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증거 성구들”은 어떠한가?
몇몇 성서 구절들이 삼위일체를 뒷받침하는 증거를 제시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성구들을 읽을 때, 성서의 증거와 역사적 증거가 삼위일체를 뒷받침하지 않는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증거로 제시되는 참조 성구들은 어느 것이나 성서 전체의 일관된 가르침과 관련하여 이해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많은 경우 그와 같은 성구의 참다운 의미는 전후 구절의 문맥을 살펴보면 분명해집니다.
하나 속의 셋
「신가톨릭 백과사전」은 그와 같은 “증거 성구들” 셋을 제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렇게 인정합니다. “성삼위일체 교리는 구약에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신약에서 가장 오래 된 증거는 바울의 서한들에 들어 있는 것, 특히 고린도 후서 13.3[일부 성서들에서는 14절]과 고린도 전서 12.4-6에 있는 것이다. 복음서에서 삼위일체에 관한 증거는 마태 28.19의 침례 공식문에서만 명백하게 나타난다.”
「공동번역」은 그런 구절들에서 다음과 같이 세 “위”를 나란히 열거합니다. II 고린토 13:13은 이렇게 셋을 함께 언급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 주시는 친교를 여러분 모두가 누리시기를 빕니다.” I 고린토 12:4-6은 이렇게 알려 줍니다. “은총의 선물은 여러가지이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주님을 섬기는 직책은 여러가지이지만 우리가 섬기는 분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일의 결과는 여러가지이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일을 이루어 주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마태오 28:19의 기록은 이러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라.]”
이 구절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이 지고의 삼위일체 신을 구성하며, 셋은 실체와 능력과 영원성 면에서 동등하다고 알려 줍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철수, 영호, 영수와 같은 세 사람을 열거한다고 해서 그들이 하나 속의 셋임을 뜻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유형의 참조 성구는 “언급된 세 주체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지, ··· 그 자체가 반드시 셋이 모두 하느님의 본성에 속하며 동등한 하느님의 존엄성을 지니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매클린톡과 스트롱 공편 「성서, 신학 및 교회 문헌 백과사전」은 시인합니다.
그 자료는 삼위일체를 지지하면서도, 고린도 후서 13:13(14)에 관하여 이렇게 알려 줍니다. “셋이 동등한 권위 혹은 같은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추론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마태 복음 28:18-20에 관하여는 이렇게 알려 줍니다. “그러나 이 성구는 그 자체만으로는, 언급된 세 주체의 인격성 또는 동등성 또는 신성을 결정적으로 증명하지 못할 것이다.”
예수께서 침례받으셨을 때, 하나님과 예수 및 성령은 같은 문맥에서 언급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셨습니다. (마태 3:16) 하지만, 이 구절은 셋이 하나라고 알려 주지 않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여러 번 함께 언급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도 이름이 함께 언급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 역시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더 나아가, 예수께서 침례받으실 때 그분 위에 하나님의 영이 내려왔는데, 이것은 예수께서 그때까지 영으로 기름부음을 받지 않으셨음을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그분이 어떻게 항상 성령과 하나로 존재해 온 삼위일체의 일부일 수 있겠습니까?
셋을 함께 언급하는 또 다른 참조 성구는 일부 오래 된 번역본들의 요한 1서 5:7에 나타납니다. 하지만, 학자들은 그 문구가 성서에 원래 없었는데 훨씬 뒤에 부가되었음을 인정합니다. 대부분의 현대 번역본들은 합당하게도 그 위조된 구절을 삭제하였습니다.
다른 “증거 성구들”은 단지 둘—아버지와 예수—사이의 관계만을 다룹니다. 그 중의 일부를 고려해 봅시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요한 복음 10:30에 나오는 위의 문구는, 셋째 위가 언급되어 있지 않은데도, 흔히 삼위일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참조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와 “하나”라는 말이 뜻하는 바를 직접 알려 주셨습니다. 요한 복음 17:21, 22에서, 그분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것 같이” 제자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 모두가 하나의 개체가 되기를 기도하고 계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과 하나님처럼, 제자들도 생각과 목적에 있어서 연합되기를 기도하고 계셨음이 분명합니다.—또한 고린도 전 1:10, 참조.
고린도 전서 3:6, 8에서, 바울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하나, 신세]”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과 아볼로가 하나 속의 두 위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목적에 있어서 연합되어 있다는 뜻으로 말한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에서 “하나”라는 뜻으로 사용한 희랍어 단어(헨)는 중성으로서, 문자적으로 “하나(의 것)”를 뜻하며, 협동 속의 하나됨을 시사합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요한 복음 10:30에서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를 묘사하는 데 사용하신 것과 같은 단어입니다. 그것은 또한 예수께서 요한 복음 17:21, 22에서 사용하신 것과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그 경우들에서 “하나”(헨)라는 단어를 사용하실 때, 생각과 목적에 있어서의 연합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 복음 10:30에 관하여, 장 칼뱅(존 캘빈, 삼위일체론자였음)은 「요한 복음 주해」(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책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옛날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 아버지와 같은 본질임을 증명하기 위해 이 구절을 사용한 것은 잘못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실체의 연합을 주장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아버지와 의견이 일치한다는 것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 복음 10:30 이후 구절들의 문맥에서 곧바로, 예수께서는 자신의 말이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것이 아님을 강변하셨습니다. 그처럼 그릇된 결론을 내리고 그분을 돌로 치려고 하던 유대인들에게 그분은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거룩한 일을 맡겨 세상에 보내주셨다. 너희는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한 말 때문에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하느냐?” (요한 10:31-36, 공동번역)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아들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셨습니다.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셨는가?
삼위일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제시되는 또 다른 성구는 요한 복음 5:18입니다. 그 성구는 예수께서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요한 복음 10:31-36에서와 같이) 그분을 죽이려 했다고 알려 줍니다.
그러나 누가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신다고 말하였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바로 다음 구절(19)에서 그 거짓 비난에 대해 자신을 변호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 이렇게 말씀하셨다. ‘···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그대로 할 뿐이지 무슨 일이나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공동번역」.
이런 말씀으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하지 않으며, 따라서 임의대로 행동할 수 없음을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동등한 어떤 분이 자신은 “무슨 일이나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라고 말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까? (비교 다니엘 4:34, 35.) 흥미롭게도, 요한 복음 5:18과 10:30 모두의 문맥은, 삼위일체론자들처럼 그릇된 결론을 내리고 있는 유대인들의 거짓 비난에 대해 예수께서 자신을 변호하셨음을 알려 줍니다.
“하나님과 동등”한가?
빌립보서 2:6에서, 1609년의 가톨릭 「두에이역」(Douay Version)은 예수에 관하여 이렇게 알려 줍니다. “그는 하느님의 형태로 계셨으며, 하느님과 동등됨을 약탈이 아니라고 생각하셨다.” 1611년의 「제임스 왕역」(King James Version)도 거의 같은 내용입니다. 일부 사람들은 예수께서 하나님과 동등하셨다는 사상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그와 같은 다수의 역본들을 여전히 사용합니다. 그러나 다른 번역본들은 그 구절을 어떻게 옮겼는가 유의해 보십시오.
1869년: “그는 하나님의 형태로 계셨으며,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는 것을 취할 만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으셨다.” 「신약」(The New Testament), G. R. 노이스.
1965년: “그는—참으로 신의 본성!—결코 자만하여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되게 하지 않으셨다.” 「신약」(Das Neue Testament) 개정판, 프리드리히 푀플린.
1968년: “그는 하나님의 형태로 계셨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탐욕스럽게 자기 것으로 만들 만한 일로 생각하지 않으셨다.” 「용어 색인 성서」(La Bibbia Concordata).
1976년: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본성을 가지셨지만, 억지로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려고 생각하지 않으셨다.” 「오늘날의 영어 역본」.
1984년: “그는 하나님의 형태로 존재하셨지만, 탈취하려고 즉 하나님과 동등되려고 생각하지 않으셨다.” 「신세계역 성경」(New World Translation of the Holy Scriptures).
1985년: “그는 하느님의 형태로 계셨으며, 하느님과 동등됨을 취할 만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으셨다.” 「신 예루살렘 성서」(The New Jerusalem Bible).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이처럼 보다 정확한 번역들도 (1) 예수께서 이미 동등됨을 가지셨지만 그것을 계속 붙잡고 있기를 원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의미하거나 (2) 그분은 이미 동등됨을 가지셨기 때문에 그것을 취하려 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랠프 마틴은 「빌립보인에게 보낸 바울의 서한」(The Epistle of Paul to the Philippians)에서 원 희랍어에 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동사의 의미가 ‘탈취하다,’ ‘강제로 빼앗다’라는 실제의 뜻에서 ‘굳게 보유하다’라는 뜻으로 변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해설자의 희랍어 성서」(The Expositor’s Greek Testament) 역시 이렇게 알려 줍니다. “ἁρπάζω[하르파조] 혹은 그것의 어떤 파생어가 ‘가지고 있는’ 즉 ‘보유하는’의 의미를 나타내는 성구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항상 ‘탈취하다,’ ‘강제로 빼앗다’를 의미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올바른 의미인 ‘취하려 하다’에서 ‘굳게 보유하다’라는 온전히 다른 의미로 변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
이상의 내용에 비추어 볼 때, 「두에이역」 및 「제임스 왕역」 같은 역본들의 번역자들은 삼위일체론의 목적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규칙을 구부리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빌립보서 2:6의 희랍어는, 객관적으로 읽어 볼 때, 예수께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합당한 일로 생각하셨다고 알려 주기는커녕, 오히려 정반대의 사실, 즉 예수께서는 그것이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셨음을 알려 줍니다.
전후 구절들(3-5, 7, 8)의 문맥은 6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해줍니다. 빌립보인들은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강력한 권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그런 태도의 뛰어난 본으로 이렇게 그리스도를 언급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정신, 두에이역]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정신]이니[라.]” 어떤 “정신”입니까? “하나님과 동등됨을 약탈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은 지적된 요점과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시고, 결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확실히,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어떤 부분에 대해 말하는 것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여기에 나타난 바울의 요점—다시 말해서, 누구보다 우월한 분이며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겸손과 순종의 중요성—을 완전하게 예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있는 자”
요한 복음 8:58에서, 이를테면 「예루살렘 성서」(The Jerusalem Bible) 같은 여러 번역본은 예수께서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도, 나는 있는 자이다”(Before Abraham ever was, I Am)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알려 줍니다. 예수께서는 여기에서, 삼위일체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신이 “있는 자”(I Am)라는 칭호로 알려져 있었음을 가르치고 계셨습니까? 그리고,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제임스 왕역」 출애굽기 3:14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God said unto Moses, I AM THAT I AM)라고 기술되어 있기 때문에, 그 구절은 예수께서 히브리어 성경의 여호와였음을 뜻하는 것입니까?
출애굽기 3:14(제임스 왕역)에서 “있는 자”(I AM)라는 문구는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셨고 자신이 약속한 일을 하실 것임을 지적하기 위한 하나님의 칭호로 사용됩니다. J. H. 헤르츠 박사 편, 「모세 오경과 하프타라」(The Pentateuch and Haftorahs)는 그 문구에 대해 이렇게 알려 줍니다. “속박되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문구가 지니는 의미는 ‘아직은 그분이 자신의 능력을 너희에게 전시하시지 않았지만, 앞으로 그렇게 하실 것이다. 그분은 영원하신 분이며 분명히 너희를 구출하실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현대어 역본들은 라시[프랑스의 성서 및 탈무드 주석가]의 본을 따라 [출애굽기 3:14을] ‘나는 내가 될 자로 되겠노라[I will be what I will be]’로 번역한다.”
요한 복음 8:58의 표현은 출애굽기 3:14에서 사용된 표현과 매우 다릅니다. 예수께서는 그 표현을 이름 혹은 칭호로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 이전의 자기 존재를 설명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셨습니다. 따라서, 다른 몇몇 성서 역본들이 요한 복음 8:58을 어떻게 옮겼는가 유의해 보십시오.
1869년: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 「신약」, G. R. 노이스.
1935년: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 존재하였다!” 「성서—미국역」(The Bible—An American Translation), J. M. P. 스미스와 E. J. 굿스피드.
1965년: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 나는 이미 있는 자였다.” 「신약」(Das Neue Testament), 외르크 칭크.
1981년: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 살아 있었다!” 「쉬운 영어 성서」(The Simple English Bible).
1984년: “아브라함이 존재하게 되기 전에, 내가 있었다.” 「신세계역 성경」.
따라서, 여기에 사용된 희랍어의 실제 사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에 앞서 태어나신 분,” 곧 예수께서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오래 전에 존재하셨다는 것입니다.—골로새 1:15, 공동번역; 잠언 8:22, 23, 30; 계시 3:14.
또다시, 문맥은 이것이 정확한 이해임을 보여줍니다. 이번 경우에,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그들의 말대로 아직 오십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고 주장한다는 이유로 그분을 돌로 치려고 하였습니다. (57절) 예수께서 나타내신 자연스러운 반응은 자신의 나이에 관한 진실을 알려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유대인들에게, 자신은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 살아 있었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쉬운 영어 성서」.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 복음 1:1에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위일체론자들은 이 구절이 예수 그리스도로 땅에 오신 “말씀”(희랍어, 호 로고스)이 전능하신 하나님 자신이었음을 뜻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문맥이 정확한 이해를 위한 기초를 제공한다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개역 한글판」 성서 자체도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라고 알려 줍니다. (사체로는 본 책자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사람이 그 다른 사람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와 일치하게, 예수회 수사 요제프 A. 피츠마이어 편, 「성서 문헌지」(Journal of Biblical Literature)는, 만약 요한 복음 1:1 후반부를 하나님 자신(“the” God)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고 말한 “앞의 문구와 모순될 것”임을 지적합니다.
또한, 다른 번역본들이 이 구절의 그 부분을 어떻게 번역하는가 유의하십시오.
1808년: “그리고 말씀은 신이었다.” (and the word was a god.) 「신약, 대주교 뉴컴의 새로운 번역에 근거한 개정역: 교정본 부가」(The New Testament in an Improved Version, Upon the Basis of Archbishop Newcome’s New Translation:With a Corrected Text).
1864년: “그리고 말씀은 신이었다.” (and a god was the word.) 「엠파틱 다이아글롯」(The Emphatic Diaglott), 행간역, 벤저민 윌슨.
1928년: “그리고 말씀은 신성한 존재자였다.” (and the Word was a divine being.) 「백년 성서」(La Bible du Centenaire), 레방질 스롱 장, 모리스 고겔.
1935년: “그리고 말씀은 신성이었다.” (and the Word was divine.) 「성서—미국역」, J. M. P. 스미스와 E. J. 굿스피드.
1946년: “그리고 말씀은 한 신성을 지닌 분이었다.” (and of a divine kind was the Word.) 「신약」(Das Neue Testament), 루드비히 팀메.
1950년: “그리고 말씀은 신이었다.” (and the Word was a god.)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 신세계역」.
1958년: “그리고 말씀은 하나님이었다.” (and the Word was a God.) 「신약」(The New Testament), 제임스 L. 토머네크.
1975년: “그리고 말씀은 신(혹은 한 신성을 지닌 분)이었다.” (and a god[or, of a divine kind] was the Word.) 「요한 복음」(Das Evangelium nach Johannes), 지그프리트 슐츠.
1978년: “그리고 로고스는 신과 같은 분이었다.” (and godlike kind was the Logos.) 「요한 복음」(Das Evangelium nach Johannes), 요하네스 슈나이더.
요한 복음 1:1에는 희랍어 명사 데오스(신)가 두번 나옵니다. 첫 번째 경우는 말씀이 함께 있었던 분(“말씀[로고스]이 하나님[데오스의 한 형태]과 함께 계셨”다: “and the Word was with God”)인 전능하신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이 첫 번째 데오스 앞에는 톤(영어의 the)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단어는 구별된 개체, 이 경우에는 전능하신 하나님(‘말씀이 [그]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and the Word was with [the] God”)을 지적하는 희랍어 정관사의 한 형태입니다.
반면에, 요한 복음 1:1의 두번째 데오스 앞에는 관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직역을 하면 “그리고 말씀은 신이었다” (and god was the Word)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많은 번역본들이 이 두번째 데오스(서술 명사)를 “신성”(divine), “신과 같은”(godlike) 혹은 “신”(a god)으로 옮긴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번역본들은 무슨 권위로 그렇게 옮깁니까?
코이네 희랍어에는 정관사(영어의 “the”)는 있지만, 부정관사(영어의 “a” 혹은 “an”)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서술 명사 앞에 정관사가 없으면, 문맥에 따라서 부정관사를 넣을 수 있습니다.
「성서 문헌지」는 “동사 앞에 무관사[관사가 없는] 술어가 사용된 [표현은] 주로 특성을 가리키는 뜻이 있다”라고 알려 줍니다. 「성서 문헌지」에서 지적하는 대로, 이것은 로고스가 신에 비견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 책은 또한 요한 복음 1:1에 대해 이렇게 알려 줍니다. “그 술어는 특성을 나타내는 뜻이 매우 두드러지기 때문에, 그 명사[데오스]는 한정적 의미로 간주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요한 복음 1:1은 말씀의 특성, 즉 말씀이 “신성”(divine), “신과 같은”(godlike) 혹은 “신”(a god)이었지만 전능한 하나님은 아니라는 사실을 두드러지게 합니다. 이것은 성서의 나머지 부분과도 일치하는데, 그런 부분에서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대변자 역할을 하는 “말씀”으로 불린 예수께서 자신보다 우월한 분, 전능한 하나님으로부터 땅으로 보냄을 받은 순종하는 종속자(從屬者)였음을 알려 줍니다.
동일한 구조로 된 희랍어 문장들을 번역하는 경우에, 다른 언어들의 거의 모든 번역자들이 일관되게 관사 “a”를 삽입한 성서 구절은 그 밖에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제임스 왕역」은 마가 복음 6:49에서, 제자들이 물위를 걷는 예수를 보았을 때, “그들은 그것이 영[a spirit]이라고 생각하였다”라고 알려 줍니다. 코이네 희랍어에서는 “영”(spirit) 앞에 “a”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언어의 거의 모든 번역본들은 문맥에 적합하게 옮기기 위해서 “a”를 부가합니다. 같은 방식으로, 요한 복음 1:1은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알려 주기 때문에, 그분은 하나님 자신일 수 없었으며, “신”(a god) 혹은 “신성”(divine)이었습니다.
신학자이자 「미국 표준역」(American Standard Version) 작업을 했던 학자인 조지프 헨리 테이어는 간단하게 “로고스는 신성(divine)이었고 신성한 존재자(the divine Being) 자신이 아니었다”라고 기술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회 수사 존 L. 매켄지는 자신의 저서 「성서 사전」(Dictionary of the Bible)에서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요한 1:1은 엄밀하게 ··· ‘말씀은 신성한 존재(a divine being)였다’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규칙을 어기는 것인가?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그와 같이 번역하는 것이 지난 1933년에 희랍어 학자 E. C. 콜웰이 발표한 코이네 희랍어 문법의 규칙을 어기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콜웰은 희랍어에서 서술 명사가 “동사 뒤에 올 때는 [정]관사를 취하며, 동사 앞에 나올 때는 [정]관사를 취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콜웰이 그렇게 주장한 것은 동사 앞에 나오는 서술 명사의 경우 그 앞에 정관사(“the”)가 실제로 있는 것처럼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요한 복음 1:1에서 두번째 명사(데오스) 곧 서술 명사는 동사 앞에 나옵니다—“그리고 [데오스]는 말씀이었다.”(and [the·osʹ] was the Word.) 그러므로 콜웰은 요한 복음 1:1이 “그리고 말씀은 하나님이었다”(and [the] God was the Word)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요한 복음 8:44(신세)에 나오는 두 가지 예만 고려해 보십시오. 그 구절에서 예수께서는 마귀에 대하여 ‘그 자는 살인자(a manslayer)였다’ 그리고 ‘그는 거짓말장이(a liar)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 복음 1:1에서와 같이, 희랍어에서는 서술 명사(“살인자”[manslayer]와 “거짓말장이”[liar])가 동사(“였다”[was]와 “이다”[is]) 앞에 나옵니다. 코이네 희랍어에는 부정관사가 없기 때문에, 각 명사 앞에는 부정관사가 없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번역본들은 희랍어 문법과 문맥상의 필요 때문에 “a”라는 단어를 삽입합니다.—또한 마가 11:32; 요한 4:19; 6:70; 9:17; 10:1; 12:6, 신세 참조.
콜웰은 서술 명사에 관해서 위와 같은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콜웰은 “다만 문맥상의 필요가 있을 때에는 그 자리에 부정관사[영어의 “a” 혹은 “an”]가 온다”라고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문맥상의 필요가 있을 때는, 그런 형태의 문장 구조의 명사 앞에, 번역자가 부정관사를 삽입할 수 있다는 점을 콜웰도 인정한 것입니다.
요한 복음 1:1은 문맥상 부정관사가 필요합니까? 그렇습니다. 성서 전체가 증거하는 것은 예수가 전능한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런 경우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는 콜웰의 문법 규칙이 아니라, 문맥이 번역자에게 지침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요한 복음 1:1과 그 밖의 구절들에 부정관사 “a”를 삽입한 많은 번역본을 살펴볼 때, 많은 학자들은 그러한 인위적인 규칙에 동의하지 않음이 분명하며, 하나님의 말씀 역시 동의하지 않음이 분명합니다.
모순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a god)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오직 한분뿐이라는 성서의 가르침과 모순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서는 때때로 능한 피조물을 가리키는 데 그 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8:5에는 “저[사람]를 천사[다시 말해서, 신과 같은 이들(신세); 히브리어, 엘로힘]보다 조금 못하게 하”셨다는 문구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다는 유대인들의 비난에 대해 변호하시면서, “성서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다시 말해서, 인간 재판관들]을 모두 신이라고 불렀다”는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요한 10:34, 35, 공동번역; 시 82:1-6) 고린도 후서 4:4에서는 사단도 “이 세상 신”이라고 불립니다.
예수께서는 천사들, 불완전한 사람들 혹은 사단보다 훨씬 높은 지위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 존재들도 “신” 곧 능한 자들이라고 불렸으므로, 예수께서는 확실히 “신”이 되실 수 있으시며 실제로 “신”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여호와와 관련된 독특한 지위 때문에, “능한 하나님”(Mighty God)이십니다.—요한 1:1; 이사야 9:6, 신세.
그러나 “능한 하나님”에 해당하는 영어 표현이 대문자로 표기되어 있다는 사실은 예수께서 어떤 면으로인가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함을 시사하는 것이 아닙니까?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는 단지 예수께서 일컬음을 받게 될 네 가지 이름 중에 하나로 그것을 예언하였을 뿐이며, 영어로는 그런 이름들을 대문자로 표기합니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능한”(Mighty) 분으로 불렸다 해도, “전능하신”(Almighty) 분은 오직 한분이 있을 수 있을 뿐입니다. 같은 신으로 불리지만 보다 작은 혹은 열등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다른 신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여호와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으로 부르는 것은 의미가 거의 없는 일일 것입니다.
가톨릭 신학자 카를 라너에 의하면, 요한 복음 1:1과 같은 성구에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데 데오스가 사용되지만, “그런 용례 중 어떤 곳에서도, ‘데오스’는 예수를 신약의 다른 곳에서 ‘호 데오스’로 나타내는 분, 다시 말해서, 최고의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방법으로 사용되지 않는다”라고 영국의 「존 라일랜즈 도서관 편람」은 지적합니다. 그리고 그 「편람」은 이렇게 부언합니다. “만약 신약 필자들이, 예수를 ‘하느님’으로 인정하는 것이 신자들에게 필수적인 일이라고 믿었다면, 그런 형태의 신앙 고백이 신약에 거의 전혀 없다는 것은 납득이 될 만한 일인가?”
그러면 사도 도마가 요한 복음 20:28에서 예수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한 말은 어떠합니까? 도마에게는, 특히 기적이 일어난 상황에서, 예수가 “신”과 같았기 때문에, 도마는 감탄을 표현하였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도마가 예수에게 말하기는 했지만 하나님을 향한 놀란 감정으로 감탄을 표현한 것일뿐이라고 말합니다. 어느 경우에도, 도마는 예수를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도마와 그 밖의 모든 사도는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지 않고 여호와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라고 가르치셨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요한 17:3.
또다시, 문맥이 그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며칠 전에, 부활되신 예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20:17) 예수께서는 이미 능한 영으로 부활되셨지만, 여호와는 여전히 그분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영광스럽게 되신 후에도, 성서의 마지막 책과 같은 곳에서, 하나님을 계속해서 그와 같이 부르셨습니다.—계시 1:5, 6; 3:2, 12.
도마의 감탄이 묘사된 구절에서 단지 세 구절 뒤인 요한 복음 20:31에서, 성서는 이렇게 기술함으로써 문제를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니라.]” 그리고 그것은 지고의 삼위일체 신의 어떤 신비스러운 부분이 아니라, 실제 아버지와 아들처럼, 문자적인 “아들”을 뜻합니다.
성서와 일치해야 한다
삼위일체를 뒷받침한다고 주장하는 성구들은 그 밖에도 여럿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성구들은, 주의 깊이 조사해 보면 실제로 뒷받침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에서, 위에서 검토한 구절들과 비슷합니다. 그런 구절들은, 삼위일체를 뒷받침한다고 하는 어떤 성구를 고려할 경우,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아야 함을 예시할 뿐입니다. ‘그 해석은 성서 전체의 일관된 가르침—여호와 하나님만이 최고자라는 가르침—과 일치한가?’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 해석은 틀린 것임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과 예수 및 성령이 어떤 신비스러운 지고의 신 속에 하나로 되어 있음을 알려 주는 “증거 성구”가 하나도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성서 어디에도 실체, 능력 및 영원성에 있어서 셋이 모두 같다고 알려 주는 성구는 하나도 없습니다. 성서는 일관되게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홀로 최고자로, 예수를 그분이 창조하신 아들로, 성령을 하나님의 활동력으로 밝혀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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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 아버지와 같은 본질임을 증명하기 위해 [요한 복음 10:30]을 사용한 것은 잘못이었다.”—「요한 복음 주해」, 장 칼뱅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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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사람이 그 다른 사람과 같은 사람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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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스는 신성(divine)이었고 신성한 존재자(the divine Being) 자신이 아니었다.”—조지프 헨리 테이어, 성서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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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자신과 아버지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제자들도 모두 “하나가 되게 하”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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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그대로 할 뿐이지 무슨 일이나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하지 않음을 나타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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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는 인간들, 천사들, 심지어 사단도 “신” 곧 능력이 큰 자라고 부르기 때문에, 그들보다 더 우월한, 하늘에 계신 예수께서는 합당하게도 “신”(a god)이라고 불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