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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고 말만하지 않고 행함을 보임파수대—1986 | 1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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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고 말만하지 않고 행함을 보임
“만일 ··· 너희 중에 누구든지 [궁핍한 형제]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야고보 2:15-17.
1. 나이지리아에 사는 한 형제는 어떻게 해서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읍니까?
레베치 오크와라오차는 1880년 이전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따라서 그는 이제 100세가 훨씬 넘었읍니다. 그는 대를 이어서 나이지리아의 수호신인 주주를 숭배하였읍니다. 그러다가 80대가 되었을 때, 그는 ‘여호와의 증인’과 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하였읍니다. 그는 배운 것을 적용하였으며 침례를 받았읍니다. 그렇게 하여 약 30년 동안 ‘증인’으로 생활해 왔읍니다. 얼마 전에 심한 폭우가 쏟아진 후에 그가 속한 회중의 장로들이 그와, 72세된 영국 국교회에 다니는 그의 부인을 찾아왔읍니다. 두 사람은 낙심해 있었읍니다. 그들이 사는 초가집은 마루가 물에 잠겨 있었고, 숙소를 마련해 주거나 복구하는 일을 도와 줄 만한 친척이 그들에게는 아무도 없었읍니다. 당신이 그 장소에 있었다면, 어떻게 하였을 것입니까? 있었던 일을 알아 보기 전에, 성서의 교훈을 몇 가지 살펴 보도록 합시다.
2. 우리가 “선한 일”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는 것이었읍니다. (디도 2:14) 이러한 선한 일은 생명을 구조하는 사업인 왕국 전파 활동을 중심으로 한 것입니다. (마가 13:10; 계시 7:9, 10)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선한 일”에는 중요한 전파 활동만 포함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상의 일이 포함됩니다. 예수의 이부 동생 야고보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야고보 1:27.
3, 4. 우리는 디모데 전서 3-5장으로부터 “선한 일”에 관하여 무엇을 배울 수 있으며, 따라서 무슨 질문이 생깁니까?
3 제 1세기의 회중 활동에는 두 종류의 “선한 일”이 포함되었읍니다. 디모데 전서 3장에서 감독자 및 봉사의 종의 자격을 설명한 다음, 사도 바울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불렀읍니다. (디모데 전 3:1-15)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진리의 가르침에 계속 머물면 그들 자신과 그들에게서 듣는 자를 구원할 수 있다고 설명하였읍니다. (디모데 전 4:16) 그런 다음 바울은 “외로운” 충실한 과부를 물질적으로 돌보는 “선한 일”에 관하여 이야기하였읍니다.—디모데 전 5:3-5.
4 따라서 복음을 전하는 일 외에, 우리는 ‘환난 중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그러한 “선한 일”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도하는 자들”로서, 장로와 봉사의 종들이 이 면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히브리 13:17) 우리 중 다른 사람들은 이 면에서 그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읍니까? 또한 이러한 종류의 “선한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우리가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훌륭하게 인도하는 장로들
5. 바울은 특별히 위급한 일에 어떻게 대처하였으며, 오늘날 어떤 유사한 일을 볼 수 있읍니까?
5 유대에서 특별히 위급한 일이 일어났을 때, 바울은 장로로서 구제 봉사를 질서있게 수행하는 일을 인도하였읍니다. 그처럼 인도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여하한 혼란도 최소 한도로 줄일 수 있었으며, 필요에 따라서 쓸 것이 공정하게 나누어 질 수 있었읍니다. (고린도 전 16:1-3; 사도 6:1, 2) 오늘날의 장로들도 홍수나 산사태, 해일, 대폭풍 또는 지진과 같은 재해가 있은 후에 구제 봉사를 인도해 옴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개인적 관심을 나타내는 일에 눈을 두었읍니다.’—빌립보 2:3, 4, 신세.
6.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재해가 발생하였을 때, 장로들은 어떠한 반응을 나타냈읍니까?
6 「깨어라!」(영문) 1986년 10월 8일호에는 활동적인 그리스도교에 관한 한 본보기가 실려 있읍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 둑이 무너져 홍수가 발생하였을 때 장로들은 즉시 행동을 취하였읍니다. 이 영적 목자들은 실종된 사람이 누구인지, 치료나 식량을 필요로 하거나 숙소를 마련해 주어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 신속히 양떼를 점검하였읍니다. 그 장로들은 ‘여호와의 증인’의 본부 사무실과 협력하였읍니다. 구제 위원회가 조직되었으며, 동료 ‘증인’으로서 돕기 위해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조별로 조직되어 피해를 입은 가정을 청소하고 복구하였읍니다. 장로들은 필수품을 사서 나누어 주는 일도 감독하였읍니다. 이러한 예는, 그처럼 특별히 위급한 일이 발생하였을 때 ‘제자들이 각기 자신이 베풀 수 있는 또는 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서 결정’할 수 있지만 지방 장로들과 함께 상의하고 그들에게서 지시를 받는 것이 지혜로운 일임을 잘 설명해 줍니다.—비교 사도 11:27-30.
7. 우리는 보다 흔히 있을 수 있는 어떠한 어려운 일에도 반응을 나타내야 합니까?
7 우리가 (장로이든 아니든) 재해에 뒤따르는 매우 위급한 일에 반응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가 이따금 있을 수 있지만, 보다 흔한 일로 그에 못지 않게 중요시될 수 있는 어려운 일이 바로 우리의 회중 내에서 생길 수 있읍니다. 이같은 어려운 일은 대재해만큼 소문이 자자하지 않기 때문에, 간과하거나 주의를 기울인다 해도 아주 적게 기울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지방적인 어려운 일이 실제로는 야고보서 2:15-17에 언급된 것에 해당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회중에서 생기는 도전이 우리 자신의 ‘믿음이 행함이 있는지 아니면 그 자체가 죽은 것’인지를 나타내는 가장 큰 도전이 될 수 있읍니다.
8. 감독자들은 회중 내의 어려운 일을 다루는 일에서 어떻게 지혜를 나타낼 수 있읍니까?
8 인도하는 면에서, 장로들은 “지혜와 총명”을 나타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야고보 3:13) 장로들은 지혜가 있어야 이 형제 저 형제(또는 이 회중 저 회중)를 찾아 다니며 돈을 꾸거나 “도움”을 얻기 위해서 말을 지어내는 사기꾼들로부터 양떼를 보호할 수 있읍니다. 감독자들이 게으름을 동정하지 않는 것은 지혜로운 일입니다. 성서의 규칙이 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데살로니가 후 3:10-15) 그렇지만, 장로들은 ‘마음 문을 닫고 동정하지 않’거나 동료 형제들 역시 그렇게 하라는 식으로 인도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I 요한 3:17, 새번역) 장로들이 지혜를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되는 또 다른 이유는 성서에서 궁핍한 사람이나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돌보는 일에 대해 한없이 규칙을 알려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시대마다 그리고 지역에 따라서 상황이 다릅니다.
9. (ㄱ) 제 1세기에 도움을 받기에 합당한 과부들을 어떻게 돌봐 주었읍니까? (ㄴ) 오늘날에는 그러한 사람들이 어떤 형태의 도움의 혜택을 받게 할 수 있읍니까?
9 예를 들어, 디모데 전서 5:3-10에서 사도 바울은 “외로운” 상태에 있는, 도움을 받기에 합당한 과부에 관하여 이야기하였읍니다. 그들을 도울 우선적인 책임이 있는 사람은 믿음 안에 있는 그들의 친족이었읍니다. 그러한 의무를 소홀히 한다면 그 친족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신분이 해를 입을 수 있었읍니다. 하지만 궁핍하면서 도움을 받기에 합당한 과부가 그러한 방법으로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면, 장로들이 어떤 물질적인 도움을 회중으로부터 마련해 주었을 것입니다. 최근에, 일부 회중에서도 그들 가운데 있는 특히 궁핍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 적이 있읍니다. 그러나, 요즈음 대부분의 나라에는 노약자나 직장을 원하지만 구할 수 없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세금으로 지원되는 마련이 있읍니다. 하지만 다른 방법으로 돕고자 하는 그리스도인 장로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참으로 궁핍하고 사회 복지 마련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이 있는데도 신청하는 방법을 모르거나 너무 소극적이어서 요청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혜택을 받지 못한 경우도 있읍니다. 따라서 장로들은 정부 기관에 문의하거나 이러한 문제에 경험이 있는 ‘증인’과 접촉할 수 있읍니다. 그후에 유능한 형제나 자매를 통해서 궁핍한 사람이 이용 가능한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돕는 마련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로마 13:1, 4.
실제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조직함
10. 양무리를 칠 때, 장로들은 무엇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까?
10 깨어 있는 감독자들은 고통을 당하거나 궁핍한 사람들이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종종 주선해 주는 역할을 하곤 합니다. 장로들은 양떼에 속한 모든 사람을 돌보면서 영적 및 육적인 필요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장로들이 “기도하는 것과 말씀의 봉사”를 중요시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사도 6:4, 난외주 참조) 따라서, 그들은 몸져 누워 있거나 병원에 입원한 양무리의 성원을 영적으로 먹이기 위해서 어떤 마련을 하고자 할 것입니다. 장로들은 집회에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집회 내용을 녹음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번갈아서 녹음된 테이프를 전달해 준 장로나 봉사의 종들은 그들이 방문함으로써 다른 영적인 선물을 나누어 줄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읍니다. (로마 1:11, 12) 동시에, 그들은 새로운 필요를 알아낼 수 있읍니다.
11. 어려운 처지에 있는 자매를 돕기 위한 마련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예를 들어 보십시오.
11 장로들은, 신체 장애가 있거나 노쇠한 자매일지라도 어떤 자매의 도움을 받아서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을 수 있다면 때때로 ‘왕국회관’에 참석하거나 야외 봉사에 잠시나마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교 시 23:1, 2, 5.) 감독자들은 그러한 마련을 하기 위해서 성원 중의 한 사람을 임명하기까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장로들은 자원하는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동반하거나 차편을 제공해 줄 것을 회중에 요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계획을 세워 한다면, 한층더 질서있게 일들이 돌보아질 수 있을 것입니다.
12. 병약하거나 노쇠한 사람들을 돕는 데 있어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감독자들과 협력할 수 있읍니까?
12 장로들은 도움을 베풀거나 사랑에 찬 마련을 할 필요가 있는 다른 문제에 관하여 알게 될 수 있읍니다. 예를 들면, 노쇠하거나 병약한 자매라면 자기 집안 일을 예전처럼 잘 돌볼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봉사의 종이나 다른 형제나 자매들이 그런 자매에게 일손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입니까? 잔디를 깎고 정원의 나무들을 손질해 준다면 그 자매는 이젠 집안 일로 이웃에게 흠잡힐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훨씬 기분이 나아질 것입니다. 정원의 잡초를 뽑아 주거나 물을 주어야 할 필요는 없읍니까? 장을 보러 가는 자매가 몸져 누운 자매에게 자진해서 물어보고 필요한 물품들을 사다 줄 수 있을 것입니까? 기억하십시오. 사도들은 그와 같이 실제적인 면에 관심이 있었으며, 그들은 돕기 위해서 회중 내의 유능한 사람들을 조직하였읍니다.—사도 6:1-6.
13. 앞서 언급된 그 나이지리아 형제를 장로들이 도움으로써 어떤 일이 있게 되었읍니까?
13 앞서 언급된 장로들은 양치는 방문을 하는 도중, 레베치 오크와라오차 부부가 비탄에 잠겨 있는 것을 알고는 그러한 그리스도인 염려를 나타내었읍니다. 그 장로의 회는 신속히 그 문제를 거론하였으며, 회중에게 그들이 계획하고 있는 일 즉 집을 다시 짓는 일을 알렸읍니다. 여러 형제 자매들이 재료를 헌물하였으며 기꺼이 그 계획에 참여하였읍니다. 일주일 만에, 그들은 안전하고 금속 재료로 지붕을 입힌 자그마한 집을 지었읍니다. 나이지리아에서 들어온 보고에 의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다음번 폭우가 있기 전에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 장시간 바삐 일하는 형제 자매들을 보고는 놀랐으며 자발적으로 음식과 음료를 가져 왔읍니다. 많은 마을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는커녕 사람들에게서 빼앗아 가는 다른 종교 집단들에 대해 불평을 터뜨린다고 그들은 말하였읍니다. 이러한 일은 그 마을의 화제 거리가 되었읍니다. 마을 사람들은 반응이 아주 좋아졌으며, 많은 가정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읍니다.”
이러한 “선한 일”에 우리 자신이 참여함
14. 우리는 동료 형제들에게 “선한 일”을 행하는 것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져야 합니까?
14 물론, 우리는 연로하거나 병약하거나 입원해 있는 사람들 또는 우리 주변에서 달리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필요에 종종 개인적으로 직접 반응을 나타낼 수 있읍니다. 만일 우리가 참 그리스도교를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면, 솔선해서 도우려 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읍니까? (사도 9:36-39)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압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사랑입니다. 실제적인 도움을 베푸는 어떤 경우이든 첫째 요인은 우리에게 순수한 관심과 동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 중 아무도 노인을 젊어지게 하거나 병을 기적으로 치료하거나 회중 내의 모든 사람의 경제적인 수준을 균일하게 할 수는 없읍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염려를 나타내어 베푸는 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그러한 영이 있고 또 우리가 그에 따라 행한다면, 우리와 우리가 돕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의 띠가 강화될 것입니다. 바울과 오네시모 사이의 사랑의 띠가 그렇게 되었읍니다. 오네시모는 ‘갇힌 중에 있는 바울을 섬’긴 비교적 새로운 그리스도인이었읍니다.—빌레몬 10-13; 골로새 3:12-14; 4:10, 11.
15. 참으로 궁핍하고 도움을 받기에 합당한 일부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겠읍니까?
15 때때로 우리는 익명으로 보내는 것이든 개인적으로 베푸는 것이든 물질적으로 궁핍한 사람에게 친절한 선물을 함으로써 반응을 나타낼 수 있읍니다. 어떤 형제가 직장을 잃었거나 다른 일자리를 찾지 못하였읍니까? 어떤 자매가 예기치 않은 치료비를 내야 할 입장에 있읍니까? 그 자매가 사고를 당했거나 강탈을 당하였읍니까? 이러한 상황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날 수 있읍니다. 우리가 “자비의 선물들”을 한다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우리의 아버지께서 주목하시고 승인하실 것입니다. (마태 6:1-4, 신세) 아니면, 욥이 했던 바와 같이, 돈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옷가지를 베풀 수 있고 과부나 고아들에게 양식이나 집에서 마련한 식사를 베풀 수 있을 것입니다.—욥 6:14; 29:12-16; 31:16-22.
16. 때때로 다른 어떤 실제적인 방법으로 도움을 베풀 수 있읍니까? 예를 드십시오.
16 우리의 경험이나 친밀한 접촉은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근원이 될 수 있읍니다. 한 형제가 모 형제에게 돈을 빌려 줄 것을 청하였읍니다. 모 형제가 보인 친절한 반응은 이러하였읍니다. ‘어떻게 해서 저에게 꾸어 줄 만한 여분의 돈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셨는지요?’ 그 대답은 이러하였읍니다. ‘형제는 남달리 돈을 잘 관리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종종 궁핍한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 준 적이 있었던 모 형제는 분별력있게 이처럼 제안하였읍니다. ‘글쎄요 형제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도움을 좀 받아서 돈을 관리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군요. 저의 도움을 원하신다면 기꺼이 도와 드리겠읍니다.’ 생활 수준을 새로운 환경에 맞게 조절할 필요가 있거나 비교적 좀 덜 중히 여기는 직종일지라도 기꺼이 열심히 일하고자 하는 형제들은, 그러한 유의 도움에 대해서 특히 고맙게 여깁니다. 물론 참으로 돈을 빌려 주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경우라면, 후일에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서명을 한 증서를 만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돈을 빌리기를 꺼리는 많은 형제들은 권고의 형태로든 경험담을 함께 나누는 식으로든 베푸는 개인적인 도움에 대해 깊이 감사할 것입니다. (로마 13:8) 서아프리카에서 있었던 엠마누엘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경험담은 그 점을 잘 설명해 줍니다.
엠마누엘은 숙련된 이발사였지만, 손님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생계비를 벌지 못하는 무능함 때문에 낙심하였다. 그러자 그 회중의 한 깨어 있는 장로는 엠마누엘에게 다른 일을 해볼 생각이 있는지를 물었다. 그의 대답은 그렇다는 것이었다. 그는 직업적인 자존심에 구애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장로는 친분이 있는 사람들과 상의한 다음, 병원에서 시중드는 사람으로 일하는 직업을 엠마누엘에게 알선해 주었다. 그는 이 일을 잘해 내었으며, 회중 내의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었다.
17. 우리는 병원에 입원한 형제에게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읍니까? (시 41:1-3)
17 동료 그리스도인이 병원이나 요양원에 입원해 있을 때는 특별히 도울 기회가 됩니다. 이 경우에도, 진실한 관심과 염려를 나타내는 것이 기본적으로 요구됩니다. 환자에게 자원해서 격려적인 그리스도인 책자를 읽어주거나 고무적인 경험담을 이야기해 줌으로써 그러한 관심과 염려를 나타낼 수 있읍니다. 하지만 우리가 도울 수 있는 신체적 필요가 있읍니까? 어떤 지역에서는 의료 시설을 이용하면 과중한 부담이 되기 때문에, 어떤 환자는 방문객이 도와 주지 않으면 목욕이나 식사를 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의사가 허락한다면, 환자에게 자양분있는 식사를 제공하거나 환자가 머리를 감거나 목욕하는 일을 도와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따뜻한 옷이나 슬리퍼도 고맙게 여기지 않겠읍니까? (디모데 후 4:13) 또는 환자가 염려하고 있는 어떤 문제를 돌봐 주겠다고 제안해 보지 않겠읍니까? 아마 환자는 수표를 현금으로 바꿔서 어떻게 각종 요금을 내야 할지를 염려할지 모릅니다. 우리가 그를 위해서 심지어 작은 일들, 이를 테면 그의 집에 우편물이 쌓이지 않게 한다든가 화분에 물을 준다든가 난방기가 꺼져 있는지를 확인해 준다면 근심을 덜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18. 당신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형제들에 대해서 어떻게 하기로 결심하였읍니까?
18 틀림없이, 우리 각 사람은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고 말만하지 않고 행함을 보이는 면에서 개선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부면을 찾아 낼 수 있읍니다. (야고보 2:16) 우리 회중 내의 형제 자매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참으로 물질적으로 궁핍하거나 병이 났거나 신체 장애가 있거나 몸져 누워 있어서 도움을 받기에 합당한 성원이 있읍니까?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신 이들 사랑하는 회중 성원들을 어떻게 실제적인 방법으로 도와 줄 수 있읍니까? 이러한 태도를 갖는 것은 어려운 일이 생길 때 더욱 기꺼이 신속히 응할 태세를 갖추게 해줄 것입니다.
19. (ㄱ) 이 부면에서 균형이 매우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선은 무엇이며,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시 72:4, 16)
19 우리는 형제들을 힘써 도움으로써, 우리의 믿음이 죽은 것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동일한 믿음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우리는 그리스도인 전파 활동에도 열심히 참여하게 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물질적으로 돕는 것과 그리스도인 전파 활동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것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할 필요가 있읍니다. (비교 마태 15:3-9; 23:23.)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하신 예수의 교훈은 그러한 균형을 잘 나타내 줍니다. 예수께서는 물질적인 양식을 영적인 양식과 비교하여 후자가 빼앗겨서는 안 될 “좋은 몫”이라고 말씀하셨읍니다. (누가 10:39-42, 새번역) 병든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이 현 사물의 제도에서는 항상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선한 일을 할 수 있고 또 마땅히 해야 합니다. (마가 14:7)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하면서도 가장 지속적인 선은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왕국’에 관해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께서 집중적으로 수행하셨던 일입니다. (누가 4:16-19) 그 일이야말로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영원히 구제받을 수 있게 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 희망을 두고 “참된 생명을 취하”도록 동료 형제와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입니다.—디모데 전 6: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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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고 말만하지 않고 행함을 보임파수대—1986 | 1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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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면 네모]
회중의 돌봄을 받음
어느 시골 지역의 작은 회중으로 이사한 한 부부는 이처럼 생각을 자극하는 보고를 하였다.
‘3년 전에, 아내와 나는 집을 팔고서, 얼마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장성된 도움을 필요로 하는 먼 곳에 있는 회중으로 이사하였읍니다. 곧 저는 네 가지 책임있는 직분을 맡게 되었읍니다.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했고 그들과 함께 일하기를 원했읍니다. 수개월이 지나 회중의 영이 개선되었으며, 두명의 훌륭한 장로가 이사왔읍니다.
‘저의 자매는 건강 문제를 갖기 시작했고, 작년에는 대수술을 받을 필요가 있었읍니다. 자매가 입원하던 날, 저는 간염에 걸렸읍니다. 2개월 후에, 그 지역의 경제 사정이 아주 나빴기 때문에 일시 해고를 당하였읍니다. 가지고 있던 돈이 다 떨어지고 직장을 일시 잃은 상태에서, 우리 두 사람은 다 건강을 회복하려고 애쓰는 중이었읍니다. 지역 대회는 다가오고 있었고 프로그램의 한 부분을 맡았기 때문에 저는 의기 소침해졌읍니다. 또한 몇주 후에 있을 순회 대회에서도 한 임명을 받았읍니다. 하지만 돈이 한푼도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대회에 참석할 수 있을지 더구나 가족을 어떻게 돌봐야 할지 막막했읍니다. 어느날 아침 아내가 야외 봉사하러 나간 다음, 앉아서 우리의 처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읍니다.
‘창밖을 내다 보면서, ‘여호와께 대한 나의 신뢰심은 어디로 갔는가?’하고 자문해 보았읍니다. 아내에게는 걱정 말라고 얘기해 놓고는, 이제 와서는 제가 불안해하기 시작하는 것이었읍니다. 그때 저는 여호와께 “적은 믿음”을 나타내어서 그분께 도움을 청하였읍니다. 기도를 마치는 순간, 한 형제가 문을 두드렸읍니다. 그는 커피 한잔 마시러 함께 가자고 하였읍니다. 저는 그날 저녁 집회에서 수행해야 할 프로그램이 있고 해서 마시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말했읍니다. 그러나 그는 단 몇분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하면서 막무가내로 우겼읍니다. 그래서 우리는 같이 갔읍니다. 반시간 후에 돌아와서 차에서 내렸을 때, 기분이 한결 좋았읍니다.
‘집에 들어섰을 때, 부엌 조리대에 식료품이 쌓여 있는 것이 눈에 띄었읍니다. 아내가 장보러 갔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읍니다. “하지만 잠깐, 우리에겐 돈이 한푼도 없는데 어떻게 장을 볼 수 있었지.”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봉투 하나가 보였읍니다. 앞면에 이와 같이 씌여 있었읍니다.
‘“두분을 마음깊이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로부터. 이것을 헌금함에 넣지 마십시오. 두분을 위해 마련된 것입니다.”
‘저는 눈물을 억제할 수 없었읍니다. 저의 “적은 믿음”이 생각났고, 그러자 눈물이 더욱 쏟아졌읍니다. 그때 아내가 집에 들어왔읍니다. 저는 그저 식품과 다른 선물을 가리킬 뿐이었읍니다. 아내 역시 함께 들어온 다른 두 자매와 함께 울음을 터뜨렸읍니다. 우리는 그렇게 많은 것을 받을 수 없다고 설명하려 했지만, 그 자매들은 우리에게 누가 무얼 냈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었읍니다. 전체 회중이 참여하였으며, 그들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싶었다는 것이었읍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더욱 쏟아졌읍니다!’
후에, 그 형제가 이 이야기를 쓸 무렵, 그는 직장에 다시 나가게 되었다. 그 동안 그와 그의 아내는 보조 파이오니아 봉사에 참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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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고 말만하지 않고 행함을 보임파수대—1986 | 1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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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면 네모]
그리스도인 사랑의 증거
미국 서부에 있는 한 ‘여호와의 증인’의 회중은, 성경에서 장려하는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타낼 수 있는 보기 드문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중증의 뇌성 마비 신체 장애자를 위한 주립 재활원이 그 회중 구역에 개설된 것이다. 이 재활원에 최초로 수용된 사람들 중에는 25세된 게리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자기 집에서 더 이상 보살핌을 받지 못하게 된 사람이었다. 게리는 뇌성 마비로 인해 수족이 완전히 마비되었으며, 말을 하는 데도 지장을 받았다.
게리는 7년 전에 침례받은 ‘증인’이었다. 새로운 재활원에 들어가자 마자, 그는 그 지방 회중 집회에 참석하기를 원하였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는 그의 부모가 한 동안은 게리를 실어다 주었다. 하지만 부모가 노령이었기 때문에, 회중의 다른 형제들이 이 일을 돕기 시작하였다. 밴을 가지고 있는 한 형제가 자신의 아내 및 두 딸과 함께 준비하고, 집회 시작 45분 전에 집을 출발하여 게리를 태워 집회에 오곤 하였다. 집회 후에는 재활원에 다시 태워다 주었기 때문에, 이 가족은 아주 늦게 귀가하곤 하였다.
이런 일이 있게 되자, 재활원 내에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다른 뇌성 마비 환자들이 성서 진리에 관심을 나타낸 것이다. 이내 환자 중 둘이 성서 연구에 응하였다. 얼마 후, 다른 환자들도 관심을 보였다. 이들 모두를 어떻게 집회로 태워다 줄 수 있을 것인가? 이번에는 회중의 다른 가족이 밴을 구입하였고, 지방 ‘증인’ 소유의 한 사업체에서 세대째의 밴을 이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이 차량들은 환자를 태우기에는 때때로 부적당하거나 불편하였다. 회중이 취할 수 있는 좀더 나은 방도가 있을 것인가?
장로들은 이 문제에 대해 의논하고 나서 집회를 왕복하며 신체 장애자들만을 수송할 목적으로 밴을 구입할 것을 제안하였다. 회중 성원들은 동의하였고, 기꺼이 헌금하였다. 주변 지역에 사는 다른 ‘증인’도 이 계획에 관해 듣고는 역시 헌금하였다. 마침내 밴 한대를 구입하였으며, 휠체어를 그대로 차 내에 실을 수 있도록 개조하였다.
그래서, 매달 회중 서적 연구 집단이 돌아가면서 집회와 대회로 이 밴을 운전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다. 뇌성 마비 환자 재활원의 환자들 중 다섯명이 정기적으로 참석하고 있으며, 현재 그 중 네명은 침례받은 ‘증인’이다. 그들은 많은 형제 자매에게 알려지고 또 그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으며, 형제 자매들은 돕는 데서 오는 행복감을 경험하고 있다. 어떻게 그런 경험을 하는가? 집회 중에 노래책을 붙잡아 주거나 성귀를 찾아 줌으로써 그런 경험을 한다. 순회 및 지역 대회에서, 그들은 스스로 식사를 할 수 없거나 자기를 돌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까지 한다. 이 일은 상호간에 참으로 가슴 뭉클케 하는 친밀감을 싹트게 하였다. 그러면 게리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는 현재 그처럼 그리스도인 사랑의 증거를 보여온 이 회중에서 봉사의 종으로 일하고 있다.—사도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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