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비아
아프리카는 수를 놓은 커다란 옷과도 같습니다. 지중해 연안의 백사장에서부터, 황금빛의 사하라를 지나, 에메랄드 빛 삼림을 거쳐, 바람이 휘몰아치고 하얀 파도가 부서지는 희망봉의 해안선에 이르기까지, 이 대륙에는 세계 인구의 10분의 1이 살고 있습니다. 나일 강, 나이저 강, 콩고 강, 잠베지 강과 같은 여러 강이 이 대륙 곳곳을 굽이굽이 흐릅니다. 그리고 이 대륙 깊숙한 곳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금과 구리와 보석이 매장되어 있습니다.
콩고 분지의 열대 우림은 고도가 높아지면서 완만하게 굽이치는 사바나 지역 즉 중앙아프리카 고원으로 이어지는데, 이 고원에 잠비아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나라의 모양이 지도 위에 비스듬히 내려앉은 커다란 나비처럼 생겼다고 말합니다. 이 독특한 모양의 국경선은 식민지 시대의 유물로, 75만 제곱킬로미터가 넘는 땅을 둘러싸고 있으며, 그 면적은 한반도의 세 배가 훨씬 넘습니다.
현재 잠비아라고 불리는 이 지역은 북동쪽에 그레이트리프트밸리 즉 대지구대가 있으며, 서쪽과 남쪽으로는 거대한 잠베지 강이 흐릅니다. 19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이 지역은 금과 상아와 노예를 얻기 위해 아프리카를 약탈하던 외국인들에게 여전히 머나먼 땅이었습니다. 1855년에 스코틀랜드의 방앗간 노동자의 아들인 탐험가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천둥 치는 연기”—그가 후에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을 따서 빅토리아 폭포라고 부른 탄성을 자아내는 인상적인 폭포—너머에 있던 이 땅에 대해 세계인들이 눈을 뜨게 해 주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리스도교국의 선교사들이 왔으며, 그들은 이 대륙의 중심부를 개척하기 위해 “그리스도교·상업·문명”을 열성적으로 전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용한 방법은 흔히 그들의 봉사가 훌륭한 추천을 받는 데 거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사람들이 오게 되었으며, 그들은 하느님의 도움을 받아 진정으로 자신들을 하느님의 봉사자로 추천하였습니다.—고린도 둘째 6:3-10.
초창기
1890년경에, 지금의 잠비아에 해당하는 지역 내에는 5개의 선교회가 설립되어 있었습니다.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식민 세력과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회사들의 진출로 인해 고통을 겪게 되자, 영적인 지침을 구하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 갔습니다. 대륙 곳곳에서 특이하고 이상한 종교 운동들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영적 도움을 받을 때가 가까워 오고 있었습니다. 일찍이 1911년에 「성경 연구」 책이 잠비아에 있던 마음이 정직한 사람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이 책들이 언제나 하느님을 섬기는 데 진정으로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 의해 전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성서 진리는 급속히 북쪽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1910년에 그 당시 왕국 전파 활동을 감독하던 찰스 테이즈 러셀은 니아살랜드(지금의 말라위)에 있는 형제들을 돕기 위해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출신의 믿음직스럽고 진지한 형제인 윌리엄 W. 존스턴을 보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존스턴 형제보다 먼저 그곳에 갔던 몇몇 사람들은—그 지방 사람이었든 외국인이었든 모두—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성경 진리를 왜곡하였습니다. 참으로 그 이후 여러 해 동안, 자칭 전파자들과 목회자들이 북로디지아(지금의 잠비아)에 와서 종교와 해방의 약속과 불결한 행위들을 어지럽게 혼합하여 선전하였습니다. 존스턴 형제는 니아살랜드 사람들을 도왔으며, 그들을 “하느님의 말씀을 더 잘 알고자 하는 강한 욕망을 품”고 있는 사람들로 묘사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서쪽에 있는 구역들에는 직접적인 주의를 거의 기울이지 못하였습니다. 성서에 근거한 출판물이 우편이나 이주 노동자들을 통해 북로디지아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그 당시의 왕국 전파 활동은 여전히 거의 감독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불안정한 시대
1920년대 초는 불안정한 시대였습니다. 자생적인 “워치 타워 운동”은 하느님의 종들이 수행하는 참다운 그리스도인 봉사의 직무가 불신을 받게 만들었습니다. 성서 진리를 거의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성경 연구생 즉 오늘날의 여호와의 증인과 연합하고 있다고 거짓 주장을 하던 사람들 가운데서 아내를 교환하는 행위를 비롯하여 그릇된 행동을 한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서 원칙에 진실한 애착을 가지고 있고 열정적으로 전파함으로 진리에 따라 생활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사람들의 집단이 많이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문제는 하느님을 섬기는 데 진실한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분별해 내는 일이었습니다. 둘 다 영국 출신인 토머스 월더와 조지 필립스는 1924년에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에 있는 성경 연구생의 사무실에 왔습니다. 30대 초반이었던 월더 형제는 워치 타워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밝혀내기 위하여 로디지아 전역을 다녔습니다. 이듬해에는 유럽 출신인 윌리엄 도슨이 형성되고 있는 집단들을 방문하라는 임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몇몇 자칭 목회자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열성적으로 침례를 주고 있으며, 그렇게 침례를 받는 사람들이 대부분 성서 진리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부족하다는 사실에 유의하게 되었습니다. 후에 루엘린 필립스(조지 필립스와는 친척이 아님)는 이렇게 썼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오른편과 왼편의 차이도 알지 못했던’ 니네베의 주민과 같다는 사실이 아주 명백해졌습니다.” (요나 4:11) 진실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지만, 자국어로 된 출판물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진리를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우리의 활동을 안정적으로 감독하기 위해 정부의 승인을 얻으려고 여러 차례 노력을 기울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케이프타운 사무실은 공개 전파와 침례를 제한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월더 형제는 성서 연구와 숭배를 위한 모임을 막지는 않았지만, 관심자들로 이루어진 집단들에 편지를 보내서, 성경 연구생들의 상주 대표자가 임명될 때까지 이 임시 조처에 협조할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철도를 따라서
여러 세기 동안 이 지역 사람들은 땅에 나와 있는 구리를 사용해서 도구나 장식품을 만들었습니다. 1920년대 중반이 되자, 그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채광권도 장악하고 있던 브리티시사우스아프리카 회사가 이 막대한 지하자원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인부들이 필요하게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시골 지역에서 새롭게 개발되던 마을들과 도시들로 이주해 왔습니다. 이런 마을들과 도시들은 원래는 케이프타운에서 카이로까지 놓으려고 계획하였던 철도를 따라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제임스 루카 무앙고는 이렇게 회상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부회 즉 지금의 회중을 설립하는 것이 요즈음 조직에서 하는 것과는 매우 달랐습니다. 1930년 이전에는 성서 연구를 위한 모임을 작은 집단 차원으로만 열었습니다. 케이프타운 사무실에 연락을 하는 관심자들이 있는가 하면, 브루클린으로 직접 출판물을 신청하는 관심자들도 있었습니다. 출판물은 영어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러한 집단들은 대개 규모는 작았지만 잘 발전하였고, 그들의 열심과 결심으로 인해 점점 더 조직적인 전파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의 주의를 끌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탄압
1935년 5월에 영향력 있는 종교 단체들은 북로디지아의 형법을 수정하도록 압력을 가해서, 이른바 선동적인 출판물의 수입과 배포를 심각한 범죄 행위로 만들었습니다. 물론, 무엇이 선동적이거나 반체제적인 출판물인지를 결정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혹은 종교적 신념에 따라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후에 일어난 일을 보면, 반대자들이 여호와의 증인을 금지시킬 구실을 찾고 있었다는 데에는 거의 의문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새로운 세법이 공표되면서 광산촌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반대자들은 그때가 증인들을 반정부 세력으로 낙인찍을 기회라고 여겼습니다. 그달 초에 증인들은 루사카에서 대회를 열었는데, 반대자들은 이 작은 대회가 북쪽으로 30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는 곳에서 발생한 소요 사태와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젊은이였던 톰슨 캉갈레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전파하는 대신, 집 안에 있으면서 왕국 노래를 연습하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파업이나 폭력 행위에 가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을 체포하는 일이 뒤따랐으며, 많은 도시에서 형제들은 살던 집에서 쫓겨났고, 성서 서적은 압수되거나 폐기되었습니다. 총독은 20가지의 우리 출판물을 금지한다는 포고령을 내렸습니다.
이러한 소요 사태를 조사하도록 조사 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이 지역의 조사 위원은 이렇게 인정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과 워치 타워 조직 자체는 파업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 여호와의 증인은 단 한 명도 어떠한 폭동에도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코퍼 벨트의 그리스도인들」(Christians of the Copperbelt)이라는 책은 이렇게 보고하였습니다. “조사 위원회는 ··· 아주 빈약한 증거에 기초하여 많은 심각한 주장들을 받아들였으며, 위원회의 보고서를 근거로 여호와의 증인의 출판물이 금지되었다. 몇몇 지역에서는 부족장들이 강력한 탄압을 가하고 워치 타워의 집회 장소들을 불태워 버렸다.”
한편 케이프타운 사무실은 반복적으로 영국 정부의 식민지 담당 장관에게 증인들이 “그들의 양심의 지시에 따라 방해받지 않고 여호와 하느님을 숭배할 천부의 권리를 행사하도록 허락”해 줄 것을 탄원하였습니다. 또한 대표자가 있는 상주 사무실을 허가해 줄 것도 탄원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러한 노력을 축복하셨습니다. 1936년 3월에 식민지 담당 장관은 루사카에 서적 보관소를 개설할 것을 승인하고 루엘린 필립스를 대표자로 인정하였습니다.
네 가지 요구 조건
루사카에 서적 보관소가 개설된 것은 뜻 깊은 승리였습니다. 하지만 회중들이 더 체계적인 감독을 받고 있다는 만족스러운 증거가 제시될 때까지, 총독은 여호와의 증인을 종교 조직으로 법적 인가를 해 주는 것을 미뤘습니다. 그 후로 여러 해 동안 필립스 형제는 진실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베풀고 그들을 강화시킬 뿐만 아니라 비성경적인 행위를 하도록 부추기는 사람들을 물리치기 위하여 충실한 형제들과 함께 활기차게 일하였습니다. 파이오니아들은 교리와 도덕적인 문제 및 조직상의 문제에 관한 훈련을 받고서 집단들과 회중들을 돕도록 파견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대해 한 형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1940년은 잠비아의 전도인들에게 최고의 해였습니다. 그해부터 다시 침례를 받을 수 있게 되었는데, 1925년 이후로는 침례 마련이 없었던 것입니다.”
제임스 무앙고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그때에 성서 연구생은 침례를 받을 수 있으려면, 우리가 네 가지 요구 조건이라고 부른 것을 연구해야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침례를 주는 형제나 부회의 종이 지명한 다른 형제로부터 그 요구 조건들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첫 번째 요구 조건은 진리의 말씀을 듣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회개였으며, 세 번째는 하느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 네 번째는 헌신이었습니다. 연구생은 이 네 가지 요구 조건을 올바로 이해했을 때, 침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절차를 도입한 것은 침례받는 사람이 하려고 하는 일의 의미를 확실히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출판물이 금지되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정부 관리들은 증인들의 중립을 정부의 징병 정책을 반대하는 것으로 오해하였습니다. 1940년 12월에는, 금서 목록이 확대되어 여호와의 증인이 발행한 모든 출판물이 포함되게 되었습니다. 우리 출판물의 수입 역시 금지되었습니다. 1941년 봄에 정부는 워치 타워 출판물을 소지하고 있는 사람은 출판물들을 내놓아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소되어 투옥될 수 있다고 고시하였습니다.
여행하는 감독자로 봉사하였고 후에 길르앗 학교에 다녀온 솔로몬 리암벨라는 이렇게 회상하였습니다. “우리는 잠베지 강에 띄워 놓은 카누 안에 출판물을 숨겼습니다. 책들을 침대 밑에 묶어 두거나, 심지어는 가지고 있던 옥수수 가루와 수수 속에 숨겨 놓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형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책들을 땅에 묻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베뢰아 성서」는 숨기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이 성서는 금지되지 않아서 우리에게 매우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많은 책을 잃었습니다. 어떤 책은 흰개미가 먹어 버렸고 어떤 책은 도둑이 훔쳐 가기도 하였습니다. 우리가 책을 묻어 놓은 곳에 자주 왔다 갔다 하였기 때문에, 도둑들은 우리가 뭔가 값나가는 것을 묻어 놓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루는 숲 속으로 연구를 하러 갔는데, 우리 책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는 그 책들을 모아서 다른 장소에 다시 숨겨 놓았습니다.”
루엘린 필립스는 금지된 출판물에 대하여 담대하게도 총독에게 항의 서한을 보냈습니다. 이미 그해 초에 군 복무를 거부하여 투옥되었던 필립스 형제는 6개월 형을 또 선고받았습니다. 루사카 서적 보관소에서 임시로 봉사하던 한 자원 봉사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범죄 수사과에서 우리를 자주 찾아왔으며, 종종 필립스 형제를 경찰서로 소환하였습니다.” 그렇지만 필립스 형제는 계속 여러 회중에서 질서가 유지되도록 힘쓰고 열심을 고취시켰습니다. 유능한 형제들이 일할 수 있게 되자, 그들을 훈련하여 형제들의 종 즉 여행하는 봉사자로 파견하였습니다. 그들은 1943년에 최고 전도인 수가 3409명에 이르게 하는 데 큰 몫을 하였습니다.
꾸준히 더 큰 자유를 얻어 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여호와의 증인의 영국 사무실과 남아프리카 사무실은, 런던에 있는 식민성(省)에 우리의 출판물을 합법화해 줄 것을 거듭거듭 탄원하였습니다. 북로디지아 정부는 4만여 명이 여호와의 증인의 교육 활동을 지지한다고 서명한 탄원서를 받고는 금지된 출판물의 목록에서 일부 출판물을 삭제하였습니다. 그러나 「파수대」지는 여전히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1948년 1월에, 브루클린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본부에서 네이선 노어와 밀턴 헨첼이 이 나라를 처음으로 방문하였습니다. 그들은 루사카에서 열린 나흘간의 대회에 참석한 다음 원주민부 장관과 법무부 장관을 만났는데, 장관들은 이제 곧 남아 있는 제한 사항들이 해제될 것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마침내 여호와의 백성의 활동이 법적 인가를 받게 된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었습니다! 1948년 9월 1일에 새로운 지부 사무실은 워치 타워 협회가 아닌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름으로 개설되었습니다. 이제 당국자들과 일반인들, 심지어는 형제들 스스로가, 아무 관련이 없는 자생적인 “워치 타워” 교파들의 신봉자들과 여호와의 증인을 뚜렷이 구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40년 동안 종교적 반대자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를 삼는 일에는 관심을 거의 나타내지 않으면서 좋은 소식을 듣는 사람들의 믿음을 파괴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썼습니다. 한동안 여호와의 증인들은 “속이는 사람”으로 잘못 알려졌지만, 자신들이 하느님의 진실한 봉사자임을 계속 증명해 나갔습니다. (고린도 둘째 6:8) 그들은 전쟁이 끝나고 나서 자유를 누릴 것을 예상하고, 이후의 증가에 대비하여 가슴 설레게 하는 조처들을 취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선교 봉사
“선교 봉사의 보람된 특징들 가운데 하나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는 데 모든 부류의 남자와 여자를 어떻게 사용하시는지를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영적인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인식을 나타내는 것을 보는 것 역시 기쁨이 됩니다.” 잠비아에서 여러 해 동안 봉사한 이언 (존) 퍼거슨의 말입니다. 다른 종교의 선교사들이 흔히 사회적·경제적 문제들에 몰두하는 데 비해, 여호와의 증인의 선교인들은 그리스도인 제자를 삼는 활동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 선교인들은 하느님께 받은 이 사명을 수행하면서, “위선 없는 사랑”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해 왔습니다.—고린도 둘째 6:6.
이러한 선교 봉사의 영을 아주 분명하게 나타낸 사람들 가운데는 윌리엄 존스턴이 있습니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몇 년 전에 남부 아프리카로 와서 그 지역 곳곳을 두루 여행하였습니다. 1921년 초에 피트 데 야헤르와 패리 윌리엄스와 그 밖의 사람들은 잠비아의 이웃 나라인 남로디지아(지금의 짐바브웨)의 수도인 솔즈베리(지금의 하라레)에 도착하였습니다. 1920년대 중반에는 조지 필립스와 토머스 월더와 윌리엄 도슨이 북로디지아에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그 밖에도, 북로디지아에서 태어났지만, 다른 곳에서 일하는 동안 성경 연구생들과 접하게 된 사람들도 “좋은 일에 관한 좋은 소식”을 널리 전하기 위해 돌아왔습니다. (로마 10:15) 마나세 은코마와 올리버 카붕고는 그 초창기 전파 활동에서 큰 몫을 수행하였습니다. 잠비아 태생의 조지프 물렘와는 짐바브웨 북부에 있는 완키(지금의 황게) 광산에서 성경 연구생과 접촉하였고, 나중에 잠비아 서부에서 충실하게 봉사하였습니다. 프레드 카봄보는 그 지역 최초의 여행하는 감독자로 봉사하였습니다. 이 형제들은 진정한 파이오니아 즉 개척자들이었으며, 좋은 소식이 거의 혹은 전혀 전파되지 않은 지역들로 가서 향후의 성장에 대비하여 견고한 기초를 놓았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 갈 무렵, 남아프리카 출신의 찰스 홀리데이는 케이프타운 사무실의 조지 필립스의 권유를 받아들여 웨스턴 주에 있는 관심자들로 이루어진 집단들을 방문하였습니다. 홀리데이 형제는 통역자로 일할 현지 형제 한 명과 함께 목재 운반 열차, 카누, 갱거스 트롤리(사람의 힘으로 움직이는 작은 궤도차)를 타고 여행하였습니다. 그들은 빅토리아 폭포에서 북쪽으로 25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작은 도시인 세낭가에 도착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 중에는 이 방문객이 설명해 주는 성서 진리를 듣는 데 예리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며칠 동안을 여행해서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길르앗 선교인들이 도착하다
1948년에 두 명의 선교인, 해리 아넛과 이언 퍼거슨이 잠비아에 왔습니다. 이제, 구리 광산 운영 때문에 이곳으로 이주한 수많은 유럽인들에게 주의가 기울여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대단히 고무적이었습니다. 그해에 야외 봉사를 하는 증인들의 수는 61퍼센트나 증가하였습니다.
많은 곳에서 선교인이 성서 연구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적어 놓은 대기자 명단을 가지고 있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부 사무실에서는 10년 된 소형 유개 트럭을 한 대 구했습니다. 이 트럭은 선교인이며 여행하는 감독자인 두 명의 형제가 산업 중심지 밖에 있는 지역에 갈 때 사용하였습니다. 지부에서는 이렇게 보고하였습니다. “이 트럭은 매우 유용했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지부로 돌아올 때 바퀴가 세 개밖에 없거나 차대 반쪽이 뒤에 매달려서 오기도 하였습니다.”
1951년에 이 나라에는 여섯 명의 선교인이 있었습니다. 1953년 12월에는 도움을 베풀 준비를 갖춘 여섯 명의 선교인이 더 왔습니다. 이 선교인들 가운데 밸로라 마일스와 존 마일스가 있었는데, 이들은 잠비아에서 6년간 봉사한 뒤에 임지가 짐바브웨로, 나중에는 레소토로 바뀌었습니다. 그 후로 여러 해 동안 더 많은 선교인들이 왔습니다. 조지프 호릴룩, 존 렌턴과 이언 렌턴, 유진 키나슈크, 폴 온데이코, 피터 팰리서와 베라 팰리서, 에이비스 모건을 비롯한 모든 선교인이 사랑에 찬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물론 이 특별한 봉사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희생과 조정이 필요하였습니다.
“아직 어린애잖아!”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웨인 존슨은 잠비아로 가라는 임명을 받았을 때의 느낌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길르앗 학교 제36기 졸업생인 웨인은 얼 아치볼드와 함께 1962년 초에 잠비아에 왔습니다. 현재 웨인은 아내인 그레이스와 함께 캐나다에서 여행하는 봉사자로 섬기고 있는데 그때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나는 겨우 스물네 살인데다 외모조차도 어려 보였습니다. 친얀자어[치체와어라고도 함]를 배우고 있을 때, 나를 처음 본 자매들이 ‘아칼리 무아나’—‘아직 어린애잖아!’—하고 서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곤 했습니다.”
웨인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여호와와 그분의 조직에 굳게 의지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사도행전 16:4의 취지와 일치하게, 나는 여호와와 그분의 조직이 마련한 지침과 전달 사항을 전해 주고 있을 뿐임을 모두가 알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행동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 시절을 돌이켜 보면, 내가 그러한 훌륭한 특권을 받았다는 사실이 아직도 놀랍습니다.”
추방되다!
1960년대와 1970년대는 변화의 시대였습니다. 잠비아 전역에서 주기적으로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1964년에 잠비아가 독립하면서, 형제들은 기 경례와 국가를 부르는 문제와 관련하여 점점 더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1960년대 말이 되면서, 일부 정치인들은 선교인들이 정부 방침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지부 보고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1968년 1월 20일 이른 아침에 거의 모든 영어 회중의 감독자들로부터 전화가 걸려 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추방 명령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흥미롭게도, 외국 출신의 여호와의 증인들뿐 아니라 조지 모턴과 아이작 치풍구와 같이 잠비아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증인들도 추방 명령을 받았습니다.”
사태는 급박하게 전개되었습니다. 같은 날 오전 10시에 이민국 관리들이 지부 사무실에 와서 다섯 선교인 부부에게 추방 명령서를 전달하였습니다. 선교인인 프랭크 루이스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그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부에 와 있었습니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선교인 형제들이 뒷문으로 나가 한 형제의 집으로 가서 금지령이 내려질 때를 대비해서 준비해 놓은 마련들을 실행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하지만 한 선교인 자매가 말라리아에 걸려 위층에서 심하게 앓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지부를 떠나기가 망설여졌습니다. 하지만 현지 형제들은 그 자매를 돌보아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우리에게 떠나라고 강권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그렇게 해 줄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타임스 오브 잠비아」지를 보니 우리에게 워치타워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워치타워가 이제 금지되었고 ‘지도자’들은 숨어 버렸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기분이 정말 이상했습니다. 우리 이름이 그 신문 표지에 실렸고 신문에는 당국에서 우리를 찾기 위해 시내에서 집집을 수색하고 있다는 내용도 실렸습니다! 지부 사무실에 남았던 현지 형제들은 맡은 일을 잘 처리하였습니다. 그들은 서류철과 출판물을 여러 곳으로 나누어 보냈습니다. 그 일이 끝나자 우리는 다음 날 지부로 돌아가서 당국에 연락을 하였습니다.”
경찰관 한 명이 지부 사무실에 배치되었고, 얼마 안 있어서 당국에서 선정한 선교인들과 외국 국적의 증인들에게 추방 명령서가 발부되었습니다. 루이스 형제는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몇 사람이 떠났습니다. 우리를 개인적으로 잘 알지도 못하지만 그저 우리와 악수하고 얼굴을 보며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자녀들을 데리고 칼룰루시에서부터 25킬로미터를 걸어온 자매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목이 멥니다!”
두 번째로 추방의 물결이 일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현재 잠비아 지부의 지부 위원으로 봉사하고 있는 앨버트 무손다는 1975년에 스물두 살의 나이에 베델 자원 봉사자로 회계부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경찰이 갑자기 들이닥쳤습니다. “그들은 선교인들에게 이틀 안에 이 나라에서 떠나라고 하였습니다.” 앨버트의 말입니다.
존 제이슨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1975년 12월에 이민국에서는 우리에게 36시간 안에 이 나라에서 떠나라고 명령하는 짤막한 통고문을 보냈습니다.” 현지의 한 변호사를 통해 이의 신청을 하자, 선교인들에게 개인 물품을 챙길 수 있도록 시간을 연장해 주었습니다. 제이슨 형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게 한 다음에 우리는 매우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앨버트의 아내인 데일레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형제들을 배웅하기 위해 사우스다운 공항까지 함께 갔습니다. 존 제이슨은 비행기를 타고 케냐로 갔고, 이언 퍼거슨은 스페인으로 갔습니다.” 이렇게 두 번째로 추방의 물결이 일게 된 원인은 무엇이었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1975년의 대회가 화근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대회는 그 소란스러웠던 시기에 열린 아주 큰 대회들 가운데 하나로 참석자 수가 총 4만 명이 넘었”다고 존 제이슨은 회상합니다. 공교롭게도 근처에서 정치 집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 가운데는 여호와의 증인이 정치에 중립을 지키므로 증인들에게 단호한 조처를 취할 것을 요구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제이슨 형제의 기억에 따르면, 사람들은 그 정치 집회에 참석자가 적었던 이유를 여호와의 증인의 대회 탓으로 돌렸다고 합니다.
선교인들이 돌아오다
선교인들이 다시 잠비아에 들어오게 되기까지 10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1980년대는 정치적으로 매우 안정되고 제한이 완화되던 시기였습니다. 1986년에 에드워드 핀치와 그의 아내인 린다가 감비아에서 잠비아로 왔습니다. 그 뒤로 앨프리드 퀴에와 헬렌 퀴에, 디트마어 슈미트와 세이바인 슈미트 같은 선교인이 더 왔습니다.
1987년 9월에 데럴 샤프와 수잔 샤프가 자이르 즉 지금의 콩고 민주 공화국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경유하여 왔습니다. 그들은 1969년에 길르앗 학교를 졸업하고 콩고 전역에서 여행하는 봉사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중부 아프리카의 생활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건강하고 활기가 넘치는 데럴은 현재 40년이 넘게 특별 전 시간 봉사를 해 왔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여러 해 동안 살았던 선교인 집은 루붐바시에 있었는데 바로 국경 너머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수시로 잠비아로 여행하였습니다.”
수잔은 그때를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1970년대 초에 콩고에 식량 부족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에 몇 달에 한 번씩은 식품을 사러 잠비아에 가야만 했어요. 시간이 흘러 1987년 초에 통치체는 우리에게 콩고를 떠나 새로운 임지로 가라고 했지요. 그곳이 바로 잠비아였지요!” 콩고에서는 활동이 점점 더 심한 제한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샤프 부부는 형제들이 종교적 자유를 점점 더 많이 누리게 된 나라로 이주하게 되자 기뻐하였습니다.
하지만 야외와 지부에 몇 가지 조정을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공개 봉사가 부분적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형제들은 성서 연구 사회만 하였습니다. 많은 전도인들이 집집을 다니며 공개적으로 전파하는 일 즉 여호와의 증인이 수행하는 기본적인 공개 봉사 방법에 따라 봉사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고 심지어 불안해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따라서 형제들은 좀 더 담대하게 호별 방문 전파 활동을 수행하도록 격려를 받았습니다. 특히 국내 사정이 완화되고 경찰이 우리의 활동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하였습니다.
뒤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감
지부 위원회는 1970년대에 성장이 부진함이 분명하게 드러나자 이에 대하여 염려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지역적인 전통 때문에 자녀들과 함께 연구하는 것을 어려워하였으며, 호별 방문 증거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들이 다른 사람에게 자녀의 연구를 맡기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들은 다른 집의 자녀들과 연구를 하였습니다. 이제 용기 있는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 후로 여러 해 동안, 전도인들은 비성경적인 전통과 관행들을 버리도록 격려받았습니다. 회중들이 호응함에 따라 그들은 축복을 받았으며, 형제들은 자신들의 삶을 성서 원칙과 세계 전역의 형제들과 일치하게 틀 잡아 가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였습니다.
1975년에 선교인들이 추방된 이후로 5년 동안, 전도인이 거의 11퍼센트 감소하였습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1986년에 선교인들이 돌아온 이후로 5년 동안에 최고 전도인 수가 50퍼센트 이상 증가하였습니다. 그해 이래로, 활동적인 전도인의 수는 두 배 이상 늘어났습니다.
이전에 여행하는 감독자였던 사일러스 치브웨카는 지부에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1950년대부터, 길르앗에서 훈련받은 선교인들은 사람들이 장성하도록 도왔습니다. 선교인들은 매우 참을성과 이해심이 많았고 친절하였습니다. 그들은 전도인들에게 가까이 다가감으로, 시정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선교인들의 그와 같은 위선이 없고 사랑에 찬 지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성장의 자극제가 되고 있습니다.
인쇄된 소식
바울과 그의 동료들처럼 현대의 여호와의 증인들도 “오른손과 왼손에 있는 의의 무기들을” 사용함으로 자신들이 봉사자라는 증거를 제시합니다. (고린도 둘째 6:7) 그들은 영적인 전쟁을 하면서, 참 숭배를 증진시키기 위해 계속 의로운 “무기들” 즉 의로운 수단들을 사용합니다.
초창기에 우리 출판물은 영어로만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일찍이 1909년에 몇몇 남아프리카 사람들이 「파수대」를 예약하기는 했지만 성서 진리는 대부분 글이 아니라 말로 전파되었습니다. 그 시절에 봉사한 한 형제는 이렇게 보고하였습니다. “마을마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소식을 이야기하는 [모임 장소]가 있습니다. 영어를 아는 순회하는 형제가 현지 사람들이 쓰는 언어로 항들을 쉽게 번역해 줍니다. 그리고 질문을 고려합니다.” 물론 진리가 정확하게 전달되느냐는 번역하는 사람들의 능력과 동기에 크게 좌우되었습니다. 따라서 관심자들 가운데 연합을 증진시키고 정확한 지식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그들의 언어로 성서에 근거한 출판물이 정기적으로 꼬박꼬박 공급되어야 하였습니다.
출판물을 구할 수 있게 되다
1930년대 초에는 「하나님의 거문고」 책과 소책자 몇 부가 친얀자어로 번역되어 발행되었습니다. 1934년경에는 소수의 활동적인 전도인들이 1만 1000부가 넘는 출판물을 배부하였습니다. 이러한 활동에 자극을 받은 반대자들은 후에 “법령으로 괴롭힐” 궁리를 하였습니다. (시 94:20)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9년 말엽에는 「파수대」가 더는 금지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시벰바어 「파수대」를 월 1회씩 등사 인쇄하여 우편으로 예약자들에게 보냈습니다.
조너스 만조니는 1950년대 초반에 자신이 잡지를 번역하던 때를 기억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시벰바어로 번역하는 일을 나 혼자서 했습니다. 나는 영문 원고를 받아서 번역을 하고 교정을 보았습니다. 그다음 등사 원지에 내용을 타자기로 친 다음 인쇄를 하였습니다. 그 일을 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들었는데, 때로는 한 호의 잡지를 7000부나 만들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수작업으로 잡지를 한 부씩 만들었고 그런 다음 중철을 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우편으로 회중들에 잡지를 보냈습니다. 잡지들을 말아서 우표를 붙이고 상자에 넣어 우체국으로 운반하는 일도 적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기술이 제한되어 있었지만, 번역하는 형제들은 자신들의 일이 유익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헌신적으로 일하였습니다. 제임스 무앙고는 여행하는 봉사를 바쁘게 수행하면서도 번역문을 손으로 직접 써 가면서 번역 일을 하였는데, 그것도 대부분 촛불을 켜 놓고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무 피곤해서 번역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내가 기울인 노력이 형제들에게 영적 양식을 공급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며 그들이 장성에 이르도록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손을 바꾸다’
진리를 올바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번역자가 자신의 언어뿐만 아니라 영문 원고도 철저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에런 마풀랑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번역을 하다가 보게 되는 어구들 중에는 단어들만 보고 생각한 뜻과는 다른 뜻을 지닌 어구들도 있습니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임무를 넘겨주는 것에 관해 설명하는 출판물에 나온 영어 표현인 ‘change hands’[체인지 핸즈, 문자적 의미는 ‘손을 바꾸다’]에 관해 토의했던 기억이 납니다. 한 형제는 그 어구를 문자 그대로 번역하였습니다. 나는 그 어구의 의미가 정말로 ‘손을 바꾸는 것’인지 의심스러웠습니다. 다른 형제들과 상의한 끝에 우리는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단어 대 단어 식으로 직역하면 번역문이 영어 문장 같은 느낌이 들 것이므로 그렇게 하지 말라는 조언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직역을 하지 않고 우리가 번역하는 언어의 방식을 따르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기술적인 지원
1986년부터는 여러 지부 사무실에서 멥스(다종 언어 전산 사식 시스템의 약자)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시스템은 번역과 번역문 검토 및 조판의 속도를 크게 향상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워치타워 번역 시스템 소프트웨어와 번역 도구들이 널리 사용되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번역 팀들이 성서에 근거한 출판물을 몇 가지 주요 현지 언어로 번역하기 때문에 잠비아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한 출판물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세계역」 성경과 그 밖의 “의의 무기들”은 마음이 정직한 사람들이 여호와를 알 수 있도록 돕는 데 계속 유용하게 사용될 것입니다.—고린도 둘째 6:7.
난민들을 돕다
아프리카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행복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영향을 받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이웃이 적이 되고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들이 집을 떠나 도망해야 하고 마을들이 황폐됩니다. 난민들은 겨우 몇 가지 물건들만 챙겨 안전한 곳을 찾아 떠납니다. 오늘날 수백만 명이 이러한 일을 겪고 있습니다.
1999년 3월에 수천 명이 콩고 민주 공화국에서 일어난 분쟁을 피해 잠비아로 몰려들었습니다. 많은 전쟁에서와 마찬가지로 군대는 나아가면서 약탈을 자행하고, 남자들을 징발하여 무거운 짐들을 운반하게 하고, 여자들과 어린이들을 학대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무기를 운반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수가 굴욕적인 대우를 당하고 잔혹하게 구타당하였습니다. 50대 중반의 열심 있는 정규 파이오니아인 카타투 송가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그들은 여자들과 아이들 앞에서 나를 눕혀 놓고는 내가 의식을 잃을 때까지 채찍질을 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학대를 당하지 않기 위해 많은 가족들이 도피하였습니다. 마펭고 키탐보는 도피하는 중에 수풀을 지나면서 아들들과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찾을 겨를이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몹시 걱정이 되었지만 계속 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안전한 곳에 도착할 때까지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수백 킬로미터를 도피하였습니다.
조그만 카푸타 마을은 난민들로 넘쳐 나게 되었습니다. 그 난민들 가운데는 멀고도 험한 길을 오느라 완전히 지쳐 버린 5000명 가까이 되는 형제들과 그들의 가족들도 있었습니다. 그 마을에 사는 200명의 왕국 전도인들은 난민들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지만 형제 자매들에게 기꺼이 그리스도인 후대를 베풀었습니다. 난민이었던 만다 은톰파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베풀어진 사랑과 후대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 지방 형제들은 우리가 여호와의 증인임을 알게 되면 즉시 자신들의 집으로 우리를 맞아 주었습니다. 사르밧의 과부처럼 그들은 식품을 조금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기꺼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북쪽에 있는 무에루 호숫가 근처에서는 얼마 안 되는 현지 증인들이 수백 명의 난민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들은 조직적인 방법으로 식품과 거처를 제공하였습니다. 인근의 회중들은 카사바와 물고기를 공급해 주었습니다. 3개월 후에 콩고 증인들은 마침내 난민 수용소에 등록이 되어 그곳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격렬한 분쟁을 피해 온 사람들 가운데는 책이나 잡지를 챙겨 온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안전을 위해 필사적으로 도피하다 보면 아주 소중히 여기는 소유물이라도 그냥 두고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들 가운데서는 그와 대조가 되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피신을 하면서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 없는 상황에서도 몇몇 증인들은 어떻게든 출판물들을 챙겨 왔습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성서와 성서에 근거한 출판물은 여전히 귀했습니다. 보통, 집회에 150명이 참석해도 서적은 기껏해야 다섯 권뿐이었습니다. 참석한 사람들은 어떻게 집회에 참여하였습니까? 한 형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성서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성구를 찾아보았고, 성서를 가지고 있지 않던 사람들은 온전히 주의를 기울여서 들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모두가 해설함으로 여호와를 찬양하고 서로를 격려하는 일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물질적 필요를 돌보다
난민들은 대부분 여자와 어린이들입니다. 그들은 도착할 무렵, 흔히 건강이 나빠져 있고 먹을 것도 전혀 없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들을 어떻게 도왔습니까? 「타임스 오브 잠비아」에서는 이렇게 보도하였습니다. “기쁘게도, 잠비아 여호와의 증인 협회는 대호수 지역에 있는 난민들의 어려움을 덜어 주기 위해 이전의 자이르로 자원 봉사자들과 구호 봉사자들을 파견하였다.” 그 기사는 벨기에와 스위스 및 프랑스의 증인들이 “난민들에게 총 500킬로그램의 의약품, 10톤의 비타민제, 20톤의 식품, 90톤이 넘는 의복, 1만 8500켤레의 신발, 1000장의 담요를 공급하였으며, 그 가치를 전부 합하면 100만 달러(약 10억 원)에 달한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은톰파 형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구호물자가 도착한 날 우리 모두는 가슴이 매우 벅차올랐고 믿음이 강화되었습니다. 우리의 조직은 참으로 우리를 사랑스럽게 돌봅니다! 이러한 큰 사랑의 표현은 우리 형제들의 믿지 않는 가족 성원들이 견해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그런 가족들이 우리와 함께 연합하게 되었고 하느님을 숭배하는 사람으로서 잘 발전하고 있습니다.” 구호물자는 차별 없이 모든 난민에게 나누어졌습니다.
1999년 말에 이 나라에 온 난민의 수는 20만 명을 훨씬 넘어서게 되었습니다. 한 지방 신문은 “잠비아는 분쟁을 피해 온 아프리카 난민들을 가장 많이 수용하고 있는 나라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고 보도하였습니다. 난민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려는 당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난민들이 느낀 좌절과 불만은 폭력적인 항의로 이어졌습니다. 한 차례 소요 사태가 있은 후에 수용소 당국자들은 그곳에 있던 순회 감독자를 찾아와 질서 유지를 위해 협조하지 않았다고 그를 비난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단 한 번도 소란에 연루된 적이 없었는데도 말입니다. 순회 감독자는 친절하면서도 단호하게 이와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분명 여러분을 도왔습니다! 만일 폭도가 5000명이 더 많았다면 사태가 얼마나 악화되었을지 상상이 되십니까? 최소한 5000명의 난민이 증인이기 때문에, 소요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하길 바랍니다. 그들은 저의 형제들입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난민촌의 평화 유지에 도움이 되는 사람들로 인식됩니다. 한 정부 관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매우 종교심이 깊은 사람들이라는 말을 들어서 그들 중 여러 사람을 구역의 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렇게 하고 난 이후로 수용소가 평온해졌습니다. 그들이 도움을 베풀고, 모두가 열중하여 성서를 읽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계속 우리와 함께 있고 수용소 분위기가 매우 평화로운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피를 금지하는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함
“피[를] ··· 계속 멀리하십시오”라는 성경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실용적 지혜를 나타내는 일임은 오래전부터 분명하게 알 수 있었지만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무수혈 치료에 대해 심한 편견과 오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도 15:28, 29) 안타깝게도 여호와의 증인들은 가혹한 대우와 치욕을 당해 왔습니다. 병원에 입원한 어린이를 부모도 모르게 밤에 데리고 가서 수혈을 시키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제날라 무쿠사오는 여섯 살 난 손자 마이클을 돌보고 있었는데, 마이클은 심한 빈혈 때문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의사들은 수혈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무쿠사오 자매가 동의하지 않자 나흘 동안 협박과 욕설을 듣게 되었습니다. 무쿠사오 자매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의사들에게 간청하면서 나의 「치료 지침」 카드를 보여 주었지만 그들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간호사들은 내가 손자를 죽이고 싶어 하는 마녀라고 나를 비난하였습니다.”
그러한 적대적인 태도 때문에 어떤 형제들은 병원에 가기를 주저하였습니다. 많은 의사들이 환자가 충분한 설명을 근거로 동의할 수 있는 권리를 무시하였습니다. 기꺼이 도우려고 한 소수의 의사들은 많은 사람들이 관행을 벗어난 것이라고 여기던 치료법을 시술함으로 동료들로부터 심한 비난을 받거나 심지어는 따돌림을 당할 위험을 무릅썼습니다. 또한 기반 시설이 미흡하고 수혈을 대체하는 치료법을 많이 활용할 수 없는 현실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1989년에 구리 채광 업체의 의료 책임자는 “사람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수혈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몇몇 의료 전문가들의 견해가 누그러지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습니다.
위원회가 강력한 영향을 주다
1995년에 잠비아에 병원 안내 봉사부가 생기면서 그와 관련된 병원 교섭 위원회들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 위원회들이 무수혈 치료법과 환자의 권리에 대한 의학계의 태도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게 될지 예측할 수 있었던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병원 교섭 위원회가 하는 일 가운데는 병원을 방문하여 의사들과 면담을 하고 의료계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여는 것이 포함되는데, 이러한 모든 일의 목표는 협조를 구하고 대립을 피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설명회에서 분명히 드러난 수준 높은 전문 지식은 의료진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잠비아 남부 지역에 있는 한 병원에서는 병원 간부 한 사람이 감동을 받아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의사나 다름없습니다. 단지 여러분 자신이 그렇다고 말을 하지 않을 뿐입니다.”
서부 잠비아의 지역 병원에서 근무하는 한 네덜란드 출신의 의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2주 전에 우리는 관련된 위험들 때문에 피의 사용을 최소화하는 방법에 관하여 토의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 문제에 관해 우리와 이야기할 전문가들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오래지 않아, 병원 교섭 위원회에서 마련한 설명회에 참석한 의료 관계자들은 동료들에게도 참석해 볼 것을 추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프로그램은 의료계에서 주목을 받게 되었고, 대립은 점차 사라지고 협력이 이루어졌습니다.
병원 교섭 위원으로 봉사하는 형제들 가운데는 의사들에게 갈 때 자신감의 부족을 극복해야만 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실, 의사들이 오랫동안 신처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루사카에 있는 위원회의 사회자로 봉사한 스마트 피리 형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나는 의학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자신감을 갖기가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끈기를 갖고 여호와를 신뢰한 결과 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다른 한 위원은 초창기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세 사람은 매우 영향력 있는 한 의사를 만나러 갔는데, 그는 보건부 장관으로 일한 적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매우 긴장이 되었습니다. 그 의사의 사무실 앞 복도에서 우리는 여호와께 기도로 담대히 말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 의사의 사무실에 들어가서 유익한 토의를 하였고, 그는 매우 협조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지원을 받고 있으며 따라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병원 교섭 위원회와 의학계 사이의 협력 관계가 두터워지고 있다는 사실의 증거는, 의사들이 몇 년 전에는 수혈을 할 수 없으면 맡으려고 하지 않던 어려운 수술도 기꺼이 해 주는 것에서 볼 수 있습니다. 2000년 10월에 두 명의 외과 의사가 콩고 민주 공화국에서 온 6개월 된 아기인 베아트리스를 수술해 주겠다는 용기 있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아기의 담도 폐쇄증 수술은 수혈 없이 성공하였지만, 그 수술은 격렬한 반대 여론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하지만 그 수술을 한 의료진의 책임자인 루판도 문콩게 교수의 언론 발표는 상황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는 베아트리스의 부모의 입장을 존중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이러한 발표는 언론 매체의 비난을 크게 가라앉혔습니다. 두 달 후에는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프로에서 그 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무수혈 치료와 수술에 관한 우리의 입장을 호의적으로 다루어 주었습니다.
‘빨리 해 주세요’
피와 관련된 증인들의 양심적인 입장에 대해 계속 회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의사들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이제 대부분의 의사들은 대체 치료법이 안전하고 간단하며 효과적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아프리카의 시골 지역에서도 이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많은 환자들이 담대하게 자신의 권리를 변호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들이 중요한 쟁점들에 관해 스스로 연구하고 자신의 양심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지를 배우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어린이들도 “가르침받은 자의 혀”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50:4) 좌측 대퇴골에 골수염을 앓고 있던 여덟 살 된 네이선은 수술을 받기 전에 의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술할 때 제발 빨리 해서 피를 많이 흘리지 않게 해 주세요. 수혈은 하지 마세요. 수혈을 하면 부모님과 여호와께서 의사 선생님들을 용서하지 않으실 거예요.” 수술이 끝난 후에 수술을 한 의료진 가운데 한 사람은 네이선의 부모에게 아들을 잘 가르쳤다고 칭찬하였습니다. 그 의사는 겸손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어린 환자에게서 하느님을 존중하는 것의 중요성을 일깨움받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는 잠 못 자는 밤으로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봉사자로 추천’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종들이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흔히 동료 신자들을 염려하고 참 숭배를 증진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둘째 6:3-5) 병원 교섭 위원으로 봉사하는 형제들은 실제로 종종 그러한 경험을 합니다. 그러한 자기희생적인 태도는 눈에 띄기 마련입니다. 한 자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말로 감사를 다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병원 교섭 위원회의 형제들은 나를 돕기 위해 곧바로 와서 아주 늦은 시간까지도 나를 위해 항상 곁에 있어 주었습니다. 이 형제들의 자기희생적인 영을 느끼면 기운이 나고 위로를 받습니다. 그래서 24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번째로 수술실로 들어갔을 때도 겁이 나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의 격려적인 말은 나를 크게 강화시켜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쁜 평판”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증인들은 의료계와 기꺼이 협력함으로 자신들을 하느님의 봉사자로 계속 추천하였습니다. (고린도 둘째 6:8) 그들은 “좋은 평판”에 강화되어 “피[를] ··· 계속 멀리하십시오”라는 하느님의 명령에 계속 순종하기로 결심합니다.
봉사 훈련 학교
잠비아 지부의 지부 위원인 사이러스 니앙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나라에서 25명 정도의 젊은 남자들로 이루어진 그룹은 소란을 일으킬 소지가 있다는 의혹을 받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봉사 훈련 학교에서는 총 31개 학급을 열어 활력이 넘치는 헌신한 그리스도인 남자들로 이루어진 그룹들을 지속적으로 훈련시켜 왔으며, 그 남자들은 그들이 봉사하고 있는 지역에 축복이 되었습니다.” 이 국제적인 학교를 졸업한 600명 이상의 남자들은 남아프리카에 있는 여섯 개 나라에서 다양한 부면의 전 시간 봉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잠비아에서는 여행하는 감독자의 절반 이상이 이 학교의 졸업생입니다. 이 학교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이며, 어떤 일을 이루었습니까?
1993년에 제1기 학급이 졸업한 이후로 잠비아에서는 활동적인 전도인의 수가 거의 60퍼센트나 증가하였습니다. 따라서 회중을 돌볼 자격을 갖춘 남자들이 필요한데, 특히 성서 원칙들에 어긋나는 전통과 관습을 지키게 하려는 공동체의 압력이 심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이와 같이 양을 치고 가르칠 유능한 남자들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한 졸업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일하는 밭의 한 가지 문제점은 사람들이 그릇된 일을 용인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가 옳은 것에 대해 확고해야 하며 기록된 것을 넘어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배웠습니다.”
처음에 학생들은 고려하는 다양한 내용과 깊이 있는 연구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강사들은 기꺼이 도움을 베풀려고 합니다. 강사 중 한 명인 새럴 하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각 학급을 가르치는 일이 나에게는 산길을 안내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처음에는 모두가 익숙하지 않아서, 낯설고 외경심을 자아내는 주위 환경에 적응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때때로 바위들이 길을 막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장애물을 헤치고 계속 산을 올라가면서 뒤를 돌아보면, 전에는 극복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던 장애물들을 넘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러한 장애물은 더 이상 그리 대단하게 여겨지지 않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학교에 참석하여 영적으로 진보하게 된 것을 마치 애벌레가 나비로 변태하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현재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는 일러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가르칠 자격을 갖추지 못하였고 가외의 회중 책임들을 맡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봉사 훈련 학교는 내가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도와주었습니다. 내가 처음으로 임명된 회중에는 16명의 전도인이 성서 연구생이 잘 발전하도록 연구를 사회하는 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제안들을 정기적으로 검토하고 봉사에 나가기 전에 제공 연설들을 연습하였습니다. 2001년쯤에는 20명의 격지 집단 성원들을 포함하여 회중 전도인이 60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성공의 척도
봉사 훈련 학교가 그러한 성공을 거두는 요인은 무엇입니까? 강사 중 한 명인 리처드 프러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항상 겸손을 나타내는 것의 중요성을 진정으로 강조하고 자기 자신에 대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 이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역설합니다. 우리는 장성과 동정심 그리고 어려운 문제를 다루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 주기 위해 노력합니다. 만일 형제들이 다른 형제들을 친절하게 대하며 섬김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고 싶어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면, 우리는 이 학교가 목적을 달성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학생들은 이 말이 참됨을 인식합니다. 제14기 졸업생인 임마누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회중으로 임명된다고 해서 사소한 것들 하나하나를 모두 바로잡기 위해 달려들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회중과 함께 가장 중요한 일 즉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에 참여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파이오니아인 모제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여호와께서 비천한 사람을 그 누구라도 사용하실 수 있으며 때때로 지식이나 경험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에게 중요한 것은 회중과 야외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형제들과 협력하려는 태도입니다.”
큰 모임들
그리스도 이전 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이 지킨 축제들과 그들의 “거룩한 대회”들은 참석한 사람들이 영적인 것들에 초점을 맞출 수 있게 해 주는 즐거운 행사였습니다. (레위 23:21; 신명 16:13-15) 오늘날 하느님의 백성의 모임들 역시도 그러한 행사입니다. 잠비아에서는 대회가 근사한 현대식 운동 경기장에서 열리지 않습니다. 형제들은 이른바 ‘대회촌’이라는 것을 세우고 그 안에 잠을 잘 수 있는 작은 초막들도 만듭니다.
해가 지나면서 그러한 곳들에 좀 더 영구적인 건물들이 들어섰습니다. 하지만 초창기에는 기지를 발휘해야 할 어려운 문제들이 많았습니다. 한 지역 감독자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순회 대회가 열리는 곳에서는 형제들이 저를 위해 오두막을 지어 주었는데, 오두막은 대개 풀로 지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청중석 주위로 울타리를 세웠습니다. 좌석은 흙무더기였고, 풀로 만든 ‘방석’을 그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때때로 형제들은 비어 있는 흰개미들의 개미탑 꼭대기를 평평하게 하여 연단을 만들었습니다. 형제들은 그 위에다 작은 초막을 만들어 그곳에서 프로그램을 제공하였습니다.”
선교인인 피터 팰리서는 이렇게 회상하였습니다. “한 대회에서 형제들은 연단을 높게 만드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하였습니다. 형제 한 사람은 폭발물을 다루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폭발물을 설치하여 높이가 약 6미터에 달하던 버려진 개미탑의 윗부분을 날려 버렸습니다. 그러자 불룩하게 솟은 흙더미만 남았고 우리는 그 위에 연단을 만들었습니다.”
참석하기 위한 노력
대부분의 대회 장소는 주요 도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가기가 힘들었습니다. 로빈슨 샤물루마는 자신이 1959년에 참석한 대회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15명 정도가 자전거를 타고 센트럴 주의 카브웨로 갔습니다. 먹을 것으로는 옥수수 가루와 말린 생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매일 밤 수풀 속에서 잠을 잤습니다. 카브웨에서 기차를 탔고 거의 나흘간의 여행을 한 끝에 마침내 대회 장소에 도착하였습니다.”
램프 치셍가는,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여섯 자녀를 데리고 약 130킬로미터를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여행한 형제를 기억합니다. 치셍가 형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여행을 위해 구운 카사바와 대지콩과 땅콩버터를 챙겼습니다. 그들은 종종 보호 시설이 전혀 없는 수풀 속에서 천막을 치고 지내야 했습니다.”
웨인 존슨은 지역 감독자로 봉사하면서 많은 형제들이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에 유의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한 특별 파이오니아는 대회를 보려고 거의 일주일 동안 자전거를 타고 왔습니다. 트럭 짐칸에 타고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대회가 있는 주의 초반에 일찌감치 도착하였습니다. 밤에는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노래를 불렀습니다. 때로는 야외 봉사를 할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 주에 구역을 세 차례나 돌기도 하였습니다.”
반대가 있었지만 거르지 않았다
큰 모임들은 형제들에게 계속해서 힘과 격려를 줍니다. 요즈음에는 사람들이 대회에 대해서 상당히 호의적인 평을 합니다. 하지만 정치적 변화가 있던 시기에, 특히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사람들은 그러한 대회들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정부 인사들은 우리의 숭배를 제한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였습니다. 형제들은 국가를 부르지 않았기 때문에 공개 집회를 갖는 데 필요한 경찰의 허가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후에는 참석 인원을 제한하는 규정도 생겼습니다. 달링턴 세푸카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1974년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공개 장소에서 모임을 가질 수 있었던 마지막 해였습니다. 내무부 장관은 국가를 부르지 않고 국기를 걸어 놓지 않으면 어떠한 공개 집회도 열 수 없다고 공포하였습니다.” 하지만 형제들은 지방 왕국회관 주위에 풀로 만든 울타리로 두르고서 왕국회관에 모여 집회를 볼 수는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맞추어 지부에서는 순회 대회 프로그램을 조정하여 왕국회관에서 대회를 볼 수 있게 하였으며, 그런 대회에는 흔히 한두 회중만이 참석하였습니다.
지역 대회 또한 소규모로 열렸습니다. 대회를 조직하는 일에 참여한 한 형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한 번의 대규모 지역 대회를 여는 대신 우리는 20차례의 소규모 대회를 열곤 하였습니다. 많은 형제들은 훈련을 받아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부서 일을 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그리하여 금지령이 해제되었을 때 우리에게는 크고 작은 대회들을 조직하는 데 사용할 만한 경험 있는 형제들이 많이 있게 되었습니다.”
침례
1940년대 초부터는 침례를 받는 사람들이 그 단계가 의미하는 바를 반드시 온전히 인식하도록 돕기 위한 노력이 기울여졌습니다. “큰 바빌론”과 거짓 종교의 관습들을 완전히 내버리는 것을 어려워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계시 18:2, 4) 이러한 문제의 원인은 글을 읽고서 잘 이해하는 사람이 비교적 소수였고 많은 회중들이 충분한 양의 성서 연구 보조서들을 공급받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순회 및 지역 감독자들은 각각의 침례 지원자들과 면담을 하여 그가 자격을 갖추었는지 확인하였습니다. 길르앗 제33기 졸업생인 제프리 휠러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침례를 받기 원하는 아기 엄마들이 안고 온 아기들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미신적인 목걸이나 부적이 있는지 확인하였습니다. 대회 주간에는 종종 매일 밤 12시까지도 잠을 자지 못하였는데, 침례 지원자가 매우 많았기 때문입니다.” 여행하는 감독자들은 회중 장로들에게 친절하게 도움을 베풀었고, 후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니이다”」와 같은 출판물들이 나오고 계속된 조직상의 정련이 있으면서 그러한 면담을 가질 필요성은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무대 공포증!
고대 의상을 갖춘 드라마는 여전히 가장 인기 있는 대회 프로 가운데 하나입니다. 드라마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각각 자신이 맡은 인물의 감정을 제대로 전달해야 할 책임을 깊이 인식하고 있으며, 잠비아 사람들 가운데는 연기력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전에 선교인으로 봉사하다가 지금은 미국 베델 가족의 일원인 프랭크 루이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초창기 드라마에는 녹음테이프가 없었습니다. 다양한 배역을 맡은 형제들은 대사를 외워야 하였습니다. 노던 주에서 열린 어느 대회에 참석한 기억이 나는데, 그 대회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드라마를 상연하였습니다. 그 드라마는 요셉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편이 늦어져 형제들이 각본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형제들이 대사를 외우도록 돕느라 밤늦게까지 일해야 했습니다. 드라마는 상연되었고,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이 자신을 강간하려 했다고 남편에게 소리치는 장면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보디발 역을 맡은 형제가 무대 공포증이 일어나 무대에서 내려와 버렸습니다. 나는 무대 뒤편에서 형제들에게 대사를 일러 주고 있다가 그 형제가 무대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재빨리 그의 대사 첫 부분의 몇 마디를 알려 주고 그를 밀어서 무대 위로 올려 보냈습니다. 그러자 그 형제는 강간 미수로 고발을 당해 서 있는 남자에게 경멸하는 말로 호통을 치는 장면을 아주 훌륭하게 소화해 내었습니다! 하마터면 대회 중에 큰 실수가 날 뻔하였지만, 나는 매번 성서에서 이 내용을 읽을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아마 실제로 그랬을 거야. 보디발은 화가 나서 방을 나갔다가 감정을 가라앉힌 다음 돌아와서 요셉을 꾸짖었을 거야!’”
1978년에는 대회의 규모를 제한하는 4년 동안의 정부 금지령이 완화되면서 “승리의 믿음” 지역 대회가 열렸는데, 이 대회에서는 한 가지 어려운 문제가 생겼습니다. 전에 여행하는 감독자로 봉사한 형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그 대회에서 우리는 왕국회관에서 모일 수밖에 없었던 몇 해 동안 상연하지 못한 드라마를 모두 상연하였습니다. 대회는 5일 동안 계속되었고 하루에 한 편씩 다섯 편의 드라마를 상연하였습니다. 그동안 못 본 드라마를 다 상연한 것입니다! 매우 기쁜 일이었지만 그 드라마들을 모두 검토해야 했던 베델 대표자들에게는 도전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할 일이 엄청나게 많았던 것입니다!”
지부 위원회의 한 성원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정말이지 그 대회보다 즐거웠던 대회는 여태껏 참석해 본 적이 없습니다. 아침에 가족들은 아주 단정하고 깔끔한 모습으로 머물고 있던 작은 초막에서 나왔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으로 여호와 앞에 나왔습니다. 그들이 앉은 자리는 흔히 그늘이 아니라 햇볕이 내리쬐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루 종일 자리를 떠나지 않고 열심히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정말 멋진 광경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에게는 함께 모임을 갖는 것이 숭배의 필수적인 부분입니다. (히브리 10:24, 25) 개인적인 어려움이나 종교적인 반대로 인해 “슬퍼”하고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여호와의 백성은 큰 모임에 참석하는 것이 “항상 기뻐”하게 해 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고린도 둘째 6:10.
왕국회관 건축
“본인은 상기 회중의 토지 소유를 허가하기 위해 이 문서를 작성합니다. 이 토지의 소유권은 영구적이며, 본인은 이 회중이 150년 동안 토지를 사용하는 데 동의합니다. 낙원이 올 때까지 아무도 그들을 괴롭혀서는 안 됩니다.”—부족장 칼릴렐레.
지난 세기 초부터, 아프리카 남부에서 진리를 찾아 구하던 사람들은 숭배를 위해 함께 모일 필요성을 인식하였습니다. 1910년경에 윌리엄 존스턴은 급속히 성장하는 집단들이 전통적인 자재들로 모임 장소들을 건축했으며, 그런 것들 중에는 600명을 수용할 정도로 큰 것도 있다고 보고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숭배 장소를 갖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모두가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930년대 초에 처음 성서 진리를 배운 홀런드 무심바는 이렇게 회상하였습니다. “숭배를 위해서 함께 모이도록 격려를 받았지만, 지방 형제들은 정규 모임 장소를 갖는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큰 나무 그늘이나 형제 집 마당과 같은 적당한 곳이 있으면 어느 곳에서나 모임을 가졌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누가 9:58을 근거로 ‘예수께서도 영구적인 회관을 가지고 계시지 않았는데, 우리가 회관을 건축하는 것에 대해 염려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50년 이전의 모임 장소들은 대부분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목재와 진흙으로 지은 단순하고 허술한 건물이었습니다. 이언 퍼거슨은 번화한 코퍼 벨트 지역에서 광산 책임자를 설득하여 왕국회관을 지을 만한 부지를 할당받았습니다. 1950년에 우시킬리에는 최초의 왕국회관이 건축되었습니다. 형제들이 표준화된 건축 설계도를 작성하기까지는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설계도에 따라 지어진 최초의 왕국회관은 훌륭한 평지붕 건물로, 건축에는 약 1만 2000 잠비아 콰차가 들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상당한 금액이었지만, 인플레이션으로 경제가 파탄 지경에 이른 오늘날에는 그 금액이 미화로 3달러(약 3000원)도 되지 않습니다!
증인들이 당원증을 사지 않았기 때문에 애국적인 극렬 운동원들은 증인들에게 계속해서 거센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숭배 장소들은 방화를 당하였습니다. 앞으로도 공격받을 것을 염려한 일부 형제들은 건축을 하지 않고 야외에서 모임을 갖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1970년대 초에 제한 조처들이 더 내려지면서 부지를 구하기가 더욱더 어려워졌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어떠한 정당도 지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일부 지역의 당국자들은 모든 신청서에 당원증이 첨부되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위스턴 신칼라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건축 허가는 말할 것도 없고, 부지를 구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였습니다. 우리가 시의회에 그 문제를 법정으로 가져가겠다고 말하자 그들은 우리가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유능한 변호사를 구하였고, 2년 후 법원에서는 우리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려 부지를 공급해 주라고 의회에 명령하였습니다. 이 판결은 그 이후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검은색 말
회중에서 부지를 받게 될 때 법적인 증서를 함께 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형제들은 종종 개발되지 않은 부지를 찾을 수 있었지만, 적절한 서류가 없어 영구적인 건물은 지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재 값이 비싸서 대부분 얇은 철판을 사용하거나 빈 드럼통을 잘라서 편 다음 나무틀에 못을 박아 사용하였습니다. 그렇게 지은 건물에 대해 한 장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철판에 타르를 칠했는데, 멀리서 보면 회관은 커다란 검은색 말처럼 보였습니다. 실내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더웠습니다.”
순회 감독자로 봉사했던 한 형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러한 건물을 왕국회관이라고 하기가 민망할 정도입니다. 실제로 그 건물들은 가장 높으신 하느님 여호와의 집이라고 불리기에 부적합하였습니다.”
회관을 임대하기로 결정한 회중들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비용이 덜 들기는 하였지만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1970년대에 루사카에서 영어 회중과만 연합해 있던 이드리스 문디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디스코텍으로도 사용하던 홀을 임대하였습니다. 토요일마다 사람들은 다음 날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춤을 추었으므로, 우리는 일요일에 일찍 가서 청소를 해야 하였습니다. 홀에서는 맥주 냄새와 담배 냄새가 나서, 그러한 곳에서는 여호와를 숭배하기가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이드리스의 남편인 잭슨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어느 일요일에 한창 집회를 보고 있는데, 젊은 남자가 들어와서 곧장 앞쪽으로 가더니 전날 밤에 두고 갔던 맥주 박스를 집어 들고는 참석자들을 아랑곳하지도 않고 걸어 나갔습니다.” 형제들이 자체 왕국회관을 갖고 싶어 한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역사적인 건축 프로그램
더 많은 사람들이 왕국 소식에 반응을 보이면서 품위 있는 왕국회관이 더욱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열정과 열심은 넘쳤지만 일부 형제들은 왕국회관을 위한 비용을 지불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의 식료품 비용을 대기도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손은 짧지 않아서, 예상하지 못했던 즐거운 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조사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40개의 개발도상국에 8000채 이상의 왕국회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통치체는 건축을 더 빠른 속도로 진행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일부 지역에는 건축 공사를 할 만한 기술자들이 거의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공구 또한 그러하였습니다. 더욱이 경제 성장이 진행되고 있는 나라들에서는 많은 회중들이 고액의 융자금을 상환할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전도인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어서 어떤 지역의 지부들은 제대로 조직된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이러한 모든 문제들을 염두에 두고, 통치체는 전 세계적인 왕국회관 건축 프로그램의 운영을 감독하기 위해 미국에 설계 및 건축 위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재원이 부족한 나라들에서 왕국회관을 건축하기 위한 지침이 마련되었고, 숙련된 자원 봉사자들이 외국의 건축 공사에 참여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때때로 전통적인 건축 방법이나 생각을 조정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잠비아에서는 여자들이 물을 길어 오거나 모래를 나르는 일이나 요리를 자원하여 건축 공사를 지원하였습니다. 하지만 건축 팀에서는 자매들을 실제 건축 일에 참여시켜 인력을 최대한 활용하기를 원하였습니다.
이스턴 주의 어느 부족장은 한 자매가 왕국회관의 벽을 쌓고 있는 모습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태어나서 여자가 벽돌 쌓는 것을 보기는 처음입니다! 게다가 일도 참 잘하는군요! 이런 것을 보다니 나는 정말 복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의 영적 병원”
건축 프로그램은 지역 사회에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한때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증인을 반대하던 많은 사람들이 훨씬 더 개방적인 견해를 갖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처음에는 자기 구역에 왕국회관을 건축하는 것을 반대한 이스턴 주의 한 부족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처음에 여러분의 건축 공사를 허가하지 않은 것은 내 본심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종파의 교직자들이 나에게 영향을 주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제 나는 여러분이 좋은 목적으로 이곳에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건물은 이제 우리의 영적 병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주된 일은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입니다. (고린도 둘째 6:5; 마태 24:14) 하지만 성령이 하느님의 백성을 감동시켜 전파하게 만드는 것처럼, 성령은 또한 그들이 품위 있는 모임 장소를 건축하여 왕국 권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활기차게 일하도록 고무합니다. 회중들은 목적을 더욱 뚜렷이 인식하고 있습니다. 한 형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봉사에 나가 사람들을 집회에 초대할 때 자신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오게 될 곳은 허름한 판잣집이 아니라 여호와를 영광스럽게 하는 왕국회관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형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런 시골에 그처럼 훌륭한 왕국회관이 있는 것이 우리에게는 과분한 일일지 몰라도 여호와께는 마땅한 일입니다. 더 나은 숭배 장소를 마련하여 여호와께 영광이 돌아가게 되어서 기쁩니다.”
여행하는 봉사
인내는 하느님의 봉사자들에게 꼭 필요한 특성입니다. (골로새 1:24, 25) 여행하는 감독자들은 왕국 권익의 증진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면에서 모범이 됩니다. 그들은 회중들을 강하게 하는 목자로서 사랑에 찬 수고를 아끼지 않음으로 자신들이 “사람들로 된 선물”임을 분명히 나타냈습니다.—에베소 4:8; 데살로니가 첫째 1:3.
1930년대 말에 유능한 남자들은 지구의 종과 지역의 종으로 봉사하도록 훈련받았는데, 현재는 그들을 순회 감독자와 지역 감독자로 부릅니다. 제임스 무앙고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한 회중에서 다른 회중으로 여행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자전거를 지급받기는 했지만 형제들이 우리와 동행하여 걸으면서 우리가 짐 나르는 것을 도와주어야 하였습니다. 목적지까지 가려면 며칠이 걸렸습니다. 우리는 각 회중에서 2주씩 머물곤 하였습니다.”
‘그는 곧바로 기절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시골 지역을 여행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현재 80세가 넘은 로빈슨 샤물루마는 아내 줄리아나와 함께 여행하는 봉사를 하였습니다. 로빈슨은 언젠가 우기에 아주 심한 폭풍우를 만났던 때를 기억합니다. 폭풍이 가라앉자 가야 할 길이 깨끗해졌습니다. 다만 그 길을 가려면 자전거 안장까지 차오르는 진창을 지나가야 했습니다! 그들이 다음 회중에 도착했을 즈음에 줄리아나는 너무 지쳐서 물 한 모금 마실 힘조차 낼 수 없었습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순회 감독자와 지역 감독자로 봉사한 이노크 치르와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월요일은 매우 힘든 날이었습니다. 여행을 하는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회중에 도착하면 여행 생각은 나지도 않았습니다. 형제들과 함께 있으면 행복했습니다.”
먼 거리와 힘든 일만이 장애가 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램프 치셍가는 이 나라 북부에 있는 한 회중을 방문하기 위해 여행할 때 두 형제와 동행을 하였습니다. 그들이 먼지가 날리는 도로에서 바라보니 좀 떨어진 곳에 어떤 동물이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치셍가 형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은 그 동물을 똑똑히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동물은 개처럼 도로에 앉아 있더군요. 나는 물었습니다. ‘보입니까? 보여요?’ 그때 형제 하나가 그 동물이 사자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비명을 지르더니 곧바로 기절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사자가 수풀 속으로 들어갈 때까지 얼마 동안 그곳에서 쉬기로 하였습니다.”
잠비아에서 26년간 머무르면서 얼마 동안 지역 봉사를 한 존 제이슨과 그의 아내 케이는 기계에 문제가 생길 때 참을성이 필요함을 배웠습니다. 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동차 스프링이 망가진 채로 150킬로미터 이상을 운전한 때가 생각나는데, 그렇게 한 것은 예비 부품도 없었고 도움을 청할 곳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곳에선가 자동차가 고장으로 멈춰 버렸습니다. 자동차가 과열이 되어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우리가 할 수 있었던 일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가지고 있던 물로 엔진을 식히고 마지막 남은 한 잔의 물로 차를 타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고 날씨는 더웠으며, 우리는 지친 채로 차 안에 앉아서 여호와께 도와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오후 세 시에 도로 공사를 하는 차 한 대가 지나갔는데, 그 차는 그날 처음으로 본 자동차였습니다. 도로 공사를 하던 사람들은 우리가 곤경에 처한 것을 보고 우리 차를 견인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땅거미가 지기 직전에 형제들이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신뢰하는 법을 배움
그러한 환경에서 여행하는 감독자들은 개인의 능력이나 물질이 아니라, 더욱 신뢰할 만한 지원의 근원인 여호와 하느님과 그리스도인 형제들을 신뢰하는 법을 금방 배우게 됩니다. (히브리 13:5, 6) 제프리 휠러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지역 활동을 시작하고서 불과 3주 만에 문제에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주말의 프로그램을 위해 마련된 대회장에 있었습니다. 나는 약간 문제가 있는 프리머스 스토브 한 대를 물려받아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날은 덥고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었는데, 스토브에 불을 붙이자 불길이 위로 치솟았습니다. 몇 분 만에 불길은 걷잡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랜드로버 자동차의 앞쪽에 있던 타이어에 불이 붙었고 순식간에 자동차 전체가 불길에 휩싸여 버렸습니다.”
자동차가 타 버린 것만도 큰 일이었는데 문제가 더 있었습니다. 제프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옷가지들이 랜드로버 자동차 안에 있는 검은색 철제 가방에 있었습니다. 그 옷들은 불에 타지는 않았지만 오그라들어 버렸습니다! 형제들이 와서 아직 불붙지 않은 쪽에서 우리의 침대와 셔츠와 타자기를 끌어냈습니다. 형제들의 신속한 판단에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차가 불타면서 개인 소지품을 모두 잃게 되었지만, 그들은 두 달 후에나 시내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동안 그들은 어떻게 지냈습니까? 제프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 형제가 내게 넥타이를 빌려 주었고, 나는 고무로 만든 덧신 같은 것을 신고 공개 강연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어쨌든 생활을 해 나갔으며, 형제들은 경험이 얼마 없는 지역 감독자를 위로해 주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 주었습니다.”
뱀 걱정이 없는 안전한 침대
“후대의 행로를 따르”는 회중들이 나타낸 사랑과 관심은 여행하는 감독자들과 그들의 아내들이 자기희생적인 활동을 계속해 나갈 수 있도록 힘을 주었습니다. 회중들이 물질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베풀어 준 사랑에 찬 마련들을 기록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그러한 마련은 참으로 고마운 것이었습니다.—로마 12:13; 잠언 15:17.
여행하는 감독자들을 위한 숙소는 보통 아주 기본적인 것들이었지만 언제나 사랑의 영으로 마련된 것이었습니다. 1980년대 초에 순회 감독자로 봉사한 프레드 카시모토는 밤중에 잠비아의 노던 주에 있는 한 마을에 도착한 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은 그를 따뜻하게 환영하였습니다. 모두가 어느 작은 집에 들어갔고, 형제들은 프레드의 짐을 큰 탁자 위에 놓았는데, 막대로 만든 그 탁자는 높이가 1.5미터쯤 되었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카시모토 형제는 “제가 잘 곳은 어디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형제들은 탁자를 가리키며 “저기 저쪽에 있는 것이 침대입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곳에는 뱀들이 많아서 형제들이 뱀 걱정이 없는 안전한 침대를 마련한 것 같습니다. 카시모토 형제는 풀을 말아서 만든 매트리스 위에서 그날 밤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시골 지역에서는 종종 농장에서 생산한 것을 선물로 줍니다. 제프리 휠러는 미소 띤 얼굴로 이와 같이 회상합니다. “한번은 형제들이 우리에게 닭 한 마리를 주었습니다. 우리는 어두워지기 직전에 닭을 변소에 있는 나무 막대에 올려 두었습니다. 그런데 이 미련한 닭이 나무 막대에서 뛰어오르다가 구덩이 속으로 빠져 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괭이를 가지고 닭을 무사히 꺼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 다음 아내는 따뜻한 비눗물에 살균제를 듬뿍 넣어서 닭을 씻었습니다. 그 주의 주말에 닭을 요리해 먹었는데, 맛이 아주 좋았습니다!”
존 제이슨 가족도 그와 비슷하게 관대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은 여러 차례 우리에게 살아 있는 닭을 주곤 하였습니다. 우리는 임명된 지역을 여행할 때 작은 바구니에 암탉 한 마리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 암탉은 매일 아침 알을 낳았기 때문에 우리는 닭을 잡아먹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곳으로 가기 위해 짐을 꾸리고 있으면 그 암탉도 분명 따라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았습니다.”
활동사진
1954년부터는 “활동하는 신세계 사회”를 비롯한 몇 편의 영화들 덕분에 활기찬 교육 활동이 전개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지부 사무실의 보고에 따르면, “영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봉사의 직무나 회중 활동을 더욱 열심히 수행하도록 고무하였습니다.” 어떤 형제들은 영화 상영 후에 대회장을 정리하면서 “‘활동하는 신세계 사회’식으로 합시다”라는 구호를 외쳤는데, 그 말은 “활기차게!” 일하자는 뜻이었습니다. 그 영화가 처음 상영된 해에 그 영화를 본 사람들은 정부 관리들과 교육계 인사들을 포함하여 4만 2000명이 넘었고, 그들은 영화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마침내 100만 명이 넘는 잠비아 사람들이 여호와의 증인과 그들의 그리스도인 조직에 관해 알게 되었습니다.
웨인 존슨은 그 영화들이 끼친 강력한 영향을 기억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멀리서도 영화를 보러 왔으며, 영화는 그들에게 여호와의 조직에 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영화 상영 중에 사람들은 종종 오랫동안 열렬히 박수를 쳤습니다.”
한동안 순회 대회의 토요일 저녁 회기에 영화 한 편을 상영하였습니다. 한적한 시골 지역에서 이러한 영화 상영은 아주 흥미로운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매우 강력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지만 다른 곳의 생활을 잘 모르던 사람들은 몇몇 장면을 오해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영화에는 뉴욕 시의 지하철역 출구에서 사람들이 줄지어 나오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장면이 부활을 묘사한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처럼 오해도 있었지만 사람들은 영화를 보고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고 있었고 국가의 독립에 대한 열망이 커져 감에 따라, 많은 잠비아 사람들이 형제들에게 반감을 품게 되었습니다. 회중들과 여행하는 감독자들 모두가 인내를 더욱 많이 나타내야 할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정치적인 방해
1964년 10월 24일에 북로디지아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잠비아 공화국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정치적 긴장이 매우 고조되어 있었습니다. 중립을 지키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식민 지배의 유지를 은근히 지지하고 있다는 오해를 받았습니다.
램프 치셍가는 이 시기에 방궤울루 호수 지역을 여행하던 때를 기억합니다. 램프는 배를 타고 섬 지역들로 가서 그곳에 있는 증인 어부들을 방문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는 우선 버스를 타고 호수 주변으로 갔습니다. 버스에서 내리자, 당원증을 보여 달라는 요구를 받았습니다. 물론 그는 당원증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정당의 요원들이 그의 가방을 빼앗았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워치타워”라는 표시가 있는 상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크게 호루라기를 불고는 “워치타워! 워치타워!” 하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관리는 소동이 일어날까 염려하여 램프를 다시 버스에 태우고 가방들도 버스에 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더니 버스에 돌을 던져 문이나 바퀴나 유리창을 맞혔습니다. 운전사는 얼른 그곳을 떠나 9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삼피아까지 쉬지 않고 내달렸습니다. 밤 사이에 상황은 진정되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램프는 침착하게 배를 타고 가서 호수 주변의 작은 회중들을 섬겼습니다.
여행하는 감독자들은 “많은 인내”로 계속 자신들을 하느님의 봉사자로 추천합니다. (고린도 둘째 6:4) 잠베지 강을 따라 있는 순회구를 섬긴 판웰 치셍가는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려면 온 영혼을 다한 정성과 자기희생 정신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이 지역에 있는 회중들을 다니려면 물이 새어 들어오는 낡은 카누를 타고 한참 동안 강을 따라 여행을 해야 합니다. 그런 강에서 잘못했다가는 성난 하마들이 마른 나뭇가지를 꺾듯이 카누를 가볍게 부서뜨릴 수도 있습니다. 판웰이 순회 봉사를 하면서 인내하는 데 무엇이 도움이 되었습니까? 그는 강가로 배웅을 나온 회중 성원들의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미소를 지으며 자신에게 동기를 부여해 주는 것 한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형제 자매들입니다. 그는 생각에 잠겨 이렇게 질문합니다. “이 성난 세상 가운데 이처럼 행복한 얼굴을 또 어느 곳에서 찾아볼 수 있겠습니까?”
중립
“군인으로 복무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지켜 세상의 일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여 그는 자기를 모집한 장교를 만족시키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위와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디모데 둘째 2:4, 웨이머스역) 그리스도인들이 지도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온전히 따르려면 세상의 정치 및 종교 제도와 관련을 맺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입장 때문에 세상의 일에 대해 중립을 유지하기 원하는 참 그리스도인들은 어려움과 “환난”을 겪습니다.—요한 15:19.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많은 사람들은 “애국심”이 없다는 이유로 잔인한 취급을 받았습니다. 후에 열심 있는 여행하는 감독자가 된 벤슨 저지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연로한 형제들이 군 복무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옥수수 부대처럼 트럭에 실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그 형제들이 ‘티자페라 자 물룽구’(하느님을 위해 기꺼이 죽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무코시쿠 시날리는 당시에 아직 침례를 받지 않았지만 전쟁 중에 중립 문제가 종종 대두되었던 것을 뚜렷이 기억합니다. “모두가 땅을 파서 맘봉고 덩굴의 뿌리를 모아야 했는데, 그 뿌리에서는 귀한 유액이 나왔습니다. 그 뿌리의 껍질을 벗기고 두드려서 띠 모양으로 만들어 한데 묶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것을 가공하면, 군화를 만드는 데 쓸 수 있는 고무 대용물이 나왔습니다. 증인들은 뿌리를 거두어들이기를 거부하였는데, 이 일이 전쟁을 지원하는 것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형제들은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형제들은 ‘불온 분자’가 되었습니다.”
조지프 물렘와 역시 그러한 “불온 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남로디지아 출신인 그는 1932년에 북로디지아의 웨스턴 주로 왔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그가 ‘왕국이 가까웠’기 때문에 농사를 짓지 말라고 사람들을 부추긴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마붐보 선교구에서 온 한 교직자는 조지프를 멸시하며 그와 같은 거짓 비난을 퍼뜨렸습니다. 조지프는 체포되어 정신 장애가 있는 한 남자와 함께 수갑에 채워졌습니다. 사람들은 그 남자가 조지프를 공격하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조지프는 장애가 있는 그 남자를 진정시켰습니다. 조지프는 풀려난 후에 계속해서 전파하고 회중들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1980년대 중반에 사망할 때까지 충실을 유지하였습니다.
시험에 직면하도록 강화되다
지역 사회 내에서 국가주의적인 영과 긴장이 고조되면서 선한 양심 때문에 정치적 변화에 가담할 수 없던 사람들은 위협을 받게 되었습니다. 비록 이 나라가 팽팽한 긴장 상태에 있었지만, 1963년에 키트웨에서 열린 “담대한 전도인들” 전국 대회는 여호와의 증인들 가운데 평화와 연합이 존재함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거의 2만 5000명에 달하는 참석자들은 네 가지 언어로 제공되는 대회 프로그램을 원하는 언어로 즐겼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5일 동안의 행사를 위해 천막과 포장마차를 가지고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밀턴 헨첼이 그리스도인들과 국가의 관계에 초점을 맞춰 제공한 연설은 매우 의미심장하였습니다. 프랭크 루이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헨첼 형제가 우리 형제들이 중립 문제에 관해 이해하도록 도와주라고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시기적절한 교훈을 받고 정말 기뻐했습니다. 잠비아의 형제들 대부분이 앞에 놓여 있던 혹독한 시험을 이겨 냈고 여호와께 충실을 유지하였기 때문입니다!”
1960년대 내내 여호와의 증인들은 만연한 폭력적인 박해를 당하였고 재산 피해를 입기도 하였습니다. 집과 왕국회관이 파괴되었습니다. 다행히도 정부는 그러한 위협에 가담한 많은 사람들을 투옥하였습니다. 북로디지아가 잠비아 공화국이 되자, 여호와의 증인은 새 헌법에 명시된 기본적인 인권에 관한 조항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애국주의의 물결이 전혀 뜻밖의 대상을 덮치게 되었습니다.
국가의 상징
식민지 시대에 여호와의 증인 자녀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국기—당시에는 영국 국기—에 경례를 하지 않아서 벌을 받았습니다. 또한 국가를 부르지 않았기 때문에 벌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당국에 진정서를 제출하자, 교육부는 견해를 누그러뜨려서 이렇게 편지하였습니다. “기 경례에 대한 여러분의 [단체의] 입장은 잘 알려져 있고 존중받고 있으며, 어떤 어린이도 기 경례를 거부한다고 해서 벌을 받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새 공화국 헌법이 양심의 자유, 사상의 자유, 종교의 자유를 포함한 기본적 자유를 더욱 강화할 것이라는 희망이 커졌습니다. 하지만 새 국기와 국가가 제정되면서 애국주의가 급격히 고조되었습니다. 학교에는 매일 기 경례를 하고 국가를 부르는 의식이 다시 도입되어 매우 열성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일부 증인 청소년들에게는 열외가 허용되었지만, 많은 증인 청소년들은 매를 맞거나 심지어는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였습니다.
1966년에 통과된 새 교육법에는 희망을 가질 만한 이유가 엿보였습니다. 그 법에는 부모나 보호자가 아이를 종교 예배나 의식에서 열외시켜 줄 것을 요청할 수 있다는 조항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결과 정학이나 퇴학을 당한 많은 아이들이 다시 학교를 다닐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리고 상당히 은밀하게 교육법에 몇몇 규정들이 덧붙여지게 되었는데, 그 규정들은 국기와 국가를 국가 의식을 고취시키는 비종교적인 상징물로 정의하였습니다. 형제들이 정부 당국과 몇 차례 토의를 가졌지만, 1966년 말까지 3000명이 넘는 아이들이 중립 때문에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였습니다.
펠리야는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그러한 조처가 합법적인지를 판가름할 시간이 왔습니다. 재판을 할 사건이 결정되었습니다. 펠리야 카차수는 코퍼 벨트에 있는 부얀탄시 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펠리야는 모범생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퇴학을 당하였습니다. 프랭크 루이스는 그 사건이 어떻게 법정에 가게 되었는지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리치먼드 스미스 씨가 우리 소송을 맡았는데, 그 소송은 정부 정책에 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쉽지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펠리야가 기 경례를 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을 듣고서 그 소송을 맡아 볼 만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당시 루사카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던 데일레스 무손다는 이렇게 말합니다. “펠리야의 사건이 법정으로 가게 되었을 때 우리는 좋은 결과가 나올 것으로 잔뜩 기대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재판을 보려고 무풀리라에서 왔습니다. 언니와 나도 초대를 받았습니다. 법정에서 펠리야가 하얀 모자를 쓰고 옅은 색의 옷을 입고 있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재판은 사흘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잠비아에는 그때까지도 선교인 몇 사람이 남아 있었는데, 그들 중에 필립스 형제와 퍼거슨 형제가 방청하러 왔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온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재판장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소송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이 국가와 국기에 모독하는 행동을 하려고 했다는 기미는 전혀 없다.” 하지만 그는 국민의례가 종교적인 것이 아니며, 펠리야가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교육법의 조항들에 대해 예외를 인정해 줄 것을 주장할 수는 없다고 판결하였습니다. 그는 국가 안보를 위해서는 국민의례가 필요하다고 믿었습니다. 미성년자에게 그러한 의무를 지우는 것이 어떻게 국민의 이익에 부합하는지에 관한 설명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펠리야는 그리스도인 믿음을 고수하는 한 학교에 다닐 수 없었습니다!
데일레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매우 실망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여호와의 손에 맡겼습니다.” 압력이 점차 거세져 데일레스와 그의 언니 역시 1967년에 학교를 중퇴하였습니다. 1968년 말까지 거의 6000명의 여호와의 증인 자녀들이 퇴학을 당하였습니다.
공개 집회가 제한을 받다
1966년의 공공질서법은 모든 공개 집회를 시작할 때 국가를 부를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일반 대중들을 초대하는 대회를 열 수 없게 되었습니다. 형제들은 정부의 요구 조건을 따르기 위해서 대개 왕국회관 주변에 있는 개인 소유지에 풀로 울타리를 두르고서 더 큰 규모의 모임을 가졌습니다. 많은 관심자들이 호기심을 갖고 무엇을 하는지 보러 왔으며, 그 결과 참석자들이 꾸준히 증가하여 1967년에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에 약 12만 25명이 참석하였습니다.
램프 치셍가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이 시기에는 격렬한 반대가 있었습니다. 삼피아 지역에서는 폭도들이 카탄샤 회중의 마보 형제를 공격하여 그를 죽였습니다. 형제들은 때때로 집회를 보는 중에 공격을 받았고 많은 왕국회관이 불탔습니다. 하지만 당국은 증인들을 계속 존중해 주었고 일부 반대자들이 체포되어 처벌을 받았습니다.”
그들에게는 공군도 있다!
반대자들은 여호와의 증인이 대단히 부유하며 다음에 들어설 정부를 구성하려 한다고 주장하면서 증인들에 대해 계속 거짓 고발을 하였습니다. 하루는 여당의 사무총장이 아무런 통보도 없이 키트웨 지부 사무실로 왔습니다. 형제들은 경찰들이 잇따라 출입문으로 몰려오는 것을 보고 비로소 그가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지부 대표들과의 모임 중에 흥분하였습니다. 그래서 목소리를 높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건물들을 건축할 수 있게 허가를 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건물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 건물이 여러분의 정부 청사입니까?”
당국자들 가운데 일부는 왜곡된 소문을 계속 믿었습니다. 잠비아의 노스웨스턴 주에서는 경찰이 대회 참석자들을 해산시키려고 최루 가스를 사용하였습니다. 형제들은 가까스로 지부 사무실에 급전을 쳤습니다. 해외에서 이주해 온 농부 한 사람이 소형 비행기를 가지고 있어서, 사태를 진정시키고 오해를 해소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하여 추가로 보내는 지부 대표자들을 카봄포로 태워 주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렇게 한 것은 일부 사람들의 의심을 해소시켜 주지 못했는데, 그들은 이제 증인들에게는 공군도 있다고 보고를 하였습니다!
대회 장소에서 형제들은 사용하고 버린 최루 가스통을 주의를 기울여 수거하였습니다. 후에 지부 대표자들이 우려를 표하기 위해 정부 관리들을 방문하였을 때 불필요하게 공권력을 사용한 증거로 이 가스통들을 제시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널리 알려졌으며, 증인들이 평화적으로 대응한 사실 역시도 주목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입장을 설명하다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법적으로 금지하려는 움직임이 계속해서 신속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지부에서는 정부에 우리의 중립 입장을 설명하기를 원하였습니다. 여러 명의 장관들 앞에서 설명을 할 사람으로 스마트 피리와 조너스 만조니가 정해졌습니다. 설명회 도중에 한 장관은 형제들에게 폭언을 퍼부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을 끌어내어 두드려 패고 싶소! 당신들이 무슨 짓을 해 왔는지 알기나 하는 거요? 당신들은 가장 훌륭한 시민들, 달걀 노른자위 같은 사람들을 차지하고 우리에게는 어떤 사람들을 남겨 두었소? 살인자들, 부도덕한 자들, 도둑들이 아니오!”
형제들은 재빨리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 가운데 얼마의 사람들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도둑이나 부도덕한 자이거나 살인자였지만, 성서가 발휘하는 힘 때문에 생활을 변화시켜 잠비아에서 가장 훌륭한 시민들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우리는 여러분에게 자유롭게 전파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고린도 첫째 6:9-11.
국외 추방과 부분적인 금지령
앞서 살펴본 것처럼 선교인들은 이 나라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프랭크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1968년 1월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한 형제가 우리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민국 관리가 방금 자신의 집을 다녀갔다고 말했습니다. 관리는 그 형제에게 잠비아에서 일을 모두 정리하고 출국하기까지 7일간의 말미를 주는 국외 추방 통지서를 주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 전화가 계속해서 걸려 왔습니다. 그러던 중 마침내 형제 한 사람이 전화를 걸어, 다음 차례는 키트웨의 큰 건물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한 극단적인 조처는 아마도 증인의 연합을 약화시켜서 열심히 활동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로 취해진 것 같습니다.
이듬해에 대통령은 공공 안전 질서 유지법을 승인하였는데 그에 따라 호별 방문 전파 활동이 불법화되었습니다. 사실상 금지령이나 다름없는 이 조처로 인해 형제들은 봉사를 수행하는 방법을 조정해야 했고 비공식 증거에 더 중점을 두었습니다. 「우리의 왕국 봉사」는 「우리의 월간 회보」가 되었고, “좋은 소식을 전함” 부분은 제목이 “우리의 내부 봉사”로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정부 검열관의 주의를 끌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1971년 4월에 거의 4만 8000건에 달하는 가정 성서 연구 신기록이 보고되었으며, 활동을 제한하려는 시도는 형제들을 전혀 낙담시키지 못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 주었습니다.
현재 영국에 살고 있는 클라이브 마운트포드는 여러 선교인들과 교제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가 증거할 때 사용하던 방법 한 가지는 사람들에게 차를 태워 주고 그들과 진리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누가 차에 타든 쉽게 볼 수 있도록 항상 잡지를 차에 놓아두었습니다.”
성서 토의는 불법화되지 않았지만 제한 규정에 따라 방문하기 전에 동의를 받아야 하였습니다. 때때로 이러한 방문은 그저 친척, 동창생, 직장 동료나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을 방문하는 것이었습니다. 사교적인 방문 중에 재치 있게 대화를 성경적인 내용으로 이끌 수 있었습니다. 확대 가족의 규모가 컸기 때문에 믿지 않는 친척들이나 지역 주민들을 연이어서 접촉할 수 있었습니다.
1975년에 지부는 이렇게 보고하였습니다. “우리 밭에 있는 수천 명의 전도인들은 호별 방문 봉사를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제자들이 들어오고 있으며 엄청난 증거가 행해지고 있습니다.” 호별 방문 활동에 제한이 내려져 있었기 때문에 형제들은 다른 방법을 사용하여 증거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정부 부처에서 기록을 관리하던 한 형제가 사용한 방법입니다. 그가 한 일에는 일반 사람들의 이름과 세부 사항들을 기록하는 일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성서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특히 관심을 갖고 그들에게 그와 동일한 이름을 가진 성서 인물에 대해 알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증거할 기회가 많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한 어머니와 딸이 찾아왔을 때, 형제는 그 여자 아이의 이름이 에덴이라는 사실에 유의하였습니다. “에덴”이라는 이름의 뜻을 알고 있는지 물어보자, 어머니는 잘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형제는 간단히 설명하면서 가까운 장래에 이 땅이 원래의 에덴동산과 같이 될 것임을 지적하였습니다. 관심을 갖게 된 그 여자는 형제에게 자신의 집 주소를 알려 주었습니다. 그의 남편 역시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가족은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으며 마침내 가족 중 일부가 침례를 받았습니다.
다른 전도인들은 세속 직업을 이용하여 증거하였습니다. 광산 회사에 고용된 로이드는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동료 일꾼들에게 여러 가지 성구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았습니다. “마태 16:18에 나오는 ‘바위’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또는 “로마 9:32의 ‘걸림돌’은 누구일까요?”라는 질문을 사용하였습니다. 종종 많은 광부들이 모여들어 성서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이와 같은 비공식 토의로 인해 로이드의 동료 일꾼 여러 명이 잘 발전하여 헌신하고 침례를 받았습니다.
또한 청소년들도 학교에서 단호한 입장을 취하여 사람들에게 진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여러 명의 어린이들이 애국적인 노래를 부르는 데 참여하지 않자, 교사는 화가 나서 학급 전체에게 밖에 나가 서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 어린이들 가운데 한 명은 이렇게 회상하였습니다. “선생님은 우리가 우리 노래도 부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분명해요. 선생님은 그 기회에 우리를 조롱하려고 한 것 같아요.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종교 교파별로 모이라고 했어요. 그리고 교파별로 교회에서 부르는 노래를 한두 곡씩 부르게 했어요. 두 교파의 아이들이 노래를 하나도 기억해 내지 못하자, 선생님은 우리에게 해 보라고 했어요. 우리는 ‘이는 여호와의 날!’을 부르기 시작했어요. 학교 옆을 지나가던 그곳 사람들이 멈춰 서서 노래를 들은 것을 보면 우리가 노래를 꽤 잘 부른 것 같아요. 우리는 이어서 ‘여호와께서 왕이 되셨네!’를 불렀어요. 선생님과 사람들이 모두 박수를 쳤어요. 우리는 교실로 돌아갔는데, 많은 반 친구들이 와서 그렇게 아름다운 노래를 어디서 배웠는지 물어보았어요. 어떤 친구들은 우리와 함께 집회에 참석하였으며 나중에 활동적인 증인이 되었어요.”
“책을 전하는 사람들”
이 시기 내내 형제들은 “뱀과 같이 조심스럽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하다는 것을 나타냈습니다. (마태 10:16)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들의 독특한 출판물과 열심히 연구 보조서를 사용하는 것 때문에 “책을 전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아바포니아 이피타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반대자들은 형제들을 잠잠하게 하기 위해 완고하게 노력을 기울였지만 왕국 전파 활동은 느슨해지지 않았습니다. 이따금씩 격렬한 반대가 일어나 수년 동안 계속되기도 하였지만 1980년대 초가 되자 반대가 수그러들었습니다.
잠비아가 독립된 이후로 25년 동안 거의 9만 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활동적인 전도인의 수는 단지 4만 2000명 정도만 증가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물론 사망한 사람도 있고 다른 곳으로 이주한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두려움도 한 가지 요인”이었다고 그 시기에 지부 사무실에서 봉사하던 넬디는 회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봉사의 직무에서 비정규나 무활동이 되었습니다. 그에 더하여 잠비아가 독립하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회사를 관리하거나 경영하는 자리를 예전에는 해외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만 차지하였으나 이제는 다른 사람들이 채워야 하였습니다. 주택, 직장, 교육과 관련하여 새로운 기회가 열리게 되자, 많은 가족들이 영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 추구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활동에 진전이 있었습니다. 지혜로운 왕 솔로몬은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아침에 네 씨를 뿌리고 저녁때까지 네 손을 쉬게 하지 말아라. 이것이 어디에서 성공할지, 여기서일지 저기서일지, 혹은 둘 다 똑같이 잘 될지 네가 모르기 때문이다.” (전도 11:6) 형제들은 상황이 좀 더 나아지자 더 잘 자라게 될 진리의 씨를 뿌리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꾸준히 증가가 이루어져서, 1976년에는 트럭을 새로 구입해야 할 정도로 출판물 발송량이 늘어났습니다. 1982년에는 베델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새로운 인쇄 시설을 건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한 실용적인 조처는 향후에 있을 증가를 위한 기초가 되었습니다.
중앙아프리카의 나라들 중에서 잠비아만큼 평화를 누리고 내전이 없었던 나라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비록 현재 상황은 “좋은 일에 관한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환난”에 대한 기억은 충실한 이들을 고무하여 계속 바쁘게 “영원한 생명을 위한 열매를 모아”들이게 합니다.—로마 10:15; 고린도 둘째 6:4; 요한 4:36.
지부 확장
1930년대에 루엘린 필립스와 그의 동료 일꾼들은 루사카에 있는 방 두 칸짜리 임대 건물에서 임명을 수행하였습니다. 면적이 110헥타르나 되고 250명이 넘는 자원 봉사자를 수용하고 있는 지금의 베델 시설로 확장되리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이곳의 형제 자매들은 12만 5000명이 넘는 전도인들과 파이오니아들의 영적 필요를 돌봅니다. 어떻게 이러한 확장이 있게 되었는지 간단하게 고려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36년경에 당국은 태도가 상당히 누그러져 루사카에 서적 보관소를 개설하도록 허가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활동이 확장되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더 큰 건물로 옮겨야 하였습니다. 그래서 중앙 경찰서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주거 시설을 매입하였습니다. 조너스 만조니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그 건물에는 두 개의 침실이 있었습니다. 식당은 봉사부 사무실로 사용했고 베란다는 발송부 작업장으로 사용하였습니다.” 1951년에 조너스는 직장에 2주 휴가를 내고 베델 봉사를 하였으며, 후에 계속 베델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베델은 잘 조직되어 있었고, 행복한 영이 흘렀습니다. 나는 필립스 형제와 발송부에 있으면서 예약을 처리하고 말아 둔 잡지에 우표 붙이는 일을 하였습니다. 형제들을 섬기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행복했습니다.” 후에 해리 아넛이 루엘린 필립스와 합류하게 되었으며, 이 두 사람은 잡 시첼라, 앤드루 존 물라바카, 존 무탈레, 포티퍼 카체파, 모턴 치술로와 같은 현지 형제들과 함께 일하였습니다.
잠비아는 광업이 활기를 띠고 있었고 사회 기반 시설이 급속히 발전하여 사람들이 전국 각지에서 광업 지역으로 몰려들고 있었기 때문에, 루사카보다는 코퍼 벨트에 점점 더 초점을 맞추게 되었습니다. 이언 퍼거슨은 광업 도시에 부동산을 매입하도록 추천하였고, 1954년 지부 사무실은 루안샤의 킹조지 가(街)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그곳은 비좁아졌습니다. 밭이 급속하게 확장하여 동아프리카의 대부분을 돌보아야 하였기 때문입니다. 세계 본부의 네이선 노어는 1959년의 “깨어 있는 봉사자” 지역 대회를 위해 이곳을 방문해 있는 동안에 새로운 지부를 건축할 후보지들을 둘러보고 건축을 추진하도록 허가하였습니다. 제프리 휠러는 그때를 회상하면서 “프랭크 루이스와 유진 키나슈크와 나는 건축사와 함께 키트웨에 있는 새 부지로 가서 새 베델의 경계에 말뚝을 박았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1962년 2월 3일에는 숙소와 인쇄실과 왕국회관이 딸린 새로운 지부 사무실을 여호와께 봉헌하였습니다. 이 시설을 위한 봉헌식 프로그램을 끝맺으면서 당시 지부의 종인 해리 아넛은 더 중요한 건축, 즉 각자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라는 건축 자재를 사용하여 열심히 일해야 하는 영적 건축에 주의를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이 시설들로도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10년 사이에 왕국 전도인의 수가 3만 129명에서 거의 5만 7000명으로 증가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언 퍼거슨 형제는 이렇게 회상하였습니다. “노어 형제는 인쇄 시설을 확장하도록 권하였습니다. 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일런즈폰테인에 있는 지부를 방문하여 형제들과 상의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에서 인쇄기 한 대를 비행기에 실어 키트웨로 가져왔습니다.”
키트웨에서는 출판물이나 잡지 외에도 케냐와 다른 동아프리카 지역에 배부할 월간 「우리의 왕국 봉사」를 생산하였습니다. 얼마 되지도 않아 작은 인쇄 시설이 비좁아져서 옮길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시의회에서 우리가 쓸 만한 땅을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자, 한 형제가 나서서 얼마의 부지를 제공하였습니다. 건축 공사는 1984년에 끝났습니다. 키트웨는 30년 동안 잠비아의 전파 활동을 위한 영적 중심지 역할을 하였습니다.
선교인들이 국외로 추방된 이후의 어려운 시기에도 지부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수는 증가하여, 14명의 베델 가족이 베델 밖에서 자기 가족들과 생활해야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앞으로의 활동을 적절하게 수행하려면 조정이 필요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집 두 채를 매입하고 한 채를 임대하여 베델 가족의 수를 늘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시설이 필요한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기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이 극적으로 진전되었습니다. 1986년에 몇몇 주요 지역에 있던 형제들은 새로운 지부를 건축할 부지를 물색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수도에서 서쪽으로 15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110헥타르의 농장을 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지혜로운 선택이었는데, 그 지역에는 지하수가 풍부하기 때문입니다. 데럴 샤프는 “내 생각에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이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하신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봉헌과 성장
1993년 4월 24일 토요일에 많은 수의 오래된 여호와의 종들이 새로운 시설의 봉헌을 위해 모였습니다. 4000명의 현지 형제 자매들 틈에는 약 20년 전에 잠비아를 떠나야 했던 선교인들을 포함하여 160명이 넘는 외국 손님들도 있었습니다. 참석한 두 명의 통치체 성원 가운데 시어도어 재라스는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봉사자로 추천함”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습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충실하게 봉사한 사람들에게 그들이 인내하지 않았다면 그처럼 건축을 해야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그는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한 말을 언급하면서, 참된 봉사자들은 어려움과 시련과 환난을 인내할 수 있게 해 주는 영의 열매를 배양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하느님의 봉사자로 추천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새 지부를 건축해야 했던 것은 활동이 확장되었기 때문입니다.”
2004년에는 32개의 방이 있는 4층짜리 새 숙소 건물이 완공되었습니다. 인쇄 시설이 있던 약 1000제곱미터의 공간을 개수하여, 47개의 번역 사무실과 파일 창고, 회의실, 도서실을 위한 가외의 공간을 마련하였습니다.
경제적 어려움과 다른 난관들에도 불구하고 잠비아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하느님께 드리는 봉사에서 부유하게 되었으며, 그들은 그 영적 부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을 특권으로 여깁니다.—고린도 둘째 6:10.
모든 사람들에게 진리를 추천함
가족 중심의 잠비아 사회는 여러 해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길로 양육받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잠비아의 웨스턴 주에는 소는 뿔이 무거운지를 알지 못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가족을 돌보는 책임을 짐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하느님 앞에 답변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인식하며, 자녀들에게 말과 행동으로 그리스도인 봉사의 직무를 추천함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줍니다. 그 결과 현재 그와 같은 충성스러운 사람의 자손들 가운데는 열심 있는 증인들이 많이 있습니다.—시 128:1-4.
잠비아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여호와의 참으심과 지원 덕분에 이루게 된 일들을 보고 기뻐합니다. (베드로 둘째 3:14, 15) 초창기에 성서에 근거한 “진실한” 믿음은 그들이 불확실한 시기를 인내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능동적인 “위선 없는 사랑”은 계속 다양한 부족들에서 나온 사람들을 묶어 주는 띠가 되었고, 불필요한 고통 없이 꾸준한 영적 성장을 이루게 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의의 무기들”을 사용하여 “친절”하게 변호하고 알려서, 권위 있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 종종 “좋은 평판”을 얻고 있습니다. 현재 2100개가 넘는 회중들은 “지식”으로 굳게 세워지고 있으며, 봉사 훈련 학교를 졸업한 유능한 형제들이 필요한 감독을 베풀고 있습니다. 더 큰 “환난”들이 닥칠 수도 있지만, 여호와의 증인들은 함께 모이면서 “항상 기뻐”할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고린도 둘째 6:4-10.
1940 봉사 연도에는 약 5000명이 예수의 명령에 따라 그분의 죽음을 기념하였습니다. 이 수는 인구 약 200명당 1명에 해당합니다. 최근에는 50만 명이 넘는 사람들, 실제로 2005년에는 56만 9891명이 그 특별한 밤에 여호와께 영예를 돌렸는데, 그 수는 인구 약 20명당 1명에 해당합니다. (누가 22:19) 여호와의 백성이 그러한 성공적인 결과를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모든 영예는 영적인 성장을 가능하게 하신 여호와 하느님께 돌아가야 합니다.—고린도 첫째 3:7.
하지만 잠비아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도 자신의 몫을 다하였습니다. 지부 위원회의 한 성원은 “우리는 좋은 소식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그렇게 하는 것을 특권으로 여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방문객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예의 바르면서도 굳은 결심으로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인구 대 전도인의 비율이 약 90대 1인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해야 할 일들이 더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이니, 의로운 자는 그리로 달려들어가서 보호를 받는다”라고 성서는 알려 줍니다. (잠언 18:10) 지금도 여전히 합당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긴급하게 여호와의 편으로 달려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잠비아에서는 매달 거의 20만 건의 성서 연구가 사회되고 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성서 연구를 통해 여호와께 헌신하고 그분의 열심 있는 봉사자들이 되도록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12만 5000명이 넘는 잠비아의 활동적인 증인들은 참으로 그러한 행로를 추천할 타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168면 네모]
잠비아의 개요
국토: 잠비아는 수목이 울창하고 지대가 평평한 내륙국으로, 해발 약 1200미터의 고원에 자리 잡고 있다. 잠베지 강이 남쪽 국경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주민: 잠비아 사람들은 대부분 글을 읽고 쓸 줄 알며,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한다. 시골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초가집에 살며 집 근처에서 농작물을 재배한다.
언어: 공용어는 영어이지만, 70개가 넘는 원주민들의 언어도 사용된다.
생활: 주요 산업은 구리 채굴과 가공이다. 농산물로는 옥수수, 사탕수수, 쌀, 땅콩이 있다.
식품: 옥수수를 즐겨 먹는다. 대표적인 음식으로는 은시마라는 걸쭉한 옥수수 죽이 있다.
기후: 이 나라는 지대가 높아서 아프리카 중남부에 있는 나라인데도 생각보다 기후가 온화하다. 주기적으로 가뭄이 든다.
[173-175면 네모와 삽화]
나는 17개월 형과 24대의 태형을 선고받았다
코사무 무안자
출생: 1886년
침례: 1918년
약력: 박해와 거짓 형제들을 인내하였다. 1989년에 지상 행로를 마칠 때까지 파이오니아와 장로로서 충실하게 봉사하였다.
나는 제1차 세계 대전 초기에 육군에 입대해서 북로디지아 연대에서 위생병으로 일하였습니다. 1917년 12월에 휴가를 나왔다가 남로디지아에서 온 두 명의 남자를 만났는데, 그들은 성경 연구생들과 연합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내게 여섯 권으로 된 「성경 연구」를 주었습니다. 나는 사흘 동안 그 책들을 열심히 읽었고, 전쟁터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의 지부 사무실과 연락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함께 있던 형제들과 나는 지부의 인도를 받지 못한 채 일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마을들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모아 연설을 하고 청중의 질문을 고려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이 나라의 북부 지방에 모임을 갖는 중심지를 정하고 그곳을 갈릴리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그곳을 거점으로 하여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와서 성서에 대한 설명을 들어 보라고 초대하였습니다. 나는 감독자로 임명되었습니다. 슬프게도 많은 거짓 형제들이 일어나 여러 곳에서 혼란을 일으켰습니다.
우리는 전파하려는 열망을 갖고 있었으며, 우리의 노력으로 인해 그 지역의 가톨릭 및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의 밭에서는 일이 그들의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큰 모임들을 열었습니다. 1919년 1월에 이소카 근처의 구릉지에서 약 600명이 모임을 가졌던 일이 생각납니다. 경찰과 군인들은 우리의 목적을 잘 알지 못하여 모임 장소에 와서는 우리의 성서와 서적들을 파기하고 우리 중 많은 사람을 체포했습니다. 일부는 카사마 근처에 투옥되었으며, 음발라 또는 남쪽으로 멀리 리빙스턴에까지 투옥된 사람도 있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3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나는 17개월 형과 엉덩이를 맞는 24대의 태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나는 석방되자 고향 마을로 돌아가 전파 활동을 재개하였습니다. 나중에 다시 체포되어 태형을 더 많이 받고 투옥되었습니다. 반대가 계속되었습니다. 그 지역의 추장은 형제들을 마을에서 추방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른 마을로 이주하였는데, 그 마을의 추장은 우리를 환영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 정착하였고, 추장의 허가를 얻어 우리만의 마을을 세우고 그곳을 나사렛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활동으로 평화를 깨뜨리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곳에 머물도록 허락을 받았는데, 추장은 우리의 행실을 보고 흡족해하였습니다.
1924년 말에 나는 북쪽에 있는 이소카로 돌아갔는데, 그곳에서 한 인정 많은 지역 행정관은 내가 영어를 더 잘 이해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 기간에 자칭 지도자들이 몇 명 일어나서, 뒤틀어진 것들을 가르치고 많은 사람을 그릇 인도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분별력을 나타내어 개인 집에서 계속 모임을 가졌습니다. 몇 년 뒤에 나는 루사카에서 루엘린 필립스를 만나 보라는 권유를 받았는데, 그는 나에게 잠비아와 탄자니아의 국경 근처에 있는 회중들을 방문하는 일을 맡겼습니다. 나는 탄자니아의 음베야까지 가서 형제들을 강화하였습니다. 매번 구역을 다 돌고 나면 내가 속해 있는 지방 회중으로 돌아오곤 하였습니다. 1940년대에 순회 감독자들이 임명될 때까지, 나는 이 일을 하였습니다.
[184-186면 네모와 삽화]
북쪽에 있는 이웃 나라들에 도움을 주다
1948년에 새로 개설된 북로디지아 지부는 당시에 영국령 동아프리카로 불리던 대부분의 지역에서 수행되는 왕국 전파 활동을 감독하게 되었다. 그때는 잠비아 북쪽의 고지대에 있는 이 이웃 나라들에 전도인이 많지 않았다. 그 시절에 이런 나라들의 당국에서는 대체로 외국 선교인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고 있었는데, 겸손한 사람들이 진리를 배우도록 누가 도울 것이었는가?
해피 치셍가 형제는 잠비아의 센트럴 주에서 정규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겠다고 신청을 했다가 탄자니아의 은좀베 근처의 격지 구역에서 봉사하라는 초대를 받고 놀랐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아내와 나는 ‘격지’라는 단어를 보고는, 우리가 외딴 지역에서 전도인들과 함께 일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가 그곳에서 최초로 전파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의 관심을 그들의 성서에 들어 있는 여호와라는 이름이나 아마겟돈과 같은 표현들에 이끌자, 사람들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아내에게는 아마겟돈, 나에게는 여호와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마침내 우리의 임지가 아루샤로 바뀌게 되었을 때, 그곳에는 견실한 전도인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집단이 있게 되었습니다.”
1957년에 윌리엄 램프 치셍가 형제는 탄자니아의 음베야 주변의 산악 지대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라는 임명을 받았다. “아내인 메리와 우리의 두 자녀는 11월에 임지에 도착하였는데, 그 지역의 호텔들에 빈방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날 밤을 버스 터미널에서 보냈습니다. 춥고 비가 오고 있었지만, 우리는 여호와께서 일들을 어떻게 조정하실 것인지 기대를 갖고 기다렸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나는 가족을 터미널에 남겨 두고 숙소를 찾기 위해 나섰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였지만, 「파수대」를 조금 가지고 갔습니다. 잡지를 몇 부 전하면서 우체국까지 왔는데, 존슨이라는 남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나에게 ‘댁은 어디서 오셨고, 어디로 가시는 길인가요?’ 하고 물었습니다. 나는 좋은 소식을 전파하러 왔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내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말을 듣고는, 자기가 원래 잠비아의 이스턴 주에 있는 룬다지에 살았으며 침례받은 증인이지만 무활동이 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나의 가족과 짐들을 그의 집으로 옮기기로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존슨과 그의 아내는 영적인 힘을 되찾았고, 우리가 스와힐리어를 배우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잠비아로 돌아가서 좋은 소식의 활동적인 전파자가 되었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나는 우리를 도우시는 여호와의 능력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며 사람들을 도울 기회를 결코 대수롭지 않게 보아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버나드 무싱가는 전 시간 봉사를 하면서 아내 폴린과 어린 자녀들과 함께 우간다, 케냐, 에티오피아와 같은 여러 지역을 다니게 되었다. 세이셸을 방문했을 때에 관해, 버나드 형제는 이렇게 말한다. “1976년에 나는 아름다운 프랄랭 섬에 있는 한 집단을 방문하라는 임명을 받았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이었으며, 몇 차례 오해가 생긴 적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새로운 전도인의 어린 아들은 수학 시간에 덧셈 부호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이것은 십자가인데, 나는 십자가를 믿지 않아요’ 하고 설명하였습니다. 이것을 두고, 종교 지도자들은, ‘여호와의 증인은 자녀에게 수학 공부를 시키지 않는다’는 터무니없는 비난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교육부 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존경심 있는 태도로 우리의 믿음에 대해 설명하고 이와 관련된 오해를 풀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교육부 장관과 우호적인 관계를 갖게 되었고 그 결과 선교인들이 입국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삽화]
해피 무아바 치셍가
[삽화]
윌리엄 램프 치셍가
[삽화]
버나드 무싱가와 폴린 무싱가
[191, 192면 네모와 삽화]
“자네는 장래를 망치고 있네!”
무코시쿠 시날리
출생: 1928년
침례: 1951년
약력: 길르앗 졸업생으로, 전에 번역자로 일하였으며, 현재는 회중 장로로 봉사하고 있다.
내가 침례받던 날, 선교인인 해리 아넛이 나에게 실로지어 번역자가 필요한데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번역자로 임명한다는 편지와 「파수대」지를 한 부 받았습니다. 나는 그날 저녁부터 열심히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번역을 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여러 시간 동안 낡은 펜으로 글을 써야 했고, 실로지어 사전도 나와 있지 않았습니다. 나는 낮에는 우체국에서 일하고 밤에는 번역 일을 했습니다. 때때로 지부 사무실로부터 “즉시 번역물을 보내 주십시오” 하는 독촉을 받곤 하였습니다. 나는 종종 ‘내가 전 시간 봉사를 시작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마침내 나는 우체국을 그만두었습니다. 상관들은 나를 믿었지만, 내가 일을 그만두자 공금을 횡령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생겼습니다. 우체국에서는 두 명의 유럽인 조사관을 보내 조사를 하게 했습니다. 철저하게 조사를 한 결과 아무런 문제가 없음이 밝혀졌습니다. 그들은 내가 우체국을 그만두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상관들은 내게 그만두지 말라며 승진시켜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거절하자 그들은 “자네는 장래를 망치고 있네!” 하고 말하면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은 틀렸습니다. 1960년에 나는 베델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는 길르앗 학교에 오라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나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난생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파리로, 이어서 암스테르담으로, 그리고 마침내 뉴욕으로 가면서, ‘기름부음받은 자들이 하늘로 갈 때 이런 기분이 들까?’ 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세계 본부에서 받은 사랑 넘친 대접은 참으로 감동적인 것이었습니다. 형제들은 진정한 겸손과 편견이 전혀 없는 태도를 나타냈습니다. 나는 다시 잠비아로 임명되었으며, 그곳에서 계속 번역 일을 도왔습니다.
[194면 네모와 삽화]
독수리보다 빠르게
카투쿠 은코봉고는 신체장애가 있어서 걷지 못한다. 순회 감독자가 방문하고 있던 어느 일요일에, 그가 살고 있던 마을을 향해 반란군이 진격해 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모두가 도피하였다. 마지막으로 마을을 떠난 사람들 가운데는 순회 감독자인 미앙가 마보쇼도 있었다. 그가 안전한 곳으로 도피하기 위해 자전거에 막 올라탔을 때, 근처의 한 오두막에서 “형제, 날 이곳에 놔두고 갈 건가요?”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카투쿠 형제였다. 순회 감독자는 재빨리 그를 도와서 자전거에 태우고는 그 마을을 빠져나갔다.
남쪽으로 잠비아를 향해 가려면 험한 지형을 가로질러 가야 했다. 은코봉고 형제는 가파른 언덕들을 기어올라 가야 했다. 순회 감독자는 이렇게 회상한다. “나는 두 다리로 걸어 올라갔는데도, 그는 나보다도 먼저 언덕 꼭대기에 도착했습니다! 나는 ‘이 형제는 다리가 불구인데도, 마치 날개를 단 것 같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마침내 안전한 장소에 도착해서 음식을 제공받았을 때, 나는 은코봉고 형제에게 기도를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그의 기도를 들으니 눈물이 났습니다. 그는 이사야 40장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여호와여, 아버지의 말씀은 참됩니다. 소년이라도 피곤하고 지치며, 청년이라도 틀림없이 걸려 넘어지겠지만, 아버지께 희망을 두는 사람들은 능력을 되찾을 것입니다. 그들은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솟아오를 것입니다. 그들은 달려가도 지치지 않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여호와여, 제가 하늘의 독수리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4, 205면 네모와 삽화]
카키색 반바지와 갈색 운동화
필레몬 카시포
출생: 1948년
침례: 1966년
약력: 잠비아에서 여행하는 감독자와 봉사 훈련 학교의 강사 및 조정자로 섬기고 있다.
할아버지는 내가 봉사를 잘할 수 있도록 훈련시켜 주었는데, 여러 번 나를 급우들에게 데려가서는 그들에게 증거하게 하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정기적으로 가족 연구를 사회하였는데, 아무도 졸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항상 가족 연구 시간을 고대하였습니다.
나는 우리 집 근처에 있는 강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한 달 후에는 회중에서 처음으로 연설을 하였습니다. 그날 새 카키색 반바지에 갈색 운동화를 신었던 기억이 납니다. 후회스럽게도, 운동화 끈을 너무 꽉 졸라매서 불편하였습니다. 회중의 종은 이 사실을 알아채고는, 내가 말을 못하고 있자 친절하게도 연단으로 와서 끈을 느슨하게 풀어 주었습니다. 나는 연설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고, 그 친절한 행동으로부터 교훈을 얻었습니다. 나는 여호와께서 나에게 많은 훈련을 베풀어 주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이사야 60:22이 성취되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습니다. 회중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책임을 수행할 준비를 잘 갖추고 있는 장로와 봉사의 종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봉사 훈련 학교는 이러한 필요를 채워 줍니다. 이 젊은이들을 가르치면서 참으로 즐거움을 느낍니다. 나는 여호와께서 할 일을 주시면서 반드시 성령도 주신다는 사실을 배워 알게 되었습니다.
[207-209면 네모와 삽화]
“뭐, 별것 아닙니다”
에드워드 핀치와 린다 핀치
출생: 1951년
침례: 각각 1969년과 1966년
약력: 길르앗 학교 제69기 졸업생. 에드워드는 잠비아 지부 위원회의 조정 위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어느 해에 대회가 열리는 기간에, 우리는 자동차로 이 나라의 북쪽 지역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도로가 거의 없고 그저 사람들이 다녀서 생긴 작은 길들만 있는 곳입니다. 어떤 마을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우리 쪽으로 걸어오는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그중 한 사람은 허리가 몹시 휘고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었습니다. 그는 장화를 한데 묶어서 소지품을 담은 작은 가방과 함께 등에 둘러메고 있었습니다.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그 노인과 다른 사람들이 대회 가슴표를 달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우리는 멈춰 서서 그들에게 어디에서 오는 길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 연로한 형제는 허리를 약간 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벌써 잊으셨군요. 우리는 대회 때 찬사에 함께 있었지요. 이제 집에 거의 다 와 갑니다.”
“그럼 언제 대회장에서 떠난 겁니까?” 하고 우리는 물었습니다.
“일요일에 대회 프로그램이 끝나고 나서 떠났지요.”
“하지만 지금은 수요일 오후인데요. 사흘 동안 걸어온 겁니까?”
“네, 지난밤엔 사자 울음소리도 들리더군요.”
“여러분은 모두 이처럼 훌륭한 영을 나타내고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희생을 치른 것에 대해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하고 우리가 말했습니다.
그 연로한 형제는 그저 소지품들을 챙겨 들고 걷기 시작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뭐, 별것 아닙니다. 지부 사무실에 가시면 새로운 곳에 대회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해 주십시오. 작년에는 닷새를 걸어야 했는데, 올해는 사흘만 걸으면 되니 말입니다.”
잠비아 사람들은 대부분 1992년에 가뭄이 들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해에 우리는 빅토리아 폭포에서 잠베지 강을 따라 200킬로미터 정도 거슬러 올라간 곳에 있는 강기슭에서 열린 대회에 참석했습니다. 저녁에 우리는 여러 가족을 방문하였는데, 그 가족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작은 초막 앞에 불을 피워 놓고 그 주위에 모여 있었습니다. 20명쯤 되는 사람들이 왕국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대회에 오기 위해 8일 동안 걸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어떤 특별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린 자녀들, 식품, 조리 기구들과 그 외의 필수품들을 짐바리 짐승에 싣고, 해가 어두워지면 어느 곳에서나 잠을 자면서 여행하였습니다.
다음 날, 많은 지역에서 가뭄 피해를 입고 있으며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베풀어지고 있다는 광고가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에 세 명의 형제가 우리 오두막에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모두 맨발이었고, 낡은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가뭄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들은 형제들이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참으로 가슴이 아프다는 말을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한 형제는 웃옷 주머니에서 돈이 가득 들어 있는 봉투 하나를 꺼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형제들이 굶주리지 않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기 이 돈으로 그 형제들에게 음식을 좀 사 주십시오.” 우리는 목이 메어서 고맙다는 말도 못하였습니다. 우리가 좀 진정이 되기도 전에 그들은 떠나 버렸습니다. 그들은 이런 일을 예상하고 대회에 온 것이 아니었으므로, 이렇게 돈을 기부하는 것은 큰 희생이었습니다. 이런 일을 경험하게 되면 우리는 형제들과 더욱더 가까워지게 됩니다.
[삽화]
어려움 속에서도 많은 형제들은 크고 작은 대회들에 참석하기 위해 먼 거리를 여행한다
위: 대회장에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모습
왼쪽: 옥외 오븐에다 빵을 굽는 모습
[211-213면 네모와 삽화]
대회를 갖기로 굳게 결심하다
에런 마풀랑가
출생: 1938년
침례: 1955년
약력: 베델 자원 봉사자, 번역자, 지부 위원으로 봉사한 바 있으며, 현재는 가장이면서 회중 장로로 섬기고 있다.
1974년에 우리는 카사마에서 동쪽으로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대회를 열었습니다. 그 지역의 부족장이 우리의 모임을 허가해 주었는데도, 경찰은 우리에게 해산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얼마 안 있어 몸집이 큰 지휘관이 백여 명의 전투 경찰을 이끌고 와서는 우리가 있는 곳을 에워쌌습니다. 우리는 프로그램을 계속 진행하였는데, 그동안에 한 초막 안에서는 대회 허가와 국가 연주 여부를 놓고 열띤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내가 프로를 수행할 시간이 되자, 그 지휘관은 내가 기조연설을 하지 못하게 막으려고 나를 따라 연단으로 올라왔습니다. 청중은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걱정하였습니다. 그는 잠시 동안 서서 약 1만 2000명의 청중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홱 돌아서 가 버렸습니다. 연설을 마치고 내려오니 그가 연단 뒤에서 매우 화가 난 채로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는 부하들에게 모임을 해산시키라고 명령하였지만, 간부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지더니 그들은 차를 타고 떠나 버렸습니다. 그들은 얼마 안 있어서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큰 책을 한 권 가지고 왔습니다. 지휘관은 그 책을 내 앞에 있는 탁자에 놓더니, 나에게 표시된 부분을 읽으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소리 내지 않고 그 표시된 항을 읽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책의 말이 맞습니다. 여기에는 ‘경찰은 평화에 위협이 될 경우 어떠한 모임이라도 해산시킬 권한이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나는 그의 벨트와 권총을 바라보면서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위협이 되는 것은 당신과 무장한 당신의 부하들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즉시 한 정보 담당 경찰을 돌아보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가자!” 그들은 나를 경찰서로 데려갔습니다.
그는 사무실에 도착하더니 전화기를 집어 들고 다른 경찰관과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영어로 이야기를 했었는데, 이제 그는 실로지어로 말하였습니다. 그는 내가 실로지어도 할 줄 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에 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나는 그저 조용히 앉아서 내가 그들의 말을 이해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더니 “자, 내 말 잘 들으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나는 실로지어로 “에니 샤 나 테일레자!”—“네, 듣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가 의자에 앉아서 한참 동안 나를 쳐다보기만 한 것으로 보아 깜짝 놀란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더니 일어나서 사무실 구석에 있는 큰 냉장고로 걸어가 나에게 시원한 음료를 꺼내 주었습니다. 분위기가 좀 부드러워졌습니다.
나중에, 그 지역에서 크게 존경받는 사업가 형제도 경찰서에 왔습니다. 우리는 실용적인 제안들을 하였고, 그러자 그 경찰관은 염려를 덜게 되었으며, 긴장된 상황이 끝났습니다. 여호와의 후원이 있어서, 대회를 마련하기가 더 쉬워지게 되었습니다.
[221면 네모와 삽화]
젓가락처럼 야위다
마이클 무카누
출생: 1928년
침례: 1954년
약력: 여행하는 감독자로 봉사하였고 현재는 잠비아 베델에서 봉사하고 있다.
내가 돌보던 순회구에는 가파른 절벽 너머에 있는 계곡 지역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종종 체체파리 때문에 고생을 하곤 했으므로, 곤충들과 한낮의 열기를 피하기 위해 새벽 1시에 일어나 길을 떠나서 언덕들과 산들을 넘어 다음 회중으로 갔습니다. 상당히 많이 걸어 다녔기 때문에, 짐은 거의 가지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먹는 음식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젓가락처럼 야위었습니다. 형제들은 내가 머지않아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의 임명을 바꾸어 달라고 요청하는 편지를 지부 사무실에 보낼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나에게 그 점에 관해 이야기하였을 때,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친절한 제안이기는 하지만, 여러분은 내 임명이 여호와로부터 온 것이며 그분이 임명을 바꾸실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설령 죽는다 해도, 내가 이곳에서 제일 먼저 죽는 사람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냥 계속 봉사하게 놔두십시오. 만일 내가 죽으면, 지부 사무실에 통보만 해 주시면 됩니다.”
3주 후에, 나는 임명이 바뀌었습니다. 참으로, 여호와를 섬기는 일은 도전이 될 수 있지만, 우리는 그분을 계속 섬겨야 합니다. 여호와는 행복하신 하느님입니다. 만일 그분의 종들이 행복하지 않다면, 그분은 자신의 종들이 계속 즐겁게 봉사할 수 있도록 조처를 취하실 수 있습니다.
[223, 224면 네모와 삽화]
미신을 따르지 않다
하킨스 무킹가
출생: 1954년
침례: 1970년
약력: 아내와 함께 여행하는 감독자로 봉사하였고, 현재는 잠비아 베델에서 봉사하고 있다.
아내인 아이다와 나는 여행하는 봉사를 할 때, 두 살 된 우리 외아들을 데리고 다녔습니다. 우리는 한 회중에 도착하여 형제들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목요일 아침에 우리 아들이 울기 시작하더니 울음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오전 8시에 나는 아내가 아들을 잘 돌보도록 맡겨 놓고 야외 봉사를 위한 모임에 갔습니다. 한 시간 뒤에, 나는 성서 연구를 사회하고 있던 중에 우리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여러 형제들이 누군가가 우리 아들에게 마법을 걸었다고 결론을 내렸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더욱 괴로웠습니다. 우리는 형제들이 이러한 널리 퍼져 있는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도록 추리하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이 소식은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것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나는 사탄이 강력하기는 하지만 여호와와 그분의 충실한 종들을 이길 수는 없다고 설명하였습니다. “때와 예기치 못한 일”이 우리 모두에게 닥치지만, 우리는 두려움 때문에 성급한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고 설명하였습니다.—전도 9:11.
다음 날 아들의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리고 장례식이 끝난 후에 우리는 집회를 열었습니다. 형제들은 이 일로부터 얼마의 교훈 즉 우리가 악한 영을 두려워하거나 미신을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아들을 잃고 상심이 매우 컸지만, 우리는 특별 활동 주간의 봉사를 계속한 다음 다른 회중을 방문하기 위해 떠났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일을 겪은 것에 대해 회중으로부터 위로를 받은 것이 아니라, 가까운 장래에 죽음이 옛일이 될 것이라며 형제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였습니다.
[228, 229면 네모와 삽화]
우리는 용기를 냈다
레너드 무손다
출생: 1955년
침례: 1974년
약력: 1976년 이래로 전 시간 봉사를 하고 있다. 6년 동안 여행하는 봉사를 했으며, 현재는 잠비아 베델에서 봉사하고 있다.
1985년경에 이 나라 북단에 있는 회중들을 방문하던 때가 생각납니다. 전에 여러 해 동안 그곳에서는 거센 정치적 반대가 있었습니다. 나는 새로 임명된 순회 감독자였는데, 믿음과 용기를 나타낼 기회가 생겼습니다. 어느 날 야외 봉사를 위한 모임이 끝난 직후에, 우리는 근처에 있는 한 마을을 방문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때 한 형제가 만일 여호와의 증인이 그 마을에서 전파하려고 했다가는 온 마을 사람들로부터 몰매를 맞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에 폭도들의 공격이 있기는 했지만, 나는 이때에도 마을 사람들 모두가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말은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말을 듣고 일부 전도인은 마음이 약해져서 뒤에 남았습니다. 우리 중의 꽤 많은 사람들은 용기를 내서 그 마을을 향해 갔습니다. 우리는 뜻밖의 일에 깜짝 놀랐습니다. 많은 잡지를 전했을 뿐만 아니라 만난 사람들과 우호적인 대화를 나눈 것입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 중에는 우리가 마을에 들어서는 것을 보고는 달아난 사람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보니 솥의 음식이 그대로 끓어 넘치고 있었고, 집들은 문이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우리는 큰 소동을 겪은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달아나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232, 233면 네모와 삽화]
살려면 달아나야 하였다
달링턴 세푸카
출생: 1945년
침례: 1963년
약력: 특별 파이오니아와 여행하는 감독자 및 잠비아 베델의 자원 봉사자로 봉사하였다.
1963년에는 상황이 매우 불안정하였습니다. 야외 봉사를 나가면, 흔히 정치적인 성향이 강한 청소년들이 무리를 지어 우리를 앞서 가면서 사람들에게 우리 말을 듣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만일 우리 말을 듣는다면 누군가가 와서 그들의 집의 창문을 깨고 문을 부술 것이라고 위협하였습니다.
침례받은 지 겨우 이틀밖에 안 되었던 어느 날 저녁에, 나는 15명의 청소년들에게 심하게 구타를 당하였습니다. 입과 코에서 피가 흘러나왔습니다. 또 어느 날 저녁에는, 약 40명이 내가 살고 있던 곳까지 따라와서 나와 한 형제를 폭행하였습니다. 주 예수께서 겪으신 일들을 되새겨 보니 힘이 났습니다. 내가 침례받을 때 존 제이슨 형제가 한 연설에서는 그리스도인이 문제가 전혀 없는 생활을 하게 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밝혀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일들이 일어났을 때, 놀라기보다는 격려를 받았습니다.
그 당시에 정치가들은 그들의 독립 투쟁을 사람들이 지원해 주기를 원했고, 우리의 중립 입장은 유럽인들과 미국인들에게 동조하는 것으로 비쳐졌습니다. 정치 집단들을 지지하던 종교 지도자들은 우리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더욱 부풀렸습니다. 독립이 되기 전에도 상황이 어려웠지만, 독립이 되고 나서도 여전히 큰 문제를 겪게 되었습니다. 많은 형제들이 당원증을 구입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직업을 잃었습니다. 일부 형제들은 정치 활동을 지원하는 기부금을 내라는 요청을 받지 않기 위해, 도시 지역에서 고향 마을로 돌아가 수입이 적은 일자리를 구하기도 하였습니다.
십 대 시절에는 증인이 아닌 사촌이 나를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나의 중립 입장 때문에 사촌의 가족에게 협박과 위협이 가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두려워했습니다. 어느 날 사촌은 일을 하러 나가기 전에, “저녁에 돌아오면, 네가 집에 없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처음에 나는 그 도시에 다른 친척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사촌이 농담을 하는 줄 알았습니다. 나는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사촌이 농담을 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촌은 집에 돌아와서 나를 보더니 몹시 화를 냈습니다. 그러더니 돌들을 집어 들고 나를 쫓아오면서, “네 친구 놈들한테나 가 버려!” 하고 소리쳤습니다. 나는 살려면 달아나야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나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는 “계속 중립을 지킬 거면 집에는 발도 들여놓지 마라”라는 전갈을 보내왔습니다. 열여덟 살이었던 나에게는 참으로 가혹한 말이었습니다. 누가 나를 받아들여 준단 말입니까? 회중이 나를 받아들여 주었습니다. 나는 종종 다윗 왕의 이러한 말을 묵상합니다. “내 아버지와 내 어머니는 나를 버린다 해도, 여호와께서는 나를 받아 주실 것입니다.” (시 27:10) 나는 여호와께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236, 237면 네모와 삽화]
나는 행실로 많은 교사들의 존중을 받았다
잭슨 카포베
출생: 1957년
침례: 1971년
약력: 회중의 장로로 섬기고 있다.
1964년부터 증인 자녀들은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부 사무실에서는 자녀들을 그에 대비시켜야 함을 부모들이 이해하도록 도왔습니다. 방과 후에 아버지가 나와 함께 앉아서 탈출기 20:4, 5을 토의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조회 시간에 나는 마찰을 피하기 위해 뒤를 보고 서 있었습니다. 국가를 부르지 않다가 발견된 아이들은 앞으로 불려 나갔습니다. 교장이 나에게 국가를 부르지 않은 이유를 물었을 때, 나는 성서를 사용하여 대답하였습니다. 교장은 “너는 글을 읽으면서도 국가는 부르지 않는구나!” 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는 정부가 학교를 세워서 내가 글을 읽을 수 있도록 가르쳐 주었으니, 정부에 충성을 바쳐야 한다고 설득하였습니다.
결국 1967년 2월에 나는 퇴학을 당하였습니다. 나는 배우는 것을 좋아하였고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실망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직장 동료들과 믿지 않는 가족들로부터 압력을 받으면서도,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확신시켜 주었습니다. 어머니 역시 압력을 받았습니다. 내가 어머니와 함께 일을 하러 들에 나가면, 여자들이 “이 아이는 왜 학교에 가지 않는 거지요?” 하면서 우리를 비웃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교육을 못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1972년부터는 회중 내에 마련된 문맹 퇴치반에 더 많은 주의가 기울여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학교의 상황도 나아졌습니다. 우리 집은 학교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되는 곳에 있었습니다. 종종 교장은 우리 집에 와서 시원한 물을 얻어 마시거나 교실을 쓸 비를 빌려 가곤 하였습니다. 한번은 돈을 빌리러 오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는 우리 가족의 친절한 행동에 감동을 받았음이 분명한데, 하루는 “아드님이 계속 학교를 다니고 싶어 합니까?” 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여전히 여호와의 증인임을 그에게 일깨워 주었습니다. 교장은 “문제없습니다” 하고 말하더니, 나에게 “몇 학년부터 공부하고 싶으냐?” 하고 물었습니다. 나는 6학년부터 공부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학교도 같고, 교장도 같고, 급우들도 같았지만, 내 읽기 능력만은 대부분의 아이들보다 나았습니다. 바로 왕국회관에서 열린 문맹 퇴치반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열심히 공부하고 훌륭한 행실을 보이자 많은 교사들의 존중을 받게 되었고, 학교생활이 더욱 쉬워졌습니다. 나는 열심히 공부하였고 몇 가지 시험을 보아서 광산의 책임 있는 지위를 맡을 수 있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가족을 부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국가를 부르는 면에서 타협을 하지 않아서 매우 기쁩니다.
[241, 242면 네모와 삽화]
“우리가 어떻게 전파를 중단할 수 있겠습니까?”
조너스 만조니
출생: 1922년
침례: 1950년
약력: 잠비아 베델에서 20년 이상 봉사하였으며, 현재는 장로이자 정규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일 때, 형이 탄자니아에서 성서와 「정부」, 「화목」과 같은 몇 권의 책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의 출판물이 여전히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왜들 그렇게 야단법석인지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나는 「화목」 책을 읽어 보았지만,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몇 년 후에 나는 형을 찾아가서 형과 함께 회중 집회에 갔습니다. 왕국회관은 없었고, 대나무로 울타리를 친 공터가 모임 장소였습니다. 인쇄된 골자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성경을 직접 인용해서 하는 강연을 들으니 참으로 만족스러웠습니다! 집회에서 들은 성서 해설은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 들은 것과는 아주 달랐는데, 그 교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기 경례와 북 치는 일에 아주 열심이었습니다. 게다가 교회 안에서는 부족 간의 차이나 무슨 언어로 노래를 불러야 하는지를 두고 말다툼이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집회에서는 여호와께 찬양을 드리는 아름다운 노래를 들을 수 있었고, 온 가족이 앉아서 영적 양식을 섭취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나는 침례를 받았고, 계속 병원 잡역부로 세속 일을 하였습니다. 이 일을 하다 보니 광산 지대에 있는 도시들을 옮겨 다니게 되었습니다. 1951년에 나는 2주 동안 휴가를 내서, 루사카에 있는 지부 사무실에서 일을 도우면서 보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베델에서 봉사하도록 초대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발송 일을 하였고, 나중에 지부 사무실이 루안샤로 이전하고 나서는 문서부 일과 번역 일을 도왔습니다. 1960년대 초에 정치적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지만, 형제들은 계속해서 많은 열매를 맺었으며 정치적인 격변기에 중립을 유지하였습니다.
나는 케네스 카운다 박사를 몇 차례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조만간 잠비아의 대통령이 될 예정이었는데, 1963년 3월에 나는 그를 만나 우리가 정당에 가입하거나 당원증을 사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에게 정치적인 반대자들로부터 더 이상 위협을 받지 않을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고, 그는 정보를 더 달라고 하였습니다. 몇 년 후에, 카운다 박사는 우리를 의회 의사당으로 초대하였고, 우리는 그곳에서 대통령과 주요 각료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 모임은 저녁 늦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대통령은 하나의 종교 단체로서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 반대하지는 않지만, 다른 종교들처럼 전파하지는 말고 그냥 집회만 볼 수는 없는지 물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전파를 중단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는 전파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 곁에 그저 성전을 하나 지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차례 탄원을 하였지만, 우리의 봉사는 몇 가지 면으로 금지령 아래 있었습니다. 하지만 늘 그랬듯이, 우리는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종들을 사용하시는 여호와께 영예를 돌릴 방법을 찾았습니다.
[245, 246면 네모와 삽화]
배우고자 하는 강한 열망이 있었다
대니얼 사칼라
출생: 1964년
침례: 1996년
약력: 회중의 장로로 봉사하고 있다.
「읽고 쓰기 교본」이라는 소책자를 한 부 받았을 때, 나는 시온의 영(靈) 교회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나는 글을 몰랐지만, 배우고자 하는 강한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출판물을 받고 나서 그 내용을 알아보는 데 많은 시간을 바쳤습니다. 나는 새로운 단어들을 이해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사람들에게 부탁하곤 하였습니다. 마땅히 가르쳐 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나는 이런 방식을 사용하여 발전하였고, 짧은 기간 안에 읽기와 쓰기의 기초를 익혔습니다.
마침내 나는 성서를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몇 가지 점이 내가 다니던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일들과는 상충된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인 친척 한 사람이 나에게 「죽은 자의 영—우리에게 도움이나 해를 줄 수 있는가? 과연 존재하는가?」 팜플렛을 보내 주었습니다. 이 팜플렛을 읽고 나니 목사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루는 교회에서 신명기 18:10, 11을 읽은 다음, “왜 우리는 성서에서 정죄하는 일들을 행하는 겁니까?”라고 질문하였습니다.
목사는 “우리 각자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다음에 나는 전도서 9:5을 읽고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성서는 죽은 자가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한다’고 알려 주는데, 죽은 자에게 영예를 돌리도록 사람들에게 권하는 이유가 뭡니까?” 목사도 참석한 사람들도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일부 교회 신자들이 나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증인이 아니오. 그런데 왜 우리가 죽은 자를 존경하고 우리의 관습을 따르는 일을 중단해야 한단 말이오?” 이 말을 들으니 어리둥절해지더군요. 나는 토의를 하면서 단지 성서만을 사용하였을 뿐인데, 교회 성원들은 내가 여호와의 증인과 연합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입니다! 그때부터 나는 이전에 함께 교회에 다니던 동료 두 명과 함께 왕국회관에 참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로 삼 개월이 지나지 않아서 나는 몇몇 가까운 친족들을 격려하여 그리스도인 집회들에 참석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나의 아내를 포함하여, 그들 중 세 명은 현재 침례받은 증인입니다.
[176, 177면 도표와 그래프]
잠비아 연대표
1910
1911년: 「성경 연구」가 잠비아에 들어오다.
1919년: 코사무 무안자와 약 150명이 매질을 당하고 투옥되다.
1925년: 성경 연구생의 케이프타운 사무실이 전파 활동과 침례를 제한하다.
1935년: 정부가 출판물 수입을 제한하다. 20가지 출판물이 금지되다.
1936년: 루사카에 서적 보관소가 개설되고 루엘린 필립스가 감독을 하게 되다.
1940
1940년: 정부가 우리 출판물의 수입과 배부를 금지하다. 다시 침례를 주기 시작하다.
1948년: 최초의 길르앗 졸업생들이 도착하다.
1949년: 정부가 「파수대」에 대한 금지령을 해제하다.
1954년: 지부 사무실을 루안샤로 이전하다.
1962년: 지부 사무실을 키트웨로 이전하다.
1969년: 정부가 우리의 공개 전파 활동을 금지하다.
1970
1975년: 선교인들이 추방되다.
1986년: 선교인들의 입국이 다시 허용되다.
1993년: 루사카에서 현재의 지부 시설이 봉헌되다.
2000
2004년: 루사카에서 증축된 지부 시설이 봉헌되다.
2005년: 12만 7151명의 전도인이 잠비아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래프]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전도인 총수
파이오니아 총수
130,000
65,000
1910 1940 1970 2000
[169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콩고 민주 공화국
잠비아
카푸타
음발라
이소카
카사마
삼피아
룬다지
무풀리라
칼룰루시
키트웨
루안샤
카브웨
루사카
세낭가
잠베지 강
리빙스턴
보츠와나
짐바브웨
모잠비크
말라위
[162면 전면 삽화]
[167면 삽화]
톰슨 캉갈레
[170면 삽화]
루엘린 필립스
[178면 삽화]
해리 아넛, 네이선 노어, 케이 제이슨과 존 제이슨, 이언 퍼거슨, 1952년
[193면 삽화]
오른쪽: 만다 은톰파와 그의 가족, 무앙게 난민 수용소에서, 2001년
[193면 삽화]
아래: 전형적인 난민 수용소
[201면 삽화]
잠비아의 봉사 훈련 학교 제1기 학급, 1993년
[202면 삽화]
봉사 훈련 학교의 강사들인 리처드 프러드와 필레몬 카시포가 학생과 만나 대화하는 장면
[206면 삽화]
대회장은 진흙과 풀 등 이 지역에 흔한 자재로 만들었다
[215면 삽화]
왼쪽: 고대 의상을 갖춘 성서 드라마, 1991년
[215면 삽화]
아래: 1996년 “경건한 평화의 사자” 지역 대회의 침례 지원자들
[235면 삽화]
리치먼드 스미스 씨와 펠리야 카차수와 그의 아버지 폴
[251면 삽화]
지금의 루사카 지부 건축에 참여한 행복한 일꾼들
[252, 253면 삽화]
(1, 2) 최근에 지은 왕국회관
(3, 4) 루사카에 있는 잠비아 지부
(5) 스티븐 레트, 2004년 12월의 확장된 지부 봉헌식에서
[254면 삽화]
지부 위원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앨버트 무손다, 앨프리드 퀴에, 에드워드 핀치, 사이러스 니앙구, 데럴 샤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