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자비를 본받으라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여러분도 계속 자비로우십시오.”—누가 6:36.
1.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자비가 없는 사람들임을 어떻게 나타냈습니까?
사람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긴 하였지만, 그분의 자비를 본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창세 1:27) 예를 들어 바리새인들을 고려해 봅시다. 하나의 집단으로서 그들은 예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안식일에 자비롭게 고쳐 주신 것이 전혀 기쁘지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를] 멸하려고” 상의하였습니다. (마태 12:9-14) 또 한번은 예수께서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고쳐 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또다시 “바리새인들 가운데 몇”은 예수께서 나타내신 동정심을 보고도 전혀 기쁨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 사람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므로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라고 불평하였습니다.—요한 9:1-7, 16.
2, 3.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의 효모를 주의’하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었습니까?
2 바리새인들은 그러한 냉혹한 태도 때문에 인간애를 외면한 범죄이자 하느님을 거스르는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요한 9:39-4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러한 엘리트층의 사람들이나 사두개인들과 같은 그 밖의 종교인들의 “효모를 주의”하라고 경고하신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마태 16:6) 효모는 성서에서 죄나 부패를 상징하는 데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이 순결한 숭배를 부패시킬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율법을 오로지 그들이 임의로 만들어 낸 규칙들과 의식들과만 관련짓도록 가르치고 또한 자비를 포함하여 “더 중한 것”은 무시하도록 가르침으로써입니다. (마태 23:23) 이러한 의식에 치우친 종교는 하느님께 드리는 숭배가 감당하기 어려운 짐이 되게 하였습니다.
3 예수께서는 탕자의 비유의 두 번째 부분에서, 그러한 유대교 지도자들의 부패한 생각을 폭로하셨습니다. 비유 가운데 여호와를 상징하는 아버지는 회개하는 아들을 용서해 주기를 간절히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전영하는 그 청년의 형은 이 일에 대해 전혀 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누가 15:2.
형의 분노
4, 5. 어떤 의미에서 탕자의 형을 “길을 잃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4 “그런데 그의 큰아들은 밭에 있었습니다. 그가 와서 집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인 하나를 불러 이것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하인이 말하였습니다. ‘당신의 동생이 왔습니다. 그를 건강하게 다시 얻었다고 하여 당신의 아버지께서 살지고 젊은 수소를 잡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격분하여 들어가려 하지 않았습니다.”—누가 15:25-28.
5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유에서 문제가 있는 사람은 탕자만이 아니었음이 분명합니다. 한 참고 문헌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에서는 두 아들 다 길을 잃은 것으로 묘사한다. 한 아들은 불의를 저질러서 타락하게 되었고, 다른 아들은 독선에 휩싸여 분별력을 잃었다.” 탕자의 형이 기뻐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격분”하였다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격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분노를 터뜨리는 것이라기보다는 오래 지속되는 정신 상태를 가리킵니다. 탕자의 형에게는 분노가 마음속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 같으며, 따라서 애초부터 집을 떠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이 돌아온 것을 축하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6. 탕자의 형은 누구를 상징하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6 탕자의 형은 예수께서 죄인들에게 동정심을 나타내시고 주의를 기울이시는 것에 대해 분개한 사람들을 잘 상징합니다. 독선적인 그 사람들은 예수께서 나타내신 자비에 감동을 받지 않았습니다. 죄인이 용서받을 때 하늘에서 기쁨이 솟아나지만, 그들은 그러한 기쁨을 반영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의 자비는 그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으며, 그들은 마음속으로 “악한 것을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태 9:2-4) 한번은 일부 바리새인들이 매우 격렬한 분노를 나타내어, 예수께서 고쳐 주신 한 남자를 불러온 다음 회당에서 “그를 쫓아 냈”는데, 아마도 그를 추방하였을 것입니다! (요한 9:22, 34) 유대교 지도자들은 “들어가려 하지 않”은 탕자의 형처럼,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할 기회가 있었을 때 그렇게 하기를 거절하였습니다. (로마 12:15) 예수께서는 비유를 이어 나가시면서, 그들의 악한 추리를 더욱 폭로하셨습니다.
그릇된 추리
7, 8. (ㄱ) 탕자의 형은 어떻게 아들이라는 신분의 의미를 망각하였습니까? (ㄴ) 큰아들은 아버지와 어떻게 달랐습니까?
7 “그러자 그의 아버지가 나와서 그에게 간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여 말하였습니다. ‘저는 그토록 여러 해를 아버지를 위하여 종노릇하였고, 단 한 번도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제게는 단 한 번도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새끼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더불어 아버지의 살림을 탕진한 그 아들이 도착하자마자, 그를 위해 살지고 젊은 수소를 잡으셨습니다.’”—누가 15:28-30.
8 탕자의 형은 이러한 말로 아들이라는 신분의 참다운 의미를 망각하고 있음을 분명히 나타냈습니다. 그는 마치 고용인이 고용주를 섬기듯이 자기 아버지를 섬겼습니다. 그가 아버지에게 자신이 “아버지를 위하여 종노릇하였”다고 말한 바와 같습니다. 이 큰아들이 집을 떠나거나 아버지의 계명을 범한 적이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랑의 동기로 순종하였습니까? 그는 아버지를 섬기면서 진정한 기쁨을 발견하였습니까, 아니면 단지 “밭에서” 자기 의무를 수행하였다는 이유로 자신이 좋은 아들이라고 생각하면서 점점 더 자기 만족에 빠져 들어간 것입니까? 그가 참으로 효성이 지극한 아들이었다면, 아버지의 생각을 반영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동생에게 자비를 나타낼 기회가 있었을 때, 그의 마음에 동정심을 나타낼 여지가 없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비교 시 50:20-22.
9. 유대교 지도자들이 어떻게 큰아들과 비슷하였는지 설명하십시오.
9 유대교 지도자들은 이 큰아들과 비슷하였습니다. 그들은 법전에 엄격히 고착했기 때문에 자신들을 하느님께 충성스러운 사람들로 여겼습니다. 순종이 매우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사무엘 상 15:22) 그러나 행위를 지나치게 강조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하느님께 드린 숭배는 기계적인 일상 활동 즉 진정한 영성이 없는 겉치레 정성에 불과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정신은 전통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사랑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일반 사람들을 자기들 발 밑의 진흙처럼 여겼으며, 심지어 경멸하는 태도로 “저주받은 사람들”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요한 7:49) 사실, 그러한 지도자들의 마음이 그분에게서 멀리 떠나 있는데 하느님께서 어떻게 그들의 행위를 보고 감명을 받으실 수 있었겠습니까?—마태 15:7, 8.
10. (ㄱ) “나는 자비를 원하고 희생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적절한 교훈이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자비의 부족은 얼마나 심각한 문제입니까?
10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나는 자비를 원하고 희생을 원하지 않는다’고 한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 9:13; 호세아 6:6, 「신세」 참조) 그들은 무엇이 우선 순위에 와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자비가 없이는 그들의 모든 희생이 무가치한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인데, “자비가 없는”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죽어 마땅”하다고 간주되는 사람들 가운데 포함된다고 성서에서 말하기 때문입니다. (로마 1:31, 32) 그러므로 예수께서 하나의 반열로서 종교 지도자들이 영원한 멸망을 받도록 정해져 있다고 말씀하신 것도 놀랄 만한 일이 아닙니다. 분명히 그들의 자비 없는 태도가 그들이 그러한 판결을 받게 된 주요 요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마태 23:33) 그러나 이 반열에 속한 개개인들은 구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비유를 끝맺으시면서, 큰아들에게 하는 아버지의 말을 통해 그러한 유대인들의 생각을 바로잡아 주려고 애쓰셨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셨는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아버지의 자비
11, 12. 예수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는 큰아들을 어떻게 설득하려고 하였으며, 아버지가 ‘너의 동생’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데는 무슨 중요한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까?
11 “그러자 아버지가 말하였습니다. ‘얘야, 너는 언제나 나와 함께 있었고, 나의 것은 모두 너의 것이다. 하지만 너의 이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찾았기 때문에, 우리가 정말 즐기고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누가 15:31, 32.
12 아버지가 사용한 ‘너의 동생’이라는 표현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앞서 큰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면서 “탕자”를 “내 동생”이 아니라 “그 아들”이라고 불렀던 것을 다시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큰아들은 자신과 동생과의 가족적 유대를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아버지는 사실상 큰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애는 내 아들일뿐만 아니라, 너의 동생 즉 너의 친혈육이기도 하다. 너에게는 동생이 돌아온 것을 기뻐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예수의 말씀의 취지는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명백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이 업신여겼던 죄인들이 실은 그들의 “형제들”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습니다. (전도 7:20) 그러므로 탁월한 위치에 있던 그 유대인들에게는 죄인들이 회개할 때 기뻐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13. 예수의 비유는 갑자기 끝이 나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무슨 질문을 우리에게 남깁니까?
13 이 비유는, 아버지의 호소가 있은 다음 갑자기 끝이 납니다. 마치 예수께서 자신의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에게 그들이 직접 이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라고 권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큰아들이 어떻게 대답하였든지 간에, 이 이야기를 들은 각 사람은 이러한 질문에 직면하게 됩니다. ‘죄인들이 회개할 때 하늘에서도 기뻐하는데, 당신도 그러한 기쁨을 함께 나눌 것인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 질문에 대해 분명히 대답할 기회가 있습니다. 어떻게 그러합니까?
오늘날 하느님의 자비를 본받는 일
14. (ㄱ) 우리는 에베소 5:1에 나오는 바울의 교훈을 자비와 관련하여 어떻게 적용할 수 있습니까? (ㄴ) 하느님의 자비와 관련하여 무슨 오해를 하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까?
14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에게 이렇게 훈계하였습니다. “사랑받는 자녀로서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에베소 5:1)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감사하게 여기고 우리의 마음속 깊이 새긴 다음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면에서 이 특성을 나타내야 합니다. 하지만 조심해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죄를 가볍게 여기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냉담한 태도로 이렇게 추리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나는 죄를 지을 경우, 항상 기도로 하느님께 용서를 구할 수 있다. 그러면 그분은 자비를 베푸실 것이다.’ 그러한 태도는 성서 필자 유다가 말한 “우리 하느님의 과분한 친절을 방종을 위한 구실로 바꾸”는 것이 될 것입니다. (유다 4) 여호와께서 자비로우시긴 하지만, 회개하지 않는 범죄자들을 다루실 경우에 그분은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으십니다.—출애굽 34:7; 비교 여호수아 24:19; 요한 첫째 5:16.
15. (ㄱ) 특히 장로들이 자비에 대한 균형 잡힌 견해를 유지할 필요가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장로들은 고의로 지은 범죄를 관용하지는 않지만, 어떻게 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15 한편 우리는 다른 쪽 극단으로 치우치는 것 역시 그와 똑같이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고 경건하게 슬퍼하고 있음을 분명히 나타내는 사람들에게 완고하고 비판적이 되는 경향을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린도 둘째 7:11) 장로들은 여호와의 양들을 돌보는 일을 맡고 있으므로, 이 점에 있어서 반드시 균형 잡힌 견해를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사법 문제를 다룰 때 그러합니다. 그리스도인 회중은 깨끗하게 유지되어야 하며, 제명 처분을 통해 “악한 사람을 제거”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합당한 일입니다. (고린도 첫째 5:11-13) 그와 동시에 자비를 베풀 명확한 근거가 있을 경우에는 자비를 베푸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장로들은 고의로 지은 범죄를 관용하지는 않지만, 공의의 한계 내에서 사랑으로 자비롭게 처리하려고 애씁니다. 장로들은 항상 이러한 성서 원칙을 기억합니다. “자비를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자비 없는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기고 크게 기뻐합니다.”—야고보 2:13; 잠언 19:17; 마태 5:7.
16. (ㄱ) 성서를 사용하여, 여호와께서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 자신에게로 돌아오기를 얼마나 진실로 간절히 원하시는지 설명하십시오. (ㄴ) 우리 역시 회개하는 죄인들이 돌아오는 것을 환영한다는 것을 어떻게 분명히 나타낼 수 있습니까?
16 탕자의 비유에서 명백히 밝혀 주는 점은, 여호와께서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 자신에게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분은 그들이 스스로 가망이 없는 사람들임을 증명할 때까지는 계속 그들에게 권고하십니다. (에스겔 33:11; 말라기 3:7; 로마 2:4, 5; 베드로 둘째 3:9) 탕자의 아버지처럼 여호와께서는, 돌아오는 사람들을 존중심을 갖고 대하시며 가족의 온전한 성원들로 다시 받아들이십니다. 당신은 이 점에서 여호와를 본받고 있습니까? 한동안 제명되어 있던 동료 신자가 복귀될 때,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우리는 ‘하늘에서 기뻐’한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누가 15:7) 하지만 땅에서도, 당신의 회중에서도, 아니 당신의 마음속에서도 기뻐합니까? 그렇지 않으면,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과도 같이, 애초부터 하느님의 양 무리를 떠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을 환영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은 일인 것처럼, 다소 분개합니까?
17. (ㄱ) 1세기에 고린도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졌으며, 바울은 회중 성원들에게 그 문제를 어떻게 다루라고 권고하였습니까? (ㄴ) 바울의 훈계가 실제적이었던 이유는 무엇이며, 오늘날 우리는 그 훈계를 어떻게 적용할 수 있습니까? (또한 오른쪽의 네모 참조)
17 이 점에 있어서 우리 자신을 검토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기원 55년에 고린도에서 있었던 일을 고려해 봅시다. 고린도에는 회중에서 추방당하였으나 마침내 자신의 생활을 깨끗이 회복한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어떻게 해야 하였습니까? 형제들은 그가 회개한 것에 대해 미심쩍게 여기고 계속 그를 피해야 하였습니까? 오히려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이렇게 강력히 권하였습니다. “여러분은 ··· 그를 친절하게 용서하고 위로해야 합니다. 그것은 어떻게든 그 사람이 지나친 슬픔에 삼키우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이 그에 대한 여러분의 사랑을 확증하도록 권고합니다.” (고린도 둘째 2:7, 8) 흔히 회개한 범죄자들은 창피하고 절망적이라고 느끼기가 특히 쉬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동료 신자들과 여호와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확신시켜 줄 필요가 있습니다. (예레미야 31:3; 로마 1:12) 그렇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18, 19. (ㄱ) 지난번에 고린도 사람들은 어떻게 지나치게 관대한 태도를 나타냈습니까? (ㄴ) 자비 없는 태도로 인해 어떻게 고린도 사람들은 “사탄에게 속아 넘어”갈 수도 있었습니까?
18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용서할 것을 권하면서, 그렇게 해야 할 한 가지 이유를 이렇게 제시하였습니다. “우리가 사탄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의 계략을 모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둘째 2:11) 바울은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한 것입니까? 지난번 편지에서 바울은 고린도 회중이 지나치게 관대하였기 때문에 책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무 처벌도 하지 않은 채 앞서 언급한 그 사람이 죄를 짓도록 내버려 두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그 회중은—특히 그 회중의 장로들은—사탄이 바라는 대로 행하였던 것입니다. 사탄은 그 회중이 나쁜 평판을 받는 것을 좋아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고린도 첫째 5:1-5.
19 그들이 이제 다른 쪽 극단에 치우쳐 회개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려 하였다면, 그들은 또 다른 방법으로 사탄에게 속아 넘어가는 것이 될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그러합니까? 사탄이 그들의 가혹하고 자비 없는 태도를 이용할 수 있다는 면에서 그러합니다. 회개한 죄인이 “지나친 슬픔에 삼키우”게 된다면—혹은 「오늘날의 영어 역본」에 의하면 “슬픈 나머지 완전히 포기하”게 된다면—장로들은 여호와 앞에 참으로 심각한 책임을 지게 될 것입니다! (비교 에스겔 34:6; 야고보 3:1) 예수께서 추종자들에게 “이 작은 이들 중의 하나”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신 후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당신의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십시오.”a—누가 17:1-4.
20.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할 때 어떻게 하늘에서는 물론 땅에서도 기뻐하는 일이 있습니까?
20 매년 순결한 숭배로 돌아오는 많은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베푸신 자비에 대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내 인생에서 그 때처럼 행복했던 기억은 결코 없었습니다.” 한 그리스도인 자매는 자신이 복귀된 때에 대해 그렇게 말합니다. 그 자매와 함께 천사들이 기뻐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할 때 ‘하늘에서는 기뻐’하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 역시 그러한 기쁨에 동참하게 되기 바랍니다. (누가 15:7)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여호와의 자비를 본받게 될 것입니다.
[각주]
a 고린도의 그 범죄자는 비교적 짧은 기간 내에 복귀된 것으로 보이지만, 이 경우가 모든 제명 처분에 대한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례에 따라 각각 다르다. 어떤 범죄자들은 추방되자마자 거의 그 즉시 진정한 회개를 분명히 나타내기 시작한다. 그런가 하면 그러한 태도가 분명히 나타날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모든 경우에 복귀되는 사람들은 먼저 경건한 슬픔의 증거를 나타내야 하며, 가능한 한 회개에 알맞은 일을 하고 있음을 분명히 나타내야 한다.—사도 26:20; 고린도 둘째 7:11.
복습
◻ 탕자의 형은 어떤 면에서 유대교 지도자들과 비슷하였습니까?
◻ 탕자의 형은 어떻게 아들이라는 신분의 참다운 의미를 망각하였습니까?
◻ 하느님의 자비를 반영할 때, 우리는 어떤 두 가지 극단을 피할 필요가 있습니까?
◻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의 자비를 본받을 수 있습니까?
[17면 네모]
‘그에 대한 여러분의 사랑을 확증하십시오’
바울은 회개를 분명히 나타낸 추방된 범죄자에 대해 고린도 회중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여러분이 그에 대한 여러분의 사랑을 확증하도록 권고합니다.” (고린도 둘째 2:8) “확증”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는 “유효하게 하다”를 의미하는 법률 용어이다. 그렇다. 회개하고 복귀된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랑받고 있으며 다시 한 번 회중 성원으로 환영받고 있음을 느낄 필요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회중 내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사람이 추방되거나 복귀된 과정에 관한 특정한 상황을 모르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에 더하여 회개한 사람의 범죄 때문에—아마도 심지어 오랜 기간—개인적으로 영향을 받거나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므로 복귀 발표가 있을 때 우리가 그러한 점들에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어 환영한다는 표현을 하지 않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환영한다는 말을 할 수 있다.
복귀된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인 회중 성원으로 다시 환영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참으로 믿음이 강화된다! 우리는 그러한 회개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왕국회관에서나 봉사의 직무에서나 그 밖의 적절한 기회에 그들과 우정을 나눔으로 그들을 격려할 수 있다. 그처럼 이 소중한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확증한다고 해서 즉 유효하게 한다고 해서, 우리가 어떤 면으로든 그들이 저지른 죄의 심각성을 과소 평가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들이 죄 많은 행로를 배척하고 여호와께로 돌아왔다는 사실에 대해 하늘의 수많은 천사들과 함께 기뻐하는 것이다.—누가 15:7.
[15면 삽화]
큰아들은 동생이 돌아온 것을 기뻐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