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장
“내 백성을 위로하여라”
1.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한 가지 방법은 무엇입니까?
여호와는 “위로를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로하시는 한 가지 방법은 그분의 말씀에 기록하신 약속들을 통해서입니다. (로마 15:4, 5) 예를 들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게 될 때, 그 사랑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신세계에서 부활될 것이라는 전망보다 더 위로를 줄 수 있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요한 5:28, 29) 그리고 여호와께서 머지않아 악을 끝내시고 이 땅을 낙원으로 변모시키실 것이라는 약속은 어떠합니까? 살아남은 사람들이 미래의 그 낙원으로 들어가서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있다니 참으로 위로가 되지 않습니까?—시 37:9-11, 29; 계시 21:3-5.
2. 하느님의 약속들을 신뢰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 하느님의 약속들을 참으로 신뢰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참으로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약속들을 하신 분이 전적으로 신뢰할 만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약속을 이행하실 능력과 의지를 모두 가지고 계십니다. (이사야 55:10, 11) 예루살렘에 참 숭배를 회복시키시겠다고 여호와께서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하신 말씀과 관련하여 그 점이 강력하게 증명되었습니다. 이사야 40장에 나오는 그 예언을 고려해 보도록 합시다. 그렇게 할 때 약속을 성취시키시는 분인 여호와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강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로가 되는 약속
3, 4. (ㄱ) 이사야는 하느님의 백성이 나중에 필요로 하게 될 어떤 위로의 말씀을 기록합니까? (ㄴ)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이 바빌론으로 유배되어 가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들의 예속은 얼마 동안 지속될 것입니까?
3 예언자 이사야가 위로의 말씀을 기록하는 시기는 기원전 8세기인데, 여호와의 백성은 나중에 그러한 위로를 필요로 하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는 히스기야 왕에게 예루살렘의 멸망이 다가오고 있고 유대인들이 바빌론으로 강제 이주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알려 주고 나서 곧 이어 회복을 약속하는 여호와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기술합니다. “‘너희는 위로하여라, 내 백성을 위로하여라.’ 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의 마음에 말하고 그에게 외치기를, 그 군복무의 때가 다 찼고 그 잘못에 대한 값이 치러졌다고 하여라. 여호와의 손에서 그가 자기의 모든 죄의 대가를 충분히 받았다.’”—이사야 40:1, 2.
4 이사야 40장의 첫머리에 나오는 “위로하여라”라는 말로 볼 때 이사야서의 나머지 부분에 빛과 희망의 소식이 담겨 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은 배교로 인해 기원전 607년에 바빌론으로 유배되어 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유대인 포로들은 바빌로니아 사람들을 영원히 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의 예속은 그들의 잘못에 대한 ‘값이 치러질’ 때까지만 지속될 것입니다. 예속 기간은 얼마나 될 것입니까? 예언자 예레미야의 말에 따르면, 70년이 될 것입니다. (예레미야 25:11, 12) 그 기간이 끝나면, 여호와께서는 회개한 남은 자들을 인도하여 바빌론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데려오실 것입니다. 유다가 황폐하게 된 지 70년째 되는 해에, 약속된 구출의 때가 가까웠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그 포로들은 참으로 위로를 얻게 될 것입니다!—다니엘 9:1, 2.
5, 6. (ㄱ) 바빌론에서 예루살렘까지 가는 길이 멀다고 해도 그것이 하느님의 약속을 성취시키는 데 장애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유대인들을 고토로 회복시키는 일은 다른 나라들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입니까?
5 바빌론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어떤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 800킬로미터에서 1600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리가 됩니다. 그 머나먼 거리를 가야 한다는 것이 하느님의 약속을 성취시키는 데 장애가 될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못할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잘 들어라! 누군가 광야에서 외치고 있다. ‘너희는 여호와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 평원을 통과하는 대로를 곧게 하여라. 모든 골짜기는 돋우어지고, 모든 산과 언덕은 낮아져라. 기복이 심한 땅은 평지가 되고, 험한 땅은 골짜기 평야가 되어야 한다. 틀림없이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볼 것이다. 여호와의 입이 그것을 말씀하셨다.’”—이사야 40:3-5.
6 동방의 통치자들은 여행을 떠나기 전에 흔히 사람들을 보내어 길을 닦게 하였는데, 커다란 돌들을 치우고 심지어 대로를 만들기도 하고 언덕은 평평하게 하였습니다. 돌아가는 유대인들의 경우에는, 하느님께서 친히 그들을 앞서 가셔서 모든 장애물을 치우시는 것과 같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들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지닌 백성이므로, 그들을 고토로 회복시키겠다는 약속을 성취시키게 되면 여호와의 영광이 모든 나라 앞에 분명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 나라들은 좋든 싫든 간에, 여호와께서 약속을 성취시키시는 분임을 보게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7, 8. (ㄱ) 이사야 40:3의 말씀은 기원 1세기에 어떻게 성취되었습니까? (ㄴ) 이사야의 예언은 1919년에 어떻게 더 크게 성취되었습니까?
7 이 예언의 성취는 기원전 6세기의 회복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기원 1세기에도 성취가 있었습니다. 침례자 요한은 이사야 40:3을 성취시키는 ‘광야에서 외치는’ 누군가의 음성이었습니다. (누가 3:1-6) 요한은 영감을 받아 이사야의 말을 자신에게 적용시켰습니다. (요한 1:19-23) 요한은 기원 29년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길을 준비하기 시작하였습니다.a 요한이 미리 선포한 덕분에 사람들은 약속된 메시아를 찾게 되었고, 그 결과 그들은 메시아의 말을 듣고 메시아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누가 1:13-17, 76) 여호와께서는 예수를 통해, 회개하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왕국만이 줄 수 있는 자유—죄와 죽음의 속박으로부터의 해방—를 얻게 해 주실 것이었습니다. (요한 1:29; 8:32) 이사야의 말은 1919년에 영적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큰 바빌론에서 구출되고 참 숭배로 회복되었을 때 더 크게 성취되었습니다.
8 그러면 약속의 첫 번째 성취로부터 유익을 얻게 될 사람들, 즉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있는 유대인들은 어떠합니까? 그들을 사랑하는 고토로 돌아가게 해 주시겠다는 여호와의 약속을 그들은 정말로 신뢰할 수 있습니까? 정말로 신뢰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이제 생생한 표현들과 일상 생활에서 택한 예들로, 여호와께서 약속을 지키실 것임을 그들이 전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강력한 이유들을 제시합니다.
그 말씀이 영원히 존속하는 하느님
9, 10. 이사야는 인간의 삶의 무상함과 하느님의 “말씀”의 영속성을 어떻게 대조하고 있습니까?
9 첫 번째 이유는, 회복을 약속하시는 분의 말씀은 영원히 존속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잘 들어라! 누군가 말한다. ‘외쳐라!’ 그러자 말하는 자가 있었다. ‘내가 무엇을 외쳐야 합니까?’ ‘모든 육체는 푸른 풀이요, 그들의 모든 사랑의 친절은 들의 꽃과 같다. 푸른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여호와의 영이 그 위에 불기 때문이다. 확실히 백성은 푸른 풀이다. 푸른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한정 없는 때까지 존속할 것이다.’”—이사야 40:6-8.
10 이스라엘 사람들은 풀은 영원히 존속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풀은 건기에 태양의 강한 열기로 인해 푸른색에서 메마른 갈색으로 변해 버립니다. 어떤 면에서는 인간의 삶도 풀과 같아서 매우 덧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시 103:15, 16; 야고보 1:10, 11) 이사야는 인간의 삶의 무상함과 하느님의 “말씀” 즉 명시된 목적의 영속성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존속합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면 아무것도 그분의 말씀을 무효화하거나 그 말씀이 성취되지 못하도록 방해할 수 없습니다.—여호수아 23:14.
11. 여호와께서 자신의 기록된 말씀에 들어 있는 약속들을 성취시키실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1 오늘날 우리는 성서에 기록된 형태로 여호와의 목적에 관한 그분 자신의 언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서는 여러 세기에 걸쳐서 혹독한 반대를 받아 왔지만, 두려움을 모르는 번역자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성서를 보존하기 위해 생명의 위험을 무릅썼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바친 노력만으로는 성서가 존속해 온 이유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성서가 존속해 온 것에 대한 모든 영예는 “살아 계시고 영존하시는 하느님”이시자 자신의 말씀의 보존자이신 여호와께 돌아가야 합니다. (베드로 첫째 1:23-25) 이제 이러한 점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자신의 기록된 말씀을 보존해 오셨다면, 그분이 자신의 말씀에 들어 있는 약속들도 성취시키실 것이라고 믿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양을 부드럽게 돌보시는 강한 하느님
12, 13. (ㄱ) 회복 약속을 믿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유대인 유배자들에게 어떤 좋은 소식이 있으며, 그들이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2 이사야는 회복 약속을 믿을 수 있는 두 번째 이유를 제시합니다. 그 약속을 하시는 분은 자신의 백성을 부드럽게 돌보시는 강한 하느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시온에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여자야, 높은 산으로 올라가거라. 예루살렘에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여자야, 네 목소리를 힘껏 높여라. 소리를 높여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유다의 도시들에게 ‘여기에 너희 하느님이 계시다’ 하고 말하여라. 보라! 주권자인 주 여호와께서 강한 분으로[“힘을 가지고”, 신세계역 참조주 성서 각주 참조] 오실 것이요, 그분의 팔이 그분을 위하여 통치할 것이다. 보라! 그분의 상이 그분에게 있고, 그분이 치르시는 삯이 그분 앞에 있다. 목자처럼 그분은 자신의 가축 떼를 돌보실 것이다. 팔로 어린 양들을 모으시고, 품에 안으실 것이다. 젖 먹이는 것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실 것이다.”—이사야 40:9-11.
13 성서 시대에는 여자들이 승리를 축하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전쟁에서 이겼다거나 구원이 임박했다는 좋은 소식을 여자들이 큰 소리로 외치거나 노래로 부르는 것입니다. (사무엘 첫째 18:6, 7; 시 68:11) 이사야가 예언적으로 알려 주는 것은, 유대인 유배자들에게 좋은 소식이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심지어 산꼭대기에서 두려움 없이 외칠 만한 소식으로서, 여호와께서 자신의 백성을 인도하시어 그들이 사랑하는 예루살렘으로 다시 데려오실 것이라는 소식입니다! 그들이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여호와께서 “힘을 가지고”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약속을 성취시키시는 것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14. (ㄱ)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백성을 부드러운 방법으로 인도하실 것임을 어떻게 예를 들어 설명합니까? (ㄴ) 목자들이 자기들의 양을 부드럽게 돌보는 방법을 잘 보여 주는 어떤 예가 있습니까? (405면 네모 참조)
14 하지만 이 강하신 하느님에게는 부드러운 면도 있습니다.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백성을 어떻게 인도하여 그들의 고토로 다시 데려오실 것인지를 가슴 뭉클하게 묘사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어린 양들을 모아 “품”에 안는 사랑 많은 목자와 같으십니다. 여기에 사용된 “품”이라는 단어는 옷 위쪽의 접힌 부분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목자들은 양 떼와 보조를 맞출 수 없는 갓 태어난 어린 양들을 때때로 바로 여기에 안고 갑니다. (사무엘 둘째 12:3) 목자들의 생활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감동적인 장면을 통해 여호와의 유배된 백성은 자신들에 대한 여호와의 사랑에 찬 관심을 확신하였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처럼 강하고도 부드러우신 하느님이라면 자신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성취시키실 것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15. (ㄱ) 여호와께서 언제 “힘을 가지고” 오셨으며, ‘그분을 위하여 통치하는 팔’은 누구입니까? (ㄴ) 두려움 없이 선포해야 할 좋은 소식은 무엇입니까?
15 이사야의 말에는 우리 시대를 위한 예언적 의미도 가득 담겨 있습니다. 1914년에 여호와께서는 “힘을 가지고” 오셔서 하늘에 왕국을 설립하셨습니다. ‘그분을 위하여 통치하는 팔’은 그분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이며, 여호와께서는 그를 하늘 왕좌에 앉히셨습니다. 1919년에 여호와께서는 지상에 있는 자신의 기름부음받은 종들을 큰 바빌론의 속박에서 구출하시고 살아 계신 참 하느님에 대한 순결한 숭배를 온전히 회복시키기 시작하셨습니다. 이것은 두려움 없이 선포해야 할 좋은 소식으로서, 마치 산꼭대기에서 외치듯이 선포함으로써 그 소리가 멀리 그리고 널리 퍼져 나갈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목소리를 힘껏 높여, 여호와 하느님께서 이 땅에 그분에 대한 순결한 숭배를 회복시키셨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담대하게 알려 주도록 합시다!
16. 여호와께서는 오늘날 자신의 백성을 어떻게 인도하시며, 그 점은 어떤 면으로 본이 됩니까?
16 이사야 40:10, 11의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 또한 실용적인 가치도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신의 백성을 부드럽게 인도하시는 것을 보는 것은 위로가 됩니다. 다른 양들과 보조를 맞출 수 없는 어린 양들을 포함하여 양들 각자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목자가 이해하고 있듯이, 여호와께서도 자신의 충실한 종들 각자의 한계를 이해하고 계십니다. 더 나아가, 여호와께서는 부드러우신 목자로서 그리스도인 목자들을 위한 본이 되십니다. 장로들은 여호와께서 친히 나타내신 사랑에 찬 관심을 본받아 양 떼를 부드럽게 대해야 합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자기 아들의 피로 사신” 양들 각자에 대해 어떻게 느끼시는지 항상 유의해야 합니다.—사도 20:28.
전지 전능하시다
17, 18. (ㄱ) 유대인 유배자들이 회복 약속을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이사야는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질문들을 합니까?
17 유대인 유배자들이 회복 약속을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전지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손바닥으로 물을 되었고 뼘으로 하늘을 재었으며 땅의 흙먼지를 계량 용기에 담아 보았거나, 산들을 계기로, 언덕들을 저울로 달아 보았느냐? 누가 여호와의 영을 측정하였으며, 누가 그분의 조언자가 되어 그분에게 무언가를 알게 할 수 있겠느냐? 그분과 함께 의논하여 그분을 이해시킨 자가 누구냐? 그분에게 공의의 길을 가르치거나 지식을 가르치거나 참된 이해의 길을 알게 하는 자가 누구냐?”—이사야 40:12-14.
18 이것은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질문들로서 유대인 유배자들이 숙고해 볼 만한 질문입니다. 한낱 인간이 위력 있는 바다의 조수의 흐름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물론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와께는, 땅을 덮고 있는 바다도 그분의 손바닥에 있는 한 방울의 물과 같습니다.b 미약한 인간이 별이 총총한 거대한 하늘을 재 보거나 지상에 있는 산들이나 언덕들의 무게를 달아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사람이 뼘—손을 폈을 때 엄지손가락 끝에서부터 새끼손가락 끝까지의 길이—으로 어떤 물건의 길이를 재듯이 하늘을 쉽게 재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실상 산들이나 언덕들의 무게를 저울에 달아 보실 수도 있습니다. 가장 지혜로운 인간이라 한들 하느님께 현재의 상황에서는 어떻게 하라고 조언하거나 미래에는 어떻게 하라고 알려 드릴 수 있겠습니까? 물론,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19, 20. 이사야는 여호와의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해 어떤 비유적 표현을 사용합니까?
19 지상의 강대한 나라들은 어떠합니까? 그들은 하느님께서 약속의 말씀을 성취시키실 때 그분을 대항할 수 있습니까? 이사야는 나라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함으로 그 질문에 대답합니다. “보라! 나라들은 물통에서 떨어지는 물 한 방울 같고, 저울에 얇게 앉은 먼지처럼 여겨진다. 보라! 그분은 섬들을 고운 먼지처럼 들어올리신다. 레바논조차 계속 불을 때기에 족하지 않고, 그 들짐승들은 번제물로 족하지 않다. 모든 나라들이 그분 앞에서는 없는 것과 같고, 그분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 실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진다.”—이사야 40:15-17.
20 여호와께는, 나라들을 다 합해 봤자 물통에서 떨어지는 물 한 방울 같습니다. 그들은 저울에 쌓인 고운 먼지에 지나지 않아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합니다.c 어떤 사람이 거대한 제단을 세우고 레바논의 산들을 덮고 있는 모든 나무를 그 제단의 장작으로 사용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리고 그 사람이 그 산들을 돌아다니는 모든 동물을 희생 제물로 바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한 제물이라도 여호와에게는 대수롭지 않게 보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용한 비유적 표현으로도 충분치 않은 듯, 이사야는 한층 더 강력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여호와의 눈에는 모든 나라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만도 못”합니다.—이사야 40:17, 신 개역 표준역.
21, 22. (ㄱ)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비할 데 없으신 분임을 어떻게 강조합니까? (ㄴ) 이사야의 생생한 묘사를 통해 우리는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까? (ㄷ) 예언자 이사야는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어떤 말을 기록합니까? (412면 네모 참조)
21 여호와께서 비할 데 없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한층 더 강조하기 위하여 이사야는 금이나 은이나 나무로 우상을 만드는 자들이 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보여 줍니다. 그러한 우상이 “원 모양의 땅 위에 거하시는 분”이자 땅의 주민들을 지배하시는 분을 적절하게 대표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낭독 이사야 40:18-24.
22 이 모든 생생한 묘사를 통해 우리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전지 전능하시고 비할 데 없으신 여호와께서 자신의 약속을 성취시키시는 것을 그 어느 것도 방해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사야의 말은 바빌론에 있으면서 고토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던 유대인 유배자들에게 참으로 위로가 되었을 것이며 그들을 강화시켜 주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미래에 대한 여호와의 약속이 실제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누가 이것들을 창조하였느냐?”
23. 유대인 유배자들은 어떤 이유로 용기를 낼 수 있으며, 여호와께서는 이제 자신과 관련하여 어떤 점을 강조하십니까?
23 그런데 유대인 유배자들이 용기를 낼 수 있는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구출을 약속하시는 분은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모든 활력의 근원이 되시는 분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놀라운 능력을 강조하시기 위해, 창조물 가운데 분명히 나타나 있는 자신의 능력에 다음과 같이 주의를 이끄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에 비하여 그와 동등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거룩한 분이 말씀하신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고 보아라. 누가 이것들을 창조하였느냐? 그분은 그 군대를 수대로 끌어 내시고, 그 모든 것을 이름으로 부르시는 분이다. 그분은 활력이 풍부하시며 또한 능력이 강하시어, 그 중 하나도 빠지지 않는다.’”—이사야 40:25, 26.
24. 여호와께서는 자신을 위해 말씀하시면서 어떻게 자신이 비할 데 없는 분임을 보여 주십니까?
24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 자신을 위하여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이 비할 데 없는 분임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하늘의 별들에게로 주의를 이끄십니다. 사령관이 자신의 군대를 정렬시킬 수 있는 것처럼, 여호와께서는 별들에게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분이 그것들을 집합시키신다면 “그 중 하나도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별들의 수가 엄청나지만 그분은 그 별들을 일일이 점호하시는데, 고유의 이름으로 부르시든지 아니면 이름 같은 명칭으로 부르시든지 하십니다. 별들은 순종적인 군인처럼 제 위치를 고수하며 합당한 질서를 지키는데, 자기들의 지휘관이 “활력”이 풍부하시고 “능력이 강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 유배자들에게는 확신을 가질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별들에게 명령을 내리시는 창조주시라면 자신의 종들을 지원할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25. 이사야 40:26에 기록된 하느님의 권고에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이며, 그 결과 어떤 영향을 받습니까?
25 우리 중에 누가 이사야 40:26에 기록된 “너희는 눈을 높이 들고 보아라”라는 하느님의 권고를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현대의 천문학자들이 발견한 사실들에 의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별이 총총한 하늘은 이사야 시대에 그랬던 것보다 훨씬 더 경외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강력한 망원경으로 하늘을 자세히 관찰해 온 천문학자들은 관찰 가능한 우주에만도 1250억 개나 되는 은하가 있다고 추산합니다. 그런데 일부 추산에 의하면, 그 중 한 은하—우리 은하—에만도 1000억 개가 넘는 별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의 마음 속에서 우리의 창조주에 대한 경외심이 일게 되고 그분의 약속의 말씀에 대한 온전한 확신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26, 27. 바빌론에 유배되어 있는 사람들의 심정이 어떻게 묘사되어 있으며, 그들은 어떤 사실을 알아야 합니까?
26 여호와께서는 유대인 유배자들이 포로 상태로 여러 해를 지내다 보면 사기가 떨어질 것을 아시고, 이사야에게 영감을 주시어 다음과 같이 안심시켜 주시는 말씀을 미리 기록하게 하십니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나의 길은 여호와에게서 감추어져 있고, 나에 대한 공의는 나의 하느님을 비켜 간다’ 하느냐? 너는 알지 못하였고, 듣지 못하였느냐? 땅 끝까지 지으신 창조주 여호와는 한정 없는 때까지 하느님이시다. 그분은 피곤하거나 지치지 않으신다. 그분의 이해는 찾아 낼 길이 없다.”—이사야 40:27, 28.d
27 이사야는 고국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바빌론에 유배되어 있는 사람들의 심정을 묘사하는 여호와의 말씀을 기록합니다. 일부 사람들은 자기들의 “길”—자기들의 힘든 삶의 길—을 자기들의 하느님께서 보지 못하시고 알지 못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겪고 있는 불공정에 관심이 없으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더라도 적어도 전해 내려온 지식을 통해서라도 알아 두어야 할 사실들을 상기받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구출하실 능력과 의사를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그분은 영원한 하느님이시며 온 땅의 창조주이십니다. 따라서 그분은 창조하실 때 나타내신 능력을 여전히 가지고 계시므로, 강대한 바빌론조차도 그분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한 하느님이시라면 피곤해지실 수가 없으며 자신의 백성을 실망시키실 리도 없습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자기들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분의 이해력—혹은 그분의 통찰력이나 분별력이나 지각력—은 그들의 이해를 초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28, 29. (ㄱ) 여호와께서는 지친 자들을 도와 주실 것임을 자신의 백성에게 어떻게 상기시키십니까? (ㄴ) 여호와께서 자신의 종들에게 능력을 주시는 방법을 보여 주기 위해 어떤 예가 사용됩니까?
28 여호와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풀이 죽어 있는 유배자들에게 계속 격려를 베푸십니다. “그분은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며, 활력이 없는 자에게 온전한 위력이 넘치게 하신다. 소년이라도 피곤하고 지치며, 청년이라도 틀림없이 걸려 넘어지겠지만, 여호와께 희망을 두는 사람들은 능력을 되찾을 것이다. 그들은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솟아오를 것이다. 그들은 달려가도 지치지 않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이사야 40:29-31.
29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실 필요에 대해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는 유배자들이 고토로 돌아가기 위해 치러야 할 힘든 여행을 염두에 두고 계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여호와께서는, 지원을 얻기 위해 자신을 바라보는 지친 자들에게 도움을 주시는 것이 자신의 특성임을 자신의 백성에게 상기시켜 주십니다. 인간 가운데 가장 활기가 넘치는 사람—“소년”이나 “청년”—이라 할지라도 피로하여 지칠 수 있으며 기진맥진하여 걸려 넘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능력—지치지 않고 달리며 걸을 수 있는 능력—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자신의 종들에게 어떻게 능력을 주시는지를 예시하기 위하여, 한 번에 여러 시간을 날아 오를 수 있는 강력한 새인 독수리가 힘들이지 않고 나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을 사용하고 있습니다.e 그러한 하느님의 지원이 있을 것임을 생각할 때 유대인 유배자들은 실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30. 오늘날 참 그리스도인들은 이사야 40장의 마지막 구절들에서 어떻게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까?
30 이사야 40장을 끝맺는 이 구절들에는 이 악한 제도의 마지막 날에 살고 있는 참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위로의 말씀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를 낙담시키는 압력이나 문제들이 매우 많으므로, 우리가 인내하는 고난이나 우리가 겪는 불공정을 우리 하느님께서 모르고 계시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참으로 안심이 됩니다. 만물의 창조주, 그 ‘이해를 이루 다 이야기할 수 없’는 분께서 그분이 정하신 때에 그분의 방법으로 모든 불공정을 시정해 주실 것임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시 147:5, 6) 그때까지도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인내할 필요가 없습니다. 고갈되지 않는 자원을 가지고 계신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종들에게 시련의 때에 능력—심지어 “정상적인 것을 초월하는 능력”—을 주실 수 있습니다.—고린도 둘째 4:7.
31. 이사야의 예언은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있던 유대인들에게 빛이 되는 어떤 약속을 담고 있었으며, 우리는 누구를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습니까?
31 기원전 6세기에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있던 그 유대인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그들이 사랑하는 예루살렘은 황폐된 채로, 그 성전은 폐허가 된 채로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이사야의 예언은 위로가 되는 빛과 희망의 약속을 담고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고토로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기원전 537년에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고토로 인도하심으로 자신이 약속을 성취시키시는 분임을 증명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여호와를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에 매우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는 그분의 왕국 약속은 실제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좋은 소식, 온 인류를 위한 빛이 되는 소식입니다!
[각주]
a 이사야는 여호와 앞에서 길을 준비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사야 40:3) 하지만 복음서들은 그 예언을 침례자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길을 준비하기 위해 한 일에 적용한다.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의 영감받은 필자들은 예수께서 아버지를 대표하여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적용한 것이다.—요한 5:43; 8:29.
b “바다의 질량은 대략 1.35x1018미터톤, 혹은 지구의 총질량의 4400분의 1정도” 되는 것으로 추산된다.—「엔카르타 97 백과 사전」.
c 「해설자의 성서 주석」(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근동 지방의 시장 거래에서는 고기나 과일의 무게를 달 때 계량 물통에 있는 작은 물방울이나 저울의 미세한 먼지는 계산에 넣지 않았다.”
d 이사야 40:28에 나오는 “한정 없는 때”라는 표현은 “영원”을 의미한다. 여호와께서는 “영원하신 왕”이기 때문이다.—디모데 첫째 1:17.
e 독수리는 최소한의 에너지를 사용하여 하늘 높이 머무를 수 있다. 상승 온난 기류 즉 위로 올라가는 따뜻한 공기 기둥을 기술적으로 이용하여 그렇게 한다.
[404, 405면 네모와 삽화]
여호와, 사랑 많으신 목자
이사야는 여호와를 어린 양들을 품에 안는 사랑 많은 목자에 비한다. (이사야 40:10, 11) 이사야는 목자들이 실제로 하는 일을 근거로 이 가슴 뭉클한 예를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중동 지방의 헤르몬 산의 경사지에 있는 목자들을 유심히 살펴본 현대의 한 관찰자는 이렇게 보고한다. “목자마다 양 떼의 상태가 어떠한지 알기 위해 면밀히 살폈다. 갓 태어난 어린 양을 발견하면 그 양을 ··· 긴 겉옷의 접힌 부분에 품었다. 그 양은 너무 약해 어미를 따라다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슴이 어린 양들로 가득 차면, 어린 양의 발을 잡아 어깨에 올려 놓든지 아니면 당나귀 등에 실은 자루나 광주리에 넣고 다녔다. 그 어린 새끼들이 어미들을 따라다닐 수 있을 때까지 그렇게 하였다.” 자신의 백성에 대해 그처럼 부드러운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하느님을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위로가 되지 않는가?
[412면 네모와 삽화]
지구는 어떤 모양으로 생겼는가?
고대에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일찍이 기원전 6세기에 그리스의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지구가 구체일 것이라는 이론을 세웠다. 그런데 피타고라스가 그런 이론을 세우기 200년 전에 예언자 이사야는 대단히 명료하고 확실하게 이렇게 말하였다. ‘원 모양의 땅 위에 거하시는 분이 계시다.’ (이사야 40:22) 여기서 “원”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단어 후그는 “구(球)”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구체라야만 어느 각도에서 보든지 원으로 보인다는 것이다.f 그러므로 예언자 이사야는 자기 시대의 사람들보다 훨씬 앞서서, 과학적으로 근거가 있고 고대의 미신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각주]
f 과학적으로 엄밀히 말하자면, 지구는 편구(偏球)이다. 양극이 약간 평평한 모양을 하고 있다.
[403면 삽화]
침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음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