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러분을 위하여 본을 세웠습니다’
‘시간으로 볼 때에 여러분은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히브리 5:12.
1. 히브리 5:12의 말씀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다소 염려하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기사의 주제 성구에 나오는 영감받은 말씀을 읽어 보니, 자신에 대해 다소 염려가 됩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당신 혼자만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추종자들로서, 우리가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마태 28:19, 20)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로 인해 우리가 가능한 한 능숙하게 가르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의 가르치는 일에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의 생사가 달려 있을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디모데 첫째 4:16) 따라서 다음과 같이 자문해 보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 모릅니다. ‘나는 내가 마땅히 되어 있어야 하는 가르치는 사람이 실제로 되었는가? 나는 어떻게 가르치는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는가?’
2, 3. (ㄱ) 한 교사는 잘 가르치는 것의 기초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였습니까? (ㄴ) 예수께서는 가르치는 일과 관련하여 우리를 위하여 어떤 본을 세우셨습니까?
2 그러한 염려 때문에 낙담할 필요는 없습니다. 가르치는 일을 단지 전문적인 기술이 요구되는 일로만 생각한다면,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이 어렵게 느껴져서 엄두가 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잘 가르치는 것의 기초는 기술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경험 많은 한 교사가 그 점에 관해 다룬 책에서 기술한 다음과 같은 말에 유의해 보십시오. “잘 가르치는 것은 특정한 기술이나 방식의 문제도, 계획이나 행위의 문제도 아니다. ··· 가르치는 일은 주로 사랑에 관한 문제이다.” 물론, 이것은 한 직업 교사의 견해입니다. 하지만 그가 말한 요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가르치는 일에 훨씬 잘 적용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러합니까?
3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우리의 모범이 되시는 분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내가 여러분을 위하여 본을 세”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13:15) 그분은 겸손을 나타내는 면에서 자신이 세운 모범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세우신 본 가운데는 인간이 땅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가르치는 일—이 분명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가 4:43) 따라서 당신에게 예수께서 수행하신 봉사의 직무를 한 단어로 묘사해 보라고 한다면, 필시 “사랑”이라는 단어를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골로새 1:15; 요한 첫째 4:8) 하늘의 아버지이신 여호와께 나타낸 예수의 사랑은 가장 탁월한 사랑이었습니다. (요한 14:31) 하지만 예수께서는 가르치는 자로서 다른 두 가지 면으로도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가르치는 진리를 사랑하셨고 자신이 가르치는 사람들도 사랑하셨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세우신 본 가운데 이 두 가지 면에 좀 더 면밀히 초점을 맞추어 보도록 합시다.
하느님의 진리에 대한 오래 지속된 사랑
4. 예수께서는 여호와의 가르침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갖게 되셨습니까?
4 가르치는 내용에 대한 가르치는 사람의 태도는 가르치는 일의 질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무관심한 태도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은 필시 그것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며 그로 인해 영향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여호와와 그분의 왕국에 관해 자신이 가르치는 귀중한 진리에 대해 냉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한 진리에 대한 예수의 사랑은 매우 깊었습니다. 그러한 사랑은 그분이 가르침을 받는 자였을 때 갖게 된 사랑이었습니다. 독생자께서는 인간이 되기 전에 오랜 세월 동안 언제나 열성적으로 배우는 분이었던 것입니다. 이사야 50:4, 5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표현합니다. “주권자인 주 여호와께서 가르침받은 자의 혀를 나에게 주셔서 내가 피곤한 사람에게 말로 응답하는 방법을 알게 하셨다. 그분은 아침마다 깨우시고, 내 귀를 깨우셔서 가르침받은 자처럼 듣게 하신다. 주권자인 주 여호와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 않았다. 나는 반대쪽으로 돌아서지 않았다.”
5, 6. (ㄱ) 예수께서는 침례를 받으실 때 어떤 경험을 하셨던 것 같으며, 그러한 경험은 그분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ㄴ) 하느님의 말씀을 사용하는 면에서 예수와 사탄은 서로 어떻게 대조가 되었습니까?
5 예수께서는 땅에서 인간으로 성장하는 동안에도 계속 하느님의 지혜를 사랑하셨습니다. (누가 2:52) 후에 침례를 받으셨을 때 그분은 한 가지 독특한 경험을 하셨습니다. 누가 3:21에서는, “하늘이 열”렸다고 알려 줍니다. 예수께서는 그때 자신이 인간이 되기 전에 존재했던 때를 기억할 수 있게 되셨던 것 같습니다. 그 후 그분은 광야에서 단식하며 40일을 보내셨습니다. 틀림없이 그분은 하늘에 계실 때 여호와로부터 자주 교훈을 받은 일들에 대해 묵상하시면서 강렬한 희열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하느님의 진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은 시험을 받게 되었습니다.
6 예수께서 피로하고 배고프실 때, 사탄은 그분을 유혹하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이 두 아들은 참으로 서로 현격한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둘 다 히브리어 성경을 인용하였지만, 그들이 가진 태도는 서로 완전히 달랐습니다. 사탄은 하느님의 말씀을 왜곡하였고, 불경스럽게도 그 말씀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였습니다. 사실, 이 반역자는 하느님의 진리를 경멸할 뿐이었습니다. 한편, 예수께서는 누가 봐도 명백히 알 수 있는 사랑을 가지고 성경을 인용하셨으며, 매번 하느님의 말씀을 조심스럽게 사용하여 대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영감받은 말씀이 처음으로 기록되기 오래 전부터 이미 존재해 계시던 분이었지만, 그 말씀을 깊이 존중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하늘의 아버지로부터 나온 귀중한 진리였던 것입니다! 그분은 사탄에게 여호와로부터 나온 그러한 말씀이 음식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 4:1-11)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여호와께서 가르쳐 주신 모든 진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분은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그러한 사랑을 나타내셨습니까?
자신이 가르치는 진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
7. 예수께서 자신의 독자적인 가르침을 창안해 내려고 하지 않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7 자신이 가르치는 진리에 대한 예수의 사랑은 언제나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아무튼, 그분은 자신의 독자적인 견해를 쉽게 발전시키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분은 매우 방대한 지식과 지혜를 소유한 분이었습니다. (골로새 2:3) 그렇지만 그분은 자신이 가르치는 모든 것이 그분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하늘의 아버지에게서 나온 것임을 자신의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 재삼재사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요한 7:16; 8:28; 12:49; 14:10) 그분은 하느님에게서 나온 진리를 매우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진리를 자신의 독자적인 생각으로 대체하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8. 예수께서는 봉사의 직무를 시작하셨을 때, 하느님의 말씀에 의지하는 면에서 어떤 본을 세우셨습니까?
8 예수께서는 공개 봉사의 직무를 시작하자마자 지체 없이 본을 세우셨습니다. 그분이 하느님의 백성에게 자신이 약속된 메시아라는 것을 처음으로 선포하신 방법을 고려해 보십시오. 그분은 단지 많은 사람들 앞에 나타나셔서,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선언한 다음, 극적인 기적들을 행함으로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백성이 습관적으로 성경을 읽던 곳인 회당에 가셨습니다. 그분은 회당에서 이사야 61:1, 2의 예언을 소리 내어 읽으시고, 그 예언과 관련된 진리들이 자신에게 적용된다는 것을 설명하셨습니다. (누가 4:16-22) 그분이 행하신 많은 기적들은 그분이 여호와의 후원을 받고 계심을 확증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가르치실 때 항상 하느님의 말씀에 의지하셨습니다.
9.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대하시면서, 어떻게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충성스러운 사랑을 나타내셨습니까?
9 예수께서는 종교적 반대자들로부터 도전을 받으셨을 때, 책략을 사용하여 이기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하셨더라면 반대자들을 쉽게 물리치실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말씀이 그들을 논파하게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의 추종자들이 안식일 법을 범했다고 바리새인들이 비난했을 때를 생각해 봅시다. 바리새인들은 그분의 추종자들이 곡식 밭 사이로 지나가면서 이삭을 몇 개 따서 먹은 것을 빌미로 그러한 비난을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에 대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당신들은 다윗과 그와 함께한 사람들이 굶주릴 때에, 그가 어떻게 했는지 읽어 본 적이 없습니까?” (마태 12:1-5) 그 독선적인 사람들은 사무엘 첫째 21:1-6에 나오는 영감받은 기록을 분명히 읽어 보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 기록에 들어 있는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분별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단지 그 기록을 읽기만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그에 대해 생각하셨으며, 그 기록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을 마음에 새겨 두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여호와께서 그러한 기록을 통해 가르쳐 주신 원칙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모세의 율법에 나오는 한 가지 예와 함께 그 기록을 사용하여, 율법의 합리적인 정신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려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충성스러운 사랑에서 우러나와, 종교 지도자들이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그 말씀을 왜곡하거나 인간 전통의 늪 속에 그 말씀을 묻어 버리려고 하는 시도에 대항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옹호하셨습니다.
10. 예수께서는 자신의 가르치는 일의 질에 관한 예언들을 어떻게 성취시키셨습니까?
10 예수께서는 자신이 가르치는 진리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계셨으므로, 그저 외워서 지루하게 기계적으로 가르치는 일이 결코 없으셨습니다. 영감받은 예언들은 메시아가 “고상한 말들”을 사용하여 ‘입술에 있는 매혹적인 것’으로 말할 것임을 이미 시사하였습니다. (시 45:2; 창세 49:21) 예수께서는 자신이 매우 사랑하는 진리를 가르치실 때 “사람을 끄는 말씀”을 사용하시면서 자신이 전하는 소식이 신선하고 생기 넘친 소식이 되게 하심으로 그러한 예언들을 성취시키셨습니다. (누가 4:22) 의문의 여지 없이, 그분의 열정은 그분의 표정에 활기를 불어넣었을 것이며 그분의 눈빛은 자신이 가르치는 내용에 대한 강렬한 관심으로 반짝였을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은 틀림없이 매우 즐거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배워 알게 된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줄 때 따라야 할 참으로 훌륭한 본입니다!
11. 예수께서 가르치는 자로서 자신이 가진 능력으로 인해 결코 교만으로 우쭐해지시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11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진리에 대한 대단히 깊은 자신의 이해력과 마음을 끄는 말로 가르치는 자신의 방식으로 인해 교만으로 우쭐해지셨습니까? 인간 교사들의 경우 흔히 그런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경건한 면으로도 지혜로우셨음을 기억하도록 하십시오. 그러한 지혜는 거만한 태도를 용납하지 않는데, ‘지혜는 겸허한 자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잠언 11:2) 그리고 예수께서 교만하거나 거만하게 되지 않으시게 해 준 다른 요인이 또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가르치는 사람들을 사랑하셨다
12. 예수께서는 자신의 추종자들이 그분 때문에 위압감을 느끼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것을 어떻게 나타내셨습니까?
12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깊은 사랑은 그분의 가르침에 항상 나타나 있었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교만으로 가득 찬 인간들의 가르침과는 달리, 사람들로 하여금 결코 위압감을 느끼게 하지 않았습니다. (전도 8:9) 베드로는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을 목격한 후에, 놀라움에 사로잡혀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렸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추종자들이 자신에 대해 병적인 두려움을 갖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친절하게 “더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라고 말씀하신 다음, 베드로에게 그가 참여하게 될 흥미진진한 일인 제자를 삼는 일에 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누가 5:8-10) 예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이 스승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에 관한 귀중한 진리에 대한 그들 자신의 사랑에 마음이 감동되어 행동하기를 원하셨습니다.
13, 14. 예수께서는 어떻게 사람들에게 감정 이입을 하셨습니까?
13 자신이 가르치는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사랑은 그분이 그들에게 감정 이입을 하신 것에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찢겨지고 내던져졌기 때문입니다.’ (마태 9:36) 그분은 애처로운 상태에 있던 그러한 사람들을 동정하셨으며, 마음에서 우러나와 그들을 도와주셨습니다.
14 예수께서 감정 이입을 하신 또 다른 경우에 대해서도 유의해 봅시다. 혈루증으로 시달리던 한 여자가 무리 가운데서 그분에게 다가와 그분의 겉옷 술을 만지자, 기적에 의해 병이 나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에게서 힘이 나가는 것을 느끼셨지만,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은 보지 못하셨습니다. 그분은 그 여자를 찾아내려고 하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여자는 율법을 어겼다거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규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그분이 자신을 심하게 꾸짖으실까 봐 매우 두려웠을지 모르지만, 그분은 그런 이유로 그 여자를 찾으셨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그 여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딸이여, 그대의 믿음이 그대를 낫게 하였소. 평안히 가시오. 그리고 그대의 심한 병에서 놓여 건강해지시오.” (마가 5:25-34) 이러한 말씀에 표현되어 있는 감정 이입에 유의해 보십시오. 그분은 단지 “나으시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그분은 “그대의 심한 병에서 놓여 건강해지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가가 여기에서 사용한 단어는 문자적으로 “채찍질하는”을 의미할 수 있는데, 이것은 흔히 고문을 할 때의 채찍질을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그 여자가 병 때문에 고통을 겪어 왔음을, 아마도 신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심한 고통을 겪어 왔음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그 여자를 동정하셨습니다.
15, 16. 예수의 봉사의 직무 중에 있었던 어떤 일들이 그분이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찾으셨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줍니까?
15 예수께서는 또한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찾음으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분이 후에 사도가 된 나다나엘을 만나셨을 때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이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보십시오. 확실히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그 속에는 속이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기적의 힘으로 나다나엘의 마음을 읽으실 수 있었으며, 따라서 그에 관해 많은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물론, 나다나엘이 완전한 사람이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는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결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는 예수에 관해 들었을 때, “나사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하고 다소 퉁명스럽게 말하였습니다. (요한 1:45-51) 예수께서는 자신이 나다나엘에 대해 말씀하실 수 있었던 모든 것 가운데서 좋은 점,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의 정직성을 택하여 그 점에 초점을 맞추셨습니다.
16 그와 비슷한 예로, 아마 이방인인 로마 사람이었을 한 장교가 예수께 와서 병든 종을 고쳐 달라고 청하였을 때, 예수께서는 그 군인에게도 결점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 당시의 장교라면 필시 과거에 폭력과 유혈과 거짓 숭배로 얼룩진 많은 행위가 거의 일상화되다시피 한 생활을 한 적이 있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좋은 점에—그 사람의 탁월한 믿음에—초점을 맞추셨습니다. (마태 8:5-13) 후에, 예수께서는 자기 옆에 있는 고통의 기둥에 매달려 있던 행악자에게 말씀하셨을 때, 그 사람이 과거에 행한 범죄를 질책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에게 미래의 희망을 갖도록 격려하셨습니다. (누가 23:43)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에 대한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견해가 그 사람을 낙담시킬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찾으려고 노력하셨기 때문에, 틀림없이 많은 사람들은 격려를 받아 개선하려는 마음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을 섬기려는 자진성
17, 18. 예수께서는 땅에 오는 임무를 받아들이시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섬기려는 자진성을 나타내셨습니까?
17 자신이 가르치는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사랑을 보여 주는 또 하나의 강력한 증거는, 사람들을 섬기려는 그분의 자진성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인간이 되기 전에도 항상 인류를 좋아하셨습니다. (잠언 8:30, 31) 그분은 여호와의 “말씀” 곧 대변자로서, 사람들과 관련이 있는 많은 일들을 즐겁게 수행하셨을 것입니다. (요한 1:1) 하지만 그분은, 부분적으로는 좀 더 직접적으로 인류를 가르치시기 위해, “자기를 비우고 종의 모습을 취”하셨으며, 하늘의 높은 지위를 떠나셨습니다. (빌립보 2:7; 고린도 둘째 8:9) 지상에 계시는 동안, 예수께서는 누군가의 시중을 받거나 섬김을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고 또 자기 영혼을 많은 사람들과 교환하는 대속물로 주려고 온 것입니다.” (마태 20:28) 예수께서는 이러한 말씀과 온전히 일치하게 사셨습니다.
18 예수께서는 자신이 가르치는 사람들의 필요를 위해 겸손하게 섬기셨으며, 그들의 유익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그분은 도보로 약속의 땅을 다니셨는데,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수백 킬로미터를 걸어서 다니면서 전파하셨습니다. 그분은 교만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과는 달리, 늘 겸손하고 접근하기 쉬운 분이셨습니다. 온갖 사람들이—고관들, 군인들, 율법학자들, 여자들, 어린이들, 가난한 사람들, 아픈 사람들, 심지어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까지도—간절한 마음으로 두려움 없이 그분에게 다가왔습니다. 예수께서는 완전하기는 하셨지만 인간이셨으며, 따라서 피로나 배고픔을 느끼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피곤하시거나 휴식이나 조용히 기도할 시간이 필요하셨을 때에도, 자신의 필요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앞 자리에 두셨습니다.—마가 1:35-39.
19. 예수께서는 겸손하고 참을성 있고 친절하게 제자들을 대하는 면에서 어떤 본을 세우셨습니까?
19 예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을 섬기는 면에서도 그와 같은 자진성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분은 친절하고 참을성 있게 그들을 가르치심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얼마의 중요한 교훈들을 이해하는 것이 더딜 때에도, 그분은 포기하거나 화를 내거나 그들을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이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계속 새로운 방법을 찾으셨습니다. 예를 들어, 제자들이 자기들 가운데서 누가 가장 크냐는 문제로 얼마나 자주 언쟁을 벌였는지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겸손하게 서로를 대하도록 가르치시기 위해, 자신이 처형을 당하기 전 밤까지도 계속 거듭해서 새로운 방법을 찾으셨습니다. 다른 문제에서도 늘 그러셨던 것처럼 겸손에 관한 이 문제에서도, 예수께서는 “내가 여러분을 위하여 본을 세”웠다고 정당하게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요한 13:5-15; 마태 20:25; 마가 9:34-37.
20. 가르치는 방법에 있어서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어떻게 다르셨으며, 예수께서 사용하신 방법이 효과적이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20 예수께서 단지 말로만 제자들에게 본이 무엇인지 이야기해 주신 것이 아니라 “본을 세”우셨다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그분은 모범을 보이심으로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그들에게 명령은 하지만 그러한 명령들을 몸소 실천할 필요는 없는 우월한 존재인 양, 마치 은혜라도 베푸는 듯이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바리새인들의 방식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에 관해 “그들은 ··· 행하지는 않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 23:3) 예수께서는 겸손하시게도 자신이 가르친 대로 생활하시고 그 가르침을 직접 실천하심으로, 자신의 가르침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제자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물질주의에 영향을 받지 않는 단순한 생활을 영위하라고 강력히 권하셨을 때, 그들은 그분의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추측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분이 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이 없습니다.” (마태 8:20)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겸손하게 본을 세우심으로 그들을 섬기셨습니다.
21. 이어지는 기사에서는 무엇을 고려할 것입니까?
21 의문의 여지 없이, 예수는 지상에서 살았던 사람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선생님이셨습니다. 자신이 가르치는 진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과 자신이 가르치는 사람들에 대한 그분의 사랑은, 그분을 보고 그분의 말씀을 들은 마음이 정직한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오늘날 그분이 세우신 본을 연구하는 우리에게도 그와 마찬가지로 분명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완전한 모범을 따를 수 있습니까? 이어지는 기사에서는 그러한 질문을 고려할 것입니다.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 잘 가르치는 것의 기초는 무엇이며, 그와 관련하여 모범이 되신 분은 누구입니까?
● 예수께서는 자신이 가르치는 진리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나타내셨습니까?
● 예수께서는 자신이 가르치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나타내셨습니까?
● 어떤 예들이 예수께서 자신이 가르치는 사람들을 겸손하게 섬기려는 자진성을 가지고 계셨음을 보여 줍니까?
[12면 삽화]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느님의 말씀에 나오는 원칙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어떻게 나타내셨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