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하느님이 바라시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대하라
1-3. (ㄱ) 고대 티레 하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생각합니까? (ㄴ) 히람 왕과 이스라엘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설명해 보십시오. (ㄷ) 티레와 관련하여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고대 티레 하면 무엇이 떠오릅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알렉산더 대왕이 본토 티레의 폐허에서 잔해를 모아서, 섬에 세운 새로운 티레까지 둑길을 건설하여 그 도시를 멸망시킴으로 예언이 성취된 일을 생각할 것입니다. (에스겔 26:4, 12; 스가랴 9:3, 4) 하지만 티레라는 말을 들으면 영적 형제들이나 그 밖의 사람들을 대할 때 어떻게 해야 하고 어떻게 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됩니까?
2 티레가 멸망된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티레의 거역 행위 때문이며’, “그들이 포로들을 모조리 에돔에 넘겨 주고, 형제의 계약을 기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티레의 성벽에 불을 보내겠[다].” (아모스 1:9, 10) 그 이전 시대에 티레의 히람 왕은 다윗에게 선의를 보였고 솔로몬의 성전을 위해 자재를 공급해 주었습니다. 솔로몬은 히람과 계약을 맺었으며 그에게 갈릴리에 있는 도시들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히람은 솔로몬을 “내 형제”라고 하였습니다. (열왕 첫째 5:1-18; 9:10-13, 26-28; 사무엘 둘째 5:11) 그러므로 티레가 “형제의 계약을 기억하지 않”고 하느님의 백성 일부를 노예로 팔았을 때, 여호와께서는 티레의 그런 행위에 유의하셨습니다.
3 하느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포악하게 대한 티레의 가나안 사람들을 심판하셨다는 사실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은 우리가 영적 형제들을 대하는 방식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책 앞부분의 장들에서는, 직장에서 공의를 실천하고 순결한 행실을 나타내는 것과 같은 대인 관계에 관한 열두 예언자의 조언을 검토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열두 권의 책에는 하느님께서 우리가 사람들을 어떤 방식으로 대하기를 바라시는지 알려 주는 내용이 더 들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어려움을 겪을 때 기뻐하지 말라
4. 에돔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형제”였으며,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형제들”을 어떻게 대하였습니까?
4 우리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인근 나라인 에돔을 질책하신 이러한 말씀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너는 네 형제의 날에, 그의 불행의 날에 방관하지 말아야 하며, 유다 자손이 망하는 날에 그들을 보고 기뻐하지 말아야 한다.” (오바댜 12) 티레 사람들이 상업적인 일에 있어서 “형제”였다면 에돔 사람들은 야곱과 쌍둥이인 에서의 후손이었으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형제”였습니다. 심지어 여호와께서도 에돔 사람들을 이스라엘의 “형제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신명 2:1-4)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바빌론 사람들의 손에 재난을 당할 때 에돔 사람들이 기뻐한 것은 참으로 혐오감을 느끼게 하였습니다.—에스겔 25:12-14.
5.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에돔 사람들과 같은 영을 나타내게 될 수 있습니까?
5 분명 하느님께서는 에돔 사람들이 형제들인 유대인들을 대한 방식을 승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내가 형제들을 대하는 방식은 하느님께서 어떻게 평가하실 것인가?’ 하고 자문해 볼 수 있습니다. 관심을 기울여야 할 한 가지 부면은, 상황이 원만하지 않을 때 우리가 형제를 어떻게 보고 대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그리스도인이 우리의 감정을 상하게 했거나 우리의 친족과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불평할 이유”가 있을 때, 문제를 잊어 주려 하거나 해결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분을 품을 것입니까? (골로새 3:13; 여호수아 22:9-30; 마태 5:23, 24) 그렇게 하면 우리가 그 형제를 대하는 행동이 영향을 받아, 그를 냉랭하게 대하고 그와 함께 있지 않으려 하거나 그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를 더 확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 형제가 나중에 잘못을 하여 혹시 회중 장로들에게서 교훈이나 시정을 받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갈라디아 6:1) 우리는 에돔 사람들과 같은 영을 나타내어 그 형제가 어려움을 겪는 것을 기뻐할 것입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실 것입니까?
6. 스가랴 7:10과는 대조되는 미가 7:18은 우리에게 어떻게 할 것을 권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6 여호와께서는 스가랴를 통해 우리가 ‘서로에 대하여 악한 것을 마음 속으로 꾸미지 않기를’ 바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스가랴 7:9, 10; 8:17) 이 조언은 어떤 형제가 우리의 기분을 상하게 했거나 우리의 가족 중 누군가를 부당하게 대한 것 같을 때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경우에 우리는 ‘악한 것을 마음 속으로 꾸며서’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게 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훌륭한 본을 따르기를 바라십니다. 미가가 여호와는 “잘못을 사하시고 범법에 대하여 눈감아 주시는 분”이라고 기록한 것을 기억하십시오.a (미가 7:18) 이러한 본을 어떻게 실제로 적용할 수 있습니까?
7. 감정을 상하게 한 일을 그냥 잊어버리기로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7 누군가가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친족에게 한 일 때문에 감정이 상하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정말로 심각한 것입니까? 성서는 불화나 형제에 대한 죄를 해결할 때 밟아야 할 단계들을 알려 줍니다. 그렇지만 흔히 과실이나 감정을 상하게 한 일은 그냥 지나쳐 주는 것, ‘범법에 대하여 눈감아 주는 것’이 최선책입니다. 이렇게 자문해 보십시오. ‘이 일은 내가 그 형제를 용서해 주어야 할 일흔일곱 번 가운데 한 번일 수 있지 않을까? 그냥 잊어 주는 것이 어떨까?’ (마태 18:15-17, 21, 22) 그 잘못이 지금은 심각해 보이더라도, 앞으로 천 년 후에도 그러할 것입니까? 사람이 수고하여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는 것을 묘사하는 전도서 5:20의 이러한 말씀에서 한 가지 기본적인 교훈을 얻도록 하십시오. “그는 자기가 사는 날들을 자주 생각하지 않으리니, 참 하느님께서 그로 하여금 그 마음의 기쁨에 열중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행복한 마음으로 자신이 현재 누리는 즐거움에 초점을 맞추고 사는 사람은 일상생활의 문제들을 쉽게 잊어버립니다. 우리도 그러한 태도를 본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 형제 관계를 통해 누리는 기쁨에 초점을 맞춘다면, 지속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어서 신세계에서는 기억하지 않을 문제들은 잊어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어려움을 겪을 때 기뻐하거나 자신의 감정을 상하게 한 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확실히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진실을 말하라
8. 진리 즉 진실을 이야기하는 일과 관련하여 도전이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8 열두 예언서는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가 사람들을 대할 때 진실하기를 참으로 원하신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물론 우리는 진실 곧 “좋은 소식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일에 힘쓰고 있습니다. (골로새 1:5; 고린도 둘째 4:2; 디모데 첫째 2:4, 7) 하지만 그보다 더 도전이 될 수 있는 것은 가족이나 영적 형제들과 일상 대화를 나눌 때 진리 즉 진실에 고착하는 것인데, 일상 대화의 주제와 상황은 매우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도전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9. 어떤 때 사실 그대로 다 말하지 않으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으며, 하지만 우리는 무엇을 자문해 보아야 합니까?
9 우리 중에 불친절한 말이나 행동을 하고서 나중에야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은 경험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아마 우리는 난처했을 것이며 다소 죄책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느낌이 들 때 자칫하면 실수한 사실을 부정하게 될 수도 있고, 잘못을 변명하거나 그것을 올바르게 보이게 하려고 진실을 왜곡하는 “해명”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불편스러운 상황에 있게 되면 세부점 가운데 일부만 골라서 이야기하여 사실과는 다르게 보이게 하려는 유혹을 느끼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가 말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전혀 다른 인상을 주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오늘날 세상에서 흔히 하는 것과 같은 명백한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참으로 “각각 자기 이웃과 더불어” 즉 영적 형제와 더불어 ‘진실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에베소 4:15, 25; 디모데 첫째 4:1, 2) 그리스도인이 자기가 말하는 방식이 형제들로 하여금 그릇된 결론을 내려서 사실과 다른 정확하지 않은 것을 믿게 만드는 방식임을 속으로 알면서도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하느님께서 어떻게 느끼시겠습니까?
10. 예언자들은 고대 이스라엘과 유다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행태를 어떻게 묘사합니까?
10 예언자들은 여호와께 헌신한 남녀들이라도 그분이 그들에게서 바라시는 것을 무시하는 때가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호세아는 하느님께서 자신이 살던 시대의 일부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느끼시는지를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그들에게 탈취가 닥친다! 그들이 내게 범법 행위를 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을 구속하였는데도 그들은 나에 대하여 거짓말을 하였다.” 여호와에 대해 노골적이고 명백한 거짓말을 하는 데 더해, ‘저주하고 속임수를 행하는’ 것까지 서슴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아마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그릇 인도하려고 사실을 왜곡함으로 그렇게 하였을 것입니다. (호세아 4:1, 2; 7:1-3, 13; 10:4; 12:1) 호세아는 이 말씀을 북쪽 왕국의 사마리아에서 기록하였습니다. 유다의 상황은 좀 나은 편이었습니까? 미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알려 줍니다. “그 부자들은 폭력이 가득하고 그 주민들은 거짓을 말하며, 그들의 혀는 입 안에서 간사하구나.” (미가 6:12) 우리는 그 예언자들이 ‘속임수를 행하는’ 것과 ‘혀가 입 안에서 간사한’ 자들을 정죄하였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따라서 고의적으로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을 그리스도인이라도 이렇게 자문해 볼 수 있습니다. ‘나도 속임수를 행하거나 혀가 입 안에서 간사하게 되는 때가 있지는 않은가? 하느님께서는 내가 이 부면에서 어떻게 하기를 바라시는가?’
11. 예언자들은 우리의 말과 관련하여 하느님의 뜻이 무엇이라고 밝혀 줍니까?
11 한편, 하느님께서는 또한 예언자들을 사용하여 그분이 우리에게서 바라시는 선한 행실이 어떠한 것인지도 명백히 밝혀 주셨습니다. 스가랴 8:16은 이렇게 알려 줍니다. “너희가 해야 할 일은 이러하다. 서로 진실하게 말하여라. 너희 성문에서 진리와 평화의 재판으로 재판하여라.” 스가랴의 시대에 성문은 연로자들이 소송 사건을 심리하는 공공장소였습니다. (룻 4:1; 느헤미야 8:1) 하지만 스가랴는 그러한 상황에서만 정직하게 말하면 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공적인 자리에서 정직해야 하나, “서로 진실하게 말하여라”라는 권고도 받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사생활 중에 배우자나 가까운 친족과 이야기할 때에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또한 그 권고는 영적 형제 자매들과 나누는 일상 대화에도 적용되는데, 우리가 대면해서 이야기를 하든 전화 통화를 하든 그 밖의 다른 방법으로 이야기를 하든 그러합니다. 그들은 당연히 우리의 말이 진실일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리스도인 부모라면 자녀에게 거짓을 멀리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함을 강조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자녀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혀가 간사해지지 않고 참으로 정직하게 말하기를 기대하신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성장하게 됩니다.—스바냐 3:13.
12. 예언서들에서 얻을 수 있는 귀중한 교훈은 무엇입니까?
12 진실함의 길에 고착하는 청소년이나 어른은 “진리와 평화를 사랑하여라”라는 스가랴의 권고에 공감합니다. (스가랴 8:19) 그리고 여호와께서 자신의 아들을 통해 어떤 특성들을 본으로 보여 주실 것인지에 대해 말라기가 이처럼 묘사한 바에 유의합니다. “진리의 법이 그의 입에 있었고, 불의는 그의 입술에 없었다. 평화와 올바름 가운데 그는 나와 함께 걸었[다].” (말라기 2:6) 여호와께서 우리는 그보다 못하기를 바라시겠습니까? 우리는 열두 예언서가 포함된 성서 전체를 볼 수 있고 그로부터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사람을 대할 때 폭력을 멀리하라
13. 미가 6:12에서는 무슨 다른 문제가 있었음을 밝혀 줍니까?
13 미가 6:12에 의하면, 고대에 하느님의 백성은 ‘거짓을 말하며, 그들의 혀가 입 안에서 간사하게’ 됨으로 다른 사람들을 학대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성구에서는 다른 심각한 결함도 밝혀 주었습니다. 그 성구는 ‘그 부자들이 폭력이 가득하였음을’ 언급합니다. 어떻게 그러하였으며, 여기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14, 15. 하느님의 백성의 주변 나라들은 폭력과 관련하여 어떤 기록을 쌓았습니까?
14 하느님의 백성의 인근에 있었던 몇몇 나라들이 어떤 평을 들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북동쪽에는 아시리아가 있었는데, 그 수도인 니네베에 관해 나훔은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이 피흘림의 도시에 화가 있다. 그에게는 온통 속임수와 강도질이 가득하다. 약탈물이 떠나지 않는다!” (나훔 3:1) 아시리아 사람들은 침략 전쟁을 일삼고 포로들을 잔인하게 대하기로 유명했는데, 포로들을 산 채로 불태우거나 살가죽을 벗기기도 하고, 눈을 멀게 하거나 코, 귀, 손가락들을 잘라 버리기도 하였습니다. 「제신과 고분들과 학자들」(Gods, Graves, and Scholars)이라는 책에서는 이렇게 알려 줍니다. “니네베에 관해 인류의 의식 속에 각인되었던 것은 약자들을 살해하고 약탈하고 억압하고 욕보인 일, 전쟁을 벌이고 온갖 물리적 폭력을 휘두른 일 ··· 외에는 거의 없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폭력을 지켜본 (그리고 참여하였을 수도 있는) 사람의 증언도 있습니다. 니네베의 왕은 요나의 소식을 듣고 자신의 백성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사람이든 가축이든 자루천을 몸에 걸치게 하여라. 그들로 힘써 하느님께 부르짖게 하고, 각 사람이 자기의 악한 길에서, 그 손에 있던 폭력에서 돌아오게 하여라.”—요나 3:6-8.b
15 아시리아만 극악하게 폭력적이었던 것이 아닙니다. 유다의 남동쪽에 있던 에돔 역시 보응을 받아야 하였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에돔은 황무지의 광야가 될 것이다. 그들이 유다 자손에게 폭력을 행하여 그 땅에 무고한 피를 흘렸기 때문이다.” (요엘 3:19) 에돔은 이 경고를 청종하여 폭력적인 행로를 그만두었습니까? 약 2세기 후에 오바댜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데만[에돔의 도시]아, 네 용사들이 겁에 질릴 것이다. ···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폭력 때문에 ··· 너는 한정 없는 때까지 끊어질 것이다.” (오바댜 9, 10) 그러면 하느님의 백성은 어떠하였습니까?
16. 아모스와 하박국을 통해 우리는 그들이 살던 시대에 무슨 문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까?
16 아모스는 북쪽 왕국의 수도인 사마리아의 상황을 이렇게 밝혔습니다. “‘그 가운데 있는 많은 무질서와 그 안에서 행해지는 사기 행위를 보아라. 그들, 즉 ··· 폭력을 쌓고 탈취하고 있는 자들은 바른 일을 행할 줄 몰랐다.’ 여호와의 말이다.” (아모스 3:9, 10) 여호와의 성전이 있었던 유다는 달랐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유다에 살았던 하박국은 하느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언제까지 제가 폭력으로부터 구해 달라고 당신에게 청해야 하며, 당신은 구원해 주지 않으시렵니까? 어찌하여 당신은 저로 유해한 것을 보게 하시고, 괴로움을 그저 보고만 계십니까? 어찌하여 제 앞에 탈취와 폭력이 있[습니까?]”—하박국 1:2, 3; 2:12.
17. 폭력적인 성향이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서 자라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 수 있습니까?
17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서 폭력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은 아시리아나 에돔 등 인근 나라들의 폭력적인 태도가 영향을 끼치도록 방치하였기 때문일 수 있습니까? 솔로몬은 그러할 수 있음을 이와 같이 경고했습니다. “폭력적인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고, 그의 길은 어느 것도 택하지 말아라.” (잠언 3:31; 24:1) 훗날 예레미야는 이렇게 분명하게 말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방 사람들의 길을 결코 배우지 말[아라].’”—예레미야 10:2; 신명 18:9.
18, 19. (ㄱ) 하박국이 지금 살아 있다면 오늘날의 폭력이 표현되는 행태를 보고 어떻게 느꼈을 것입니까? (ㄴ) 우리 시대의 폭력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느낍니까?
18 하박국이 지금 살아 있다면 우리 시대의 폭력에 충격을 받지 않았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어릴 때부터 폭력에 물들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화에도 폭력이 난무합니다. 만화의 등장인물들은 상대를 때려눕히거나 파멸시키든가 그 밖의 방법으로 죽여 없애려고 합니다. 오래지 않아 많은 청소년들은 그러한 것을 졸업하고, 상대편을 총으로 쏘든가 폭파시키든가 괴멸시켜서 이기는 비디오 게임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건 그저 게임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집에서 컴퓨터로 하든 전자 오락실에서 하든 폭력적인 게임은 게임을 하는 사람이 폭력에 빠져 들게 하여 그 사람의 태도와 행동을 틀 잡습니다. “폭력적인 사람은 자기 이웃을 꾀어서 정녕 좋지 않은 길을 가게 한다”라는 영감받은 교훈은 실로 참됩니다!—잠언 16:29.
19 하박국은 괴로움과 그의 ‘앞에 있는 폭력’을 그저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로 인해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 볼 수 있습니다. ‘하박국이 나와 함께 앉아서 내가 정기적으로 시청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본다면 그는 편안하게 느꼈을 것인가?’ 또한 이렇게도 자문해 보십시오. ‘하박국이라면 폭력을 보여 주는 것이 목적인, 그래서 선수들이 고대의 검투사들처럼 보호 장구를 착용하기까지 하는 이른바 스포츠 경기라는 것을 시간을 내서 관전할 것인가?’ 경기장이나 운동장에서 혹은 열광한 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싸움 때문에 많은 사람이 스릴을 느끼는 경기들도 있습니다. 일부 문화권에서는 전쟁이나 무술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폭력적인 영화나 비디오를 시청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한 것은 역사물이라고 혹은 그 나라의 과거 문화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변명할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폭력이 더 용납할 만한 것이 됩니까?—잠언 4:17.
20. 말라기는 어떠한 폭력에 관한 여호와의 견해를 밝혀 주었습니까?
20 말라기는 일부 유대인이 자기 아내를 배신한 일에 대한 여호와의 견해를 밝히면서 관련이 있는 한 가지 부면을 이와 같이 언급합니다. “‘하느님은 이혼하는 것을 미워한다.’ 이스라엘의 하느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또한 폭력으로 자기 옷을 가리는 자도 미워한다.’” (말라기 2:16) ‘폭력으로 자기 옷을 가린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여러 가지 의미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 표현이 폭력을 써서 다른 사람을 공격하여 자기 옷에 피를 묻히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이건 간에 말라기는 배우자를 학대하는 일을 명백히 정죄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말라기는 가정 폭력이라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하느님께서 그것을 승인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려 준 것입니다.
21.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상황들에서 폭력을 멀리해야 합니까?
21 신체적 폭력이든 언어폭력이든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사생활 중에 자행되는 폭력은 공개적으로 자행되는 폭력과 마찬가지로 용납될 수 없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두 가지를 다 보고 계십니다. (전도 5:8) 말라기가 언급한 것이 아내에게 폭력을 쓰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성서 어디에서도 남자가 자녀나 연로한 부모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은 덜 비난받을 일로 여기게 하지 않습니다. 또한 아내가 남편이나 자녀나 부모에게 폭력을 사용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물론 불완전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가정에서 긴장이 고조되어 흥분하고 때로는 화를 내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조언합니다. “격분하더라도 죄를 짓지 마십시오. 성난 상태로 해가 지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에베소 4:26; 6:4; 시 4:4; 골로새 3:19.
22.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폭력에 물들어 있더라도 폭력을 멀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22 ‘나는 폭력적인 가정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라든가 ‘내가 자란 지역이나 문화권의 사람들이 흥분을 더 잘하고 화를 더 잘 터뜨리는 것일 뿐’이라는 말로 자신의 폭력적인 방식을 정당화하려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미가는 ‘폭력이 가득한 부자들’을 질책할 때 그들이 폭력이 만연한 가운데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이라는 암시를 하지 않았습니다. (미가 6:12) 노아는 땅이 “폭력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살았으며 그의 아들들은 폭력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성장하였습니다. 그들은 폭력적인 방식을 받아들였습니까?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노아는 여호와의 눈에 호의를 얻었으며’, 그의 아들들도 그를 본받았고 그래서 대홍수를 살아남도록 보존되었습니다.—창세 6:8, 11-13; 시 11:5.
23, 24. (ㄱ) 폭력적인 사람이 되지 않는 데 무엇이 도움이 됩니까? (ㄴ) 여호와께서 바라시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사람들에 대해 그분은 어떻게 느끼십니까?
23 세계 전역에서 여호와의 증인은 폭력을 멀리하는 평화로운 사람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폭력 행위를 금하는 카이사르의 법을 존중하고 준수합니다. (로마 13:1-4) 그들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려고 노력해 왔으며 평화를 추구하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사야 2:4) 그들은 “새 인간성”을 입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폭력을 멀리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에베소 4:22-26)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인 장로들의 훌륭한 본을 따르는데, 장로들은 말로든 행동으로든 ‘구타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디모데 첫째 3:3; 디도 1:7.
24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바라시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대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합니다. 호세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로워서 이런 일들을 이해할 사람이 누구인가? 슬기로워서 그것들을 알 사람이 누구인가? 여호와의 길은 올바르므로 의로운 사람들은 그 길로 걸을 것이다.”—호세아 14:9.
a 한 학자에 따르면, ‘범법에 대하여 눈감아 준다’라는 히브리어 은유 표현은 “여행자가 자신이 주의를 기울이고 싶지 않은 대상은 신경 쓰지 않고 지나치는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 사상은 [하느님께서 죄를 보지 못하신다는 것이 아니고], 어떤 경우에는 그분이 처벌할 생각으로 죄에 특별히 유의하는 일을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즉 처벌하지 않고 용서해 주신다는 것이다.”
b 니네베에서 남동쪽으로 35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아슈르나시르팔이 재건한 갈라(님루드)가 있다. 대영 박물관에는 갈라에서 가져온 벽판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벽판들에 대해 이러한 설명이 있다. “아슈르나시르팔은 군사 원정을 나가서 자신이 얼마나 잔혹하고 무자비했는지에 대해 숨김없이 상세히 묘사하였다. 포로들을 장대에 매달거나 포위 공격 중인 도시의 성벽 기둥에 못 박았고 ··· 청년 남녀들을 산 채로 살가죽을 벗겼다.”—「성서의 고고학」(Archaeology of the Bi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