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과 싸워 이김
“너는 모략[기술있는 지도, 신세]으로 싸우라”고 잠언 24:6은 언급한다.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는 단순히 좋은 의도만이 아니라 기술도 필요하다. 분명히,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본의 아니게 감정이 더욱 악화되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1984년에 실시한 어느 연구에 의하면, 우울증에 걸린 일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화를 내고, 과음을 하거나 과식을 해서 긴장을 풀며, 안정제를 더 많이 복용’함으로써 우울증을 극복해 보려고 애쓴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결과 “더욱 심한 우울증과 신체적인 증세”가 초래되었다.
일부 우울증 환자들은 정신력이 약한 사람으로 간주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기술있는 지도를 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우울증은 정신력의 약함의 표시도 영적인 실패의 표시도 아니다. 연구 결과는 뇌 속에 어떤 화학적인 기능 장애가 있을 때에도 이런 심각한 장애가 생길 수 있음을 지적한다. 신체적인 병이 우울증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에, 두 주일 이상 심한 우울증이 있으면 의료 검진을 받아보는 것이 좋다. 문제의 원인이 되는 신체적 병이 발견되지 않을 경우에도, 대개의 장애는 적절한 약물 치료나 영양 보충을 받으면서 사고 방식을 조정하면 개선이 가능하다.a 우울증과 싸워 이긴다는 것은 다시는 우울한 기분을 가지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슬픔은 생활의 일부이다. 하지만, 기술있게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면, 우울증에 더 잘 대처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의사는 종종 항우울증 약을 처방해 준다. 이것은 화학적인 불균형을 없애 주기 위해서 고안된 약이다. 앞서 언급된 엘리자베스는 이 약을 사용하였다. 그랬더니 몇 주일 안 되어서 기분이 나아지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효과를 보려면 약을 복용하면서 동시에 긍정적인 태도를 배양해야 합니다. 약의 ‘지원’으로 회복되어야겠다는 의지를 가지게 되었읍니다. 또한 매일의 운동 계획을 꾸준히 지켰읍니다.”
하지만, 항우울증 약을 사용한다고 언제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난처한 부작용이 생기기도 한다. 그리고 설사 화학적인 기능 장애가 시정된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사고 방식이 시정되지 않으면 우울증은 재발할 수 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일을 기꺼이 하고자 한다면 많은 위안을 얻을 수 있다.
자신의 감정을 털어 놓으라
세라는 가족적인 책임의 짐을 혼자서 일방적으로 지는 데다가 세속 일의 압력까지 받는 것에 대해 매우 분개하고 있었다. (7면 참조.) 세라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그러나 나는 가슴 속에 감정을 쌓기만 했읍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심한 절망감을 느끼고는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었읍니다. 난생 처음으로 감정을 털어 놓기 시작했읍니다. 그것이 전환점이 되었읍니다. 그 전화를 한 것이 위안이 되었읍니다.”
그러므로, 우울증이 있으면 마음에 있는 것을 털어 놓을 수 있는, 감정 이입할 줄 아는 사람을 찾아보라. 결혼 배우자, 가까운 친구, 친척, 전도 봉사자, 의사 혹은 훈련받은 상담가가 좋을 것이다. 「결혼 생활과 가정지」(Journal of Marriage and the Family)가 보도한 어느 연구에 의하면, 우울증을 물리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 하나는 “인생의 시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후원자의 도움”이라고 한다.
우리의 정신이 문제나 손실을 당한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함으로써 해결되지 않은 채로 문제를 방치하지 않도록 막아 주는 치료 방법은, 자신의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감정을 털어 놓아야 한다. 거짓된 자존심 때문에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려고 자신을 억제하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잠언 12:25은 “근심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그것으로 번뇌케 하나 선한 말은 그것을 즐겁게 하느니라”고 언급한다. 그러나, 감정을 털어 놓아야만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근심”을 이해하기 시작하고 비로소 격려의 “선한 말”을 해줄 수가 있다.
세라는 이렇게 회상하였다. “나는 단지 동정심이나 구하려는 생각으로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인데, 더 많은 유익을 얻었읍니다. 동생은 내 생각이 어디가 잘못되었는지를 알게 도와주었읍니다. 동생은 내가 혼자서 너무 많은 책임을 떠맡고 있다고 말했읍니다. 처음에는 그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지만, 동생의 충고를 적용하기 시작하자 커다란 짐이 벗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읍니다.” 잠언 27:9의 이러한 말은 과연 참되다.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라.”
솔직히 이야기해 주고 사물을 올바로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친구나 배우자가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때로는 한번에 한 가지 문제에만 집중하도록 도와주고자 할지 모른다. 그러므로 방어적이 되지 말고, 그와 같은 “기술있는 지도”를 소중히 여기라. 여러 차례 대화를 나누다 보면, 감정적인 압박을 원천적으로 줄이거나 없애기 위해 우리가 처한 상황을 변화시키거나 얼마간 바꾸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단계들을 지적해 주는 얼마의 단기적인 목표를 제시해 줄 사람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b
우울증과 싸우는 데는 대개 자기 비하 감정과 싸우는 것이 요구된다. 어떻게 그와 같은 감정을 기술있게 물리칠 수 있는가?
자기 비하 감정과의 싸움
예를 들면, 앞 기사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머리아는 집안에서 다툼이 있은 후에 우울증에 걸리게 되었다. 그는 이런 식으로 결론내렸다. ‘나는 아주 몹쓸 사람이야. 무엇 하나 올바로 하는 게 없단 말이야.’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머리아가 자신이 내린 결론을 분석해 보기만 했더라면, 이렇게 추리함으로써 그러한 생각에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나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어떤 일은 올바로 하고 어떤 일은 잘못하지. 몇 가지 실수를 하였으니, 보다 신중하게 일을 할 필요가 있겠군. 하지만 이런 일을 지나치게 확대하지는 말아야지.’ 그처럼 추리했더라면 그는 자기 비하 감정을 전혀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정죄하는 지나치게 비평적인 마음의 소리는 종종 잘못된 것이다! 우울증을 낳는 왜곡된 생각의 몇몇 전형적인 예가 다음 면의 네모 안에 열거되어 있다. 그처럼 잘못된 생각이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고 그 타당성에 대해 의문을 품고 생각해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37세 된 홀어머니인 진 또한 자기 비하 감정의 피해자였다. 그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나는 아들 둘을 기르느라 압박을 많이 받았읍니다. 그러나 다른 홀어버이들이 재혼하는 것을 볼 때면, ‘나는 분명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읍니다. 부정적인 생각만 하다 보니 이러한 생각은 눈덩이처럼 불어났읍니다. 결국 우울증으로 인해 입원하게 되었읍니다.”
진은 계속 이렇게 말하였다. “퇴원 후에, 1981년 9월 8일호 「깰 때이다」(한국어판은 1981년 12월 15일호)지에 실린 ‘우울증에 걸리게 할 수 있는 생각들’의 목록을 읽어 보았읍니다. 매일 밤 그 목록을 읽었읍니다. 몇몇 잘못된 생각으로는 ‘한 인간으로서의 나의 가치는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있다,’ ‘나는 결코 상심하지 말아야 한다; 항상 행복하고 침착해야 한다,’ ‘나는 완벽한 부모가 되어야 한다’와 같은 것들이 있었읍니다. 나는 완벽주의자가 되려는 경향이 있었읍니다. 그래서 나는 그런 식의 생각이 들면, 그런 생각을 멈추도록 도와 달라고 여호와께 즉시 기도했읍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자기 비하 감정에 빠지게 하여, 온통 생활상의 어려움만 보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것들은 보이지 않게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읍니다. 특정한 잘못된 생각들을 피하려고 스스로 노력함으로써, 나는 우울증을 극복하였읍니다.” 당신의 생각 가운데도 의문을 품어 보거나 버려야 할 것들이 있는가?
내 잘못인가?
알렉산더는 심한 우울증에 걸리기는 하였지만, 그럭저럭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기는 하였다. (3면 참조.) 자기가 가르치던 학생들 중에 몇몇이 중요한 읽기 시험에서 낙제를 하자, 그는 자포 자기하게 되었다. 그의 아내, 에스터는 이렇게 말하였다. “남편은 자기는 실패했다고 느꼈읍니다. 나는 남편에게 그것은 남편의 잘못이 아니며, 100퍼센트 성공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고 말해 주었읍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죄책감에 압도되어 정신의 문을 닫았으며,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 대개, 지나친 죄책감은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 비현실적인 책임감을 느낄 때 초래된다.
아무리 자녀라 하더라도, 부모가 자녀의 생활에 강한 영향을 미칠 수는 있지만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다. 만일 계획한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으면 이렇게 자문해 보라.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예기치 않은 어떤 일에 직면했는가? (전도 9:11) 내가 가지고 있는 신체적, 정신적, 감정적 능력의 한도 내에서 합리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였는가? 나의 기대 수준이 너무 높지는 않았는가? 보다 합리적이 되고 겸허해질 필요가 있는가?—빌립보 4:5.
그러나 당신이 심각한 실수를 범하였으며, 더우기 자신의 잘못이라면 어떠한가? 자신을 정신적으로 계속해서 질타한다고 실수가 개선되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할 때, 기꺼이 “널리” 용서해 주시지 않는가? (이사야 55:7) 하나님께서는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는데, 스스로를 정죄하여 그러한 잘못으로 인해 평생토록 정신적인 고통을 주어서야 되겠는가? (시 103:8-14) 끊임없이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시정’하기 위해서 적극적인 단계를 취할 때,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우울증 또한 덜 수가 있다.—고린도 후 7:8-11, 신세 참조.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라’
우리의 감정적인 문제들 중 일부는 지나간 일에 뿌리를 두고 있는 수가 있다. 부당한 대우로 인해 피해를 입었을 경우에는 특히 그러하다. 이런 것들은 기꺼이 용서하고 잊어버려야 한다. ‘잊어버리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쉽지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을 자꾸 생각하여 남은 인생을 망치는 것보다는 잊어버리는 편이 낫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립보 3:13, 14) 바울은 살인을 승인한 일을 포함하여 그가 유대교에서 추구했던 잘못된 행로만 계속 생각하지 않았다. (사도 8:1) 그런 것이 아니라, 바울은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는 미래의 상을 위하여 자격을 갖추는 일에 자신의 힘을 집중하였다. 머리아 역시 지나간 일만 계속 생각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한때는 자기를 잘못 길렀다고 어머니를 탓하기도 하였다. 머리아의 어머니는 탁월해 지는 것과 육체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하였고, 그 때문에 머리아는 완벽주의자가 되었고 매력적인 외모를 갖춘 여동생에 대해 질투하는 경향이 있었다.
“잠재해 있는 이러한 질투심이 갈등의 근본 원인이었는데도, 나의 행동 방식을 가족의 탓으로만 돌렸읍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이와 같은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읍니다. ‘누구의 잘못이든 간에 실제로 무슨 차이가 있는가?’ 혹 어머니가 나를 잘못 길렀기 때문에 내가 얼마의 나쁜 기질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요점은 무언가 조처를 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계속 행동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은 머리아가 정신적으로 필요한 조정을 하여 우울증과 싸워 이기는 데 도움이 되었다.—잠언 14:30.
사람의 진정한 가치
모든 요인을 고려해 볼 때, 우울증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가치에 대해 균형 잡힌 견해를 갖는 것이 요구된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편지하였다. “여러분 각자에게 말하는데, 진정한 가치 이상으로 자신을 평가하지 말고 자신을 냉철하게 평가하시오.” (로마 12:3, 찰스 B. 윌리엄스역) 거짓된 자존심, 자신의 한계의 무시 및 완벽주의는 모두 자신을 과대 평가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저항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극단으로 흐르는 것도 피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 각자의 개인적인 가치를 강조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누가 12:6, 7) 우리는 하나님께 그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에 대해서 아주 사소한 점까지도 유의하신다. 그분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에 대해서 우리 자신이 모르는 것까지도 아신다.—베드로 전 5:7.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세라가 자신의 가치에 대한 감정을 개선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나는 언제나 창조주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읍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분이 한 인격체로서 나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읍니다. 아이들이 무슨 일을 하든, 남편이 무슨 일을 하든, 엄마 아빠가 나를 어떻게 길렀든 간에, 여호와와의 개인적인 벗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할 자존심이 실제로 생기기 시작했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종들을 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에, 우리의 가치는 다른 사람의 인정 여부에 의존하지 않는다. 물론 배척당하는 것은 불유쾌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이 인정하는 일이나 인정하지 않는 일을 자신의 가치를 평가하는 척도로 삼을 때, 우리는 우울증에 걸리기가 쉬울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던, 다윗 왕도 한번은 “비루한 자,” 달리 말하자면 “무가치한 자”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부르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음을 알고, 그러한 말을 자신의 가치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으로 보지 않았다. 사실 사람들이 종종 그러하듯이, 시므이는 나중에 사과하였다. 설사 어떤 사람의 비평이 정당하다 하더라도, 그러한 비평은 우리가 한 특정한 일을 겨냥한 것이지 한 인격체로서의 우리의 가치를 비평하는 것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사무엘 하 16:7; 19:18, 19.
세라에게는 성서와 성서에 기초한 출판물을 개인적으로 연구하고 여호와의 증인의 집회에 참석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의 기초를 놓는 데 도움이 되었다. 세라는 이렇게 회상하였다. “하지만, 기도에 대한 태도를 바꾸는 것이 가장 큰 도움이 되었읍니다. 나는 커다란 일들에 대해서만 하나님께 기도해야지 사소한 문제들로 하나님을 귀찮게 해드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곤 했읍니다. 이제는 무슨 일이라도 하나님께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신경이 날카로와질 때는, 차분하고 합리적이 되게 도와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 주시며 매일매일의 견디기 어려운 모든 상황들을 극복하도록 도와주신다는 것을 알 때, 더욱더 그분께 이끌리게 됩니다.”—요한 1서 5:14; 빌립보 4:7.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우리의 한계를 이해하시고, 우리에게 매일의 문제를 타개해 나갈 힘을 주신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우울증과 싸우는 열쇠이다. 하지만, 때로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해봐도 우울증이 좀처럼 떠나지 않는 수가 있다.
‘시시 각각’으로 인내함
여러 해 동안 중우울증과 싸워 왔던 47세 된 어머니인 에일린은 이처럼 한탄한다. “영양 보충에 항우울증 약에, 모든 것을 다 해보았읍니다. 잘못된 생각을 조정할 줄도 압니다. 이것이 보다 합리적인 사람이 되는 데는 도움이 되었읍니다. 하지만 우울증은 여전합니다.”
우울증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우울증과 기술있게 싸우고 있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의사도 이 장애를 치료하는 방법에 대한 답을 모두 아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 우울증은 어떤 심각한 병을 치료하기 위해 투여한 약물의 부작용으로 생긴다. 따라서, 그러한 약물의 사용은 이율 배반적이다. 그것은 그러한 약물이 다른 어떤 의학적인 문제를 치료하는 유익도 있지만, 그 부작용으로서 우울증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해를 해주는 다른 어떤 사람에게 자신의 감정을 털어 놓는 것은 도움이 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아무도 자신이 느끼는 고통의 깊이를 실제로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알고 도와주신다. 에일린은 이렇게 밝혔다. “여호와께서는 계속 노력할 수 있도록 힘을 주셨읍니다. 그분은 내가 포기하지 않게 도우셨고 내게 희망을 주셨읍니다.”
하나님의 도움과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감정적인 지원과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우리는 문제에 압도당하여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 때가 되면 여타의 만성 질환에 적응했던 것처럼 우울증에도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인내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인내는 가능하다! 심한 우울증에 지속적으로 시달려온 진은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그것을 매일매일이 아니라 시시 각각으로 부닥쳤읍니다.” 에일린과 진은 모두 성서에 약속되어 있는 희망으로 계속 견뎌 나갔다. 그 희망이란 무엇인가?
귀중한 희망
성서는 가까운 장래에 이러한 때가 이를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눈물을 그[인류의]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시 21:3, 4) 그때에 하나님의 왕국은 지상의 신민 모두를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완전하게 치료해 줄 것이다.—시 37:10, 11, 29.
단지 신체적인 고통만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괴로운 고민과 고통까지도 사라질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신다.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이사야 65:17, 18) 인류가 지난날의 모든 짐에서 벗어나 매일 수정처럼 맑은 정신으로 깨어나 그 날의 활동을 열심으로 시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가! 사람들은 더는 몽롱하고 우울한 기분으로 인해 지장을 받지 않을 것이다.
‘사망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 다시 있지 않’을 것이며, 현재와 같이 우울증을 초래하는 비극적인 손실이나 매일매일의 감정적 압박이 사라질 것이다. 사랑의 친절, 진실 및 평화가 충만한 상태에서 사람들이 서로 교제하기 때문에, 극한 대립은 사라질 것이다. (시 85:10, 11) 죄의 영향이 제거됨에 따라, 마침내 하나님의 의의 표준을 완전히 달하게 되어 내적으로 충만한 평화를 누리는 즐거움이 얼마나 훌륭할 것인가!
이러한 가슴 설레는 전망은 제아무리 심한 우울증과도 계속 싸우게 해주는 커다란 자극제이다. 하나님의 신세계에서는 완전해진 사람들이 우울증에 대해 완전 무결한 승리를 거둘 것이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좋은 소식인가!
[각주]
a 「깰 때이다」지는 어떤 특정 형태의 치료를 지지하거나 권장하지 않으며, 다만 도움이 되는 최신 정보를 제공하고자 한다. 본지 1982년 2월 1일호에 실린 “중우울증 격퇴—전문적 치료법”을 보라. 중우울증과는 완전히 다른 단순한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본지 1983년 1월 15일호에 실린 “어떻게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를 보라.
b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 믿고 의논할 수 있는 사람은, 죄책감이나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라는 느낌을 더해 줄 수 있는 단정적인 말을 피해야 할 뿐만 아니라 비현실적으로 낙관적이 되어서도 안 된다. 다음 호 잡지에서는 우울증에 걸린 사람을 다른 사람이 도울 수 있는 방법에 관한 지식이 제공될 것이다.
[13면 네모]
왜곡된 생각의 몇가지 유형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생각: 사물을 흑백의 범주로 본다. 자신의 성과가 완전에 미치지 못하면, 자신은 완전히 낙오자라고 생각한다.
지나친 일반화: 하나의 부정적인 사건을 끝없는 실패의 연속의 한 형태로 본다. 예를 들면, 한 친구와 한번의 언쟁을 하고 나서 이렇게 결론 짓는다. ‘나는 친구를 전부 잃고 말거야.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니까.’
긍정적인 부면의 무시: 긍정적인 경험을 “별로 중요치 않다”거나 “나는 그만한 자격이 없다”는 주장으로 배척한다. 한 가지 사소한 부정적인 면만 계속 생각함으로써 전체적인 견해가 어두워진다.
결론의 비약: 어떤 사람이 자기를 싫어한다고 혼자서 결론을 내리고는 그것을 확인하기조차 귀찮아 한다. 혹은 언제나 나쁜 결과가 생길 것이라고 절대 확신한다.
확대 혹은 축소 해석: 어떤 것(자기 자신의 실수나 다른 사람의 성취와 같은 일)은 그 중요성을 과장하는가 하면, 어떤 것(자기 자신의 바람직한 특성이나 동료의 불완전한 특성)은 얕보아 사소한 것으로 여기고 만다. 흔히 있는 부정적인 사건을 끔찍스런 재난이나 되는 것처럼 여긴다.
자기 책임 의식: 사실상 본래 자신의 책임이 아닌 어떤 부정적인 외부의 사건을 자신이 원인인 것처럼 생각한다.
의학 박사, 데이비드 D. 번스 저 「상쾌한 느낌—기분 전환 요법」(Feeling Good—The New Mood Therapy)에 근거한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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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이입할 줄 아는, 믿고 의논할 수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감정을 털어 놓는 것은 치료의 한 방법이 될 수 있으며 커다란 위안을 준다
[15면 삽화]
하나님께서 하찮은 참새도 가치있게 보신다면, 우리는 훨씬 더 가치있게 보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