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가 기뻐하다
1. 사라가 몹시 자녀를 낳고 싶어하였던 이유는 무엇이며, 그와 관련하여 사라는 어떤 경험을 하였습니까?
사라는 몹시 자녀를 낳고 싶어하였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사라는 임신을 하지 못하였으며, 그로 인해 매우 괴로워하였습니다. 그 시대에, 임신을 하지 못하는 것은 치욕으로 여겨졌지만, 사라를 괴롭게 만드는 요인은 그 밖에도 더 있었습니다. 사라는 자기 남편에게 하신 하느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기를 열망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땅의 모든 가족에게 축복이 될 씨의 아버지가 되게 되어 있었습니다. (창세 12:1-3) 하지만 하느님께서 그 약속을 하신 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자식이 없었습니다. 사라가 늙어 가는데도 자식이 없었습니다. 이따금 사라는 자기가 헛된 희망을 가진 것이 아닌가 의심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라의 절망이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2. 이사야 54장에 기록된 예언에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사라가 처했던 곤경은 이사야 54장에 기록된 예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거기에 보면, 예루살렘이 마치 임신하지 못하였다가 많은 자녀를 갖게 되는 큰 기쁨을 경험하는 여자인 것처럼 언급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고대 백성을 집합적으로 자신의 아내로 묘사하심으로써, 그들에 대한 자신의 부드러운 감정을 나타내십니다. 뿐만 아니라, 이사야 54장은 성서에서 “신성한 비밀”이라고 부르는 것의 매우 중요한 부면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로마 16:25, 26) 이 예언에 나오는 “여자”가 누구인지 하는 점과 그 여자가 한 경험들은 오늘날의 순결한 숭배에 중요한 빛을 던져 줍니다.
“여자”가 누구인지 밝혀짐
3.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가 기뻐할 이유를 어떻게 갖게 될 것입니까?
3 54장은 행복한 어조로 시작됩니다. “‘출산하지 못한 너,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여, 기뻐 외쳐라! 너, 출산의 고통을 겪지 못한 여자여, 기뻐하는 외침으로 즐거워하고 소리 높여 외쳐라. 버림받은 자의 아들들이 남편인 소유자가 있는 여자의 아들들보다 더 많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이사야 54:1) 이사야는 이 예언을 할 때 틀림없이 매우 감격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언의 성취는 바빌론에 유배되어 있는 유대인들에게 참으로 위로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때에도 예루살렘은 여전히 황폐되어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예루살렘에 다시 사람이 살게 될 가망이 없어 보일 것입니다. 마치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가 노년에 자녀를 낳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이 “여자”는 장차 커다란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잉태하게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정신을 잃을 정도로 기뻐할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다시 “아들들” 즉 주민들로 들끓게 될 것입니다.
4. (ㄱ) 이사야 54장이 기원전 537년에 성취된 것보다 더 크게 성취될 것이 분명함을 이해할 수 있도록 사도 바울은 어떻게 도움을 줍니까? (ㄴ)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무엇입니까?
4 이사야는 몰랐겠지만, 그의 예언은 한 번 이상 성취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사야 54장을 인용하여, 그 “여자”가 지상에 있는 도시 예루살렘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로우며, 그는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갈라디아 4:26) 이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무엇입니까? 약속의 땅에 있는 예루살렘 도시가 아님은 분명합니다. 그 도시는 지상에 있는 것으로서, 하늘 영역인 “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하늘 “여자”로서, 강력한 영적 피조물들로 이루어진 하느님의 조직입니다.
5. 갈라디아 4:22-31에 개략적으로 설명되어 있는 상징적인 극에서, (ㄱ) 아브라함 (ㄴ) 사라 (ㄷ) 이삭 (ㄹ) 하갈 (ㅁ) 이스마엘은 각각 누구 혹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5 그러면 여호와께서는 어떻게 두 명의 상징적 여자—하나는 하늘의 여자, 다른 하나는 지상의 여자—를 거느리고 계실 수 있습니까? 여기에 모순된 점이라도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가족을 통해 제시된 예언적 상징에 그 답이 있음을 설명합니다. (갈라디아 4:22-31; 218면의 “아브라함의 가족—예언적 상징” 참조) “자유로운 여자”이자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는 영적 피조물들로 이루어진 여호와의 아내 같은 조직을 상징합니다. 하녀이면서 아브라함의 이차적 아내 즉 첩이 된 하갈은 지상의 예루살렘을 상징합니다.
6. 하느님의 하늘 조직은 어떤 의미에서 오랜 기간 임신하지 못하는 상태를 겪었습니까?
6 이러한 배경을 알고 나면, 이사야 54:1의 깊은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사라는 임신하지 못하는 상태로 수십 년을 보내다가 90세가 되었을 때 이삭을 낳았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하늘 조직도 오랜 기간 임신하지 못하는 상태를 겪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일찍이 에덴에서, 자신의 “여자”가 “씨”를 산출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창세 3:15) 2000여 년 후에, 여호와께서는 약속의 씨와 관련하여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하늘 “여자”는 그 씨를 산출하기까지 아주 오랜 기간을 더 기다려야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한때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였던 사람의 자녀가 육적 이스라엘의 자녀보다 더 많아질 때가 되었습니다.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의 예는, 천사들이 예언된 씨가 나타나는 것을 몹시 보고 싶어하던 이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베드로 첫째 1:12) 그 일은 마침내 언제 있었습니까?
7.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이사야 54:1에 예언된 대로 언제 기뻐할 일이 생겼으며, 그렇게 대답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7 예수께서 인간 아기로 태어나신 일은 분명히 천사들이 기뻐할 일이었습니다. (누가 2:9-14) 하지만 그 일은 이사야 54:1에 예언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기원 29년에 성령으로 태어나셨을 때에야 비로소 “위에 있는 예루살렘”의 영적 아들이 되셨으며, 하느님에 의해 직접 그분의 “아들, 사랑하는 자”라고 공개적으로 인정받으셨습니다. (마가 1:10, 11; 히브리 1:5; 5:4, 5) 그제야 비로소 하느님의 하늘 “여자”는 이사야 54:1의 성취로 기뻐할 이유를 갖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 여자가 약속된 씨인 메시아를 산출한 것입니다! 임신하지 못하는 상태로 지내던 오랜 기간이 끝났습니다. 하지만 그 여자의 기뻐하는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많은 아들들
8. 하느님의 하늘 “여자”가 약속된 씨를 산출한 후에도 기뻐할 만한 이유가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8 예수께서 죽으시고 뒤이어 부활되시자, 하느님의 하늘 “여자”는 이 은혜받은 아들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처음 나신 분”으로 다시 받아들이게 되어 기뻐하였습니다. (골로새 1:18) 그 후로 그 여자는 더 많은 영적 아들들을 산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기원 33년 오순절에, 약 120명의 예수의 추종자들이 성령으로 기름부음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의 공동 상속자로 입양되었습니다. 그날 나중에 3000명이 더 추가되었습니다. (요한 1:12; 사도 1:13-15; 2:1-4, 41; 로마 8:14-16) 이 아들들의 연합체는 계속 커져 갔습니다. 그러다가 그리스도교국이 배교하고 나서 처음 몇 세기 동안 그 성장 속도가 느려지더니 미미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그러한 상황이 바뀌게 되어 있었습니다.
9, 10. “천막 터를 넓혀라”라는 지시가 고대에 천막에 거하는 여자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며, 이때가 그러한 여자에게 기쁨의 때가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9 이사야는 이어서 주목할 만한 성장의 시기에 대해 예언합니다. “너의 천막 터를 넓혀라. 그들이 네 웅장한 장막의 천막 천을 넓게 펴게 하여라. 주저하지 말아라. 너의 천막 줄을 길게 늘이고, 너의 천막 말뚝을 튼튼하게 하여라. 좌우로 네가 퍼져 나가고, 네 자손이 나라들을 차지하며, 황폐한 도시들에도 거주할 것이기 때문이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네가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굴욕을 느끼지 말아라. 네가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네 젊은 때의 수치를 잊겠고, 계속된 과부 생활의 치욕을 다시는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이사야 54:2-4.
10 여기서는 예루살렘이 마치 사라처럼 천막에 거하는 아내이자 어머니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가족이 점점 커지는 축복을 받게 되자, 그러한 어머니도 집을 확장할 조처를 취할 때가 됩니다. 천막 천과 천막 줄을 더 길게 늘이고 천막 말뚝을 새로운 자리에 안전하게 박아야 합니다. 이것은 그 어머니에게 행복한 일이며, 그처럼 바쁜 때에는, 자녀를 낳아 가족의 대를 잇게 될 것인지 의심하며 걱정스럽게 보내던 세월이 있었는지도 쉽게 잊어버릴 것입니다.
11. (ㄱ) 하느님의 하늘 “여자”는 1914년에 어떻게 축복을 받았습니까? (각주 참조) (ㄴ) 1919년 이후로, 지상의 기름부음받은 자들은 어떤 축복을 경험해 왔습니까?
11 지상의 예루살렘은 바빌론에 유배되었다가 부흥하는 그러한 때로 축복을 받았습니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훨씬 더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a 특히 1919년 이후로, 그 여자의 기름부음받은 “자손”은 새롭게 회복된 영적 상태에서 번영을 누려 왔습니다. (이사야 61:4; 66:8) 그들은 널리 많은 나라로 퍼져 나가 자기들의 영적 가족에 합류할 모든 사람을 찾아냄으로써 “나라들을 차지”하였습니다. 그 결과, 기름부음받은 아들들을 모아들이는 일에서 급속한 성장이 이루어졌습니다. 14만 4000명의 최종 수가 1930년대 중반의 언젠가 채워진 것 같습니다. (계시 14:3) 그때에, 전파 활동의 초점은 더는 기름부음받은 자들을 모아들이는 일에 맞추어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기름부음받은 자들과 함께 이루어지는 확장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12. 기름부음받은 자들에 더하여, 1930년대 이후로 또 누가 그리스도인 회중으로 모아졌습니까?
12 예수께서 직접 예언하신 바에 의하면, 그분은 기름부음받은 형제들로 이루어진 “적은 무리” 외에 “다른 양들”을 갖게 될 것이며, 그들도 참 그리스도인들로 이루어진 양 우리 안으로 반드시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누가 12:32; 요한 10:16) 기름부음받은 자들의 이 충실한 동료들은 “위에 있는 예루살렘”의 기름부음받은 아들들 가운데 속하지는 않지만, 오래 전부터 예언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스가랴 8:23) 193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그러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큰 무리”가 모아져 왔으며, 그 결과 그리스도인 회중은 전례가 없을 정도로 확장되었습니다. (계시 7:9, 10) 오늘날 그 큰 무리의 수는 수백만 명에 달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확장으로 인해 더 많은 왕국회관, 대회 회관, 지부 복합 건물들이 긴급히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시간이 갈수록 적절해 보입니다. 이 예언된 확장에 참여하는 것은 참으로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손을 돌보는 어머니
13, 14. (ㄱ) 하느님의 하늘 “여자”에게 하신 표현 중 일부를 볼 때 분명히 어떤 어려움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까? (ㄴ) 가족 관계의 예를 사용하시는 하느님의 방법으로부터 우리는 어떤 통찰력을 얻을 수 있습니까?
13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예언에 나오는 “여자”는 더 큰 성취에서 여호와의 하늘 조직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이사야 54:4을 읽고 나면, 영적 피조물들로 이루어진 그 조직이 수치나 치욕을 당하는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었는지 의아하게 생각될지 모릅니다. 이어지는 구절들에서는 하느님의 “여자”가 퇴박맞고, 괴로움을 당하고, 또 공격도 당할 것이라고 알려 줍니다. 그 여자는 심지어 하느님이 분개하게 자극하기까지 할 것입니다. 그러한 일들이 어떻게 한 번도 죄를 범한 적이 없는 완전한 영적 피조물들로 이루어진 조직에 적용될 수 있습니까? 가족의 본질적인 특성에서 그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14 여호와께서는 의미심장한 영적 진리를 전달하시는 데 가족 관계—남편과 아내의 관계, 어머니와 자녀의 관계—를 사용하십니다. 그런 관계가 상징하는 것들이 인간들에게는 의미하는 바가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이 경험한 가족 관계의 정도나 질이 어떠하든, 우리는 아마 훌륭한 결혼 생활 혹은 부모와 자식 간의 훌륭한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알고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는 자신이 영적인 종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무리와 따뜻하고 친밀하고 신뢰하는 관계를 맺고 계시다는 점을 우리에게 참으로 생생하게 가르쳐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하늘 조직이 지상에 있는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자손을 돌보고 있다는 점을 매우 인상적으로 가르쳐 주고 계신 것입니다! 인간 종들이 고통을 당할 때, 충실한 하늘의 종들인 “위에 있는 예루살렘”도 고통을 당합니다. 그와 비슷한 의미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나의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형제들 중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그만큼 나에게 한 것이다.”—마태 25:40.
15, 16. 이사야 54:5, 6의 처음 성취는 무엇이며, 더 큰 성취는 무엇입니까?
15 그러므로 여호와의 하늘 “여자”에게 하시는 말씀 중 많은 부분은 그 여자의 자녀가 지상에서 겪는 일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점은 놀라운 사실이 아닙니다. 이러한 말씀을 고려해 보십시오. “‘너를 만든 위대한 이가 너의 남편인 소유자이다. 만군의 여호와가 그 이름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는 너를 도로 사는 이이다. 그는 온 땅의 하느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여호와가 너를, 마치 완전히 버림받아 영이 상한 아내인 양, 젊은 시절의 아내였다가 퇴박맞은 여자인 양 불렀다.’ 너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이사야 54:5, 6.
16 여기 언급되어 있는 아내는 누구입니까? 처음 성취에서, 그것은 하느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예루살렘입니다. 바빌론에 70년간 유배되어 있는 동안, 그들은 마치 여호와께서 자신들을 퇴박하여 완전히 버리신 것처럼 느끼게 될 것입니다. 더 큰 성취에서, 이 말씀은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가리키며, 또한 그 여자가 창세기 3:15의 성취로 마침내 “씨”를 산출하게 되는 경험을 가리킵니다.
일시적인 징계와 영원한 축복
17. (ㄱ) 지상의 예루살렘은 어떻게 “홍수 같은” 하느님의 분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까? (ㄴ) “위에 있는 예루살렘”의 아들들은 어떤 “홍수”를 경험하였습니까?
17 예언은 다음과 같이 계속됩니다. “‘잠시 내가 너를 완전히 버렸으나, 큰 자비로 너를 모을 것이다. 홍수 같은 분개로 내가 나의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지만, 한정 없는 때까지 이르는 사랑의 친절로 너에게 자비를 베풀겠다.’ 너를 도로 사시는 분,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이사야 54:7, 8) 바빌로니아 군대가 기원전 607년에 공격할 때, 지상의 예루살렘에는 “홍수” 같은 하느님의 분개가 넘쳐흐르게 됩니다. 70년간의 유배 기간은 긴 시간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시련은, 징계에 대해 올바른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들을 위해 예비된 영원한 축복에 비하면 “잠시” 지속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위에 있는 예루살렘”의 기름부음받은 아들들도, 자기들이 큰 바빌론의 선동으로 정치 요소들의 공격을 받게 여호와께서 허락하셨을 때, 마치 “홍수 같은” 하느님의 진노에 의해 자기들이 휩쓸려가 버리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러한 징계 조처 기간은 1919년 이후로 있게 된 영적 축복의 기간과 비교해 볼 때 매우 짧았습니다!
18. 여호와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는 것과 관련하여 어떤 중요한 원칙을 식별할 수 있으며, 이것은 우리 개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까?
18 이 성구들은 또 하나의 중요한 진리를 표현하고 있는데, 하느님의 진노는 신속히 지나가지만 그분의 자비는 영원히 지속된다는 점입니다. 범죄 행위가 있을 때 그분의 분노가 타오르지만, 그것은 언제나 잘 제어되며, 또한 언제나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여호와의 징계를 받아들인다면, 그분의 분노는 “잠시” 지속되다가 사그라집니다. 그리고 그 분노는 그분의 “큰 자비”—그분의 용서와 사랑의 친절—로 대치됩니다. 이런 것들은 “한정 없는 때까지” 지속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죄를 범하게 된다면, 회개하고 하느님과 화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을 결코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심각한 성격의 죄라면, 즉시 회중 장로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야고보 5:14) 사실, 징계가 필요할지 모르며, 징계를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히브리 12:11) 하지만 여호와 하느님의 용서를 받게 될 때 오는 영원한 축복에 비하면 징계는 짧은 것이 될 것입니다!
19, 20. (ㄱ) 무지개 계약이란 무엇이며, 그 계약은 바빌론에 유배되어 있는 사람들과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ㄴ) “평화의 계약”은 오늘날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슨 보증을 해 줍니까?
19 여호와께서는 이제 자신의 백성을 다음과 같이 위로하시며 안심시켜 주십니다. “‘이는 나에게 노아의 날과 같다. 나는 노아의 물이 다시는 땅 위에 지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하였듯이, 너에게 분개하지도 너를 꾸짖지도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산들은 떠나고 언덕들은 흔들려도, 나의 사랑의 친절은 너에게서 떠나지 않으며, 나의 평화의 계약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너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분인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이사야 54:9, 10) 하느님께서는 대홍수 후에, 노아를 비롯하여 모든 산 영혼과 계약—무지개 계약으로도 알려져 있는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더는 세계적인 홍수로 지상에 멸망을 가져오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창세 9:8-17) 이것은 이사야와 그의 민족에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20 그들이 반드시 겪게 될 처벌, 즉 70년간의 바빌론 유배는 단 한 번밖에 있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아는 것은 위로가 됩니다. 그것이 끝나고 나면 그런 일은 더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 후로는 하느님의 “평화의 계약”이 발효될 것입니다. “평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전쟁이 없는 상태라는 의미뿐 아니라 모든 면으로 복지를 누리는 상태라는 의미도 전달합니다. 하느님 편에서 볼 때, 이 계약은 영구적인 것입니다. 언덕들과 산들은 사라져도 자신의 충실한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의 친절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지상에 있는 그분의 나라는 결국 그들이 이행해야 할 계약 조건과 일치하게 살지 못할 것이며, 메시아를 배척함으로 자기들이 누리던 평화를 스스로 깨뜨려 버릴 것입니다. 하지만 “위에 있는 예루살렘”의 아들들은 훨씬 더 현명하게 처신하였습니다. 일단 어려운 징계 기간이 끝나자, 그들은 하느님의 보호를 확신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의 영적 안전
21, 22. (ㄱ)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 괴로움을 당하고 광풍에 요동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하느님의 하늘 “여자”의 축복받은 상태는 지상에 있는 그 여자의 “자손”과 관련하여 무엇을 의미할 것입니까?
21 여호와께서는 뒤이어 자신의 충실한 백성의 안전을 예언하십니다. “괴로움을 당하고, 광풍에 요동하며, 위로를 받지 못한 여자여, 이제 내가 견고한 모르타르로 네 돌들을 놓고, 사파이어로 네 기초를 놓겠다. 내가 루비로 네 흉벽을, 불처럼 빛나는 돌로 네 성문을, 좋아할 만한 돌들로 네 모든 경계를 만들겠다. 네 아들들은 모두 여호와에게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이 되리니, 네 아들들의 평화가 풍부할 것이다. 너는 의로 굳게 세워질 것이다. 너는 압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이다—너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또한 겁낼 만한 것으로부터 떨어져 있을 것이다. 그것이 너에게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다. 만일 누가 공격한다 해도, 그것은 나의 명령에 따른 것이 아닐 것이다. 너를 공격하는 자는 누구든지 너로 말미암아 쓰러질 것이다.”—이사야 54:11-15.
22 물론, 영계에 있는 여호와의 “여자”가 직접 괴로움을 당하거나 광풍에 요동한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상에 있는 자신의 기름부음받은 “자손”이 고통을 당했을 때, 특히 1918-19년 기간에 영적 포로 상태에 있었을 때, 그 여자도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반대로, 하늘의 “여자”가 높여질 때, 그것은 그 여자의 자손이 일반적으로 누리고 있는 그와 비슷한 상태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에 있는 예루살렘”에 관한 찬란한 묘사를 고려해 보십시오. 성문의 보석들, 값비싼 “견고한 모르타르”, 기초, 심지어 경계가 암시하는 것은, 한 참조 문헌에서 언급하듯이, “아름다움, 장엄함, 순결, 힘, 견고함”입니다. 무엇이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을 그처럼 안전하고 축복받은 상태로 인도할 것입니까?
23. (ㄱ) “여호와에게 가르침을 받는” 것은 마지막 날에 살고 있는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쳐 왔습니까? (ㄴ) 하느님의 백성은 어떤 의미에서 ‘좋아할 만한 돌들로 만든 경계’로 축복을 받아 왔습니까?
23 이사야 54장 13절에서 그 답을 알려 줍니다. 모두가 “여호와에게 가르침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친히 이 성구의 말씀을 자신의 기름부음받은 추종자들에게 적용시키셨습니다. (요한 6:45) 예언자 다니엘은 이 “마지막 때”에 기름부음받은 자들이 풍부한 참 지식과 영적 통찰력으로 축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다니엘 12:3, 4) 그러한 통찰력으로 인해 그들은 역사상 최대의 교육 운동의 선봉에 서서, 온 땅에 하느님의 가르침을 전파할 수 있었습니다. (마태 24:14) 한편, 그러한 통찰력은 그들이 참 종교와 거짓 종교의 차이를 분별할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이사야 54:12에서는 ‘좋아할 만한 돌들로 만든 경계’에 대해 언급합니다. 1919년 이래, 여호와께서는 기름부음받은 자들이 경계—영적 구분선—를 점점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그들이 거짓 종교와 세상의 불경한 요소들로부터 분리되게 해 오셨습니다. (에스겔 44:23; 요한 17:14; 야고보 1:27) 그리하여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으로 분리되어 있습니다.—베드로 첫째 2:9.
24. 어떻게 할 때 우리는 틀림없이 여호와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습니까?
24 따라서 우리 각자는 ‘나는 여호와께 가르침을 받고 있는가?’ 하고 자문해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한 가르침을 받는 것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정기적으로 읽고 묵상한다면, 그리고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 발행하는 성서에 근거한 출판물을 읽고 그리스도인 집회를 위한 준비를 하고 그 집회에 참석함으로써 교훈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참으로 여호와께 가르침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마태 24:45-47) 배우는 것을 적용하려고 노력하고 영적으로 깨어 살피는 상태를 유지한다면, 하느님의 가르침은 우리를 분리시켜 이 무신적인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구별되게 해 줄 것입니다. (베드로 첫째 5:8, 9) 더 나아가,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야고보 1:22-25; 4:8.
25. 평화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은 현대에 사는 그분의 백성에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25 이사야의 예언은 또한 기름부음받은 자들이 풍부한 평화로 축복을 받고 있다고 알려 줍니다. 이것은 그들이 결코 공격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자신이 그러한 공격을 명령하시거나 그러한 공격이 성공하게 허락하시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보증하십니다.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보라! 숯불을 불어서 자기의 수공품인 무기를 만들어 내는 장인을 내가 창조하였다. 또한 파멸시키는 파괴자도 내가 창조하였다. 너를 치려고 만들어지는 무기는 무엇이든지 성공하지 못할 것이며, 재판에서 너를 거슬러 일어나는 혀는 모두 네가 정죄할 것이다. 이것이 여호와의 종들의 유산이며, 그들의 의는 내게서 나온다.’ 여호와의 말씀이다.”—이사야 54:16, 17.
26. 여호와께서 온 인류의 창조주라는 사실을 알 때 안심이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6 여호와께서는 이사야서의 이 장에서 두 번째로, 자신의 종들에게 자신이 창조주임을 상기시키십니다. 앞에서도 그분은 자신의 상징적 아내에게 자신이 그를 “만든 위대한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그분은 자신이 온 인류의 창조주라고 말씀하십니다. 16절에서는 대장간 숯불을 불어서 파괴의 무기를 만드는 금속 세공인과 전사 즉 “파멸시키는 파괴자”에 대해 묘사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자기와 같은 사람에게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기들의 창조주를 대항하여 이길 수 있기를 어떻게 감히 바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날, 이 세상의 가장 강력한 군대가 여호와의 백성을 공격한다 해도, 그들에게는 최종적인 승리를 거둘 가능성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27, 28. 이 험난한 시대에도 우리는 무슨 확신을 가질 수 있으며, 우리에 대한 사탄의 공격이 아무런 효과도 없을 것임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27 하느님의 백성과 그들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숭배에 대한 파멸적인 공격의 때는 지나갔습니다. (요한 4:23, 24) 여호와께서는 큰 바빌론이 한 번의 공격을 하게 허락하셨는데, 그 공격은 일시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지상의 전파 활동이 거의 중단되다시피 하였을 때,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잠시 자신의 자손이 침묵에 가까운 상태에 빠져 든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 일이 다시는 없을 것입니다! 이제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신의 아들들로 인해 기뻐합니다. 그들이 영적인 의미에서, 적들이 이길 수 없는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 16:33; 요한 첫째 5:4) 물론, 그들을 치려고 만들어진 공격 무기들이 있었으며, 앞으로도 더 있을 것입니다. (계시 12:17) 하지만 그것들은 성공하지 못하였으며, 앞으로도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탄이 소유하고 있는 무기 중에, 기름부음받은 자들과 그들의 동료들의 믿음과 타오르는 열심을 잠잠하게 만들 수 있는 무기는 없습니다. 이러한 영적 평화는 “여호와의 종들의 유산”이므로, 아무도 그것을 그들에게서 강제로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시 118:6; 로마 8:38, 39.
28 그렇습니다. 사탄의 세상이 할 수 있는 어떤 것도 하느님의 헌신한 종들이 하는 활동과 그들이 하느님께 드리는 지속적인 깨끗한 숭배를 중단시킬 수는 없습니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의 기름부음받은 자손은 이러한 보증으로부터 커다란 위로를 얻어 왔습니다. 큰 무리에 속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의 하늘 조직에 대해 그리고 그 조직이 지상에 있는 여호와의 숭배자들을 대해 온 방식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수록, 우리의 믿음은 더 강해질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강한 상태를 유지하는 한, 사탄의 무기들은 우리에 대한 싸움에서 아무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각주]
a 계시록 12:1-17에 의하면, 하느님의 “여자”는 매우 중요한 “자손”—영적 아들 일개인이 아니라 하늘의 메시아 왕국—을 낳음으로 크게 축복을 받았다. 이러한 출산은 1914년에 있었다. (「계시록—그 웅대한 절정은 가까왔다!」 177-86면 참조) 이사야의 예언은, 지상에 있는 그 여자의 기름부음받은 아들들을 하느님께서 축복하신 결과 그 여자가 느끼는 기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218, 219면 네모]
아브라함의 가족—예언적 상징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가족이 상징적인 극 역할을 한다고, 다시 말해서 여호와께서 자신의 하늘 조직과 맺고 계신 관계 및 모세의 율법 계약 아래 있는 지상의 이스라엘 나라와 맺고 계신 관계를 보여 주는 예언적 상징 역할을 한다고 설명하였다.—갈라디아 4:22-31.
아브라함은 가족의 머리로서, 여호와 하느님을 상징한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소중한 아들 이삭을 기꺼이 희생 제물로 바치려고 한 것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기꺼이 인류의 죄를 위한 희생 제물로 바치신 것을 전영한다.—창세 22:1-13; 요한 3:16.
사라는 하느님의 하늘 “아내” 즉 영자들로 이루어진 그분의 조직을 상징한다. 이 하늘 조직을 여호와의 아내라고 묘사하는 것이 적절한 이유는, 이 여자가 여호와와 밀접히 연합해 있고 그분의 머리 직분에 복종하고 그분의 목적들을 이루는 데 온전히 협조하기 때문이다. 이 여자는 또한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라고도 불린다. (갈라디아 4:26) 창세기 3:15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여자”이며, 계시록 12:1-6, 13-17에 나오는 환상에도 이 여자가 묘사되어 있다.
이삭은 하느님의 여자의 영적 씨를 상징한다. 일차적으로, 이 씨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하지만 이 씨에는 그리스도의 기름부음받은 형제들도 포함되게 되었는데, 이들은 영적 아들들로 입양되어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공동 상속자가 된다.—로마 8:15-17; 갈라디아 3:16, 29.
하갈은 아브라함의 이차적 아내 즉 첩이 되었지만, 원래는 종이었다. 하갈은 적절하게도 지상의 예루살렘을 상징하는데, 지상의 예루살렘에서는 모세의 율법이 지배하면서 그 신봉자들 모두가 죄와 죽음의 종임을 드러내 주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나이 산을 의미”한다고 말하였다. 율법 계약이 그곳에서 체결되었기 때문이다.—갈라디아 3:10, 13; 4:25.
이스마엘은 하갈의 아들로서, 1세기의 유대인들 즉 여전히 모세의 율법의 종이 되어 있던 예루살렘의 아들들을 상징한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박해한 것처럼 이 유대인들도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상징적 사라 즉 “위에 있는 예루살렘”의 기름부음받은 아들들이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낸 것처럼, 여호와께서도 결국 예루살렘과 그 반역적인 아들들을 버리셨다.—마태 23:37, 38.
[220면 삽화]
예수께서는 침례받으신 후 성령으로 기름부음받으셨고, 그리하여 이사야 54:1은 가장 중요한 의미로 성취되기 시작하였다
[225면 삽화]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얼굴을 예루살렘에게서 “잠시” 가리셨다
[231면 삽화]
전사나 금속 세공인이 자기들의 창조주를 대항하여 이길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