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그 때가 다가왔음을 알리는 “징조”
1. 우리는 천년기가 가까왔음에 대하여 왜 알기를 갈망해야 합니까?
성서의 설명에 비추어 볼 때 천년기는 산 자와 죽은 자를 포함한 온 인류가 크고 동경할 만한 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때가 다가왔다는 발표는 이해력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참으로 반가운 소식입니다. 우리는 그 때가 다가왔음을 확신할 수 있는 어떤 확실한 이유가 있는지 알기를 갈망해야 합니다. 무엇이 그러한 이유들입니까? 그 이유 몇가지를 고려하여 봅시다.
2. (ㄱ) 지금 무엇이 모이고 있는 사실 자체는 천년기가 다가왔다는 명백한 증거입니까? (ㄴ) 누가 하나님 편에서 “전쟁”을 지휘하시며, 그분은 이미 어떠한 직책을 가지고 계십니까?
2 지금까지 우리가 천년기에 대하여 고려한 바로 볼 때 우리는 천년기 직전에 전 인류 사상 가장 파괴적인 전쟁 곧 ‘아마겟돈’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큰 날에 일어날 전쟁”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읍니다. 우리는 정치적 통치자들 즉 “온 세계의 왕들”이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세력의 인도를 받아 그 최대의 전쟁으로 모아지고 있는 것을 지금 볼 수 있읍니다. 이 사실 자체는 그 전쟁 후에 있게 될 대망의 천년기가 또한 다가왔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계시 16:13-16, 새번역) 그 전쟁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편에서 적극적인 행동을 하실 분은 하나님의 천군의 지휘자, 신실하고 참된 자라고 불리우는 분,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이 ‘아마겟돈’ 전쟁이 시작하기 전에 이미 이 천적 지휘자는 왕이십니다. 그분은 “머리에 많은 관을 썼고” “그의 옷과 넓적다리에는 왕들의 왕, 주들의 주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분입니다. (계시 19:11-16, 새번역) 그러므로 그분은 144,000명의 그리스도인 공동 후사들과 함께 그 천년간의 통치를 시작하기 전에 이미 왕으로 통치하고 계십니다.—계시 12:5; 14:1-4; 20:4-6.
3. 그리스도의 천년기 이전 통치의 시작과 관련하여 두루마리의 처음 두 봉인이 떼어질 때 ‘요한’은 무엇을 보았읍니까 (계시 6:1-4)?
3 이 왕들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년기 이전에 통치를 시작하실 일에 대하여는, 현 이십세기의 세계 상태에 대한 그 앞의 묘사에서 언급되었읍니다. 이러한 묘사가 계시록 6장에 나오는데, 그 가운데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곱 봉인을 떼기 시작하실 때 그가 본 것을 알리고 있읍니다. 그 봉인은 천적 보좌에 앉아 계시는 하나님의 손에서 그가 받은 “두루마리”를 밀봉한 것이었읍니다.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린 양이 그 일곱 봉인 중의 하나를 떼는 것을 내가 보았읍니다. 그 때에 나는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우뢰 같은 소리로 ‘오라’고 하는 말을 들었읍니다. 또 내가 보니 흰 말이 있었고 그 위에 탄 자가 활을 가지고 있었읍니다. 그에게는 면류관이 주어져 있었는데 그는 이기며 나아갔고 또 이기려고 나아갔읍니다. 어린 양이 둘째 봉인을 떼었을 때에 나는 둘째 생물이 ‘오라’하는 말을 들었읍니다. 그러자 불같은 붉은 말이 나왔는데 그 위에 탄 자에게는 사람들이 서로 죽이도록 땅 위에서 평화를 걷어 버리는 권한이 허락되었고 또 다른 검이 그에게 주어졌읍니다.”—계시 6:1-4, 새번역.
4, 5. (ㄱ) 불같이 붉은 말을 탄 자는 무엇을 상징하였읍니까? (ㄴ) 그 때에 완전히 정복하기 위하여 누가 나아갔으며, 이것은 시편 2:1-6이 성취되도록 어떻게 무대를 조성하였읍니까?
4 여기에서 우리는 기원 1914년에 돌발한 최초의 세계 대전을 묘사하는 상징에 접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대전은 6년간 지상에서 평화를 더 걷어버린 두 번째 세계 대전의 선구에 불과하였읍니다. 그 최초의 세계 대전이 의로운 전사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적 면류관을 받고 지상의 적들과 싸우고 승리하고 그들을 완전히 정복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대항하여 나아가실 정해진 때였읍니다. 이것은 그분이 후에 ‘아마겟돈’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은 큰 날에 일어날 전쟁”시에 하나님의 편에서 싸우실 것을 의미하였읍니다. 최초의 세계 대전시에 예수께서 하늘에서 왕으로 관을 쓰신 때에 시편 2편의 이러한 말씀이 성취될 무대가 조성되었읍니다.
5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받은 자[그의 그리스도, 희랍어 칠십인역]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그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시 2:1-6; 또한 사도 4:24-30.
6. 양차 세계 대전과 국제 연합은 ‘시온’ 산에 앉으신 여호와의 왕을 권좌에서 몰아냈읍니까? ‘아마겟돈’에서 있을 전쟁의 결과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증할 것입니까?
6 기원 1914-1918년의 그 첫 세계 대전 이후로 나라들을 혼란시킨 모든 소동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왕, 자기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왕국 정부의 천적 소재지인 ‘시온’에 앉히셨읍니다. (계시 14:1; 히브리 12:22) 제 1차 세계 대전도, 제 2차 세계 대전도, 국제 연합 기구도 이 메시야 왕을 권좌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하지 못하였읍니다. ‘아마겟돈’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큰 날에 일어날 전쟁”은 천적 보좌에 앉으신 그분의 지위를 더욱 굳게 할 것이며 그분은 그 보좌에서 충성스러운 144,000명의 공동 후사들과 함께 천년기 통치를 시작하실 것입니다. (계시 19:19-21) 이러한 중요한 이유 때문에 인류에게 활력을 주는 축복을 수반할 약속된 천년기는 우리에게 확실합니다. 그 때는 다가왔읍니다!
7. 왜 우리는 고대의 그 “악하고 음란 세대”와 같지 않으며, 그러나 우리가 고려하도록 예수께서 말씀하신 “징조”는 어디에 기록되어 있읍니까?
7 이상에 제시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천년기가 참으로 다가왔으며, 더우기, 우리 세대 내에 시작할 것임을 확신하기 전에 “징조”를 요구할 회의적인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우리는 십구 세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임을 확신할 수 있도록 예수로부터 징조를 구한 종교적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그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아닙니다. (마태 12:38, 39) 그러나, “징조”에 관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설명이 분명히 있으며, 예수께서는 우리가 살펴 볼 수 있도록 그것을 말씀하셨으므로, 그것을 우리가 고려하기를 거절한다면 우리는 심각한 무지 속에 머물러 있게 될 것입니다. 그 설명이 마태복음 24, 25장, 마가복음 13장, 그리고 누가복음 21장에 나와 있읍니다. 징조에 관한 설명은 사도들의 요청에 따라 그들에게 주어진 것인데, 그것은 그분이 메시야 혹은 그리스도임을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약속된 어떤 미래의 사건들이 가까왔으며, 성취될 때가 임박하였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읍니다. 그것이 주어진 때는 기원 33년 봄 ‘니산’월 11일 즉 그분이 횡사당하기 3일 전이었읍니다.
“징조”에 관한 예언
8. 예수께서는 자기가 떠나갈 것을 어떻게 암시하셨으며, 그분이 돌아오실 때에 어떠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까?
8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듣고 매우 무서워한 일 즉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에 대하여 막 예언하셨읍니다. 그 때 그분은 종교적 반대자들에게 이렇게 선언하셨읍니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마태 23:38, 39) 이것은 그분이 떠나가신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읍니다. 그분이 돌아오시면 시편 118:26의 예언적 말씀에 따라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하고 말할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9.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숭배자들이 자기의 돌아옴을 환영하는 그러한 말을 하지 않을 것임을 어떻게 지적하셨읍니까?
9 여호와의 숭배자들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을 그러한 예언적 말로 환영할 곳이 ‘예루살렘’의 물질적 성전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그분의 불길한 말씀에 뒤따르는 이러한 기록에 의하면 바로 그 점을 예수께서는 매우 분명히 하셨읍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마태 24:1, 2.
10. 성전이 내려다 보이는 감람산에서 네명의 사도들은 예수께 어떠한 질문을 하였으며, 여러 가지 번역판들은 그들의 질문을 어떻게 번역하였읍니까?
10 열두 사도는 그들이 감람산에 가기 전까지는 이러한 무서운 예언에 관하여 질문하지 않았읍니다. 감람산에서는 ‘예루살렘’이 내려다 보였고 ‘헤롯’ 대왕이 수리한 그 성전이 잘 보였읍니다. 시야에 그러한 것들이 잘 들어왔기 때문에 네명의 사도는 감동을 받고 중대한 질문을 한 것 같으며 그 질문은 또한 다른 사도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읍니다. 기록은 이러합니다.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임재, 신세; ‘파로우시아’, 희랍어]과 세상 끝[사물의 제도의 결말, 신세]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까?” (마태 24:3) 「‘영’의 직역 성서」는 사도들의 말을 희랍어에서 이렇게 번역하였읍니다.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이러한 것들이 언제 있을 것입니까? 그리고 당신의 임재와, 시대의 온전한 끝의 징조가 무엇입니까?” ‘로더햄’의 「강조된 성서」에도 비슷하게 번역되어 있읍니다. “이러한 일들이 언제 있을 것이며, 당신의 임재와 시대의 결말의 징조가 무엇일 것인지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뉴우캄’ 대주교의 「새번역」(개정판)에는 이렇게 되어 있읍니다. “당신의 출현과 시대의 끝의 징조는 무엇일 것입니까?”—1808년판.
11. (ㄱ)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은 언제 있었으며, 그러나 그 때에 또한 다른 무슨 일이 있지 않았읍니까? (ㄴ) 그러므로 우리가 역사에 대하여 어떻게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입니까?
11 오늘날 우리는 ‘예루살렘’의 문자적인 성전의 멸망이 언제 발생하였었는지를 알고 있읍니다. 그것은 천구백년 전인 기원 70년 여름이었는데, 그 때에 ‘티투스’ 장군이 이끄는 ‘로마’ 군단이 ‘예루살렘’ 시 전체를 파괴하였읍니다. (누가 21:20-24) 그러나 다른 일들, 즉 제자들의 질문에 포함된 그리스도의 ‘파로우시아’(임재(臨在), 출현)와 시대 혹은 사물의 제도(혹은 상태a)의 결말의 “징조”에 대하여는 어떠합니까? ‘유대’인 사물의 상태 혹은 제도의 온전한 끝 혹은 결말이 기원 70년에 이른 것은 사실이지만 단순히 예언적 본 혹은 모형이었던 ‘유대’인 제도의 실체인 더 큰 사물의 제도의 결말은 이르지 않았읍니다.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 혹은 출현인 ‘파로우시아’는 그 해에 있지 않았읍니다. 우리는 기원 20세기에 살고 있으므로 예언된 “징조”가 우리 세대에 나타났는지의 여부를 알아내기 위하여 현 이십 세기의 역사를 조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12. ‘스데반’이 그리스도의 첫 번째 오심에 대하여 말한 바에 비추어 볼 때에 왜 우리는 사도들이 예수의 “오심” 혹은 “강림”에 대하여 질문하였는지의 여부를 질문해 보아야 합니까?
12 우리는 제자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파로우시아’에 관하여 질문하였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그의 “오심”에 관하여 즉 일부 사람들이 말하는 그의 “강림”에 대하여 질문한 것입니까? 이러한 질문은 제기할 가치가 있읍니다. 왜냐 하면 그리스도인 순교자 ‘스데반’은 주 예수의 첫 번 째 “오심”에 대하여 말하면서 ‘예루살렘’의 ‘유대’인 ‘산헤드린’에서 이렇게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 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엘레우시스’, 희랍어]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었느니라].” (사도 7:52) 그리스도의 첫 번 째 오심에 대하여 말할 때에 ‘스데반’은 ‘파로우시아’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희랍어 ‘엘레우시스’를 사용하였음에 유의합시다. 이 두 개의 희랍어는 어형과 어원이 다를 뿐 아니라 의미도 다릅니다.
13. 어원에 의하면 ‘파로우시아’라는 단어는 문자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며, 그러나 희랍어의 권위자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까?
13 ‘파로우시아’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곁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왜냐 하면 그것은 ‘파라’(“곁”)라는 희랍어 전치사와 ‘오우시아’(“있음”)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입니다. ‘리델’과 ‘스코트’ 공편 「희영 사전」 제 2권 1343면 2단에서 ‘파로우시아’의 첫째 정의를 “임재”(“Presence”)라고 하였고, 그 단어의 둘째 정의는 도착이라고 말한 다음, 이렇게 부언합니다. “특히, 왕가에 속한 혹은 관직에 있는 명사의 방문.” 이와 일치하게, 「신약 성서 신학 사전」 제5권(‘게르하르트 프리드리히’ 저)은 “일반적인 의미”로 “임재”(“Presence”)라는 말을 게재하였읍니다. (859면) 다음에 그 사전은 ‘헬레니즘’ 시대의 희랍어의 “전문적 어법”으로 “1. 통치자의 방문”을 내세웠읍니다. 865면에서 동 사전은 “신약에서 ‘파레이미’(동사)와 ‘파로우시아’의 전문적 용법”에 관하여 이렇게 설명하였읍니다. “신약에서, 그러한 말들이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지적하는 데 결코 사용되지 않았으며, 파로우시아는 결코 돌아오심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파로우시아’에 한가지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사상은 후대의 교회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14. (ㄱ) ‘헬레니즘’ 시대의 희랍어의 전문적 용법에 의하면, “임재” 대신에 어떠한 말이 사용될 것입니까? (ㄴ) 어떠한 번역판들에는 ‘파로우시아’가 시종 일관 “임재”(presence)라고 번역되어 있으며, 빌립보 2:12에는 어떠한 대조가 있읍니까?
14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들은 그분의 “도착”에 대해서가 아니라 도착 후에 대하여 질문한 것이었읍니다. 그들의 질문은 그분의 “임재”에 관한 것이었읍니다. 그리고 “임재”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헬레니즘’ 시대의 희랍어의 “전문적 어법”에 따르면 제자들이 예수께 이렇게 질문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읍니다. “무엇이 당신의 [왕실에 속한 명사로서의 방문]과 사물의 제도의 결말의 징조가 될 것입니까?” “방문”에는 “도착” 이상의 뜻이 내포되어 있읍니다. 그것은 “임재”라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소위 신약에서 ‘파로우시아’라는 희랍어는 스물 네번 나오며 그 단어가 나올 때마다 “임재”(Presence)라고 번역한 것은 「신세계역 성경」을 비롯하여, 그외에도 1862년 발행 「‘영’의 직역 성서」, 기원 1857-1863년 발행 ‘윌슨’의 「엠페틱 다이어글롯역」, 1897년 발행 ‘로더햄’의 「강조된 성서」 등입니다. 빌립보 2:12에서 “임재” 즉 ‘같이 있음’과 ‘떠나 있음’이 매우 적절히 대조되어 있음을 유의하게 되는데, 거기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언제나 순종해 오던 그대로 내가 같이 있을 때 뿐만 아니라 떠나 있는 지금도 더욱 순종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시오.” (새번역)
열 처녀의 비유
15. 예수께서 예언하신 “징조”의 여러 가지 면을 고려 할 때에 ‘파로우시아’를 어떻게 번역할 수 밖에 없으며, 그 예로 어떠한 비유가 있읍니까?
15 ‘파로우시아’와 사물의 제도의 결말의 “징조”에 대한 예수의 예언의 여러 가지 면을 고려할 때에 ‘파로우시아’의 의미는 “임재”일 수 밖에 없읍니다. 예를 들면, 일반적으로 슬기로운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의 비유라고 불리우는 예언의 부분을 고려하여 봅시다. 예수께서는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과 “악한 종”에 관하여 예언하신 직후에 자기의 ‘파로우시아’와 관련한 또 다른 면에 대하여 예언하셨읍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있는지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느니라].”—마태 25:1-4; 24:45-51.
16. 비유의 서론에 의하면 그 여자들은 어떠한 의미로 “처녀”입니까?
16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이 비유가 한 반열의 사람들을 내포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 성취는 개개인의 생사에 적용되는 것이 아님에 유의해야 합니다. 관련된 사람들은 “천국”을 대표하기 때문에 특별한 의미에서 “처녀”입니다. 왜냐 하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그 때에 천국은 마치 ··· [무엇과 같은가?] 열 처녀와 같”기 때문입니다. 이 왕국은 예수께서 이보다 조금 앞서 예언하신 가운데 언급하신 그 왕국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이 왕국의 좋은 소식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사람이 거주하는 온 땅에 전파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끝이 올 것입니다.”—마태 24:14, 신세.
17. (ㄱ) 열명의 “처녀”는 누구를 상징합니까? (ㄴ) 비유는 언제 성취되기 시작하였으며, 왜 그 때부터 성취되었읍니까?
17 “열”이라는 수자는 성경에서 지적인 사물에 대한 완전함을 나타내는 수자이므로, 열명의 “처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을 상속할 대열에 있는 혹은 그 대열에 있다고 공언하는 그리스도인 전부를 상징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적 비유는 언제 성취되기 시작하였읍니까? 기원 33년 ‘시완’월 6일 일요일 오순절입니다. 어떻게 그러합니까? 왜냐 하면 그 때에 처녀 반열이 존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의 다락방에 모여 있던 예수 그리스도의 충실한 제자들이 그 날 성령으로 침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에 의하여 그분의 영적 아들로 출생하여 ‘하나님의 후사’ 및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가 될 입장에 있게 되었읍니다. (로마 8:17) 그러나 성서에서 후사들이란 일반적으로 아들들입니다. 그런데, 왜 비유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영으로 출생한 회중의 모든 성원들이 결혼식 날 밤에 신랑을 맞으러 나가는 처녀 즉 여자로 상징되었읍니까? 그리고 이 “신랑”은 누구입니까?
18. 혼사와 관련하여 침례자 ‘요한’은 자신과 예수를 누구에게 비하였으며, ‘요한’은 자기의 제자들을 누구에게 인도하였읍니까?
18 우선, 이 “신랑”은 부활되고 영화롭게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침례자 ‘요한’은 그러한 관점에서 그에 관하여 말하였으며 따라서 자신을 “신랑의 친구”에 비겼읍니다. 그 당시 “신랑의 친구”는 일반적으로 신랑 신부의 결혼을 주선하는 사람이었읍니다. 약혼한 두 사람이 결혼하는 날 밤에는 신랑의 친구에게보다 신랑에게 관심이 집중되었읍니다. 그러므로 침례자 ‘요한’은 그들의 비유적인 “신랑”인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대비시키고 있던 자기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분보다 앞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다’라고 내가 전에 한 말을 증거할 사람은 바로 너희이다. 신부를 차지하는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는 옆에 서서 신랑의 음성을 기다리다가 신랑의 목소리를 듣고 크게 기뻐한다. 나는 지금 그런 기쁨으로 가득차 있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요한 3:28-30, 새번역) 그러므로 ‘요한’이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께 인도한 것은 적절한 일이었읍니다.
19, 20. (ㄱ) 예수께서는 비유와 「계시록」 가운데서 자신을 어떻게 신랑에 비하였읍니까? (ㄴ) 따라서 새 ‘예루살렘’은 무엇이라고 불리웁니까?
19 한편, 예수께서는 자기가 말씀하신 비유 중에서 자신을 신랑에 비하셨읍니다. 이것은 왕이 아들을 위하여 준비한 “결혼 잔치”의 비유였고 이 아들은 위대하신 영원한 왕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을 대표하였읍니다. (마태 22:1-14, 새번역)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사도 ‘요한’에게 전달한 계시 가운데서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는 자기의 제자들의 회중과 결혼하는 신랑으로 비유되어 있읍니다. 인용하면 이러합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라. 어린 양의 결혼 날이 이르렀다. 그의 신부는 몸단장을 끝내고 빛나고 깨끗한 고운 베옷을 입었다. 이 고운 베옷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이다’ ··· ‘어린 양의 결혼 잔치에 초대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고 기록하라.” 또한 사도 ‘요한’은 자기에게 와서 말한 천사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20 “일곱 천사 중의 하나가 내게 와서 말했읍니다. ‘오라, 어린 양의 아내인 신부를 네게 보여 주겠다.’ 그리고 그는 성령으로 나를 이끌어 크고 높은 산위로 데리고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을 보여 주었읍니다. 그 도시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둘려 있었읍니다.”—계시 19:7-9; 21:9-11, 새번역.
21. 에베소 5:23-27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회중과의 관계를 무엇에 비하였읍니까?
21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공동 후사 144,000명의 회중과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비하였읍니다. 그는 이렇게 기술하였읍니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찌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에베소 5:23-27.
22. 결혼은 어디에서 있으며, 왜 예수의 비유에는 신부에 대한 언급이 없읍니까?
22 물론, 신랑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신부” 회중과의 결혼은 하늘에서 있게 됩니다. 하늘에서 그들은 천적 아버지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으로 연합될 것입니다. 그러나 열 처녀의 비유 가운데에는 신부에 관한 언급이 없다는 점에 유의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생각의 어수선함을 피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신부”가 열 처녀 가운데서 뽑히기 때문에, 즉 선택되기 때문입니다. 선택된 “처녀들”은 “어린 양의 결혼 잔치에 초대를 받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계시 19:9, 새번역) 이와 일치하게, 예수의 비유는 자격이 있는 “처녀들”이 결혼 잔치가 베풀어지는 방으로 통하는 문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읍니다. 그들이 어떻게 자격이 있는지를 비유는 설명합니다.
23. 그리스도의 회중 성원들이 “처녀들”로 비유된 사실은 그들에게 어떠한 요구 조건을 부과합니까?
23 그리스도의 신부 회중의 성원들은 그들이 동정을 지킨 신랑과 약혼하였다는 이유 외에 다른 이유로도 “처녀들”로 비유되어 있읍니다. 그들은 또 다른 영적 의미로서 “처녀들”입니다. 처녀는 깨끗하고 순결하고 성적으로 접촉된 바 없듯이, 그리스도인 회중의 이들 충실한 성원들은 이 세상의 종교적 정치적 조직과 어떠한 관련도 가지지 않고 이 세상과 분리된 면에서 순수하고 깨끗합니다. 그들은 교회와 국가의 결합에 가담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 말려들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영적 처녀성을 유지합니다. (디모데 후 2:3, 4) 이것이 바로, 영적 ‘시온’ 산에 하나님의 어린 양과 함께 서 있는 것으로 나타난 144,000명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의 의미입니다. “이 사람들은 여자[종교적인 음녀 큰 ‘바벨론’과 그의 딸들과 같은]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사실, 그들은 처녀들이다, 신세]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니라].”—계시 14:4; 17:3-5.
24. 야고보 1:26, 27은 처녀로 비유된 자들에게 요구된 깨끗함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24 요구된 깨끗함에 대하여 제자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숭배 형식, 신세]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숭배 방식]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야고보 1:26, 27.
“신랑”을 맞으러 나감
25. 기원 33년 오순절에 그리스도의 회중은 어떻게 하나님의 관점에서 순결하고 더럽혀지지 않은 종교로 출발하였으며, 그들에게는 이에 대한 어떠한 증거가 있었읍니까?
25 기원 33년 오순절날 ‘예루살렘’에서 기다리고 있던 예수 그리스도의 충실한 제자들에게 성령의 침례가 베풀어졌는데, 그때에 그리스도인 회중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숭배의 형태로 출발하였읍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 넘겨 형주에 못박게 한 종교 조직으로부터 분리된, 영적 의미의 처녀 반열이었읍니다. (사도 2:1-42) 그들은 메시야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열두 사도의 가르침으로 출발하여, 잘못 안 조상들로부터 전해 내려온 비성경적 종교 전통에 몰두하던 “패역한 세대”로부터 떠나 있었읍니다. (사도 2:40; 갈라디아 1:13-17; 마태 15:1-9) 성령의 침례와 방언의 선물은 그들이 참 종교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알고 있다는 증거였읍니다. 이제 그들은 그 면에서 “처녀”로 머물러 있어야 하였읍니다.
26, 27. (ㄱ) 영적인 면으로, 그리스도인 회중은 기원 33년 오순절에 누구와 약혼하였읍니까? (ㄴ) ‘바울’은 “신랑의 친구”와 같이, 고린도 후 11:2-5에서 ‘고린도’인들에게 어떻게 말하였읍니까?
26 그리스도인 회중이 천적 신랑 예수 그리스도와 약혼한 것은 그 날(기원 33년 ‘시완’월 6일)이었읍니다. ‘예루살렘’의 120명으로 구성된 그 원 회중에 그 후에 부가된 사람들 모두는 그 약혼한 반열의 일부가 되었으며 그들은 “처녀”로 머물러 있어야 하였읍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 사실을 지적하여,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의 약혼을 파하고 거짓 그리스도와 결혼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경고하였읍니다. 사도 ‘바울’은 “신랑의 친구”와 비슷한 입장에서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27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내가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줄 생각하노라.”—고린도 후 11:2-5.
28. 예수와 천사들은 예수께서 ‘유대’인 신랑과 같이 와서 그들을 데려가실 것임을 제자들에게 어떻게 말하였읍니까?
28 그들이 동정을 지킨 신랑과 하늘에서 결혼하는 것은 미확정적인 장래, 즉 기원 33년 오순절 그 약혼일로부터 상당히 먼 후일에 있을 일이었읍니다. 그 보다 52일 전, 즉 예수께서 불충실한 사도 ‘가룟 유다’에게 배반당하시던 밤에 예수께서는 그의 충실한 사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한 14:2-4) 그로부터 42일 후에 여러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감람산에서 승천하여 하늘로 올라가실 때에 두 천사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사도 1:9-11) 그러므로 제자들은 이전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확약하신 바와 같이, 떠나가신 예수께서 결혼식날 밤의 ‘유대’인 신랑과 같이 와서 그들을 그분의 천적 아버지의 집으로 데려가실 것을 알았읍니다.—요한 14:1-3.
29. (ㄱ) “처녀” 반열은 언제 신랑을 맞으러 출발하였읍니까? (ㄴ) 이제 어떠한 질문이 생기며, 두 종류의 처녀들의 수가 같은 사실은 무엇을 나타냅니까?
29 결혼 행사에 관한 그러한 전망을 가지고, 약혼한 처녀 반열은 신랑을 맞이하고 환영하고 그와 함께 기뻐하기 위하여 나갔읍니다. 그들은 항상 깨어 있어야 하였읍니다.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태 25:13) 기원 33년 오순절날 출발한 사람들과 후에 그들과 연합한 수천명 가운데서 얼마나 되는 사람들이 비유 중의 “슬기있는” 처녀들과 같고 얼마나 되는 사람들이 “미련한” 혹은 슬기롭지 못한 처녀들과 같을 것입니까? 비유는 슬기있는 자들의 수와 미련한 자들의 수가 같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그것은 실제로 출발한 모든 사람들에게 같은 기회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며, 또한 한 종류의 사람들이 다른 종류의 사람들보다 많을 것임을 나타내려고 하지 않기 위한 것이었읍니다. 그 점은 미정에 붙여두었읍니다. 그러나 비유는 “처녀”로 출발하는 모두가 “어린 양의 결혼 잔치”에 들어가 즐기기에 합당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예언하였읍니다.—누가 12:35-38.
30. (ㄱ) 슬기있는 처녀와 미련한 처녀들을 무엇이 구별시켜 주었읍니까? (ㄴ) 모두는 불켜진 등을 가지고 출발하였읍니까? 그러므로 이 점에서 중요한 문제는 무엇이었읍니까?
30 그러면 슬기있은 혹은 분별있는 처녀와 미련한 혹은 무분별한 처녀를 구별시켜 준 것은 무엇이었읍니까? 그것은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 갔”다는 점입니다. (마태 25:3, 4) 그러나 그들 모두가 환영 행렬 끝까지 그들이 불켜진 등을 가지고 있는 것이 그들의 신분 증명이 되며 그들이 결혼 잔치에 들어가기에 합당함을 나타내는 증거가 될 것임을 알고 있었읍니다. 이 때문에 결혼 행렬이 신랑의 집에 이를 때까지 등불이 켜져 있게 할 만한 기름이 필요하였읍니다. 비유의 성취에서 기름은 무엇을 상징하였읍니까? 그들은 도착한다는 발표가 있기 전에 신랑을 맞으러 나갔으며, 그들이 출발할 때에 그들의 등은 불이 켜져 있었읍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그 때에는 그들의 등에 기름이 있었읍니다. 그러나 결혼 행렬이 신랑의 집에 들어갈 때까지 그들의 등불을 유지시킬 만한 기름이 있었읍니까?
31, 32. (ㄱ) 비유의 목적은 그들 상징적 “처녀들”에 관하여 무엇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읍니까? (ㄴ) ‘바울’이 빌립보 3:20, 21에서 표현하였듯이, 그들은 어떠한 기다리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까?
31 기름은 빛을 내는 액체였읍니다. 기름이 없으면 등에 있는 심지는 한결같고 계속적인 빛을 발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이 결혼 잔치에 불켜진 등을 가지고 가는 것은 무엇을 상징하였읍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기 위하여 우리는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목적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목적은 천적 결혼식에 참석하고자 원하는 사람들이 특정한 신분, 특정한 성품을 지녀야 할 것이며, 결혼 행렬이 언제 시작하여 마침내 “신부”를 위하여 신랑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든지 않든지 간에 그들이 이것을 끝까지 유지해야 할 것임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읍니다. 우선 “천국” 반열은 지상, 이 어두운 세상 가운데 있는 동안 영적인 면으로 “처녀”로 머물러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희망을 천적 신랑에 고정시켰고 이러한 태도로 인하여 그들은 불결한 세상에 자신을 더럽혀지지 않게 하였읍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야 합니다. (계시 14:4) 그들은 이렇게 말한 사도 ‘바울’과 같아야 합니다.
32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립보 3:20, 21.
33. (ㄱ) 그들은 이 영적 처녀성을 얼마 동안이나 유지해야 하며, 무엇에 합당함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렇게 해야 합니까? (ㄴ) 예수께서는 그들이 이 합당한 상태를 반영하는 것에 관하여 어떻게 말씀하셨읍니까?
33 그러므로 그들이 영적인 처녀성을 유지하는 것은 천적 신랑이 그들을 “신부”로 받아들이기에 합당함을 증명하려는 그들의 염원과 결의 때문입니다. 그들의 일상 생활은 현 인류 세상의 어두움 가운데서 이것을 반영해야 합니다.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기원 31년에 산상 수훈 가운데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 5:14-16.
34. 빌립보 2:14-16에 있는 ‘바울’의 말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빛을 내야 하였읍니까?
34 사도 ‘바울’은 또한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모든 일을 불평과 시비없이 하시오. 여러분은 흠잡힐 데 없는 순진한 사람이 되어 이 구부러지고 비뚤어진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로 생명의 말씀을 굳게 잡아 세상에서 빛으로 나타나시오. 그리하면 내가 달음질한 것과 수고한 것이 헛되지 아니하여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것이 있게 될 것입니다.”—빌립보 2:14-16, 새번역.
35. 그러면, 처녀들이 등을 들고 있는 것은 무엇을 상징하며 무엇을 기대하고 그렇게 합니까?
35 “천국” 반열이 “세상의 빛”으로서 빛을 발하기 위하여는 천적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착한 행실”을 해야 합니다. 즉 그들은 모든 일을 불평과 시비없이 해야 하고 그리스도인 생활에 관한한 흠잡힐 데 없고 순진한 상태를 유지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흠없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들은 신랑이 와서 그들을 그의 천적 아버지의 집으로 데려갈 것을 기대하고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들이 이 모든 일을 하는 것이, 처녀들이 불켜진 등을 들고 있는 것으로 상징되었읍니다. 그것은 세상의 어두운 밤에 신랑을 기쁘게 할 것입니다.
상징적 기름과 담는 그릇
36. 빛을 내는 액체인 “기름”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36 그러면 빛을 내는 액체인 기름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그것은 “천국” 반열이 어두운 세상에서 계속 빛을 내게 해 주는 무엇인가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그것은 그들이 “굳게 잡”아야 할 “생명의 말씀”을 상징할 것입니다. 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읍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 119:105) “주의 말씀을 열므로 우둔한 자에게 비취어 깨닫게 하나이다.” (시 119:130) “기름”이 상징하는 것 가운데에는 또한 하나님의 성령이 포함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거룩한 보이지 않는 활동력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도록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요한 16:13) 이 성령은 또한 그리스도인에게 작용하여 열매 즉, 사랑, 즐거움, 평화, 오래 참음, 친절, 착함, 믿음, 온유, 자제와 같은 영의 열매를 맺습니다. (갈라디아 5:22, 23, 신세) 그러한 영적 “기름”은 빛을 내는 힘이 있읍니다.
37. 처녀들이 그들의 “그릇”에 기름을 가진 것은 무엇을 상징하며, 왜 그렇습니까?
37 비유 가운데서, 처녀들은 기름을 그릇에, 그들이 들고 있는 등에 기름을 부을 수 있는 그릇에 담고 있어야 하였읍니다. 그들은 기름을 마시고 다음에 필요에 따라 등에 토해넣어 불이 꺼지지 않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몸을 “그릇”이 되게 할 수 없었읍니다. 그러나, 기름으로 채운 “그릇”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물론 그들 개인의 몸을 그릇으로 삼아 그 속에 기름을 넣고 있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공급할 기름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읍니다. 그러므로 “천국” 반열은 확실히, 그 반열 내에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성령을 소유, 곧 비축하고 있읍니다. 그러므로, 적절하게도, 비유 가운데서 “그릇”은, 상징적 “기름”을 가진 자들로서의 “처녀” 반열의 성원들을 뜻합니다. 확실히 그들은 신랑을 맞으러 나가 행렬에 가담하기 위하여 그러한 “기름”을 충분히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38. 그러면 처녀들이 가진 등은 무엇을 상징하며, 어떠한 면으로 빛을 발합니까?
38 비유 가운데서, 열 처녀는 밤에 주위를 밝히기 위하여 등을 사용하였읍니다. 그러면 오늘날 그 비유의 성취에서 그 등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기름 “그릇”과 동일한 것을 상징합니다. 왜냐 하면 고대의 등에는 기름 “그릇”처럼 빛을 내는 기름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국 반열”의 성원들 자신이 상징적 등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기름을 배불리 마셨다가 자신의 몸 전체에 뿜고 불을 질러 신랑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는 순교자들과 같이 행렬 도로에 늘어선 “살아있는 햇불”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 않고, 그들은 계몽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성령으로 충만해 있으며, 따라서 영광스러운 천적 신랑을 위하여 영적으로 빛을 발합니다. 영적 특질로 인하여 그들 자신은 “세상에서 빛으로 나타”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영의 영향을 받아 빛을 발하는 생활을 하기 때문에 그분께 영광을 돌립니다.
39. (ㄱ) “처녀들”은 그들이 신랑을 위하여 얼마 동안이나 기다려야 할 것인지를 왜 알지 못하였읍니까? (ㄴ) 그러므로 슬기있는 처녀들은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함을 깨달았읍니까?
39 신랑이 신부를 맞은 집을 밤 어느 시간에 떠나 결혼 생활을 위한 자기 집으로 행렬을 인도할지가 정하여져 있지 않으므로 비유 가운데 처녀들은 신랑이 나타날 때까지 그들이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정확히 알지 못하였읍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등을 얼마 동안 켜 두어야 할 것인지를 알지 못하였읍니다. 그러므로 등에 기름을 채워야 할 뿐 아니라 그릇에 가외의 기름을 채워두는 것이 현명하였을 것입니다. “슬기있는” 혹은 분별있는 처녀들은 이것을 알고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읍니다. “미련한” 혹은 슬기없고 무분별한 처녀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면에서의 그들의 미련함은 시간이 경과하면서 분명하여졌읍니다.
40. (ㄱ) 비유의 성취에서, “슬기 있는” 처녀 반열은 어떻게 그들의 그릇에 기름을 담아가지고 갑니까? (ㄴ) 이것은 그들이 그들의 신랑과의 약혼 관계에 충실함을 증명하도록 어떻게 도와줍니까?
40 비유의 성취에서, “슬기있는” 다섯 처녀로 상징된 사람들은, 말하자면, 그들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움으로써, 곧 개인 연구에 의하여 그것을 그들의 정신과 마음에 간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토론하는 그리스도인 집회에 참석하고, 하나님의 그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로 그것을 사용함으로써 그들의 그릇에 여분의 기름을 담아가지고 갑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을 간구하고 계속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고자 노력합니다. (에베소 5:18) 이와 같이 그들이 영적 “기름”으로 충만하여 있기 때문에, 장차 어떠한 긴급 사태가 있을지라도, 그들은 인내력을 새롭게 하고 그들의 천적 신랑과의 약혼 관계에 충실하다는 증거로 “세상의 빛”이 되어 계속 빛을 발하는 데 도움을 받을 것입니다.
“신랑이 더디 오므로”
41. (ㄱ) 이방인들은 언제 처음으로 신랑을 맞으러 나간 “정결한 처녀” 반열의 일부가 되었읍니까? (ㄴ) 기원 70년에 ‘유대’인들에게 발생한 일 때문에 “처녀” 반열은 그때에 신랑을 만났읍니까?
41 기원 36년 가을에, 할례받지 않은 비‘유대’인 즉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관점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숭배 방식인 그리스도교로 개종할 수 있는 문이 열렸읍니다. 이들 믿는 이방인들은 기원 33년 오순절에 ‘유대’인 신자들이 받은 것과 같은 하나님의 성령과 성령의 선물들을 받았읍니다. (사도 10:1에서 11:18; 15:7-19) 그리하여 이들도 역시 ‘그리스도와 약혼한’ “정결한 처녀” 반열의 일부가 되었읍니다. (고린도 후 11:2) 그 때부터 그들은 “열 처녀”의 비유의 성취에 가담하였으며, 비유의 말을 빌리면, 그들은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갔읍니다. 기원 70년에 ‘예루살렘’ 시와 그 곳의 호화로운 성전은 ‘로마’ 군단에 의하여 멸망되었읍니다. 그 끔직한 멸망은 믿지 않고 그리스도를 반대한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표현이었으나 “정결한 처녀” 반열은 그들이 환영하러 나간 천적 신랑을 만나지 못하였읍니다.—누가 21:20-24; 마태 24:15-22; 마가 13:14-20.
42, 43. (ㄱ) 제 1세기 말에, 어떠한 계시가 “정결한 처녀” 반열과 그들이 가진 희망에 격려가 되었을 것이 분명하며, 그러나 그 계시는 어떻게 끝났읍니까? (ㄴ) ‘요한’은 그 후에 쓴 첫째 편지에서 이미 누구의 임재를 지적하였읍니까?
42 몇해 후, 기원 제 1세기 말인 기원 96년경에 사도 ‘요한’은 천적 신랑 예수 그리스도와 새 ‘예루살렘’으로 묘사된 그의 “신부”에 대하여 밝혀 주는 놀라운 계시를 보았읍니다. (계시 21:1에서 22:17) 이것은 돌아오는 신랑을 맞이할 희망에 고착한 “정결한 처녀” 반열에게 말할 수 없는 격려가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천적 신랑은 이러한 말로 그 계시를 끝맺었읍니다.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니라].” 그러자 연로한 사도 ‘요한’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하고 응답하고 나서, 끝으로 이렇게 부언하였읍니다.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 찌어다. 아멘.” (계시 22:20, 21) 아마 그로부터 2년 후 즉 기원 98년경에 사도 ‘요한’은 자기의 세 개의 편지 중 처음 것을 썼을 것이며, 그 가운데서 그는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43 “어린 사람들이여, 지금은 마지막 때입니다. 적그리스도가 온다는 말을 그대들이 들은대로 벌써 많은 적그리스도가 나타났읍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이 마지막 때인 것을 압니다.”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죄 가운데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하나님에게서 나신 분이 그 사람을 지켜 주시므로 악한 자가 그를 다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해 있고 온 세상은 악한 자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요한 1서 2:18; 5:18, 19, 새번역.
44. (ㄱ) 그 후 ‘요한’이 사망하자 누가 들어오는 길이 열렸읍니까? (ㄴ) 그 때까지는 “열 처녀” 반열의 불 켜진 등이 어느 정도나 비쳤을 것이며, 신랑을 만날 희망은 어떠하였읍니까?
44 연로한 ‘요한’은 세 개의 편지와 「요한 복음」이라고 알려진 예수의 생애에 대한 기록을 남긴 직후, “어린 양의 십이 사도” 중 마지막으로 사망하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사망하자, ‘요한’이 이미 경고한 바와 같이, 신랑이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적그리스도가 들어오는 문이 점차 열리기 시작하였을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후 2:7, 8) 다음에 “세상의 빛”은 거의 소멸되었읍니다. “열 처녀”로 상징된 반열의 상징적 “등”은 매우 희미한 빛을 내었읍니다. 사실 참다운 “처녀들”의 수는 매우 적어졌을 것입니다. 주 예수께서 돌아오시기를 바라는 염원보다 다른 관심사,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관심사가 단순히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의 주의를 모았을 것입니다. 상당히 오랜 기간이 경과하였지만 그분은 나타나지 않으셨읍니다.
4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잤]”다는 말이 특히, ‘콘스탄틴’ 시대까지는 어떻게 성취되었읍니까?
45 이 사실은 열 처녀의 비유 가운데서 다음과 같이 예언되어 있읍니다.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잤느니라].” (마태 25:5)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 회중이라고 공언하는 종교 단체 내에서 성원들이 신랑의 오심을 기다리다가 점점 지쳤읍니다. 사실, ‘콘스탄틴’ 대제가 소위 “개종”을 하고 그리스도교라 칭하는 당시의 종교를 ‘로마’의 국교로 삼으면서 그리스도의 돌아오심은 필요없는 것 같이 보이게 되었읍니다. 이제 그리스도교국이 확립되어 교회의 종교적 주교 중 다수가 ‘로마’ 정부와 제휴하고 종교적인 의미로 통치를 시작하였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사도들이 죽음 가운데 잠자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이들 자칭 그리스도인 주교들도 그리스도인 책임과, 인간의 철학과 전통으로부터 그리스도인 회중을 순결하게 보호할 필요성과, 하나님 앞에서의 깨끗하고 더러움이 없는 숭배 방식에 있어서 절대 순수하고 세상으로부터의 흠이 없는 상태를 유지할 필요성에 대하여 잠들어 있었읍니다.
46. (ㄱ) “열 처녀” 반열의 이 잠은 예수께서 밀과 가라지의 비유 가운데 예언하신 것과 어떻게 유사합니까? (ㄴ) 영적인 잠은 얼마 동안이나 지속될 것이었으며, 그 비유의 마지막 면은 어느 때에 성취될 것이었읍니까?
46 이 종교적 상태는 밀과 가라지의 예수의 비유로 상징된 것과 유사한 것 같습니다. 그 비유에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라].” (마태 13:24, 25) 오랜 성장기가 지난 후에야 추수기가 될 것이며, 그 때에야 비유 가운데 있는 그 “사람”이 추수하러 와서 가라지는 뽑아내고 순수한 “밀”은 모아 자기 창고에 넣으라고 명할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비유 전체를 설명하실 때에 예수께서는, 사도들이 마태복음 24:3에 기록된 질문을 할 때 사용한 것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셨읍니다. 예수께서는 “추수 때는 세상 끝[사물의 제도의 결말, 신세]”이라고 말씀하셨읍니다. (마태 13:39) 세상적 사물의 제도의 결말까지 오랜 시간이 남았으며, “열 처녀”의 비유 가운데 예언된 잠은 긴 잠이었읍니다. 처녀들에 관한 비유의 마지막 면의 성취는 “사물의 제도의 결말”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징조”의 일부가 될 것이었읍니다.
[각주]
a ‘캠벨’, ‘맥나이트’, ‘다드리지’ 공저 「흔히 신약이라고 불리우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과 복음 전도자들의 거룩한 기록」 기원 1828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