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건축술
(architecture)
건설하는 일과 관련된 기술 혹은 학문. 성서는 노아 시대의 대홍수 이전 1656년 동안의 인류 역사 초기에 있었던 다양한 거주지와 생활 관습에 대해 알려 준다. 카인은 아벨을 살해한 후에 어떤 특정한 지역에 “거주하였다”고 하며, 그곳에 “그는 도시를 세웠”다. (창 4:16, 17) 하지만 그의 후손 가운데 하나인 야발은 “천막에 살며 가축을 치는 사람들의 시조”가 되었다. 또 다른 후손은 “구리와 철로 된 온갖 도구의 단조공”이 되었다. (창 4:20, 22) 카인의 후손들은 늦어도 대홍수가 일어난 때에는 멸절되었으나, 건축술과 도구의 사용법은 그들과 함께 없어지지 않았다.
대홍수 이전의 그 기간에 두드러졌던 건축 작업은 셋의 후손들이 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노아와 그의 아들들이 방주를 건축한 일이었다. 기본적인 설계와 치수는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셨지만, 인간 작업 감독인 노아도 틀림없이 건축 작업 역량을 어느 정도 발휘했을 것이다. 방주의 길이는 300큐빗, 너비는 50큐빗, 높이는 30큐빗(133.5미터×22.3미터×13.4미터)이었다. 바닥 면적은 대략 0.9헥타르 정도 되었을 것이다. 방주를 삼층으로 만들고 폭이 넓은 지붕을 씌우려면, “칸들”을 만들 뿐만 아니라, 중량을 지탱하고 구조물에 필요한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얼마의 나무 기둥과 들보를 사용할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 타르를 써서 방주에 방수 처리를 했지만, 웬만해선 물이 스며들지 않는 방수 구조가 되도록 목재를 주의 깊이 끼워 맞출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창 6:13-16. 방주 참조.
대홍수 이후의 초기 건축 대홍수 이후 시대에 니므롯은 여러 도시를 세운 뛰어난 건축자가 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창 10:8-12) 이제 또 하나의 대규모 건축 계획이 추진되었다. 그 건축물은 하느님께서 승인하지 않으신 바벨탑이었다. 이번에는 새로운 자재들이 언급되어 있는데, 가마에서 구운 벽돌과 모르타르 구실을 하는 역청이 그것이다. 그 탑을 쌓아서 당시까지로는 가장 높은 구조물을 세우려고 하였던 것이다.—창 11:3, 4.
이스라엘 사람들의 조상 아브라함은 틀림없이 칼데아 사람들의 우르에서 상당히 진보된 건축 양식을 보았을 것이다. (창 11:31) 그곳에서 행해진 발굴 조사 결과, 기원전 세 번째 천년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도시의 거리, 벽돌 계단이 있는 이층집, 신전과 궁전의 복합 건물들의 흔적이 드러나고 있다. 이곳에서는 또한 코벨(내쌓기) 볼트나 캔틸레버 아치(양쪽 벽을 점점 더 가까워지도록 쌓아 결국 양쪽 벽이 한 줄의 돌이나 벽돌로 이어지게 하여 만든 아치)뿐만 아니라, 이맛돌을 넣은 명실상부한 곡선 아치도 사용한 가장 오래된 흔적을 얼마쯤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은 후에 이집트에 체류하는 동안(창 12:10), 그 땅의 장려한 건축물들 얼마를 보았을 가능성이 있다. 사카라에 있는 조세르 왕의 계단형 피라미드는 기원전 세 번째 천년기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자른 돌을 사용한 주요 건축물로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실례 가운데 하나이다. (1권, 530면 사진) 다소 후대에 기자에 건설된 쿠푸의 대피라미드는 기부가 대단히 넓어서 5.3헥타르에 이르고 각각 무게가 평균 2.3톤에 달하는 석회암 돌 230만 개가량으로 만들어졌다. 이 피라미드의 높이는 원래 147미터나 되었다. 이 건축물은 크기만이 아니라 정밀도에 있어서도 대단히 뛰어나기 때문에 현대의 공학자들마저도 경탄할 정도이다. 몇 세기 후에 이집트인들은 나일 강 상류에 있는 카르나크에, 사람이 건축한 최대의 신전으로 알려져 있는 신전을 지었다. 그 신전의 대형 홀의 지붕은 134개의 거대한 원주(圓柱)로 받쳐졌는데, 각 기둥은 지름이 약 3미터였으며 다채롭게 채색된 돋을새김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스라엘인의 건축 이집트에서 압제를 당하는 동안, 이스라엘인들은 이집트의 작업 감독들 밑에서 노예로서 상당히 많은 건축 일을 하였다. (출 1:11-14) 그 후 광야에서,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널빤지 틀, 장부 받침, 가로장, 기둥이 있는 장막을 건축하도록 세부적인 지시를 주셨는데, 이것 역시 그들로서는 상당한 건축상의 기량을 요하는 일이었다. (출 25:9, 40; 26:15-37; 히 8:5) 그런 일을 하던 (그리고 이집트에서 건축 일을 했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필시 약속의 땅에 도착하기 전에 죽었겠지만, 틀림없이 건축 방법에 관한 개념이나 도구의 사용법은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전수되었을 것이다. (신 27:5 비교) 모세 율법에는 건축물과 관련하여 적어도 한 가지 규정이 들어 있었다. (신 22:8) 약속의 땅을 정복할 때 이스라엘인들은 완성된 건축물이 있는 도시와 마을을 통째로 차지한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또한 직접 건축하기도 하였다. (민 32:16; 신 6:10, 11; 8:12)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무렵(기원전 1473년), 그 땅에는 성곽 도시들과 견고한 요새들이 아주 많았다.—민 13:28.
건축과 관련된 이스라엘인의 독창성과 창의성을 보여 주는 어떤 인상적인 건축물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그런 능력이 없었다고 단정 짓는 것은 합리적인 생각이 아니다. 이교 나라들과는 달리, 이스라엘인들은 정치 지도자들이나 군사 영웅들을 기리는 거대한 기념비나 기념물을 세우지 않았다. 배교로 말미암아 다른 종교적인 장소들이 생겨나기는 했지만, 건축된 유일한 성전은 예루살렘에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는 최초의 성전이나 두 번째 성전이나 마찬가지이다. 발굴된 유적 가운데 한층 인상적인 것은 고대 므깃도, 하솔, 게셀로 여겨지는 도시들의 성문 유적인데, 이것들은 솔로몬 시대에 건축된 것으로 여겨진다. (왕첫 9:15) 각 경우에 길이가 20미터 되는 외벽은 공들여 다듬은 돌들로 만들어졌다. 성문 통로 내부에는 연이어 세 쌍의 문설주 혹은 폭이 넓은 지주(支柱)가 있었으므로, 통로의 양쪽 측면에는 쑥 들어간 여섯 개의 방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그 안에서 거래가 이루어질 수도 있었고 성문을 돌파하려고 시도하는 군대를 그 방에 있던 병사들이 저지할 수도 있었다. (문, 성문, 성문 통로 참조) 므깃도와 사마리아에서도 숙련된 석조술의 예를 볼 수 있다. 돌을 주의 깊이 정으로 쪼아서 다듬고 제자리에 놓아 아주 정확하게 맞물리게 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어떤 경우에는 얼마나 정확하게 맞물렸는지 맞물린 돌들 사이로 얇은 칼날마저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이다. 틀림없이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에서도 그같이 질 높은 작업이 수행되었을 것이다.—왕첫 5:17; 6:7.
고고학적 조사를 근거로 해서 볼 때, 이스라엘인의 집의 구조는 일반적으로 매우 간소한 형태였던 것 같다. 연구가들 중에는 그 구조가 꽤 조잡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러한 견해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매우 빈약한 편이다. 「해설자의 성서 사전」(The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 1권, 209면)에서 이렇게 설명하는 바와 같다. “이 문제에 대한 현대의 지식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고대 저술가들이 건축상의 흥미를 끌 만한 점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데다가 건물 자체도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의 힘과 후대의 건축자들에 의해 건물들은 대부분 철저히 파괴되어 버렸다.” (G. A. 버트릭 편, 1962년) 그 결과 팔레스타인에서는 폐허가 된 건물의 기초 위에 돌이 한두 단 이상 쌓여 있는 것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또한 좋은 집들은 파괴자들의 손에 의해서, 그리고 이어서 건축 자재를 구하는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고대의 건축 자재와 건축술 돌을 기초로 쓰는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일반적인 일이었다. 다듬지 않은 돌들을 사용했을 것이지만, 이 돌들을 가지런히 맞추고 차곡차곡 쌓는 기준점 역할을 한 모퉁잇돌들은 주의 깊이 다듬었으며 꼭 들어맞게 만들어졌다. (시 118:22; 사 28:16 비교) 이스라엘인의 석조 가옥 내부에 진흙 모르타르 곧 벽토가 사용되었음이 레위기 14:40-48에 언급되어 있다. 집의 나머지 부분을 완성하는 데 돌을 사용하지 않을 경우, 기초 위에는 햇볕에 말리거나 가마에서 구운 벽돌을 흔히 사용하였다. (사 9:10 비교) 때때로 벽돌들 사이에는 간간이 목재가 끼여 있었다. 무슨 자재가 사용되었는가는 주로 그 지방에서 구할 수 있는 것에 달려 있었다.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에서는 나무와 돌이 부족했기 때문에 건축물들이 대부분 점토질 벽돌로 지어진 반면, 팔레스타인에서는 일반적으로 석회암 따위의 돌들이 풍부하였다. 경제적으로 벽을 만든 초기 방법은 욋가지에 흙 등을 발라 만드는 것이었다. 땅에 나무 기둥들을 박고 갈대나 잘 휘어지는 나뭇가지를 엮어 그 기둥들 사이를 수평으로 연결함으로써 그물 모양의 뼈대를 만들면 그 위에 진흙을 바를 수 있었다. 진흙이 햇볕에 바싹 말라 단단해진 후에는, 벽을 자연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그 위에 주기적으로 벽토를 바르곤 하였다.—벽, 성벽, 담 참조.
건물의 지붕은 일반적으로, 건물을 지탱하는 벽에 긴 석재나 목재를 가로질러 놓아서 만들었다. 지붕을 폭이 넓게 만들기 위해 기둥들을 삽입할 수도 있었는데, 이것은 일반적으로 “기둥과 상인방(上引枋)” 방식 혹은 “가구식 구조법”으로 알려져 있다. 코벨 볼트와 곡선 아치는 고대로부터 알려져 있었으므로, 큰 건물들의 경우 아마도 상당한 중량을 견딜 수 있는 평지붕을 받치기 위해 이런 구조물들을 사용했을 것이다. 이런 대형 건물들에는 흔히 한 줄이나 두 줄의 기둥이 사용되었으며, 나무 기둥이나 돌기둥은 돌 받침대 곧 주춧돌 위에 고정시켰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면 블레셋 사람들이 눈먼 삼손을 끌고 간 다곤의 집에 있던 기둥들도 이런 형태였다고 한다. 삼손이 두 개의 주요 기둥을 쓰러뜨리자 그 집이 무너져 내렸는데, 그때 건물 안에 모여 있던 사람들 외에도 약 3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지붕 위에서 구경하고 있었다.—판 16:25-30.
소형 건물과 가정집의 지붕은 흔히 나뭇가지나 갈대를 묶어서 들보 위에 걸친 다음 진흙을 빽빽이 채워 덮었으며, 그런 다음 표면을 평평하게 만들었다. 비가 흘러내리도록 지붕을 약간 경사지게 하였다. 요르단 골짜기에 있는 현대의 주거 시설에서는 아직도 이런 지붕을 볼 수가 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건물의 기본 형태가 직사각형이었다. 주거 시설의 경우, 내부에는 보통 작은 직사각형 방들이 다소 자유롭게 배치되어 있었다. 흔히 집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는 도시 안에서는 사용 가능한 공간이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건물의 크기와 형태도 영향을 받았다. 공간에 여유가 있으면 안뜰을 만들기도 하였는데, 그러한 뜰은 모든 방과 통하였고 거리에서 들어오는 입구가 단 하나만 있었다. 직사각형이라는 동일한 기본 형태가 사용된 것은 가정집만이 아니라 왕의 집(궁전), 창고, 모임의 집(회당), 하느님의 집(성전) 그리고 죽은 자들의 집(무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들과 관련된 건축 다윗 왕의 재위 기간 중에 건축된 것으로 특별하게 언급된 유일한 건축물은, 페니키아의 티레 왕 히람이 자재와 일꾼들을 공급하여 짓게 한 “실삼나무 집”인 것 같다. (대첫 14:1; 17:1) 물론 다윗이 예루살렘에 계속 다른 집들을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기는 하다. (대첫 15:1) 다윗은 또한 아들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완수할 수 있도록 많은 준비를 했는데, 그 가운데는 네모난 돌을 다듬고, 쇠못을 만들고, 구리와 실삼나무 목재를 “많이” 준비하고, 금과 은과 보석 및 모자이크용 자갈 등의 물품을 따로 떼어 놓은 일이 포함되었다. (대첫 22:1-4; 29:1-5) 다윗은 또한 전체 성전의 배치와 비품을 위한 하느님의 영감받은 “건축 설계”를 마련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대첫 28:11, 19) “건축 설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타브니트)는 바나(‘짓다’; 대첫 22:11)라는 어근에서 파생되었는데, 다른 곳에서는 “모형”과 “표상”으로 번역되어 있다.—출 25:9; 대첫 28:18.
솔로몬 시대에 이스라엘인의 건축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대둘 1:15; 전 2:4-6) 성전 건축에 쓸 목재를 레바논에서 자르는 일에 히람 왕의 페니키아인 일꾼들이 고용되기는 했지만, 기록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이 기본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페니키아인들의 작품이라는 흔히 개진되는 견해를 뒷받침하지 않는다. 히람이라는 이스라엘계 페니키아인이 직접 성전 건축에 공헌한 것으로 언급되어 있지만, 그는 건물이 세워진 후에 주로 장식하는 일과 금속 세공과 관련된 일을 했을 뿐이며 그나마 다윗 왕이 마련해 준 설계도에 따라 일했다. (대첫 28:19) 티레의 히람 왕은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도 “숙련된 사람들”이 있다고 인정하였다. (왕첫 7:13-40; 대둘 2:3, 8-16. 대첫 28:20, 21 비교) 솔로몬 자신은 성전 구조물의 건축을 지휘하였다. (왕첫 6:1-38; 대둘 3:1–4:22) 그 외에도 솔로몬은 성전 뜰, 실삼나무 기둥 45개와 독특한 채광 시설이 주목을 끄는 ‘레바논 숲 집’, ‘기둥 현관’, ‘왕좌 현관’ 그리고 그 자신의 집과 파라오의 딸을 위한 집을 건축했는데, 그 모든 것이 “치수에 따라” 다듬은 값비싼 돌로 지은 것이었다.—왕첫 7:1-12.
건축과 관련해서 두드러진 다른 왕들로는 아사(왕첫 15:23), 바아사(왕첫 15:17), 오므리(왕첫 16:23, 24), 아합(왕첫 22:39), 여호사밧(대둘 17:12), 웃시야(대둘 26:6-10, 15), 요담(대둘 27:3, 4), 히스기야(왕둘 20:20)가 있었다. 히스기야가 만든 것으로 여겨지는 실로암 터널(길이가 533미터)과 라기스, 기브온, 게셀, 므깃도에서 발견된 터널들은 주목할 만한 공학상의 위업이었다.
유배 기간 이후의 팔레스타인의 건축 바빌론 유배 기간 이후에 유대인들은 수수한 건축물만 세운 것 같다. 하지만 헤롯 대왕(기원전 1세기)과 그의 후계자들은 대규모 건축 공사를 추진했는데, 그 가운데는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의 재건(막 13:1, 2; 누 21:5), 카이사레아 항, 예루살렘 중심부에 가설된 대(大)고가교, 공공건물, 극장, 타원형 경기장, 목욕탕 등이 있었다. 매우 주목할 만한 위업은 사해보다 400미터 남짓 높은 마사다 언덕 위에 헤롯이 세운 요새였다. 헤롯은 이곳에 요새뿐만 아니라 테라스와 목욕용 풀을 갖춘 우아한 3단(段)의 가공 궁전을 지었고, 또한 벽 안에 난방용 파이프를 넣은 로마식 목욕탕이 있고 수세 시설을 갖춘 좌변식 화장실이 있는 또 다른 궁전도 지었다. 그는 이 거대한 암석 요새에, 모두 합치면 거의 4만 킬로리터의 물을 담을 수 있는 12개의 대형 저수조를 만들어 놓았다.—2권, 751면 사진.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의 건축 북쪽 이스라엘 왕국의 함락(기원전 740년)과 남쪽 유다 왕국의 전복(기원전 607년)으로 말미암아, 유대 사람들은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제국의 장려한 건축물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 코르사바드에 있는 사르곤 2세의 궁전은 균형과 좌우 대칭의 양식, 화려한 돋을새김, 유약을 칠한 벽돌, 법랑 타일에 그린 회화로 유명하였다. 니네베에 있는 산헤립(센나케리브)의 궁전은 방이 70개 정도 되는 거대한 구조물로서, 길이가 3000미터가 넘는 벽면에는 조각된 석판이 늘어서 있었다. (왕둘 19:36. 욘 3:2, 3 비교) 산헤립은 또한 고멜 강에서 니네베의 정원들로 물을 끌어 오는 48킬로미터의 수로교를 건설한 것으로 여겨진다. 시리아 동부의 유프라테스 강가에 있는 마리에는 300개의 방이 있는 거대한 궁전 건물 군이 약 6헥타르를 차지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고대 바빌론의 폐허도 그 도시가 난공불락의 성벽, 유명한 거리, 수많은 궁전과 신전 등으로 한때 웅장한 도시였음을 보여 준다.
페르시아의 통치 아래서, 수산에 있던 유대인들은 그곳에 있던 다리우스 1세의 장려한 궁전을 보았을 것인데, 그 궁전의 내부는 유약을 칠한 화려한 색채의 벽돌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다. (2권, 330면 사진) 페르세폴리스에는 거대한 수소 상이 있는 크세르크세스의 문을 비롯하여 다리우스와 크세르크세스의 궁전과 거대한 알현실들—그 가운데는 100개의 원주가 있는 홀이 포함되어 있음—이 있었는데, 그 웅장한 모습은 아마도 훨씬 더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2권, 329면 사진) 페르시아의 원주는 그리스인들의 유명한 이오니아식 원주보다 더 우아하고 가늘었다. 크세르크세스의 홀에 있는 원주들의 높이와 지름의 비율은 12대 1로서, 최대치의 비율이 10대 1인 코린트식 원주와 비율이 단지 6대 1밖에 안 되는 이집트식 원주와 비교가 되었다. 또한 페르시아 건물들의 원주와 원주 사이의 간격은 그리스 건물들에 비해 무려 두 배나 넓었는데, 그로 말미암아 유사한 고대 건축물들보다 공간이 더 넓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리스와 로마의 건축 양식과 건축술 그리스의 건축은 기원전 7세기에 “황금기”에 접어들었다. 그 시대는 기원전 4세기까지 계속되었다. 아테네에는 그리스의 신들과 여신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웅장한 신전과 건물들이 세워졌다. 이 건물들 중에는 파르테논, 날개 없는 승리의 여신의 신전, 에렉테움이 있었다. 한편 코린트(고린도)에서는 아폴로 신전과 거대한 장터(또는 아고라)가 두드러졌다. 건축 양식은 일반적으로, 아름다운 그리스의 원주와 관련해서 발달된 세 가지 주요 양식, 즉 도리스 양식과 이오니아 양식과 코린트 양식으로 일컬어진다.
로마인들은 건축 양식과 관련해서 그리스인들에게 많은 신세를 졌다. 로마의 건축은 일반적으로 그리스의 건축보다 기능을 더 중시했지만 미묘한 아름다움 면에서는 다소 떨어졌다. 로마인들은 또한 쐐기형 돌들로 이루어지는 진정한 의미의 아치로 유명한 에트루리아 사람들에게서 도움을 받았다. 기원전 6세기에는 그러한 진정한 의미의 아치가 로마의 대하수도 건설에 매우 인상적인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로마의 건축자들은 또한 이중 아치와 돔을 개발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들은 이 두 가지 건축술을 이용하여 기둥이 없는 거대한 원형 건축물과 넓은 홀을 만들었다. 그리스의 석공들은 사용된 대리석 석재들을 끼워 맞추고 결합하는 데 탁월한 기술과 정밀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모르타르나 시멘트를 사용하지 않고서도 웅장한 건축물을 지었었다. 로마의 석공들은 포졸라나라고 하는, 석회를 혼합시킨 화산재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접착력이 강한 수경성(水硬性) 시멘트였다. 로마인들은 포졸라나를 모르타르로 사용하여 아치의 기둥 간격을 넓히고 여러 층으로 된 대건축물을 세울 수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는 4층으로 된 거대한 콜로세움으로서 기원 1세기에 건축되었는데, 좌석 수가 4만에서 8만 7000석까지 다양하게 추산되기도 한다. 로마인이 건설한 것들 중에서 한층 가치 있는 것은, 특히 기원전 3세기 이후로 건설된 넓은 군용 도로와 장려한 수도교였다. 사도 바울은 이 로마의 가도를 크게 이용했으며, 로마로 갈 때는 필시 아피아 가도를 따라 세워진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수도교를 보았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건축물 이스라엘 민족이 건축상의 장려함이나 화려함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것처럼, 영적 이스라엘에 속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건축물도 수수한 편이다. 「웅거의 성서 사전」(Unger’s Bible Dictionary, 1965년, 84, 85면)에서는 이렇게 논평한다. “일찍이 3세기 무렵에는 그들이 세운 건물들이 존재했으나, 그 건물들은 거대하지도 않았고 값비싸지도 않았다.” 정치적인 국가와 관계를 맺기를 원하는 자들이 힘을 얻은 때인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특별한 양식의 건축물이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현재 알려진 가장 화려하고 장식이 많은 대건축물들 중 일부가 만들어지기에 이르렀다.
예언과 비유 가운데 나오는 건축 성서에 나오는 예언과 비유 가운데는 건축 용어가 아주 많이 사용된다. 회복 예언은 하느님의 백성과 그 도시들을 세우는(혹은 재건하는) 일을 많이 다룬다. (사 58:12; 60:10; 61:4; 겔 28:26; 36:36) 시온은 견고한 모르타르를 써서 놓은 돌들 위에, 사파이어 기초, 루비 흉벽, 불처럼 빛나는 돌로 된 문을 갖춘 도시로 건축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다. (사 54:11, 12) 지혜는 그 자신의 집을 짓는 것으로(잠 9:1), 또한 분별력 및 지식과 더불어 집안을 세우기 위한 수단으로 묘사되어 있다. (잠 14:1; 24:3, 4) 여호야김은 일꾼들에게 삯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궁전을 불의로 세웠다는 정죄를 받았으며, 칼데아 사람들은 정복된 사람들의 피와 수고로 도시를 세웠다는 정죄를 받았다. (렘 22:13-15; 합 2:12, 13) 하느님과 평화로운 관계에 있다고 거짓되이 상상하는 것은 회칠한 칸막이 벽을 세우는 것에 비유되는데, 여호와께서는 폭풍을 불게 하시고 진노의 우박을 떨어뜨려 그것을 허물어뜨리고 기초를 드러나게 하신다. (겔 13:10-16) 시편 필자는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않으시면 건축자들의 수고가 헛되다고 확언한다. (시 127:1) 하느님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여호와의 큰 날”이 오기 전에 건물을 짓겠지만 그 안에서 살지는 못할 것이다. (습 1:12-14. 암 5:11 비교) 그와는 대조적으로, 하느님의 종들은 “집을 지어 그 안에서 살고” 그 손으로 일한 것을 “충분히 누”리게 되어 있다.—사 65:17-23. 전 3:3 비교.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예수께서는 건축을 시작하기 전에 비용을 검토하는 일의 중요성을 언급하셨는데, 이 말씀을 하시면서 그분은 듣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추종자가 되는 일에 무엇이 관련되는지 정확히 인식하도록 격려하셨다. (누 14:28-30) 견고한 기초의 필요성이 많은 예 가운데 언급되어 있다. (마 7:24-27; 누 6:48, 49; 디첫 6:17-19; 디둘 2:19; 히 11:10)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자신의 회중을 바위(페트라) 위에 세우겠다고 말씀하시는데(마 16:18), 예수 자신은 유일한 기초로 언급되어 있으며 그 기초 외에는 ‘어떠한 사람도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다.’ 하지만 그분은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시다. (고첫 3:11; 마 21:42; 행 4:11; 시 118:22) 예수께서 주된 모퉁잇돌이시므로, 이 성전의 다른 모든 “산 돌”은 공의를 “측량줄”로 삼고 의를 “수준기”로 삼아 그분 위에 세워지고 그분을 기준으로 정렬된다. (엡 2:20, 21; 베첫 2:4-8; 사 28:16, 17) 예수 시대에 예루살렘에 있는 문자적인 성전과 주변 건물들을 짓는 데 46년이 걸렸고 여전히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는데, 예수께서는 자신의 몸이라는 성전이 “사흘 만에” 세워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요 2:18-22) “지혜로운 공사 감독”으로서 바울은 기초이신 그리스도 위에 집을 지을 때 불에 타지 않는 양질의 자재를 사용하는 것에 관해서 훈계하였다. (고첫 3:10-17) 사랑은 세워 주는 일의 으뜸가는 요소로서 언급되어 있다. (고첫 8:1. 시 89:2 비교) 요한이 환상에서 본 새 예루살렘은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기초석들 위에 성벽이 세워져 있고 보석들로 만들어진 밝게 빛나는 도시로서 묘사되어 있다. (계 21:9-27) 하느님 자신은 모든 것을 지으신 위대한 건축자로서 언급되어 있으며, 따라서 사람들이 만든 건물에 거하시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히 3:4; 행 7:48-50; 17:24, 25; 사 6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