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신임받는 동역자로서 섬기는 일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친절, 신세]를 사랑하며 겸손히[겸허하게, 신세]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 6:8.
1. 오늘날의 여호와의 종들 모두를 그분의 “동역자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무슨 성경적 근거가 있읍니까?
그리스도의 사도 요한은 이렇게 편지하였읍니다. “보시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큽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게 되었읍니다. 사실 우리는 그의 자녀입니다.” (I 요한 3:1, 새번역) 그리고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과 동료인 아볼로에 관해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라고 하였읍니다. (고린도 전 3:9) 이 말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기름부음받은 추종자들이 한 말이거나 그들에 관한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들은 원칙적으로 하나님의 참된 종들 모두에게 적용됩니다. 따라서 이 말들은 이러한 뜻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시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큽니까? 우리가 여호와의 동역자들이 된다니 말입니다.’
2. 여호와의 종들이 그분의 동역자가 되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약하고 불완전한 인간들이, 능력과 지혜가 무한하며 공의가 완전하고 사랑의 구현체이신 위대한 창조주의 동역자가 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의 첫 조상이 창조주 및 그분의 동역자인 말씀 즉 로고스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창세 1:26, 27; 요한 1:1) 그러므로 우리의 첫 조상은 어느 정도 지혜, 공의, 능력 및 사랑을 부여받았읍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지상에 있는 종들에게 예언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읍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친절, 신세]를 사랑하며 겸손히[겸허하게, 신세]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 6:8.
3. 미가 6:8에는 무슨 의미가 함축되어 있으며, 사람이 여호와의 동역자가 되려면 먼저 무엇이 요구됩니까?
3 우리는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이라는 말을 읽을 때, 이어서 나오는 말에 하나님과 동료 인간들에 대한 “사람”의 책임이 아주 잘 요약되어 있을 것이라는 암시를 받게 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어느 정도나 그러한지는 이제 논의해 나가면서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저 아무나 여호와와 동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말하자면, ‘약속을 해서 그분을 만난’ 사람들만이 그러한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아모스 3:3, 현대인의 성경 참조) 어떻게 그런 약속을 합니까? 앞의 기사에서 지적한 대로, 여호와께 무조건 헌신하고 그 상징으로 물 침례를 받음으로써 그러한 약속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미가 6:8은 이러한 약속을 한 사람들 개개인에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공의를 행함’
4. 기본적으로, “공의를 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4 우선, 한 가지 요구 조건은 “공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우리는 선한 양심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공의를 행”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옳은 일을 하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무를 다하는 것, 그중 첫째가는 것으로서 여호와께 온 정성을 다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훔 1:2, 신세) 그분은 어떠한 경쟁자도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결단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읍니다.—고린도 전 10:22; 마태 6:24.
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신다는 점을 어떻게 나타내셨읍니까?
5 더우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하셨던 것처럼 “공의를 행”하기 위해 “정의[의, 신세]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께서는 의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셨읍니다. (시 45:7; 히브리 7:26) 또한 예수께서는 악을 미워하셨기 때문에 의분을 느끼셔서 그 당시의 위선적이고 탐욕적인 종교 지도자들을 심히 꾸짖으셨읍니다.—마태 23:13-36; 요한 8:44.
6. 악하기 때문에 금지된 것을 우리가 피해야 한다는 것에 단순히 정신적으로 동의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6 예수의 본을 통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의를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또한 악을 미워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몹시 싫어하고 강한 혐오감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경향이 어려서부터 악하고 우리 마음이 거짓되고 심히 부패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악한 일이 금지되어 있음을 정신적으로 동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합니다. (창세 8:21; 예레미야 17:9) 우리가 죄 짓기 쉬운 경향과 유혹에 단호하게 맞서지 않는다면, 그러한 것들에 이끌려 들어가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악한 일에 대해, 비느하스가 바알브올의 부도덕한 숭배 행위에 교합해 있는 남녀를 창으로 꿰뚫었을 때 나타냈던 바와 동일한 강한 혐오감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민수 25:5-8.
7. 여호와께서는 악한 사람을 자신의 동역자로 사용하시지 않는다는 무슨 증거가 있읍니까?
7 여호와께서는 악한 사람을 자신의 동역자로 사용하기를 원하지 않으시며 또 사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 점이 시편 50:16-18에 이렇게 분명히 나와 있읍니다.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네가 어찌 내 율례를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 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며 도적을 본즉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와 동류가 되[는도다.]”
8. 우리가 범죄를 저지를 때 비난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을 무슨 사건이 분명히 알려 줍니까?
8 우리는 하나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에 여호와의 봉사에서 매우 바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극히 조심하여 자제를 행사하지 않는다면, 육체의 약함으로 인해 잘못을 저지르거나 여호와의 이름에 비난을 돌릴 수 있읍니다. 예를 들어, 몇해 전에 한 장로는 믿지 않는 남편이 있는 영적 자매와 간음을 범하였읍니다. 그 장로였던 사람이 제명되었다는 사실이 발표되던 날 저녁에, 격분한 남편은 엽총을 들고 왕국회관으로 들어와서 범죄한 두 사람을 향해 총을 난사하였읍니다. 그 두 사람이 죽지는 않았지만, 그 다음날 이 사건은 미국에서 가장 큰 신문의 제 1면에 실렸읍니다! 참으로, 범죄는 비난을 돌립니다.—잠언 6:32.
9. 잠언 4:23에 따르면, 우리는 무엇을 지켜야 하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9 그러므로 적절하게도 우리는 이러한 교훈을 받고 있읍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언 4:23)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에 대해 자신을 징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텔레비전, 잡지 및 그외 여러 형태의 보도 매체들이 점점 더 외설물을 포함하여 불결한 것들을 위주로 하고 있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고 듣고 읽는 것에 대해 매우 선택적이 되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생각을 통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정신 속에 우리가 실생활에서는 행동으로 옮기려는 생각도 하지 않을 일들인 성적 공상을 떠 올려 쾌락을 이끌어 내기는 쉬운 일일 수 있읍니다. (마태 5:28) 그러나 그러한 생각을 한 결과 나쁜 행동을 하게 되는 일이 실제로 자주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일들을 정신 속에서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인 자제를 나타내고 빌립보서 4:8에 나와 있는 것들을 곰곰이 생각하도록 합시다.—갈라디아 5:22, 23.
‘친절을 사랑하라’
10, 11. (ㄱ) 충실함과 충성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읍니까? (ㄴ) 하나님의 아들은 어떻게 충실함과 충성을 나타내셨읍니까?
10 미가 6:8에 언급된 두번째 요구 조건은 우리가 “친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신영어 성서」에는 이 귀절이 “충성을 사랑하라”(“love loyalty”)로 되어 있읍니다. 「신세계역 참조주 성서」의 각주는 “친절”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헤세드가 “사랑의 친절”(loving-kindness) 혹은 “충성스러운 사랑”(loyal love)으로도 번역될 수 있음을 알려 줍니다. 사전 편집자들에 의하면, “‘충성스러운’은 저버리거나 배신하게 만들려는 어떠한 유혹도 단호히 저항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충성스러운’은 ‘충실한’이라는 의미에 사람이나 사물을 지지하고 위하여 싸우려 하는, 힘겨운 상대와도 맞서려 한다는 개념이 더해진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우리는 또한 성경 가운데서 이 두 단어의 사용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충성”이란 단어는 결코 무생물에 사용되는 일이 없읍니다. 그러나 “충실한”이란 단어는 자주 무생물에 사용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달은 “하늘의 충실한 증인”이라고 불립니다. (시 89:37, 현대인의 성경) 또한, 그외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충실하다고 (faithful), 다시 말해서 믿을 만하다고 되어 있읍니다.a (계시 21:5; 22:6, 신세 참조) 그러나, 충성은 여호와 하나님과 그분의 승인받은 종들에게만 있는 특성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호와에 관하여 이러한 기록을 읽게 됩니다. “충성스러운 자에게는 당신도 충성으로 행하실 것[입니다.]”—사무엘 하 22:26, 신세.
11 하나님의 아들은 하늘에 계신 여호와께 충실하면서도 충성스러운 분이었읍니다. 그분은 지상에 계실 때 인간 예수 그리스도로서 시험들을 받으셨으며 순종으로써 자신이 인간으로서 충실하면서도 충성스러운 분임을 증명하셨읍니다. 그 점이 히브리서 5:7-9의 이러한 기록에 잘 지적되어 있읍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니라.]”
충성의 시험
12. 때때로, 무엇이 우리의 충성에 시험이 될 수 있으며, 일부 사람들은 그러한 시험에 어떤 반응을 보였읍니까?
12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충성에는 우리가 또한 지상에 있는 그분의 종들인 우리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충성하는 것도 요구됩니다. 사도 요한은 그 점을 분명히 밝히면서 우리에게 이렇게 상기시켜 줍니다.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요한 1서 4:20) 다른 사람들의 불완전성이 이 점에 있어서 우리의 충성을 시험하는 것이 될 수 있읍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감정이 상하게 되었을 때 그리스도인 집회에 빠짐으로써 여호와의 조직에 대한 충성심이 약함을 나타냈읍니다. 또 다른 시험으로서, 여호와께서 인도하도록 사용하시는 형제들이 잘못 판단하는 일이 있을 때 형제들에 대한 우리의 충성심이 시험받게 됩니다. 이따금, 일부 사람들은 그러한 실수들을 구실삼아 화를 내면서 여호와의 보이는 조직으로부터 스스로 이탈하였읍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의 행로가 정당화됩니까? 결코 정당화될 수 없읍니다!
13. 여호와의 조직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러한 불충성스러운 사람들에게 제시되는 대안은 무엇입니까?
13 그러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조직을 떠난 일은 왜 정당화될 수 없읍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이렇게 확약해 주기 때문입니다. “주[여호와]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시 119:165) 더우기, 우리는 이러한 명령을 받고 있읍니다.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베드로 전 4:8; 잠언 10:12) 그에 더하여, 어떤 사람이 자신을 여호와의 백성으로부터 분리시키려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이 갈 수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그 사람은 예수의 사도들이 그들도 예수를 떠나기를 원하는지를 질문받았을 때 직면했던 동일한 문제에 직면한 것이 아닙니까?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올바른 대답을 하였읍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요한 6:68) 거짓 종교 세계 제국인 “큰 바벨론”으로 가거나 사단의 정치적 “짐승”의 손아귀 아래로 들어가는 것 외에는 달리 갈 곳이 없읍니다. (계시 13:1; 18:1-5) 여호와의 보이는 조직을 떠난 불충성스러운 사람들은 대부분 하나님께 불명예를 돌리는 “큰 바벨론”에 속한 사람들과 연합 전선을 폈읍니다.
‘겸허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라’
14, 15. (ㄱ) ‘겸허한’으로 번역된 영어 단어에는 무슨 의미가 있읍니까? (ㄴ) 이 항에서 우리는 ‘겸허한’의 어느 의미에 관심이 있으며, 무슨 이유로 관심이 있읍니까? (ㄷ) 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능력이나 가치에 대하여 합당한 평가를 내’려야 합니까?
14 ‘겸허한’으로 번역된 영어 단어 (modest)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읍니다. 그 단어는 뽐내지 않는, “크기, 양 혹은 규모에 있어서 제한된”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읍니다. 또한 그 단어는 “옷차림과 품행에 있어서 예의 범절을 지키는” 정숙한 태도를 의미할 수 있읍니다. (디모데 전 2:9) 그외에도, ‘겸허한’으로 번역된 그 단어에는, 우리가 지금 특별히 관심이 있는 의미인,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 것 혹은 “자신의 능력이나 가치에 대하여 합당한 평가를 내리는 것”이라는 의미도 있읍니다. 우리는 자신의 견해를 너무 높이 평가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우선적인 주의를 돌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의를 돌리면서 결코 여호와의 동역자가 될 수 없읍니다.
15 ‘자신의 능력이나 가치에 대하여 합당한 평가를 내리는 것’이 미가 6:8에서 ‘겸허한’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에 우리가 포함시켜야 하는 분명한 의미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그 단어가 나오는 다른 유일한 곳에서 그 단어가 사용된 방법을 보아도 그 점을 분명히 알 수 있읍니다. 잠언 11:2(신세)에서 그 단어는 성적 불결함이 아니라, 자신을 너무 높이 평가하는 결과인 주제넘음과 대조되어 있읍니다. 그 귀절에서 우리는 이러한 기록을 읽어 보게 됩니다. “주제넘음이 왔는가? 그러면 불명예가 올 것이다. 그러나 지혜는 겸허한 자와 함께 있다.” 겸허하다는 것은 여호와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여호와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다는 것은 또한 지혜와 관련이 있읍니다. (시 111:10) 겸허한 사람은 자신과 여호와 사이의 그리고 여호와의 의 및 능력과 자신의 불완전성 및 약함 사이의 엄청난 차이를 실감하기 때문에 여호와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읍니다. 그러므로, 겸허한 사람은 두려움과 떨림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나갑니다.—빌립보 2:12.
16. 그리스도인들이 겸허해야 할 이유를 알려 주는 무슨 성경 구절들이 있읍니까?
16 여호와의 동역자들이 겸허해야 할 이유는 아주 많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혜가 얼마나 되든, 타고난 신체적 힘이 얼마나 강하든, 물질적 부를 얼마나 소유하든, 그것은 자랑할 만한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예레미야 9:23)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고린도 전서 4:7(새번역)에 명시된 이러한 원칙 때문입니다. “누가 당신을 남달리 월등하게 만들었읍니까?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무엇입니까? 만일 모두가 받은 것이라면 왜 받은 것이 아닌 것처럼 자기를 자랑합니까?” 우리는 또한 우리의 봉사의 직무의 결과로 인해서도 자랑할 것이 전혀 없는데, 그 이유를 고린도 전서 3:6, 7에서 읽어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 구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 누가 복음 17:10의 예수의 말씀 역시 우리가 겸허한 상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데,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것 뿐이라 할찌니라.”
17. 겸허한 것이 참으로 지혜의 길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17 겸허한 것은 참으로 지혜의 길입니다. 겸허할 때 우리는 어디에서 섬기도록 특권을 받든지 만족할 것입니다. 우리가 겸허하다면, 야심을 품고 탁월해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작은 자”로 행동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입니다. (누가 9:48, 신세) 우리가 겸허하다면, 또한 다음과 같이 선언한 시편 필자와 같은 태도를 가질 것입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옵나이다.]” (시 84:10) 더우기, 우리가 겸허하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솔선하여 존경심을 나타내도록 마음을 감동시키는 사랑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로마 12:10.
겸허는 젊은이에게 어울린다
18. (ㄱ) 겸허가 특히 젊은이들에게 적절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겸허의 필요성이 현대의 젊은이들과 관련이 있는 무슨 기록을 통해 실증됩니까?
18 특히 그리스도인 젊은이들은 겸허의 옷으로 자신을 단장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엘리후는 젊은이들을 위해 참으로 훌륭한 본을 보였읍니다! 엘리후는 옳은 답을 가지고 있었지만, 연로한 사람들이 이야기를 마칠 때까지 기꺼이 존경심을 가지고 기다렸읍니다. (욥 32:6, 7) 흔히, 젊은이들은 자신 만만해 하고, 자신의 한계를 거의 깨닫지 못하게 되기가 쉽습니다. 젊은이들은 신체적으로 힘이 있고 어느 정도 지식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연로한 사람들을 깔보는 경향이 있을 수 있읍니다. 그러나 지식은, 지식을 적용할 줄 아는 것인 지혜와 동의어가 아닙니다. 대표적인 예로서, 미국에서 현대의 젊은이들이 세우고 있는 서글픈 기록이 있읍니다. 미국에서 주요 범죄자로 구속된 사람들의 63퍼센트가 24세 미만의 젊은이들이며, 구속된 사람들의 30퍼센트는 18세 미만의 청소년들입니다. “음주 운전이나 마약의 영향을 받은 상태에서 운전하는 것이 15-24세 된 미국인의 주요 사망 원인”이라는 보고도 있읍니다. 미국에서 “점점 더 많은 십대 결혼이 이혼으로 끝난다”고 하며, 반면에 “신랑과 신부가 결혼하기에 앞서 더 오랜 기간 지혜를 늘려 왔다면, 그만큼 결혼 생활이 지속될 가능성이 더 크다”는 보고가 있읍니다.
19. 젊은이들은 무슨 성경적 교훈을 명심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까?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은 얼마나 지혜롭습니까! 적절하게도, 하나님의 말씀은 젊은이들에게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고 모든 일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가르칩니다. (에베소 6:1-3; 골로새 3:20) 젊은이들은 다음과 같은 지혜로운 교훈을 특히 명심해야 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신뢰, 신세]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언 3:5, 6.
20. 헌신하고 침례받은 모든 사람들은 미가 6:8을 청종한다면 무슨 상을 기대할 수 있읍니까?
20 우리 모두는 헌신과 물 침례로 여호와에 대한 신뢰를 나타낸 후에 ‘공의를 행하고 충성스러운 사랑을 나타내고 겸허하게 여호와와 행한다면’ 무슨 상을 기대할 수 있읍니까?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우리는 그분의 요구 조건에 달하였기 때문에 여호와의 승인을 받을 것이며 따라서 여호와의 뛰어나고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일에 참여함으로써 그분의 마음을 기쁘시게 할 것입니다. (잠언 27:11) 뿐만 아니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활에서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다는 원칙의 진리를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디모데 전 4:8.
[각주]
a 미국 서부에는, 여러 해 동안 평균 65분마다 한번씩 분출한 간헐천이 있다. 그래서 그 간헐천은 ‘한결같은 충실’이라는 뜻의 올드 페이스펄(Old Faithful)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어떻게 대답하겠읍니까?
◻ 미가 6:8과 조화를 이루려면, “공의를 행”하기 위해 무엇이 요구됩니까?
◻ 여호와께 대한 충성은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우리와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 우리는 왜 ‘겸허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해야 합니까?
◻ 겸허는 왜 특히 그리스도인 젊은이들에게 유익합니까?
[17면 삽화]
당신은 보고 듣고 읽는 것에 대해 선택적이 됨으로써 마음을 지키는가?
[18면 삽화]
베드로는 예수께 “영생의 말씀”이 있으므로 달리 갈 곳이 없음을 알았다. 당신은 여호와의 조직에 충성스럽게 머물 결심을 하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