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행복한 사람이 됨
“자신의 동료 인간을 멸시하는 사람은 죄를 짓고 있는 것이지만,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잠언 14:21, 신세.
1, 2. 필리핀의 세 가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따라서 우리는 무슨 질문을 고려하게 됩니까?
필리핀, 판가시난주에 사는 세 가족이 그리스도인 집회에 참석해 있는 동안, 갑자기 화재가 발생하여 그들의 집들이 잿더미가 되어 버렸읍니다. 그 세 가족은 집에 돌아와서야, 먹을 것도 잘 곳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읍니다. 그 재해 소식을 들은 동료 그리스도인들은 급히 먹을 것을 가져왔고, 그 회중 내에 있는 다른 성원들과 함께 지낼 수 있는 숙소를 마련해 주었읍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동료 그리스도인들은 대나무와 다른 건축 자재를 가져왔읍니다. 이러한 형제 사랑은 이웃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읍니다. 그 세 가족 역시 그러한 선행으로 인해 감동을 받았읍니다. 화재는 그들의 집을 없애 버렸지만, 그들의 믿음과 그리스도인의 기타 특성은 건재하였으며, 사랑에 찬 반응으로 인해 한층 강화되었읍니다.—마태 6:33; 비교 고린도 전 3:12-14.
2 이러한 경험담은 마음을 흐뭇하게 해주지 않습니까? 이러한 일은 인간적인 친절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세워 주며, 진정한 그리스도교의 힘에 대한 믿음을 더욱더 강화시켜 줍니다. (사도 28:2, 신세 참조) 하지만, 우리는 그와 같이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하라는 성경 원칙을 깊이 인식하고 있읍니까? (갈라디아 6:10) 또한 우리는 개인적으로 이 면에서 어떻게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읍니까?
우리를 위한 탁월한 본
3. 우리에 대한 여호와의 관심에 관하여 우리는 무엇을 확신할 수 있읍니까?
3 제자 야고보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 내려 오[느니라.]” (야고보 1:17) 이 말은 얼마나 참됩니까!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영적 및 물질적 유익을 위하여 풍성하게 마련해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엇에 우선 순위를 두십니까? 영적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그분은 우리가 영적인 인도를 받으며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성서를 마련해 주셨읍니다. 그러한 희망은 하나님의 아들을 선물로 주신 일에 집중되어 있읍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은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의 전망을 갖게 하는 기초가 됩니다.—요한 3:16; 마태 20:28.
4. 하나님께서 우리의 물질적인 필요에도 관심을 갖고 계신 것이 분명한 어떤 증거가 있읍니까?
4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물질적인 복지에도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 점에 관하여 고대 루스드라에 사는 사람들과 함께 생각해 본 적이 있읍니다. 그들은 비록 참 숭배자들은 아니었지만, 창조주께서 ‘우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우리 마음을 만족케 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읍니다. (사도 14:15-17) 여호와께서는 사랑의 동기로 우리의 영적인 필요를 채워 주실 뿐 아니라 우리의 육적인 생활에 필요한 마련을 해주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일로 인해 하나님께서 “행복하신 하나님”이 된다고 생각지 않습니까?—디모데 전 1:11, 신세.
5. 우리는 하나님께서 고대 이스라엘을 대하신 일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읍니까?
5 하나님께서 고대 이스라엘을 대하신 일은 그분이 자신의 숭배자들의 영적인 필요뿐 아니라 물질적인 형편에도 균형잡힌 주의를 기울이신다는 것을 설명해 줍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이 율법을 가까이 대할 수 있게 해주셨읍니다. 그분이 세우신 왕들은 개인용으로 율법의 사본을 마련해야 하였으며, 백성은 주기적으로 모여서 율법이 낭독되는 것을 들었읍니다. (신명 17:18; 31:9-13) 율법에는 백성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성막 혹은 성전에 관하여 그리고 제사장들이 희생물을 다루는 일에 관한 규정이 있었읍니다. 이스라엘인들은 매년 갖는 숭배의 주요 행사들인 영적 잔치에 정기적으로 모였읍니다. (신명 16:1-17) 이 모든 일의 결과로, 이스라엘 백성 개개인은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부유한 사람이 될 수 있었읍니다.
6, 7. 여호와께서는 율법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의 육적인 필요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어떻게 나타내셨읍니까?
6 그러나 율법은 또한 하나님께서 그분의 종들의 육적인 형편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 주었읍니다. 아마 우리의 머리 속에서 얼른 떠오르는 것은 공중 위생과, 전염병의 확산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한 조치에 관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신 법들일지 모르겠읍니다. (신명 14:11-21; 23:10-14) 하지만 우리는 빈곤하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취해진 하나님의 특별한 마련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건강이 나빠지거나, 화재나 홍수와 같은 재해로 인해서 이스라엘인들 중 어떤 사람은 가난해 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바로 그분의 율법 가운데서 모든 사람이 다 경제적으로 같은 상태에 있지는 않을 것임을 인정하셨읍니다. (신명 15:11) 그러나 그분은 가난한 자들과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단순히 측은히 여기시는 데 그치지 않으시고, 그 이상의 일을 하셨읍니다. 그분은 돕기 위한 마련을 하셨읍니다.
7 그러한 사람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먹을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내의 가난한 사람들이 마음대로 밭에서 이삭을 줍고 포도원에서 남은 포도를 따고 감람나무에 남은 열매를 딸 수 있게 하라고 명령하셨읍니다. (신명 24:19-22; 레위 19:9, 10; 23:22) 하나님의 방침은 사람들이 일할 수 있는데도 게을러지거나 대중이 베푸는 동냥을 받고 살아가도록 조장하는 것이 아니었읍니다. 이스라엘인으로 이삭 줍는 사람은 노력을 해야 하였으며, 그날 먹을 것을 모으기 위해서 뙤약볕 아래서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빈곤한 사람들에게 동정심 많은 마련을 하셨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비교 룻 2:2-7; 시 69:33; 102:17.
8. (ㄱ) 유대인 개개인은 동료 형제들에게 어떻게 하라는 강력한 권고를 받았읍니까? (비교 예레미야 5:26, 28.) (ㄴ)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 강력히 권고하신 태도는 오늘날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태도와 어떻게 비교가 됩니까?
8 여호와께서는 이사야 58:6, 7에서 하신 것과 같은 선언을 통해 고통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한층더 두드러지게 하셨읍니다. 한때 자기 만족에 빠진 일부 이스라엘 사람들이 금식을 하는 체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예언자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읍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오늘날 일부 사람들은 소위 자기의 ‘안전 지대’라는 것을 지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자신에게 하등 개인적인 희생이나 불편함을 주지 않는 경우에만 궁핍한 사람들을 기꺼이 돕습니다. 그러한 태도는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하신 말씀에서 강조하고 있는 영과는 얼마나 다릅니까!—또한 에스겔 18:5-9 참조.
9. 빌려 주는 일에 대한 율법의 교훈은 무엇이었으며, 하나님께서는 어떤 태도를 나타낼 것을 권면하셨읍니까?
9 가난한 이스라엘 형제에 대한 관심은 빌려 주는 일에서 나타날 수 있었읍니다. 어떤 이스라엘 사람은 사업을 시작하려거나 확장하려고 돈을 쓰기 원하는 사람에게 빌려 주면서 이자를 받을 것을 기대할 수 있었읍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가난한 형제에게 빌려 주는 돈에 대해 이자를 청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읍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난한 형제가 빚에 쪼들리다 못해 그릇된 일을 하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출애굽 22:25; 신명 15:7, 8, 11; 23:19, 20; 잠언 6:30, 31) 불행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그분의 백성에게 본이 되어야 하였읍니다.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우리에게 이러한 약속까지 해주십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은혜를 베푸는, 신세]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빌려 주는, 현대인의 성경]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잠언 19:17) 잠시 생각해 보십시오.—그렇게 하는 것은 넉넉히 갚아 주시겠다는 보증의 말씀을 하시는 여호와께 빌려 주는 것이라는 것을!
10. 하나님의 본을 고려해 본 후에, 무슨 자문을 해볼 수 있읍니까?
10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이와 같이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에 대해 갖고 계신 견해 및 그들을 대하신 방법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는 그분의 완전한 본으로부터 교훈을 얻고 또 그것을 본받으려고 노력해 왔는가? 이 점에 있어서 하나님을 닮아가는 데 나는 개선할 여지가 있는가?—창세 1:26.
아버지를 그대로 닮은 아들
11. 예수께서 나타내신 관심은 그분의 아버지께서 나타내신 관심과 어느 정도나 일치하였읍니까? (고린도 후 8:9)
11 예수 그리스도는 여호와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의 본체의 완전한 표현”이십니다. (히브리 1:3, 새번역) 따라서 우리는 참 숭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 대해 나타내신 아버지의 관심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반영하실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실제로 그런 관심을 나타내셨읍니다. 예수께서는 가장 구제받을 필요가 있는 가난은 영적인 가난이라는 점을 이렇게 설명하셨읍니다. “자기들의 영적 필요를 의식하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하늘 왕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 5:3, 신세; 비교 누가 6:20.)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도 말씀하셨읍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요한 18:37) 따라서, 그분은 주로 기적을 행하는 분이나 병고치는 분으로가 아니라 가르치는 분으로 알려지셨읍니다. (마가 10:17-21; 12:28-33) 이와 관련해서, 마가 복음 6:30-34에 유의해 봅시다. 거기 보면 예수께서 한때 원기를 회복하시기 위해 개인 시간을 좀 갖고 싶어하셨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던 중에 ‘예수께서는 큰 무리를 보셨고 ··· [그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았읍니다. 그분은 어떤 반응을 나타내셨읍니까? 그들을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위하여 힘껏 노력하셨읍니다. 그 필요로 하는 것이란 그들이 그에 따라 살면 영원히 살 수 있는 바로 진리였읍니다.—요한 4:14; 6:51.
12. 우리는 마가 복음 6:30-34과 마가 복음 6:35-44로부터 예수의 관점에 관하여 무엇을 배울 수 있읍니까?
12 예수께서는 겸손한 유대인들의 영적인 필요에 주의를 집중하시면서도, 그들의 물질적인 필요를 무시하지 않으셨읍니다. 마가의 기록을 보면, 예수께서 문자적인 양식의 필요에 깨어 계셨음을 알 수 있읍니다. 사도들은 먼저 무리를 보내어 “무엇을 사 먹게” 할 것을 제안하였읍니다. 예수께서는 승낙하지 않으셨읍니다. 그러자 사도들은 가지고 있던 운영 기금의 일부를 취하여 먹을 것을 사는 데 쓸 수 있는지를 여쭈었읍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허락지 않으시고, 그 유명한 기적을 행하기로 하셨읍니다. 그 기적을 통해 그분은 여자와 아이 외에 5,000명의 남자를 떡과 물고기로 된 기본 식사로 먹이셨읍니다. 아마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그 무리의 필요를 기적으로 채워주신 일이 예수에게는 쉬운 일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그분이 진정한 관심을 가지셨고 또 그에 따라 행동하셨다는 것입니다.—마가 6:35-44; 마태 14:21.a
13.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복지에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다른 어떤 증거를 보여주셨읍니까?
13 아마 복음서 기록을 읽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불행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 대해 느끼시는 예수의 감정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국한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분은 병든 사람들과 그 외의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도 도와 주셨읍니다. (누가 6:17-19; 17:12-19; 요한 5:2-9; 9:1-7) 더구나 그 일은 우연히 그분 가까이 있게 된 사람들만을 고쳐 주시는 그러한 일이 아니었읍니다. 때때로 예수께서는 도움을 베풀기 위하여 병든 사람이 있는 곳까지 가셨읍니다.—누가 8:41-55.
14, 15. (ㄱ) 예수께서 자신의 추종자들이 그분처럼 관심을 나타낼 것을 기대하셨다고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우리는 무슨 자문을 해보는 것이 좋습니까?
14 그러나 가난하고 고통을 당하는 제자들[또는 진리를 찾는 사람들]의 필요는, 다만 기적을 행함으로 구제를 베풀 수 있는 사람들만이 염려해야 할 문제였읍니까? 그렇지 않았읍니다. 예수의 제자라면 누구나 관심을 갖고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하였읍니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원하는 한 부유한 사람에게 이처럼 강권하신 적이 있읍니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누가 18:18-22) 또한 예수께서는 이와 같이 교훈하셨읍니다.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누가 14:13, 14.
15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이처럼 자문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 고통당하는 사람, 불행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 대해 예수께서 나타내신 태도와 행동을 나는 어느 정도로 본받고 있는가? 사도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말한 것처럼, 나는 정직하게 그와 같이 말할 수 있는가?—고린도 전 11:1.
바울—훌륭한 본
16. 사도 바울의 각별한 관심사는 무엇이었읍니까?
16 이에 관하여 바울을 거론하는 것은 적절할 것입니다. 바울 역시 본받을 만한 훌륭한 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의 주된 관심은 다른 사람의 영적인 필요에 집중해 있었읍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대사가 되어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간청’하였읍니다. (고린도 후 5:20, 신세 참조) 바울의 특별한 임무는 비유대인들 사이에서 전파하고 회중을 세우는 일이었읍니다. 그는 이처럼 편지한 적이 있읍니다.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았느니라.]”—갈라디아 2:7.
17. 바울이 육적인 관심사에도 주의를 기울였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읍니까?
17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고 있다고 말하였으므로, 그는 (여호와와 예수처럼) 동료 숭배자들의 육적인 고통이나 어려움에 주의를 기울였읍니까? 바울 자신의 대답을 들어 봅시다. 그는 계속해서 갈라디아서 2:9에서 이와 같이 말하였읍니다. “야고보와 게바[베드로]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 가게 하려 함이라.” 그렇게 말한 다음 바로 다음 절에서, 바울은 이처럼 덧붙였읍니다.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갈라디아 2:10) 그러므로 바울은 비록 자신이 많은 회중을 돌볼 책임이 있는 선교인이자 사도이긴 하였지만, 너무 바쁜 나머지 동료 형제 자매들의 육적인 복지에 관심을 갖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됨을 깊이 인식하였읍니다.
18. 바울이 갈라디아서 2:10에서 언급한 “가난한 자들”은 누구였을 것이며, 그들이 주의를 받아 마땅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18 아마 바울이 갈라디아서 2:10에서 말한 “가난한 자들”은 주로, 예루살렘과 유대에 사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보다 전에 “헬라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이 히브리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에게 불평을 말”하는 일이 있었읍니다. 그것은 매일 양식을 “구제[분배, 신세] 하는 일에 있어서 자기네 과부들이 소홀히 여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6:1, 새번역) 따라서,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라고 말하였을 때, 그는 그리스도인 형제 관계에 있는 어느 누구도 무시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명백히 하였읍니다. (로마 11:13)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 가운데 형제들을 육적인 면으로 돌보아야 한다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는 점을 잘 이해하였읍니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느니라.]”—고린도 전 12:25, 26.
19. 바울과 그외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갖고 행동하였음을 알려 주는 어떠한 증거가 있읍니까?
19 예루살렘과 유대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가난이나 지방적인 기근 또는 박해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였을 때, 반응을 나타낸 회중 가운데는 먼 곳에 있는 회중들도 있었읍니다. 물론, 그러한 회중들은 하나님의 지원과 위로를 구하는 기도 가운데서 궁핍한 형제들을 기억하고 있음을 나타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읍니다.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다고 편지하였읍니다. (로마 15:26, 27) 그처럼 고통당하는 형제들에게 재정적인 기부를 하는 사람들은 “부요하게 되어 아낌없이 도울 수 있게 될 것”이며, “우리를 통하여 ···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것”이었읍니다. (II 고린도 9:1-13, 새번역) 그러한 일은 그들이 행복해 할 만한 이유가 되지 않았겠읍니까?
20.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서 기부한 형제들이 행복해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20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금을 보낸 형제들에게는 행복해 할 만한 부가적인 이유가 있었읍니다. 그처럼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일은 기부한 형제들이 하나님의 승인을 받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로마서 15:26과 고린도 후서 9:13에서 “동정”과 “연보”로 번역된 희랍어 단어가 “동료 관계의 증표, 형제 연합의 증거, 심지어 선물”이란 개념을 내포한다는 점에 유의함으로써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읍니다. 그 희랍어 단어가 히브리서 13:16에서도 사용되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고딕체로는 본지에서)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 될 것인가?
21. 행복을 얻기 위한 기초를 마련해 주는 것은 무엇이라고 결론내릴 수 있읍니까?
21 우리는 이번 기사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사도 바울이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돌보았다는 성경적인 증거를 검토하였읍니다. 우리는 그분들 모두가 영적인 필요에 우선적인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셨음에 유의하였읍니다. 그러나 실로 그분들 모두는 가난한 사람과 병든 사람과 불행한 일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매우 실제적인 방법으로 관심을 나타내시기도 하였읍니다. 그분들은 실제적인 도움을 베푸는 일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었읍니다. 우리도 그래야 하지 않겠읍니까?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처럼 강권하였읍니다.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복하다, 공동번역]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사도 20:35.
22. 이 문제와 관련해서 우리의 주의를 끌 만한 어떤 부면들이 아직 남아 있읍니까?
22 그러나, 당연히 이러한 질문이 생길 것입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인가? 진정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게으름을 조장하지 않으면서, 친절하고 현실적으로, 다른 사람의 감정을 고려에 넣으면서도 좋은 소식을 전해야 할 자신의 그리스도인 의무와 균형을 이루는 방법으로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는가? 다음 기사에서는 이러한 문제의 여러 부면을 집중적으로 다룰 것이며, 그렇게 하여 우리가 부가적인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기초를 놓아 줄 것입니다.
[각주]
a 흥미롭게도, 예수 자신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물질적인 도움을 받으실 때 거북해 하시거나 너무 자존심이 강하여 받아들이지 않는 일이 없으셨다.—누가 5:29; 7:36, 37; 8:3.
유의하셨읍니까?
◻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적인 필요 외에도 영적인 필요에 관심을 갖고 계신 것이 분명한 어떤 증거가 있읍니까?
◻ 예수께서 진리를 가르치는 일을 통해 사람들을 돕는 일 외에도,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으셨음을 무엇이 알려 줍니까?
◻ 바울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어떠한 본을 세워 놓았읍니까?
◻ 여호와와 예수 및 사도 바울의 본을 고려한 후에, 우리는 무슨 일을 할 필요가 있음을 알 수 있읍니까?
[14면 삽화]
그리스도인 장로들 및 그외 사람들은 누가 복음 14:13, 14에 나오는 예수의 교훈을 적용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