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페르시아 사람들
(Persia, Persians)
성서와 세속 역사에서 통상적으로 메디아 사람들과 함께 나오는 나라와 민족. 메디아 사람들과 페르시아 사람들은 고대 아리아 어족(인도·이란 어파)에 속한 서로 친척 관계인 민족들이었던 것 같다. 따라서 페르시아 사람들은 야벳의 자손일 것이며 아마도 마대를 통해 나온 사람들이어서 메디아 사람들과 조상이 같을 것이다. (창 10:2) 한 비문에서 다리우스 대왕은 자신을 “페르시아 사람이자 페르시아 사람의 아들이며 아리아인의 후예인 아리아인”이라고 묘사한다.—「페르시아 제국사」(History of the Persian Empire), A. 옴스테드, 1948년, 123면.
살만에셀 3세(이스라엘의 예후와 동시대 인물로 추정됨)의 시대에 관한 아시리아의 비문들에서는 메디아를 침략하여 “파르수아”의 왕들로부터 조공을 받은 일에 대해 언급하는데, “파르수아”는 우르미아 호 서쪽에 위치한, 아시리아와 접해 있던 지역인 것 같다. 많은 학자들은 “파르수아”가 당시에는 페르시아 사람들이 살던 지역에 사용된 이름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이름을 파르티아인들과 연관시키는 학자들도 있다. 아무튼 후대의 비문들에는 페르시아 사람들이 그보다 상당히 더 남쪽에 살았고 엘람의 남동쪽에 있는 “파르사”에 정착하였던 것으로 나온다. 오늘날 그곳은 현대 이란의 파르스 주에 위치해 있다. 안샨은 엘람과 접해 있는 한 지역 혹은 도시로서 한때 엘람의 영토 내에 있었던 곳으로, 역시 페르시아 사람들이 거주하였던 곳이다.
따라서 페르시아 사람들은 그들의 역사 초기에는 광대한 이란 고원의 남서쪽 지역만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들의 경계는 북서쪽으로는 엘람과 메디아, 북쪽으로는 파르티아, 동쪽으로는 카르마니아, 남쪽과 남서쪽으로는 페르시아 만이었던 것 같다. 무더운 페르시아 만의 해안 지대를 제외하면, 그 지역의 대부분은 험준한 자그로스 산맥의 남쪽 부분이 차지하고 있으며, 그 사이사이에는 비탈이 울창한 삼림으로 덮인 길고 매우 비옥한 골짜기들이 자리 잡고 있다. 골짜기 지역은 기후가 온화하지만 높은 고원 지대의 건조하고 바람이 많이 부는 지역에는 겨울철의 여러 달 동안 혹심한 추위가 닥친다. 메디아 사람들처럼 페르시아 사람들도 필수적인 농경 활동과 더불어 목축을 많이 했던 것 같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은 자신의 고국을 “아름답고 말과 사람이 많은 땅”이라고 자랑스럽게 묘사하였다.—「브리태니커 백과사전」(영문), 1959년, 17권, 603면.
초기에는 다소 간소하게 생활하고 많은 경우 유목 생활을 하였던 페르시아 사람들은 제국 시대가 되자 사치품과 사치스러운 환경을 매우 애호하는 태도를 나타냈다. (더 1:3-7 비교. 또한 더 8:15에서 모르드개가 받은 의복 비교) 페르세폴리스에 있는 조각들은 페르시아 사람들을 발목까지 닿게 늘어뜨려지는 긴옷을 입고 허리에 띠를 매고 끈이 낮게 달린 신발을 신은 모습으로 묘사한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메디아 사람들은 몸에 달라붙고 소매가 긴, 무릎 근처까지 오는 겉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2권, 328면 사진) 페르시아 사람들과 메디아 사람들은 바지도 입었던 것 같다. 페르시아 군인들은 바지를 입고 철 미늘 갑옷 위에다 소매가 있는 가운 모양의 웃옷을 걸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들은 말을 능숙하게 잘 다루었으며 기병대는 그들의 전략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페르시아어는 인도·유럽 어족에 속하는 언어로 분류되며,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와도 관련이 있음이 확연히 드러난다. 페르시아 사람들은 그들의 역사의 어느 시기에 설형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설형 문자는,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의 설형 문자 기록에서 수백 개의 기호를 사용한 것과 비교할 때 사용하는 기호의 수가 훨씬 적었다.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 중에 만들어진 비문들 중에는 고대 페르시아어로 기록되어 있고 거기에 아카드어 번역문과 일반적으로 “엘람어”나 “수사어”로 불리는 언어의 번역문이 딸려 있는 비문이 있다. 하지만 제국 영토 내의 행정에서 사용된 공식 문서들은 주로 국제 공용어였던 아람어로 기록되었다.—라 4:7.
메디아·페르시아 제국의 발전 (2권, 327면 지도) 메디아 사람들처럼 페르시아 사람들도 몇몇 귀족 집안의 통치를 받았던 것 같다. 그러한 귀족 집안 가운데 하나에서 아케메네스 왕조가 탄생하였는데, 페르시아 제국을 설립한 키루스 대왕은 이 왕가 출신이었다. 키루스는 헤로도토스와 크세노폰에 의하면 페르시아 사람 아버지와 메디아 사람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사람으로, 페르시아 사람들을 자신의 지도력 아래 규합하였다. (「헤로도토스」, I, 107, 108; 「키로파이디아」, I, ii, 1) 당시까지만 해도 메디아 사람들이 페르시아 사람들보다 우위에 있었지만 키루스는 메디아 왕 아스티아게스에게 신속하게 승리를 거두고 그의 수도 엑바타나를 함락시켰다(기원전 550년). (단 8:3, 20 비교) 그리하여 메디아 제국은 페르시아 사람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나머지 기간에 메디아 사람들은 페르시아 사람들에게 계속 예속되어 있었지만, 그로 인해 탄생한 제국이 이중 제국의 성격을 띠고 있었음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일례로, 「페르시아 제국사」(37면)에서는 이렇게 알려 준다. “페르시아 사람들과 메디아 사람들의 긴밀한 관계는 결코 소홀히 여겨지지 않았다. 점령지였던 엑바타나는 여전히 왕들이 즐겨 머무르는 곳이었다. 메디아 사람들은 페르시아 사람들과 동일한 영예를 얻었다. 그들은 고위 관직에 등용되고 페르시아군을 지휘하도록 발탁되었다. 타국인들은 늘 메디아 사람들과 페르시아 사람들이라고 말하였고, 한 단어로 그들을 가리킬 경우에는 ‘메디아 사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키루스의 통치 아래 메디아·페르시아 제국은 서쪽으로 더 멀리 뻗어 나갔는데, 페르시아군이 리디아의 크로이소스 왕에게 승리를 거두고 해안 지대에 있는 몇몇 그리스 도시들을 굴복시킴으로 영토가 에게 해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키루스에게 주요한 승리를 안겨 준 일은 기원전 539년에 있었는데, 당시 그는 메디아 사람들과 페르시아 사람들과 엘람 사람들로 이루어진 연합군을 거느리고 강대한 바빌론을 함락시켰다. 그것은 성서 예언들의 성취였다. (사 21:2, 9; 44:26-45:7; 단 5:28) 바빌론이 무너짐으로 인해 셈족이 패권을 장악했던 오랜 기간이 끝나고 처음으로 (야벳에게서 나온) 아리아인 계통의 유력한 세계 강국이 들어서게 되었다. 또한 유다 지역(그리고 시리아와 페니키아)은 메디아·페르시아의 세력권 안에 놓이게 되었다. 유배된 유대인들은 기원전 537년에 키루스의 포고령에 의해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허용되었는데, 그 땅은 정확히 70년간 황폐된 상태로 있었다.—대둘 36:20-23. 키루스 참조.
페르시아의 수도들 이중 제국의 성격에 걸맞게, 패배한 칼데아 사람들의 왕국의 통치자가 된 사람은 다리우스라는 메디아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키루스의 종주권(宗主權)에서 벗어나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단 5:31; 9:1. 다리우스 1번 참조) 바빌론은 메디아·페르시아 제국의 왕도로, 또한 종교와 상업의 중심지로 존속하였다. 하지만 바빌론의 찌는 듯한 여름은 일반적으로 페르시아의 황제들이 기꺼이 참고 견딜 만한 정도를 넘어섰던 것 같으며, 따라서 바빌론이 황제들의 겨울 거처 이상의 역할을 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고고학적 증거에 의하면, 키루스는 바빌론을 정복한 후 이내 엑바타나(현대의 하마단)로 돌아왔는데, 엑바타나는 알완드 산 기슭의 해발 1900미터가 넘는 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리고 추위가 혹심한 반면 여름에는 쾌적한 곳이었다. 엑바타나는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과 관련된 키루스의 비망기가 그 명령이 공포된 지 여러 해 후에 발견된 곳이기도 하다. (라 6:2-5) 페르시아의 이전 수도는 파사르가다에에 있었는데, 그곳은 엑바타나에서 남동쪽으로 약 65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지만 높이는 엑바타나와 같다. 나중에 페르시아의 황제들인 다리우스와 크세르크세스와 아닥사스다(아르타크세르크세스) 롱기마누스는 파사르가다에 근처에 대규모 지하 터널망을 갖춘 페르세폴리스라는 왕도를 건설하였는데, 그러한 지하 터널망은 아마도 담수를 공급하기 위한 것 같다. 또 다른 수도는 고대 엘람의 초아스페스(카르헤) 강 근처에 위치한 수사(수산)였는데, 수사는 바빌론과 엑바타나와 페르세폴리스 사이의 전략적인 요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다리우스 대왕은 수사에 웅장한 궁전을 지었는데, 이 궁전은 대개 겨울 거처로만 사용되었다. 바빌론과 마찬가지로 수사도 여름에는 더위가 극심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수사는 점점 더 제국의 실제적인 행정 중심지가 되었다.—수산; 엑바타나 참조.
종교와 법 페르시아의 통치자들이라고 해서 셈족 계통인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왕들만큼 잔인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법은 없지만 적어도 외견상으로 볼 때 그들은 정복한 민족들을 대하면서 처음에는 공정하고 법에 고착하는 태도를 어느 정도 나타내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의 종교에는 다소간의 윤리 개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고 신인 아후라 마즈다 다음에 오는 주요 신은 미트라였는데, 미트라는 전쟁의 신일 뿐 아니라 계약의 신으로서, 누구든 계약을 위반하는 이를 찾아내기 위해 눈과 귀가 항상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들과 여신들 참조)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I, 136, 138)는 페르시아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였다. “그들은 아들들을 다섯 살부터 스무 살까지 교육시키는데, 아들들에게 단 세 가지 즉 말 타는 법과 활 쏘는 법 그리고 진실을 말하는 법만을 가르친다. ··· 그들은 거짓말을 그 무엇보다도 혐오스럽게 여긴다.” 페르시아 통치자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들이라고 해서 기만과 술책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키라’는 부족의 신조에 원칙적으로 고착하려는 태도는 ‘메디아 사람과 페르시아 사람의 법’을 결코 어겨서는 안 되는 것으로 고집한 데에도 잘 나타나 있는 것 같다. (단 6:8, 15; 더 1:19; 8:8) 그래서 다리우스 왕은 키루스의 포고령에 관한 기록이 그 포고령이 내려진 지 약 18년 후에 발견되었을 때, 성전 건축과 관련하여 유대인들의 입장이 합법적인 것임을 인정하면서 그들에게 협조를 아끼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라 6:1-12.
페르시아의 제국 조직에는 상당한 행정 수완이 반영되어 있다. “페르시아와 메디아의 일곱 방백”으로 이루어진 왕 자신의 자문 위원회 즉 고문단이 있었을 뿐 아니라(더 1:14; 라 7:14), 주요한 지역이나 지방에는 태수들이 임명되어 있었다. 그처럼 태수들이 다스린 곳으로는 메디아, 엘람, 파르티아,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아라비아, 아르메니아, 카파도키아, 리디아, 이오니아 등이 있었으며 제국이 확장되면서 이집트, 에티오피아, 리비아 등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그러한 태수들은 자신의 영토 내의 사법 및 재정 문제를 관할하는 일을 비롯하여, 태수령(太守領)을 통치하는 일에서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부여받았다. (태수 참조) 태수령 내에는 관할 지역(아하수에로 왕 시대에는 127개였음)을 다스리는 하위 총독들이 있었던 것 같으며, 또한 관할 지역 내에는 그 지역 주민을 구성하는 민족들의 방백들이 있었다. (라 8:36; 더 3:12; 8:9) 아마도 광대한 영토의 다소 구석진 곳에 제국의 수도가 위치해 있기 때문에 생기는 불리한 점을 극복하기 위해, 역마를 타는 파발꾼을 이용한 왕명 전달 방식에 기반을 둔 신속한 통신망이 구축되었으며 그리하여 왕권이 모든 관할 지역에 미치게 되었다. (더 8:10, 14) 왕의 직할 대로들은 잘 유지 보수되었는데, 그중 하나는 수산에서 멀리 소아시아의 사르디스(사데)까지 이어져 있었다.
키루스가 사망한 때부터 다리우스가 사망한 때까지 키루스 대왕의 통치는 그가 원정길에서 사망한 해인 기원전 530년에 끝났다. 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캄비세스가 왕위에 올랐는데, 그는 이집트를 성공적으로 정복하였다. 성서에 캄비세스라는 이름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그는 “아하수에로”인 것 같은데, 성전 공사를 반대하는 자들은 에스라 4:6에서 알려 주는 것처럼 아하수에로에게 유대인들을 거짓 고발하는 글을 썼다.
캄비세스의 통치의 끝과 관련된 상황은 명확하지 않다. 다리우스 대왕이 베히스툰 비문에서 말한 내용과 헤로도토스를 비롯한 여러 역사가들이—서로 차이점은 있지만—알려 주는 내용에 근거한 한 가지 설명은, 캄비세스가 자기 형제인 바르디야(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스메르디스)를 몰래 살해하였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캄비세스가 이집트에 가고 없는 동안, 사제 집단인 마기에 속한 가우마타(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스메르디스)라는 인물이 바르디야(스메르디스)의 행세를 하면서 왕좌를 찬탈하였으며 왕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캄비세스는 이집트에서 돌아오는 길에 죽었으며 그리하여 왕위를 찬탈한 가우마타는 왕위를 공고히 하게 되었다. (「헤로도토스」, III, 61-67) 일부 역사가들이 지지하는 또 다른 설명은 바르디야가 살해되지 않았으며 그를 사칭한 어떤 사람이 아니라 그 자신이 캄비세스가 자리를 비운 동안 왕위를 찬탈하였다는 것이다.
아무튼 캄비세스의 통치는 기원전 522년에 끝났으며 그 후임자의 통치도 7개월간 지속되다가 (바르디야이든 아니면 가짜 스메르디스인 가우마타이든) 왕위를 찬탈한 그 사람이 암살됨으로 인해 역시 기원전 522년에 끝났다. 하지만 아마도 이처럼 짧은 통치 기간에 페르시아 왕에게 유대인들을 두 번째로 고발하는 일이 있었던 것 같다. 당시의 왕은 성서에서 “아닥사스다”(아마 왕위에 올랐을 때 부여된 이름 혹은 칭호)로 불리는 인물이었는데, 이번에는 그 고발이 성과를 거두어 성전 건축을 진척시키지 못하게 하는 왕의 금지령이 내려졌다. (라 4:7-23) 그 후 성전 공사는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통치 제이 년까지” 중지된 상태로 있었다.—라 4:24.
다리우스 1세(다리우스 히스타스피스 혹은 다리우스 대왕으로도 불림)는 페르시아의 왕위에 있던 사람을 계략이나 선동을 통해 살해하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통치 중에 예루살렘 성전 공사는 왕의 인가를 받아 다시 진행되었으며 성전은 그의 통치 제육 년(기원전 515년 초)에 완공되었다. (라 6:1-15) 다리우스의 통치 시대는 제국의 영토 확장이 두드러진 시기였다. 그는 페르시아의 영토를 동쪽으로는 인도까지 그리고 서쪽으로는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까지 넓혔다.
다니엘 7:5과 8:4에 나오는 상징적 표현이 사용된 예언들은 늦어도 이 시기까지는 페르시아의 통치자들을 통해 성취되었다. 그 성구들에서 곰과 숫양으로 상징되어 있는 메디아·페르시아 제국은 주요한 세 방향 즉 북쪽과 서쪽과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그리스 원정 중에 다리우스의 군대는 기원전 490년에 마라톤에서 패배를 맛보았다. 다리우스는 기원전 486년에 사망하였다.—다리우스 2번 참조.
크세르크세스와 아닥사스다의 통치 다리우스의 아들 크세르크세스는 에스더기에서 아하수에로로 나오는 왕인 것 같다. 그의 행적은 페르시아의 넷째 왕에 대한 묘사와도 일치한데, 그는 “그리스 왕국을 대적하여 모든 것을 일으킬 것”이었다. (단 11:2) 크세르크세스는 페르시아가 마라톤에서 당한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기원전 480년에 그리스 본토로 대군을 진격시켰다. 그의 군대는 테르모필레에서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나마 승리를 거두고 또한 아테네를 황폐시켰지만 뒤이어 살라미스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플라타이아이에서 패하였으며 그로 인해 크세르크세스는 페르시아로 후퇴하게 되었다.
크세르크세스 통치 시대의 특징은 여러모로 행정 개혁이 단행되었다는 것과, 그의 아버지가 페르세폴리스에서 착수한 건축 공사 가운데 많은 부분이 끝마쳐졌다는 것이다. (더 10:1, 2 비교) 그리스의 기록들에서 크세르크세스의 통치의 끝 부분과 관련하여 주로 등장하는 것은 결혼 생활의 불화와 하렘의 무질서, 그리고 크세르크세스가 몇몇 조신들에게 조종당하는 것 같은 일 등이다. 매우 혼란스럽고 왜곡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러한 이야기들은, 왕비 와스디가 폐위되고 그 대신에 에스더가 왕비가 된 일과 또한 모르드개가 제국에서 큰 권세가 있는 지위에 오르게 된 일을 포함하여, 에스더기의 기본 골격을 이루는 사실들 가운데 일부와 일치한 것일 수 있다. (더 2:17; 10:3) 세속 기록에 의하면, 크세르크세스는 조신 가운데 한 사람에 의해 암살되었다.
크세르크세스의 계승자인 아닥사스다 롱기마누스는 에스라에게 많은 헌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그곳에 있는 성전을 지원하도록 허가해 준 왕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 일은 아닥사스다 제칠 년(기원전 468년)에 있었다. (라 7:1-26; 8:24-36) 아닥사스다 제20년(기원전 455년)에는 느헤미야가 허가를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도시를 재건하게 되었다. (느 1:3; 2:1, 5-8) 나중에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제32년(기원전 443년)에 그 왕의 궁정에 잠시 돌아왔다.—느 13:6.
크세르크세스와 아닥사스다의 통치와 관련하여 역사 기록들에는 다소 일치하지 않는 점이 있다. 참조 문헌들에서는 아닥사스다의 즉위년을 기원전 465년으로 잡는다. 일부 문서에서는 그의 아버지 크세르크세스의 통치가 21년째 되는 해까지 계속되었다고 알려 준다. 통상적으로 크세르크세스의 통치 기간은 그의 아버지 다리우스가 죽은 때인 기원전 486년부터 계산한다. 또한 크세르크세스 자신의 재위 원년은 기원전 485년에 시작된 것으로 간주되며, 그의 통치 21년과 아닥사스다의 즉위년은 많은 경우 기원전 465년으로 제시된다. 아닥사스다와 관련하여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그가 통치한 마지막 해가 기원전 424년에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일부 문서들에서는 그해가 아닥사스다 통치 제41년이었다고 알려 준다. 만일 그러한 주장들이 옳다면, 그의 즉위년은 기원전 465년이었고 그의 재위 원년은 기원전 464년에 시작되었음을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크세르크세스의 마지막 해와 아닥사스다의 즉위년을 기원전 475년으로 계산해야 한다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 그 증거는 세 가지 즉 그리스의 자료, 페르시아의 자료, 바빌론의 자료이다.
그리스 자료들의 증거 그리스의 역사에서 있었던 한 가지 사건은 아닥사스다(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통치가 언제 시작되었는지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리스의 정치가이며 전쟁 영웅인 테미스토클레스는 동족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어 안전한 곳을 찾아 페르시아로 도망하였다. 정확한 기록으로 명성을 얻은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I, CXXXVII, 3)에 의하면, 당시 테미스토클레스는 “최근에 왕위에 오른 크세르크세스의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왕에게 편지를 보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Plutarch’s Lives, ‘테미스토클레스’, XXVII, 1)에서는, “투키디데스와 람프사코스의 카론의 말에 따르면, 크세르크세스는 죽었고 테미스토클레스가 대면한 사람은 그의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였다”고 알려 준다. 카론은 통치자가 크세르크세스에서 아닥사스다로 바뀌는 시기에 살았던 페르시아의 신하이다. 투키디데스와 람프사코스의 카론이 제시하는 증거를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테미스토클레스는 아닥사스다가 통치를 막 시작했을 때 페르시아에 도착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테미스토클레스가 죽은 때로부터 거슬러서 계산하면 아닥사스다가 통치를 시작한 때가 언제인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사망한 시기에 대해 모든 참조 문헌들이 동일한 시기를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역사가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시칠리아의 디오도로스」 Diodorus of Sicily, XI, 54, 1; XI, 58, 3)는 “프락시에르구스가 아테네에서 아르콘으로 있을 때” 일어난 사건들에 관해 기록하면서 테미스토클레스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였다. 프락시에르구스가 아테네에서 아르콘으로 있었던 때는 기원전 471/470년이었다. (「그리스·로마 연대기」 Greek and Roman Chronology, 앨런 E. 새뮤얼, 뮌헨, 1972년, 206면) 투키디데스에 의하면,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에 도착한 다음 아닥사스다를 알현하기 위한 준비로 일 년간 언어 공부를 했다. 뒤이어 아닥사스다 왕은 그에게 많은 영예를 주면서 페르시아에 정착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만일 테미스토클레스가 기원전 471/470년에 죽었다면, 분명 그는 늦어도 기원전 472년에는 페르시아에 정착하였을 것이며 그곳에 도착한 때는 한 해 전인 기원전 473년이었을 것이다. 당시 아닥사스다는 “최근에 왕위에 [올라 있었다].”
크세르크세스가 사망하고 아닥사스다가 왕위에 오른 시기에 관해 M. 드 쿠토르가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크세르크세스가 투키디데스의 연대기에 따르면 기원전 475년 말쯤에 죽었다는 사실, 그리고 동 역사가에 의하면 테미스토클레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롱기마누스가 왕위에 오르고 얼마 안 되어 소아시아에 도착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다양한 학자들이 프랑스 제국 학사원의 문예·비문 아카데미에 제출한 논문집」(Mémoires présentés par divers savants à l’Académie des Inscriptions et Belles-Lettres de l’Institut Impérial de France), 1집, 6권, 2부, 파리, 1864년, 147면.
그 점을 지지하는 또 다른 증거로서, E. 레베스크는 이렇게 지적하였다. “따라서 「알렉산드리아 역대기」(Alexandrian Chronicle)에 의하면, 크세르크세스는 11년간 통치한 후 기원전 475년에 사망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역사가 유스티누스(III, 1)는 이 연대기의 내용과 투키디데스의 주장을 확증한다. 그에 의하면, 크세르크세스가 살해되었을 때 그의 아들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어린아이 곧 푸에르[소년]에 불과하였는데, 만일 크세르크세스가 기원전 475년에 사망하였다면 그것이 사실일 것이다. 당시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16세였던 것이다. 하지만 465년에는 그가 이십육 세였을 것이며, 그렇다면 유스티누스의 표현이 옳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이 연대기에 의하면,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기원전 475년에 통치를 시작했기 때문에 그의 통치 20년은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것과는 달리 기원전 445년이 아니라 기원전 455년이다.”—「호교론 평론」(Revue apologétique), 파리, 68권, 1939년, 94면.
다리우스가 기원전 486년에 죽었고 크세르크세스가 기원전 475년에 죽었다면, 일부 고대 문서들에서 크세르크세스가 21년간 통치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왕과 그의 아들이 이중 왕권을 행사하여 함께 통치하는 경우, 다시 말해 공동 통치를 하는 경우가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다리우스와 크세르크세스의 경우도 그러하였다면, 역사가들은 크세르크세스가 통치한 해를 그가 아버지와 공동 통치를 시작한 때부터 계산할 수도 있고 혹은 그의 아버지가 사망한 때로부터 계산할 수도 있었다. 만일 크세르크세스가 아버지와 함께 10년을 통치하였고 혼자서 11년을 통치하였다면, 일부 자료에서는 그의 통치 기간이 21년이었다고 할 수 있고 다른 자료에서는 그의 통치 기간이 11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크세르크세스가 그의 아버지 다리우스와 공동 통치를 하였다는 확실한 증거도 있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VII, 3)는 이렇게 알려 준다. “다리우스는 [왕권을 달라는] 그[크세르크세스]의 청원을 정당한 것으로 판단하여 그를 왕으로 공포하였다. 하지만 내 생각에 크세르크세스는 그런 의견을 내지 않았어도 왕이 되었을 것이다.” 이 기록으로 볼 때 크세르크세스는 그의 아버지 다리우스의 통치 중에 왕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페르시아 자료들의 증거 크세르크세스가 다리우스와 함께 공동 통치를 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발굴된 페르시아의 얕은 돋을새김들에 특히 잘 나타나 있다. 페르세폴리스에서는 얕은 돋을새김이 여러 개 발견되었는데, 그 조각품들에서는 크세르크세스가 자기 아버지의 왕좌 뒤에 서 있지만 아버지의 옷과 똑같은 옷을 입고 있고 머리의 높이가 아버지의 머리 높이와 같은 것으로 묘사한다. 이러한 모습은 매우 이례적인 것인데, 일반적으로 왕의 머리는 다른 모든 사람의 머리보다 높은 위치에 그려지기 때문이다. 「페르세폴리스에서 발견된 새로운 크세르크세스 비문」(A New Inscription of Xerxes From Persepolis, 에른스트 E. 헤르츠펠트, 1932년)에도 페르세폴리스에서 발견된 비문들과 건물들 역시 크세르크세스가 그의 아버지 다리우스와 공동 통치를 하였음을 암시한다고 지적되어 있다. 헤르츠펠트는 자신의 저서의 8면에서 이렇게 썼다. “페르세폴리스에서 발견된 크세르크세스의 비문들이 대부분의 경우 크세르크세스 자신의 행적과 그의 아버지의 행적을 구별하지 않는 독특한 성격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이나, 그들의 건물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다리우스를 위한 것인지 크세르크세스를 위한 것인지 구분할 수 없는 독특한 관계에 있다는 점이 한결같이 시사하는 바는 크세르크세스가 일종의 공동 통치를 하였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페르세폴리스에 있는 두 개의 조각 역시 그러한 관계가 존재하였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그 조각 중 하나에 관해 헤르츠펠트는 이렇게 지적하였다. “다리우스는 그의 제국의 여러 민족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떠받들고 있는 높은 침상 모양의 대(臺) 위에 온갖 왕권 상징물을 지니고 앉아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돋을새김에서 그의 뒤에는, 즉 실제로 보면 그의 오른편에는 크세르크세스가 역시 동일한 왕권 상징물들을 지니고 왼손을 그 왕좌의 높은 등받이에 얹은 채 서 있다. 이것은 분명 단순한 계승자 이상의 지위를 시사하는 자세이다. 그 자세는 공동 통치를 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리우스와 크세르크세스를 그런 식으로 묘사한 돋을새김들의 연대와 관련하여 앤 파르카스는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의 조각」(Achaemenid Sculpture, 이스탄불, 1974년, 53면)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 돋을새김들이 보물고에 설치된 시기는 그 보물고의 첫 번째 증축 부분이 건축 중이던 주전 494/493년에서 492/491년 사이의 어느 때였을 수 있다. 분명 그때는 그처럼 부피가 큰 석조물을 옮기기에 가장 용이한 시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조각품들이 보물고로 옮겨진 시기가 언제이든 간에 그 조각품들은 아마도 490년대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바빌로니아 자료들의 증거 크세르크세스가 기원전 490년대에 그의 아버지 다리우스와 공동 통치를 시작했다는 증거는 바빌론에서도 발견되었다. 그곳에서 행해진 발굴 작업에서는 기원전 496년에 완공된 크세르크세스의 궁전을 발견하였다. 이 점과 관련하여 A. T. 옴스테드는 「페르시아 제국사」(215면)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가 알게 된 바에 의하면, 498년 10월 23일 무렵 바빌론에서는 왕의 아들[다시 말해, 다리우스의 아들 크세르크세스]의 집이 세워지고 있었다. 의문의 여지 없이 이것은 우리가 이미 설명한 중심 구획에 있는 다리우스의 궁전이다. 보르시파 인근에서 발견된 한 사업 문서에는, 2년 후[기원전 496년] 그 ‘새로운 궁전’이 이미 완공되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크세르크세스가 다리우스와 공동 통치를 했다는 사실에 대한 또 다른 증거가 될 만한 것으로 두 개의 특이한 점토판이 있다. 그중 한 점토판은 한 건물의 임대료에 관한 크세르크세스의 즉위년의 사업 문서이다. 이 서판은 그해의 첫째 달인 니산월에 작성된 것이다. (「옥스퍼드 대학교 보들리 도서관의 후기 바빌로니아 서판 목록」 A Catalogue of the Late Babylonian Tablets in the Bodleian Library, Oxford, R. 캠벨 톰프슨, 런던, 1927년, 13면, 서판명 A. 124) 또 다른 서판에는 “크세르크세스의 즉위년의 아브(?)월”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다. 주목할 만한 점으로 이 나중 서판에서는 크세르크세스에게 당시에 일반적이었던 “바빌론의 왕, 나라들의 왕”이라는 칭호를 붙이지 않고 있다.—「신바빌로니아의 법률·행정 문서 번역 및 해설」(Neubabylonische Rechts- und Verwaltungsurkunden übersetzt und erläutert), M. 산 니콜로와 A. 웅그나트 공저, 라이프치히, 1934년, 1권, 4부, 544면, 서판 634호, 명칭 VAT 4397.
이 두 서판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왕의 즉위년은 대개 선왕이 사망한 후에 시작된다. 하지만 증거에 의하면, 크세르크세스의 선왕(다리우스)은 그의 통치 마지막 해의 일곱째 달까지 살았다. 그런데 크세르크세스의 즉위년에 작성된 이 두 서판에는 일곱째 달 이전의 날짜(하나는 첫째 달, 다른 하나는 다섯째 달)가 적혀 있다. 따라서 이 문서들은 크세르크세스의 아버지가 죽은 후 크세르크세스가 즉위한 시기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그가 다리우스와 공동 통치를 하고 있는 기간 중의 즉위년에 대해 알려 주는 것이다. 만일 그 즉위년이 바빌론에 있는 크세르크세스의 궁전이 완공된 때인 기원전 496년이었다면, 그가 공동 통치자로서 통치한 첫해는 이듬해인 기원전 495년 니산월에 시작되었을 것이며 그의 통치 제21년이자 마지막 해는 기원전 475년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할 경우, 크세르크세스의 통치 기간은 다리우스와 함께 통치한 10년(기원전 496년부터 486년)과 혼자서 왕위에 있었던 11년(기원전 486년부터 475년)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한편, 역사가들은 다리우스 2세의 재위 원년이 기원전 423년 봄에 시작되었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바빌론의 한 서판에서도 다리우스 2세가 자신의 즉위년 열한째 달 4일 즉 기원전 423년 2월 13일에 이미 왕위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바빌로니아 연대기, 주전 626년–주후 75년」 Babylonian Chronology, 626 B.C.–A.D. 75, R. 파커와 W. H. 더버스타인 공저, 1971년, 18면) 하지만 두 개의 서판에서는 아닥사스다의 통치가 그의 통치 41년 열한째 달 4일 이후로도 계속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 서판들 중 하나는 그의 통치 41년 열한째 달 17일에 만들어진 것이다. (18면) 그리고 나머지 한 서판은 그의 통치 41년 열두째 달에 만들어진 것이다. (「구약과 셈어 연구」 Old Testament and Semitic Studies, 하퍼, 브라운, 무어 공저, 1908년, 1권, 304면, 서판 12호, 명칭 CBM, 5505) 따라서 아닥사스다는 그의 41번째 재위년에도 계승자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고 그해 내내 통치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보건대, 아닥사스다의 통치 기간은 틀림없이 41년을 넘었을 것이며 따라서 그의 재위 원년을 기원전 464년에 시작된 것으로 계산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알게 된다.
아닥사스다 롱기마누스가 그의 통치 제41년 이후에도 통치를 계속했다는 증거로 보르시파에서 발견된 한 사업 문서가 있는데, 그 문서는 아닥사스다 통치 제50년에 작성된 것이다. (「대영 박물관의 바빌로니아 서판 목록」 Catalogue of the Babylonian Tablets in the British Museum, 7권: ‘시파르 2의 서판들’, E. 라이히티와 A. K. 그레이슨 공저, 1987년, 153면, 서판명 B. M. 65494) 아닥사스다의 통치가 끝난 때와 다리우스 2세의 통치가 시작된 때를 연결해 주는 서판들 가운데 하나에는 다음과 같은 일자가 나와 있다. “즉위년인 제51년, 열두째 달 20일, 나라들의 왕 다리우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바빌로니아 탐사대, 시리즈 A: 설형 문자 문헌」 The Babylonian Expedition of the University of Pennsylvania, Series A: Cuneiform Texts, 8권, 1부, 앨버트 T. 클레이, 1908년, 34, 83면, 도판 57, 서판 127호, 명칭 CBM 12803) 다리우스 2세의 재위 원년은 기원전 423년이었으므로 결국 아닥사스다 제51년은 기원전 424년이었고 그의 재위 원년은 기원전 474년이었다.
따라서 그리스와 페르시아와 바빌로니아의 자료들에 근거한 증거들은 공통적으로 아닥사스다의 즉위년이 기원전 475년이었고 그의 재위 원년은 기원전 474년이었음을 밝혀 준다. 따라서 다니엘 9:24에 나오는 70주가 계산되기 시작하는 때인 아닥사스다 제20년은 기원전 455년이 되는 것이다. 다니엘 9:25을 근거로 해로 된 69주(483년)를 기원전 455년부터 계산하면, 지도자인 메시아가 나타나게 되어 있는 중요한 해에 이르게 된다.
기원전 455년부터 기원 1년까지 계산하면 만 455년이 된다. 여기에 (총 483년이 되도록) 남은 28년을 더하면 기원 29년이 나오는데, 바로 그해에 나사렛 예수께서는 물 침례를 받고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아 메시아 곧 그리스도로 공개 봉사를 시작하셨다.—누 3:1, 2, 21, 22.
제국의 몰락과 분열 아닥사스다 롱기마누스의 뒤를 이은 페르시아의 왕위 계승자와 관련하여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다음과 같은 점을 알려 준다. “아시아에서 크세르크세스 왕은 일 년간 혹은 일부 기록에 의하면 2개월간 통치한 후 사망하였으며 그의 형제인 소그디아누스가 왕위를 계승하여 7개월간 다스렸다. 그는 다리우스에게 살해되었으며 다리우스는 19년간 통치하였다.” (「시칠리아의 디오도로스」, XII, 71, 1) 이 다리우스(다리우스 2세로 알려짐)는 원래 이름이 오쿠스였는데, 왕이 되자 다리우스라는 이름을 받아들였다. 그는 느헤미야 12:22에 나오는 “다리우스”인 것 같다.
다리우스 2세에 이어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므네몬으로 불림)가 등장하였는데, 그의 통치 중에는 이집트가 반란을 일으켰으며 그리스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그의 통치(기원전 404년부터 359년으로 추정됨)에 이어 그의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오쿠스로도 불림)가 통치하였는데, 그는 약 21년 동안(기원전 358-338년) 다스렸던 것으로 생각되며 페르시아의 모든 통치자들 가운데 가장 피를 많이 흘린 사람으로 전해진다. 그의 주된 업적은 이집트를 다시 정복한 것이다. 세속 역사에 의하면, 그 후에는 아르세스가 2년간 다스렸고 다리우스 3세(코돔마누스)가 5년간 다스렸는데, 다리우스 3세의 통치 중에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가 살해되고(기원전 336년) 그의 아들 알렉산더가 그 뒤를 이었다. 기원전 334년에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제국을 공격하기 시작하여 처음에는 소아시아의 북서쪽 귀퉁이에 있는 그라니코스에서, 그리고 또다시 소아시아의 반대쪽 귀퉁이에 있는 이수스에서 페르시아군을 패퇴시켰다. (기원전 333년) 그리스인들이 페니키아와 이집트를 정복한 후 결국 페르시아의 마지막 저항은 기원전 331년에 가우가멜라에서 분쇄되고 페르시아 제국은 막을 내렸다.
알렉산더가 죽고 그의 제국이 분열되자 셀레우코스 니카토르는 페르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의 영토의 주요 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셀레우코스 왕조가 시작되어 기원전 64년까지 존속하였다. 다니엘의 예언에 나오는 “북방 왕”이라는 예언적 인물은 셀레우코스 니카토르를 통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 같다. 그는 상징적인 “남방 왕”의 역할을 최초로 맡은 것으로 보이는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대적하였다.—단 11:4-6.
기원전 3세기와 2세기에 원래 페르시아의 영토였던 지역을 정복했던 파르티아인들의 침입으로 인해,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들은 자기들의 영토의 서쪽 지역으로만 영향력이 제한되게 되었다. 파르티아인들은 기원 3세기에 사산인들에게 패하였으며 사산 왕조의 통치는 7세기에 아랍인들이 정복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에스겔(27:10)의 예언에는 페르시아 사람들이 부유한 티레의 군대에서 복무하고 티레의 영화를 더해 주는 전사들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 또한 페르시아는 상징적인 “마곡 땅의 곡”의 인도 아래 여호와의 계약 백성들을 대적하는 큰 무리를 이루는 민족들 가운데 언급되어 있다.—겔 38:2, 4, 5, 8,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