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
(mercy)
불우한 사람들을 구제해 줌으로 친절한 배려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 부드러운 동정심. 또한, 때로는 재판이나 형벌을 가볍게 해 주는 것.
자비로 자주 번역되는 원어는 히브리어 라하밈과 그리스어 엘레오스(동사는 엘레에오)이다. 이 용어들과 그 용법을 검토해 보면 그 뉘앙스와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게 된다. 히브리어 동사 라함은 “달아오르다, 부드러운 감정으로 따뜻한 느낌을 갖다, ··· 동정하다”를 의미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히브리어·칼데아어 사전」 A Hebrew and Chaldee Lexicon, B. 데이비스 편, 1957년, 590면) 사전 편집자 게제니우스에 의하면 “주안점은 소중히 여기고 달래 준다는 것, 부드러운 정서라는 것에 있는 것 같다.” (「구약 히브리어·영어 사전」 A Hebrew and English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E. 로빈슨 역, 1836년, 939면) 이 용어는 “태”에 해당하는 단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어쩌면 “창자”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사실 이런 기관들은 사람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동정심을 느끼거나 불쌍히 여기게 될 때 영향을 받는다.—사 63:15, 16; 렘 31:20 비교.
성경에서 하느님에 대하여 사람 쪽에서 라함을 사용한 것은 한 번뿐인데, 시편 필자가 이렇게 말한 경우이다. “나는 당신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겠습니다[라함의 변화형], 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시 18:1) 사람들 사이에서는 요셉이 이 특성을 나타낸 예가 있는데, 그는 동생 베냐민을 향하여 ‘속 감정[라하밈의 변화형]이 불타올라’ 눈물을 흘렸다. (창 43:29, 30. 왕첫 3:25, 26 비교) 사로잡은 자들이나(왕첫 8:50; 렘 42:10-12), 위에 있는 권위를 가진 관리들에게서(창 43:14; 느 1:11; 단 1:9) 가혹하거나 무정한 처우를 당할 가능성이 있게 될 때, 사람들은 그러한 사람들 앞에서 불쌍히 여김을 받거나 자비를 받게 되기를, 그래서 은혜롭고 부드럽고 사려 깊은 처우를 받게 되기를 바라며 기도하였다.—사 13:17, 18 대조.
여호와의 자비 자비라는 용어는 여호와께서 그분의 계약 백성을 대하신 일들과 관련하여 가장 자주 사용되었다. 하느님께서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라함)은 여인이 자기 태의 자녀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과 아버지가 자기 아들들에게 자비를 보이는 것에 비하여져 있다. (사 49:15; 시 103:13) 이스라엘 민족이 의에서 벗어나 심한 곤경에 처하게 된 일이 빈번하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자비로운 도움이 특별히 필요한 경우가 자주 있었다. 그들이 올바른 마음의 태도를 보이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면, 그분은 그들에 대해 분노하셨다가도 동정심과 은혜와 선의를 베풀곤 하셨다. (신 13:17; 30:3; 시 102:13; 사 54:7-10; 60:10) 그분이 자신의 아들을 보내어 이스라엘에서 태어나게 하셨다는 것은 그들에 대한 하느님의 동정심과 자비의 “새벽”이 밝아 오고 있다는 증거였다.—누 1:50-58, 72-78.
그리스어 엘레오스는 히브리어 라하밈의 의미를 얼마간 전달한다. 「바인의 신구약 단어 해설 사전」(Vine’s Expository Dictionary of Old and New Testament Words)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엘레오스(ἔλεος)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외부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을 받는 쪽에서는 그것이 필요하고 그것을 베푸는 쪽에는 그 필요를 충족시킬 만큼 충분한 역량이 있는 상황이 전제된다.’” 그 동사형(엘레에오)이 전달하는 일반적인 개념은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한 동정심, 특히 행동으로 나타나는 동정심”을 느낀다는 개념이다. (1981년, 3권, 60, 61면) 그러므로 엘레오스를 자아내는 즉 자비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의 표출을 자아내는 사람들로는 눈먼 사람, 악귀 들린 사람, 나병 환자, 혹은 고통을 겪는 자녀를 둔 사람들이 있었다. (마 9:27; 15:22; 17:15; 막 5:18, 19; 누 17:12, 13)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는 간청에 응하시어 그러한 사람들을 구제해 주는 기적을 행하셨다. 그분은 기계적으로 아무런 느낌 없이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겨” 그렇게 하셨다. (마 20:31, 34) 복음서 필자는 여기서 문자적으로는 “창자”를 의미하는 스플랑크나와 관련이 있는 동사 스플랑크니조마이의 변화형을 사용하였다. (행 1:18) 이 동사는 불쌍히 여기는 감정을 표현하는 말이고, 엘레오스는 그처럼 불쌍히 여기는 감정을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 그래서 자비의 행동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법적 조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자비”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mercy)는 흔히 형벌을 집행하는 일 등에서 참거나 억제한다는 개념을 전달하는데, 그렇게 억제하는 동기는 동정심이다. 그러므로 그 단어에는 대개, 재판관이 범죄자에게 판결을 누그러뜨려 관용을 베푸는 경우처럼, 사법적인 뉘앙스가 담겨 있다. 하느님이 자비를 베푸실 때는 언제나 공의와 진실성을 비롯한 그분의 다른 특성들이나 의로운 표준과 일치하게 베푸시는 것이고(시 40:11; 호 2:19), 모든 사람은 유전죄가 있어 죄의 삯인 죽음을 맞는 것이 당연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로 5:12. 시 130:3, 4; 단 9:18; 딛 3:5 비교), 하느님이 자비를 베푸시는 것에는 대개 잘못을 사하여 주거나 심판 혹은 형벌을 가볍게 해 주는 것이 관련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시 51:1, 2; 103:3, 4; 단 9:9; 미 7:18, 19) 그러나 앞서 설명된 내용을 볼 때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용어(라하밈, 엘레오스)는 용서하거나 사법적 형벌을 가하는 면에서 억제하는 경우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용어들이 일반적으로 묘사하는 자비는 잘못을 용서하는 것 자체가 아니다. 그보다는 그러한 용서로 인하여 그 자비를 베풀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실 때에도 자신의 공의의 완전한 표준을 결코 무시하지 않으신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공의를 범하지 않으면서도 죄를 용서하는 것이 가능해지도록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대속 희생을 마련하신 것이다.—로 3:25, 26.
그러므로 대개의 경우 자비란 (처벌 따위를) 면하게 해 주는 소극적인 조처가 아니라, 불우하고 자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구제해 줌으로 친절하게 배려하거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표현하는 적극적인 조처를 가리키는 말이다.
어느 사마리아인에 관한 예수의 비유는 이 점을 잘 예시해 주는데, 그것은 행인이 강도를 만나 구타당하여 길가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본 사마리아인에 관한 비유였다. 그는 자신이 그 행인의 “이웃”임을 나타냈는데, 그를 불쌍히 여겨 상처를 치료해 주고 돌보아 줌으로 “그 사람에게 자비롭게 행”하였기 때문이다. (누 10:29-37) 여기에는 잘못에 대한 용서라든지 사법적 절차가 관련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성경에서 밝혀 주는 바에 의하면, 여호와 하느님의 자비하심은 사람들이 어떤 특정한 잘못을 범해서 그분 앞에서, 이를테면, “심리”를 받을 때에만 작용하는 특성이 아니다. 그보다도 그것은 하느님의 성품의 한 가지 특성이요 그분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반응을 나타내시는 일상적인 방식으로서 그분의 사랑의 한 단면이다. (고둘 1:3; 요첫 4:8) 그분은 나라들의 거짓 신들, 무정하고 동정심이 없는 신들과는 다르다. 도리어 “여호와는 은혜롭고 자비로우며, 분노하기를 더디 하고 사랑의 친절이 크신 분. 여호와는 모두에게 선하시고, 그 자비가 그 만드신 모든 것 위에 있”다. (시 145:8, 9. 시 25:8; 104:14, 15, 20-28; 마 5:45-48; 행 14:15-17 비교) 그분은 “자비가 풍부”하시고 그분에게서 오는 지혜에는 ‘자비가 가득’하다. (엡 2:4; 야 3:17) 자신의 아버지가 어떠한 분인지를 나타내 주신 그분의 아들(요 1:18)은 이 점을 자신의 성품과 언행으로 보여 주셨다. 무리가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나아왔을 때 그분이 하실 말씀에 대한 그들의 반응을 보시기도 전에 그분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스플랑크니조마이의 변화형].” “그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찢겨지고 내던져졌기” 때문이다.—막 6:34; 마 9:36. 마 14:14; 15:32 비교.
인류에게 필요하다 확실히, 인류를 무력하게 하는 근본적인 최대의 장애는 조상인 아담에게서 유전받은 죄로 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으며 불쌍한 상태에 있다. 여호와 하느님은 온 인류를 위해 자비로운 행동을 하셨는데, 인류를 그토록 무력하게 하는 큰 장애와 그 결과인 병과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 주셨다. (마 20:28; 딛 3:4-7; 요첫 2:2) 자비로운 하느님이신 그분은 “아무도 멸망되기를 바라지 않으시고 모두가 회개에 이르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참을성을 나타내신다. (베둘 3:9) 여호와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해 주고 싶어 하는 분이기에 그렇게 하는 것을 좋아하신다. (사 30:18, 19 비교) 그분은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 분이며, 유다와 예루살렘이 멸망되게 하실 때처럼 “사람의 아들들을 괴롭게 하거나 근심하게 하시는 것은 그분의 본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겔 33:11; 애 3:31-33) 그분이 사람들에 대해 그와는 다른 조처를 취하시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까닭은, 즉 그분의 자비가 그들에게로 흐르지 못하고 ‘막혀 버리는’ 까닭은 사람들의 마음의 고집 때문이며, 그들이 완고하여 그분의 은혜와 자비에 호응하지 않기 때문이다.—시 77:9; 렘 13:10, 14; 사 13:9; 로 2:4-11.
한량 없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에게 진실하게 다가오는 자들에게는 큰 자비를 나타내시지만, 회개하지 않아서 참으로 처벌을 받기에 마땅한 자들에게는 결코 처벌을 면제해 주지 않으신다. (출 34:6, 7) 어떤 사람도 하느님의 자비를 악용해서는 안 된다. 죄를 짓고는 벌을 완전히 피할 수가 없으며, 자기의 잘못된 행로로 인한 당연한 결말이나 결과를 면할 수가 없다. (갈 6:7, 8. 민 12:1-3, 9-15; 삼둘 12:9-14 비교) 여호와께서 자비로우시게도 참을성과 오래 참음을 나타내시어,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잘못된 행로를 시정할 기회를 주실지 모른다. 승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시겠지만, 그들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으시고 자비로우시게도 도움과 지침을 어느 정도 계속 베푸실지 모른다. (느 9:18, 19, 27-31 비교) 그러나 그들이 불응하면 그분의 참을성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그분은 자비를 거두어들이시고 그분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대적하는 조처를 취하신다.—사 9:17; 63:7-10; 렘 16:5-13, 21. 누 13:6-9 비교.
인간의 표준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자비를 보이시는 데 표준이나 기준이 될 만한 것을 인간이 제 나름대로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하늘 처소의 유리한 위치에서 그분 자신의 선한 목적과 일치하게, 미래를 내다보는 장기적인 안목과 마음을 읽으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자비를 보일 자에게 자비를 보이신다.’ (출 33:19; 로 9:15-18. 왕둘 13:23; 마 20:12-15 비교) 로마 11장에서 사도 바울은 하느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하늘 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서 비할 데 없는 지혜와 자비를 나타내신 것에 관하여 논한다. 이방인들은 하느님의 나라인 이스라엘의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 이전에는 하느님과의 계약 관계로 말미암은 자비를 받을 수가 없었고, 그들 또한 하느님께 불순종하는 삶을 살았다. (로 9:24-26; 호 2:23 비교) 처음에는 이스라엘에게 기회가 있었지만 그들 대부분이 불순종하였다고 바울은 설명한다. 그 결과로, 약속된 “제사장 왕국과 거룩한 나라”의 일부가 될 수 있는 길이 이방인들에게 열렸다. (출 19:5, 6) 바울은 이렇게 결론지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모두 함께 불순종 안에 가두어 두신 것은 그들 모두에게 자비를 보이시기 위한 것입니다.” 온 인류 가운데서 작용하는 아담의 죄는, 그리스도의 대속 희생을 통하여, (이방인을 포함하여) 믿음을 나타내는 모든 사람에게서 제거될 수 있게 되었고, 율법의 저주도 그분이 고통의 기둥에서 죽으심으로 그 저주 아래 있던 사람들(유대인들)에게서 제거될 수 있게 되었으므로, 모두가 자비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도는 이렇게 감탄하였다. “오, 하느님의 부와 지혜와 지식의 깊음이여! 참으로 그분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고, 그분의 길은 더듬어 알아 낼 수 없구나!”—로 11:30-33; 요 3:16; 골 2:13, 14; 갈 3:13.
하느님의 자비를 구함 하느님의 자비가 흐르는 것을 맛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그릇된 길과 해를 입히는 생각을 버림으로 올바른 마음 상태를 나타내면서 그분을 찾아야 한다. (사 55:6, 7) 그들은 그분에 대한 합당한 두려움을 가지고 그분의 의로운 훈계에 대한 인식을 나타내야 한다. (시 103:13; 119:77, 156, 157; 누 1:50) 의로운 길을 걷다가 벗어나게 될 경우에는 그것을 감추려고 해서는 안 되며, 그것을 고백하고 진심으로 뉘우치며 마음으로 슬퍼하고 있음을 나타내야 한다. (시 51:1, 17; 잠 28:13)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 또 한 가지는 그들 자신이 자비로워야 한다는 점이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비로운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들이 자비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마 5:7.
자비의 선물 바리새인들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자비롭지 못한 태도를 나타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들을 이러한 말씀으로 꾸짖으셨다. “가서, ‘나는 자비를 원하고 희생을 원하지 않는다’고 한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배우십시오.” (마 9:10-13; 12:1-7. 호 6:6 비교) 그분은 자비를 율법의 더 중한 것들 가운데 한 가지로 언급하셨다. (마 23:23) 이미 언급된 바와 같이, 그러한 자비에는 바리새인들이 아마도 산헤드린의 성원으로서 나타낼 기회가 있었을 사법적 관용도 내포될 수 있었지만, 자비는 그러한 것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보다 근본적인 의미로 그것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나 동정심을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 즉 자비의 행동을 가리키는 말이었다.—신 15:7-11 비교.
이 자비는 물질을 주는 일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 가치 있는 것이 되려면 그저 ‘개화된 이기주의’가 아닌 올바른 동기로 주는 것이어야 한다. (마 6:1-4) 도르가가 풍성하게 베푼 “자비의 선물[엘레에모시네의 변화형]”에는 물질적인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며(행 9:36, 39), 고넬료가 베푼 자비의 선물에도 물질적인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는 그의 기도와 더불어 그 선물들로 인하여 하느님께 호의적으로 들으심을 얻었다. (행 10:2, 4, 31) 예수의 말씀에 따르면, 바리새인들이 잘못한 것은 “속에 있는 것들을 자비의 선물로” 주지 않은 데 있었다. (누 11:41) 그러므로 참된 자비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예수와 그분의 제자들은 물질적인 것들보다 훨씬 큰 가치가 있는 영적인 선물들을 자비로운 마음으로 베푸는 면에서 특히 탁월하였다. (요 6:35; 행 3:1-8 비교) 그리스도인 회중의 성원들, 특히 회중 안에서 ‘목자’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베첫 5:1, 2) 자비라는 특성을 길러야 한다. 그들은 물질적인 면으로든 영적인 면으로든 자비를 “즐거이” 나타내야지, 결코 마지못해 나타내서는 안 된다. (로 12:8) 일부 회중 성원들은 믿음이 약해져서 영적으로 병들고 심지어 의심을 표현하게 될 수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영적으로 죽을 위험에 다가가는 것이므로, 동료 그리스도인들은 이들에게 계속 자비가 흐르게 해 주고 이들이 파멸적인 종국을 당하지 않도록 도우라는 권고를 받고 있다. 그들은 합당하지 않은 행동을 한 사람들에게 계속 자비를 보이기는 하지만 그들 자신도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데, 자신들은 의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 악한 것을 미워하기도 해야 한다는 점을 의식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자비에는 그릇된 것을 묵인한다는 의미가 전혀 함축되어 있지 않다.—유 22, 23. 요첫 5:16, 17 비교. 자비의 선물 참조.
자비는 심판을 이기고 크게 기뻐한다 제자 야고보는 이렇게 말한다. “자비를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자비 없는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기고 크게 기뻐합니다.” (야 2:13) 문맥을 보면 야고보는 앞서 참 숭배에 관하여 설명한 개념을 전개시키는 중인데, 여기에는 역경을 겪는 자들을 돌보아 줌으로, 그리고 부자에게는 호의를 보이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냉대하여 편애하거나 차별 대우를 하지 않음으로 자비를 표현하는 것이 포함된다. (야 1:27; 2:1-9) 그가 뒤이어 한 말도 그 점을 보여 주는데, 그 내용은 “벌거벗은 상태에 있고 그 날의 음식도 없는” 형제들이 필요로 하는 것에 관하여 다루고 있다. (야 2:14-17) 그러므로 그의 말은 자비로운 사람들이 자비를 받을 것이라는 예수의 말씀과 부합한다. (마 5:7. 마 6:12; 18:32-35 비교) 자비로웠던 사람들 즉 불쌍히 여기거나 동정심을 나타내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준 사람들은 하느님께 심판을 받게 될 때 이제 그들 자신이 하느님에게서 자비를 받을 차례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자비가 없다면 그들에게 닥칠 수도 있을 불리한 심판을 사실상 그들의 자비가 이기는 셈이 된다. 잠언에서도 이렇게 말한다. “낮은 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이는 여호와께 빌려 드리는 것이니, 그분은 그 행위에 대하여 그에게 갚아 주신다.” (잠 19:17) 다른 여러 성구들도 야고보가 설명한 요점을 확증해 준다.—욥 31:16-23, 32; 시 37:21, 26; 112:5; 잠 14:21; 17:5; 21:13; 28:27; 디둘 1:16, 18; 히 13:16 비교.
하느님의 대제사장의 자비 히브리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아론계의 여느 제사장보다도 훨씬 더 위대한 대제사장 예수께서 인간이 되어 고통을 당하고 죽으셔야 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점에서 자기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하였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느님에 관한 일에서 자비롭고 충실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사람들의 죄를 위하여 화목 희생을 바치시기 위함입니다.” 시험을 받으며 고난을 당하셨기에, 그분은 “시험받고 있는 사람들을 도와 주실 수 있”다. (히 2:17, 18) 예수의 생애와 그분의 말씀과 행실에 관한 기록이 있으므로, 예수를 통하여 하느님께 청원하는 사람들은 확신을 가지고 그렇게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마찬가지로 모든 점에서 시험을 받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죄는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말의 자유를 가지고 과분한 친절의 왕좌에 가까이 가도록 합시다. 그것은 우리가 적절한 때에 도움을 받기 위해 자비를 얻고 과분한 친절을 발견하려는 것입니다.”—히 4:15, 16.
예수께서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신 것은 자비와 사랑을 나타낸 탁월한 행동이었다. 그분은 대제사장으로 계시는 하늘 처소로부터도 자비하시다는 증거를 보여 주셨는데, 바울(사울)을 대하신 경우가 그러하였다. 바울의 무지함을 인하여 그에게 자비를 보이신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도 내가 자비를 받은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으뜸 가는 사례로 삼아 그분의 오래 참음을 온전히 나타내 보이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그분에게 믿음을 두려고 하는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디첫 1:13-16) 예수의 아버지이신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여러 번 자비를 보이셨는데, 그들을 적들에게서 구원하시고 압제자에게서 풀려나게 하시고 평화롭고 번영하는 상태로 인도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도 하느님의 아들을 통하여 표현될 자비에 굳은 희망을 둘 수 있다. 그래서 유다는 이렇게 기술한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 자신을 지키십시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기다리십시오.” (유 21) 그리스도를 통해 표현되는 하느님의 놀라운 자비는 참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봉사의 직무를 포기하지 않고 비이기적인 방식으로 수행하도록 힘을 북돋워 준다.—고둘 4:1, 2.
동물들을 자비롭게 다룸 잠언 12:10에서는 “의로운 자는 자기 가축의 영혼을 보살피지만, 악한 자들의 자비는 잔인하다”고 말한다. 의로운 사람은 자기가 기르는 동물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잘 알고 애정을 가지고 돌보지만, 악한 사람은 그러한 필요를 보고도 자비심이 발동하는 일이 없다. 세상의 이기적이고 무정한 원칙에 따르면 자기가 기르는 동물을 어떻게 다루느냐는 오로지 그 동물에게서 무슨 이득을 얻을 수 있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악한 사람이 적절한 보살핌이라고 여기는 것일지라도 실상은 잔인하게 다루는 것일 수 있다. (창 33:12-14 대조) 의로운 사람이 자기가 기르는 동물에 대해 마음을 쓰는 것은 하느님께서 동물들을 자신의 창조물의 일부로서 돌보시는 데 나타난 선례를 따르는 것이다.—출 20:10; 신 25:4; 22:4, 6, 7; 11:15; 시 104:14, 27; 욘 4:11 비교.
자비와 친절 라하밈이나 엘레오스라는 말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자주 연관되어 사용되는 다른 단어들은 히브리어 헤세드(시 25:6; 69:16; 렘 16:5; 애 3:22)와 그리스어 카리스(디첫 1:2; 히 4:16; 요둘 3)로서, 각기 “사랑의 친절(충성스러운 사랑)”과 “과분한 친절”을 의미한다. 헤세드가 라하밈과 다른 점은 헤세드는 친절을 나타내는 대상에 대한 정성 혹은 충성스러운 애착에 주안점이 있지만 라하밈은 부드러운 동정심이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 역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와 비슷하게, 카리스와 엘레오스의 주된 차이점도 카리스는 특히 선물이 무상이고 과분한 것이라는 개념을 표현함으로 주는 자가 도량이 넓고 관대하다는 것에 역점이 있고 엘레오스는 괴로움을 당하거나 불우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해 자비로운 반응을 보인다는 것에 주안점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친절하시게도 자신의 아들에게 다른 모든 이름보다 뛰어난 이름을 주셨을[에카리사토]’ 때 그 아들에게 카리스(과분한 친절)를 나타내신 것이다. (빌 2:9) 이러한 친절의 동기가 된 것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에 넘친 관대함이었다.—친절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