. 그에 따라 ‘왙취타워 협회’의 변호사는 서부 ‘버지니아’ 주 교육 위원회를 상대로 하여 미합중국 서부 ‘버지니아’ 남부 지방 법원에 금지 명령소송을 제기하였다. 그 이유는? 강제적인 기 경배 법령의 시행을 억제하기 위해서였다. 세명으로 구성된 재판부는 전원 일치로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으나 서부 ‘버지니아’ 주 교육 위원회가 상소하였다. 기의 날인 1943년 6월 14일 미합중국 대심원은 교육 위원회가 기 경배를 하지 않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자녀들을 퇴학시킬 권한이 없으며 따라서 그들에 대한 교육을 거부할 권한이 없다고 판결함으로써 (서부 ‘버지니아’ 주 교육 위원회 대 ‘바아네트’ 사건에서) ‘고비티스’ 사건에서의 대심원 자체의 입장을 번복한 것이다.
그 판결로 ‘고비티스’ 사건에 대한 대심원 판결은 파기된 것이다. 그것으로 기 경배와 관련된 그리스도인의 입장에 대한 모든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 왕국 학교는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약 8년이 지난 뒤 처음으로 여호와의 증인 자녀들이 공립 학교로 돌아 갈 수 있었다.
‘좋은 소식을 변호하고 증거함’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은 노소를 막론하고 박해를 기대한다. 사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마태 10:22) ‘바울’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무릇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디모데 후 3:12) 박해로 말미암아 거짓 혐의—대개 면허없이 판매한다거나 평화를 교란시킨다는 혐의—로 그리스도인들이 체포되는 경우도 있었다. 처음에는 통계가 없었으나 1933년에 미합중국 전역에서 268명이 체포되었다고 보고되었다. 1936년까지는 그 수가 1,149명으로 증가되었다. 부당하게도 여호와의 증인들은 복음 전파자가 아니라 선전원이나 행상인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체포, 심문, 투옥을 당하였을 때 여호와의 증인들이 투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법정에서 내린 불리한 판결은 상소하는 방침을 택하였다. 여호와의 도움으로 그들은 ‘복음을 변호하고 증거할’ 수 있었다.—빌립보 1:7, 새번역.
불과 몇 면의 지면을 사용하여 여호와의 종들이 전파의 자유를 위해 싸웠을 때의 그 감동적이고도 극적인 사건을 재연하거나, 용맹한 신권적 전투의 여러 장면들을 재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리라. 그러나 맹렬하였던 “뉴우저어지의 전투”부터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포격 개시’가 1928년에 있었는데 그 때 ‘뉴우저어지’ 주 ‘사우드 앰보이’에서 몇몇 하나님의 종들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 주에서 여호와의 증인에 대항하는 ‘가톨릭’의 전투 중심지가 된 곳은 ‘플레인필드’였다.
‘플레인필드’ 사건
여호와의 백성을 박해하는 데 있어 ‘플레인필드’가 두드러지다는 점을 고려하여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는 “오늘날 이 나라에서 종교적 편협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공개 강연을 그곳에서 하기로 결정하였다. 1933년 7월 30일 초대되지도 않았고, 원치도 않았고, 필요치도 않은 약 50명의 경찰관들이 이 특별한 마련에 몰려 왔는데 명목상으로는 극장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거기에 온 것은 ‘가톨릭’ 교직체의 제의에 의한 것임이 분명하였다. 교직체는 그 집회를 막고 경우에 따라서는 연사를 제거하려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러더포오드’ 형제는 극장에 도착하자 경찰관들이 휘장 뒤에 자기와 청중을 항해 기관총 두 자루를 겨냥해 놓은 것을 보게 되었다. 그가 항의했으나 경찰이나 그 무기는 반응이 없었다. 그들은 폭동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였으며 질서 유지를 위해 그곳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오지 갱개스’는, 강연하는 동안 내내 긴장된 분위기였다고 말한다. 특히 그는 ‘러더포오드’의 연설이 결론에 이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할 때 긴장이 더욱 고조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제들과 교직자들은 사람들을 진리에 대하여 무지케 하고 그렇게 하여 자기들이 폭로되는 것을 막으려고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박해를 공모하고 박해를 조장하므로 수치스러운 일을 하고 있읍니다. 당국자들은 자기들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하여 여호와의 증인들을 거리낌 없이 선뜻 이기적인 행상인이나 판매원으로 취급하므로 부끄러운 일을 하고 있읍니다. 판사들은 법정에 앉아, 개인적인 어떤 손실을 두려워하여 문제를 회피하거나 행상인 혹은 판매원을 규제하기 위한 사령을 이용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의 왕국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공정한 판정을 내리지 않거나 그것을 거부함으로 수치스러운 일을 하고 있었읍니다!”
‘갱개스’ 형제는 이렇게 자인한다. “나는 생각하기를 ‘이제 그들이 그에게 사격을 가할 것이다! 이제 그들은 그를 체포할 것이다!’라고. 그러나 ‘편협’이라는 소책자의 서문에 언급되어 있듯이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셨다.” (시 34:7) 그 역경 하에서도 ‘러더포오드’ 형제의 연설은 아무 일 없이 끝났다. 그 연설은 열광적인 갈채를 받았다. 후에 출판되어 널리 배부된 「편협」이라는 소책자도 그러하였다.
독재자가 증인들로부터 경고를 받다
언론과 숭배의 자유를 위한 여호와의 증인들의 투쟁은 비단 미합중국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소위 “성년”(聖年)이라는 1933년 6월에 ‘아돌프 히틀러’ 정권은 ‘마그데부르크’에 있는 ‘왙취 타워 협회’의 재산을 몰수하고 독일 내에서 집회와 서적 배부와 관련된 여호와의 백성의 활동을 금지하였다. 재산은 10월에 반환하였다. 1934년 10월 7일 독일의 증인들은 집단적으로 모여 엄숙한 기도를 한 후에 ‘히틀러’ 정부의 관리들에게 항의 전보를 발송하였다. 그리고 다른 나라에 있는 하나님의 종들도 역시 그대로 수수방관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글래디스 볼튼’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1934년 어느날 밤 봉사회에서 우리는 특별한 일을 위해 일요일 오전 9:00에 집회 장소로 모이라는 발표를 듣게 되었다. 모두는 흥분하였다! 무슨 일인가? 일요일 아침 집회 장소는 가득찼다. 연사는 독일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박해를 중지하도록 요청하는 전보를 ‘히틀러’에게 모두가 동시에 보내기 위해 전세계 여호와의 증인의 회중들이 오늘 모이고 있다고 발표하였다.” 여호와께 기도한 후 각 집단은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독일, ‘베를린’의 ‘히틀러’ 정부에게. 귀 정부의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학대로 인하여 전세계의 모든 선량한 사람들이 놀라고 있으며 하나님의 이름에 불명예가 돌아가고 있다. 이제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박해를 중단하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귀 정부와 ‘나치스’당을 멸망시키실 것이다.” 그 전보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이름으로 보내는 것이었으며 회중이 모인 도시나 읍의 이름을 밝혔다.
이러한 전보는 심지어 미합중국의 몇몇 전신국에도 상당한 동요를 일으켰다. ‘멜빈 윈체스터’는 “다른 곳에서 뿐만 아니라 ‘버지니아’ 주 ‘케이스빌’에서도 벗들이 전보 내용을 가지고 갔을 때 전신기사가 거의 실신할 지경이었다”고 말한다.
‘나치스’ 정권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박해가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독일과 다른 곳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 앞에 놓인 반대와 어려움을 각오하고 있었다. 여호와께서는 적절한 때에 그들이 필요한 성서적인 교훈과 격려를 받을 수 있게 하셨다. 그러한 교훈과 격려는 1933년 후반의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파수대」 기사를 통해 주어졌다. 그 기사는 ‘로마 가톨릭’의 적의를 폭로하였고 반대로 인하여 하나님의 충실한 어떤 종들이 죽게 될 수도 있다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그 기사는 그 거룩한 이름을 입증하는 데 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도록 담대하고 즐겁게 그분의 이름을 계속 증거하라고 하나님의 백성을 권고하였다.
변호를 위한 도움
그때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을 시험하는 때였다. 물론 공공연한 반대를 받았다거나 심지어 체포되었다고 해서 그 모든 경우에 재판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미합중국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은 법정에서 성공적인 변호를 하기 위해서는 도움이 필요함을 여러 번 느끼게 되었다. 왕국 선포자들을 돕기 위해서 ‘왙취 타워 협회’는 ‘뉴우요오크’ ‘브루클린’ 본부에 법무부를 설치하였다.
과거를 돌이켜 보면서 ‘로버어트 이이. 모어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봉사회에서 협회가 마련한 ‘재판 절차’를 연구함으로써 야외 봉사에서 빈번히 우리를 괴롭히는 경찰과 재판관들을 대할 준비를 갖추기 위해 노력하였다. 경찰이 와서 말을 걸 때 대답하는 방법, 시민으로서의 우리의 권리, 좋은 소식을 옹호하고 또한 결국에 유죄 판결을 받아서 공소원으로 가게 될 경우 소송을 할 수 있는 건전한 근거를 갖추기 위해 어떤 조처를 취해야 하는지 등을 봉사회에서 배웠다.”
‘레이 시이. 봅’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체포될 때부터 재판이 끝날 때까지의 과정과 사건이 처리되는 것을 봉사회에서 실연으로 보여 주었다. 회중에 있는 종들이 검사나 변호사 역할을 하였으며 어떤 ‘재판’은 몇 주일 계속되기도 하였다.”
체포되어 감금됨
협회가 마련한 법적 도움과 봉사회에서 받은 훌륭한 훈련으로 하나님의 종들이 큰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감옥에서의 호된 생활에 대해서는 여호와 만이 그의 백성을 강하게 할 수 있었다.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 4:13.
1930년 대와 1940년대의 혼란기에는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이 수백 명씩 체포되어 감금되었다. ‘호머 엘. 로저스’는 한 지방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이 직면하였던 법적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조오지아’ 주) ‘라 그레인지’ 시에서는 누구든지 가정 방문을 통하여 어떤 인쇄물이건 집 주인에게 제공하는 일을 금하는 시 조례를 만들어 냈다. 그것은 여호와의 증인들을 목표로 한 것이었으며 단지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해서만 시행되었다.” 어떻게 그가 그렇게 확실히 말할 수 있는가? 다른 모든 인쇄물은 당국의 간섭없이 ‘라 그레인지’에서 자유로이 배부된다고 그 도시의 주민들이 증언하였다.
1936년 5월 17일 ‘라 그레인지’에서 176명의 증인들이 전파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감금되었다. 그 다음날 여자들은 풀려났으나 76명의 남자들은 그 시에서 4‘마일’ 떨어져 있는 ‘트루우프 카운티 형무소’에서 14일 동안 감금되어 있었다. 그곳에 있는 일반 재소자들은 한 쇠사슬에 매어 있었으며 실제로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길에서 일할 때도 족쇄로 묶여 있었다. ‘시이. 이이. 실라웨이’에 의하면 재판을 받았을 때 증인들은 유죄판결을 받아 각각 1‘달러’의 벌금 혹은 30일 형을 받게 되었다. 사건 이송 명령서를 통해 검사가 서기에게 공소 서류에는 서명하지 말라고 명령하였기 때문에 형제들이 상소할 권리를 상실하게 되었으며 57명이 30일 형을 온전히 채우기 위해 1937년 5월 28일 형무소로 돌아가야 하였다. 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그 증인들은 수의를 입게 되었고 추운 밤에 두 사람이 담요 한장을 같이 써야 했으며 거리나 다른 곳에서 고된 노동을 하게 되었다.
이들 감금된 사람들이 받은 고통은 심했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으로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도 가졌다. ‘시이. 이이. 실라웨이’ 형제는 이렇게 기술한다. “우리가 받은 30일간의 형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우리 집단과 다른 집단, 모두 12명은 상당히 외따로 떨어져 있는 흑인 묘지에 임명되었다. 아침 나절에 장례 행렬이 정문으로 들어와 멈춰 섰고 장의사는 우리에게로 다가 왔다. 그 가족은 너무나 가난해서 교역자에게 줄 장례식 비용이 없었으므로 고인을 위해 설교나 기도를 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봉사자들인 우리 중의 한 사람이 몇 마디 해 줄 수 있지 않겠는가? 얼마의 사람들에게 죽은 자의 진정한 상태와 부활의 소망을 말해 주는 것도 일종의 특권이었다. 그들은 수의를 개의치 않았다.”
‘데레사 드레이크’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편협함을 자기가 처음 맛본 것은 1930년대 초반으로서 그때 ‘뉴우저어지’ 주 ‘버젠필드’에서 처음으로 체포되었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계속한다. “나는 ‘뉴우저어지’ 주 ‘플레인필드’에서 처음으로 지문을 찍게 되었다. 다른 28명의 자매들과 함께 하룻밤 구류된 곳이 ‘플레인필드’였다. 조그만 방에 29명이 함께 있게 되었으므로 우리는 누워 잘 수가 없었다. 결국 그들은 같은 건물에 있는 체육관으로 우리를 끌고 갔는데 거기에는 우리가 누울 수 있는 ‘매트’가 있었다. 경찰관 한 사람이 문을 열고 들여다 보면서 ‘도살장으로 갈 양들 같군’ 하고 말했던게 생각난다.”
다른 경우를 인용하면서 ‘드레이크’ 자매는 이렇게 기술한다. “우리는 ‘펄스 앰보이’에서 체포되어 오전 10시부터 오후 8시까지 구류되어 있었다. 내가 ‘러더포오드’ 형제를 만난 것은 그때였다. 그는 체포된 우리 150명을 보석시키기 위해 왔었다. 우리는 재판소에 있는 큰 방에 수용되어 있었다. 밖에서는 사람들이 우리 차에서 책과 출판물을 꺼내 재판소의 모든 잔디 위에 내어던지고 있었다. 법정 뒤에는 ‘러더포오드’ 형제를 치기 위해 6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에게 위협을 가하였으나 결코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 재판소를 떠나면서 우리는 그를 둘러쌌으며 일상 사용하던 차가 아닌 어떤 대기 중인 차로 재빨리 가버렸기 때문이다.”
‘에드나 바우어’는 ‘오하이오’ 주와 서‘버지니아’ 주의 도시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많은 벗들이 체포되었고 소방차에 실리워 유치장으로 보내지곤 했는데 그 소방차는 체포했다는 사실에 주의를 끌려고 요란하게 ‘사이렌’을 울렸다.” 많은 사람들이 즉시 감금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나이는 고려되지도 않았다. 예를 들어 ‘제임스 더불류. 베네코프’ 자매는 남‘캐롤라이나’ 주 ‘콜럼비아’에 있었던 사건을 이렇게 말한다. “그때 우리들 200명이 감금되었으며 그 중 가장 나이 어린 사람은 6주된 어린 아기였다.”
유치장 안의 상태는 더 비참하였다. ‘얼 알. 데일’은 ‘뉴우햄프셔’ 주 ‘서머스워드’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당하게 감금되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는데 그에 관해 이렇게 기술한다. “그날밤 나는 잠을 잤다. 아니 자려고 노력하였다. 유치장은 그리 깨끗한 곳이 못되었다. 밤이 되자 어떤 조그마한 벌레들이 우리 주위에 우글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싫어하였지만 그들은 나를 좋아하였다.” 1941년 ‘미주리’ 주 ‘카루서스빌’에서 좋은 소식을 전하였다는 이유로 ‘알. 제이. 어데이어’ 부부는 78일동안 감금되어 있었다. ‘어데이어’ 자매는 자기가 감금되어 있던 곳을 “토굴”이라고 묘사하였다. 감금되어 있는 동안 ‘어데이어’ 자매의 건강이 나빠졌다. 그 자매는 이런 사실을 시인한다. “78일 동안 담요 한장과 베개를 가지고 ‘콩크리트’ 바닥에서 잔다는 것은 결코 기분 좋은 일은 못되었다. 그러나 여호와께 대한 충실을 유지한다는 것이 중요하였다.”
미합중국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왕국 소식을 전한다는 이유로 투옥되는 일이 많았지만 그로 인해 그들의 입술이 잠잠해지지는 않았다. 갇혀 있었지만 그들은 계속 좋은 소식을 선포하였다. 예를 들면 감금되어 있는 동안 ‘도라 와담스’에게는 전파할 수 있는 많은 기회가 있었다. 언젠가 ‘뉴우저어지’ 주 ‘뉴와크’ 유치장에서 주인들이 석방된다는 소식이 나돌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 자매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우리가 감금되어 있던 어느날 밤 우리 주위에 있던 죄수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내일은 저 성경의 사람들이 우리를 떠나게 된다네. 이곳은 결코 이전과 같지는 않을 거야. 저 사람들은 마치 우리에게 보내진 천사들과 같단 말이야.’”
법정에 선 날들
체포되어 법정 신문이 있게 되면 여호와의 종들은 자신과 하나님께서 주신 사업을 변호할 준비를 하였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변호사를 세우지도 않았다. 예를 들어 1938년에 ‘마사추우세츠’ 주 ‘오렌지’ 회중과 연합한 ‘로랜드 이이. 콜리어’는 근처의 ‘아솔’에서 확성기를 단 차를 사용할 허가를 받았다. 그와 다른 형제는 확성기가 장치된 차에 타고 “적”이라는 녹음을 틀고 있었으며 다른 왕국 전도인들은 호별 방문 전파를 하고 있었다. ‘콜리어’ 형제도 체포되었는데 그 경우에는 호별 방문을 하지 않았는 데도 호별 방문했다는 죄목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흥미를 가지고 기다리면서 우리는 재판받을 준비를 하였다. 법정 신문을 위한 준비로 협회가 발행한 「재판 절차」를 주의깊이 연구하였다. 재판받는 날 몇 형제들이 나에게 용기를 넣어 주려고 법정에 왔었다. 나는 협회가 개술한 바 있는 정당한 법정 절차를 취하였고 심지어 경찰 서장에게 반대심문까지 할 정도였다. 법정 심문을 완전히 마친 후 모든 증거가 제시되었을 때 나는 무죄가 되었다. 신문에는 ‘오렌지 사람이 유치장에서 나와 도를 전파하다’라는 표제가 실렸다.”
여호와의 증인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백성을 변호하기 위해 열심히 일한 변호사도 있었다. 그러나 증인 변호사들이 법정에서 동료 신자들을 대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들 가운데 ‘빅토르 슈미트’가 있다. 그의 아내 ‘밀드레드’가 말한 것을 발췌하면 이러하다. “기 문제에 대하여 미합중국 대심원이 불리한 판결을 내린 후에,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 외부의 여러 지역에서는 폭동 및 체포 사태가 우리의 형제들에게 쏟아졌다. 남편이 운전을 하지 않았으므로 내가 운전하여 남편과 함께 그런 여러 곳으로가야 했다. 얼마 동안은 거의 매일 다른 곳으로 가야 했다. 그래서 나는 ‘파이오니아’들과 함께 일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 ‘빅토르’는 여호와께 대한 강한 믿음이 있었으며 그로 인해 나도 격려를 받아 같은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법정에서 우리의 형제들을 대변해야 할 그러한 도시들에 가까와지면 ‘빅토르’는 길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나를 끌고 가서 형제들을 위해서 도움을 베풀 수 있는 길을 열어 달라고 그리고 여호와의 뜻이라면 우리를 인자하게 보호해 주시고 결코 사람을 두려워하는 일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 달라고 여호와께 기도하곤 하였다. 여호와의 천사들의 강한 힘이 우리를 위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는 때가 많았다.”
미합중국 대심원으로
여호와의 증인과 관련된 여러 법정 사건들이 최종적으로 미합중국 대심원에서 심리를 받게 되었다. 그 중 하나가 ‘로벨’ 대 ‘그리핀’ 시 사건이다. ‘조오지아’ 주 ‘그리핀’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좋은 소식을 전하였다는 이유로 체포된 일이 종종 있었으나 한번은 “사전에 ‘그리핀’ 시 시장의 허가를 받지 않고는 ··· 어떠한 출판물도 ··· 배부할” 수 없다는 시조례를 범했다는 이유로 여러 사람이 체포되었다. ‘지이. 이이. 피스크’는 이렇게 설명한다. “키가 6‘피이트’를 넘는 형제들도 몇명 있었는데 관리들은 집단 대표자 한 사람을 자기들이 뽑아도 좋겠느냐고 물었다. 우리 감독자들은 순순히 응하였다. 그랬더니 그들은 몸집이 작고 호리호리한 자매를 뽑았다. 자기들 생각에는 그런 사람이면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자매(‘앨마 로벨’)는 「재판 절차」를 연구했었다. ··· 남자들 가운데서도 그 조그만 자매만큼 준비한 사람은 없었으며 그 사건이 심리되었을 때 그 자매는 재판관에게 한 시간 이상 진술하였고 훌륭한 증거를 하였다. 하지만 판사는 조금도 관심을 갖지 않았고 탁상 위에 자기 발을 올려 놓고 있었다. 자매가 자리에 앉자 판사는 자기 발을 내리고 ‘다 끝났소?’라고 물었다. 그 자매는 ‘예, 판사님’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모두에게 유죄를 선고하였다. 협회의 변호사는 즉각 그 사건들을 상소하였다.” 1938년 3월 28일 대심원은 문제가 된 그 조례 자체가 무효임을 전원 일치로 판결하였다.
1938년 4월 26일 그리스도인 증인인 ‘뉴우턴 캔트웰’은 “적”이라는 축음기 판을 들려 주고 같은 명칭의 서적을 배부하는 왕국 전파 활동을 하다가 어린 두 아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 사건은 ‘로마 가톨릭’교인 두 사람의 고발로 ‘커네티커트’ 법원에서 심리되었다. 치안 방해 및 ‘커네티커트’ 주 공공복지 위원회 사무총장의 승인 없이는 자선 사업이나 종교적인 운동에 기증하도록 권유할 수 없다는 ‘커네티커트’ 주법을 범했다는 주장이었다. ‘커네티커트’ 법정에서 유죄 판결이 내려졌는데 ‘알. 티이. 캔트웰’은 이렇게 기술한다. “협회는 그 사건을 상소하였으며 그 사건은 미합중국 대심원으로 가게 되었다. ··· 유죄 판결은 파기되었으며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적용된 바와 같이 종교적 출판물을 제공하여 판매하거나 혹은 종교 운동을 위해 기부를 받는데 있어서 허가를 요구하는 ‘커네티커트’ 주법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여호와의 백성이 거둔 또 하나의 승리였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들은 1942년 6월 8일 미합중국 대심원에서 5 대 4의 판결로 한가지 중요한 사건에서 패소하였다. 그것이 ‘존스’ 대 ‘오펠리카’ 시 사건이었다. 가두 잡지 봉사와 관련된 사건인데, 그 사건으로 인해 세금도 내지 않고 면허도 없이 “책을 판매”함으로써 ‘알라바마’ 주 ‘오펠리카’ 시조례를 범했다고 ‘로스코 존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하는 문제였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즐거운 날”
이제 1943년 5월 3일이 되었다. 그날은 가히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즐거운 날”이라고 불리워질 만하였다. 그 이유는? 그날에 13건의 소송 사건 중 12건에서 승소하였기 때문이다. ‘무르독’ 대 ‘펜실베이니아’의 면허세 사건은 두드러진 것이었다. 그 사건에 대한 미합중국 대심원의 판결로 ‘존스’ 대 ‘오펠리카’ 시의 사건에 있어서의 대심원의 입장이 번복되었다. ‘무르독’ 사건을 심리한 법정은 다음과 같이 판시하였다. “면허세가 이 활동을 탄압 혹은 억제하지 않는 한, 그것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데 의견이 일치하였다. 그렇게 하는 것은 이 세금의 성격을 무시하는 것이다. 면허세란 권리 장전에 의해 주어진 특권 행사에 대해 부과되는 정액세인 것이다. 연방 헌법이 수여한 권리 향유에 대해서 주가 세금을 부과할 수는 없다.” 그 판결은 ‘존스’ 사건과 관련해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존스’ 대 ‘오펠리카’ 사건의 판결은 금일부로 무효이다. 구속력있는 그러한 판례를 파기함으로써 우리는 출판물의 배부를 통해 자기의 종교적 신앙과 믿는 교리를 선포하는 순회 복음 전도자의 자유를 고귀하고도 합헌적인 위치로 회복시켜 줄 수 있다.” 유리한 ‘무르독’ 판결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백성과 관련된 무수한 면허세 사건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여호와의 백성의 노력은 법률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러한 점을 다음과 같이 말한 것도 당연하다. “미합중국 대심원의 유권 해석을 통해 개인적인 자유에 대하여 현재 헌법적으로 보장되고 있는 것은 1938년 봄 이전보다 훨씬 더 포괄적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그러한 확대는 ‘로벨’ 대 ‘그리핀’ 시 사건을 선두로 한 31건의 여호와의 증인들의 소송 사건(16건의 결정적 판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라 한다면 헌법은 이 특이한 집단의 이 집요한 투쟁 다시 말해서 헌신적인 행동에 얼마나 큰 은혜를 입고 있는가?”—(Minesota Law Review, 28권, 4호, 1944년 3월호, 246면.)
폭도들이 여호와의 찬양자들을 잠잠하게 하지 못하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숭배의 자유 및 복음 전파의 권리를 위해 법적 투쟁을 하고 있는 동안 야외에서 그들은 때때로 폭도들과 정면으로 마주치곤 하였다. 그러나 그런 일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런 일을 당하시지 않았는가! (누가 4:28-30; 요한 8:59; 10:31-39) 충실한 ‘스데반’은 노한 군중에게 순교당하였다.—사도 6:8-12; 7:54-8:1.
폭도들은 1939년 6월 23-25일에 개최된 세계적인 그리스도인 대회를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힐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였다. 중심 도시인 ‘뉴우요오크’ 시부터 다른 대회 개최지인 미합중국, ‘캐나다’, 영국 제도, ‘오스트레일리아’ 및 ‘하와이’의 여러 도시로 유선전선이 연결되었다.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의 “정부와 평화”라는 강연을 광고하는 중에 여호와의 종들은 ‘가톨릭’ 행동 대원들이 6월 25일의 공개 집회를 막을 계획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말썽이 일어날 것에 대비하였다. ‘블로스코 무스 카리엘로’는 이렇게 말한다. “마치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할 때 사람들에게 건설 도구와 전투 장비를 함께 공급한 바와 같이(느헤미야 4:15-22) 우리도 그렇게 무장하였다. ··· 우리 젊은이들 중 얼마는 안내인들로서 특별 지시를 받았다. 각자는 주요 강연 중 어떤 방해가 있을시 사용할 수 있는 단단한 막대기를 받았다.” 그러나 “궁지에 몰려 최후의 방어를 할 경우가 아니라면 그것을 사용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알. 디이. 캔트웰’은 부언한다.
일반적으로 그리 알려져 있지 않는 일이지만 1939년 6월 25일 바로 그 일요일 오후 ‘러더포오드’ 형제가 ‘뉴우요오크’ 시 ‘메디슨 스퀘어 가든’ 연단에 올라섰을 때 그의 건강 상태는 매우 약했었다. 곧 이어 강연이 진행되었다. 나중에 들어온 자들 중에는 1930년대의 “방송 사제”로 널리 알려졌고 수백만명이 그의 정규 방송을 들은 바 있는 ‘로마 가톨릭’ 교직자 ‘차알스 이이. 코플린’의 추종자들 약 500명이 들어 있었다. 그 강당 아래쪽은 지정석으로서 증인들로 꽉 차 있었으므로 사제들을 포함한 ‘코플린’의 추종자들은 연사 뒤에 있는 맨 윗부분을 차지할 수 밖에 없었다.
「위안」지 통신원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강당의 어느 곳에서도 담배 피우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연설이 시작된지 18분 후에 그 무리의 전면 좌측에 있던 사람이 궐련을 피워 물었다. 그러자 전면 우측에 있는 다른 사람이 또 궐련을 피웠다. 그러자 그곳에서만 전등 불이 깜박거렸다. 그리고 그 부분에서만 조소와 고함과 희롱하는 소리가 났다.” ‘에드워드브로우드’ 자매는 이렇게 말한다. “소란이 금방 대회장 전체에 퍼질 것 같아서 잔뜩 긴장해 앉아 있었다. 그러나 곧 말썽은 연사 바로 뒤에 있는 한 집단에만 국한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궁금하였다. 연단 위로 물건들이 막 던져지고 언제 ‘마이크’를 빼앗길지 모르는 상황하에서는 누구라도 연설을 계속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에스터 알렌’은 “거친 함성과 ‘히틀러 만세!’ ‘프랑코 만세!’ ‘‘러더포오드’ 녀석을 죽여라!’ 등등의 소요가 장내를 진동시켰다”고 말한다.
쇠약한 ‘러더포오드’는 그러한 폭력적인 적들에 굴복할 것인가? “연사의 목소리를 지워버리기 위해 그들이 점점 더 크게 고함을 치면 칠수록 ‘러더포오드’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고 ‘에이. 에프. 라우펠트’ 자매는 말한다. ‘알렉크 뱅글’은 이렇게 말한다. “협회장은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오늘 ‘나치스’와 ‘가톨릭’교인들이 이 집회를 파괴하려는 것을 보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으로 그렇게 할 수 없읍니다.’라고 말했다.” ‘로저 모오건’은 “그때야말로 진심에서 우러나온 박수 갈채를 보내어 연사에게 우리의 열광적인 지지를 나타낼 필요가 있는 때였다.”라고 기술하면서 이렇게 부언한다. “‘러더포오드’ 형제는 그 시간이 끝날 때까지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나중에 우리가 사람들의 가정에서 그 강연을 실은 축음기판을 틀 때마다 우리는 감격을 느끼게 되었다.”
‘시이. 에이치. 라이언’은 이렇게 말한다. “안내인들은 그들의 임무를 잘 수행하였다. 더 심하게 날뛰던, ‘코플린’패 두 사람이 막대기로 머리를 맞아 그들 모두는 다급히 난간으로 내려뛰어 강당밖으로 빠져 나갔다. ‘코플린’패 가운데 한 사람은 ‘터반’ 같이 머리를 싸매고 있는 자기 사진이 나오자 그 다음날 일간 신문에 내서 상당히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하였다.”
세 사람의 증인 안내인들이 “폭행”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들은 1939년 10월 23, 24일 ‘뉴우요오크’ 시 형사 지방법원에서 세명의 판사(‘로마 가톨릭’교인 2명과 ‘유대’인 한명)로 구성된 재판부에 의해 재판을 받았다. 재판에서 이런 점들이 밝혀졌다. 안내인들은 난동자들을 물러가게 하기 위해 ‘메디슨 스퀘어 가든’의 난동 발생 지역으로 들어갔었다. 난동자들이 안내인들을 공격했을 때 그들은 저항하였고 과격분자들 가운데 몇 사람을 단호한 태도로 대하였다. 원고측 증인들은 모순되는 진술을 많이 늘어 놓았다. 그 법정은 세 안내인을 무죄로 방면하였을 뿐 아니라 증인 안내인들은 자기들의 권리내에서 행동하였다고 판결하였다.
세계 대전이 폭력의 불길에 부채질하다
1939년 여호와의 증인의 대회에서 폭도들의 난동이 있었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폭력의 불길은 세계적 전쟁의 바람을 타고 더욱 강력하게 되었다. 때는 1941년 후반으로 아직 미합중국이 독일, ‘이탈리아’,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기 전이었으나 국가주의 정신은 그보다 더 오래 전에 전국적으로 강화되어 있었다.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처음 몇 달 동안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해 특별한 마련을 해 주셨다. 1939년 11월 1일호 「파수대」지(영)에 “중립”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그 기사의 주제 성귀는 자기 제자들에 관련된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말씀이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 하였삽나이다.” (요한 17:16) 참으로 적절한 시기에 그리스도인 중립에 관한 성서적 연구는 앞에 놓인 어려운 시기에 대비하여 미리 여호와의 증인들이 준비할 수 있게 하였다.
왕국 농장에 대한 방화 위협
‘뉴우요오크’ 주 ‘사우드 랜싱’ 근처에 있는 왕국 농장은 협회 본부 성원들에게 과일, 채소, 고기, 우유, ‘치이즈’ 등을 공급하는 데 훌륭한 역할을 했다. ‘데이비드 애불’은 1940년 왕국 농장의 평안과 정적이 깨뜨려졌을 때 그 농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애불’ 형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기의 날’인 1940년 6월 14일 전날밤, ‘사우드 랜싱’에서 ‘위스키’를 사러 가기 위해 매일 옆을 지나가게 되는 낮익은 한 분이, 그 고장 사람들과 미국 재향군인회 회원들이 우리의 건물을 모두 불태우고 기계를 파괴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알려 주었다.” 그 사실을 보안관에게 알려 주었다.
마침내 적들이 무대에 등장하였다. 그 당시 농장의 종이었던 ‘존 보가아드’는 언젠가 그 사실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저녁 6시쯤 되자 그 패들이 한 차 두 차 모이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30대 내지 40대가 몰려들었다. 보안관과 경찰이 도착하여 그러한 자동차 운전자들을 정지시키고 면허증을 검사하기 시작하였으며 왕국 농장에 대하여 어떤 일을 저질러서도 안된다고 경고하였다. 그들은 밤늦게까지 우리 농장 앞 도로를 따라 차로 계속 왔다갔다 하였다. 그러나 경찰이 지키는 가운데 그들은 차에서 내릴 수가 없었으며 따라서 농장을 파괴하려는 그들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곳 농장에 있던 우리 모두에게 그날 밤은 참으로 긴장된 때였다. 그러나 추종자들에 대한 예수의 이런 보증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누가 21:17, 18.”
그렇게 하여 그런 공격의 위협과 미리 모의한 방화를 피할 수 있었다. 4,000명 정도는 실었을 1,000대 정도로 추산되는 차들이 협회의 왕국 농장을 파괴하려고 ‘뉴우요오크’ 주 서부의 지역에서 몰려 왔었으나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캐더린 보가아드’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의 목적은 실패하였으며 폭도였던 바로 그 사람들 중 어떤 사람은 이제 자신들이 증인이 되었으며 더 나아가 심지어 전 시간 봉사를 하게 된 사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