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illustrations)
파라볼레(parabole, 문자적 의미는 ‘곁에 둠’, 혹은 ‘함께 둠’)라는 그리스어 표현은 영어 단어 “proverb”[프로버브, 속담, 잠언] 혹은 “parable”[패러블, 비유, 예화]보다 의미의 폭이 더 넓은 편이다. 그러나 영어 “illustration”[일러스트레이션, 예]은 “parable”을 포함할 수 있고 많은 경우 “proverb”도 포함할 수 있을 만큼 의미 영역이 넓다. “proverb”는 표현이 풍부한 말을 사용하여, 그것도 종종 은유적인 말을 사용하여 진리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며, “parable”은 비교 혹은 비유를 나타내는 말로서 대개 창작한 짧은 이야기를 가리키는데, 이것으로부터 도덕적인 혹은 영적인 진리를 이끌어 낸다.
성경에서 파라볼레라는 단어를 영어 단어 “parable”보다 더 넓은 의미로 사용한다는 사실은 마태 13:34, 35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구절에서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그분이 “illustrations”(NW), “parables”(KJ, RS)를 사용하여 말씀하실 것임이 예언되었다고 지적한다. 이 표현과 관련하여 마태가 인용한 시편 78:2에는 “속담투의 말”(히브리어, 마샬)로 되어 있으며, 이 단어에 대한 역어로서 이 복음서 필자는 파라볼레라는 그리스어를 사용하였다. 이 그리스어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가 시사하듯이, 파라볼레는 어떤 사상을 가르치거나 전달하는 수단, 사물을 다른 비슷한 것 ‘곁에 둠’으로써 설명하는 수법을 이른다. (막 4:30 비교) 대부분의 영어 번역판들은 영어화한 형태인 “parable”을 그냥 사용하여 이 그리스어를 번역한다. 하지만 이 번역 표현이 모든 경우에 온전한 의미를 전달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번역판들은 히브리 9:9과 11:19에서 필요에 따라 “parable” 이외의 표현을 사용한다. 전자의 성구에서,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사용한 장막 곧 천막을 가리켜 “지정된 때를 위한 예[파라볼레; “모형”, 「킹」; “유사 표현”, Ro; “상징”, AT, RS]”라고 부른다. 후자의 성구에서,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이삭을 “예시적으로”(「신세」)(엔 파라볼레; “상징적으로 말해서”, JB, RS) 돌려받은 것으로 묘사한다. “의사여, 네 자신을 고쳐라”라는 말 역시 일종의 파라볼레라고 불린다. (누 4:23) 이 점을 고려하여, “illustration”(NW) 같은 좀 더 기본적인 용어가 모든 경우에 파라볼레에 대한 일관성 있는 역어로서 사용되어 있다.
관련된 또 다른 단어는 “allegory”[알레고리, 그리스어, 알레고리아; 우의(寓意)]이다. 이것은 일련의 행동이 다른 행동을 상징하는 긴 은유인데, 등장인물들은 어떤 것의 모형 혹은 의인화된 것을 나타내는 경우가 흔하다. 바울은 아브라함, 사라, 하갈과 관련하여 갈라디아 4:24에서 알레고레오(우의로 말하다)라는 그리스어 동사를 사용한다. 이 단어는 ‘우의적인 뜻이 있다’(「천」), ‘비유적인 표현이다’(AT), ‘상징적인 극이다’(「신세」) 등으로 번역된다.
사도 요한도 “비유”(요 10:6; 16:25, 29)를 의미하는 별도의 단어(파로이미아)를 사용하였다. 이 단어는 “상징”, “상징적인 말”, “속담”, “비유”(「신세」, AT, KJ)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된다. 베드로는 개가 토한 것으로 돌아가고 돼지가 진창에 뒹군다는 “속담”과 관련하여 이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였다.—베둘 2:22.
효과 예 혹은 비유는 가르치는 강력한 수단으로서 적어도 다섯 가지 면에서 효과적이다. (1) 주의를 사로잡는다. 경험담이나 이야기만큼 흥미를 일으키는 것은 별로 없다. 탕자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 관한 예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2) 사고력을 자극한다. 가장 좋은 정신 운동 가운데 하나는, 비유로 제시된 추상적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 비유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3) 감정에 자극을 준다. 또한 듣는 사람에게 진리의 실용적 적용법을 대개 분명히 밝혀 줌으로써 양심과 마음에 이른다. (4) 기억을 돕는다. 후에 이야기를 재현하여 적용할 수 있게 한다. (5) 어느 때나 시대에도 항상 적용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진리를 보전한다. 그 이유는 예가 생활과 자연계의 사물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에 반하여 단순한 말만으로는 의미가 바뀔 수 있다. 성서 진리가, 말해지거나 기록된 시대처럼, 오늘날까지 온전히 명확하게 남아 있는 이유 한 가지가 바로 이것이다.
목적 전술한 바에서 시사하듯이, 모든 예의 주된 목적은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나 성서에 나오는 예는 다른 목적에도 기여한다.
(1) 예와 관련하여 마음을 움직이는 온전하고 깊은 의미를 파악하려면 때때로 깊이 탐구해야 한다는 사실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단지 피상적인 관심만 가지고 있어서 진리를 마음으로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떠나가게 할 수 있다. (마 13:13-15) 하느님은 그런 사람들을 모으고 계시지 않다. 예를 듣게 되면 겸손한 사람들은 더 자세한 설명을 해 달라고 요청하지만 교만한 사람들은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귀가 있는 사람은 잘 들으십시오” 하고 말씀하셨는데,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던 무리의 대다수는 떠나갔지만 제자들은 와서 그 의미를 설명해 달라고 요청하였다.—마 13:9, 36.
(2) 예는 진리를 오용하고 하느님의 종들을 덫에 걸려들게 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진리를 감춘다. 예수께서는 인두세 주화에 관한 예를 통하여 바리새인들의 함정이 있는 질문에 대답하시면서, “그러므로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리십시오”라고 결론지으셨다. 그분의 적들은 그 예를 자기들 나름대로 적용할 수밖에 없었지만, 예수의 제자들은 그 언명된 중립 원칙을 온전히 이해하였다.—마 22:15-21.
(3) 예가 시사하는 원칙을 적용하는 것이 듣는 사람에게 맡겨져 있으므로, 예는 듣는 사람에게 경고와 질책의 소식을 분명히 전달하면서도 듣는 사람의 적의를 없애서 말하는 사람에게 보복할 근거를 남기지 않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신발이 맞으면 신으라’는 영어 속담과 같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속담은 ‘그 말이 옳게 생각되거든 그대로 따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서 세금 징수원들과 죄인들과 함께 먹는다고 비난하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지만,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가서, ‘나는 자비를 원하고 희생을 원하지 않는다’고 한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배우십시오. 나는 의로운 사람들이 아니라 죄인들을 부르러 왔습니다.”—마 9:11-13.
(4) 사람을 시정하기 위해 사용될 경우에도, 예는 듣는 사람의 편견을 제거하여 그의 생각이 그러한 편견으로 흐려지지 않게 하는 데 사용될 수 있으므로, 단지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많은 성과를 이룰 수 있다. 나단이 밧-세바와 우리아와 관련된 다윗 왕의 죄를 책망하면서 듣는 귀를 얻은 경우가 그러하였다. (삼둘 12:1-14) 또한 악한 아합 왕은 하느님의 적인 시리아 왕 벤-하닷의 목숨을 살려 주었는데, 아합 왕이 그 일과 관련된 자신의 불순종의 행동과 관계가 있는 원칙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심사숙고하여 자신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것도 예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다.—왕첫 20:34, 38-43.
(5) 예는 사람들을 자극하여 어느 쪽으로든 행동을 취하도록, 즉 자신이 하느님의 진실한 종인지 아닌지 ‘본모습을 드러내’도록 할 수 있다. 예수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고 말씀하시자, “그분의 제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뒤에 있는 것으로 물러가고 더 이상 그분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예수께서는 진정 마음으로부터 믿지 않는 사람들을 ‘잡초를 뽑듯 뽑으셨다.’—요 6:54, 60-66.
합당한 견해와 태도 성서에 나오는 예들에는 한 가지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원칙을 알려 주고 명확하게 해 주며, 종종 예언적 의미와 적용이 담겨져 있다. 또한 예들이 언급된 때나 그 후 얼마 지나고 난 때와 관련된 예언적 의미를 담고 있는 예들도 있고, 먼 훗날에 이루어지게 되어 있는 예들도 있다.
성서의 예들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는 그릇된 통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모든 예를 단지 좋은 이야기나 본보기 혹은 교훈으로 보는 것이다. 이를테면, 탕자에 관한 비유를 단지 훌륭한 문학 작품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고,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예를 죽은 후에 받게 되는 상과 처벌의 본보기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또한 이 점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점은, 예들이 비록 생활과 자연계의 사물에서 이끌어 낸 것이라 해도 반드시 실제로 일어난 일을 다루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일부 예들이 “옛날에”, “어떤 사람에게 ··· 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있었다’ 등의 표현들이나 이와 유사한 문구들로 시작되기는 하지만, 이것들은 화자들이 하느님의 영의 영향력 아래서 생각해 낸 것으로서 예 혹은 비유라고 할 수 있다. (판 9:8; 마 21:28, 33; 누 16:1, 19)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이렇게 알려 준다. “예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예로써 무리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예가 아니면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마 13:34; 막 4:33, 34.
예를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는 두 번째 장애물은 예를 너무 세부적으로 적용하려고 하여, 실제로 일어난 일에 관한 이야기의 모든 세부점을 임의로 적용하거나 해석함으로써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끌어 맞추려 하는 것이다.
합당한 태도는 먼저 문맥을 읽고 예가 나오게 된 배경을 확인하고 ‘상황과 사정은 어떠한가?’ 하고 질문해 보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스라엘의 통치자들과 백성이 “소돔의 지배자들”과 “고모라의 백성”이라고 불린 경우에,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여호와를 대적하여 심한 죄를 지었던 백성에 관해 생각해 보게 한다. (사 1:10; 창 13:13; 19:13, 24)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의 적들에게 “미디안에게 하신 것과 같이” 행해 달라고 시편 필자가 여호와께 기도한 경우에, 그것은 하느님의 백성을 압제하던 그 압제자들이 완전히 패주하여 12만여 명이 살육된 일을 상기시킨다.—시 83:2, 3, 9-11; 판 8:10-12.
다음으로, 율법, 관습과 관례, 당시의 관용 어법에 대한 지식은 종종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율법에 대한 지식은 우리가 후릿그물의 예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마 13:47-50) 당시에는 팔레스타인에서 과실나무에 세금이 부과되었기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베어 버렸는데, 이것은 예수께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예로 사용하시기 위해 마르게 하신 이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마 21:18-22.
마지막으로, 예에 담겨 있는 여러 가지 요소들에 개인적인 견해로부터 혹은 철학으로부터 얻은 자의적인 의미를 부가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규칙이 정해져 있다. “하느님의 일도 하느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친절하게 주신 것들을 우리가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이것들을 말할 때에, 인간의 지혜로 가르침받은 말로 하지 않고 영으로 가르침받은 말로 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것을 영적인 말과 결합시킵니다.”—고첫 2:11-13.
이 규칙이 적용되는 실례를 계시록 6장에 나오는 예언적인 예와 관련해서 볼 수 있다. 흰말은 여기에 언급된 네 마리 말 가운데 첫 번째 말이다. (계 6:2) 이것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성서의 다른 부분과 문맥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잠언 21:31은 “전투의 날을 위하여 말을 준비”한다고 알려 준다. 흰색은 종종 의를 상징하는 데 사용된다. 하느님의 심판의 왕좌는 흰색이며, 하늘에 있는 군대들은 흰말을 타고 있으며 희고 깨끗하고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있다. (계 20:11; 19:14. 계 6:11; 19:8 비교) 그러므로 흰말은 의로운 전쟁을 상징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검은 말을 탄 기수는 저울을 들고 있으며, 식량은 무게를 달아서 분배되고 있다. (계 6:5, 6) 이것은 기근을 묘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근에 대한 에스겔의 예언 가운데서, 에스겔이 이런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네가 먹을 음식은 무게를 달아라. ··· 그들이 무게를 달아 염려하면서 빵을 먹고, 물도 되어서 겁에 질린 채 마실 것이다.” (겔 4:10, 16) 예들 가운데 언급된 동물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성서의 상징적 용법을 이해함으로써 종종 도움과 영적인 빛을 얻을 수 있다.—짐승, 상징적 참조.
다수의 예들은 성서 자체의 설명을 통해서, 흔히 뒤이은 그 예들을 성취시키는 일에 관한 기록을 통해서 이해된다. 이러한 예들 가운데 두 가지를 들자면 에스겔이 벽에 구멍을 뚫고 얼굴을 가린 채 나간 일과(겔 12:1-16; 왕둘 25:1-7, 11; 렘 52:1-15),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으로 바치려고 하였지만 하느님이 개입하셔서 이삭을 돌려받은 일이 있다(이 예들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기도 하였으며, 드라마처럼 행하여졌다). (창 22:9-13; 히 11:19) 다른 예들은,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많은 예들은 나중에 예수께서 직접 설명해 주셨다. 많은 경우, 성서에 나오는 예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그 예들과 관련하여 성취되고 있는 현대의 사건들이다.
히브리어 성경에 나오는 예 히브리 예언자들과 성서 필자들은 여호와의 영에 감동되어 셀 수 없이 많은 적절한 예들을 기록하였다. 예를 사용한 표현이 창세기에, 아브라함의 씨를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에 있는 모래알처럼” 번성하게 하실 것이라는 여호와의 약속에 나온다. (창 22:15-18) 여호와께서는 죄로 인해 유다에 있는 자신의 백성에게 닥친 비참한 상태를 강조하기 위해, 이사야로 하여금 그런 상태를 신체적 질병으로 인한 역겨운 상태에 비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머리는 온통 병든 상태이고, 마음은 온통 힘이 없다. ··· 상처와 멍과 새로 매맞은 자국들—그것들을 짜내거나 싸매지도 못하고, 기름으로 부드럽게 하지도 못하였구나.” (사 1:4-6) 여호와께서는 느부갓네살(네부카드네자르) 왕에게 거대한 형상과 높이 솟은 나무에 관한 환상을 통하여 예언적인 소식을 전달하셨으며, 다니엘은 땅의 특정한 정부들이 짐승으로 묘사되는 것을 보았다.—단 2, 4, 7장.
흔히 예언자들은 개인이나 집단에게 말할 때 그 개인이나 집단에게 있는 특징을 나타내기 위해서 어떤 단어나 표현을 사용하였다. 다시 말해, 은유 표현을 사용하였다. 예를 들어,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반석”, “바위”, “성채”로 묘사되시며, 따라서 하느님은 안전의 확고한 근원이시라는 생각이 전달된다. (삼둘 23:3; 시 18:2) 유다는 “사자 새끼”라고 불린다. (창 49:9) 아시리아 사람들은 하느님의 분노를 위한 “몽둥이”라고 불린다.—사 10:5.
많은 경우에 예언자들은 전달하라는 사명을 받은 소식을 실연하였으며, 그리하여 구두로 전하는 소식의 효과를 높였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에 재앙이 닥칠 것을 예언하였으며, 모인 백성의 연로자들과 제사장들의 연로자들 목전에서 병을 깨뜨려 그 사실을 강조하였다. 그는 바빌론에 예속될 것을 예언하였으며, 여러 왕들에게 줄과 멍에대를 보냄으로써 그 일을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렘 19, 27장) 이사야가 벌거벗은 채 맨발로 다닌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도움을 청하기 위해 바라보았던 이집트인들과 에티오피아인들이 바로 그처럼 유배되어 끌려갈 것임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 20장) 에스겔은 예루살렘의 모양을 벽돌 위에 새기고, 그것을 향하여 포위 공격 누벽을 세우고, 자신과 그 모형 사이에 굽는 철판을 놓은 다음 그것을 마주 보고 옆으로 누워서 다가오는 예루살렘 포위 공격을 묘사하였다.—겔 4장.
때로는 전달하려는 요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야기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요담은 이런 방법을 사용하여, 세겜의 토지 소유자들이 아비멜렉 같은 매우 사악한 사람을 그들의 왕으로 선택하면서 나타낸 그들의 어리석음을 드러냈다. (판 9:7-20) 에스겔서에는 바빌론 및 이집트와 관련된 유다의 행로를 예시하기 위해, 두 마리의 독수리와 한 그루의 포도나무에 관한 이야기가 엮어져 있다. (겔 17장) 그와 비슷하게, 에스겔은 매춘부가 된 오홀라와 오홀리바라는 두 자매를 사용하여 사마리아(이스라엘 열 지파 왕국)와 예루살렘(유다)의 행로를 예시하였다.—겔 23장.
여기에 언급된 예들은 히브리어 성경에 나오는 많은 예들 가운데 단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거의 모든 성서 필자들과 예언자들은 예를 사용하였는데, 그중에는 환상의 형태로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직접 주신 예들도 있고, 말씀으로 주어진 예들도 있고, “예”라고 불린 장막의 경우처럼 실제 현실을 통해서 주어진 예들도 있었다.—히 9:9.
그리스어 성경에 나오는 예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도 생생한 예들로 가득 차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제까지 이 사람처럼 말한 사람은 없었[다]”는 평을 받으셨다. 이제껏 지상에서 살았던 모든 사람 가운데서 그분은 길어 낼 수 있는 지식의 최대 보고였다. (요 7:46) 하느님께서는 다름 아닌 예수를 통하여 모든 것을 만드셨다. (요 1:1-3; 골 1:15-17) 예수께서는 모든 창조물을 자세히 알고 계셨다. 그러므로 당연하게도, 그분이 드시는 비유는 매우 적절하였고 인간 감정의 묘사에는 깊은 이해가 반영되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한 고대의 지혜자와 같으셨다. “회중을 모으는 자가 지혜롭게 되었을 뿐 아니라 백성에게 지식을 계속 가르치기도 하였으니, 그가 숙고하고 철저히 살펴서 많은 잠언들을 정리하였다. 회중을 모으는 자는 기쁨을 주는 말을 찾고 진리의 올바른 말씀을 기록하려고 애썼다.”—전 12:9, 10.
예수께서는 적절하게도 자신의 제자들을 “땅의 소금”, “세상의 빛”으로 여기셨다. (마 5:13, 14) 또한 제자들에게 “하늘의 새들을 주의 깊이 관찰해 보”라고, ‘들의 백합들로부터 교훈을 얻으’라고 강력히 권하셨다. (마 6:26-30) 예수께서는 자신을, 양들을 위하여 기꺼이 죽는 목자에 비하셨다. (요 10:11-15) 그분은 예루살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암탉이 병아리들을 날개 아래 모으는 것같이, 내가 얼마나 자주 너의 자녀를 모으려 하였던가! 그러나 당신들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소.” (마 23:37) 또한 위선적인 종교 지도자들에게 “눈먼 인도자들이여, 당신들은 각다귀는 걸러 내면서 낙타는 삼키고 있소!” 하고 말씀하셨다. (마 23:24)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사람과 관련하여, “맷돌이 목에 달린 채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그에게 더 이로울 것”이라고 선언하셨다.—누 17:1, 2.
예수께서 사용하신 예들은 히브리어 성경에 나오는 속담과 비슷하게 짧고 간결한 표현인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 더 긴 편이며 종종 이야기로서의 길이와 특색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일반적으로 자신의 예들을 주변에 있는 창조물에서, 일상생활의 익숙한 관습에서, 이따금 발생하는 일이나 있을 법한 상황에서, 그리고 듣는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최근의 일들에서 이끌어 내셨다.
예수께서 사용하신 두드러진 예들 다음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 봉사 기간에 사용하셨고 복음서 필자들이 기록한 예들 가운데 30가지 예의 배경과 문맥에 관한 유용한 정보를 알려 줄 것이다.
(1) 두 명의 빚진 사람(누 7:41-43). 두 명의 빚진 사람에 관한 비유에서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비해 열 배나 더 빚졌는데, 이 비유의 목적과 적용은 누가 7:36-40, 44-50에 나오는 문맥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예를 말씀하시게 된 이유는, 예수를 초대한 주인 시몬이 자기 집에 들어와 예수의 발에 향유를 바른 여자에게 나타낸 태도 때문이었다. 이처럼 초대받지 않은 사람이 들어온 것은 이례적인 일로 간주되지 않았다. 때때로 초대받지 않은 사람이 식사 도중에 방으로 들어와 벽을 등지고 앉아서, 방 중앙에 있는 식탁에 기대앉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두 명의 빚진 사람의 상황을 적절하게 적용하시어, 시몬이 예수의 발 씻을 물도 준비하지 않았고 입 맞추며 인사하지도 않았고 예수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지도 않았음을 지적하셨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관습상 손님에게 마땅히 나타내야 할 예의였다. 반면에 많은 죄를 지은 이 여자는 자신이 여주인이 아니었는데도 예수에게 더 큰 사랑과 후대를 나타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당신의 죄가 용서받았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2) 씨 뿌리는 사람(마 13:3-8; 막 4:3-8; 누 8:5-8). 이 예 자체에 해석을 위한 실마리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명백한 설명이 마태 13:18-23, 마가 4:14-20, 누가 8:11-15에 나와 있다. 흙 곧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환경과, 씨 곧 왕국의 말씀의 성장을 방해할 수 있는 영향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 당시에는 씨를 뿌리는 방법이 다양했다. 한 가지 일반적인 방법은 씨 뿌리는 사람이 씨가 든 자루를 어깨와 허리에 두르고 걸어가며 씨를 뿌리는 것이었다. 겉옷의 일부분을 이용하여 씨 담는 주머니로 쓰는 사람도 있었다. 씨 뿌리는 사람은 걸으면서 손으로 씨를 넓게 흩뿌리곤 하였다. 뿌려진 씨는 까마귀가 먹어 버리기 전에 가능한 한 속히 흙으로 덮었다. 그러나 쟁기질하는 사람이 밭 사이의 좁은 길을 쟁기질하지 않고 남겨 둘 경우에, 혹은 어떤 씨가 길가의 단단한 땅에 떨어질 경우에, 새들이 그곳에 떨어진 씨를 먹어 버렸다. “바위 땅”은 바위가 단지 흙 가운데 흩어져 있는 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도리어 누가 8:6에서 알려 주듯이, 씨는 흙이 거의 없는 “바위” 위에, 즉 숨겨진 암석 위에 떨어졌다. 이러한 씨에서 발아한 식물들은 햇볕이 쪼이면 이내 시들어 버렸다. 가시나무가 있는 흙의 경우, 쟁기질은 하였겠지만 잡초를 제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시나무가 자라서 새로 심겨진 씨의 숨을 막아 버렸다. 생산적인 씨의 수확량이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로 언급된 것은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었다. 씨를 뿌리는 일과 다양한 종류의 흙은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3) 밀 가운데 덧뿌린 잡초(마 13:24-30). 이 예는 마태 13:36-43에 기록된 바와 같이 예수께서 설명해 주셨는데, “왕국의 아들들”인 “밀”과 “악한 자의 아들들”인 “잡초”가 대비되어 있다.
밀밭에 잡초를 덧뿌리는 일은 적의를 나타내는 행동으로서 중동에서는 생소한 일이 아니었다. 여기에 나오는 “잡초”는 독보리(Lolium temulentum)를 가리킨다는 것이 통설이며, 일반적으로 그 독성은 그 씨 안에서 자라는 곰팡이가 원인이라고 여겨진다. 독보리는 다 자랄 때까지는 겉모습이 밀과 매우 흡사하지만 그 후에는 쉽게 구분할 수 있다. 그것을 먹게 되면 현기증을 일으킬 수 있고 특정한 상황에서는 죽게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잡초의 뿌리는 밀의 뿌리와 서로 쉽사리 얽히게 되므로, 구분이 가능하다 해도 수확하기 전에 잡초를 뽑다가는 밀도 함께 뽑히게 될 수 있다.
(4) 겨자씨(마 13:31, 32; 막 4:30-32; 누 13:18, 19). 관련된 주제로 “하늘 왕국”이 언급되어 있다. 다른 성구들에서 알려 주듯이, 이것은 하느님의 왕국과 관련된 어떤 특징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이 경우에 겨자씨의 비유는 두 가지를 강조하는데, 첫째는 왕국 소식의 놀라운 성장이고 둘째는 그 소식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받는 보호이다.
겨자씨는 아주 작으며, 따라서 극히 작은 어떤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될 수 있었다. (누 17:6) 일부 겨자는 다 자라면 실제로 높이가 3미터에서 4.5미터에 이르고 단단한 가지를 가지고 있으므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실상 “나무”가 되는 것도 있었다. 그와 비슷하게 그리스도인 회중은 기원 33년 오순절에 매우 작은 규모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1세기에 급속도로 성장하였고, 현대에는 겨자 “나무”의 가지들이 예상보다 훨씬 더 멀리 뻗어 나가고 무성해졌다.—사 60:22.
(5) 누룩(마 13:33). 또다시 주제는 “하늘 왕국”이다. “서 말”은 3사타, 곧 3스아를 가리키며 도합 밀가루 22리터가량 된다. 이 양에 비하면 누룩의 양은 적은 편이지만, 그 누룩이 주변에 있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 이 예는 왕국의 어떤 부면을 설명하는 것인가? 누룩의 경우와 비슷하게, 왕국과 관련된 영적 성장은 대개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지속적으로 진행되며, 사방으로 확산된다. 많은 양의 밀가루 속에 있는 누룩처럼, 영적 성장을 촉진하는 왕국 전파 활동도 현재 왕국이 “땅의 가장 먼 곳까지” 전파되고 있을 정도로 확장되었다.—행 1:8.
(6) 숨겨진 보물(마 13:44). 예수께서 무리에게가 아니라 자신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예. (마 13:36) 성구에서 언급하듯이, 주제는 “하늘 왕국”인데, 이 왕국은 그것을 발견하는 사람에게 기쁨을 가져다준다. 이렇게 되려면 생활을 바꾸고 조정하며 왕국을 첫째로 구하고 왕국을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
(7) 진주를 찾는 상인(마 13:45, 46).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예. 그분은 하늘 왕국을 매우 귀중한 좋은 진주에 비하셨는데, 그 진주는 사람이 그것을 얻기 위해 자기의 모든 소유물을 팔 만큼 귀중한 것이다.
진주는 진주조개와 일부 다른 연체동물의 껍데기 속에서 발견되는 귀한 보석이다. 하지만 진주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반투명한 흰색이 아니라 노란색을 띤 것이 있는가 하면, 거무스름한 색조를 띤 것도 있고, 매끄럽지 않은 것도 있다. 중동의 고대인들 사이에서 진주는 소중히 여겨졌으며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이 예에서 상인은 진주를 찾고 있었다. 그는 이 보석의 빼어난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식별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을 얻기 위하여 기꺼이 어려움을 감수하면서 필요한 모든 조처를 취하고 그 밖의 모든 것에 작별을 고하였다.—누 14:33; 빌 3:8 비교.
(8) 후릿그물(마 13:47-50). 이 예를 통해서 예수께서는 하늘 왕국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들을 분리하는 일 곧 가려내는 일을 묘사하신다. 49절에서는 “사물의 제도의 종결”을 그 성취가 절정에 이르는 때로 지적한다.
후릿그물은 수역의 밑바닥으로 끌고 다니도록 고안된 그물로서 밧줄이나 아마로 된 줄로 만들어졌다. 후릿그물을 사용해서 온갖 물고기를 잡았다. 이 예는 예수의 제자들에게 매우 적절하였는데, 그들 중 일부는 어부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부 물고기는 부적합하여 버려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모세 율법에 따르면,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물고기는 부정하여 먹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레 11:9-12; 신 14:9, 10.
(9) 무자비한 종(마 18:23-35). 예수께서 이 예를 사용하시게 된 상황이 마태 18:21, 22에 나와 있으며 이 예의 적용은 35절에 언급되어 있다. 이 예는 우리가 하느님께 지은 빚에 비하면 우리의 동료들이 우리에게 지은 빚이 얼마나 적은지를 강조한다. 이 예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죄 많은 인간의 엄청난 빚을 용서하여 주셨으므로 우리도 동료가 우리에게 지은 비교적 사소한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통감하게 된다.
한 데나리온은 하루 품삯에 해당하였다. 따라서 더 적은 빚이었던 100데나리온은 대략 일 년 품삯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였다. 더 많은 빚이었던 은 일만 달란트는 6000만 데나리온에 해당하였으며, 품삯으로 치면 인생을 수천 번 살아야만 모을 수 있는 금액이었다. 왕에게 지은 빚이 천문학적인 액수라는 것은 요세푸스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데, 그에 따르면 당시에 유대, 이두매, 사마리아와 일부 도시들이 일 년에 바친 세금이 도합 600달란트였고, 갈릴리와 페레아는 200달란트를 바쳤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에 표현되어 있는 원칙을(마 18:35에서) 친히 이렇게 언명하셨다. “만일 여러분이 각각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여러분을 그와 같이 대하실 것입니다.”
(10) 이웃다운 사마리아인(누 10:30-37). 누가 10:25-29에 기록된 배경은 이 예가 “누가 참으로 내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주어졌음을 알려 준다. 이 예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 적절한 결론이 36절과 37절에 나온다.
예루살렘에서 예리코에 이르는 길은 강도가 빈번하게 출몰하는 거칠고 적막한 지역을 가로질러 나 있었다. 그 길은 매우 위험했으므로 마침내 여행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수비대가 주둔하게 되었다. 1세기 당시에 예리코는 예루살렘에서 동북동쪽으로 21킬로미터가량 떨어져 있었다. 율법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령하는데, 그 “이웃”이 누구인지를 밝히시기 위해 예수께서는 강도를 만나 반쯤 죽게 된 채로 버려진 사람을 보고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나타낸 반응을 언급하셨다. 제사장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서 희생 제물을 바치는 임무를 맡은 사람들이었고 레위 사람들은 제사장을 돕는 사람들이었다. 사마리아인들은 모세 오경에 명시된 율법을 인정하였건만, 유대인들은 그들을 이웃으로 여기기는커녕 그들과 상종하지조차 않았다. (요 4:9)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몹시 멸시했으며(요 8:48), 또한 회당에서 사마리아인들을 공개적으로 저주하고 날마다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에서 사마리아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함께 받지 않게 해 달라고 청하는 유대인들도 있었다. 다친 사람의 상처에는 기름과 포도주를 붓기도 했는데, 이것들은 종종 상처를 치료할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사마리아인이 다친 사람을 돌보아 달라고 하면서 여관 주인에게 남긴 두 데나리온은 약 이틀 품삯에 해당하였다.—마 20:2.
(11) 끈덕짐을 나타낸 친구(누 11:5-8). 이 예는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대한 예수의 대답의 일부였다. (누 11:1-4) 9절과 10절에서 알려 주듯이 이 예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 요점은,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요청을 번거롭게 여기신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계속 청하기를 기대하신다는 것이다.
후대는 의무이며 중동 사람들은 이 면에서 탁월해지고 싶어 한다. 아마 당시의 여행은 불확실했을 것이므로 손님이 한밤중에 불시에 도착할 수 있었으며, 그렇게 되어도 주인은 식사를 제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꼈을 것이다. 집안사람들을 위해 얼마의 빵을 구울 필요가 있는지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은 종종 쉽지 않은 일이므로, 이웃 사이에 빵을 빌리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이 경우에 이웃은 이미 잠자리에 들어 있었다. 일부 집은, 특히 가난한 사람들의 집은 단지 넓은 방 하나만 있는 경우도 있었으므로, 잠자리에서 한 사람이 일어나면 온 가족이 방해를 받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웃 사람이 친구의 청을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12) 비합리적인 부자(누 12:16-21). 이 예는 어떤 사람이 예수에게 상속 문제를 중재해 줄 것을 요청하자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해 주신 내용의 일부이다. 15절에서 알려 주듯이, 강조된 요점은 “사람이 풍부할 때라도, 그의 생명은 자기의 소유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말씀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계속하여 말씀하신 22절 이후의 내용과 비교해 보기 바란다.
율법은 맏아들이 아버지의 모든 소유물 중에서 두 몫을 상속받도록 규정하였다. (신 21:17) 이 분쟁은 이 율법을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탐심을 경계하도록 경고하신 것이었다.
(13)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누 13:6-9).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신 지 만 삼 년이 지난 기원 32년 말에 말씀하신 예. 예수께서는 빌라도가 일부 갈릴리 사람들을 죽인 일에 관한 보고를 방금 받으셨다. 그분은 또한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18명이 죽은 사건을 언급하신 다음 사람들에게, 그들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누 13:1-5) 그러고 나서 그분은 계속하여 이 예를 드셨다.
포도원에는 일반적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무화과나무와 올리브나무를 심었으므로, 포도원에 흉년이 들 경우에도 여전히 얼마쯤 수입이 있었을 것이다. 잘라 낸 가지에서 자란 새 나무라 해도 보통 이삼 년 안에는 적어도 소량의 무화과를 맺는다. 이 예에서 3년이 언급되고 예수께서도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며 동일하게 3년을 보내신 것은 의미가 있어 보인다. 무화과나무는 과세의 대상으로서 부담이 되었으며, 따라서 없애 버리는 것이 당연하였다.
(14) 성대한 만찬(누 14:16-24). 1-15절에서는 이 예의 배경을 알려 준다. 이 예는 식사 중에, “하느님의 왕국에서 빵을 먹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한 함께한 손님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식사가 실제로 준비되면 미리 잔치에 초대했던 사람들에게 통지해 주는 것이 당시의 관습이었다. 변명하면서 이 성대한 만찬을 거절한 사람들은 평소라면 꽤 합리적으로 보였을 다른 관심사를 추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만찬에 참석할 마음이 그들에게 조금도 없으며 그들이 주인에 대한 합당한 경의를 가지고 있지도 않음을 나타냈다. 나중에 초대받은 사람들, 즉 가난한 사람과 신체장애인과 저는 사람과 눈먼 사람과 또한 마침내 데리고 들어온 다른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은 일반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 천한 사람들이었다.—누 14:13 비교.
(15) 잃어버린 한 마리 양(누 15:3-7). 누가 15:1, 2에 의하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들과 세금 징수원들을 환영하시는 것에 대해 투덜거리자 이 예를 말씀하셨다. 마태 18:12-14에는 다른 경우에 사용된 유사한 예가 기록되어 있다.
세금 징수원들, 특히 유대인 세금 징수원들은 미움을 받았는데, 그들의 직업이 미움의 대상인 로마 사람들을 위해 세금을 걷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경멸의 대상이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과 관련된 예수의 예는 그 예를 듣는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통해서 쉽사리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길 잃은 양은 무력하므로 찾아 데려오는 일은 목자가 해야 할 일이었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에 대해 하늘에서 기뻐하는 것은, 예수께서 그런 사람들에게 관심을 나타내신 것에 대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투덜거린 것과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
(16) 잃어버린 드라크마 주화(누 15:8-10). 누가 15:1, 2에 배경이 나오며 이 예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 관한 예 바로 다음에 나온다. 10절에서는 그 적용점을 지적해 준다.
한 드라크마는 65센트의 가치가 있었으며 거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였다. 그러나 이 잃어버린 주화는 한 세트를 이루는 열 닢의 주화 가운데 하나로서 특별한 가치가 있었을 것인데, 어쩌면 가보이거나 한 줄의 귀중한 장식품의 일부였을 수 있다. 집에 채광창이 있다 해도 대개 상당히 작았기 때문에 등불을 켜고 찾을 필요가 있었다. 또한 바닥이 일반적으로 흙으로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집 안을 비로 쓸면 찾기가 쉬웠을 것이다.
(17) 탕자(누 15:11-32).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께서 세금 징수원들과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먹는다고 투덜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과 잃어버린 주화의 예에 이어서 이 비유를 들어 응수하셨다.
유대인의 율법에 의하면, 작은아들이 받는 상속 재산은 손위 형제가 받는 것의 절반이었다. (신 21:17) 유대인들은 작은아들이 먼 지방으로 떠난 것처럼, 세금 징수원들도 로마를 위해 봉사하려고 자기들을 떠난 것으로 여겼다. 돼지를 치는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은 유대인에게는 치욕스러운 일이었는데, 율법에 의하면 돼지는 부정한 짐승이었기 때문이다. (레 11:7) 작은아들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자기를 아들이 아니라 고용인으로 받아 달라고 청하였다. 고용인은 종들과는 달리 재산의 일부가 아니었으며, 흔히 하루하루 고용되는 품꾼이었다. (마 20:1, 2, 8) 아버지는 작은아들을 위하여 제일 좋은 긴옷을 가져오라고 하였다. 이것은 그저 수수한 옷이 아니었다. 아마도 존경받는 손님에게나 내놓는, 화려하게 수놓은 의복이었을 것이다. 반지와 샌들은 위엄과 자유인의 표였을 것이다.
(18) 불의한 관리인(누 16:1-8). 이 예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 교훈이 9-13절에 언급되어 있다. 관리인이 칭찬을 받은 것은 그의 불의 때문이 아니라 그의 실용적인 지혜 때문이었다.
관리인은 주인의 제반사를 관리하는 위치에 있었는데, 이것은 크게 신임받는 위치였다. (창 24:2; 39:4) 예수의 예 가운데서, 관리인이 해고된다는 것은 아무런 생계 수단도 없이 그 집에서 쫓겨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가 주인의 채무자들의 빚을 줄여 준 일은 그에게 돈이 생기는 일은 아니었지만 앞으로 그에게 호의를 베풀 친구들을 얻는 일이었다. 기름 100바트는 2200리터, 밀 100코르는 2만 2000리터에 해당하였다.
(19) 부자와 나사로(누 16:19-31). 누가 16:14, 15에 나오는 배경에 의하면, 돈을 사랑하는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다가 냉소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당신들은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를 의롭다고 선언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들의 마음을 아십니다. 사람들 가운데서 높아진 것은 하느님 보시기에 혐오스러운 것입니다.”
부자가 차려입은 “자주색 옷과 아마포”는 방백들과 귀인들과 제사장들만 입었던 의복과 비교해서 뒤지지 않았다. (더 8:15; 창 41:42; 출 28:4, 5) 그것은 매우 비싼 것이었다. 이 부자가 갔다고 하는 하데스는 죽은 인류의 일반 무덤이다. 이 비유로부터 하데스가 불이 타오르는 장소라고 결론지을 수 없다는 것은 계시록 20:14을 볼 때 분명해지는데, 그 구절에서는 죽음과 하데스가 “불못”에 던져지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므로 부자가 죽어서 하데스에 있게 된 것은 비유적인 의미임이 틀림없으며,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도 비유적인 죽음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누 9:60; 골 2:13; 디첫 5:6) 따라서 부자는 비유적으로는 죽었어도 실제로는 사람으로서 살아 있는 동안에 불에 의한 심한 고통을 당했던 것이다. 불은 하느님의 말씀 가운데서 하느님의 불 같은 심판의 소식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며(렘 5:14; 23:29), 하느님의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심판을 선포하면서 행하는 일은 하느님과 그분의 종들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심한 고통을 준다’고 한다.—계 11:7, 10.
나사로는 “하느님이 도우셨다”를 의미하는 엘르아살이라는 히브리어 이름의 그리스어 형태이다. 나사로의 아픈 데를 핥은 개들은 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청소 동물이었을 것이며 부정한 것으로 여겨졌다.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 자리에 있는 것은 그가 은혜받은 위치에 있음을 나타내며(요 1:18 비교), 이 수사적 표현은 식사할 때 사람이 친구의 품에 등을 댈 수 있는 자세로 기대앉는 관습에서 유래되었다.—요 13:23-25.
(20) 아무 쓸모없는 종(누 17:7-10). 이 예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 교훈이 10절에 나온다.
주인의 밭에서 일한 종은 흔히 주인이 저녁 식사를 할 때 섬기는 일도 하였다. 종은 평소에 주인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식사했으며, 또한 종들 중에 누가 주인을 시중드는 영예를 차지할 것인지가 종종 논쟁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식사 때 주인을 시중드는 것은 가외의 짐으로 여겨지기는커녕 주인에 대한 당연한 책무로 여겨졌다.
(21) 과부와 재판관(누 18:1-8). 1절에서 알려 주듯이, 이 예는 “항상 기도하고 포기하지 말아야 할 필요성에 관하여” 다룬 것이다. 7절과 8절에서도 적용점을 알려 준다. 기도를 강조하는 이 예는 앞 장 20-37절에 언급된 내용을 고려할 때 특히 적절하였다.
이 재판관은 유대인의 법정과 관련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 세기에는 다음 네 종류의 유대인 법정이 있었다. (1) 세 사람으로 구성된 마을 법정. (2) 마을의 연로자 일곱 사람으로 구성된 법정. (3) 예루살렘에는 각각 23명으로 구성된 하급 법정들이 있었으며, 이와 같은 법정들은 그 밖에도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제법 큰 도시들에 세워졌다. (4) 최고 법정으로서 71명으로 구성된 대(大)산헤드린. 그 소재지는 예루살렘이었고 민족 전체에 대한 권위가 부여되어 있었다. (법정 참조) 그러나 이 예에 나오는 재판관은 적어도 3인으로 구성된 법정이 직무를 행하던 유대인 사법 제도에 부합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로마인들에 의해 임명된 재판관들이나 치안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는 하느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여론에 대한 염려로 속박되어 있지도 않았다고 분명히 언급되어 있다. 이 예는 하느님이 그 불의한 재판관과 같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과 이 재판관을 대비시키고 있다. 이 재판관이 마침내 옳은 일을 행하였다면,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더 그러하시겠는가! 이 불의한 재판관이 행동하도록 움직인 것은 과부의 끈덕진 태도였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종들도 기도와 관련해서 끈덕진 태도를 나타내야 한다. 의로우신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시어 공의가 시행되게 하실 것이다.
(22) 스스로 의로운 체한 바리새인과 참회한 세금 징수원(누 18:9-14). 이 예의 배경과 목적이 각각 9절과 14절에 나온다.
기도하러 성전에 가는 사람들은 성소나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고, 주변에 있는 뜰에 들어가는 것만 허용되었다. 유대인인 이 남자들은 아마도, 여인의 뜰이라고 불리던 바깥뜰에 서 있었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교만하고 독선적이었으며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였다. (요 7:47, 49) 그들은 모세 율법이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였다. 그들이 단식하려고 선택한 날들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정기적인 장날이었다고 하며, 그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성읍에 있게 되고 특별한 예배가 회당에서 행해지고 지방 산헤드린이 열렸다고 한다. 따라서 그들의 경건해 보이는 모습이 사람들의 눈에 잘 띄었을 것이다. (마 6:16. 마 10:17, 각주 비교) 유대인 세금 징수원들은 성전에 들어가도록 허용되기는 하였지만 로마를 위해 봉사한다는 이유로 미움을 받았다.
(23) 한 데나리온씩 삯을 받은 일꾼들(마 20:1-16). 이 예는 마태 19:27에 나오는, “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랐습니다. 우리에게는 실제로 무엇이 있겠습니까?”라는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의 일부이다. 또한 마태 19:30과 20:16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포도를 수확하는 때는 포도원 주인에게는 우려 섞인 관심을 기울이는 계절이다. 수확하는 전체 기간 동안 고용되는 일꾼들도 있고, 필요가 생기는 대로 고용되는 일꾼들도 있다. 하루가 끝날 때 품삯을 지불하는 것은 모세 율법과 조화되며, 이것은 가난한 품꾼에게 꼭 필요한 일이었다. (레 19:13; 신 24:14, 15) 하루 품삯으로 지불된 한 데나리온은 로마의 은화였다. 현대의 가치로 환산하면 74센트에 해당할 것이다. 기원 1세기에 유대인들은 일출부터 일몰까지의 낮을 12등분하였다. 따라서 제삼 시는 오전 8-9시경, 제육 시는 오전 11-12시경, 제구 시는 오후 2-3시경, 제십일 시는 오후 4-5시경이 될 것이다.
(24) 미나(누 19:11-27). 기원 33년에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던 길에 말씀하신 예. (누 19:1, 28) 11절에 언급되어 있듯이, 이 예를 말씀하신 이유는 ‘그들이 하느님의 왕국이 즉시 나타날 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 제국에서는 귀족 출신인 사람이 왕권을 구하러 로마로 여행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헤롯 대왕의 아들인 아르켈라오스도 그렇게 한 바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아르켈라오스를 고발하기 위해서, 그리고 가능하다면 왕권을 획득하려는 그의 시도를 좌절시키기 위해서 아우구스투스의 법정에 50명의 대사를 파견하였다. 처음에 각 종에게 주어졌던 은 1미나는 오늘날의 가치로 환산하면 65.40달러가 되겠지만 당시에는 88일간의 품삯에 해당하였다.
(25) 두 아들(마 21:28-31).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말씀하신 이 예는 23절에 나오는, “당신은 무슨 권위로 이 일들을 하시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 권위를 주었소?”라는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의 일부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질문에 응수하시면서 종교 지도자들이 실제로 어떤 사람들인지를 보여 주시기 위해 몇 가지 예를 드셨다.
예수께서는 마태 21장 31절과 32절에서 자신의 예의 적용점을 지적하신다. 예수의 말씀에 따르면, 예수께서 말씀하시던 상대였던 영향력 있는 수제사장들과 연로자들, 즉 하느님을 섬긴다고 공언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는 자들은 둘째 아들에 비하여졌다. 한편 침례자 요한을 믿은 세금 징수원들과 창녀들은 첫째 아들과 같았다. 그들은 처음에는 무례하게도 하느님을 섬기기를 거절했지만 나중에는 뉘우치고서 자기들의 행로를 바꾸었다.
(26) 살인을 자행한 경작자들(마 21:33-44; 막 12:1-11; 누 20:9-18).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죽임을 당하시기 불과 3일 전에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말씀하신 예. 이 예 역시 예수의 권위의 근원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 대답해 주신 것이다. (막 11:27-33) 그 예를 말씀하신 직후에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께서 자기들에 관하여 말씀하신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복음서 기록은 기술한다.—마 21:45; 막 12:12; 누 20:19.
포도원 둘레에 친 울타리는 돌담이었을 수도 있고(잠 24:30, 31), 산울타리였을 수도 있다. (사 5:5) 포도주 통은 흔히 바위를 깎아 파서 만들었으며 두 단으로 되어 있어서 포도즙이 윗단에서 아래단으로 흘러내리게 되어 있었다. 망대는 도둑이나 동물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파수꾼이 망을 보는 곳이었다. 고용된 경작자들이 일정량의 과일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혹은 경작자가 토지 임대료를 지불하거나 주인에게 일정량의 소출을 주기로 합의한 경우도 있었는데, 이 예의 경우는 후자인 것으로 보인다. 경작자들은 포도원을 만든 사람이 외국에 있으므로, 상속자인 아들을 살해하면 포도원을 자기들의 소유로 삼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사야 5:1-7에서는 “여호와의 포도원”이 “이스라엘 집”이라고 알려 준다. 복음서 필자들이 알려 주듯이, 예수께서는 이 예를 이해하는 열쇠로서 시편 118:22, 23을 인용하셨다.
(27) 왕의 아들을 위한 결혼 잔치(마 22:1-14). 1절에서 시사하듯이, 이 예는 앞서 있은 논의의 연장으로서 예수께서 무슨 권위로 그 일을 하는지를 묻는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의 일부이다. (마 21:23-27) 적용점을 알려면 2절과 14절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 일이 있기 몇 달 전에,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이 초대받은 성대한 만찬에 관한 유사한 예를 드신 바 있다. 초대받은 사람들은 그때 다른 일들에 몰두한 나머지 초대한 사람을 무시하였다. (누 14:16-24) 예수께서는 죽으시기 불과 3일 전인 이번에는, 오려는 자진성이 없는 태도뿐만이 아니라 초대받은 사람들 중 일부가 나타낸 살의에 대해서도 말씀하신다. 그들이 왕의 대리자들을 살해한 것은 반역에 해당하였으므로 왕의 군대가 그 살인자들을 멸하고 그들의 도시를 불살라 버렸다. 이것은 왕실의 결혼식이었으며, 이와 같은 경우에 결혼식의 주인인 왕은 손님들에게 특별한 예복을 제공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손님들 가운데 하나가 결혼식 예복을 입지 않은 것은 예복이 그에게 제공되었을 때 그가 왕이 제공한 그 예복을 물리쳤음을 시사한다.
(28) 열 처녀(마 25:1-13). “하늘 왕국”과 관련된 이 예는 마태 24:3에 기록된, 예수의 제자들이 한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의 일부이다. 이 예의 목적은 마태 25:13에서 분명히 볼 수 있다.
그 당시 결혼식의 중요한 특징은 격식을 갖추어 신부를 신부의 아버지 집에서 신랑의 집이나 신랑의 아버지 집으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제일 좋은 옷을 차려입은 신랑은 친구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저녁에 자기 집을 떠나 신부의 아버지 집으로 갔다. 신부의 아버지 집에서부터, 악사들과 노래하는 사람들을 비롯하여 대개 등불을 든 사람들도 동반한 행렬이 신랑의 집을 향하여 나아갔다. 연도에 있는 사람들은 그 행렬에 큰 관심을 나타냈으며 일부 사람들이, 특히 등불을 든 처녀들이 그 행렬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렘 7:34; 16:9; 사 62:5) 그 행렬은 특별히 서두를 것이 없었으므로 늦게까지 지체될 수도 있었으며, 따라서 길가에서 기다리던 일부 사람들은 졸다가 잠이 들 수도 있었다. 꽤 멀리서도 노랫소리와 크게 기뻐하는 소리가 들렸을 것이며, 그 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자, 신랑이다!” 하고 외쳤을 것이다. 뒤이어 신랑과 그 일행이 집으로 들어가 문을 닫은 후에는 너무 늦어서 지각한 손님들이 들어갈 수 없었다. 등불을 들고 행렬을 따르다 보면 기름이 연소되어 종종 다시 채워 줄 필요가 있었다.
(29) 달란트(마 25:14-30). 외국으로 여행을 떠나려고 하는 한 사람에 관한 이 예는 예수께서 죽으시기 불과 3일 전에 네 명의 제자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죽으신 뒤 얼마 안 있어 하늘로 올라가시게 되어 있었다. 이 예 역시 마태 24:3에 나오는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의 일부이다.—막 13:3, 4.
각각의 종에게 한 미나씩만 주어졌던 미나의 예와는 달리, 이 예에서는 “각자에게 그 능력에 따라” 달란트가 주어졌다. (누 19:11-27) 여기서 언급된 것으로 보이는 은 달란트는 그 당시 품꾼이 자그마치 20년가량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이었을 것이다. 종들은 모두 주인의 재산에 관심을 가져야 했으며, 따라서 자기들에게 맡겨진 주인의 재산을 가지고 부지런하고 지혜롭게 장사해야 하였다. 그들은 최소한 그 돈을 은행가들에게 맡겨야 하였다. 그러면 그들 자신은 주인의 재산을 늘릴 마음이 없더라도 돈을 완전히 놀리는 대신 이자는 받을 것이었다. 그러나 악하고 게으른 종은 자기에게 맡겨진 달란트를 땅속에 숨김으로써 사실상 주인의 이익에 반대되게 행하였다.
(30) 양과 염소(마 25:31-46). 31, 32, 41, 46절에 기술되어 있듯이, 이 예에서는 사람의 아들이 자기의 영광 중에 도착할 때 모든 나라 사람들을 분리하고 심판할 것을 예시한다. 이 예는 ‘예수의 임재와 사물의 제도의 종결의 표징’과 관련된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께서 하신 대답의 일부이다.—마 24:3.
중동에서 양과 염소는 일반적으로 함께 풀을 뜯으며, 목자는 이 두 종류의 동물을 분리하고 싶을 때는 쉽게 구분한다. 예수께서 이 예 가운데서 염소를 언급하셨다고 해서 이 동물의 가치를 떨어뜨리신 것은 아니다. (연례 속죄일에 이스라엘을 위하여 죄를 속죄하는 데 염소의 피가 사용되었다.) 따라서 염소는 단순히 한 반열의 사람들을 상징하고 양도 또 다른 반열의 사람들을 상징할 뿐이다. “양”이 놓여진 “오른편”은 영예로운 위치이다. (행 2:33; 엡 1:19, 20) “염소”가 놓여진 “왼편”은 영예롭지 않은 위치를 나타낸다. (전 10:2 비교) 왕좌에 앉은 ‘사람의 아들’의 오른편에 있게 된 “양”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들”과는 다르게 묘사되어 있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양은 그리스도의 형제들에게 친절한 행동을 나타냈다.—마 25:34-40; 히 2:11, 12.
계시록 계시록은 성경의 마지막 책으로서, 성서 전체에서 가장 빈번하게 예가 나오는 책 가운데 하나이다. 필자인 요한 자신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표징들로” 그에게 주어진 것이다. (계 1:1) 그러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성서는 적절한 예들을 사용하는 면에서 뛰어난 책이라고 진실로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사용한 예들 그리스도인 성서 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예들을 기록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예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사도 바울이 아테네의 비유대인들에게 말하면서 사용한 훌륭한 예들을 기록한다. 바울은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정성의 대상과 그들 자신의 시인들이 쓴 글에 대해 언급하였다. (행 17:22-31) 히브리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동일한 사도(일반적으로 바울은 이 편지를 쓴 사람으로 여겨짐)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대하신 역사로부터 예들을 이끌어 내 자유자재로 사용하였다. 또한 그리스 스포츠에 익숙한 고린도 사람들에게 말하면서, 바울은 그리스도인 행로를 경주에 비하였다. (고첫 9:24-27) 두드러진 예로서 올리브나무의 예가 있는데, 이 예에는 자기만족에 대한 경고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지력으로 하느님께 신성한 봉사를 드리라는 권고가 담겨져 있다.—로 11:13-32; 12:1, 2.
예수의 이부동생 야고보는 자신의 편지 속에 일상생활의 일반적인 상황을 훌륭하게 엮어 넣으면서 거울을 보는 사람, 말에 물리는 재갈, 배의 키 등을 언급하는데, 그것은 영적인 진리를 충분히 이해시키기 위해서였다. (야 1:23, 24; 3:3, 4) 베드로와 유다는 성령에 감동되어 소식을 전달하면서, 실례를 들어 그 소식을 설명하기 위해 이전의 영감받은 기록들에 들어 있는 사건들을 빈번하게 참조하였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은 이 모든 훌륭한 예들은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를 살아 있는 책으로 만들기 위한 목적에 기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