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
(David) [아마도 ‘사랑받는’이라는 의미]
이 이름은 「신세계역」(영문)에서는 시편의 일흔세 편의 머리글에 나오는 75회를 포함하여 히브리어 성경에 1079회,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59회 나온다. 히브리어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인물 가운데, 그리스도인 성서 필자들이 다윗보다 더 자주 언급하는 인물은 모세와 아브라함뿐이다. 다윗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1138군데에서 그 표현은 단지 한 인물 즉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을 가리키거나, 때때로 다윗이 예표한 분 즉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마 1:1.
목동, 음악가, 시인, 군인, 정치가, 예언자, 왕이었던 이 사람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매우 탁월하게 두드러져 있다. 그는 전장에서 난관 아래서도 인내를 보인 맹렬한 전사였고, 강하고 흔들림 없는 용기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심각한 죄를 회개할 만큼 겸손한 지도자 겸 지휘관이었으며, 부드러운 동정심과 자비를 보일 줄 아는 사람, 진리와 의를 사랑한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하느님 여호와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확신한 사람이었다.
보아스와 룻의 자손인 다윗의 가계를 거슬러 올라가면 베레스를 거쳐 유다에게까지 이르게 된다. (룻 4:18-22; 마 1:3-6) 이새의 여덟 아들 가운데 막내인 다윗에게는 또한 두 명의 친누이 또는 이부 누이가 있었다. (삼첫 16:10, 11; 17:12; 대첫 2:16) 다윗의 형제들 가운데 한 명은 자녀 없이 죽어서 후대의 족보 기록에는 빠진 것 같다. (대첫 2:13-16) 다윗의 어머니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않다. 나하스가 그의 어머니였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하스는 다윗의 이부 누이들의 아버지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삼둘 17:25. 나하스 2번 참조.
예루살렘에서 남남서쪽으로 약 9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이며 그의 조상들인 이새, 오벳, 보아스가 살았던 성읍이다. 그리고 이 성읍은 때때로 “다윗의 도시”(David’s city)(누 2:4, 11; 요 7:42)라고 불렸는데, “‘다윗의 도시’”(the City of David) 즉 예루살렘에 있는 시온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삼둘 5:7.
청소년 시절 다윗이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베들레헴 근처의 어떤 들판에서 자기 아버지의 양들을 돌볼 때이다. 이 점은 천 년도 더 지난 뒤에 여호와의 천사가 예수의 출생을 발표하는 것을 듣도록 선택된 목자들이 경외감에 사로잡힌 곳도 베들레헴 근처의 어떤 들판이었음을 생각나게 한다. (누 2:8-14) 사무엘은 하느님의 보냄을 받아 이새의 집으로 가서 그의 아들들 가운데 한 명에게 장래에 왕이 되도록 기름을 부으려 했지만, 다윗의 일곱 형들을 물리치며 “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않으셨”다고 말하였다. 마침내 다윗을 들판에서 불러왔다. “붉고, 눈이 아름답고 용모가 준수한 젊은이”인 다윗이 들어올 때 긴장이 감돈다. 사무엘이 온 이유를 그때까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렇게 명령하신다. “일어나 그에게 기름을 부어라. 바로 이 사람이다!” 여호와께서는 이 사람에 대해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찾아 냈으니, 그는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요 내가 바라는 모든 것을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삼첫 16:1-13; 13:14; 행 13:22.
다윗이 목동으로 지낸 여러 해는 그의 나머지 생애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야외 생활은 훗날에 그가 사울의 분노를 피해 달아났을 때 도피 생활을 할 준비를 갖추어 주었다. 그는 또한 무릿매질을 배웠고, 인내심과 용기를 길렀으며, 양 떼에서 떨어져 나간 양을 기꺼이 쫓아가서 구출하고 필요할 때는 곰이나 사자를 죽이는 일도 주저하지 않는 태도를 길렀다.—삼첫 17:34-36.
그런데 다윗은 전사로서의 용맹도 대단했지만, 능숙한 수금 연주자와 작곡가로도 기억될 것이다. 아마 그는 이러한 재능들을 오랜 시간 양 떼를 돌보는 동안 습득했을 것이다. 다윗은 또한 새로운 악기의 개발자로서 명성이 높았다. (대둘 7:6; 29:26, 27; 암 6:5) 여호와에 대한 그의 사랑으로 인해, 그가 쓴 가사들은 단순한 오락이라는 일반적인 수준보다 훨씬 더 고상한 것이 되었고, 여호와에 대한 숭배와 찬양에 바쳐진 고전적인 걸작들이 되었다. 73편이나 되는 시의 머리글에서는 다윗이 지은이임을 알려 주고 있으며, 그 외에도 다른 곳에서 다윗이 지은이임을 알려 주는 시편들도 있다. (시 2:1을 행 4:25과, 시 95:7, 8을 히 4:7과 비교) 어떤 시들, 예를 들어 시편 8, 19, 23, 29편은 다윗이 목동이었을 때의 경험이 반영된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윗이 양 떼를 돌보면서 받은 이 모든 훈련은 여호와의 백성을 돌보는 면에서 더 큰 역할을 하도록 그를 준비시켜 주었다. 이렇게 기록된 바와 같다. “[여호와께서] 자신의 종 다윗을 택하셔서 그를 양 우리에서 취하셨구나. 젖 먹이는 암컷들을 따르던 그를 데려오시어 그분의 백성인 야곱과 그분의 상속 재산인 이스라엘을 돌보는 목자가 되게 하[셨구나].” (시 78:70, 71; 삼둘 7:8) 그렇지만 다윗이 그의 아버지의 양 떼를 처음으로 떠났을 때 왕권을 차지하러 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사울의 한 조언자의 추천을 받아 궁중 악사로 섬겼는데, 그 조언자는 다윗에 대해 묘사하기를, “능숙하게 연주”할 뿐만 아니라 “강한 용사이자 전사로, 총명하며 말을 잘하고, 준수한 사람인데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십니다”라고 하였다. (삼첫 16:18) 그래서 다윗은 괴로움을 겪는 사울을 위해 수금을 연주해 주는 사람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무기 든 자가 되었다.—삼첫 16:19-23.
후에 다윗은 밝혀지지 않은 어떤 이유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 얼마 동안 그곳에 있게 된다. 다윗은 당시에 블레셋 사람들과 대치 중인 사울의 군대에 속해 있는 형들에게 양식을 전해 주러 갔다가, 골리앗이 여호와를 모욕하는 것을 보고 들었을 때 격노한다. “살아 계신 하느님의 전투 대열을 조롱하는 이 할례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은 도대체 누구입니까?”라고 다윗은 질문한다. (삼첫 17:26)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사자의 발과 곰의 발에서 저를 구출하신 여호와, 그분께서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저를 구출하실 것입니다.” (삼첫 17:37) 사자와 곰도 죽였던 그는 허락을 받고 골리앗에게 다가가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만군의 여호와, 곧 네가 조롱하는 이스라엘의 전투 대열의 하느님의 이름으로 너에게 간다.” 갑자기 다윗은 무릿매로 돌을 날려 적의 장수를 쓰러뜨린다. 그다음에 다윗은 골리앗 자신의 칼로 그의 머리를 베고 승전 기념물 즉 그 거인의 머리와 칼을 가지고 진영으로 돌아온다.—삼첫 17:45-54. 1권, 745면 삽화.
4세기의 그리스어 사본인 바티칸 사본 1209호에서 볼 수 있듯이, 「칠십인역」에서 사무엘 첫째 17:55부터 18:6ㄱ의 “그들이 들어오자,”까지의 내용이 빠져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그래서 「모펏」역은 이 부분에서 마지막 절을 제외하고 전체를 겹대괄호로 묶어서 표시하며, 이 부분이 “편집자가 부가한 내용 또는 후대의 삽입문”이라고 본다. 그렇지만 마소라 본문의 내용을 지지하는 증거가 있다.—사무엘서 (그리스어 「칠십인역」에 없는 부분) 참조.
도망자 시절 (1권, 746면 지도) 급속히 진전된 이 사건들로 인해서 다윗은 광야의 무명인에서 온 이스라엘의 눈앞에 널리 알려진 사람으로 순식간에 부상하게 되었다. 전사들 위에 임명된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을 치는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올 때 춤과 기쁨으로 영접을 받았는데, 그 무렵에 사람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는 이러하였다. “사울은 수천 명을 쳐죽였고, 다윗은 수만 명을 쳐죽였네.” (삼첫 18:5-7)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을 사랑하는 자가 되었”고 사울 자신의 아들 요나단은 상호 사랑과 우정을 약속하는 평생 지속된 계약을 다윗과 맺었는데, 그 혜택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과 손자 미카에게까지 베풀어졌다.—삼첫 18:1-4, 16; 20:1-42; 23:18; 삼둘 9:1-13.
이러한 인기는 사울의 시기심을 불러일으켜서, 그는 “그 날부터 ··· 다윗을 계속 의심하며 바라보았다.” 다윗이 이전처럼 연주하고 있을 때 사울은 두 번이나 다윗을 벽에 박으려고 장창을 던졌지만 두 번 다 여호와께서 다윗을 구출해 주셨다. 사울은 누구든 골리앗을 죽이는 사람에게 자기 딸을 주겠다고 약속했었지만, 이제는 딸을 다윗에게 주기를 꺼렸다. 마침내 사울은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의 포피 백 개”를 가지고 온다면 자기의 둘째 딸과 결혼시켜 주겠다고 동의하였다. 사울의 속셈은 이러한 무리한 요구에 따르게 하여 다윗을 죽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용감한 다윗은 결혼 지참금을 두 배로 늘려서 200개의 포피를 사울에게 바치고 미갈과 결혼하였다. 이렇게 해서 이제 사울의 자녀 가운데 두 명이 사랑에 의해 다윗과의 계약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사울은 다윗을 한층 더 미워하게 되었다. (삼첫 18:9-29) 다윗이 다시 사울 앞에서 연주할 때, 사울 왕은 세 번째로 그를 벽에 박으려고 하였다. 다윗은 밤의 어둠을 이용하여 도망했는데, 그 후로는 다른 상황에서, 참으로 특이한 상황에서만 사울을 만나게 된다.—삼첫 19:10.
그 후 여러 해 동안 다윗은 도망자 생활을 했는데, 그를 죽이려고 작정한 완고하고 악한 왕의 집요한 추격에 쫓겨 이곳저곳으로 끊임없이 도망을 다녔다. 다윗은 처음에는 라마에 있는 예언자 사무엘에게로 도피했지만(삼첫 19:18-24), 그곳이 더는 숨을 곳이 못 되자 블레셋 도시인 가드로 향하였다. 그리고 도중에 대제사장 아히멜렉을 만나려고 놉에 들렀다가 그곳에서 골리앗의 칼을 손에 넣었다. (삼첫 21:1-9; 22:9-23; 마 12:3, 4) 하지만 그는 가드의 성문에 되는대로 긁적거리고 수염에 침을 흘려서 미친 체하고 나서야 가까스로 가드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삼첫 21:10-15) 다윗은 이 경험에 근거하여 시편 34편과 56편을 지었다. 그다음에 그는 아둘람 동굴로 도망했는데, 거기에서 그의 가족과 불행하고 고난을 겪는 사람들 약 400명이 그에게 합류하였다. 시편 57편이나 142편 혹은 이 두 시 모두 그가 이 동굴에 머무른 기간을 다루는 것일 가능성이 있다. 다윗은 계속 이동했는데, 그곳에서부터 모압의 미스베로 갔다가 다음에는 다시 유다에 있는 헤렛 숲으로 갔다. (삼첫 22:1-5) 그일라에 살 때, 그는 사울이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이제 600명가량 되는 자기 부하들과 함께 십 광야로 떠났다. 사울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십 광야 호레스에서부터 마온 광야에 이르기까지 계속 추격하였다. 사울이 자신의 사냥감을 막 잡으려고 할 때, 블레셋이 습격해 왔다는 전갈이 와서 사울은 당분간 추격을 포기하였다. 그래서 도망자 다윗은 엔-게디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삼첫 23:1-29) 기적으로 구출해 주신 데 대하여 여호와를 찬양하는 아름다운 시들(시 18, 59, 63, 70편)은 그와 비슷한 경험들에서 나왔다.
엔-게디에서는 사울이 용변을 보려고 동굴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 동굴 안쪽에 숨어 있던 다윗은 살며시 다가와 사울의 겉옷 자락을 잘랐지만 그의 목숨은 살려 두면서, 왕은 “여호와의 기름부음받은 자이기 때문”에 왕을 해치는 것을 자기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말하였다.—삼첫 24:1-22.
사무엘이 죽은 뒤에 사무엘이 죽은 뒤에, 여전히 쫓겨 다니는 신세이던 다윗은 바란 광야에 자리를 잡았다. (바란 참조)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헤브론 남쪽의 갈멜에서 가축을 기르는 부유한 나발에게 친절을 나타냈지만, 결국 이 배은망덕한 사람에게 박대를 당하고 말았다.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의 재빠른 판단 덕분에 다윗이 손을 들어 그 집안의 남자들을 전멸시키는 일은 하지 않게 되었지만, 나발은 여호와께서 치셔서 죽었다. 그래서 다윗은 그 과부와 결혼하여, 이제 이스르엘 출신의 아히노암에 더하여 다윗은 또 한 명 즉 갈멜의 아비가일을 아내로 두게 되었다. 다윗이 오래 자리를 비우는 동안, 사울은 미갈을 다른 남자에게 주었다.—삼첫 25:1-44; 27:3.
다윗은 두 번째로 십 광야를 피난처로 삼았고, 다시 추격이 시작되었다. 다윗은 사울과 그의 부하 3000명을, “사람이 산에서 자고새를 뒤쫓듯이 ··· 벼룩 한 마리를” 찾고 있는 사람들에 비하였다. 어느 날 밤 다윗과 아비새는 사울의 숙영지로 살며시 들어가서 사울의 장창과 물 주전자를 가지고 나왔다. 아비새는 사울을 죽이고 싶어 했지만, 다윗은 두 번째로 사울의 목숨을 살려 두면서, 손을 뻗어 하느님의 기름부음받은 자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관점에서, 자기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였다. (삼첫 26:1-25) 다윗이 자기의 적대자를 본 것은 이때가 마지막이었다.
다윗은 16개월 동안 사울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블레셋 지역의 시글락에 정착하였다. 얼마의 용사들이 사울의 군대에서 탈주하여 시글락에 있는 추방자들에게 합세하였다. 그래서 다윗은 남쪽에 있는 이스라엘의 적들의 성읍들을 습격하여 유다의 경계를 견고하게 하고 장래 왕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강화할 수 있었다. (삼첫 27:1-12; 대첫 12:1-7, 19-22)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의 군대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아기스 왕은 다윗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서 악취”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다윗에게 자기와 함께 가자고 제안하였다. 그렇지만 다른 추축 성주들은 다윗을 위험인물로 간주하고 배척하였다. (삼첫 29:1-11) 길보아 산에서 절정에 이른 전투에서, 사울과 요나단을 포함한 그의 세 아들이 죽었다.—삼첫 31:1-7.
그러는 사이에, 아말렉 사람들이 시글락을 약탈하고 불태웠으며,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을 모두 끌고 갔다. 다윗의 군대는 즉시 추격하여 그 약탈대를 따라잡고, 그들의 아내들과 자녀들과 모든 물품을 되찾았다. (삼첫 30:1-31) 사흘 뒤에 한 아말렉 사람이 사울의 왕관과 팔찌를 가지고 와서, 상을 받기를 바라고 부상당한 왕을 자기가 죽였다고 거짓말로 자랑하였다. 그는 그 일에 대하여 거짓말을 한 것이지만, 다윗은 그가 ‘여호와의 기름부음받은 자를 죽였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그를 죽이라고 명령하였다.—삼둘 1:1-16; 삼첫 31:4, 5.
왕이 된 후 (1권, 746면 지도) 다윗은 사울이 죽었다는 비극적인 소식 때문에 몹시 슬퍼하였다. 그에게는 자신의 큰 적이 죽었다는 사실보다도 여호와의 기름부음받은 자가 쓰러졌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문제였다. 다윗은 애통해하면서 “활”이라는 제목의 비가를 지었다. 그 비가에서 다윗은 자신의 최악의 적과 최상의 벗이 전투에서 함께 쓰러진 것에 대하여 이렇게 애통해한다. “사울과 요나단, 살아 있는 동안에도 사랑스러운 이들이요 즐거움을 주는 이들이더니, 죽을 때에도 서로 갈라지지 않았구나.”—삼둘 1:17-27.
다윗은 이제 헤브론으로 옮겨 갔는데, 그곳에서 유다의 연로자들이 그에게 기름을 부어 그 지파의 왕으로 삼았다. 그때는 기원전 1077년으로서 다윗이 30세였을 때이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은 나머지 지파들의 왕이 되었다. 그렇지만 약 이 년 뒤에, 이스-보셋은 암살을 당하게 되고, 암살자들은 상을 받기를 바라고 그의 머리를 다윗에게 가지고 왔지만, 그들 역시 사울을 죽인 체한 사람처럼 죽임을 당하였다. (삼둘 2:1-4, 8-10; 4:5-12) 이렇게 되어 그때까지 사울의 아들을 지지하던 지파들이 유다 지파에게 합세할 길이 열렸으며, 때가 되자 34만 822명에 이르는 군대가 다시 모여서 다윗을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다.—삼둘 5:1-3; 대첫 11:1-3; 12:23-40.
예루살렘에서 통치하다 다윗은 헤브론에서 칠 년 반 동안 통치한 뒤에 여호와의 지시에 따라 여부스 사람들에게서 빼앗은 성채인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옮겼다. 그는 그곳 시온에 ‘다윗의 도시’를 세우고 계속하여 그다음 33년간 통치하였다. (삼둘 5:4-10; 대첫 11:4-9; 대둘 6:6) 헤브론에 사는 동안, 다윗 왕은 아내를 더 많이 취했고, 미갈을 돌아오게 했으며, 여러 명의 아들과 딸들을 두었다. (삼둘 3:2-5, 13-16; 대첫 3:1-4) 예루살렘으로 옮겨 온 뒤에, 다윗은 아내와 후궁을 더 많이 얻었으며 그들은 더 많은 자녀를 낳았다.—삼둘 5:13-16; 대첫 3:5-9; 14:3-7.
블레셋 사람들은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를 타도하려고 올라왔다. 다윗은 이전에도 그랬던 것처럼(삼첫 23:2, 4, 10-12; 30:8), 자기가 그들을 치러 올라가야 하는지 여호와께 물었다. 여호와께서는 “올라가거라” 하고 대답하셨으며 적을 매우 압도적으로 멸망시키셨기 때문에, 다윗은 그 장소를 “돌파의 주인”을 의미하는 바알-브라심이라고 불렀다. 두 번째 전투에서는 여호와께서 전략을 바꾸시어, 다윗에게 옆으로 우회해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뒤에서 공격하라고 명령하셨다.—삼둘 5:17-25; 대첫 14:8-17.
다윗은 계약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오려고 시도했지만, 웃사가 그 궤에 손을 댔다가 쓰러지는 바람에 그 시도가 좌절되고 말았다. (삼둘 6:2-10; 대첫 13:1-14) 약 석 달 뒤에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고 그 궤를 처음처럼 수레에 싣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어깨에 메고 옮기도록 조처하는 등 철저하게 준비하여 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왔다. 다윗은 간단한 옷차림만 하고 “여호와 앞에서 뛰면서 춤을 추”어서 이 대행사에 대한 기쁨과 열정을 나타냈다. 그러나 그의 아내 미갈은 다윗을 질책하면서 그가 “무지한 사람들 중에 하나”처럼 행동했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부당한 불평 때문에 미갈은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었다.”—삼둘 6:11-23; 대첫 15:1-29.
다윗은 또한 그 궤가 새로 자리 잡은 장소에서 여호와에 대한 숭배를 확장하기 위한 마련도 했는데, 문지기들과 악사들을 임명하고 “아침저녁으로 항상 ··· 번제물”이 틀림없이 바쳐지게 하였다. (대첫 16:1-6, 37-43) 그에 더하여, 다윗은 실삼나무로 성전·궁전을 건축하여 천막 대신에 그 궤를 넣어 둘 집으로 삼으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그 집을 짓도록 허락받지 못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피를 많이 흘렸고, 큰 전쟁을 치렀다. 너는 내 이름을 위한 집을 짓지 못할 것이다. 네가 내 앞에서 많은 피를 땅에 흘렸기 때문이다.” (대첫 22:8; 28:3) 그렇지만, 여호와께서는 그와 계약을 맺으시며 왕권이 그의 가족 내에 영원히 머물 것이라고 약속하셨으며, 이 계약과 관련하여 하느님께서는 그의 아들 솔로몬—“평화”를 의미하는 어근에서 파생한 이름—이 그 성전을 건축할 것임을 다윗에게 보증하셨다.—삼둘 7:1-16, 25-29; 대첫 17:1-27; 대둘 6:7-9; 시 89:3, 4, 35, 36.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바로 이 왕국 계약과 일치하게, 다윗이 그의 통치 영역을 이집트 강에서부터 유프라테스 강까지 확장하고, 국경을 튼튼하게 하고, 티레 왕과 평화를 유지하고, 모든 방향의 적들—블레셋, 시리아, 모압, 에돔, 아말렉, 암몬 사람들—과 싸워 정복하도록 허락하셨다. (삼둘 8:1-14; 10:6-19; 왕첫 5:3; 대첫 13:5; 14:1, 2; 18:1–20:8) 하느님께서 주신 이러한 승리는 다윗이 아주 강력한 통치자가 되게 해 주었다. (대첫 14:17) 그렇지만 다윗은 이런 지위에 오르게 된 것이 정복이나 상속을 통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이 모형적 신권 통치의 왕좌에 앉힌 분이신 여호와에 의해 된 것임을 언제나 의식하고 있었다.—대첫 10:14; 29:10-13.
죄 때문에 재난이 닥치다 암몬 사람들에 대한 원정이 계속되던 중에, 다윗의 생애에서 가장 슬픈 사건 중 하나가 발생하였다. 그 모든 일은 아름다운 밧-세바가 목욕하는 것을 그 왕이 자기 집 옥상에서 보고 그릇된 욕망을 품었을 때 시작되었다. (야 1:14, 15) 다윗은 그 여자의 남편 우리아가 전쟁터에 나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여자를 자기의 궁전으로 데려오게 하여 그곳에서 그 여자와 관계를 가졌다. 때가 되자 왕은 그 여자가 임신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틀림없이 밧-세바가 부도덕한 행실 때문에 그 죄가 공개적으로 폭로되어 죽임을 당하게 될까 봐 두려웠을 다윗은 우리아가 예루살렘에 와서 자기 앞에 나오게 하라는 전갈을 곧바로 군대에 보냈다. 우리아가 아내와 함께 밤을 보내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윗이 우리아를 술에 취하게 했는데도, 우리아는 밧-세바와 함께 자려고 하지 않았다. 낙담한 다윗은 우리아를 군대로 돌려보내면서 그의 편에 비밀 지시 즉 우리아가 틀림없이 죽도록 그를 최전선에 배치하라는 지시를 사령관 요압에게 보냈다. 그 음모는 성공을 거두었다. 우리아는 전쟁터에서 죽었고, 그의 과부는 통상적인 애도 기간을 지켰다. 그다음에 다윗은 성읍 주민들이 그 여자가 임신한 사실을 알기 전에 그 과부와 결혼하였다.—삼둘 11:1-27.
그러나 여호와께서 보고 계셨으며, 몹시 악한 그 일의 전말을 폭로하셨다. 만일 여호와께서 다윗과 밧-세바가 관련된 그 사건을 모세의 율법에 따라 인간 재판관이 처리하게 하셨다면, 그 범죄자들은 둘 다 사형에 처해졌을 것이며, 물론 그들의 간음으로 임신이 된 태아도 어머니와 함께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신 5:18; 22:22) 그렇지만 여호와께서 친히 그 사건을 다루셨고 다윗에게 자비를 보이셨는데, 그 이유는 왕국 계약 때문에(삼둘 7:11-16), 그리고 다윗 자신도 자비를 보여 왔기 때문에, (삼첫 24:4-7. 야 2:13 비교) 그리고 범죄자들이 회개하는 것을 보셨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시 51:1-4) 그러나 그들에게 모든 처벌이 면제된 것은 아니었다. 여호와께서는 예언자 나단의 입을 통하여 이렇게 선언하셨다. “보아라, 내가 너를 대적하여 네 집에서 재앙을 일으키겠다.”—삼둘 12:1-12.
그리고 그 말씀대로 되었다. 간음으로 밧-세바에게 태어난 아기는 병이 들어서, 다윗이 그 아기 때문에 칠 일 동안 단식하고 애곡했는데도, 곧 죽고 말았다. (삼둘 12:15-23) 그 후에 다윗의 맏아들 암논은 자기의 이복 누이 다말을 강간했다가, 결국 다말의 오라비에 의해 살육을 당하여 그의 아버지에게 슬픔을 가져다주었다. (삼둘 13:1-33) 그 후에 다윗이 사랑하던 셋째 아들 압살롬은 왕좌를 찬탈하려고 시도했을 뿐만 아니라, 다윗의 후궁들과 관계를 가져 자기 아버지를 공개적으로 멸시하고 대중 앞에서 치욕스럽게 하였다. (삼둘 15:1–16:22) 결국 그 치욕은 내란이 일어나서 나라가 아버지와 아들의 싸움에 휘말리게 되었을 때 극에 달하였다. 그 내전은 다윗이 원했던 바와는 반대로 압살롬이 죽게 됨으로 끝나게 되었으며 다윗에게 큰 슬픔을 가져다주었다. (삼둘 17:1–18:33) 다윗은 압살롬을 피해 도망할 때 시편 3편을 지었는데, 거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해 있[습니다].”—시 3:8.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모든 잘못과 심각한 죄에 대하여, 회개하고 여호와의 용서를 간청함으로써 언제나 올바른 마음 상태를 나타냈다. 밧-세바가 관련된 사건에서 이 점이 잘 나타났는데, 다윗은 그 사건이 있은 뒤에 쓴 시편 51편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 잘못을 안고 태어났으며, 내 어머니가 나를 죄 중에 수태하였습니다.” (시 51:5) 또 하나의 예로서, 다윗은 사탄의 부추김을 받아 군 복무에 적합한 남자의 수를 조사했을 때 자신의 죄를 겸손하게 고백하였다.—삼둘 24:1-17; 대첫 21:1-17; 27:24. 등록 참조.
성전 부지 매입 이 마지막 사례에서 다윗 왕의 잘못 때문에 생긴 역병은 다윗이 오르난의 타작마당을 매입하고 타작에 쓰는 썰매를 땔감으로 사용하여 소를 여호와께 희생으로 바쳤을 때 멈추었다. 바로 이 부지에 솔로몬이 나중에 웅장한 성전을 건축하였다. (삼둘 24:18-25; 대첫 21:18-30; 대둘 3:1) 다윗은 그 성전을 건축하는 일을 언제나 마음에 두고 있었으며, 그 일을 하도록 허락받지는 못했지만, 채석을 하고 자재를 모으는 일을 할 일꾼들의 큰 작업반을 마련할 수는 있었다. 그 자재에는 금 10만 달란트(385억 3500만 달러)와 은 100만 달란트(66억 600만 달러)와 무게를 달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구리와 철이 포함되었다. (대첫 22:2-16) 다윗은 자기의 사유 재산에서 가치가 12억 200만 달러가 넘는 오필의 금과 정련된 은을 헌물하였다. 다윗은 또한 영감을 받아 건축 설계를 마련했고, 수만 명의 레위 사람들을 여러 개의 봉사의 조로 조직했는데, 그 가운데는 노래하는 자들과 악사들로 이루어진 대합창단도 포함되었다.—대첫 23:1–29:19; 대둘 8:14; 23:18; 29:25; 라 3:10.
통치의 끝 이제 침대에 누워 지내게 된 70세의 다윗 왕은 생애 말년에도 가족 내에 발생하는 재난을 계속 겪게 되었다. 그의 넷째 아들 아도니야가 아버지에게 알리거나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 더욱 심각한 일로서 여호와의 승인도 없이 스스로 왕이 되려고 시도하였다. 이 소식이 다윗에게 전해졌을 때, 다윗은 신속히 행동하여 여호와께서 선택하신 자인 아들 솔로몬을 공식적으로 왕으로 삼고 왕좌에 앉혔다. (왕첫 1:5-48; 대첫 28:5; 29:20-25; 대둘 1:8) 그다음에 다윗은 솔로몬에게 여호와의 길로 걷고 그분의 법규와 계명을 지키고 모든 일에서 현명하게 행하면 번영할 것이라고 조언하였다.—왕첫 2:1-9.
다윗은 40년간 통치한 뒤에 죽어서 ‘다윗의 도시’에 장사되었으며, 바울이 기록한, 믿음이 탁월한 증인들의 영예로운 명단에 포함될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였다. (왕첫 2:10, 11; 대첫 29:26-30; 행 13:36; 히 11:32) 예수께서는 시편 110편을 인용하시면서, 다윗이 그 시를 “영감을 받아” 기록했다고 말씀하셨다. (마 22:43, 44; 막 12:36) 사도들과 그 밖의 성서 필자들은 다윗을 하느님의 영감받은 예언자로 여러 차례 인정하였다.—시 16:8을 행 2:25과, 시 32:1, 2을 로 4:6-8과, 시 41:9을 요 13:18과, 시 69:22, 23을 로 11:9, 10과, 시 69:25과 109:8을 행 1:16, 20과 비교.
예수를 예표함 예언자들은 종종 다윗과 그의 왕가를 언급했는데, 어떤 때는 “다윗의 왕좌”에 앉아 있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들과 관련하여(렘 13:13; 22:2, 30; 29:16; 36:30), 어떤 때는 예언적인 의미로 언급하였다. (렘 17:25; 22:4; 암 9:11; 슥 12:7-12) 메시아에 관한 특정한 예언들에서는 여호와께서 다윗과 맺으신 왕국 계약에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이사야는 “‘놀라운 조언자’, ‘위력 있는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군왕’”이라고 불리는 분이 한정 없는 때까지 “다윗의 왕좌”에 굳게 세워질 것이라고 말한다. (사 9:6, 7. 또한 사 16:5 비교) 예레미야는 메시아를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일으키실’ “한 의로운 싹”에 비한다. (렘 23:5, 6; 33:15-17) 에스겔을 통하여, 여호와께서는 메시아인 목자를 “내 종 다윗”이라고 부르신다.—겔 34:23, 24; 37:24, 25.
마리아에게 그가 예수라고 하는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하는 가운데, 천사는 “여호와 하느님께서 그에게 그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주실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누 1:32)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법적으로 뿐만 아니라 혈통상으로도 다윗 왕좌의 상속자였다. (마 1:1, 17; 누 3:23-31) 바울은 예수께서 육체로는 다윗의 후손이라고 말하였다. (로 1:3; 디둘 2:8) 일반인들 역시 예수를 “다윗의 아들”로 보았다. (마 9:27; 12:23; 15:22; 21:9, 15; 막 10:47, 48; 누 18:38, 39) 이 점을 입증하는 것은 중요했는데, 바리새인들도 인정했듯이 다윗의 아들이 메시아가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 22:42) 부활되신 예수 자신도 증거하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 예수는 ··· 다윗의 뿌리요 그 자손이[다].”—계 22:16. 또한 계 3:7; 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