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계속 기대하여라”
1, 2. (ㄱ) 우리는 무엇을 자문해 볼 수 있습니까? (ㄴ) 열두 예언자들 중 일부는 어떤 시대적 상황 속에 살았으며, 미가는 어떤 태도를 갖고 있었습니까?
당신은 땅에서 악을 제거할 여호와의 날을 얼마 동안이나 기다려 왔습니까? 그리고 얼마 동안이나 기다릴 생각입니까? 당신은 그렇게 기다리면서 어떤 태도로 어떻게 처신하면서 살아갈 것입니까? 분명 우리의 대답은 하늘에 가기를 기대하면서도 자기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교회 신자들과는 다를 것입니다.
2 그 큰 날을 기다리는 동안 열두 예언자가 기록한 책들은 대단히 도움이 됩니다. 그 예언자들 중 상당수는 하느님의 사법적 개입이 임박한 때에 살았습니다. 예를 들어, 미가가 봉사한 시기는 기원전 740년에 아시리아 사람들을 통해 사마리아를 처벌하실 때가 임박한 시기였습니다. (20면과 21면의 연대표 참조) 세월이 좀 흐른 뒤에는 유다에 대한 여호와의 날도 어김없이 도래하였습니다. 미가는 하느님께서 정확히 언제 조처를 취하실지 모르니까 가만히 앉아서 하느님께서 얼른 조처를 취하시기를 바라며 어떻게 되는지 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습니까? 미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늘 여호와를 바라보겠다. 나는 내 구원의 하느님을 기다리는 태도를 보이겠다. 나의 하느님께서 내 말을 들으실 것이다.” (미가 7:7) 그렇습니다. 앞으로 있을 일을 확신한 미가는 파수대 위에서 늘 밖을 바라보며 경계 근무 중인 보초와 같은 태도를 나타냈습니다.—사무엘 둘째 18:24-27; 미가 1:3, 4.
3. 예루살렘의 멸망이 임박한 때에 하박국과 스바냐는 어떤 견해를 나타냈습니까?
3 이번에는 도표에서 스바냐와 하박국을 찾아보십시오. 이 두 예언자가 봉사한 시기는 예루살렘이 멸망된 때인 기원전 607년이 임박한 때였음에 유의하십시오. 그렇지만 그들도 하느님의 심판 집행이 곧 있을 것인지 수십 년 후에 있을 것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하박국 1:2; 스바냐 1:7, 14-18) 스바냐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너희는 계속 나를 기다려라.’ 여호와의 말이다. ‘내가 노략물을 향하여 일어서는 날까지 기다려라. 나의 판결은 ··· 그들에게 나의 질책을, 나의 모든 타오르는 분노를 쏟는 것이다.’” (스바냐 3:8) 스바냐보다 바로 얼마 후에 살았던 하박국은 어떠하였습니까? 하박국은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그 환상은 지정된 때에 대한 것이며, 끝을 향하여 숨가쁘게 나아가고 있다. 그 환상은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니, 비록 더딜지라도 계속 기대하여라. 틀림없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늦어지지 않을 것이다.”—하박국 2:3.
4. 스바냐와 하박국은 어떤 상황에서 예언하였으며, 그들은 어떤 태도로 예언하였습니까?
4 스바냐 3:8과 하박국 2:3에 나오는 말을 선언할 당시의 상황을 보면 더 많은 점을 깨닫게 됩니다. 스바냐는 일부 유대인들이 “여호와께서는 선을 행하지도 않으시고 악을 행하지도 않으실 것”이라고 말하던 때에 “여호와의 분노의 날”을 공포하였습니다. 그날에 적국들과 빗나간 유대인들은 여호와께서 얼마나 불쾌해하시는지를 느끼게 될 것이었습니다. (스바냐 1:4, 12; 2:2, 4, 13; 3:3, 4) 스바냐는 하느님께서 질책하고 분노하시는 것을 두려워할 것입니까? 그는 두려워하기보다는 ‘기다리는’ 마음을 가져야 하였습니다. ‘하박국은 어땠을까?’ 하고 궁금할지 모릅니다. 그도 역시 “계속 기대”해야, 즉 계속 기다리는 마음을 가져야 하였습니다. 맞습니다. 스바냐와 하박국은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상황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을 것인 양 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박국 3:16; 베드로 둘째 3:4) 살펴본 것처럼, 그 두 예언자의 중요한 공통점은 두 사람 모두 ‘계속 기대해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알고 있듯이, 그 두 예언자가 기대했던 일은 기원전 607년에 역사적 사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계속 ‘기대한’ 것은 지혜로운 일임이 증명되었습니다.
5, 6. 하느님의 목적의 성취와 관련하여 지금이 어떤 시기인가를 생각할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합니까?
5 우리도 현 사물의 제도에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닥칠 것임을, 그 일이 틀림없는 실제 사실이 될 것임을 동일하게 확신할 수 있습니다. 분명 우리는 그 점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런데 스바냐와 하박국처럼 우리도 정확히 언제 그날이 올지는 모릅니다. (마가 13:32) 하지만 그날은 확실히 올 것이며, 우리 시대에 성서 예언이 성취되고 있는 것은 그날이 임박함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그 예언자들에게 강조하신, ‘계속 기대하라’는 말씀은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절대적인 진리 한 가지는, 우리 하느님만이 ‘자신을 기다리는 자를 위하여 행동하시는’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이사야 64:4.
6 우리는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정확히 정해진 때에 올 것이라는 확신을 행동으로 나타내면서 기다리는 올바른 태도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한 확신을 갖고 그 확신에 부합되게 행동하는 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와 일치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사도들을 비롯하여 기름부음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강력히 권하셨습니다. “여러분의 허리를 졸라매고 등불을 켜 놓으십시오. 여러분은 주인[을] ··· 기다리[는] ··· 사람과 같이 되십시오. 주인이 도착하여 종들이 깨어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합니다!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하는데, 주인이 허리를 졸라매고 그들을 식탁에 기대앉히고 곁에 와서 섬길 것입니다.” (누가 12:35-37) 그렇습니다. 올바로 기다리는 태도는 여호와의 큰 날이 그분이 목적하신 때보다 단 한순간도 늦게 오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기대”하면서 “준비”함
7, 8. (ㄱ) 하느님의 참으심으로 인해 무슨 결과가 있었습니까? (ㄴ) 베드로는 우리에게 어떤 태도를 나타내도록 강력히 권합니까?
7 하느님의 현대 종들은 1914년에 하느님의 왕국이 하늘에 설립되기 전부터 기다렸으며 그 이후로도 계속 기다려 왔습니다. 그들이 기다렸다는 말은 결코 안이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하느님께서 맡기신 증거 활동을 적극적으로 수행해 왔습니다. (사도 1:8) 한편, 이 점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호와의 큰 날이 1914년에 왔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 것입니까? 그날이 40년 전에 왔다 해도 우리는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정성의 행위”를 나타내는 사람이었을 것입니까? (베드로 둘째 3:11) 증인인 우리의 가족 성원이나 회중에 있는 우리와 친밀한 벗들은 어떠했을 것입니까? 기다리는 그 기간은 우리 자신이나 우리와 같은 많은 사람들에게, 베드로 둘째 3:9에서 알려 주는 것처럼 구원의 길을 열어 주었음이 분명합니다. 왕국이 설립된 즉시 여호와께서 악한 제도 전체를 멸망시키지 않으셨기 때문에,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회개할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의 참으심을 구원으로 여기”라는 사도 베드로의 말에 우리 모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 둘째 3:15)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도 계속 사람들이 회개하여 자신들의 생활과 생각을 조정할 기회를 얻고 있습니다.
8 사실 미가와 스바냐와 하박국 시대에 만연했던 상황을 우리와는 무관한 듯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어쨌든 그건 아주 오래전의 일”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점은 무엇입니까? 앞 항에는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정성의 행위”를 나타내야 한다는 베드로의 교훈이 언급되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렇게 말한 직후에 필요한 또 다른 점을 강조하였는데, 그것은 “여호와의 날의 임재를 기다리며 그것을 가깝게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베드로 둘째 3:11, 12) 따라서 우리는 그날을 “가깝게 생각”하면서 ‘기대해야’ 합니다.
9. 우리가 ‘늘 바라보는’ 것이 적절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9 우리는 여호와를 여러 해, 아니 수십 년을 섬겨 왔더라도 미가처럼 ‘늘 바라보면서 기다리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까? (로마 13:11) 물론 사람이다 보니, 언제 끝이 오고 그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궁금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이러한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만일 도둑이 어느 야경시에 올는지 집 주인이 알았다면, 깨어 있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허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여러분도 준비하고 있으십시오. 여러분이 생각하지 않은 시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마태 24:43, 44.
10. 우리는 사도 요한의 생애와 견해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10 예수의 말씀은 미가와 스바냐와 하박국이 기록한 말씀과 대단히 유사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고대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의 추종자들을 위해, 우리를 위해 그 점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많은 헌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교훈을 참으로 적용하였습니다. 계속 기대하면서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점에서 사도 요한은 훌륭한 본을 보였습니다. 그는 올리브 산 위에서 예수께 사물의 제도의 종결에 관해 물었던 네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마태 24:3; 마가 13:3, 4) 그때는 기원 33년이었는데, 요한은 정확히 얼마나 있다가 그런 일이 일어날지 연대표 같은 것을 사용하여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약 6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요한은 나이 들었지만 지치거나 기다리는 마음이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요한은 “그렇다. 내가 속히 오겠다”라는 예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아멘! 주 예수여, 오십시오”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인생을 살아온 방식에 대해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심판을 집행하실 때 각자에게 그 일한 대로 상 주실 것임을 확신하였습니다. (계시 22:12, 20) 그 심판이 언제 있게 되든, 요한은 주 예수께서 교훈하신 것처럼 “준비”하고 있으려고 하였습니다. 우리 역시 그러합니까?
“기대”할 것인가, “만족”할 것인가?
11. 미가와 호세아 시대의 사람들은 그 예언자들과 어떻게 달랐습니까?
11 여호와의 심판이 먼저 이스라엘에게, 그다음 유다에게 집행될 때가 다가오고 있던 시대에 살았던 예언자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또 다른 점을 살펴보겠습니다. 미가가 ‘늘 바라보면서 기다리는 태도를 보이고’ 있을 때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선한 것을 미워하고 악을 사랑”하였습니다. 미가는 그들이 변화하려 하지 않는다면 ‘여호와께 도움을 청해도 그분이 그들에게 응답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미가 3:2, 4; 7:7) 미가와 동시대에 살았던 호세아는 농사와 관련된 표현을 사용하여 북쪽 이스라엘 왕국 사람들에게 이렇게 강력히 권하였습니다. “너희는 의로 씨를 뿌리고, 사랑의 친절에 따라 거두어라. 여호와를 찾을 시간이 있을 때에, ··· 너희는 경작지를 갈아라.”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악을 쟁기질”하였으며 그리하여 불의를 거두었습니다. (호세아 10:12, 13) 그들은 부패한 행위들을 묵인하거나 자행하면서 여호와의 길이 아니라 ‘자기 자신들의 길을 신뢰’하였습니다. 오늘날 일부 사람들은 ‘바로 약속의 땅에 살던 참 숭배자들이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을까?’ 하고 의아해할지 모릅니다. 호세아는 그들의 문제의 주된 원인이 된 태도가 무엇이었는지를 알려 주는데, 그와 같은 태도는 우리도 여호와의 큰 날을 계속 기대하는 사람이라면 경계해야 할 태도입니다. 그것은 안주하여 “만족”하는 태도입니다.
12. (ㄱ) 호세아에 의하면, 기원전 740년이 되기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어떤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까? (ㄴ) 그 백성이 “만족”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12 하느님의 백성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 후 상당한 번영을 누렸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호세아는 여호와의 말씀을 이렇게 전하였습니다. “그들은 또한 그들의 목초지에 따라 만족하게 되었다. 그들은 만족하게 되자 마음이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그 때문에 그들이 나를 잊었다.” (호세아 13:6) 여러 세기 전에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에게 바로 그렇게 될 위험성을 경고하셨습니다. (신명 8:11-14; 32:15)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세아와 아모스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그러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만족”에 빠진 것입니다. 아모스는 우리에게 구체적인 점을 알려 줍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집을 사치스럽게 꾸미고 별장을 가진 가정들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고급 음식을 먹고 특별한 잔으로 좋은 포도주를 마셨으며, 아마도 향기로운 화장품으로 사용하였을 “제일 좋은 기름”을 피부에 발랐습니다. (아모스 3:12, 15; 6:4-6) 생활에서 그러한 것들 자체가 부당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것을 과도하게 중시한 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었다는 것을 당신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
13. 부유한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어떤 결함이 있었습니까?
13 물론 북쪽 왕국 사람들이 다 번영해서 “만족”에 빠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힘들게 생계를 꾸려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아모스 2:6; 4:1; 8:4-6) 오늘날 세계의 여러 지역에도 그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호세아 13:6에 나오는 하느님의 교훈은 고대 이스라엘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적용되었습니까? 그리고 오늘날에도 적용됩니까? 분명 그러합니다. 여호와께서는 부유하든 그렇지 않든 참 숭배자들이 생활상의 물질적인 면에 치중하여 ‘하느님을 잊는’ 일이 없도록 경계해야 한다는 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누가 12:22-30.
14. 우리가 기대하는 마음이 여전한지 숙고해 보는 것이 적절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14 지금은 당시를 돌이켜 보면서 유익을 얻을 수 있는 시대이고 대단히 많은 성서 예언이 성취되고 있으므로 우리는 더더욱 깨어 준비하면서 기대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상당한 기간을, 어쩌면 수십 년을 기대해 왔다면 어떠합니까? 과거에 우리는 봉사의 직무에 힘썼고 개인적 결정들을 내릴 때 여호와의 날이 멀지 않았다는 확신을 나타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습니까? 이 점을 바로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여 이렇게 자문해 보십시오. ‘나의 기대하는 마음은 여전히 강렬한가 아니면 많이 식어 버렸는가?’—계시 2:4.
15. 기다리는 마음이 약해지면 어떤 징후들이 나타날 수 있습니까?
15 우리 자신의 기대하는 마음이 여전한지 평가해 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모스가 당시 “만족”에 빠진 사람들에 대해 묘사한 내용에 나온 바로 그 요점들을 활용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우리는 그 점들을 검토해 보면서 자신에게서 “만족”하는 경향이 감지되지는 않는지 분석해 볼 수 있습니다. 지난 여러 해 동안 생각과 행동으로 기대하는 마음을 나타낸 그리스도인이라도 더 사치스러운 집이나 차를 소유하고, 최신 스타일의 옷을 입고, 고가의 화장품과 장신구로 치장하고, 고급술과 값비싼 음식을 즐기는 데 힘쓰게 될 수 있습니다. 성서 어디에서도 우리가 적절한 즐거움조차 누리면 안 되는 금욕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먹고 마시며 자기의 모든 수고로 좋은 것을 보게 되어 있”습니다. (전도 3:13) 하지만 그리스도인도 먹고 마시는 것과 외모에 갈수록 더 치중하는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베드로 첫째 3:3) 예수께서는 소아시아의 일부 기름부음받은 자들이 치중하는 대상이 달라졌다고 지적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도 그런 위험에 빠질 수 있음이 분명합니다. (계시 3:14-17) 우리도 그렇게 되지는 않았습니까? 혹시 물질에 몰두하여 “만족”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기다리는 마음이 약해지지는 않았습니까?—로마 8:5-8.
16. 자녀들에게 ‘만족스러운’ 생활 방식을 추구하도록 격려하는 것이 자녀들에게 최상의 유익을 주는 것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6 우리가 여호와의 큰 날을 기다리는 마음이 사그라지면 자녀나 다른 사람에게 해 주는 조언에 그 점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속으로 이렇게 추리하는 그리스도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끝이 매우 가깝다고 생각해서 교육받고 직장을 택할 기회들을 포기했다. 이제 어떻게든 내 자녀는 안락하게 살 수 있게 해 줄 훈련을 받게 해야겠다.’ 호세아 시대에도 아마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들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면 그들이 부모로서 베푼 ‘만족스러운’ 생활 방식을 강조한 조언은 자녀들에게 최상의 유익을 주었을 것입니까? 그리고 당시의 자녀들이 실제로 ‘만족스러운’, 다시 말해 안락한 생활 방식을 추구하였다면 기원전 740년에 사마리아가 아시리아 사람들에게 함락되었을 때 그들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호세아 13:16; 스바냐 1:12, 13.
확신을 가지고 기대하면서 생활하라
17. 우리는 어떻게 미가를 본받아야 합니까?
17 고대의 참 숭배자들처럼 우리도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일이 정확히 그분이 정하신 때에 이루어질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23:14) 예언자 미가는 현명하게도 자신의 구원의 하느님을 기다리는 태도를 나타냈습니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미가 시대가 어떤 시기였는지를 보면, 그가 사마리아가 정복될 때가 대단히 가까운 때에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와 우리가 살고 있는 때는 어떠합니까? 우리의 삶을 돌이켜 보면 세속 직업, 생활 방식, 전 시간 봉사 등과 같은 문제에서 현명한 선택을 했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그 날과 시간”을 알지 못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마태 24:36-42) 하지만 우리가 미가가 나타낸 것과 같은 태도를 배양하고 그와 일치하게 행하는 것이 현명한 행동이라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미가는 회복된 지상 낙원에서 생명을 상으로 받을 때 자신의 예언의 소식과 충실한 본이 우리에게 유익하였다는 것을 알고 참으로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여호와가 구원의 하느님이시라는 산 증거가 될 것입니다!
18, 19. (ㄱ) 오바댜는 어떤 재난이 다가오고 있음을 지적하였습니까? (ㄴ) 오바댜는 이스라엘에게 어떤 희망을 제시하였습니까?
18 우리의 확신에는 분명한 근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짧은 예언서인 오바댜서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책은 고대 에돔에 초점을 맞추면서, 자기 “형제”인 이스라엘을 부당하게 대한 그 민족에게 여호와의 심판이 집행될 것임을 알려 주었습니다. (오바댜 12) 이 책 10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예언된 황폐는 실제로 닥쳤습니다. 기원전 6세기 중반에 나보니두스가 이끄는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에돔을 정복하였으며, 에돔은 더는 나라로서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바댜의 소식에는 생각해 볼 중요한 요점이 또 있는데, 그 요점은 우리가 여호와의 큰 날을 계속 기대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19 알다시피, 에돔을 황폐시킨 적국(바빌론)은 하느님의 불충실한 백성에 대한 그분의 처벌을 집행했던 나라였습니다. 기원전 607년에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멸망시켰고 유대인들을 유배지로 끌고 갔습니다. 그 후 그 땅은 황무지가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끝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오바댜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을 다시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오바댜 17에는 이러한 격려적인 약속이 들어 있습니다. “시온 산에는 피해 오는 사람들이 있게 될 것이며, 그곳은 반드시 거룩한 곳이 될 것이다. 야곱의 집은 그들이 차지할 것들을 차지할 것이다.”
20, 21. 오바댜 17이 우리에게 위로를 준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0 역사는 여호와께서 오바댜를 통해 하신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졌음을 확증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을 하셨고, 예언하신 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기원전 537년에 유다와 이스라엘의 많은 유배자들이 돌아왔습니다. 귀환한 사람들은 여호와의 축복 속에 황무지를 변모시켜 결국 초목이 우거진 낙원 같은 곳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처럼 놀랍게 변모될 것이라는 예언을 이사야 11:6-9과 35:1-7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재건된 여호와의 성전을 중심으로 참 숭배가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바댜 17은 여호와의 약속들의 신빙성을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약속들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21 오바댜는 “왕권이 여호와의 것이 될 것”이라는 힘 있는 말로 자신의 예언을 끝맺었습니다. (오바댜 21) 우리는 그 약속을 신뢰하면서 여호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땅을 포함하여 전 우주를 아무 방해 없이 다스리실 영광스러운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큰 날과 그날이 가져올 축복들을 기다려 온 지가 얼마 되지 않았든 혹은 수십 년이나 되었든, 우리는 성서에 근거한 그 기대가 실현될 것임을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습니다.
22. 우리가 하박국 2:3과 미가 4:5에 나오는 것과 같은 견해를 가지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2 그러므로 확실히 우리 시대에도 적용되는 하박국의 이러한 보증의 말씀을 다시 새겨보는 것은 적절한 일입니다. “그 환상은 지정된 때에 대한 것이며, 끝을 향하여 숨가쁘게 나아가고 있다. 그 환상은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니, 비록 더딜지라도 계속 기대하여라. 틀림없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늦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박국 2:3) 사람의 관점에서는 여호와의 큰 날이 더딘 것 같을지라도 그분의 날은 틀림없이 예정된 때에 올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오랫동안 섬겨 온 사람들이든 근래에 그분을 숭배하기 시작한 사람들이든 함께 미가 4:5에 이렇게 표현되어 있는 것과 같은 확신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한정 없는 때까지, 아니, 영원히 우리 하느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걸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