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장
여호와께서 순결한 숭배를 축복하시다
1. 이사야서의 마지막 장에는 어떤 주제들이 두드러지게 부각되어 있으며, 어떤 질문들에 대한 답이 제시되고 있습니까?
이사야서의 마지막 장에서는, 이 예언서의 몇 가지 중요한 주제가 극적인 절정에 이르게 되고, 몇 가지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도 제시됩니다. 두드러지게 부각되는 주제 가운데는 여호와의 높으심, 위선에 대한 그분의 증오, 악한 자들을 처벌하시겠다는 그분의 결심, 충실한 사람들에 대한 그분의 사랑과 염려 등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대한 답도 제시되고 있습니다. ‘참 숭배와 거짓 숭배를 구별시켜 주는 것은 무엇인가? 하느님의 백성을 압제하면서도 거룩한 체하는 위선자들에게 여호와께서 보응하실 것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여호와께서는 그분에게 충실을 유지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축복해 주실 것인가?’
순결한 숭배에 꼭 필요한 것
2.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위대함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선언하시며, 이 선언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까?
2 우선, 예언은 여호와의 위대함을 이렇게 강조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늘은 나의 왕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나를 위하여 지을 수 있는 집이 어디 있으며, 그러므로 나의 쉴 곳이 어디 있느냐?’” (이사야 66:1) 나라가 고토로 회복되어도 여호와께 바치는 성전을 재건하지 말라고 예언자가 유대인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친히 성전을 재건하라고 명령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스라 1:1-6; 이사야 60:13; 학개 1:7, 8) 그러면 이 성구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3. 땅을 여호와의 “발판”이라고 묘사하는 것이 적절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3 먼저, 땅을 여호와의 “발판”이라고 묘사하는 이유를 고려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경멸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우주 내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모든 천체 가운데서 지구에만 이 특별한 명칭이 붙여져 있습니다. 지구는 독특한 행성으로 영원히 서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독생자가 대속의 값을 치른 곳도 바로 이곳이고, 여호와께서 메시아 왕국을 통해서 자신의 주권을 입증하실 곳도 바로 이곳이기 때문입니다. 땅을 여호와의 발판이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적절한 일입니다! 왕은 높은 왕좌에 올라갈 때 그리고 그 후에 발을 쉬는 곳으로 그러한 발판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4. (ㄱ) 지상에 있는 어떤 건물이 여호와 하느님의 쉴 곳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이 모든 것”이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며, 여호와를 숭배하는 것과 관련하여 우리는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합니까?
4 물론, 왕이 발판 위에서 살지는 않을 것이며, 여호와께서도 이 땅 위에서 사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광대한 물질적 하늘이라도 그분을 모실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상에 있는 어떤 건물이 문자적으로 여호와의 집과 같은 역할을 하여 그분이 거하실 곳이 된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입니다. (열왕 첫째 8:27) 여호와의 왕좌와 그분의 쉴 곳은 영적인 영역에 있으며, 그것이 이사야 66:1에 사용된 “하늘”이라는 표현의 의미입니다. 그 다음 성구를 보면 요점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과연 이 모든 것을 나의 손이 만들어서, 이 모든 것이 있게 되었다.’ 여호와의 말씀이다.” (이사야 66:2ㄱ) 여호와께서 손으로 훑듯이 “이 모든 것”—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가리키시는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이사야 40:26; 계시 10:6) 그분은 온 우주의 위대한 창조주로서, 한낱 건물을 봉헌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는 분입니다. 외적인 형태만 갖춘 숭배를 드려서는 안 되는 분입니다.
5. 우리는 “괴로움을 겪고 영으로 통회”하고 있음을 어떻게 나타냅니까?
5 우주의 주권자께는 어떤 형태의 숭배를 드리는 것이 합당합니까? 그분은 친히 이렇게 알려 주십니다. “그러므로 괴로움을 겪고 영으로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을 내가 눈여겨볼 것이다.” (이사야 66:2ㄴ) 그렇습니다. 순결한 숭배에 꼭 필요한 것은 숭배자의 올바른 마음가짐입니다. (계시 4:11) 여호와의 숭배자는 “괴로움을 겪고 영으로 통회”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 말은 여호와께서 우리가 불행하게 지내기를 바라신다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은 “행복하신 하느님”으로서 자신의 숭배자들도 기쁘게 지내기를 바라십니다. (디모데 첫째 1:11; 빌립보 4:4) 하지만 우리 모두는 자주 죄를 지으며, 우리는 자신의 죄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로 인해 ‘괴로워’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의 의로운 표준에 도달하지 못하고 빗나가는 것으로 인해 슬퍼해야 합니다. (시 51:17) 우리는 자신이 “영으로 통회”하고 있음을 나타낼 필요가 있는데, 회개하고 자신의 죄 많은 경향과 맞서 싸우고 여호와께 기도로 용서를 구함으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누가 11:4; 요한 첫째 1:8-10.
6. 참 숭배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떨’어야 합니까?
6 뿐만 아니라,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말씀을 듣고 떠는’ 사람들을 눈여겨보십니다. 이 말은 그분의 선언을 읽을 때마다 우리가 두려움에 떨기를 그분이 바라신다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우리가 외경심과 숭상심을 가지고 받아들이기를 그분은 원하십니다. 우리는 진실하게 그분의 조언을 구하고 그것을 생활의 모든 부면에서 지침으로 사용합니다. (시 119:105) 우리는 또한, 하느님께 불순종한다거나 하느님의 진리를 인간의 전통으로 오염시킨다거나 또는 그것을 가볍게 취급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두려워한다는 의미에서 ‘떨’ 수 있습니다. 그처럼 겸손한 태도는 순결한 숭배에 꼭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세상에서는 그러한 태도를 거의 볼 수가 없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위선적인 숭배를 싫어하신다
7, 8. 여호와께서는 종교적 위선자들이 드리는 형식적인 숭배를 어떻게 보십니까?
7 자기와 동시대의 사람들을 관찰해 본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숭배자들에게서 찾으시는 성향을 가진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배교한 예루살렘은 임박한 심판을 받아 마땅합니다. 여호와께서 배교한 예루살렘에서 행해지는 숭배를 어떻게 여기시는지 유의해 보십시오. “수소를 잡는 자는 사람을 쳐죽이는 자와 같다. 양을 희생으로 잡는 자는 개의 목을 꺾는 자와 같다. 예물을 바치는 자는 돼지 피를 바치는 자! 유향 기념물을 바치는 자는 괴이한 말로 축복의 말을 하는 자와 같다. 그들은 또한 자기들 나름의 길을 택하는 자들이며, 그들의 영혼은 혐오스러운 것들을 좋아하였다.”—이사야 66:3.
8 이 말씀을 들으면 이사야서 1장에 기록된 여호와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거기에서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엇나간 백성에게, 그들의 형식적인 숭배 행위가 그분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숭배자들의 위선적인 행동 때문에 그분의 의로운 분노가 더욱 격렬하게 타오르게 만들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1:11-17) 그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제물을 끔찍한 범죄에 빗대어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값비싼 수소를 희생으로 잡는 행위는 사람을 살해하는 행위처럼 결코 여호와의 마음을 즐겁게 해 드리지 못합니다! 다른 동물들을 희생으로 잡는 행위도, 모세의 율법 아래서 부정하게 여겨져 희생으로 바치기에 결코 적합하지 않은 동물들인 개나 돼지를 바치는 행위에 빗대어져 있습니다. (레위 11:7, 27) 여호와는 그러한 종교적 위선이 처벌받지 않고 넘어가게 내버려 두시는 분입니까?
9.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여호와께서 이사야를 통하여 상기시켜 주시는 말씀에 어떤 반응을 나타냈으며, 그 결과 어떤 일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까?
9 여호와께서는 이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그들을 학대하는 길을 택하여, 그들에게 무서운 일들을 가져올 것이다. 내가 불러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고, 내가 말하여도 아무도 듣지 않았으며, 그들이 내 눈에 악한 일을 계속 행하고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일을 택하였기 때문이다.” (이사야 66:4) 이사야는 틀림없이 마음으로부터의 확신을 가지고 이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여호와의 백성을 ‘부르고’ 그들에게 ‘말하는’ 데 여러 해 동안 여호와의 도구로 사용되어 온 사람입니다. 전반적으로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을 이 예언자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악한 일을 계속 행하였기 때문에, 보응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참으로 그들을 처벌하는 길을 택하실 것이며, 자신의 배교한 백성에게 무서운 일들을 가져오실 것입니다.
10. 여호와께서 유다를 대하시는 방식은 그분이 그리스도교국을 보시는 방식에 대하여 어떤 점을 알려 줍니까?
10 그와 마찬가지로, 현대의 그리스도교국도 여호와께서 좋아하시지 않는 일들을 행해 왔습니다. 그리스도교국의 교회들에서는 우상 숭배가 널리 행해지고 있고, 설교단에서는 비성경적인 철학과 전통을 드높이고 있으며, 정치 권력을 추구하는 태도로 말미암아 날이 갈수록 세상 나라들과 영적 간음을 하는 관계에 깊이 빠져 들고 있습니다. (마가 7:13; 계시 18:4, 5, 9) 고대 예루살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국에 행해질 정당한 보응—“무서운” 일—이 그리스도교국을 향하여 가차 없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국이 반드시 처벌을 받아야 할 이유 가운데는 그리스도교국이 하느님의 백성을 대해 온 방식도 포함됩니다.
11. (ㄱ) 이사야 시대의 배교자들의 죄를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ㄴ) 이사야와 동시대의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충실한 사람들을 ‘하느님의 이름 때문에’ 배척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까?
11 이사야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떠는 너희는 그분의 말씀을 들어라. ‘너희를 미워하며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배척하는 너희 형제들이 “여호와께서 영광스럽게 되시기를!” 하고 말하였다. 그가 나타나서 너희의 기쁨이 되겠고, 그들은 수치를 당할 것이다.’” (이사야 66:5) 이사야의 “형제들” 즉 그의 동족에게는 여호와 하느님을 대표하고 그분의 주권에 복종할, 하느님께서 주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한 책임을 이행하지 못하는 그들의 죄는 참으로 심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죄를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이사야처럼 충실하고 겸손한 사람들을 미워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배교자들이 충실한 사람들을 미워하고 배척하는 이유는, 그들이 여호와 하느님을 진실하게 대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하느님의 이름 때문에’ 배척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여호와의 이 거짓 종들은 그분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면서 종교심 있는 것처럼 들리는 표현들을 경건한 척 사용하는데, 이를테면 “여호와께서 영광스럽게 되시기를!” 하고 말합니다.a
12. 종교적 위선자들이 여호와의 충실한 종들을 박해한 어떤 예들이 있습니까?
12 순결한 숭배에 고착하는 사람들에 대해 거짓 종교가 품고 있는 증오심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창세기 3:15에 나오는 예언의 또 다른 성취일 뿐입니다. 그 성구에서는 사탄의 씨와 하느님의 여자의 씨 사이에 오래 지속되는 적의가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1세기의 자신의 기름부음받은 추종자들에게, 그들 역시 동족의 손에 고통—회당에서 배척당하고 죽기까지 박해당하는 일—을 겪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16:2) 그러면 현대에는 어떠합니까? “마지막 날”이 시작될 때, 하느님의 백성은 그와 비슷한 박해가 앞에 놓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디모데 둘째 3:1) 일찍이 1914년에 「파수대」는 이사야 66:5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에게 닥친 거의 모든 박해는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 기사에서는 또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그들이 극단적인 행동을 취할 것인지—사회적으로 매장할 것인지, 조직을 와해시킬 것인지, 어쩌면 실제로 죽이기까지 할 것인지—우리는 모릅니다.” 이 말이 정말로 옳음이 드러났습니다! 그 기사가 발행되고 나서 얼마 있지 않아, 교직자들의 선동으로 시작된 박해의 열기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최고조에 달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언된 대로 그리스도교국은 수치를 당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까?
신속하고 갑작스러운 회복
13. 첫 번째 성취에서, ‘도시에서 들려 오는 소란한 소리’는 무엇입니까?
13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합니다. “도시에서 소란한 소리가, 성전에서 소리가 들려 온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적들에게 마땅한 것을 갚으시는 소리이다.” (이사야 66:6) 이 예언의 첫 번째 성취에서, “도시”는 여호와의 성전이 있는 곳인 예루살렘입니다. “소란한 소리”는 전시의 떠들썩한 소리를 의미합니다. 기원전 607년에 바빌로니아 군대가 침입하여 그 도시를 공격할 때 그 도시에서 그러한 소리가 들립니다. 그러면 현대에는 이 예언이 어떻게 성취됩니까?
14. (ㄱ) 말라기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성전에 오시는 것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예언하였습니까? (ㄴ) 에스겔의 예언에 의하면, 여호와께서 자신의 성전에 오셨을 때 무슨 결과가 있었습니까? (ㄷ) 여호와와 예수께서는 언제 영적 성전을 검사하셨으며, 순결한 숭배를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어떤 영향을 받았습니까?
14 이사야서의 이 말씀은 다른 두 예언의 말씀과 조화를 이룹니다. 하나는 에스겔 43:4, 6-9에 기록된 말씀이고, 또 하나는 말라기 3:1-5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에스겔과 말라기 두 사람 다 여호와 하느님께서 자신의 성전에 오시는 때에 대해 예언합니다. 말라기의 예언은, 여호와께서 오셔서 자신의 순결한 숭배의 집을 검사하시고 또한 정련하시는 분으로 행동하시면서, 자신을 잘못 대표하는 자들을 쫓아내신다고 알려 줍니다. 에스겔의 환상은 여호와를, 성전에 들어오셔서 부도덕과 우상 숭배의 흔적을 모두 제거할 것을 요구하시는 분으로 묘사합니다.b 이 예언들의 현대 성취로, 여호와에 대한 숭배와 관련하여 1918년에 영적으로 중요한 일이 있었습니다. 여호와와 예수께서 순결한 숭배를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모든 자들을 검사하신 것 같습니다. 그 검사 결과 마침내 부패한 그리스도교국을 버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기름부음받은 추종자들에게 그 검사는 짧은 정련 기간을 의미하였고, 뒤이어 1919년에 영적으로 신속하게 회복되는 일이 있었습니다.—베드로 첫째 4:17.
15. 어떠한 탄생이 예언되어 있으며, 그 예언은 기원전 537년에 어떻게 성취됩니까?
15 이사야서에 뒤이어 나오는 성구들에서는 그러한 회복을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여자는 진통이 오기도 전에 출산하였다. 해산 고통이 오기 전에 남자 아이를 낳았다. 누가 이러한 일을 들은 적이 있느냐? 누가 이러한 일들을 본 적이 있느냐? 한 땅이 하루 만에 진통 가운데서 생겨나겠느냐? 한 나라가 일시에 태어나겠느냐? 시온은 진통과 함께 아들들을 낳았다.” (이사야 66:7, 8) 이 예언은 바빌론에 유배되어 있는 유대인들에게 처음으로 감격적으로 성취됩니다. 시온 즉 예루살렘은 또다시 출산하는 여자로 묘사되는데, 참으로 기이한 출산입니다! 어찌나 신속하고 갑작스러운 출산인지, 해산 고통이 오기도 전에 출산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적절한 묘사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이 기원전 537년에 독자적인 나라로 재탄생된 것은 어찌나 신속하고 갑작스러운 일인지 기적처럼 보입니다. 키루스가 유대인들을 포로 상태에서 자유롭게 해 주는 때부터 충실한 남은 자들이 고토로 다시 돌아와 있는 때까지 불과 몇 개월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처음으로 탄생되기까지 있었던 일들과 비교해 보면 참으로 대조적인 일입니다! 기원전 537년에는, 반대하는 군주에게 자유롭게 해 달라고 청원할 필요도 없고, 적의에 찬 군대를 피해 도망갈 필요도 없고, 광야에서 40년간 머무를 필요도 없습니다.
16. 이사야 66:7, 8의 현대 성취에서, 시온은 무엇을 상징하며, 시온의 자손은 어떻게 재탄생을 경험하였습니까?
16 현대의 성취에서, 시온은 여호와의 하늘 “여자”, 즉 영자들로 이루어진 여호와의 하늘 조직을 상징합니다. 1919년에 이 “여자”는 지상에 있는 자신의 기름부음받은 아들들이 조직된 백성 즉 “나라”로 탄생되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그 재탄생은 신속하고 갑작스럽게 이루어졌습니다.c 불과 몇 달 만에, 기름부음받은 자들은 하나의 그룹으로서, 죽은 것과 같은 무활동의 상태에서 자기들의 “땅” 즉 하느님께서 주신 자기들의 영적 활동 영역에서 활기차고 활동적인 삶을 시작하는 상태로 일어섰습니다. (계시 11:8-12) 1919년 가을에, 그들은 심지어 「파수대」를 보완하는 새로운 잡지를 발행하겠다고 선언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황금 시대」(지금은 「깨어라!」)라고 불린 이 새로운 출판물은 하느님의 백성이 다시 활력을 얻어 봉사를 위해 또다시 조직되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였습니다.
17. 여호와께서는 자신이 영적 이스라엘과 관련된 목적을 이루시는 것을 아무것도 막을 수 없다는 점을 자신의 백성에게 어떻게 확신시켜 주십니까?
17 우주 내의 어떤 힘도 이 영적 재탄생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뒤이어 나오는 성구는 그러한 탄생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바로 내가 터지게 하거늘 출산하게도 하지 않겠느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출산하게 하거늘 과연 닫아 버리겠느냐?’ 너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사야 66:9) 출산 과정이 일단 시작되면 막을 수 없듯이, 영적 이스라엘의 재탄생도 일단 시작되자 막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반대가 있었으며, 아마 앞으로도 더 많은 반대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 시작하시는 일을 중단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여호와뿐인데, 그분은 결코 그렇게 하실 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는 다시 활력을 얻은 자신의 백성을 어떻게 대해 주십니까?
여호와의 부드러운 돌봄
18, 19. (ㄱ) 여호와께서는 어떤 감동적인 예를 사용하시며, 그 예는 그분의 유배된 백성에게 어떻게 적용됩니까? (ㄴ) 오늘날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들은 사랑에 찬 양육과 돌봄으로부터 어떤 유익을 얻어 왔습니까?
18 뒤이어 나오는 네 성구는 여호와의 부드러운 돌봄에 대해 감동적으로 묘사합니다. 먼저,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모두 그와 함께 즐거워하고 그와 함께 기뻐하여라. 그로 인하여 계속 애통해하는 자들아, 너희는 모두 그와 함께 크게 기뻐하여라. 너희가 그의 온전한 위안의 가슴에서 젖을 빨고 틀림없이 만족을 얻겠고, 그의 영광의 젖꼭지를 빨며 더없는 기쁨을 경험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66:10, 11) 여호와께서는 여기에서 갓난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여자의 예를 사용하십니다. 배고픔의 고통을 느끼는 아기는 줄기차게 울어 댑니다. 하지만 엄마의 가슴에 다가가 젖을 빨게 되면 슬픔이 행복한 만족과 포만감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바빌론에 있는 충실한 유대인들의 남은 자들에게 해방과 회복의 때가 오면 애통의 상태가 행복과 만족의 상태로 신속히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재건되고 그곳에 다시 사람이 살게 되면서 예루살렘의 영광이 회복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도시의 영광이 그 충실한 주민들을 감싸 안아 주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그들은 활동적인 제사직을 통해 영적으로 양육받게 될 것입니다.—에스겔 44:15, 23.
19 영적 이스라엘 역시 1919년에 회복된 후에 풍부한 양식으로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때 이후로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을 통해 베풀어지는 영적 양식은 꾸준히 공급되었습니다. (마태 24:45-47) 오늘날은 참으로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들에게 위안과 기쁨의 때입니다. 하지만 축복은 또 있었습니다.
20. 예루살렘은 어떻게 고대와 현대에 “범람하는 급류”로 축복을 받았습니까?
20 예언은 다음과 같이 계속됩니다.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그에게 평화를 강처럼, 나라들의 영광을 범람하는 급류처럼 베풀리니, 너희가 틀림없이 젖을 빨 것이다. 너희가 옆구리에 안기며, 무릎 위에서 귀여움을 받을 것이다.’” (이사야 66:12) 여기에서는 젖을 먹이는 이미지와 축복이 넘쳐흐르는 이미지—“강”과 “범람하는 급류”—가 결합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여호와로부터 오는 풍부한 평화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백성에게로 흘러와 하느님의 백성을 축복해 주는 “나라들의 영광”으로도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방 사람들이 여호와의 백성에게로 몰려올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학개 2:7) 고대의 성취에서, 여러 나라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이스라엘에 합류하여 유대교 개종자들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시대에 훨씬 더 큰 성취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모든 나라와 부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큰 무리’—실로 범람하는 급류와도 같은 사람들의 무리—가 영적 유대인들의 남은 자들에게 합류하고 있습니다.—계시 7:9; 스가랴 8:23.
21. 한 편의 그림을 보는 듯한 감동적인 표현을 통해서, 어떤 종류의 위로가 예언되어 있습니까?
21 이사야 66:12에서는 또한 어머니가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아이를 무릎에 올려놓고 귀여워하거나 옆구리에 안고 다니는 일—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구절에도 그와 비슷한 사상이 흥미 있는 다른 각도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친어머니가 늘 위로하는 사람처럼, 너희를 내가 늘 위로할 것이다. 예루살렘과 관련하여 너희가 위로받을 것이다.” (이사야 66:13) 어린아이가 이제 “사람” 즉 성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고난의 때에 그를 위로하려는 마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22.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사랑의 부드러움과 강도를 어떻게 나타내십니까?
22 여호와께서는 이처럼 호소력 있는 방법으로, 자신의 백성에 대한 자신의 사랑의 강도와 부드러움을 예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심지어 가장 강한 어머니의 사랑도 자신의 충실한 백성에 대한 여호와의 깊은 사랑을 희미하게 반영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사야 49:15)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늘의 아버지의 이러한 특성을 반영하는 것은 더없이 중요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특성을 반영하였고, 그렇게 하여 그리스도인 회중의 장로들에게 훌륭한 모범을 남겼습니다. (데살로니가 첫째 2:7) 예수께서는 형제 사랑이 자신의 추종자들을 식별케 하는 주된 표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3:34, 35.
23. 여호와의 회복된 백성의 행복한 상태를 묘사해 보십시오.
23 여호와께서도 사랑을 행동으로 표현하십니다. 따라서 그분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틀림없이 너희가 보고 너희 마음이 크게 기뻐할 것이며, 너희 뼈가 연한 풀처럼 돋아날 것이다. 틀림없이 여호와의 손이 그분의 종들에게 알려지겠으나, 그분의 적들은 그분이 질책하실 것이다.” (이사야 66:14) 한 히브리어 문법학자는, ‘틀림없이 너희가 볼 것이다’라는 표현은 돌아온 유배자들이 회복된 땅의 어디를 둘러보든 “이제 온통 기쁜 일만 보게 될 것이다”라는 의미가 될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합니다. 그들은 참으로 크게 기뻐할 것이며, 자기들이 사랑하는 고토로 회복된 것을 보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격을 느낄 것입니다. 뼈가 다시 강해지는 것처럼 다시 젊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 것이며, 봄의 풀처럼 기운이 샘솟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이 축복된 상태가 어떤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호와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모두가 알게 될 것입니다.
24. (ㄱ) 오늘날 여호와의 백성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들을 고려해 볼 때 어떤 결론을 내리게 됩니까? (ㄴ) 우리는 어떤 결심을 해야 합니까?
24 오늘날 여호와의 손이 그분의 백성들 사이에서 작용하고 있음을 당신은 인식하고 있습니까? 어떤 인간도 순결한 숭배의 회복을 가져올 수 없었습니다. 어떤 인간도 모든 나라에서 수백만 명의 귀중한 사람들이 홍수처럼 밀려와 영적인 땅에 있는 충실한 남은 자들에게 합류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느님만 그러한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처럼 사랑을 표현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크게 기뻐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결코 당연하게 여기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우리는 계속 ‘그분의 말씀을 듣고 떠는’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성서 원칙에 따라 살면서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하도록 합시다.
[각주]
a 오늘날 그리스도교국에 속한 많은 사람들은 여호와의 고유한 이름을 사용하기를 거부하며, 심지어 수많은 성서 번역판에서 그 이름을 빼 버리기까지 하고 있다. 일부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의 고유한 이름을 사용한다고 해서 그들을 조소한다. 하지만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 다수는, “야를 찬양하라”라는 뜻이 담긴 “할렐루야”라는 표현을 경건한 척 사용한다.
b 에스겔 43:7, 9에 사용된 “그 왕들의 시체”라는 표현은 우상들을 가리킨다. 예루살렘의 반역적인 지도자들과 백성은 하느님의 성전을 우상으로 더럽혔으며, 사실상 우상들을 왕으로 삼았다.
c 여기에 예언된 탄생은 계시록 12:1, 2, 5에 묘사된 탄생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계시록 12장에서, “아들 곧 남자 아이”는 1914년에 통치하기 시작한 메시아 왕국을 상징한다. 하지만 두 예언에 나오는 “여자”는 동일한 것을 가리킨다.
[395면 삽화]
‘이 모든 것을 나의 손이 만들었다’
[402면 삽화]
여호와께서 시온에 “나라들의 영광”을 베푸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