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것인가?
“어머니가 주신 것입니다.” “남자답지 않습니까?” “장신구로 달고 다닙니다.” “없으면 불안한 느낌이 듭니다.” “해를 당하지 않게 나를 지켜 줍니다.” “목걸이로 달고 다니는 장신구에 불과합니다.”
십자가를 달고 다니는 이유에 대한 질문에 여러 사람들은 위와 같이 대답하였다. 물론 모두가 종교적인 정성의 표라고는 할 수 없지만, 십자가를 달고 다니는 것은 세계 도처에서 상당히 유행하고 있다. 심지어 소련에서도 젊은이들이 십자가를 달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에 대해 깊은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는데, 그 이유는 한 젊은이가 이처럼 간단 명료하게 말한 바와 같다. “십자가는 신성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십자가를 달고 다니는 것이 참으로 합당한가?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방법을 정확하게 묘사하는가? 또한 장신구로 십자가를 달고 다니는 것까지 반대할 만한 타당한 근거가 있는가? 이와 같은 것을 알아보기 위해서 먼저 십자가의 기원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리스도교의 상징?
그리스도인이 최초로 십자가를 사용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메리카나 백과사전」은 “십자가는 고대에 인도와 중국에서 힌두교도나 불교도가 사용하였으며, 또한 페르시아인, 앗시리아인 및 바빌로니아인도 사용하였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챔버스 백과사전」(1969년판)은 십자가가 “그리스도교 시대 훨씬 이전에 이미 종교적 신비주의적 의미가 부여된 상징물이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초기 그리스도인이 숭배에서 십자가를 사용하였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그리스도교의 초창기에 십자가를 사용하였던 사람들은 다름아닌 이교도인 로마인이었다! 「컴패니언 성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 십자가는 바벨론의 태양신, ··· 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으며, 기원전 100-44년에 살았던 줄리우스 시저의 주화에 처음 나오고 다음에는 시저의 후계자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20년에 만든 주화에 나온다.” 로마의 자연신, 박쿠스는 때때로 수많은 십자가가 그려진 머리 띠를 두르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면, 어떻게 십자가가 그리스도교국의 상징이 되었는가?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십자가
기원 312년에, 지금의 프랑스와 영국에 해당하는 지역을 통치하던 콘스탄티누스는 그의 처남인 이탈리아의 막센티우스와의 전쟁에 나서게 되었다. 도중에 콘스탄티누스는 환상—“이것으로 승리하라”를 의미하는 “호크 빈케 (Hoc vince),”라는 글자가 새겨진 십자가를 보았다고 한다. 승전 후에, 콘스탄티누스는 십자가를 군기(軍旗)로 삼았다. 후에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을 때, 십자가는 교회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그와 같은 환상이 실제로 있었는가? 이 전설에 대한 보고는 간접적인 것에 불과하며, 모순점으로 가득 차 있다. 솔직히 말해서, 콘스탄티누스 만큼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는 그 당시, 그는 태양신의 열렬한 숭배자였다. 심지어 콘스탄티누스는 일요일을 태양의 숭배일로 공포하기까지 하였다. 이른바 개종 후의 그의 행실에서도 의로운 원칙에 대한 진실한 헌신의 증거를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다. 그의 인생은 살인, 음모 및 정치적 야심으로 점철되었다. 콘스탄티누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교는 분열된 제국을 연합시키기 위한 정치적 수단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또한 콘스탄티누스가 “보았다”는 유형의 십자가가 실제로 그리스도를 처형하는 데 사용되었던 도구라고 단언할 만한 증거도 전혀 없다. 후에 콘스탄티누스가 발행한 많은 주화에는 X 자 모양에 “P”자를 포개어 놓은 십자가가 찍혀 있다. (삽화 참조.) W. E. 바인 저, 「신약 단어 해설 사전」(An Expository Dictionary of New Testament Words)은 이렇게 말한다. “콘스탄티누스가 환상에서 보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옹호하게 되었다고 단언하는 문자인 카이 (Chi) 즉 X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희랍어로] ‘그리스도’라는 단어의 머리 글자이며,” 처형 도구로서의 “‘십자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사실상, 그러한 양식의 십자가는 태양을 섬기던 이교도들의 상징물과 거의 일치한다.
그러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십자가를 그토록 쉽사리 받아들였는가? 바인의 「사전」은 이렇게 계속 설명한다. “주후 제 3세기 중엽에, 여러 교회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어떤 교리를 버렸거나 곡해하였다. 배도한 교회 제도의 위신을 증가시키기 위하여 이교도들을 믿음의 갱신 없이도 교회에 받아들였으며 이교도들의 표지와 상징물들을 대부분 그대로 유지하게 하였다. 그래서 가장 흔한 형태의 타우 (Tau) 즉 T에서 가로선을 낮춘 것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십자가의 발전
지금에 이르기까지 십자가를 그와 같이 숭배의 대상으로 삼게 된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는가? 「종교 윤리 백과사전」(Encyclopaedia of Religion and Ethics)은 이렇게 말한다. “4세기에는, 주술적인 신앙이 교회 내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하였다.” 주술적인 주문을 하며, 단지 십자를 긋는 일만으로도 “악귀를 대항하는 가장 확실한 보호책이자 만병 통치약”으로 여겨졌다. 이렇게 미신적으로 십자가를 사용하는 일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오랜 세월에 걸쳐서, 약 400가지의 상이한 양식의 십자가가 발전되어 왔다. 처음부터 그리스도가 묘사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한 젊은이가 보석으로 장식된 십자가를 들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곤 하였다. 후에는 어린 양이 포함되었다. 기원 691년에 트룰로에서 열린 공의회는 십자가 위에 어린 양 대신에 젊은 남자의 상반신이 나오는 십자가를 “공인”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묘사되어 있는 십자가상으로 발전되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셨는가?
‘하지만 성서는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가르치지 않는가?’ 하고 질문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 대답을 알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처형되신 도구를 묘사하는 데 성서 필자들이 사용한 두 희랍어 단어—스타우로스와 크실론—의 의미를 조사해 보아야 한다.
「국제 표준 성서 백과사전」(The International Standard Bible Encyclopedia) (1979)은 “십자가”라는 제하에 이렇게 말한다. “원래의 희랍어 스타우로스는 땅에 고정시켜 놓은 뾰족한 수직 나무 기둥을 가리킨다. ··· 그것은 나란히 한 줄로 세워서 거주지 주변의 울타리나 방책을 만들거나 혹은 하나를 따로 세워 심각한 범법자를 공개적으로 매달아 죽이는 (혹 이미 죽었다면, 그 시체에 철저하게 모독을 돌리기 위한) 형구(刑具)로 사용되었다.”
사실상, 로마인은 라틴어로 크룩스라고 하는 처형 도구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 크룩스라는 단어가 스타우로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라틴어 단어 크룩스와 영어 단어 크로스[십자가]가 비슷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은 크룩스는 당연히 가로 막대가 있는 기둥일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였다. 그러나, 「임패리얼 성서 사전」(The Imperial Bible-Dictionary)은 이렇게 말한다. “심지어 로마 시대에도 크룩스(이 단어에서 크로스라는 단어가 유래하였음)는 원래 곧은 장대를 의미하였던 것 같다. 또한 이것이 언제나 이 단어의 주된 의미였다.”
「비그리스도교 십자가」(The Non-Christian Cross)라는 책은 이렇게 덧붙인다. “희랍어 원어에서 예수의 경우에 사용된 스타우로스[장대 혹은 기둥]가 평범한 스타우로스가 아니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거하는 문장은 신약을 형성하는 많은 기록 가운데 단 하나도 없다. 스타우로스가 한 토막이 아니라 십자 형태로 가로질러 못박은 두 토막으로 되어 있다는 증거는 더구나 찾아볼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크룩스 심플렉스로 불리는 크룩스(스타우로스) 형태의 것에 못박히셨을 가능성이 크다. 그것이 바로 16세기의 로마 가톨릭 학자인 유스투스 립시우스가 그림으로 묘사한 기둥과 같은 것이었다.
다른 희랍어 단어, 크실론은 어떠한가? 그 단어는 희랍어 「칠십인역」 성서 에스라 6:11에서 사용되었다. 「한글 개역판」은 다음과 같다. “내가 또 조서를 내리노니 무론 누구든지 이 명령을 변개하면 그 집에서 들보[재목, 신세]를 빼어내고 저를 그 위에 매어달게 하고 그 집은 이로 인하여 거름더미가 되게 하라.” 분명히 하나의 막대 혹은 “재목”이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신약) 번역자의 상당수가 사도 행전 5:30에 나오는 베드로의 말을 이렇게 번역한다. “너희가 나무[「흠정역」, 「신국제역」, 「예루살렘 성서」 및 「개역 표준역」도 동일함]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셨느니라.]” (사체로는 본지에서.) 독자는 아마도 자신의 성서로 크실론이 어떻게 번역되어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 행전 10:39; 13:29; 갈라디아서 3:13; 베드로 전서 2:24을 보기 바란다.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
그리스도께서 실제로는 기둥에서 죽으셨다는 이상의 증거를 고려한 후에도 여전히 십자가를 달고 다니는 것이 하나도 나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아마 ‘그것은 장신구에 불과하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역사를 통해서 십자가가 사용된 방법을 생각해 보라. 그것은 이교 숭배와 미신적 외경의 대상이었다. 십자가를 단지 장신구로 달고 다닐지라도, 고린도 전서 10:14에 나오는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고 한 사도 바울의 경고와 일치하게 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오늘날의 참 그리스도인은 어떠한가? 참 그리스도인도 성서의 충고대로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여야 한다. (요한 1서 5:21) 따라서 참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달기에 적합한 장신구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는 바울의 말을 상기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된 즉위하신 왕으로 생각하고자 한다!—갈라디아 3:13; 계시 6:2.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달고 다니지 않지만,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하여 죽으신 것에 대해 깊은 인식을 나타낸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희생이 “하나님의 능력”과 영원한 사랑을 놀랍게 보여준 것임을 알고 있다. (고린도 전 1:18; 요한 3:16) 하지만, 이 사랑의 하나님을 숭배하기 위해 십자가와 같은 눈에 보이는 사물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울이 권고한 바와 같이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고린도 후 5:7.
[22면 삽화]
여러 세기를 거치면서 십자가는 여러 가지 모양과 형태로 발전되었다
[23면 삽화]
벌거벗기워져 산 채로 나무 기둥에 매달려진 희랍신, 마스야스 상—파리, 루브르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