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부드러운 동정심을 나타내시는 우리의 아버지
“여호와는 애정이 매우 부드럽고 동정심을 나타내는 분이십니다.”—야고보 5:11, 「신세—참조주」 각주 참조.
1.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사람들은 왜 여호와 하느님께 이끌립니까?
우주는 천문학자들이 그 모든 은하를 셀 수도 없을 정도로 큽니다. 우리의 은하인 은하수는 사람이 그 모든 별을 셀 수도 없을 정도로 광대합니다. 안타레스 같은 일부 별들은 크기와 밝기가 태양의 수천 배나 됩니다. 우주의 모든 별의 위대한 창조주는 참으로 강력하신 분임이 분명합니다! 실로, 그분은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는 분입니다. (이사야 40:26) 그렇지만 외경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이 동일한 하느님은 “애정이 매우 부드럽고 동정심을 나타내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그 점을 아는 것은 여호와의 겸손한 종들에게, 특히 박해나 병이나 우울증 혹은 그 외의 난관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새 힘을 줍니다!
2. 이 세상 사람들은 부드러운 감정을 흔히 어떻게 봅니까?
2 그리스도의 “부드러운 애정과 동정심”과 같은 더 순한 감정을 약함의 표시로 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빌립보 2:1) 진화론적 철학에 영향을 받은 그런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첫째 자리에 두라고, 심지어 다른 사람의 감정을 짓밟는 경우라 해도 그렇게 하라고 권합니다. 연예계와 스포츠계의 많은 인기인들은 눈물을 흘리거나 부드러운 애정을 보이지 않는, 소위 남자다운 사람들입니다. 일부 통치자들도 그와 비슷하게 행동합니다. 잔인한 네로 황제를 교육시킨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 세네카는 “불쌍히 여기는 것은 약함의 표시”라고 역설하였습니다. 매클린톡과 스트롱 공편 「백과 사전」(Cyclopædia)은 이렇게 단언합니다. “스토아 철학의 영향은 ···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주고 있다.”
3.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자신을 어떻게 설명하셨습니까?
3 이와는 대조적으로, 인류의 창조주의 성품은 마음을 푸근하게 해줍니다. 그분은 모세에게 이러한 말로 자신을 설명하셨습니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사랑의 친절”]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으리라].” (출애굽 34:6, 7) 사실, 여호와께서는 자신에 대한 이 설명의 끝 부분에서 자기의 공의를 강조하셨습니다. 그분은 고의적인 죄인들이 받아야 할 형벌을 면죄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가리켜 자비로운, 문자적으로 “자비가 풍부한” 하느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4. 종종 “자비”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단어의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4 때때로 “자비”라는 말을, 처벌을 취소한다는 냉랭한 사법적인 의미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서 번역판들을 비교해 보면, 히브리어 동사 라함에서 파생한 그 히브리어 형용사의 풍부한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에 의하면, 이 단어의 어근의 의미는 “순하다”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동의어」(Synonyms of the Old Testament)라는 책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라함은 깊고 부드러운 동정심을 표현하는 말로서, 이를테면 우리가 각별히 사랑하는 혹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약함이나 고통을 보았을 때 생기는 것과 같은 감정이다.” 이 바람직한 특성에 대한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는 또 다른 정의들을 「성경 통찰」(Insight on the Scriptures) 제2권 375-9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5. 모세의 율법에 어떻게 자비가 분명히 나타나 있었습니까?
5 하느님의 부드러운 동정심이 그분이 이스라엘 국민에게 주신 율법에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과부, 고아, 가난한 사람들같이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동정심 어린 대우를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출애굽 22:22-27; 레위 19:9, 10; 신명 15:7-11) 종과 동물을 포함하여 누구나 매주 안식일의 휴식을 누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출애굽 20:10)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낮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부드럽게 대하는 사람들에게 유의하셨습니다. 잠언 19:17은 이렇게 언명합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하느님의 동정심의 한계
6. 여호와께서는 왜 예언자와 사자들을 자기 백성에게 보내셨습니까?
6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지녔으며, ‘여호와의 이름을 위한 전’인 예루살렘 성전에서 숭배하였습니다. (역대 하 2:4; 6:33)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은 부도덕, 우상 숭배, 살인을 묵인하여 여호와의 이름에 큰 비난이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동정심을 나타내는 특성과 일치하게, 나라 전체에 재난이 닥치게 하지 않고 이 나쁜 상황을 참을성 있게 시정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그 백성과 그 거하시는 곳을 아끼사[“동정심을 느끼셨기 때문에”] 부지런히 그 사자들을 그 백성에게 보내어 이르셨으나 그 백성이 하나님의 사자를 비웃고 말씀을 멸시하며 그 선지자[“예언자”]를 욕하여 여호와의 진노로 그 백성에게 미쳐서 만회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역대 하 36:15, 16, 「신세」 참조.
7. 여호와의 동정심이 그 한계에 이르렀을 때, 유다 왕국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7 여호와께서는 동정심을 나타내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지만, 필요할 때는 의분을 분명히 나타내십니다. 당시에, 하느님의 동정심이 그 한계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그 결과에 관해 이러한 기록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갈대아 왕의 손에 저희를 다 붙이시매 저가 와서 그 성전에서 칼로 청년을 죽이며 청년 남녀와 노인과 백발노옹을 긍휼히 여기지[“동정심을 느끼지”, 「신세」] 아니하였[더라].” (역대 하 36:17) 이렇게 하여 예루살렘과 그 성전은 멸망되었고, 그 국민은 바빌론으로 사로잡혀 갔습니다.
그분의 이름을 위한 동정심
8, 9. (ㄱ) 여호와께서는 왜 자기 이름을 위해 동정심을 나타낼 것임을 선언하셨습니까? (ㄴ) 여호와의 적들은 어떤 이유로 잠잠하게 되었습니까?
8 주변 나라들은 이러한 재난을 기뻐하였습니다. 그들은 조롱하는 투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이러한 비난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시면서,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내가 내 거룩한 이름에 대해 동정심을 가질 것이다”, 「신세」] ···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찌라 ··· 열국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에스겔 36:20-23.
9 동정심을 나타내는 하느님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이 70년간 포로 생활을 한 후, 그들을 해방시키셨고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다시 짓게 하셨습니다. 이 일은 주변 나라들을 잠잠하게 하였으며, 그 나라들은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에스겔 36:35, 36)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스라엘 국민은 또다시 악한 행위에 빠졌습니다. 충실한 유대인인 느헤미야는 그러한 상황을 시정하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공개 기도 중에, 느헤미야는 하느님께서 그 나라를 동정심 있게 대하신 일들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10. 느헤미야는 어떻게 여호와의 동정심을 부각시켰습니까?
10 “저희가 환난을 당하여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크게 긍휼을 발하사 구원자들을 주어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거늘 저희가 평강을 얻은 후에 다시 주 앞에서 악을 행하므로 주께서 그 대적의 손에 버려 두사 대적에게 제어를 받게 하시다가 저희가 돌이켜서 주께 부르짖으매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여러 번 긍휼을 발하사 건져내[셨나이다] ··· 주께서 여러 해 동안 용서하[셨나이다].”—느헤미야 9:26-30; 또한 이사야 63:9, 10 참조.
11. 여호와와 인간의 신들 사이에는 무슨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까?
11 마침내 하느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잔인하게 배척한 후에, 유대 국민은 그 특권받은 신분을 영원히 상실하였습니다. 그들에 대한 하느님의 충성스러운 애착은 1500년 이상 계속되었습니다. 이 점은 여호와께서 참으로 자비의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에 대한 영원한 증거가 됩니다. 죄많은 인간들이 고안해 낸 잔인하고 무정한 신들과는 참으로 뚜렷한 대조를 이룹니다!—8면 참조.
동정심의 최대의 표현
12. 하느님의 동정심의 최대의 표현은 무엇이었습니까?
12 하느님의 동정심의 최대의 표현은 그분이 사랑하는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일이었습니다. 사실, 예수의 충절의 생애는 여호와께 큰 기쁨이 되었고, 마귀의 거짓 고발에 대해 그분에게 완벽한 답을 제공하였습니다. (잠언 27:11) 그러나 동시에, 사랑하는 아들이 잔인하고 수치스러운 죽임을 당하는 것을 지켜 보셔야 했던 일은, 틀림없이 여호와께 어떤 인간 아버지도 견디어 낸 적이 없는 큰 고통을 느끼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것은 매우 사랑에 찬 희생이었으며, 그로 인해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요한 3:16) 침례자 요한의 아버지인 스가랴가 예언한 대로, 그 일은 “우리 하느님의 부드러운 동정심”을 돋보이게 하였습니다.—누가 1:77, 78.
13. 예수께서는 어떤 중요한 면에서 아버지의 성품을 반영하셨습니까?
13 하느님의 아들을 이 땅으로 보낸 일은 또한 인류에게 여호와의 성품에 대해 더 명확한 견해를 갖게 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러합니까? 예수께서 아버지의 성품을 완벽하게 반영하셨다는 면에서, 특히 그분이 낮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부드러운 동정심으로 대하신 면에서 그러하였습니다! (요한 1:14; 14:9) 이 점과 관련하여, 세 명의 복음서 필자, 마태와 마가와 누가는 “창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에서 유래한 스플랑크니조마이라는 그리스어 동사를 사용합니다. 성서 학자 윌리엄 바클리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단어의 어원 자체를 놓고 볼 때, 이 단어는 일반적인 불쌍히 여김이나 동정심이 아니라 사람을 그의 매우 깊은 곳까지 움직이게 하는 감정을 묘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동정심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 중 가장 강한 표현이다.” 이 단어는 ‘불쌍하다’ 혹은 ‘불쌍히 여기다’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됩니다.—마가 6:34; 8:2.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셨을 때
14, 15. 갈릴리의 한 도시에서, 예수께서는 왜 불쌍히 여기시며, 이것은 무엇을 예시합니까?
14 장소는 갈릴리의 한 도시입니다. “온몸에 나병이 걸린” 한 사람이 관례적인 경고 없이 예수에게 다가옵니다. (누가 5:12)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율법의 요구대로 “부정하다 부정하다” 하고 외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사람을 엄히 책망하십니까? (레위 13:45)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그 사람의 이러한 절망적인 간청에 귀기울이십니다. “당신이 원하기만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신 예수께서는 그 나병 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그를 만지시며 “내가 원합니다. 깨끗하게 되십시오”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의 건강이 즉시 회복됩니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하느님께서 주신 기적의 능력만 아니라 그러한 능력을 사용하는 동기가 되는 부드러운 감정까지도 분명히 나타내십니다.—마가 1:40-42.
15 예수께서는 가까이 접근해 오는 사람에게만 동정심을 보이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 후, 예수께서는 나인 시에서 나오는 장례 행렬과 우연히 마주치십니다. 틀림없이 예수께서는 장례를 치르는 일을 여러 번 목격하셨겠지만, 이번은 특히 애처롭습니다. 죽은 사람이 과부의 독자인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신 예수께서는 그 과부에게 다가가서 “그만 우십시오”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다음 그분은 과부의 아들을 다시 생명으로 일으키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십니다.—누가 7:11-15.
16. 예수께서는 왜 자기를 따르는 많은 무리를 불쌍히 여기십니까?
16 위의 일로부터 배우게 되는 인상적인 교훈은, 예수께서는 “불쌍히 여”기실 때 돕기 위해 무엇인가 적극적인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후에 또 다른 경우에, 예수께서는 자기를 계속 따르는 많은 무리를 자세히 살펴보십니다. “그분은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찢겨지고 내던져졌기 때문이다”라고 마태는 보고합니다. (마태 9:36) 바리새인들은 평민의 영적 굶주림을 거의 충족시켜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들은 겸손한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불필요한 규칙으로 짐을 지웁니다. (마태 12:1, 2; 15:1-9; 23:4, 23) 평민에 대한 그들의 견해가 예수의 말씀에 귀기울인 사람들에 대해 그들이 이렇게 한 말에서 드러났습니다. “율법을 모르는 이 무리는 저주받은 사람들이오.”—요한 7:49.
17. 예수께서는 무리에 대해 불쌍한 생각이 들어 어떻게 하시며, 그 때에 그분은 장기적인 영향을 미치는 무슨 지침을 베푸십니까?
17 이와는 반대로, 예수께서는 무리가 처한 영적 곤경에 대해 깊은 연민을 느끼십니다. 그러나 그분이 개개인을 돌보기에는 관심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제자들에게 더 많은 일꾼을 구하는 기도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 9:35-38) 그러한 기도와 일치하게, 예수께서는 “하늘 왕국이 다가왔다”는 소식과 함께 사도들을 내보내십니다. 그 때 베푸신 지시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치 있는 지침이 되고 있습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예수께서는 동정심에서 우러나와 사람들의 영적 굶주림을 충족시켜 주십니다.—마태 10:5-7.
18. 무리가 개인 생활을 침해하였을 때 예수께서는 어떤 반응을 보이시며, 우리는 이 일로부터 무슨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까?
18 또 다른 경우에, 예수께서는 무리의 영적 필요에 대해 다시 염려하십니다. 이 때에 그분과 사도들은 바쁜 전파 여행을 한 뒤라 지쳐 있으며, 휴식할 곳을 찾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곧 그들을 발견합니다. 예수께서는 개인 생활을 침해하는 이러한 행위로 언짢아하신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셨다”고 마가는 기록합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깊은 동정심을 느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또다시, 예수께서는 자기 감정을 행동으로 표현하시고 무리에게 “하느님의 왕국에 대하여”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그들이 영적으로 굶주린 것을 매우 측은히 여기셨기 때문에 그들을 가르치기 위해 필요한 휴식을 희생하셨습니다.—마가 6:34; 누가 9:11.
19. 무리의 영적 필요 외에도 예수께서는 그들에 대한 염려를 어떻게 나타내셨습니까?
19 사람들의 영적 필요를 주로 염려하신 한편, 예수께서는 결코 사람들의 기본적인 육적 필요를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동일한 때에 그분은 또한 “병 고침이 필요한 사람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누가 9:11) 후에 또 다른 때에, 무리는 오랫동안 그분과 함께 있었으며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육적 필요를 알아차리시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리가 불쌍합니다. 그들이 나와 함께 머문 지 이미 사흘이나 되었는데, 그들에게 먹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들을 굶주린 채로 보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혹시 길에서 기진할지도 모릅니다.” (마태 15:32) 이제 예수께서는 일어날 수 있는 고통당하는 일을 막기 위한 조처를 취하십니다. 그분은 수천 명의 남녀와 아이에게 빵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몇 마리에서 생긴 음식을 공급하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20.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신 일에 대해 마지막으로 기록된 실례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20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신 일에 대해 마지막으로 기록된 실례가 그분이 예루살렘으로 마지막 여행을 하시던 중에 있게 됩니다. 많은 무리가 유월절을 기념하기 위해 그분과 함께 여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예리코에 가까운 길에서, 눈먼 거지 둘이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계속 외칩니다. 무리가 그들을 잠잠하게 하려고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을 부르시고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는지 물으십니다. “주여, 우리의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하고 그들은 간청합니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겨” 그들의 눈을 만지시자, 그들은 시력을 얻게 됩니다. (마태 20:29-34) 우리는 이 일로부터 참으로 중요한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지상 봉사의 직무의 마지막 주간에 들어서려 하십니다. 그분은 사탄의 하수인들의 손에 잔인한 죽임을 당하시기 전에 수행하실 일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이 중대한 시기에 받는 압력이 그보다 덜 중요한 인간의 필요에 대해 부드러운 동정심을 보이는 일을 밀어내게 하지 않으십니다.
동정심을 부각시키는 예들
21. 주인이 종의 많은 빚을 면제해 준 일은 무엇을 예시합니까?
21 예수의 생애에 대한 이러한 기록에 사용된 그리스어 동사 스플랑크니조마이는 또한 예수께서 드신 세 가지 예에서 사용됩니다. 한 이야기에서 종은 많은 빚을 갚을 시간을 줄 것을 간청합니다. 그의 주인은 “불쌍히 여겨” 빚을 면제해 줍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느님께서 예수의 대속 희생에 대한 믿음을 나타내는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많은 죄의 빚을 면제해 주심으로 큰 동정심을 보이신 일을 예시합니다.—마태 18:27; 20:28.
22. 탕자의 비유는 무엇을 예시합니까?
22 이 외에도 탕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집스러운 아들이 집에 돌아왔을 때 일어난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달려가 목을 끌어안고 부드럽게 입맞추었습니다.” (누가 15:20) 이 이야기는 고집스러워진 그리스도인이 진정한 회개를 나타낼 때 여호와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그 돌아온 사람을 부드럽게 받아들이신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그러므로 이 두 예를 통해, 예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 여호와께서 “애정이 매우 부드럽고 동정심을 나타내는 분”이심을 알려 주십니다.—야고보 5:11, 「신세—참조주」 각주 참조.
23. 우리는 이웃다운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예수의 예에서 무슨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까?
23 스플랑크니조마이가 사용된 세 번째 예는 강도를 만나 반쯤 죽게 된 채로 버려진 유대인이 처한 곤경을 보고 “불쌍히 여”겨 동정심을 나타낸 사마리아 사람에 관한 것입니다. (누가 10:33) 이러한 감정에 따라 행동하였기 때문에, 그 사마리아 사람은 그 낯선 사람을 돕기 위해 자기의 능력 내에서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이것은, 여호와와 예수께서 부드러움과 동정심을 나타내는 면에서 참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모범을 따르기를 기대하신다는 점을 분명히 알려 줍니다. 우리가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는 방법 몇 가지를 이어지는 기사에서 고려할 것입니다.
복습 질문
◻ 자비롭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 여호와께서는 자기 이름을 위해 어떻게 동정심을 보이셨습니까?
◻ 동정심의 최대의 표현은 무엇입니까?
◻ 예수께서는 어떤 주목할 만한 면에서 자기 아버지의 성품을 반영하십니까?
◻ 예수께서 동정심을 나타내신 행위와 그분이 드신 예들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12, 13면 네모]
“부드러운, 사랑의 돌보심”에 대한 생동감 있는 표현
“오 내 창자여, 내 창자여!”라고 예언자 예레미야는 부르짖었다. 그는 좋지 않은 것을 먹어 장(腸)에 탈이 난 것을 하소연하고 있는 것인가? 그런 것이 아니다. 예레미야는 히브리어의 은유법을 사용하여 유다 왕국에 닥칠 재난에 대한 깊은 염려를 묘사한 것이다.—예레미야 4:19, 「신세」.
여호와 하느님께서 풍부한 감정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그분의 부드러운 감정을 묘사하는 데에도 “창자” 혹은 “장”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메임)가 사용된다. 예를 들어, 예레미야 시대가 이르기 수십 년 전에 열 지파 이스라엘 왕국은 아시리아(앗수르) 왕에게 사로잡혀 갔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불충실함에 대한 벌로 이러한 일을 허락하셨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유배 생활을 하는 그들을 잊으셨는가? 잊지 않으셨다. 그분은 자기 계약 백성의 일부인 그들에 대해 여전히 깊은 애착을 갖고 계셨다. 두드러진 지파인 에브라임의 이름을 사용하여 그들을 언급하시면서,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물으셨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마음이 측은한즉[‘내 창자가 요동하게 되었은즉’] 내가 반드시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예레미야 31:20, 「신세」 참조.
‘내 창자가 요동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여호와께서는 비유적 표현을 사용하여 유배 생활을 하는 자기 백성에 대한 깊은 애정을 묘사하셨다. 이 구절을 해설하면서, 19세기 성서 학자 E. 헨더슨은 이렇게 기술하였다. “여기서 여호와께서는 돌아온 탕자에 대한 부모의 부드러운 감정을 보여 주시는데, 이러한 감동적인 감정 표현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없다. ··· 그분이 [우상 숭배를 하는 에브라임 사람들]을 이처럼 꾸짖으시고 그들을 벌하시기는 하였지만 ··· , 그분은 결코 그들을 잊지 않으셨으며, 오히려 기꺼이 그들이 결국 회복되기를 기대하셨다.”
“장” 혹은 “창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사용된다. 사도 1:18에서와 같이 문자적으로 사용된 경우가 있지만, 그런 경우가 아닐 때 이 단어는 부드러운 감정의 애정이나 동정심을 가리킨다. (빌레몬 12) 이 단어는 때때로 “좋은” 혹은 “훌륭한”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단어와 결합된다. 사도 바울과 베드로는 두 단어가 합쳐진 표현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부드러운 동정심을 나타내”라고, 문자적으로 “불쌍히 여기는 좋은 성향을 가지”라고 격려한다. (에베소 4:32; 베드로 첫째 3:8) “장”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또한 그리스어 단어 폴리와 결합될 수 있다. 그 두 단어가 합쳐진 말은 문자적으로 “많은 장을 가진”을 의미한다. 매우 드문 이 그리스어 표현은 성서에서 단 한 번 사용되는데, 여호와 하느님을 가리켜 사용된 경우이다. 「신세계역」의 번역은 이러하다. ‘여호와는 애정이 매우 부드러운 분이십니다.’—야고보 5:11.
우주에서 가장 강력하신 분인 여호와 하느님께서 동정심 없는 인간들이 고안해 낸 잔인한 신들과는 아주 다른 분이신 것에 대해 우리는 참으로 감사한다! “부드러운 동정심을 나타내”시는 하느님을 본받는 참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대하는 일에서 그와 같이 행동하도록 마음이 감동된다.—에베소 5:1.
[10면 삽화]
하느님의 동정심이 그 한계에 이르렀을 때, 여호와께서는 바빌로니아인들이 고집스러운 자기 백성을 정복하도록 허락하셨다
[11면 삽화]
사랑하는 아들이 죽는 것을 지켜 보신 일은, 틀림없이 여호와 하느님께 그 누구도 겪은 적이 없는 가장 큰 고통을 느끼게 하였을 것이다
[15면 삽화]
예수께서는, 동정심을 나타내는 아버지의 성품을 완벽하게 반영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