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Paul) [적은, 작은]
베냐민 지파에 속한 이스라엘 사람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엡 1:1; 빌 3:5) 아마 이 사도는 어렸을 때부터 히브리어식 이름 사울과 로마식 이름 바울을 둘 다 가지고 있었던 것 같지만(행 9:17; 베둘 3:15), 비유대인들에게 좋은 소식을 선포해야 하는 자신의 사명을 고려하여 로마식 이름을 사용하기로 했던 것 같다.—행 9:15; 갈 2:7, 8.
바울은 길리기아의 탁월한 도시인 타르수스에서 태어났다. (행 21:39; 22:3) 그의 부모는 히브리 사람들이었으며, 아마 유대교의 바리새파를 신봉했던 것 같다. (행 23:6; 빌 3:5) 그는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는데(행 22:28), 아마 그의 아버지가 봉사를 제공하고 시민권을 받은 것 같다. 바울은 아마 천막 만드는 일을 아버지에게서 배웠을 것이다. (행 18:3) 하지만 예루살렘에서 그는 학식 있는 바리새인인 가말리엘로부터 교육을 받았는데, 이 사실은 바울이 탁월한 가문 출신이었음을 시사한다. (행 22:3; 5:34) 언어에 대해 말하자면, 바울은 적어도 그리스어와 히브리어에 능통하였다. (행 21:37-40) 바울은 선교인으로 여행할 때 독신이었다. (고첫 7:8) 이 기간 이전은 아니라 해도 대체적으로 이 기간에는, 그의 누이 한 명과 조카 한 명이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다.—행 23:16-22.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의 책이나 편지를 다른 누구보다도 많이 기록하는 특권을 누렸다. 그는 초자연적인 환상을 받았으며(고둘 12:1-5), 성령을 통하여 여러 방언으로 말할 수 있었다.—고첫 14:18.
박해, 개종, 초기 봉사의 직무 성서 기록에 처음 등장할 때 사울 또는 바울은 “젊은이”였는데, 그리스도의 제자 스데반을 돌로 친 거짓 증인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그의 발치에 놓았다. (행 6:13; 7:58) 바울은 스데반이 살해된 것을 좋게 여겼으며, 전통을 중시하는 잘못된 방향의 열심 때문에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에 대한 사악한 박해 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그들이 처형될 때 찬성표를 던졌다. 그들이 회당들에서 재판을 받을 때, 그는 그들을 강제로 변절시키려고 하였다. 그는 박해를 예루살렘 이외의 도시들에까지 확장시켰으며, 심지어는 멀리 북쪽 시리아 다마스쿠스에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들까지 찾아낸 뒤 묶어 예루살렘으로 끌어 와서 아마도 산헤드린에 의해 재판을 받게 하려고 대제사장에게서 허가서를 받아 냈다.—행 8:1, 3; 9:1, 2; 26:10, 11; 갈 1:13, 14.
바울이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갔을 때, 그리스도 예수께서 눈부신 빛 가운데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그가 본 것들과 앞으로 보게 될 것들의 시중드는 사람과 증인이 되라는 사명을 주셨다. 바울과 함께 있던 사람들도 이 현시 때문에 땅에 쓰러졌고 누군가가 말하는 소리를 들었지만, 바울만이 그 말을 알아들었고 눈이 멀어서 다마스쿠스까지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행 9:3-8; 22:6-11; 26:12-18) 사흘 동안 그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그다음에 다마스쿠스에 있는 유다라는 사람의 집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바울은 환상 가운데 그리스도의 제자 아나니아가 들어와서 자신의 시력을 되찾게 해 주는 것을 보았다. 그 환상이 실현되었을 때, 바울은 침례를 받고 성령을 받았으며, 음식을 먹고 힘을 얻었다.—행 9:9-19.
사도행전 9:20-25에 있는 기록은 바울이 다마스쿠스에서 제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 일 그리고 “곧” 그곳의 회당들에서 전파하기 시작한 일에 관해 묘사한다. 그 기록은 그를 죽이려는 음모 때문에 그가 어쩔 수 없이 다마스쿠스를 떠나게 되었을 때까지 그가 전파 활동을 수행한 일을 묘사한다. 한편,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그가 개종하고 나서 아라비아로 갔다가 그다음에 다마스쿠스로 돌아온 일에 관해 언급한다. (갈 1:15-17) 이 여러 사건들의 순서 가운데 정확히 어느 시점에 아라비아로 여행했는지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바울은 개종 직후에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뜻에 관해 묵상하려고 아라비아에 갔을지 모른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누가가 사용한 “곧”이라는 표현은 바울이 다마스쿠스로 돌아와서 그곳에 있는 제자들과 연합한 뒤 곧 전파하기 시작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갈라디아 1:17에서 바울은 자기가 즉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았으며, 그 초기 기간에 자기가 갔던 다마스쿠스 이외의 장소는 아라비아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아라비아로 갔던 일이 반드시 개종 직후의 일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이 먼저 다마스쿠스에서 며칠을 보낸 뒤에 신속히 회당들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표현함으로 자신이 반대하던 이전의 행로를 중단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밝혔을 가능성이 있다. 그 뒤에 아라비아로 여행했다가(이 여행의 실제 목적은 밝혀져 있지 않음) 돌아와서 다마스쿠스에서 계속 전파했고, 그 일에서 더 강력해져서 그의 반대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할 정도까지 되었을 수 있다. 이 두 기록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충해 준다. 단 한 가지 남은 문제는 사건들의 정확한 순서에 관한 것인데, 그 점이 밝혀져 있지 않을 뿐이다.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아마 기원 36년. 갈라디아 1:18에 언급된 삼 년은 만 삼 년이 아니라 햇수로 삼 년일 것임), 바울은 그곳에 있는 형제들이 자기가 제자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바나바가 도우러 와서 그를 사도들에게 인도”했는데, 아마 베드로와 “주의 형제 야고보”에게 인도했던 것 같다. (야고보는 12사도 가운데 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사도라고 불릴 수 있었는데, 예루살렘 회중의 사도였기 때문이다.) 바울은 게바(베드로)와 함께 15일 동안 머물렀다. 예루살렘에 있는 동안, 바울은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말하였다. 그래서 그리스어를 말하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했는데, 형제들은 그것을 알게 되어 “그를 카이사레아로 데리고 내려가서 타르수스로 보냈다.”—행 9:26-30; 갈 1:18-21.
바울은 (기원 41년경) 초자연적인 환상을 경험하는 특권을 받은 것 같다. 그 환상이 너무 생생해서 자기가 “셋째 하늘”로 이끌려 간 것이 몸 안에서였는지 몸 밖에서였는지 모를 정도였다. “셋째 하늘”이란 최상의 통치 형태인 메시아 왕국을 가리키는 말인 것 같다.—고둘 12:1-4.
후에 바나바는 사울을 타르수스에서 데리고 와서 안티오크에서 그리스어를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일하는 것을 돕게 하였다. 안티오크에서 일 년간 수고한 뒤인 기원 46년경에, 바울과 바나바는 회중에 의해 예루살렘으로 파견되어 그곳 형제들을 위한 구제 봉사 물자를 가지고 갔다. (행 11:22-30) 그들은 요한 마가를 동반하여 안티오크로 돌아왔다. (행 12:25) 그 후에 성령은 특별한 일을 위해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우라고 지시하였다.—행 13:1, 2.
일 차 선교 여행 (2권, 747면 지도) 성령의 지시가 있은 뒤에,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요한 마가를 시중드는 사람으로 데리고 자신의 일 차 선교 여행을 시작하였다(기원 47-48년경). 그들은 안티오크의 외항인 셀레우키아에서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갔다. 키프로스의 동쪽 해안에 위치한 살라미스에 있는 회당들에서,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널리 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그 섬을 가로질러서 서쪽 해안의 파포스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주술사 엘루마는 속주 총독 세르기오 바울로가 증거를 받지 못하도록 반대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엘루마가 일시적으로 눈이 멀게 하였다. 일어난 일을 보고 크게 놀란 세르기오 바울로는 믿는 사람이 되었다.—행 13:4-12.
바울과 그의 일행은 파포스에서 배를 타고 소아시아로 향하였다. 그들이 팜필리아라는 로마 속주에 있는 페르가에 도착했을 때, 요한 마가는 그들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북쪽 피시디아에 있는 안티오크로 향하였다. 그곳에서 관심을 보인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유대인들의 선동으로 결국 그들은 도시 밖으로 쫓겨났다. (행 13:13-50) 그들은 두려움 없이 남동쪽으로 여행하여 이코니온에 도착했는데, 그곳에서도 유대인들이 무리를 선동하여 그들을 반대하게 하였다. 바울과 바나바는 자기들을 돌로 치려는 시도가 있다는 것을 알고 리카오니아 지방에 있는 리스트라로 도피하였다. 바울이 날 때부터 다리가 불구인 한 남자를 고쳐 주자, 리스트라의 주민들은 바울과 바나바가 사람의 모습을 한 신들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후에 이코니온과 피시디아 안티오크에서 온 유대인들이 무리로 하여금 바울을 반대하게 하였다. 그들은 그를 돌로 쳤으며, 그가 죽은 줄로 생각하고 그를 도시 밖으로 끌어냈다. 하지만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둘러싸자, 바울은 일어나서 리스트라로 들어갔다. 다음 날 그와 바나바는 데르베로 떠났다. 그곳에서 많은 제자들을 삼은 뒤에, 그들은 리스트라, 이코니온, (피시디아의) 안티오크로 돌아가서, 형제들을 강하게 하고 격려하고 장로들을 임명하여 이 도시들에 설립된 회중들에서 섬기게 하였다. 후에 그들은 페르가에서 전파한 다음 아탈리아 항구에서 배를 타고 시리아 안티오크로 떠났다.—행 13:51–14:28.
할례 문제 유대에서 온 어떤 사람들이 (기원 49년경에) 안티오크에 와서, 비유대인들이 구원을 받으려면 모세의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것을 논박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사도였지만 자기가 그 문제를 떠맡아서 자기 자신의 권위로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바나바와 디도와 그 밖의 사람들을 동반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문제를 사도들과 그곳 회중의 연로자들 앞에 제시하였다. 그때 내려진 결정은, 이방인 신자들에게 할례가 요구되지 않으며 다만 그들이 우상 숭배와 피를 먹고 마시는 일과 성적 부도덕을 계속 멀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결정을 밝히는 편지를 마련하는 것에 더하여, 예루살렘 회중의 형제들은 유다와 실라를 자신들의 대표자로 파견하여 안티오크에서 그 문제를 명확히 설명해 주게 하였다. 또한 베드로(게바), 요한, 제자 야고보와 논의하는 가운데, 바울과 바나바가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계속 전파해야 한다는 점에 의견이 일치되었다.—행 15:1-29; 갈 2:1-10.
이로부터 얼마 뒤에, 베드로는 개인적으로 시리아 안티오크에 와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교제하였다. 하지만 예루살렘의 어떤 유대인들이 도착했을 때, 그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 굴복한 듯한데, 비유대인들에게서 떨어져 있음으로, 하느님께는 육체상의 구별이 중요하지 않다는 영의 지도와 상충되게 행동하였다. 심지어 바나바도 그릇된 행동에 이끌렸다. 바울은 이것을 보고 용기 있게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질책하였다. 그의 행동은 그리스도교의 진보에 해로운 영향을 끼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갈 2:11-14.
이 차 선교 여행 (2권, 747면 지도) 후에 바울과 바나바는 자기들이 일 차 선교 여행 중에 전파한 도시들에 있는 형제들을 방문할 생각을 하였다. 요한 마가가 먼젓번에 그들을 두고 떠났기 때문에 그를 함께 데리고 갈 것인지의 여부를 놓고 논쟁이 벌어져서, 그 결과로 바울과 바나바는 갈라서게 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실라(실루아노)를 선택하고 시리아를 거쳐 소아시아로 들어가 여행하였다(기원 49-52년경). 아마 리스트라에서, 바울은 디모데라는 젊은이가 자기와 함께 가도록 마련하고 또한 그에게 할례를 베풀었다. (행 15:36–16:3) 할례가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사항은 아니었지만, 부모 중 한쪽이 유대인인 디모데가 할례받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게 되면, 틀림없이 유대인들이 바울의 전파 활동에 대해 편견을 갖게 될 것이었다. 따라서 바울은 장애물이 될 수도 있는 이 요인을 제거함으로써, 자신이 후에 고린도 사람들에게 쓴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처럼 되었다’는 말과 일치하게 행동하였다.—고첫 9:20.
바울은 에게 해에 닿은 트로아스에서 어느 날 밤 환상 가운데 어떤 마케도니아 사람이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는 것을 보았다. 바울과 그의 선교 동료들은 의사 누가와 함께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결론짓고, 배를 타고 유럽에 있는 마케도니아로 떠났다. 마케도니아의 주요 도시인 빌립보에서 루디아와 그의 집안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이 되었다. 바울이 한 소녀에게서 악귀를 쫓아내어 그 소녀가 예언하는 능력을 잃게 만든 일 때문에, 바울은 실라와 함께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지진이 일어나서 그들의 결박이 풀렸으며, 간수와 그의 집안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바울이 자기의 로마 시민권을 근거로 강력하게 주장하자, 행정관들이 직접 와서 사도 바울과 실라를 감옥에서 데리고 나갔다. 바울과 그의 일행은 형제들을 격려한 뒤에, 암피폴리스와 아폴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로 여행하였다. 그곳에서 믿는 사람들의 회중이 생겨나게 되었다. 하지만 질투에 가득 찬 유대인들이 바울을 반대하는 소요를 선동하였다. 이 때문에 형제들은 바울과 실라를 베레아로 보냈다. 그곳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이 되었지만, 데살로니가에서 온 유대인들이 문제를 일으켜 바울은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행 16:8–17:14.
형제들은 사도 바울을 아테네까지 안내해 주었다. 바울은 그곳의 장터에서 전파하다가 아레오바고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의 변명을 듣고, 그 법정에 모인 재판관들 가운데 한 명인 디오누시오와 그 밖의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행 17:15-34) 다음에 바울은 고린도로 가서, 유대인 부부인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집에 함께 머물면서 그들과 함께 시간제로 천막 만드는 일을 하였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보내는 두 통의 편지를 고린도에서 쓴 것 같다. 고린도에서 일 년 반 동안 가르치고 회중을 설립한 뒤에, 그는 유대인들에 의해 갈리오 앞에 고발을 당하였다. 그러나 갈리오는 이 소송을 기각시켰다. (행 18:1-17) 후에 바울은 배를 타고 카이사레아로 가다가, 먼저 에베소에 들러 그곳에서 전파하였다. 카이사레아에서 사도 바울은 “올라가서 회중에게 인사”했는데, 이 회중은 틀림없이 예루살렘에 있는 회중을 가리킬 것이다. 그런 다음에 그는 시리아 안티오크로 갔다. (행 18:18-22) 그는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일찍이 고린도에서 썼거나 어쩌면 이때 시리아 안티오크에서 썼을 것이다.
삼 차 선교 여행 (2권, 747면 지도) 바울은 삼 차 선교 여행 중에(기원 52-56년경) 에베소를 다시 방문하여 그곳에서 약 삼 년 동안 수고하였다. 에베소에서 그는 고린도 사람들에게 보내는 첫째 편지를 썼으며,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을 돕도록 디도를 파견한 것 같다. 은세공인 데메드리오의 선동으로 바울을 반대하는 소요가 있은 뒤에,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 마케도니아로 향하였다. 디도를 통하여 고린도의 소식을 듣게 된 바울은, 마케도니아에서 고린도 사람들에게 보내는 둘째 편지를 썼다.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에 있는 형제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궁핍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기부한 것을 가지고 유럽을 떠나기 전에, 그리고 필시 고린도에 있었을 때, 바울은 로마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을 것이다.—행 19:1–20:4; 로 15:25, 26; 고둘 2:12, 13; 7:5-7.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트로아스에서 강연을 했으며 사고로 죽은 유두고를 부활시켰다. 그는 또한 밀레투스에 들러서 에베소 회중의 감독자들과 만나 아시아 지역에서 자신이 수행한 봉사의 직무를 회고하고 자신의 모범을 본받도록 그들을 격려하였다.—행 20:6-38.
체포 바울이 여행을 계속할 때, 도중에서 만난 그리스도인 예언자들은 속박이 예루살렘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고 예언하였다. (행 21:4-14. 행 20:22, 23 비교) 그들의 예언은 성취되었다. 바울이 자기 자신을 의식상으로 깨끗이 하기 위해 성전에 있을 때,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에 대한 집단 폭력을 선동하였다. 하지만 로마 군인들이 사도 바울을 구출해 주었다. (행 21:26-33) 병영으로 가는 계단을 올라가던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연설하도록 허락받았다. 그가 이방인들에게 전파하는 자신의 사명에 관해 언급하자마자 다시 난폭한 반응이 일어났다. (행 21:34–22:22) 군인들은 병영 안에서 바울의 죄가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채찍질하려고 그의 몸을 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로마 시민권에 주의를 환기시킴으로 채찍질을 막았다. 다음 날 바울에 대한 소송이 산헤드린 앞에 제시되었다. 바울은 공정한 청취를 기대할 수 없다고 느낀 듯하다. 그는 부활을 자신에 대한 소송의 쟁점으로 부각시킴으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사이에 분열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바울은 부활을 믿었고 “바리새인들의 아들”이었으므로, 자신의 신분을 바리새인으로 밝혀서,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서로 맞서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행 22:23–23:10.
죄수 신분인 바울을 죽이려는 음모 때문에 그를 예루살렘에서 카이사레아로 이송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며칠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유대인 연로자 몇 사람과 웅변가인 데르둘로가 카이사레아로 와서 총독 펠릭스 앞에 바울에 대한 소송을 제기하면서, 바울이 소요를 일으키고 성전을 더럽히려고 했다고 고발하였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 대한 그들의 고발을 지지할 증거가 없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펠릭스는 뇌물을 받기를 바라면서 바울을 이 년 동안 가두어 두었다. 펠릭스가 페스투스로 대치되었을 때, 유대인들은 다시 고발을 제기하였다. 카이사레아에서 다시 그 소송에 대한 청취가 있었는데, 바울은 재판이 예루살렘으로 옮겨지는 것을 막으려고 카이사르에게 상소하였다. 후에 바울은 왕 헤롯 아그리파 2세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진술한 다음, 얼마의 다른 죄수들과 함께 기원 58년경에 로마로 보내졌다.—행 23:12–27:1.
로마에서의 첫 번째 투옥과 두 번째 투옥 가는 도중에 바울과 그 일행은 몰타 섬에서 파선을 당하였다. 그곳에서 겨울을 난 뒤에, 그들은 마침내 로마에 도착하였다. (2권, 750면 지도) 바울은 경비병의 감시를 받기는 했지만 자기 셋집에서 머물도록 허락받았다. 바울은 도착한 지 얼마 뒤에, 유대인의 중심이 되는 자들과의 모임을 마련하였다. 하지만 단지 일부 사람들만 믿었다. 사도 바울은 이 년 동안, 즉 기원 59년경부터 61년경까지 자기에게 오는 모든 사람에게 계속 전파하였다. (행 27:2–28:31) 이 기간에 그는 또한 에베소 사람들에게(4:1; 6:20), 빌립보 사람들에게(1:7, 12-14), 골로새 사람들에게(4:18), 빌레몬에게(9절) 보내는 편지를 썼으며, 히브리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도 쓴 것 같다. (2권, 750면 삽화) 카이사르 네로는 바울의 무죄를 선고하고 그를 석방한 것 같다. 바울은 디모데와 디도와 함께 선교 활동을 재개한 것으로 보인다. 디모데는 에베소에, 디도는 크레타 섬에 남겨 둔 뒤에, 바울은 아마도 마케도니아에서, 그들의 임무와 관련해서 그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디첫 1:3; 딛 1:5) 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마지막으로 투옥되기 전에 자신의 활동을 스페인까지 확장시켰는지의 여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로 15:24) 그 투옥 기간에(기원 65년경)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둘째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에서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암시하였다. (디둘 4:6-8) 바울은 그로부터 얼마 후에 네로의 손에 순교당한 것 같다.
본받을 만한 모범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모범을 충실히 본받았으므로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었다. (고첫 4:16; 11:1; 빌 3:17) 바울은 주의를 기울여 하느님의 영의 인도에 따랐다. (행 13:2-5; 16:9, 10) 그는 하느님의 말씀의 행상인이 아니었으며, 성실함에서 우러나와 말하였다. (고둘 2:17) 바울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말하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려고 하지도 않았고(고첫 2:1-5)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갈 1:10) 그는 권리가 있는 어떤 일을 하려고 고집하지 않고, 전파하는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맞추었으며, 다른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지 않으려고 주의를 기울였다.—고첫 9:19-26; 고둘 6:3.
바울은 봉사의 직무 중에 열심히 노력하여 해로와 육로로 수천 킬로미터 이상 여행하고 유럽과 소아시아에 많은 회중을 설립하였다. 따라서 그는 잉크로 쓰여진 추천서가 필요 없었고, 살아 있는 추천서들 즉 자신의 노력을 통해 믿는 사람이 된 자들을 지적할 수 있었다. (고둘 3:1-3) 하지만 그는 자신이 종임을 겸손하게 인정했으며(빌 1:1), 좋은 소식을 선포할 의무를 느꼈다. (고첫 9:16) 바울은 스스로 영예를 취하지 않았으며, 하느님이야말로 자라게 하시는 분이고(고첫 3:5-9) 바울이 봉사의 직무를 위하여 충분한 자격을 갖추게 해 주신 분인 것으로 하느님께 모든 영예를 돌렸다. (고둘 3:5, 6) 사도 바울은 자신의 봉사의 직무를 매우 소중히 여겨 그것을 영광스럽게 했으며, 그 직무를 맡게 된 것이 하느님의 자비와 그분의 아들의 자비의 표현임을 인정하였다. (로 11:13; 고둘 4:1; 디첫 1:12, 13) 그는 디모데에게 이렇게 썼다. “내가 자비를 받은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으뜸 가는 사례로 삼아 그분의 오래 참음을 온전히 나타내 보이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그분에게 믿음을 두려고 하는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디첫 1:16.
바울은 이전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자였기 때문에, 자신이 사도라고 불리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으며 단지 하느님의 과분한 친절에 의해서만 그렇게 불릴 수 있음을 인정하였다. 바울은 자신에게 베풀어진 이 과분한 친절이 헛된 것이 되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다른 사도들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봉사의 직무를 계속 수행할 수 있었던 것도 전적으로 하느님의 과분한 친절 덕분이었음을 깨달았다. (고첫 15:9, 10)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다. “내게 능력 주시는 분으로 말미암아 내게는 모든 일을 할 힘이 있습니다.” (빌 4:13) 그는 많은 것을 인내했지만 불평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이렇게 썼다(기원 55년경). “내가 더욱 많이 수고하였고, 더욱 많이 감옥에 갇혔고, 지나치게 구타당하였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모자라는 매질을 다섯 번 당했고, 세 번 매로 맞았고, 한 번 돌로 맞았으며, 세 번 파선을 경험하였고, 밤낮으로 하루를 깊음에서 지냈습니다. 여행을 자주하여 강에서의 위험, 노상 강도의 위험, 내 민족의 위험, 이방 사람들의 위험, 도시에서의 위험, 광야에서의 위험, 바다에서의 위험, 거짓 형제들 가운데서의 위험을 당하였습니다. 수고하고 애쓰는 일, 자주 잠 못 자는 밤, 굶주림과 목마름, 여러 번 음식을 먹지 못하는 일, 추위와 벌거벗음을 겪었습니다. 이러한 외적인 일 외에도 날마다 나를 엄습하는 것이 있으니, 곧 모든 회중에 대한 염려입니다.” (고둘 11:23-28; 6:4-10; 7:5) 바울은 이 모든 일과 이어진 여러 해 동안 더 많은 시련을 겪은 것 외에도 “육체의 가시”와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고둘 12:7), 아마 이것은 그의 눈의 고통이나 다른 종류의 고통이었을 것이다.—행 23:1-5; 갈 4:15; 6:11 비교.
바울은 불완전했으므로 정신과 죄 많은 육체 사이의 끊임없는 충돌을 경험하였다. (로 7:21-24)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내 몸을 연달아 쳐서 그것을 종처럼 부립니다. 그것은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한 후에, 어떻게든 나 자신이 승인받지 못하게 되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고첫 9:27) 바울은 하늘에서의 불멸의 생명이라는 영광스러운 상을 언제나 자기 앞에 두었다. 그는 모든 고난이, 충실함에 대한 상으로 받게 될 영광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로 8:18; 빌 3:6-14) 그러므로 바울은 아마도 죽기 얼마 전에 이렇게 쓸 수 있었다. “나는 훌륭한 싸움을 싸웠으며, 달려갈 길을 끝까지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부터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습니다.”—디둘 4:7, 8.
바울은 영감받은 사도로서 명령을 내릴 권한이 있었고 또 실제로 그렇게 했지만(고첫 14:37; 16:1; 골 4:10; 데첫 4:2, 11. 디첫 4:11 비교), 사랑에 근거하여 형제들에게 권고하며 “하느님의 동정심”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온화함과 친절”로 그들에게 간청하는 쪽을 선호하였다. (로 12:1; 고둘 6:11-13; 8:8; 10:1; 몬 8, 9) 그는 부드러웠고, 그들에게 부드러운 애정을 나타냈으며, 아버지처럼 그들에게 권고하고 위안하였다. (데첫 2:7, 8, 11, 12) 그는 형제들로부터 물질적 지원을 받을 권리가 있었지만, 비용이 많이 드는 무거운 짐이 되지 않으려고 자기 손으로 일하는 쪽을 택하였다. (행 20:33-35; 고첫 9:18; 데첫 2:6, 9) 그 결과 바울과 바울이 섬긴 사람들 사이에는 형제 애정의 친밀한 유대가 존재하였다. 에베소 회중의 감독자들은 자기들이 그의 얼굴을 더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마음이 매우 아팠고 눈물을 흘렸다. (행 20:37, 38) 바울은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복지에 대해 매우 깊이 염려했으며, 그들이 자기들의 하늘의 부르심을 확실한 것으로 만들도록 돕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하기를 원하였다. (로 1:11; 15:15, 16; 골 2:1, 2)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기도 가운데 그들을 기억했으며(로 1:8, 9; 고둘 13:7; 엡 3:14-19; 빌 1:3-5, 9-11; 골 1:3, 9-12; 데첫 1:2, 3; 데둘 1:3), 그들에게도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로 15:30-32; 고둘 1:11) 그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에서 격려를 받았다. (로 1:12) 한편, 바울은 옳은 일에 확고했으며, 좋은 소식의 진보를 위해 필요할 때는 심지어 동료 사도를 시정하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고첫 5:1-13; 갈 2:11-14.
바울은 12사도 가운데 한 명이었는가?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강한 확신과 증거가 있었지만, 바울은 결코 자신을 “열두 사도” 가운데 포함시키지 않았다. 오순절 이전에, 베드로가 성경적인 권고를 한 결과, 모인 그리스도인들은 불충실한 이스가리옷 유다를 대신할 인물을 찾았다. 두 제자가 후보로 선택되었는데, 아마 그 모임의 남자 성원들의 표결로 선택되었을 것이다(베드로는 “형제 여러분”에게 말을 꺼냈음; 행 1:16). 그다음에 그들은 여호와 하느님께서 그 두 사람 중에 불충실한 사도를 대신하도록 택하신 사람을 하느님이 지정해 주실 것을 기도하였다. (행 1:24을 삼첫 16:7; 행 15:7, 8과 비교) 그들이 기도하고 나서 제비를 뽑았더니 “맛디아가 뽑[혔다].”—행 1:15-26. 잠 16:33 비교.
맛디아가 하느님께서 친히 택하신 사람이었음을 의심할 이유가 없다. 바울이 일단 개종한 뒤에는 매우 탁월해졌고 그의 수고가 다른 모든 사도들보다 더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고첫 15:9, 10) 하지만 바울이 개인적으로 사도직에 예정되어 있어서 하느님께서 사실상 그 그리스도인 모임의 기도에 따라 행동하기를 억제하시고 유다가 비운 자리를 바울이 개종할 때까지 공석으로 남겨 두셔서, 맛디아를 임명한 것이 단지 그 그리스도인 모임의 독단적인 행동에 불과한 것이 되게 하셨음을 지적하는 내용은 전혀 없다. 그와는 반대로, 맛디아가 대신하도록 하느님의 임명을 받았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
오순절 날에 성령이 부어져서 사도들은 독특한 능력을 받게 되었다. 그들만이 새로 침례받은 사람들에게 손을 얹어 기적의 영의 선물들을 전달해 줄 수 있었던 사람들로 밝혀져 있다. (사도 [기적의 능력] 참조) 만약 맛디아가 사실 하느님께서 택하신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가 그 일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모두에게 분명히 드러나게 되었을 것이다. 기록은 그렇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사도행전의 필자인 누가는 바울의 여행 동료이자 특정한 임무 중에 함께 참여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사도행전은 바울 자신의 견해를 반영하는 것이며 또 그 견해와 일치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 책은 “열두 사도”가 음식 분배 문제를 다루도록 일곱 사람을 임명했다고 알려 준다. 이 일은 기원 33년 오순절 이후에, 그렇지만 바울이 개종하기 전에 있었다. 따라서 맛디아는 여기서 “열두 사도” 가운데 한 명으로 인정되고 있으며, 지명된 일곱 사람에게 다른 사도들과 함께 손을 얹었다.—행 6:1-6.
그러면 요한의 환상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의 “열두 기초석”에는 누구의 이름이 나오는가—맛디아의 이름인가, 바울의 이름인가? (계 21:2, 14) 한 가지 추리 방식에 의하면 바울의 이름일 가능성이 더 많은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는 자신의 봉사의 직무를 통해서, 그리고 특히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 가운데 큰 부분을 기록함으로(14통의 편지가 그의 것으로 여겨짐) 그리스도인 회중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이러한 면에서 바울은 맛디아보다 ‘더 돋보였다.’ 맛디아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사도행전 1장 이후에는 더 이상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냉철하게 고려해 보면 바울은 원래의 12사도 가운데 많은 사람들보다도 ‘더 돋보였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12사도 가운데 일부는 사도들의 명단에만 나올 뿐, 그 외에는 거의 이름조차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이 개종할 무렵, 그리스도인 회중 즉 영적 이스라엘은 이미 설립된 또는 기초가 놓인 상태였으며, 아마 일 년 또는 그 남짓 동안 성장해 왔을 것이다. 또한 바울의 최초의 정경 서한은 기원 50년경(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들 참조)에야, 즉 영적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나라의 기초가 기원 33년 오순절에 놓이고 나서 17년이나 지난 후에야 기록된 듯하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들과, 그에 더하여 이 항목의 앞부분에 제시된 증거는 그 문제를 명확히 밝혀 준다. 그러므로 “‘어린 양’의 열두 사도” 가운데 유다를 대신할 사람으로 하느님께서 원래 맛디아를 택하신 것은 변함이 없었으며, 나중에 바울이 사도가 된 후에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것 같다.
그렇다면 바울의 사도직의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예수께서 친히 그것이 특정한 목적을 위한 것으로서—유다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바울이 ‘이방 사람들에게 사도[보냄을 받은 자]’로서 봉사하게 하기 위한 것임을 밝히셨으며(행 9:4-6, 15), 바울도 그것이 자신의 사도직의 목적임을 인정하였다. (갈 1:15, 16; 2:7, 8; 로 1:5; 디첫 2:7) 그러므로 기원 33년 오순절에 영적 이스라엘이 설립되었을 때 하나의 기초로 섬기도록 바울의 사도직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