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한 책에서 창조주에 관해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교육적이면서도 재미있는 책은 참으로 가치 있다는 점에 당신은 아마 동의할 것입니다. 성서가 바로 그러한 책입니다. 당신은 성서에서 도덕적으로 높은 가치관을 제시하는 흥미 있는 체험담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중요한 진리에 대한 생생한 예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혜가 뛰어나기로 유명한 성서의 필자 중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힘써 아름다운 말을 구하였나니 기록한 것은 정직하여 진리의 말씀이니라.”—전도 12:10.
우리가 “성서”라고 말하고 있는 책은 사실은, 1500여 년에 걸쳐 기록된 66권의 작은 책을 한 권으로 묶은 것입니다. 예를 들면, 모세는 기원전 1513년에서 1473년 사이에, 창세기로부터 시작하는 처음 다섯 권의 책을 썼습니다. 예수의 사도 중 한 사람인 요한은 맨 마지막으로 성서를 기록한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의 생애에 관한 역사(요한 복음)뿐만 아니라, 짧은 편지들, 그리고 대부분의 성서에 맨 마지막으로 나오는 계시의 책을 기록하였습니다.
모세로부터 요한에 이르는 1500년간, 약 40명의 사람들이 성서를 기록하는 일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들은 성실하고 독실한 사람들로서, 다른 사람들이 창조주에 관해 배워 알도록 돕기를 원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기록물을 통해서 하느님의 특성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고, 따라서 그분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워 알게 됩니다. 성서는 또한 악이 만연해 있는 이유와 악이 어떻게 끝나게 될 것인지도 이해할 수 있게 해줍니다. 성서의 필자들은 인류가 좀더 직접적으로 하느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 때가 언제인지를 지적하였고, 그 때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슴 설레는 상태 중 일부도 묘사하였습니다.—시 37:10, 11; 이사야 2:2-4; 65:17-25; 계시 21:3-5.
당신은 아마, 많은 사람들이 성서를 인간의 지혜가 들어 있는 오래 된 책 정도로 여기고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백만 명의 사람들은 하느님이 성서의 실제 저자이시며, 하느님이 필자들의 생각을 인도하셨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둘째 1:20, 21) 성서 필자들이 기록한 내용이 참으로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당신이 고려할 만한 증거가 많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증거들을 고려한 다음에, 성서가 단순히 인간의 책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초인적 근원에서 나온 책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에 대한 예로, 한 가지 종류의 증거만 고려해 봅시다. 그렇게 하면, 우주의 창조주이시자 인간 생명의 근원이신 분에 관하여 더 많은 점을 배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이루어진 예언들
많은 성서 필자들이 예언을 기록하였습니다. 이 필자들은 자기에게 미래를 예언할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지 않고, 창조주에게 영예를 돌렸습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는 하느님을 가리켜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시는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1:1; 42:8, 9; 46:8-11) 수십 년 후 혹은 심지어 수세기 후에 일어날 일을 예언하는 능력은, 이사야의 하느님을 독특한 분이 되게 합니다. 이사야의 하느님은, 옛적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이 숭앙해 온 것과 같은, 우상에 불과한 존재가 아닙니다. 예언은, 성서의 저자가 인간이 아니라는 납득할 만한 증거를 제시합니다. 이사야서가 어떻게 이 점을 확증해 주는지 고려해 보십시오.
이사야서의 내용을 역사 자료와 대조해 보면, 이사야서가 기원전 732년경에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예루살렘과 유다의 거민들에게 피 흘린 죄와 우상 숭배의 죄가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재난이 닥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이사야는 그 땅이 황폐될 것이고, 예루살렘과 그 성전이 파괴될 것이며, 생존자들이 바빌론(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하느님께서 그 사로잡혀 간 민족을 잊지 않으실 것이라는 점도 예언하였습니다. 이사야서는 키루스(고레스)라는 이방의 왕이 바빌론을 정복하고 유대인들을 해방시켜 그들의 고국으로 돌아가게 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사실, 이사야는 하느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으로 묘사합니다.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이사야 2:8; 24:1; 39:5-7; 43:14; 44:24-28; 45:1.
이사야의 시대인 기원전 8세기에, 그러한 예언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 같았을 것입니다. 그 당시 바빌론은 아직 군사 강국으로 부상하지도 않았습니다. 바빌론은 그 당시의 실제 세계 강국인 아시리아(앗수르)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에 못지 않게 기이한 점은, 정복당하여 먼 나라로 포로로 끌려간 민족이 해방되어 그들의 땅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들은 자가 누구[냐]”고 이사야는 기록하였습니다.—이사야 66:8.
하지만 2세기가 지난 후에 일어난 일을 살펴보면 어떤 사실을 알게 됩니까? 예언이 있은 뒤에 진행된 고대 유대인의 역사는 이사야의 예언이 세세한 점까지 성취되었음을 증명하였습니다. 바빌론은 실제로 강국이 되어 예루살렘을 파괴하였습니다. 페르시아(바사) 왕의 이름(키루스), 그가 등장하여 바빌론을 정복한 일, 유대인들이 고국으로 돌아간 일 등은 모두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예언이 세세한 점까지 매우 정확하게 성취되었기 때문에, 19세기에 비평가들은 이사야서가 날조된 기록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사실상 이렇게 말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 몇 장은 이사야가 기록했을지 모르지만, 그 책의 나머지 부분은 그 후 키루스 왕 시절에 살았던 어떤 필자가 날조해서 마치 예언처럼 보이게 한 것이다.’ 그처럼 예언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어떠합니까?
참으로 예언인가?
이사야서에 나오는 예언들은 키루스와 유대인들의 포로 생활과 관련된 사건들로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사야는 또한 바빌론이 최종적으로 처하게 될 상황에 대해서도 예언하였으며, 그의 책은 장차 오실 메시아 즉 구출자에 대해서도 많은 세부점을 알려 주었는데, 그분이 고난을 당한 후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라는 점도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한 예언들이 오래 전에 미리 기록된 것들이며, 따라서 앞으로 성취될 예언들이었다는 점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이러한 점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사야는 바빌론이 최종적으로 처하게 될 상황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열국의 영광이요 갈대아 사람의 자랑하는 노리개가 된 바벨론이 하나님께 멸망 당한 소돔과 고모라 같이 되리니 그 곳에 처할 자가 없겠고 거할 사람이 대대에 없을 것이[라].” (이사야 13:19, 20; 47장) 실제로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습니까?
사실상 바빌론은 오랫동안,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 있는 댐과 운하로 이루어진 복잡한 관개 체계에 의존해 있었습니다. 기원전 140년경에 파르티아가 이 지역을 정복하여 파괴할 때 이 수로 체계도 손상을 입어 근본적으로 붕괴된 것 같습니다. 어떤 결과가 있었습니까? 「아메리카나 백과 사전」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토양에 암염이 넘치게 되어 지표면에 알칼리 층이 형성되는 바람에, 농사를 짓는 일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약 200년 후에도 바빌론은 여전히 인구가 많은 도시였지만, 그러한 상태가 그만큼도 더 오래 가지는 못하였습니다. (비교 베드로 첫째 5:13) 기원 3세기경에,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기원 150년경-235년)는 바빌론을 방문한 사람이 “둔덕과 돌과 폐허” 외에는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였다고 묘사하였습니다. (LXVIII, 30) 의미 심장하게도, 이 때쯤 이사야는 사망한 지 이미 오래 되었으며, 기록이 완료된 이사야의 책도 사람들의 손에 유포된 지 여러 세기가 지났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오늘날 바빌론에 가 본다면, 한때 영화로웠던 그 도시의 폐허만 보게 될 것입니다. 로마, 예루살렘, 아테네와 같은 고대 도시들은 오늘날까지 존속해 왔는데, 바빌론은 황량하고 사람이 살지 않는 폐허가 되어 있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그대로입니다.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이제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한 이사야의 묘사에 초점을 맞추어 봅시다. 이사야 52:13에 의하면, 하느님의 이 특별한 종은 마침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장(이사야 53장)에서는 메시아가 존귀하게 되기 전에 놀라울 정도로 다른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메시아에 관한 예언이라고 널리 인정받는 이 장에 기록된 세부점을 읽다 보면 당신은 아마 깜짝 놀랄 것입니다.
이 장에서 읽어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메시아는 자기 동족에게 멸시를 받을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러한 일이 일어날 것임을 확신하고서, 마치 그러한 일이 이미 일어난 것처럼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도다].” (3절) 이러한 부당한 대우는 결코 정당화되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메시아가 그 민족을 위해 선한 일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 우리의 질고[“병”]를 [졌]”다고, 이사야는 메시아가 병 고치는 일을 할 것임을 묘사하였습니다. (4절, 「신세」 참조) 그런데도 메시아는 시련을 당하고 부당한 비난을 받을 것이며, 한편 비난자들 앞에서 잠잠히 있을 것입니다. (7, 8절) 그는 범죄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도록 넘겨지는 일을 피하려 하지 않을 것이며, 사형 집행 중에 그의 몸은 찔림을 당할 것입니다. (5, 12절) 그는 범죄자 중 하나처럼 죽을 것이지만, 부자처럼 장사지내질 것입니다. (9절) 그리고 메시아의 부당한 죽음은 다른 사람들의 죄를 덮는 대속의 능력을 갖게 될 것이라고 이사야는 되풀이해서 언급하였습니다.—5, 8, 11, 12절.
이 모든 일은 실제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기록한 역사는, 이사야가 예언한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음을 확증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한 일 중 일부는 예수가 죽으신 후에 일어났으므로, 그분이 상황을 조작할 수도 없었습니다. (마태 8:16, 17; 26:67; 27:14, 39-44, 57-60; 요한 19:1, 34) 메시아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의 완전한 성취는, 이전에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일부 사람들을 포함하여 진지한 성서 독자들에게 여러 세기 동안 강력한 영향을 미쳐 왔습니다. 학자인 윌리엄 어윅은 다음과 같이 기술합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이유를 기록하면서, 이 장[이사야 53장]을 숙독하다가 이전 교리와 교사들에 대한 믿음이 흔들렸다고 시인하였다.”—「여호와의 종」(The Servant of Jehovah).a
어윅이 그 말을 한 것은 1800년대 말로서, 이사야 53장이 과연 예수가 태어나기 여러 세기 전에 기록되었는지 의심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 이후로 발견된 사실들은 의심의 근거를 근본적으로 없애 버렸습니다. 1947년에 한 베두인족 목동이 사해 근처에서, 이사야서 전체가 담겨 있는 고대의 두루마리를 발견하였습니다. 고대 기록 전문가들은 그 두루마리가 기원전 125년에서 100년 사이에 기록된 것이라고 추정하였습니다. 그리고 1990년에 탄소 14 측정법으로 그 두루마리의 연대를 추정해 보니 기원전 202년에서 107년 사이에 기록된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유명한 이사야 두루마리는 예수께서 태어나셨을 당시로서도 이미 꽤 오래 된 기록이었습니다. 그 두루마리를 현대의 성서들과 비교해 보면 어떤 사실이 드러납니까?
예루살렘에 가면, 사해 두루마리의 일부를 볼 수 있습니다. 고고학 교수인 이가엘 야딘의 기록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사야가 실제로 예언을 한 때부터 기원전 2세기에 이 두루마리의 사본이 기록된 때까지는 불과 오륙백 년 정도밖에 경과하지 않았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 원두루마리가 2000년도 더 된 것인데도, 그 내용이 오늘날 우리가 히브리어 성서나 원어에서 직접 번역한 성서들에서 읽는 내용과 대동소이하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이러한 사실은 분명히 우리의 견해에 영향을 미쳐야 합니다. 어떤 견해 말입니까? 이사야서가 일들이 일어난 다음에 예언인 것처럼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는 비평적인 의심을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사본이 심지어 예수께서 태어나기 100여 년 전에 그리고 바빌론이 황폐되기 오래 전에 만들어졌다는 과학적인 증거가 현재 있습니다. 따라서 이사야서가 바빌론이 처하게 될 최종 결과뿐만 아니라, 메시아가 당하게 될 부당한 고통, 죽음의 형태, 사람들로부터 받을 대우 등을 예언하였다는 사실을 어찌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역사적 사실들은 이사야가 유대인들이 사로잡혀 갈 일과 바빌론에서 해방될 일을 정확하게 예언하였다는 사실에 대해 논박할 근거를 없애 버립니다. 이러한 성취된 예언들은, 성서의 실제 저자가 창조주이며 성서가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것”이라는 많은 증거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디모데 둘째 3:16.
성서의 저자가 하느님이라는 증거는 그 밖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성서의 천문학적·지질학적·의학적 정확성, 천몇백 년에 걸쳐 수십 명의 사람들이 기록하였는데도 성서의 책들 사이에서 볼 수 있는 내부적 조화, 성서가 세속 역사나 고고학의 많은 사실들과 일치한 점, 성서의 도덕법이 성서가 기록될 당시에도 주변 민족들의 도덕법보다 월등하였으며 지금도 필적할 상대가 없다는 것이 인정되고 있는 점 등이 포함됩니다. 이러한 증거들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증거들은 부지런하고 정직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성서가 확실히 우리의 창조주에게서 나온 책임을 확신시켜 주었습니다.b
이러한 사실들은 또한 창조주에 대해 얼마의 타당한 결론을 내리는 데도 도움이 되며, 창조주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정확히 앞을 내다보시는 그분의 능력은, 그분에게 우리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지각력이 있음을 증언하는 것이 아닙니까? 인간은 먼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알지 못하며, 그 일이 일어나도록 조종할 능력도 없습니다. 하지만 창조주는 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미래를 예견하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일들을 조정하실 수도 있습니다. 적절하게도, 이사야는 창조주에 대해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시는 분으로 묘사합니다.—이사야 46:10; 55:11.
저자를 더 잘 알게 됨
다른 사람을 잘 알려면, 그 사람과 대화를 나누어 보고 그 사람이 여러 가지 상황에서 나타내는 반응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아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을 다 사용할 수 있지만, 창조주를 아는 데에는 어떠합니까? 아마 창조주와 직접 대화를 나눌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증명해 온 바와 같이, 그분은 성서를 통해서—자신이 하신 말씀과 자신이 나타낸 반응을 통해서—자신에 관해 많은 점을 보여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이 독특한 책은 사실상 우리에게 창조주와의 관계를 발전시키라고 권유합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강력하게 권합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그분이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야고보 2:23; 4:8.
일차적인 단계를 생각해 보십시오. 누군가와 친구가 되고 싶다면 틀림없이 그 사람의 이름을 익힐 것입니다. 그러면 창조주의 이름은 무엇이며, 그분의 이름은 그분에 대하여 무엇을 알려 줍니까?
성서의 히브리어 부분(흔히 구약이라고 함)은 우리에게 창조주의 독특한 이름을 알려 줍니다. 그 이름은 고대 사본에 네 개의 히브리어 자음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영어로 YHWH나 JHVH로 음역할 수 있습니다. 창조주의 이름은 7000번가량 나오는데, 하느님이나 주라는 칭호보다 훨씬 더 자주 나옵니다. 여러 세기 동안, 히브리어 성서를 읽는 사람들은 그 고유한 이름을 사용하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이름을 발음하는 일에 대해 미신적 두려움을 발전시키는 바람에, 하느님의 이름의 발음이 보존되지 못하였습니다.
“원래의 발음은 마침내 잊혀지고 말았다. 그 발음을 되살리고 싶어하는 현대의 시도들은 추측에 근거한 것이다.” 출애굽기에 대한 유대인의 한 주석서에 실려 있는 말입니다. 물론, 우리는 모세가 출애굽기 3:16과 6:3에 나오는 하느님의 이름을 어떻게 발음했는지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모세나 예수가 지상에서 걸어다니던 당시에 사용하던 정확한 소리와 억양으로 모세나 예수의 이름을 발음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할 사람이 오늘날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모세나 예수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우리와 다른 언어를 사용했던 고대 사람들이 하느님의 이름을 정확히 어떻게 발음했는지 지나치게 염려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서 흔히 사용되는 발음을 사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예를 들면, “여호와(Jehovah)”는 영어권에서 400년 동안이나 사용되어 왔고, 영어권에서는 지금도 창조주의 이름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을 발음하는 것과 관련된 세부 사항보다 더욱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이름의 의미입니다. 히브리어로 그 이름은 “···가 되다”라는 의미인 하와라는 동사의 사역형입니다. (창세 27:29; 전도 11:3) 「옥스퍼드 성서 안내서」(The Oxford Companion to the Bible)에서는 그 이름의 의미가 “‘그는 어떤 일이 일어나게 하시다’ 혹은 ‘이루어지게 하실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창조주의 고유한 이름의 문자적인 의미는 “그는 되게 하시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일 원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을 때 어떤 사람들이 염두에 두었을지 모르는 바와는 달리, 그 이름은 오래 전에 창조주가 하신 활동을 강조하고 있지 않음에 유의하십시오.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이름은 창조주가 목적을 세워 놓고 하실 일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 동사에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시제밖에 없습니다. 창조주의 이름과 관련이 있는 한 가지 시제는 “진행 중에 있는 ··· 행동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계속되는 행동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 어떤 행동이 시작된 후로 완성을 향해 발전해 가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시제 개요」[A Short Account of the Hebrew Tenses]) 그렇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통해서, 목적을 세우시는 분으로서 자신이 활동적인 분임을 밝히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이 점진적으로 행동하여 약속을 성취시키는 분이 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창조주가 언제나 자신의 목적을 실현시키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만족스러워하며 안심합니다.
그분의 목적—우리의 목적
하느님의 이름이 목적을 반영하는 데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에서 참다운 목적을 찾기가 쉽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그들은 인류가 잇따른 위기—전쟁, 자연재해, 유행병, 가난, 범죄—에 걸려 넘어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한 해로운 영향을 가까스로 피한 소수의 특권층에 속한 사람들도, 자신들이 미래와 삶의 의미에 대한 끊임없는 의혹에 시달리고 있음을 흔히 인정합니다.
성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물질 세계가 좌절에 굴복하게 된 것은 자기의 욕망에 따라서가 아니라 창조주의 뜻에 의한 것입니다. 물질 세계를 좌절하게 하신 창조주께서는 그 세계가 장차 구출되어 ··· 하느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주셨습니다.” (로마 8:20, 21, 「신약의 서한들」[The New Testament Letters], J. W. C. 원드역) 창세기의 기록은 인간이 한때 창조주와 평화로운 관계에 있었음을 알려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정당하시게도, 인간의 그릇된 행동에 대한 반응으로, 어떤 면에서는 인류에게 좌절감을 일으킬 수도 있는 상황에 인류가 처하게 하셨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러한 상황이 발전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러한 일은 창조주에 관하여 어떤 점을 알려 주는지, 또한 미래에 어떤 일이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는지 살펴보기로 합시다.
여러 가지 면으로 확실성이 증명되어 온 창세기에 기록된 역사에 의하면, 창조된 첫 사람들의 이름은 아담과 하와였습니다. 그 기록이 알려 주는 바와 같이, 그들은 아무 목적 없이 혹은 하느님의 뜻에 관한 아무런 가르침도 없이 암중 모색하도록 방치되지 않았습니다. 사랑 많고 사려 깊은 인간 아버지라면 누구나 자기 자녀에게 그러듯이, 창조주께서는 인간에게 유용한 지침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세 1:28.
따라서 첫 사람들에게는 의미 깊은 삶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 목적 가운데에는 땅의 생태계를 돌보고, 지구를 책임감 있는 사람들로 가득 채우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비교 이사야 11:9) 창조주가 인간에게 지구를 오용하고 파괴할 구실을 주기라도 한 것처럼, 오염된 지구의 현 상태에 대해 정당하게 창조주를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정복하라”는 말은 오용해도 좋다고 허락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관리하도록 자신에게 맡겨진 지구를 인간이 경작하고 돌보라는 의미였습니다. (창세 2:15) 더욱이, 그들에게는 그 의미 깊은 임무를 실행할 지속적인 미래가 있을 것이었습니다. 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은, 인간에게 칠팔십 년 혹은 심지어 100년의 생애 동안 온전히 사용할 수 있는 것보다 용량이 훨씬 더 큰 뇌가 있다는 사실과도 일치합니다. 뇌는 무한정 사용하도록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창조물을 만들고 감독하는 분으로서 여호와 하느님은, 땅과 인류에 대한 자신의 목적을 성취시키는 방법에 대해서는 인간에게 재량권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지나치게 많은 요구를 하지도 않으셨고, 부당하게 제한을 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를 들면, 그분은 아담에게 동물학자가 누릴 수 있는 즐거움—동물을 연구하고 이름을 짓는 임명—을 주셨습니다. 아담은 동물들의 특성을 관찰한 후에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많은 이름은 동물들의 특성을 잘 묘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창세 2:19) 이것은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의 목적과 일치하게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한 가지 예에 불과합니다.
지상에서 어떠한 상황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심지어 인간이 어리석거나 해로운 행로를 택한다 하더라도, 전 우주의 지혜로운 창조주에게는 그에 즉각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점을 당신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역사 기록은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다음과 같이 단 하나의 제한을 가하는 명령을 하셨다고 알려 줍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세 2:16, 17.
그 명령은, 순종을 받을 하느님의 권리를 인정할 것을 인간에게 요구하였습니다. 아담 시대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간들은 중력의 법칙을 인정하고 그에 따라 살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중력의 법칙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고 해로운 일일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은혜를 베푸시는 창조주가 세우신 또 다른 법칙 즉 명령에 따라 살기를 거부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창조주께서는 자신의 법을 지키기를 거부할 때 오게 될 결과를 분명히 밝혀 주셨지만, 자진해서 자신에게 순종할 수 있는 선택권을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습니다. 인간의 초기 역사 기록에서,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허락하고 계심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분은 자신의 피조물이 최상의 행복을 누리기를 바라시며, 그러한 행복은 그분이 주시는 선한 법에 따라 살 때 주어지는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우리는 앞장에서 창조주가 보이지 않는 지성 있는 피조물—영적 피조물—을 만드셨다고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인간의 시초에 관한 역사 기록은 이 영자들 중 하나가 하느님의 지위를 찬탈하고 싶은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고 알려 줍니다. (비교 에스겔 28:13-15) 그는 하느님이 주신 선택의 자유를 남용하여 첫 인간 부부를 유혹해서, 노골적인 반역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는 상태로 끌어들였습니다. 하느님에게 직접 불순종하는 도전적인 행동—“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음—으로 첫 부부는 하느님의 통치로부터 독립하겠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에 더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행로를 통해서 창조주가 인간에게 좋은 것을 베풀지 않고 있다는 주장에 동조하고 있음을 나타냈습니다. 그것은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을 만드신 분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가에는 전혀 개의치 않고,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스스로 결정하겠다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중력의 법칙이 싫어서 그 법칙과 반대되게 행동하겠다고 결정한다면 참으로 비합리적인 일일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창조주의 도덕 표준을 거부하는 것도 그에 못지 않게 비이성적인 일이었습니다.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는 사람에게 해로운 결과가 닥치듯이, 순종을 요구하는 하느님의 기본 법칙을 어길 때에도 틀림없이 해로운 결과가 닥칠 것임을 인간은 예상해야 합니다.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여호와께서 조처를 취하셨음을 역사 기록은 알려 줍니다. 아담과 하와가 창조주의 뜻을 거부한 “날”에 그들은 쇠퇴하기 시작하여, 하느님께서 미리 경고하신 대로 죽음을 향하여 나아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비교 베드로 둘째 3:8) 이러한 일은 창조주의 특성의 또 다른 면을 보여 줍니다. 그분은 악의적인 불순종을 나약하게 간과하지 않으시는 공의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지혜롭고 공정한 표준을 가지고 계시며 그 표준을 지지하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뛰어난 특성과 일치하게, 인간의 생명을 즉각적으로 끝나게 하지 않으시는 자비를 보이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직 수태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조상의 죄 많은 행로에 직접적인 책임도 없는 아담과 하와의 후손을 염려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아직 수태되지 않은 생명에 대한 하느님의 염려는 창조주가 어떤 분인지를 대변해 줍니다. 그분은 감정이 없는 무자비한 심판관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공정하고,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얻을 기회를 기꺼이 주시고, 인간 생명의 신성함을 존중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뒤이어 등장하는 인간 세대들이 첫 부부와 똑같이 즐거운 상황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창조주께서 아담의 후손들이 태어나게 허락하심으로, “물질 세계가 좌절에 굴복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철저한 좌절이나 절망은 아니었습니다. 로마 8:20, 21에서 또한 창조주께서 ‘그 세계가 장차 구출될 것이라는 희망을 주셨다’고 말한 점을 상기하십시오. 바로 그것이 우리가 더 알기를 원해야 하는 점입니다.
그분을 발견할 수 있는가?
첫 인간 부부가 반역하도록 유도한 적을 성서에서는 “반항자”와 “중상자”라는 뜻을 지닌 사탄 마귀라고 부릅니다. 그 반역의 주된 선동자에게 내린 선고에서 하느님께서는 그를 적으로 낙인찍으시는 한편, 장차 태어날 인간들에게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기초를 놓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사탄]와 여자 사이에, 또 너의 씨와 여자의 씨 사이에 적의를 둘 것이다. 그는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고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창세 3:15, 「신세」) 분명히, 이것은 비유적인 혹은 예시적인 표현입니다. 이 구절에서는 장차 태어날 “씨”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성서의 다른 부분들이 이 흥미를 자아내는 구절에 빛을 던져 줍니다. 그 부분들은 이 구절이 여호와께서 자신의 이름과 일치하게 행동하셔서, 지상의 인간들을 위한 자신의 목적을 성취시키는 데 필요한 것이 ‘되시’는 일과 관련이 있음을 알려 줍니다. 그렇게 하시기 위해 그분은 한 특정한 민족을 사용하셨는데, 그분이 그 고대 민족을 대하신 역사가 성서의 주요 부분을 이룹니다. 그 중요한 역사를 간략하게 고려해 보기로 합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창조주의 특성에 대해 더 많은 점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사실, 그분이 인류를 위해 마련해 주신 책인 성서를 좀더 깊이 살펴봄으로 그분에 관한 매우 귀중한 사실들을 많이 배울 수 있습니다.
[각주]
a 비교 이사야 53:7, 8이 인용되어 나오는 사도 8:26-38.
b 성서의 기원에 대하여 자세한 점을 알고 싶으면, 사단법인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에서 발행한 「모든 사람을 위한 책」 팜플렛과 「성서—하나님의 말씀인가, 아니면 사람의 말인가?」 책 참조.
[107면 삽화]
성서에서 예언한 지 여러 세기가 지난 후에, 강력했던 바빌론은 황량한 폐허가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그러한 상태로 남아 있다
[110면 삽화]
기원전 2세기에 복사한 이 이사야 두루마리는 사해 근처의 한 동굴에서 찾은 것이다. 이 두루마리는 그것이 기록되고 나서 수백 년 후에 일어난 일을 자세히 예언하였다
[115면 삽화]
질그릇 조각에 고대 히브리어로 기록된 이 편지는 라기스에서 발굴되었다. 하느님의 이름 (화살표 참조)이 두 번 나오는데, 창조주의 이름이 잘 알려져 널리 사용되었음을 보여 준다
[117면 삽화]
아이작 뉴턴은 중력의 법칙을 공식으로 나타냈다. 창조주의 법은 합리적이기 때문에, 그 법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우리에게 이익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