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들과 그들의 보조자들
1. 오늘날 인류에게 베풀어지고 있는 가장 위대한 공적 봉사는 무엇이며, 그 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예언적으로 무엇이라고 불리웁니까?
하나님의 영적 회복 및 복구 사업은 오늘날 인류에게 베풀어지는 가장 위대한 공적 봉사입니다. 그분께서 이 사업에서 그분의 공복(公僕)으로 사용하시는 사람들은 정치인들이 아니라, 예언적으로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들로 지칭된 사람들입니다. (이사야 61:6) 그들의 인도자와 본이 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의 으뜸가는 공복이었읍니다. 그분은 19세기 전에 지상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놀라운 복구 사업을 수행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 왜 예수와 사도들은 ‘팔레스티나’ 땅의 환경 복구에 가담하지 않았읍니까?
2 당시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공적 봉사는 그들이 하나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구역으로 삼았던 ‘팔레스티나’ 땅을 환경적으로 회복하는 사업이 아니었읍니다. 그러한 일을 한다는 것은 헛된 일이었을 것입니다. 왜냐 하면 기름부음받으신 예수께서는 자기의 사도들에게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이 ‘유대’인들에게 임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일이 과연 기원 70-73년에 ‘로마’ 군단에 의해 발생했으며, ‘유대’ 땅을 황폐시킬 것이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사해 옆에 있는 ‘마사다’ 요새는 ‘로마’인에게 무너진 마지막 ‘유대’ 요새였읍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개척하시고 그분의 사도들이 뒤를 이어 수행한 영적 복구 사업은 어떠합니까? 그 사업은 그 모든 시련기가 지나도록 계속 전진하였으며, 마침내 사도들의 사망 후에 예언된 “배교” 즉 반역이 시작되었읍니다.—데살로니가 후 2:3.
3. 이사야 61:1-4에 의하면, 상징적인 “의의 나무”는 누구이며, 그들은 어떠한 활동에 착수했읍니까?
3 ‘이사야’ 예언서 제 61장에서 영적 복구 사업은 오랫 동안 황무하고 황폐된 도시의 복구에 비유되었읍니다. 그러므로, 주권자이신 주 여호와께서 영적인 낙원에 “의의 나무”를 산출함으로써 “영광을 나타낼” 것임을 먼저 말한 후에, ‘이사야’의 예언은 이렇게 계속됩니다.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로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라.]” (이사야 61:4) 여기에 재건자들로 언급된 사람들은 앞의 세 귀절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위로를 받고 종교적 자유를 얻어 여호와의 은총과 “선의”로 회복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회복 사업에 착수하였읍니다.
4. 예수께서는 이사야 61:4의 성취를 ‘바벨론’ 포로 후 ‘유다’도에 적용시키셨읍니까? 그 예언의 성취는 얼마 동안 연장됩니까?
4 예수와 사도들이 하나님의 왕국을 전파하는 대부분의 사업을 수행한 ‘유다’도와 ‘예루살렘’은,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어 기원전 537년에 고토로 돌아온 충실한 ‘유대’인들의 남은 자에 의해 오래 전에 복구되었읍니다. 그러나 기름부음을 받으신 예수께서 이사야 61:4의 예언을 문자적인 ‘유다’ 땅에의 그러한 과거의 성취에 적용하셨읍니까? 아닙니다! 그분이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 61장 처음 두 귀절을 인용하셨을 때, 그분은 그 장의 성취가 당시 자신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지적하셨읍니다. 그분은 그것에 영적 의미가 있으며 그 백성의 선천적이고, 신체적이고 환경적인 상태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셨읍니다. 그러므로 그 예언의 성취는 현 20세기, 우리 시대에까지 연장됩니다.
5. 제 1차 세계 대전 후 여호와의 백성과 관련하여 왜 영적 회복 사업이 필요하였으며, 그것은 언제 시작되었읍니까?
5 1914-1918년의 제 1차 세계 대전은 여호와의 헌신하고 침례받은 종들의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에게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읍니다. 그들의 지적 조직은 여러 면에서 마비되었읍니다. 그 최초의 전면 전쟁이 종식되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의 봉사와 숭배에서 탁월했던 다수의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장기형을 선고받고 투옥된 채 있었읍니다. 그러나 1919년에 문자적인 감금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일로, 큰 ‘바벨론’(배교한 그리스도교국을 포함한)으로부터의 해방이 있었읍니다. 영적인 회복 사업은 지체하지 않고 진행되었읍니다.
6. 1919년 ‘시다포인트’ 대회는 세계에 어떠한 사실을 통고하였으며, 그 때에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를 위해 무엇을 설립하셨읍니까?
6 1919년에 ‘오하이오’ 주 ‘시다포인트’ 시(미국)에서 열린 ‘만국 성경 연구회’의 첫 대회는 의미심장한 것이었읍니다. 동 대회는 주권자이신 주 여호와의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참 그리스도인 남은 자들이 마치 죽은 자로부터 일으킴을 받은 것처럼 다시 살아있음을 세계에 통고하였읍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은총으로 회복되어 마태복음 24:14에 예언된 ‘모든 민족에게 증거하기 위하여 이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활동에 다시 한번 공개적이고 활동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읍니다. 영적 복구를 위한 그 개척자적인 노력의 결과는 지금도 전 세계적인 규모로 나타나고 있읍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를 위한 영적 낙원을 설립하셨으며, 여호와께 찬양이 돌려졌읍니다.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고 지칭하는 분이 누구인가?
7. 이사야 61:5-7에 의하면,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의 영적 복구 사업은 얼마나 많은 주의를 끌게 되어 있었읍니까?
7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나, 여호와의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의 영적 복구 사업은 전세계의 주의를 이끌게 되어 있었읍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이것을 예언하였읍니다. 이사야 61:4을 고려하였으므로, 이제 그 다음 말을 봅시다. “외인은 서서 너희 양떼를 칠 것이요 이방 사람은 너희 농부와 포도원지기가 될 것이나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얻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열방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재산]을 얻어 자랑할 것이며 너희가 수치 대신에 [몫을] 배나 얻으며 능욕 대신에 분깃을 인하여 즐거워할 것이라. 그리하여 고토에서 배나 얻고 영영한 기쁨이 있으리라.”—이사야 61:5-7.
8. 예언된 불리한 일이 언제 어떻게 임하였으며, 누구의 선동으로 임하였읍니까?
8 이 점을 놓치지 맙시다. 이 고무적인 예언 성취가 임하는 사람들은 먼저 수치와 굴욕을 당해야 하며, 그들에게는 그들의 “몫”과 “분깃”이 없을 것입니다. 제 1차 세계 대전 중 그러한 불유쾌하고 부당한 일이 전쟁에 광분하던 그리스도교국의 선동으로 여호와의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에게 임하였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은 영적 ‘이스라엘’의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에게 수치와 굴욕을 쌓는 일을 계속하고 있읍니다.
9.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들은 어느 곳에서 수치와 굴욕과 양식의 결핍을 당하지 않을 것이었으며, 그들은 어떻게 그곳에 이르렀읍니까?
9 그러나, 그 영적 ‘이스라엘’인들은 더 이상 큰 ‘바벨론’에서 속박과 투옥과 종교적 노예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1919년 봄에, 바벨론적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이 정치적 후원자로 사용할 호전적인 국가가 더 이상 없게 되었을 때, 여호와께서 그의 충실한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를 해방시키셨읍니다. 그는 그들을 ‘이사야’의 예언에서 “고토”라고 부르는 곳으로 회복시키셨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토지에서 그들은 더 이상 수치와 굴욕과 영적 양식의 결핍을 당하지 않게 되어 있었읍니다. 그들은 영적 낙원에 있게 될 것이었으며, 그 안에서 몫을 배나 얻을 것이었읍니다.
10. 회복된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들이 종교적 반대자와 여호와에 의해 지칭되는 점에 있어서, 남은 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10 물론, 배교한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와 그리스도교국의 세상적 애인들은 아직도 회복된 남은 자를 기성 종교 단체로 지칭하는 그들 나름대로의 방식을 따르고 있읍니다. 그러나 ‘이사야’의 예언은 회복된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들이 무엇이라고 불리울 것이라고 말하였읍니까? 회복된 남은 자들에게 이사야 61:6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얻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열방의 재물을 먹으[리라.]” 여호와께서 자기의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를 무엇이라고 지칭하는가가 그들에게 중요하지, 종교적 반대자들이 그들을 부르는 명칭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11. 고대 ‘이스라엘’에서 누가 제사직에 포함되었으며, 그러나 제사장들에 대한 이사야 61:6의 예언은 누구에게 말한 것이었읍니까?
11 이사야 61:6의 예언은 예언자 ‘이사야’와 예수 그리스도의 동족에게 결코 성취될 수 없었읍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모세’의 형 ‘아론’ 가문의 자격있는 남자들만이 제사장으로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레위’ 지파에 속한 나머지 사람들은 성전에서 ‘아론’계 제사장의 보조자로 봉사하였읍니다. ‘이스라엘’의 다른 12지파는 그들의 희생물과 예물을 ‘아론’계 제사장들에게 가져왔으며 또한 성전 ‘레위’인들의 도움을 받았읍니다. 그 12지파는 자기들이 제사직과 ‘레위’인 봉사에서 제외되었다는 이유로 차별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하였읍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주권자이신 주 여호와의 임명을 받은 사람들에게 복종하였읍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율법하에서,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 전적으로 제사장들로만 구성된 나라가 될 수 없었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기름부음받은 제자들의 경우에, 제사장들로만 구성된 전체 그리스도인 ‘이스라엘’에 대해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얻을 것이라”고 되어 있읍니다.
12. 영적 ‘이스라엘’에서 제사장들은 얼마나 되며, 누가 대제사장입니까?
12 이 영적 ‘이스라엘’의 모든 성원들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지칭하시는 바에 따라 “제사장”들입니다. 그들의 개척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호와의 대제사장이며, 그분의 인도하에 “제사장” 나라가 하나님을 섬깁니다.
13.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여호와의 이 마련이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기름부음받은 제자들에게 적용된다는 것을 어떻게 확증하였읍니까?
13 예언자 ‘이사야’는 영감을 받아 이 사실을 예언하였읍니다.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감받은 사도는 주권자이신 주 여호와의 이 마련은 천적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기름부음받은 제자들에게 적용된다는 것을 확증하였읍니다. 그러한 제자들에게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기술하였읍니다.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 전 2:5, 9) 더우기,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썼읍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계시 1:5, 6.
14. 이 사실이 계시록 5:9, 10에 어떻게 반복되어 있읍니까?
14 ‘요한’은 더 나아가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려진 환호, 제사직과 관련한 하늘에서의 이러한 환호를 기록하였읍니다.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도다.]”—계시 5:9, 10.
15. 1977년판 「아메리카나 백과사전」은 개혁자들이 가르친 “모든 신자들의 제사직”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15 중세기에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은 이러한 말을 그들의 종교적 회중에 적용시켰읍니다. 「아메리카나 백과사전」 1977년판 22권 681면에서 “모든 신자들의 제사직”이라는 표제하에 이러한 해설이 있읍니다.
“개혁의 중심 교리는 신자 모두가 제사직이라는 것이었다. 구원이 믿음으로 받아들여지는 하나님의 너그러운 은총에 의해 가능하다고 믿는 개혁자들은 전파와 성례를 통해서 구원을 중재하는 전문적인 교직자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신자는 누구나 제사장과 같이 구원의 좋은 소식을 말할 수 있으며, 듣는 사람은 믿음으로 반응을 보일 수 있다. 더우기, 선한 사업은 이웃을 섬기는 것이므로, 사회를 유익하게 하는 어떠한 사업도 그리스도인 사업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른바 ‘‘프로테스탄트’ 사업 윤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주된 분야가 일상적인 일이라는 생각에서 발전된 것이다.”
16. “독일 민족의 귀족 사회”에 대해 쓴 저서에서, ‘마르틴 루터’는 모두가 제사장이라는 점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였읍니까?
16 1927, 1929년판 「아메리카나 백과사전」 제 17권 753면 상단 ‘루터’라는 표제 아래 이러한 해설이 있읍니다.
“‘루터’ 자신의 태도를 밝히는 ‘루터’의 주목할 만한 저서 두권이 나타났다. ‘독일 민족의 그리스도교 귀족 사회에게’와 ‘‘바벨론’ 포로 생활’이 그것이다. 전자의 저서에서 그는 모두가 제사장이라고 선언하고 특수층으로 구성된 제사직 계급을 반대하였다. 그는 또한 성서를 해석할 수 있는 교황의 권리에 항의하고 누구나 성서를 읽을 자유가 있다고 선언하였다.”
예를 들면, ‘마르틴 루터’는 자기의 저서 「귀족 사회에게」에서 이렇게 기술하였읍니다. “우리는 모두 침례시에 제사장으로 성별되었다 ··· 교황이나 주교가 기름을 붓고, 삭발식을 집전하고, 성직자를 임명하고, 성별되고, 평신도와 다른 복장을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위선자나 바보로 만들지언정, 그 사람을 결코 그리스도인 혹은 영적인 사람으로는 만들지 못할 것이다.”
17. 제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왜 제사장이라는 칭호를 가지지 않았으며, 지상에 계실 때의 예수 그리스도 자신은 어떠하였읍니까?
17 사도 시대의 원시적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오늘날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의 성원들은 제사장의 칭호를 가지지 않습니다. 왜 그들이 그러한 칭호를 가져야 합니까? 그들은 모두 하나의 영적 제사직의 동료 성원들이며 따라서 서로 구별이 없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직은 영감받은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이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회중이 고려하도록 지적하는 중요한 것입니다. (히브리 3:1-6) 예수 그리스도 자신도, 지상에 계실 때에, 자신이 ‘모세’의 형 ‘아론’ 즉 ‘이스라엘’의 첫 대제사장의 실체로서 섬기고 있었으면서도 자신을 제사장이라고 부르지 않으셨읍니다.
18. (ㄱ) 사람들이 장로, 감독자, 봉사의 종을 임명하듯이, 사람들이 제사장을 임명합니까? (ㄴ) 오늘날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들은 여호와의 영적 성전 어디에 있으며, 그들은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읍니까?
18 물론, ‘바울’과 ‘바나바’와 같은 사도들이 자격있는 남자들을 그리스도인 회중내에서 일할 장로 즉 감독자와 봉사의 종으로 임명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결코 “제사장”을 임명하지 않았읍니다. (사도 14:23; 빌립보 1: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의 제사장들을 임명하시는 분은 바로 여호와이십니다. 그들은 칭호를 사용하지 않지만 오늘날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제사장의 뜰”로 전영된 곳에 있읍니다. 여호와의 영적 성전에 있는 그러한 비유적인 뜰에서, 그들은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께 “영적 제사”를 드립니다.—베드로 전 2:5.
19. (ㄱ) 이사야 61:6에서, 영적 ‘이스라엘’ 성원들은 그 외에 무엇이라고 불리울 것이라고 하였읍니까? (ㄴ) 거기에 사용된 ‘히브리’어는 단순한 “종”으로 일하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까?
19 이제 이사야 61:6로 돌아가, 그 귀절이 또한 영적 ‘이스라엘’의 기름부음받은 성원들에게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라고 한 점에 유의합시다. 여기에서 “봉사자”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이사야 65:13에서처럼 “종”을 의미하는 ‘오베드’가 아니라 ‘므샤렛’(복수형)입니다. ‘므샤렛’이라는 ‘히브리’어와 ‘샤랏’이라는 동사의 기타 형태가 ‘이스라엘’의 제사장과 관련하여 흔히 사용되었읍니다. 요엘 2:17은 “여호와께 수종드는 제사장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출애굽 28:35, 43) ‘히브리’어 성경을 외국어로 번역한 최초의 번역판에서 희랍어 번역자들은 ‘오베드’와 ‘므샤렛’이라는 두개의 ‘히브리’어 단어의 차이를 인정하여, 이사야 61:6을 번역할 때 「칠십인역」에서 그들은 ‘므샤렛’에 대해 희랍어 ‘레이토우르고스’를 사용하였읍니다.
20. (ㄱ) 희랍어 ‘레이토우르고스’의 기본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ㄴ) 그 단어가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에서 인간 피조물 및 천적 피조물과 관련하여 어떻게 사용되어 있읍니까?
20 ‘레이토우르고스’라는 단어는 기본적으로 “공적 일꾼” 즉 행정 장관과 같은 공직자 혹은 봉사자를 의미합니다. (로마 13:6) 그 말은 거룩한 직책에서 일하는 사람을 의미할 수 있읍니다.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제사장의 직무를 행”하는 “이방 사람들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공복, 신세]”이라고 불렀읍니다. (로마 15:16, 새번역) 하나님의 대제사장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시는 분[공복, 신세]”이라고 불리웁니다. (히브리 8:1, 2, 새번역) ‘다윗’의 왕자 ‘암논’과 같은 공적 인물의 경우에, 그를 시중드는 사람은 공복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무엘 하 13:18) 천사들은 공복으로 간주됩니다. 왜냐 하면 사도 ‘바울’이 시편 104:4을 인용할 때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하나님]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공복, 신세]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느니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 1:7) 또한, 히브리 1:14(새번역)에서, ‘바울’은 천사들을 “섬기는[공적 봉사, 신세] 영들”이라고 말합니다.
21. 시편 103:21(신세)에서, 하나님의 천군을 무엇이라고 하였읍니까?
21 시편 103:21은 여호와의 “천군”에게 말하면서 그들을 “그분의 봉사자들”이라고 하였읍니다. (신세) 모든 사실을 고려할 때, 이사야 61:6에 나오는 “봉사자”라는 말은 사람이 종으로 섬기는 것 혹은 거룩한 봉사를 드리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22. (ㄱ)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 누구의 봉사보다 우월한 공적 봉사를 드렸읍니까? (ㄴ) 빌립보 2:17에서 ‘바울’은 ‘빌립보’ 그리스도인들의 활동을 무엇이라고 불렀읍니까?
22 히브리서 10:11은 고대 ‘이스라엘’의 개개 제사장이 매일 “서서 섬기며[공적 봉사, 신세]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말하고 있읍니다. (또한 누가 1:23 참조.) 천사들보다 높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하여, 히브리서 8:6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예수]가 더 아름다운 직분[공적 봉사, 신세]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시리아 안디옥’ 회중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포함하여 어떤 그리스도인 예언자들과 교사들은 “공적으로 여호와께 봉사”하고 있었다고 언급되어 있읍니다. (사도 13:1, 2, 신세 참조) ‘마게도냐 빌립보’에서 회중의 기초를 놓은 ‘바울’은 그들의 특별한 봉사에 대해 말할 때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공적 봉사, 신세]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린다는 표현을 사용하였읍니다. (빌립보 2:17) 그러므로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 모두는 하나님의 공복으로 일하였읍니다.—이사야 61:6.
23. 1882년 6월호 「파수대」지(영문)는 그리스도의 영적 지체의 성원들이 수행하는 공적 봉사를 어떻게 지적하였읍니까?
23 마찬가지로, 오늘날 영적 ‘이스라엘’인들의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들은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 반열로서의 “공적 봉사”를 하나님께 드렸읍니다. (마태 24:45-47) 하나님의 공복들의 그러한 반열이 존재한다는 것이 일찌기 월간지로 발행되던 「시온의 파수대」(영문) 1882년 6월호 7면, 5항, “인간 선생들이 필요하다”라는 제목하에서 지적되었읍니다. 거기에서 발행자는 이렇게 설명하였읍니다. “···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의 모든 성별된 성원이 어떤 의미에서 봉사자이며 모두가 ‘좋은 소식을 전파하도록 기름부음 받았다’고 믿지만, 여러 성원이 각기 다른 여러 부면의 일에 적합하다. 그것은 마치 인체에 여러 기관과 기능이 있는 것과 같다. 사실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의 지체 즉 교회를 인체에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적 지체의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 모두는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고 간주하고 그렇게 부르는 것이 합당합니다.—이사야 61:6.
그들이 국제적으로 주시를 받게됨
24, 25.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들은 어떻게 강탈을 당하고 불의의 대우를 받을 수 있으며, 그러나 합당한 때가 되면 누가 문제를 시정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까?
24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입장에 영예를 돌리는 방법으로 그들의 책임을 이행하고 처신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들을 오해하고 그들이 불의하고 그릇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들은 좋은 명성을 상실하거나 합당한 인정을 받지 못하거나 무시당할 수 있읍니다. (고린도 후 6:8-10) 그러나 최고 재판장께서는 그분의 목적에 합당한 때가 되면 문제를 시정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공의를 중요시하십니다. 이사야 61:8, 9에서 그분은 그릇된 대우를 받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5 “대저 나 여호와는 공의를 사랑하며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여 성실히 그들에게 [댓가를] 갚아 주고 그들과 영영한 언약을 세울 것이라. 그 자손을 열방 중에, 그 후손을 만민 중에 알리리니 무릇 이를 보는 자가 그들은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이라 인정하리라.” (신세 참조)
26. 영적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열방과 만민 중에 어떻게 알려졌으며, 이들은 어떻게 “여호와께 복받은 자손”을 인정하게 되었읍니까?
26 영적 ‘이스라엘’의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들은 자신들을 “알리”기 위하여 열방과 만민에게 나아가야 하였읍니다. 또한, 제 1차 세계 대전 중에 그리고 제 2차 세계 대전 중에도, 그들은 국제적인 “강탈”을 당하였읍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적들과 후원자들에게 거짓 고발을 당하고 비난을 받기 때문에, 커다란 박해를 받았읍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공적 봉사에서의 그들의 노력과 활동에 참으로 합당한 “댓가”를 박탈당하였읍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그의 증인들과 왕국의 좋은 소식의 전파자로 삼으심으로써 자신이 승인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보이셨읍니다. (마태 24:14; 이사야 43:10, 12) 그분은 그들이 온 세계에 증거하도록 그의 성령으로 활기를 주셨읍니다. 그러한 방법으로 열방과 만민은 “여호와께 복받은 자손”을 알게 되었읍니다.—이사야 61:9.
27. 만민과 열방 가운데 누가 남은 자의 입장을 합당하게 인정하였으며, 그들은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살며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였읍니까?
27 만민과 열방 전체는 여호와의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를 합당하게 인정하지 않았읍니다. 그러나 개인들은 인정하였읍니다. 공의와 의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읍니다. 특히 1935년 봄부터 이들은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의 편에 섰읍니다. 그들이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 이후로, “여호와께 복받은 자손” 즉 영적 ‘이스라엘’인들이 아닌 이들은 “큰 무리”가 되었읍니다. 1935년 ‘워싱턴 D. C.’ 대회에서 영적 ‘이스라엘’인들이 아닌 이 셀 수 없는 “무리”가 계시록 7:9-17의 예언적 묘사에 부합한다는 것이 밝혀졌읍니다. 그들은 영적 ‘이스라엘’인들이 아니기 때문에,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들에게 “외인”이요 “이방 사람”이었읍니나. (이사야 61:5) 그들은 남은 자들이 “의의 나무”로 특징을 이룬 그리고 도시와 같은 회중들이 있는 영적 낙원에 살고 있다는 것을 보았읍니다. 그들은 또한, 그러한 영적 낙원에서 살기를 원하였고, 거기에서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였읍니다.—「당신은 아마겟돈을 통과하여 하나님의 신세계에 살아 남을 수 있다」(영문) 296-299면 14-16항; 368면 30번.
28.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들은 “큰 무리”의 어떠한 행로로 이사야 61:5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보고 있읍니까?
28 그들은 그들의 결정과 행로의 비용을 충분히 계산하고, 오염되고 부패해 가는 세계 조직을 버렸읍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보이는 조직편에 섰읍니다. 물론 그들은 영적 ‘이스라엘’인으로 섬길 수 없지만, 여호와의 그리스도에 의한 왕국의 좋은 소식을 포고하는 데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들을 돕기를 진심으로 원하였읍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한 추종자로 침례를 받았읍니다. 그들은 영적 ‘이스라엘’인들과 함께 활동적으로 봉사하였읍니다. 따라서,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들은 이사야 61:5의 이러한 말씀이 그들에게 성취되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였읍니다. “외인은 서서 너희 양떼를 칠 것이요 이방 사람은 너희 농부와 포도원지기가 될 것[이라.]”
29. “큰 무리”는 정신이 겸손하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들을 위하여 무엇을 하는 것을 기쁘게 여기며 그 결과는 어떠합니까?
29 겸손하게도 “큰 무리”는 이사야 61:6에서 “여호와의 제사장”,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고 지칭하는 사람들과 함께 영적 낙원에서 봉사하는 것을 영예와 특권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영적 성전에서 영적 문제에 전념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가 더욱 중요한 일에 전념하도록 돕고 협조함으로써 남은 자의 짐을 더는 것을 기쁘게 여깁니다. 이 모든 것이 영적 낙원을 미화하고 생산적이 되게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도움이 됩니다.
30. 이사야 61:5은 이들 “외인”과 “이방 사람”들이 어떠한 봉사를 수행한다고 묘사하며, 그러나 계시록 7:14, 15은 그들의 봉사에 대해 어떻게 설명합니까?
30 그러므로 오늘날의 비유적인 “외인”과 “이방사람”은 남은 자들을 도와, 여호와의 영으로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부과된 그들의 의무를 이행할 수 있게 합니다. 이사야 61:5에서 보조자들의 사업이 양떼를 치는 일, 경작하고 포도원을 돌보는 일로 상징되었읍니다. 그러나 모든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오는 외인들에 관한 「계시록」 환상에는 그들에 대한 이러한 설명이 있읍니다.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느니라.]”—계시 7:14, 15.
31. 세상이 “큰 무리”의 사람들을 어떻게 보든지간에, 그들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무엇입니까?
31 이처럼 “큰 무리”의 사람들은 우주의 보좌에 앉으신 주권자이신 주께 거룩한 봉사를 드리는 자들로 묘사되어 있읍니다. 세상이 그들을 어떻게 보든지간에, 그들은 참으로 그분의 종들입니다!
32. 이사야 61:5, 6은 천년기 중에 남은 자와 “큰 무리”와 관련하여 어떻게 문자적으로 더욱 성취될 것입니까?
32 “외인”과 “이방 사람”의 “큰 무리”는 다가오는 “큰 환난”을 통과할 것입니다. 이사야 61:5은 그들이 그 후,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 중에 무엇을 할 것인지를 참으로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읍니다! 그때에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들인 “여호와의 제사장”들은 하늘의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높여질 것입니다. 하늘에서 그들은 어느 때보다도 온 인류를 위한 제사직 봉사에 전념할 것입니다. (계시 20:6) 그러나 “큰 무리”는 전세계적으로 문자 그대로 낙원으로 변모할 깨끗해진 이 땅 위에 남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누가 하나님의 지적 발등상을 복구하고 미화하는 일을 개척할 것입니까?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와 함께 영적 낙원에 고착한 환난 생존자들의 “큰 무리”가 개척할 것입니다.
33. “큰 무리”는 어떻게 그 때의 인간적 필요와 식욕을 충족시킬 것이며, 그들은 여호와의 봉사와 숭배 면에서 누구를 위한 개척자들이 될 것입니까?
33 그 때에 옷을 만드는 일이 있을 것입니까? “큰 무리”가 칠 양으로부터의 양모는 그 목적에 충분할 것입니다. 빵과 기타 농산물이 필요할 것입니까? “농부”들은 식욕을 충족시켜 줄 것입니다. 포도원지기들은 사람들이 마음을 즐겁게 해 주는 최우량 포도주를 공급해 줄 것입니다. 지상에 낙원을 회복하는 일에서의 “큰 무리”의 발전은 죽은 자로부터 부활되는 모든 사람의 눈을 즐겁게 해 줄 것이며 대제사장에 의해 대속되는 모든 사람을 돌보기 위한 사전 배려의 증거가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큰 무리”는 하나님의 영적 성전의 지적 뜰에서 정기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거룩한 봉사를 드리는 일을 등한히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일에서 그들은 솔선 인도할 것이며 죽은 자로부터 부활되는 모든 사람을 위한 훌륭한 본을 보일 것입니다.—누가 23:43.
[29면 삽화]
현대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들은 예언자 ‘이사야’가 예언하고 예수께서 개척하신 영적 복구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주권자이신 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능력을 주셔서 그들이 온 땅의 겸비한 사람들에게 왕국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