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롯
(Herod)
유대인들을 다스린 통치자들의 가문의 이름. 그들은 이두매 즉 에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명목상으로는 유대인이었는데, 요세푸스는 이두매 사람들이 기원전 125년경에 마카베오 가문의 통치자인 요한 히르카누스 1세에 의해 강제로 할례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알려 준다.
헤롯 가문에 대해 성서에서 간략히 언급하는 내용을 제외하면, 그들에 대한 대부분의 정보는 요세푸스가 기록한 역사책에 들어 있다. 헤롯 가문의 선조는 하스몬(마카베오)가(家)의 알렉산드로스 얀나이우스 왕이 이두매의 총독으로 삼은 안티파트로스(안티파스) 1세였다. 안티파트로스의 아들 역시 안티파트로스 또는 안티파스라고 불렸는데, 그가 헤롯 대왕의 아버지였다. 다마스쿠스의 역사가인 니콜라스는 안티파트로스(2세)가 바빌론에서 나와 유다 땅으로 들어온 명문 유대인의 자손이라고 말한다고 요세푸스는 기술한다. 하지만 요세푸스는 니콜라스의 주장이 단지 헤롯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이었으며, 실제로는 헤롯의 부계 쪽이나 모계 쪽이 다 에돔 사람이라고 말한다.
매우 부유한 사람이었던 안티파트로스 2세는 정치와 음모에 관여했으며, 아들들을 위해 큰 야심을 품고 있었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얀나이우스와 살로메 알렉산드라의 아들인 요한 히르카누스 2세가 유대인의 대제사장과 왕의 지위를 놓고 히르카누스의 형제인 아리스토불루스와 다툼을 벌일 때 히르카누스 2세를 지지하였다. 하지만 안티파트로스는 사실 자신의 야심을 위해 일한 것이었으며, 마침내 율리우스 카이사르로부터 로마 시민권과 유대 지방의 총독의 지위를 받게 되었다. 안티파트로스는 자기의 장남 파사엘로스를 예루살렘의 총독으로, 다른 아들인 헤롯을 갈릴리의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안티파트로스는 암살자에 의해 독살당함으로 생애를 마치게 되었다.
1. 헤롯 대왕. 안티파트로스(안티파스) 2세가 아내 키프로스를 통해 얻은 둘째 아들. 성서는 간략한 기록을 통해 이 인물의 성격을 사악하고 교활하고 의심이 많고 부도덕하고 잔인하고 살인을 일삼는 것으로 묘사하는데, 역사는 그러한 묘사가 사실임을 증명한다. 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외교와 기회 포착에 능하였다. 하지만 그가 조직자이자 사령관으로서 역량을 발휘했다는 점도 언급해야 할 것이다. 요세푸스는 그를 체력이 매우 강하고, 말타기에 능하며, 단창과 활을 다루는 데 능한 사람으로 묘사한다. (「유대 전쟁사」 The Jewish War, I, 429, 430 [xxi, 13]) 아마 그의 유익한 특성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건축자의 재능이었을 것이다.
그는 우선 자신의 관할 지역에서 강도떼를 제거하여 갈릴리의 총독으로서 이름을 떨쳤다. 하지만 그것을 시기한 어떤 유대인들이 살육을 당한 강도들의 어머니들과 함께 히르카누스 2세(당시의 대제사장)를 부추겨, 강도들을 먼저 재판에 회부하지도 않고 즉각 처형함으로 산헤드린을 무시하였다는 죄목으로 헤롯을 산헤드린 앞에 소환하게 하였다. 헤롯은 그에 응했지만, 유대교 개종자라고 자처하는 사람으로서 그 법정에 재판을 받으러 온 입장이면서도 대담하고 불경스럽게 경호원을 거느리고 그들 앞에 나타났다. 그는 유대인의 고등 법정을 이렇게 모욕하여 재판관들의 분노를 유발하였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사마이아스(시므온)라는 재판관은 용감하게 일어나서 만일 헤롯이 처벌을 모면하게 된다면 그곳 재판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언젠가 죽일 것이라고 예고하였다. 하지만 히르카누스는 수동적이고 의지가 약한 사람이었다. 히르카누스는 헤롯의 협박과 더불어, 그 소송을 기각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위협하는 섹스투스 카이사르(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친척이자 당시 시리아의 총독)의 편지 때문에 압력을 받고 굴복하였다.—「유대 고대사」(Jewish Antiquities), XIV, 168-176 (ix, 4).
유대의 왕 헤롯은 아버지를 계승했으며, 기원전 39년경에 로마 원로원의 임명을 받고 더 큰 유대의 왕이 되었다. 하지만 3년 뒤에 예루살렘을 장악하고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인 안티고누스를 몰아냈을 때에야 비로소 사실상의 왕으로 자신의 지위를 확립할 수 있었다. 이 승리를 거둔 뒤에 헤롯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조처들을 취했는데, 로마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설득하여 안티고누스를 죽이게 함으로 그리고 안티고누스 파의 유력한 인사 45명을 모두 색출하여 죽임으로 그렇게 하였다. 그는 유력한 바리새인들 가운데 사마이아스와 폴리오만 살려 두었으며, 마침내 몇 해 후에 요한 히르카누스 2세마저 죽였다. 그는 자기를 재판하려고 재판석에 앉아 있던 자들을 그렇게 살육함으로, 사마이아스의 예언을 성취시켰다.
언제나 교활한 정치가였던 헤롯은 로마를 지지하는 것이 가장 이로울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로마 통치자들의 흥망성쇠에 따라 보조를 맞추어 자주 편을 바꾸어 가며 외교술을 매우 잘 발휘해야 하였다. 섹스투스의 친한 벗이었던 헤롯은 처음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지지하다가, 그다음에는 카이사르를 암살한 카시우스와 제휴하였다. 그는 카시우스의 적이자 카이사르의 복수자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호의를 얻어 낼 수 있었는데, 막대한 양의 뇌물도 한 가지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후에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가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를 무찔렀을 때, 헤롯은 마르쿠스를 지지한 일에 대해 교묘한 방법으로 아우구스투스에게서 용서를 받아 냈으며, 그 뒤로는 아우구스투스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다. 헤롯은 로마를 지지했고 카이사르들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 돈을 마음대로 사용한 데다가 말솜씨가 좋았기 때문에, 유대인이나 그 밖의 사람들에 의해, 어떤 때는 자기의 집안사람들에 의해 자기에 대한 불평이나 고발이 로마에 들어갔을 때에도 언제나 승소하였다.
헤롯의 최초의 지배권은 갈릴리의 총독의 지위였다. 카시우스는 그를 코엘레시리아의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후에 로마 원로원은 안토니우스의 추천에 따라 헤롯을 유대의 왕으로 임명하였다. 이제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거기에다 사마리아와 가다라와 가자와 요파를, 나중에는 드라고닛, 바타나에아, 아우라니티스, 페레아 지방을 추가하였다. 페레아는 요르단 강 동편 지역으로서 대략 길르앗 지역에 해당한다. 이두매 역시 헤롯의 지배 아래 있었다.
성전 건축과 그 밖의 건축 활동 헤롯의 건축 활동에 관해 고려할 때, 예루살렘에 있는 스룹바벨 성전을 재건한 일은 특히 성서적인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주목할 만하다. 그 성전을 건축하는 데 막대한 비용이 들었으며, 요세푸스는 그 성전이 실로 장엄했다고 묘사한다. (「유대 고대사」, XV, 395, 396 [xi, 3]) 유대인들은 헤롯에 대한 증오심과 의심 때문에, 기존의 성전을 먼저 허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는 철거를 조금이라도 시작하기 전에 건축 재료를 모아 현장에 갖다 두어야 하였다. 성전의 신성한 곳은, 요세푸스에 의하면 18개월 만에 재건되었다. (「유대 고대사」, XV, 421 [xi, 6]) 그 밖의 주요 구조물들은 8년 만에 세워졌다. 하지만 기원 30년에 유대인들은 그 성전을 46년이나 걸려서 지었다고 말하였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침례 후 첫 유월절이 가까웠을 때 그분과의 대화 중에 그런 말을 하였다. (요 2:13-20) 요세푸스에 의하면(「유대 고대사」, XV, 380 [xi, 1]), 그 공사는 헤롯 통치 제18년에 시작되었다. 유대인들이 왕들의 재위년을 고려한 방식으로 계산한 것이라면, 그때가 기원전 18/17년이었음을 의미할 수 있다. 실제로 성전 공사는 성전이 기원 70년에 파괴되기 6년 전까지 증축이나 그 밖의 형태로 계속되었다.
헤롯은 또한 극장들, 원형 경기장들, 타원형 경기장들, 성채들, 요새들, 궁전들, 정원들, 카이사르를 기리는 신전들, 수도교들, 기념비들, 심지어 도시들까지 건설하였다. 그는 자신이나 친족들이나 로마 황제들의 이름을 따서 그 도시들에 이름을 붙였다. 그는 티레 항에 견줄 만한 인공 항구를 카이사레아에 건설하였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20길(36미터) 깊이의 물속에 거대한 돌들을 깔아서 너비 약 60미터의 인공 항구를 만들었다고 한다. (「유대 고대사」, XV, 334, 335 [ix, 6]) 헤롯은 안토니아 요새와 마사다 요새를 재건했는데, 마사다 요새는 매우 웅장하게 만들었다. 그의 건축 업적은 시리아 안티오크와 로도스(동일한 이름의 섬에 있었음)처럼 멀리 떨어진 도시들에까지 파급되었다.
헤롯은 오락에 돈을 극도로 헤프게 썼고 특히 로마의 고위 인사들에게 선물을 마음껏 주었다. 헤롯에 대한 유대인들의 주된 불평들 가운데 하나는 그가 카이사레아에 있는 것과 같은 원형 경기장들을 만들었다는 점이었다. 그런 곳들에서 그는 그리스와 로마식 경기들을 개최했는데, 그 가운데는 전차 경주, 검투 시합, 사람과 야수의 싸움, 그리고 그 밖의 이교 축제들이 포함되었다. 그는 올림픽 경기 대회를 보존하는 데 대단한 관심이 있어서, 한번은 로마로 여행하는 도중에 그리스에 있었을 때, 직접 투사로 참여한 적도 있었다. 그런 다음 그는 그 경기들이 지속되도록, 그리고 그와 더불어 자신의 이름도 남기기 위해 거액의 돈을 기부하였다. 명목상의 유대인이었던 그는 유대인들을 “내 동포”라고 불렀고, 바빌론에서 돌아와서 스룹바벨 성전을 지었던 사람들을 “나의 조상들”이라고 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생 행로는 여호와 하느님의 종이라는 그의 주장과는 완전히 배치되었다.
가정 내의 문제들 헤롯의 가족 성원 거의 모두가 야심과 의심이 많고, 몹시 부도덕하고, 말썽 많은 사람들이었다. 헤롯이 겪은 가장 큰 어려움과 슬픔은 그의 집안 문제 때문이었다. 그의 어머니 키프로스와 누이 살로메는 끊임없이 상황을 악화시켰다. 헤롯은 히르카누스 2세의 외손녀이자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 알렉산드로스의 딸인 마리암네(1세)와 결혼하였다. 마리암네는 빼어난 미인이었으며, 헤롯은 그를 매우 사랑하였다. 하지만 마리암네와 헤롯의 어머니와 누이 사이에 증오가 자랐다. 헤롯은 언제나 시기심이 많았으며, 가족 성원들 특히 그의 아들들이 자기에 대한 음모를 꾸미지 않을까 의심했는데, 어떤 경우에는 의심할 근거가 있었다. 그는 권력욕과 의심 때문에 급기야는 자기 아내 마리암네, 세 아들, 아내의 오라비와 외할아버지(히르카누스), 절친한 벗들이었던 몇 사람, 그리고 그 밖의 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하게 하였다. 그는 자기의 의심을 확증해 줄 정보를 가지고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누구이든 그에게서 자백을 받아 내기 위해 고문을 가하였다.
유대인들과의 관계 헤롯은 유대인들을 진정시키려고 성전을 재건했으며 기근이 들 때면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주곤 하였다. 그는 때때로 그의 일부 신민들에게 세금을 경감시켜 주었다. 그는 심지어 아우구스투스로 하여금 세계 여러 곳에서 유대인들에게 어떤 특전들을 주게 만드는 데 성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폭정과 잔학 행위는 그런 일들을 무색하게 하여, 그의 통치 기간 대부분에 유대인들과의 문제가 끊이지 않았다.
병고와 죽음 필시 방탕한 생활 때문에, 헤롯은 결국 열을 수반하는 역겨운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였는데, 요세푸스의 글을 인용하면 이러하다. “피부 전체에 도저히 참기 어려운 가려움 증세가 있었고, 장에는 계속적인 통증이 있었으며, 발에는 수종과 같은 종창이 있었고, 배에는 염증이 있었다. 은밀한 부분의 괴저 때문에 벌레들이 나올 정도였고, 천식까지 있어서 숨쉬기가 매우 힘들었으며, 사지에 경련이 일어났다.”—「유대 전쟁사」, I, 656 (xxxiii, 5).
그는 불치병에 걸려 있을 때, 음모를 꾸미는 아들 안티파트로스를 살육할 것을 명령하였다. 또한 헤롯은 자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유대인들이 기뻐할 것을 알고, 유대 민족 가운데 매우 저명한 사람들에게 예리코에 있는 히포드롬(타원형 경기장)이라는 곳으로 모이라고 명령한 뒤 그곳에 그들을 가두게 하였다. 그다음에 그는 측근들에게 명령하기를, 자기가 죽으면 유대인의 그 지도자들을 먼저 죽인 뒤에야 자기가 죽었다는 소식을 알리라고 하였다. 그렇게 되면 자기의 장례식 때 유대의 모든 가족이 틀림없이 울게 될 것이라고 그는 말하였다. 이 명령은 이행되지 않았다. 헤롯의 누이 살로메와 그의 남편 알렉사스는 그 사람들을 풀어 주고 고향으로 보냈다.
헤롯은 70세 정도의 나이에 죽었다. 그는 자기 아들 안티파스를 계승자로 지정하는 유언서를 작성했지만, 죽기 얼마 전에 아르켈라오스를 그 지위에 임명한다는 내용을 추가했거나 그 내용으로 새로 유언서를 작성하였다. 아르켈라오스는 백성과 군대에 의해 왕으로 받아들여졌다. (성서는 예수의 양부 요셉이 “아르켈라오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대신하여 유대의 왕으로 통치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알려 준다. 마 2:22) 그러나 안티파스는 그러한 조처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로마에서 그 문제를 청취한 뒤에,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는 아르켈라오스를 지지하였다. 하지만 그는 아르켈라오스를 민족 통치자로 임명했으며, 이전에 헤롯이 통치하던 영토를 분할하여 절반은 아르켈라오스에게, 나머지 절반은 헤롯의 다른 두 아들인 안티파스와 빌립에게 각각 나누어 주었다.
어린아이들을 학살하다 헤롯이 베들레헴과 그 지역에 있는, 두 살부터 그 아래의 사내아이들을 모두 살육한 일에 대한 성서 기록은 헤롯에 대한 다른 역사 기록들 및 그의 악한 성향과 일치한다. 이 일은 헤롯이 죽기 얼마 전에 있었다. 예수의 부모가 예수를 이집트로 데리고 가서 그분이 목숨을 건지게 되고, 헤롯이 죽은 뒤에 그들이 갈릴리로 돌아와 정착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는 이 두 사건을 자신의 예언자 예레미야와 호세아를 통해 예언하신 바 있었다.—마 2:1-23; 렘 31:15; 호 11:1.
사망 연대 헤롯의 사망 시기에 관해서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일부 연대 학자들은 그가 기원전 5년이나 4년에 죽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들의 연대 계산은 많은 부분이 요세푸스가 기록한 역사에 근거해 있다. 헤롯이 로마에 의해 왕으로 임명된 시기를 산정할 때, 요세푸스는 “집정관 연대 산정법”을 사용한다. 다시 말해서 그는 그 사건이 로마의 어느 집정관들의 통치 기간에 일어났는지를 지적한다. 이에 따르면 헤롯이 왕으로 임명된 때는 기원전 40년이 된다. 하지만 다른 역사가인 아피아노스의 자료에 따르면 그 사건이 기원전 39년에 일어난 것이 된다. 요세푸스는 동일한 방식으로 헤롯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때를 기원전 37년으로 잡고 있지만, 그 일이 폼페이우스가 그 도시를 점령한 때(이 일은 기원전 63년에 있었음)로부터 27년 후에 일어났다는 말도 한다. (「유대 고대사」, XIV, 487, 488 [xvi, 4]) 그가 후자의 사건을 언급한 내용을 고려하면, 헤롯이 예루살렘 도시를 장악한 때는 기원전 36년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요세푸스는 헤롯이 로마인에 의해 왕으로 임명된 때로부터 37년 후에, 그리고 그가 예루살렘을 장악한 때로부터 34년 후에 죽었다고 알려 준다. (「유대 고대사」, XVII, 190, 191 [viii, 1]) 이 사실은 그의 사망 연대가 기원전 2년 또는 어쩌면 기원전 1년일 수도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 될 것이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유대의 왕들의 통치 기간을 계산할 때, 다윗 가계의 왕들의 통치 기간을 계산했던 방식인 즉위년 방식을 사용했을 것이다. 만일 헤롯이 로마에 의해 기원전 40년에 왕으로 임명되었다면, 그의 재위 원년은 기원전 39년 니산월부터 38년 니산월까지였을 수 있다. 그와 유사하게, 헤롯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기원전 37년(또는 36년)부터 계산하면, 그의 재위 원년은 기원전 36년(또는 35년) 니산월부터 시작했을 수 있다. 따라서 요세푸스의 말대로 헤롯이 로마에 의해 임명된 때로부터 37년 후에 그리고 그가 예루살렘을 점령한 때로부터 34년 후에 죽었다면, 그리고 그 햇수들을 각각의 경우에 재위년에 따라 계산한다면, 그의 사망 시기는 기원전 1년이었을 수 있다. 이러한 취지의 주장을 「신학 연구지」(The Journal of Theological Studies)에 제시하면서, W. E. 필머는 유대인의 전승의 증거는 헤롯이 사망한 때가 스밧월(스밧월은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의 1-2월에 해당함) 2일이었음을 시사한다고 기록한다.—H. 채드윅과 H. 스파크스 공편, 옥스퍼드, 1966년, 17권, 284면.
요세푸스에 의하면, 헤롯은 월식이 있고 나서 오래지 않아, 그리고 유월절이 되기 전에 죽었다. (「유대 고대사」, XVII, 167 [vi, 4]; 213 [ix, 3]) 기원전 4년 3월 11일(율리우스력으로는 3월 13일)에 월식이 있었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요세푸스가 언급한 것이 그 월식이었다고 결론짓는다.
한편 기원전 1년에는 유월절이 되기 석 달 전쯤에 개기 월식이 있었지만, 기원전 4년에 있었던 것은 부분 월식이었다. 기원전 1년의 개기 월식은 헤롯의 사망일이라고 전해지는 스밧월 2일로부터 18일 전인 1월 8일(율리우스력으로는 1월 10일)에 있었다. 또 다른 (부분) 월식은 기원전 1년 12월 27일(율리우스력으로는 12월 29일)에 일어났다.—연대 계산, 연대 기술, 연대학 (월식) 참조.
또 하나의 계산 방법은 헤롯이 죽을 때의 나이를 중심으로 한 것이다. 요세푸스는 그가 70세쯤 되었다고 말한다. 요세푸스는 헤롯이 갈릴리의 총독으로 임명되었을 때(이때는 일반적으로 기원전 47년으로 여겨짐) 15세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학자들은 그것이 착오였으며 25세라고 기록할 의도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대 고대사」, XVII, 148 [vi, 1]; XIV, 158 [ix, 2]) 따라서 헤롯의 사망 시기는 기원전 2년 또는 1년이 된다. 하지만 사건들의 연대에 관한 요세푸스의 기록에는 불일치한 점이 많으며 따라서 그 기록이 가장 신뢰할 만한 출처는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가장 신뢰할 만한 증거를 얻으려면, 성서를 살펴보아야 한다.
입수할 수 있는 증거는 헤롯이 기원전 1년에 죽었을 것임을 시사한다. 성서 역사가인 누가는 요한이 침례를 베풀기 시작한 때가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통치 제15년이라고 알려 준다. (누 3:1-3) 아우구스투스는 기원 14년 8월 17일에 죽었다. 티베리우스는 9월 15일에 로마 원로원에 의해 황제로 지명되었다. 로마 사람들은 즉위년 방식을 사용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 제15년은 기원 28년 후반기부터 기원 29년 후반기까지에 해당할 것이다. 요한은 예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으며 봉사의 직무를 예수보다 먼저(그해의 봄이었던 것 같음) 시작하여 예수보다 앞서 가서 길을 준비하였다. (누 1:35, 36) 성서에서는 예수께서 가을에 태어나셨음을 지적하는데, 그분은 30세쯤 되셨을 때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러 가셨다. (누 3:21-23) 그러므로 그분은 필시 기원 29년 가을 10월경에 침례를 받으셨을 것이다. 그때부터 30년을 계산해서 거슬러 올라가면,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태어난 시기는 기원전 2년 가을이 될 것이다(누 3:1, 23을 단 9:24-27에 나오는 “칠십 주”에 관한 다니엘의 예언과 비교).—칠십 주 참조.
예수를 방문한 점성술사들 사도 마태는 예수께서 “헤롯 왕 시대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후에, 동쪽으로부터 점성술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자기들이 동방에 있을 때에 그분의 별을 보았다고 말했음을 알려 준다. 그 즉시 헤롯은 두려움과 의심이 생겨났으며, 수제사장들과 서기관들로부터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다음에 그는 그 점성술사들을 불러서 그들을 통해 그 별이 나타난 때를 확인하였다.—마 2:1-7.
이때는 예수가 태어나고 나서 얼마 뒤의 일임에 유의하게 되는데, 예수는 이제 구유에 누워 있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부모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마 2:11. 누 2:4-7 비교) 헤롯 왕은 점성술사들이 그 어린아이의 소재에 관한 소식을 가지고 돌아오지 않자, 베들레헴과 그 지역 전체에 있는, 두 살부터 그 아래의 사내아이들을 모두 살육하라고 명령하였다. 그사이에 예수의 부모는 하느님의 경고를 받았기 때문에 예수를 이집트로 데리고 갔다. (마 2:12-18) 헤롯은 기원전 1년 이전에 죽었을 가능성이 거의 없는데, 그렇다면 (기원전 2년 10월 1일경에 태어난) 예수가 생후 3개월도 안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어린아이들을 죽이는 일이 있었을 때 예수가 반드시 두 살이 되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가 심지어 한 살이 안 되었을 수도 있는데, 헤롯은 점성술사들이 동방에 있었을 때 그 별이 그들에게 나타난 때로부터 계산했기 때문이다. (마 2:1, 2, 7-9) 그것은 수개월의 기간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 점성술사들이 오랜 점성술의 중심지인 바빌론이나 메소포타미아에서 왔다면—실제로 그랬을 가능성이 있다—그것은 매우 긴 여행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537년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빌론에서 고국으로 돌아오는 여행은 적어도 넉 달이 걸렸다. 헤롯은 두 살부터 그 아래의 아기들을 모두 죽이면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이 아기도 확실히 처치할 수 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던 것 같다. (마 2:2) 이런 일이 있은 뒤 오래지 않아 헤롯이 죽었다는 것은, 예수가 이집트에 그리 오래 머물지 않은 것 같다는 사실로 보아 알 수 있다.—마 2:19-21.
따라서 성서의 연대 계산과 천문학 자료와 입수할 수 있는 역사 기록들은 헤롯의 사망 시기가 기원전 1년이거나 심지어 기원 1년 초일 수도 있음을 지적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2. 헤롯 안티파스. 헤롯 대왕과 사마리아 여자 말타케 사이의 아들. 그는 형제 아르켈라오스와 함께 로마에서 양육받았다. 헤롯의 유언서에는 안티파스가 왕권을 받을 사람으로 지명되어 있었지만, 헤롯은 끝에 가서 자기의 유언을 바꾸어 그 대신 아르켈라오스를 지명하였다. 안티파스는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앞에서 그 유언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아르켈라오스의 주장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왕국을 분할하여 안티파스에게 갈릴리와 페레아의 분봉왕의 지위를 주었다. 속주의 ‘사분의 일의 통치자’라는 의미인 “분봉왕”(tetrarch)이라는 용어는 하급의 지역 통치자 또는 지방 영주에게 사용되었다. 하지만 그는 아르켈라오스와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왕으로 불렸을 것이다.—마 14:9; 막 6:14, 22, 25-27.
안티파스는 페트라를 수도로 삼고 있던 아라비아 왕 아레다(아레타스)의 딸과 결혼하였다. 하지만 한번은 로마로 여행하던 중에, 안티파스는 헤롯 대왕과 마리암네 2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이복형제 헤롯 빌립(분봉왕 빌립이 아님)을 방문하였다. 방문 중에 그는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반하게 되었는데, 헤로디아는 지위에 대한 야심이 있는 여자였다. 안티파스는 헤로디아를 갈릴리로 데리고 가서 그와 결혼하였다. 그리고 아레다의 딸과 이혼하고 그를 고국으로 돌려보냈다. 이 모욕적인 행동으로 인해 전쟁이 일어났다. 아레다는 안티파스의 영토를 침략하여 그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혀서, 거의 그를 몰락시킬 정도까지 갔다. 안티파스는 로마에 도움을 간청하였고, 황제가 아레다를 사로잡거나 죽이라고 명령한 덕분에 구출되었다.
안티파스는 아우구스투스의 계승자인 티베리우스 카이사르에게 특별한 호의를 얻었다. 안티파스는 훨씬 작은 규모이기는 하지만 자기 아버지처럼 건축자로서 게네사렛 호수(갈릴리 바다 곧 티베리아스 바다) 곁에 한 도시를 세우고 황제의 이름을 따서 그 도시의 이름을 티베리아스라고 지었다. (요 6:1, 23) 그는 또 다른 도시 하나를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율리아(리비아라는 이름이 더 일반적임)의 이름을 따서 율리아스라고 지었다. 그는 또한 요새들과 궁전들과 극장들을 건축하였다.
침례자 요한을 죽이다 헤롯 안티파스가 헤로디아와 맺은 불륜의 관계에 대해 침례자 요한이 그를 책망하였다. 요한이 이 문제에 있어서 안티파스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었는데, 안티파스는 명목상 유대인이었으며 율법 아래 있다고 공언했기 때문이다. 안티파스는 요한을 죽이려고 감옥에 가두었지만 백성을 두려워했다. 백성들은 요한이 예언자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티파스의 생일잔치 때 헤로디아의 딸이 안티파스를 매우 기쁘게 하자, 안티파스는 그 딸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주겠다고 맹세하였다. 헤로디아는 자기 딸에게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라고 지시하였다. 헤롯은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 잔치에 참석해 있는 사람들 앞에서 체면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리고 자기가 한 서약 때문에 비겁하게도 굴복하고 말았다. (사실 율법 아래서는 살인과 같은 불법적인 행동을 하면서까지 서약을 지킬 의무가 없었다.)—마 14:3-12; 막 6:17-29.
후에 안티파스는 예수의 봉사의 직무 즉 전파하는 일, 병 고치는 일, 악귀들을 쫓아내는 일에 관해 들었을 때, 예수가 사실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킴을 받은 요한이 아닐까 염려하며 두려워하였다. 그 후로 그는 예수를 몹시 보고 싶어 했는데, 그분이 전파하는 내용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내린 결론을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마 14:1, 2; 막 6:14-16; 누 9:7-9.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니 여기서 떠나가십시오”라고 말한 때는, 그분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에 페레아를 지나실 때의 한 시점이었을 것이다. 헤롯은 예수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헤롯의 영토 밖으로 도망하게 만들기를 바라고 이 소문을 퍼뜨렸을 가능성이 있다. 헤롯은 감히 자기의 손을 들어 또다시 하느님의 예언자를 죽이는 것을 두려워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그에 대해 답하실 때 헤롯의 교활함을 가리켜 그를 “그 여우”라고 부르신 것 같다.—누 13:31-33.
“헤롯의 누룩” 예수께서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계속 깨어 살피고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십시오”라고 경고하신 때는 헤롯 안티파스의 통치 중이었다. (막 8:15) 이 두 파 즉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가르침에 반대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간에 적의를 품고 있었지만, 둘 다 그리스도를 공동의 적으로 여겼으며 그분을 반대하는 면에서는 서로 연합되어 있었다. 헤롯 당원들은 종교색보다는 정치색이 더 짙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율법을 따른다고 주장하면서도 유대인들이 외국인 군주(헤롯 가문은 참 유대인이 아니라 이두매 사람들이었으므로)를 인정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의견을 유지했다고 한다. 헤롯 당원들은 민족주의 정신이 매우 강하여 유대인 왕들 아래의 신권 통치라는 개념도 로마의 통치도 지지하지 않았고, 헤롯의 자손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 다스리는 민족 왕국의 회복을 원하였다.
그들의 민족주의적 “누룩”을 은연중에 드러낸 예는, 그들이 바리새인들과 함께 예수를 덫에 걸려들게 하려고 사용한 이러한 함정 질문이었다. “카이사르에게 인두세를 바치는 것이 허용됩니까, 안 됩니까? 우리가 바칠까요, 바치지 말까요?” (막 12:13-15) 예수께서는 그들을 “위선자들”이라고 부르셨으며, 자신이 깨어서 그들의 “누룩”을 조심하고 있음을 보여 주셨다. 그분은 대답으로 그들을 무력하게 하셨으며, 선동죄를 씌우거나 백성에게 반감을 사게 만들려는 그들의 의도를 좌절시키셨기 때문이다.—마 22:15-22.
예수를 조롱하다 예수의 지상 생애의 마지막 날, 그분이 본디오 빌라도 앞에 끌려오셨을 때, 빌라도는 예수께서 갈릴리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그분을 갈릴리의 지역 통치자(분봉왕)인 헤롯 안티파스(그 당시 예루살렘에 있었음)에게 보냈다. 빌라도는 갈릴리 사람들과 문제를 겪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누 13:1; 23:1-7) 헤롯은 예수를 보고 기뻐했는데, 예수의 복지에 관심이 있거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그분을 고발한 내용의 진위 여부를 밝히려고 실제로 시도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예수가 얼마의 표징 행하는 것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표징을 행하기를 거절하셨으며, 헤롯이 그분에게 “꽤 많은 말로” 질문했지만 침묵을 지키셨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단지 일종의 조롱거리로 헤롯 앞에 강제로 서게 된 것임을 알고 계셨다. 헤롯은 예수에게 실망하여 그분을 모욕하고 밝게 빛나는 옷을 입혀 조롱한 뒤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는데, 로마 정부와 관련해서는 빌라도가 더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빌라도와 헤롯은 적으로 지내 왔었는데, 아마 헤롯이 빌라도에게 퍼부은 어떤 비난들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빌라도의 이러한 조치가 헤롯을 기쁘게 하여 그들은 친구가 되었다.—누 23:8-12.
기원 33년 오순절이 지나고 오래지 않아 베드로와 요한이 구금되었다가 풀려난 뒤에, 제자들은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 가운데 이렇게 말하였다. “헤롯[안티파스]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 사람들과 이스라엘 백성들과 더불어 이 도시에 실제로 함께 모여, ··· 당신의 거룩한 종 예수를 대적하였습니다. ··· 그러므로 이제 여호와여, 그들의 위협에 주의를 기울이시고, 당신의 종들이 온전히 담대하게 당신의 말씀을 계속 전하게 해 주십시오.”—행 4:23, 27-29.
사도행전 13:1에서는 마나엔이라는 그리스도인이 지역 통치자 헤롯과 함께 교육받았다고 알려 준다. 안티파스는 로마에서 어떤 평민과 함께 양육받았으므로, 성서의 그 진술은 마나엔이 로마에서 교육받았음을 시사하는 것일 가능성이 있다.
갈리아로 추방되다 가이우스 카이사르(칼리굴라)가 아그리파 1세를 빌립이 다스리던 분봉 영지의 왕으로 삼았을 때, 안티파스의 아내 헤로디아는 자기 남편을 비난하며 그가 왕권을 받지 못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나태함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헤로디아는 아그리파는 전에 아무 직위도 없었던 반면 안티파스는 이미 분봉왕이므로 로마로 가서 카이사르에게 왕권을 요청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마침내 아내의 끈질긴 압력에 굴복하였다. 하지만 칼리굴라는 안티파스의 야심에 찬 요구에 화를 내게 되고, 아그리파가 고발한 내용에 주목하여, 안티파스를 갈리아(프랑스의 리옹이라는 도시)로 추방하였다. 안티파스는 마침내 스페인에서 죽었다. 헤로디아는 아그리파의 누이였기 때문에 처벌을 면할 수 있었지만 남편을 따라갔는데, 그것은 자존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안티파스가 추방된 뒤, 그의 분봉 영지와 돈과 헤로디아의 소유지는 아그리파 1세에게 주어졌다. 따라서 헤로디아는 안티파스가 당한 두 큰 재난 즉 아레다 왕에게 거의 패망할 뻔한 일과 추방당한 데 대한 책임이 있었다.
3. 헤롯 아그리파 1세. 헤롯 대왕의 손자. 그는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이며, 아리스토불루스는 헤롯 대왕이 마리암네 1세를 통해 얻은 아들이다. 마리암네 1세는 대제사장 히르카누스 2세의 외손녀이다. 아리스토불루스는 헤롯 대왕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아그리파는 그의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팔레스타인 전역의 왕이 된 사람으로는 헤롯 가문 가운데 마지막 인물이었다.
초기 생애 “헤롯 왕”이라는 아그리파의 지위는 많은 책략과 로마에 있는 그의 친구들의 도움으로 얻은 것이다. (행 12:1) 티베리우스 황제의 아들 드루수스와 황제의 조카 클라우디우스와 함께 로마에서 교육받은 그는 로마의 요인들 사이에서 잘 알려진 인물이 되었다. 그는 극도로 낭비벽이 심하고 앞뒤를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엄청난 빚을 졌으며 심지어 로마 국고에도 빚을 져서, 로마를 떠나 이두매로 도피하였다. 결국 그는 누이 헤로디아와 아내 키프로스(헤롯 대왕의 조카의 딸, 이 조카의 아내는 헤롯의 딸이었음)의 도움으로, 얼마 동안 티베리아스에 거주하였다. 그는 안티파스와 다투게 되어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마침내 로마로 돌아가서 티베리우스 카이사르의 호의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아그리파는 분별 없는 말을 하여 티베리우스 황제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그는 어느 순간 방심하여, 우호 관계를 맺어 왔던 가이우스(칼리굴라)에게, 가이우스가 빨리 황제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것이다. 아그리파의 하인이 그 말을 엿듣게 되어, 그가 한 말이 티베리우스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티베리우스는 아그리파를 감옥에 집어넣었다. 그의 생명은 여러 달 동안 위기에 처해 있었지만, 몇 달 뒤에 티베리우스가 죽고 칼리굴라가 황제가 되었다. 칼리굴라는 아그리파를 풀어 주고 높여서 아그리파의 사망한 삼촌 빌립이 통치했던 영토의 왕으로 삼았다.
로마 황제들의 호의를 얻다 헤로디아는 자기 오라비가 왕이 된 것을 시기하여, 분봉왕에 불과한 남편 헤롯 안티파스가 로마의 새로운 황제에게 왕위를 간청하도록 부추겼다. 하지만 아그리파는 이 문제에 대해 안티파스보다 선수를 쳤다. 아그리파는 안티파스가 티베리우스에게 반역할 음모를 꾸몄던 세야누스와 그리고 파르티아 사람들과 동맹을 맺었다고 가이우스(칼리굴라)에게 고발하였다. 안티파스는 그 고발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로 인해 안티파스는 추방을 당하게 되었다. 안티파스의 영토인 갈릴리와 페레아는 아그리파의 왕국에 합병되었다. 요세푸스는 한 구절에서는 이 영토를 칼리굴라가 아그리파에게 주었다고 말하고, 다른 두 구절에서는 클라우디우스가 주었다고 말한다. 아마 칼리굴라가 그것을 약속했고, 클라우디우스가 그것을 정식으로 인정했을지 모른다.
학자들이 기원 41년으로 추정하는 칼리굴라 암살 사건 때, 아그리파는 로마에 있었다. 그는 원로원과 자신의 벗인 새로운 황제 클라우디우스 사이에서 교섭자 또는 협상자 역할을 할 수 있었다. 클라우디우스는 감사를 표하기 위해 그에게 유대와 사마리아 영토뿐 아니라 루사니아의 왕국도 수여하였다. 아그리파는 이제 할아버지 헤롯 대왕이 차지했던 것과 거의 동일한 영토의 통치자가 되었다. 이때 아그리파는 자기 형제 헤롯(이 헤롯은 안티-레바논 산맥 서쪽 경사면의 작은 영토인 칼키스의 왕이라고만 역사에 언급되어 있음)을 위해 클라우디우스에게 칼키스 왕국을 요청하여 받게 되었다.
유대인들의 비위를 맞추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다 아그리파는 독실한 유대교 신자라고 주장하면서 유대인들의 비위를 맞추었다. 이전에 칼리굴라는 자기가 신이라고 주장하면서 자기의 형상을 예루살렘 성전에 세우기로 결심한 바 있었지만, 아그리파는 그를 교묘하게 설득하여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였다. 아그리파는 후에 예루살렘 북쪽 외곽에 성벽을 쌓기 시작하였다. 클라우디우스는 이것이 미래에 로마의 공격이 있을 경우를 대비하여 그 도시를 요새화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클라우디우스는 아그리파에게 중단할 것을 명령하였다. 아그리파는 말로는 하느님의 숭배자라고 주장했지만, 그와는 반대로 극장에서 행해지는 검투 시합과 그 밖의 이교적인 쇼를 후원하고 마련하였다.
아그리파는 할머니 마리암네 쪽의 가문을 통해 하스몬가의 혈통을 물려받았으므로 유대인들에게 받아들여졌다. 그는 로마의 멍에 아래 있는 유대인들의 대의는 옹호했지만, 그리스도인들—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일반적으로 미움을 받은 사람들—은 박해한 볼썽사나운 기록도 남겼다. 그는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없애 버렸다.” (행 12:1, 2) 그것이 유대인들을 기쁘게 하는 것을 보고, 그는 베드로를 체포하여 감금하였다. 천사의 개입으로 베드로가 풀려나서, 아그리파의 군인들 사이에는 큰 소동이 있었으며 그 결과 베드로를 지키던 경비병들은 처벌을 당하게 되었다.—행 12:3-19.
하느님의 천사에게 심판 집행을 당하다 아그리파의 통치는 갑작스럽게 끝났다. 카이사레아에서 카이사르를 기리는 축제 중에, 그는 화려한 왕복을 차려입고, 모인 청중 즉 그와의 평화를 청하고 있던 티레와 시돈 사람들에게 공개 연설을 하기 시작하였다. 청중은 그에 대한 반응으로 “신의 음성이요, 사람의 음성이 아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성서는 그가 정죄받은 위선자로서 즉각 처형되었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그러자 즉시 여호와의 천사가 그를 쳤다. 그것은 그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벌레들에게 먹혀 숨을 거두었다.”—행 12:20-23.
연대 학자들은 헤롯 아그리파 1세 왕의 사망 시기를 기원 44년으로 잡는데, 그때 그는 54세였으며 온 유대를 3년 동안 통치한 뒤였다. 그는 아들 헤롯 아그리파 2세와 딸들인 베르니케(행 25:13), 펠릭스 총독의 아내가 된 드루실라, 마리암네 3세를 남기고 죽었다.—행 24:24.
4. 헤롯 아그리파 2세. 헤롯 대왕의 증손자. 그는 헤롯 아그리파 1세와 아내 키프로스의 아들이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그는 헤롯 가계의 마지막 군주였다. 아그리파에게는 세 누이가 있었는데, 그들의 이름은 베르니케, 드루실라, 마리암네 3세였다. (행 25:13; 24:24) 그는 로마 황실에서 양육받았다. 그가 17세에 불과할 때 그의 아버지가 죽었으므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고문관들은 그가 너무 어려서 아버지의 영토에 대한 통치권을 맡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클라우디우스는 그 대신 그 영토에 총독들을 임명하였다. 아그리파 2세는 로마에 얼마 동안 머문 뒤에, 그리고 삼촌(칼키스 왕 헤롯)이 죽은 뒤에, 안티-레바논 산맥의 서쪽 경사면에 있는 작은 나라인 칼키스를 다스리는 왕권을 받았다.
그 뒤 오래지 않아 클라우디우스는 그를, 이전에 빌립과 루사니아에게 속했던 분봉 영지들의 왕으로 임명하였다. (누 3:1) 그는 또한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감독권도 받았으며, 유대인 대제사장들을 임명할 권한도 부여받았다. 그의 영토는 클라우디우스의 계승자인 네로에 의해 더 확장되었는데, 네로는 갈릴리의 티베리아스와 타리케아이 및 페레아의 율리아스와 그에 딸린 성읍들을 그에게 주었다.
후에 아그리파는 하스몬가의 왕들이 예루살렘에 세웠던 궁전을 증축하는 데 관심을 쏟았다. 이제 그가 성전 뜰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 궁전 증축 부분에서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벽을 세워서 그의 시야와 로마 경비병들이 어떤 유리한 지점에서 바라보지 못하게 가로막았다. 이로 인해 헤롯과 페스투스 둘 다 불쾌했지만, 유대인들이 네로에게 호소하자 그 황제는 그 벽을 그대로 두게 하였다. 아그리파는 또한 카이사레아 빌립보(네로를 기리기 위해 이 도시의 이름을 네로니아스로 변경함)를 아름답게 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본을 따라 페니키아에 있는 베리투스에 극장을 짓고 그곳에서 행해지는 쇼에 막대한 자금을 소비하였다.
아그리파의 누이 베르니케가 길리기아 왕과 결혼하기 전에 아그리파가 베르니케와 근친상간을 범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다. (「유대 고대사」, F. 요세푸스, XX, 145, 146 [vii, 3]) 요세푸스는 아그리파가 결혼했는지의 여부를 언급한 적이 없다.
로마의 멍에에 대한 유대인의 반역(기원 66-70년)이 민족적 재난을 초래할 뿐임이 명백해지자, 아그리파는 좀 더 온건한 노선을 따르도록 그들을 설득하려 하였다. 그는 자신의 권고가 아무 소용이 없자 유대인들을 버리고 로마 군대와 결탁했고, 실제 전투에서 날아온 돌에 부상을 당하게 되었다.
바울이 아그리파 앞에서 변론하다 성경에서 왕 헤롯 아그리파 2세와 그의 누이 베르니케는 그들이 기원 58년경에 총독 페스투스를 예방했을 때를 배경으로 언급된다. (행 25:13) 페스투스는 총독 펠릭스의 후임자였다.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고발을 당한 일은 펠릭스가 총독이었던 기간에 있었지만, 펠릭스는 그 직무에서 떠날 때 유대인들에게 호의를 얻기를 바라고 바울을 묶어 두었다. (행 24:27) 그런데 펠릭스는 아그리파의 누이 드루실라와 결혼했기 때문에 아그리파의 매부였다. (행 24:24) 바울이 카이사르에게 상소하고 후속 조처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행 25:8-12), 아그리파 왕은 바울이 하는 말을 듣고 싶다고 총독 페스투스에게 말하였다. (행 25:22) 바울은 아그리파 앞에서 변론하게 되어 기뻤는데, 바울은 아그리파 왕을 가리켜 “유대인들의 모든 관습과 논쟁에 대하여 정통한” 사람이라고 묘사하였다. (행 26:1-3) 바울의 강력한 논증 때문에 아그리파는 이렇게 말하게 되었다. “당신은 짧은 시간에 나를 설득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오.” 이에 바울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짧은 시간이든 긴 시간이든, 당신뿐 아니라 오늘 제 말을 듣는 모든 이들도 이 결박 외에는 저와 같은 사람이 되기를 하느님께 바랍니다.” (행 26:4-29) 아그리파와 페스투스는, 바울이 죄가 없지만 카이사르에게 이미 상소했기 때문에, 재판을 받도록 그를 로마로 이송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다.—행 26:30-32.
기원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된 뒤에, 헤롯 아그리파는 누이 베르니케와 함께 로마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법무관의 직무를 받았다. 아그리파는 기원 100년경에 자녀 없이 죽었다.
5. 헤롯 빌립. 헤롯 대왕이 대제사장 시몬의 딸인 마리암네 2세를 통해 얻은 아들. 빌립은 헤로디아의 첫 남편이었는데, 헤로디아는 그와 이혼하고 그의 이복형제인 헤롯 안티파스와 결혼하였다. 빌립은 성서 마태 14:3과 마가 6:17, 18 및 누가 3:19에 부수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헤롯 빌립이라는 이름은 그를 분봉왕 빌립과 구별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는데, 요세푸스에 의하면 분봉왕 빌립도 헤롯 대왕의 아들로서 헤롯 대왕이 또 다른 아내 즉 예루살렘의 클레오파트라를 통해 얻은 아들이었다.
빌립은 아버지의 왕좌를 계승할 위치에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그는 이복형들인 안티파트로스, 알렉산드로스, 아리스토불루스 다음으로 나이가 많았는데, 그들 셋이 모두 아버지에 의해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헤롯이 초기에 작성한 유언서 중 하나에는 빌립의 이름이 안티파트로스 다음 자리에 올라 있었다. 하지만 헤롯의 최종 유언서에서는 그의 이름이 제외되고, 왕국이 아르켈라오스에게 돌아갔다. 요세푸스의 기술에 의하면, 헤롯이 유언서에서 빌립의 이름을 삭제한 것은 빌립의 어머니인 마리암네 2세가 안티파트로스가 헤롯에 대해 음모를 꾸미는 것을 알고서도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빌립에게는 헤로디아를 통해서 낳은 살로메라는 딸이 있었다. 살로메는 헤롯 안티파스 앞에서 춤을 춘 뒤 어머니의 지시를 받고 침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한 여자였던 것 같다.—마 14:1-13; 막 6:17-29.
6. 분봉왕 빌립. 헤롯 대왕이 예루살렘의 클레오파트라라는 아내를 통해 얻은 아들. 그는 로마에서 양육받았다. 그는 헤롯 빌립과 헤로디아의 딸인 살로메와 결혼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는 그 왕국을 분할하여 빌립에게 연간 세수가 100달란트가 되는 이두래와 드라고닛과 그 밖의 인근 지역의 영지를 분봉해 주었다. (아마 이두래는 후에 추가되었기 때문에 요세푸스의 기록에 빠져 있는 듯하다.) 그는 30년 이상 통치하였다. 요세푸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정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온건하고 태평한 성향을 나타냈다. 사실 그는 그 모든 시간을 자기 관할의 영토 안에서 지냈다.” 요세푸스의 계속되는 기록에 의하면, 빌립은 때마침 머무르게 되는 곳 어디서든 재판석에 앉아 지체하지 않고 청취했다고 한다. 그는 율리아스에서 죽어 성대하게 장사 지내졌다. 그는 아들을 남기지 않았으므로, 티베리우스 황제는 그의 분봉 영지를 시리아 속주에 합병시켰다.—「유대 고대사」, XVIII, 106-108 (iv, 6).
빌립의 이름은 침례자 요한의 봉사의 직무 시기와 관련하여 성서에 한 번 언급되어 있다. (누 3:1) 이 성구는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의 통치에 관한 역사 자료들과 함께, 요한의 봉사의 직무가 기원 29년에 시작되었음을 지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