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장
회개의 기도
1, 2. (ㄱ) 하느님께서 징계하시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ㄴ) 여호와의 징계를 받은 유대인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입니까?
기원전 607년에 예루살렘과 그 성전이 멸망된 것은 여호와로부터 온 징계, 절대로 승인할 수 없다는 표현이었습니다. 불순종하는 나라 유다는 엄한 벌을 받아 마땅하였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유대인들을 멸절시킬 생각을 갖고 계시지는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호와께서 징계하시는 목적을 언급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사실, 어떤 징계나 당시에는 기뻐 보이지 않고 근심스러워 보이지만,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받은 사람들에게 평화를 이루는 열매, 곧 의를 맺게 합니다.”—히브리 12:11.
2 유대인들은 이 호된 경험에 어떤 반응을 나타낼 것입니까? 여호와의 징계를 싫어할 것입니까? (시 50:16, 17) 아니면 훈련으로 여기고 받아들일 것입니까? 그리고 회개하고 고침을 받을 것입니까? (이사야 57:18; 에스겔 18:23) 이사야의 예언은, 적어도 유다 주민이었던 사람들 중 일부는 징계에 호의적인 반응을 나타낼 것임을 암시합니다. 63장의 마지막 구절들에서부터 64장 끝에 이르기까지, 유다 나라는 진심 어린 간구로 여호와께 가까이 가는 통회하는 백성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장차 유배되어 갈 자기 동족을 대표하여 회개의 기도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는 장차 일어날 일들을 바로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인 것처럼 말합니다.
동정심 많은 아버지
3. (ㄱ) 이사야의 예언적 기도는 어떻게 여호와를 드높입니까? (ㄴ) 다니엘의 기도를 통해서, 이사야의 예언적 기도가 바빌론에서 회개한 유대인들의 생각을 잘 대변하고 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362면 네모 참조)
3 이사야는 여호와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늘에서 바라보시고 거룩하고 아름다운 당신의 높은 거처에서 보십시오.” 예언자는 여호와와 그분의 보이지 않는 영적 피조물들이 거하고 있는 영적 하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유배되어 있는 유대인들의 생각을 표현하여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열심과 당신의 온전한 위력이, 당신 속의 동요와 당신의 자비가 어디 있습니까? 저에게는 그것들이 그쳤습니다.” (이사야 63:15)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백성에게 그분의 능력을 공급해 주시지 않고, 그들에 대한 자신의 깊은 감정—“[그분] 속의 동요와 [그분의] 자비”—도 억제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여호와는 유대 나라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야곱)이 그들의 육적 조상이긴 하지만, 그들이 다시 살아 나오게 되면 아마 배교한 자기들의 자손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호와는 그들보다 동정심이 더 많으신 분입니다. (시 27:10) 이사야는 감사하는 마음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 여호와여, 당신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오래 전에 우리를 도로 사신 분이 당신의 이름입니다.”—이사야 63:16.
4, 5. (ㄱ) 여호와께서는 어떤 의미로, 자신의 백성이 그분의 길에서 벗어나 방황하게 하십니까? (ㄴ)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것은 어떤 형태의 숭배입니까?
4 이사야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은 진심 어린 표현을 합니다. “오 여호와여, 어찌하여 당신은 우리를 당신의 길에서 벗어나 방황하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당신은 우리의 마음을 완고해지게 하시어 당신에 대한 두려움이 없게 하십니까? 당신의 종들, 곧 당신의 유산인 지파들을 위하여 돌아오십시오.” (이사야 63:17) 그렇습니다.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그분의 종들에게 다시 주의를 기울여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는 어떤 의미로, 유대인들이 그분의 길에서 벗어나 방황하게 하십니까? 유대인들의 마음이 완고해지게 하시어 여호와에 대한 두려움이 없게 하시는 분이 바로 여호와이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하고 계시며, 유대인들은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그런 자유를 주신 것에 대해 절망 가운데서 한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탈출 4:21; 느헤미야 9:16) 그들은 여호와께서 개입하시어 자기들이 그릇된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 주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5 물론,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대하실 때 그런 방법을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유 도덕 행위자이며, 여호와께서는 우리가 그분에게 순종할 것인지의 여부를 스스로 결정하게 하십니다. (신명 30:15-19)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것은, 진실한 사랑이 동기가 되어 정신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숭배입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는 유대인들이 자유 의지를 행사하게 하셨는데, 그것이 여호와께 반역하도록 허용하는 것이 된다 하더라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바로 이런 방법으로 유대인들의 마음이 완고해지게 하셨습니다.—역대 둘째 36:14-21.
6, 7. (ㄱ) 유대인들이 여호와의 길을 떠난 결과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ㄴ) 무슨 헛된 소망이 표현되어 있으며, 하지만 유대인들은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할 만한 자격이 없습니까?
6 그 결과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이사야는 예언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거룩한 백성은 잠시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적대자들이 당신의 신성한 곳을 짓밟았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당신이 다스리시지 않은 자들처럼, 당신의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던 자들처럼 되었습니다.” (이사야 63:18, 19) 여호와의 백성은 여호와의 신성한 곳을 잠시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그곳이 파괴되고 자신의 나라가 유배되어 가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자, 마치 그분과 아브라함의 자손 사이에 아무런 계약도 없었던 것처럼, 그리고 그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던 자들인 것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유대인들은 절망 가운데서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오, 당신이 하늘을 찢고 내려오시며, 당신으로 인하여 산들이 뒤흔들리기만 하였더라면! 마치 불이 섶을 태우고 불이 물을 끓게 할 때처럼 하시어, 당신의 적대자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알게 하시고, 당신으로 인하여 이방 사람들이 동요하게 하시기만 하였더라면!” (이사야 64:1, 2) 여호와는 참으로 구원할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그분은 내려오시어 자신의 백성을 위하여 싸우셔서, 하늘 같은 정부 조직들을 찢으시고 산 같은 제국들을 깨부수는 일을 틀림없이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위하여 불 같은 열심을 나타내심으로 자신의 이름이 알려지게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7 과거에는 여호와께서 그런 일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신은 우리가 바라지도 못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일들을 하시면서 내려오셨습니다. 당신으로 인하여 산들이 뒤흔들렸습니다.” (이사야 64:3) 그러한 놀라운 행동은 여호와의 능력과 신격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사야 시대의 불충실한 유대인들은 여호와께서 자기들을 위해 그런 행동을 해 주실 것으로 기대할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오직 여호와만 구원할 능력이 있으시다
8. (ㄱ) 여호와께서는 어떤 면에서 나라들의 거짓 신들과 다르십니까? (ㄴ) 자신의 백성을 구원할 능력이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구원의 행동을 하시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ㄷ) 바울은 이사야 64:4을 어떤 식으로 인용하고 적용합니까? (366면 네모 참조)
8 거짓 신들은 자기들의 숭배자들을 위해 강력한 구원의 행동을 하지 못합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당신 외에 어떤 하느님이 자신을 기다리는 자를 위하여 행동한다는 것은 예로부터 아무도 들어 본 적이 없고, 귀를 기울인 적도, 눈으로 본 적도 없습니다. 크게 기뻐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을, 당신의 길에서 당신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을 당신은 만나 주셨습니다.” (이사야 64:4, 5ㄱ) 오직 여호와만 “자기를 진지하게 찾는 사람들에게 상 주시는 분”입니다. (히브리 11:6) 여호와는 의를 행하는 사람들과 여호와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행동하시는 분입니다. (이사야 30:18) 유대인들은 그런 일을 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사야는 여호와께 이렇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계속 죄를 지어 당신이 분개하셨고—오랫동안 그러하였으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받겠습니까?” (이사야 64:5ㄴ) 하느님의 백성은 오랫동안 계속 죄를 지은 기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분개하시지 않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행동하실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9. 회개한 유대인들은 어떤 희망을 품을 수 있으며, 우리는 이러한 사실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9 과거를 돌이킬 수는 없지만,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순결한 숭배로 돌아온다면 용서와 미래의 축복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정해진 때가 되면 회개한 자들에게 상을 주시어 바빌론의 포로 상태에서 해방시키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참을성을 나타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회개한다 하더라도, 여호와께서 자신의 시간표를 바꾸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계속 깨어 있고 여호와의 뜻에 반응을 나타낸다면, 마침내 해방될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참을성 있게 여호와를 기다립니다. (베드로 둘째 3:11, 12) 우리는 사도 바울이 한 이러한 말을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훌륭한 일을 행하다가 포기하지 맙시다. 우리가 지치지 않는다면, 제철이 되어 거두게 될 것입니다.”—갈라디아 6:9.
10. 이사야의 기도는 어떻게 할 수 없음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습니까?
10 이사야의 예언적 기도는 공식적으로 죄를 고백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그 나라가 스스로 구원할 능력이 없음을 진심으로 인정하는 표현도 담겨 있습니다.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부정한 자처럼 되고, 우리의 모든 의의 행동은 월경 기간의 의복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잎처럼 시들어 가고, 우리의 잘못이 바람처럼 우리를 휩쓸어 갈 것입니다.” (이사야 64:6) 유배 기간이 끝나갈 무렵, 회개한 유대인들은 배교적인 행동을 이미 중단하였을 것입니다. 의의 행동을 하며 여호와께로 돌아섰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불완전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선한 행동은 칭찬할 만한 것이기는 하지만, 죄를 대속하는 것과 관련해서는 이미 더럽혀진 의복과 다를 바 없습니다. 여호와의 용서는 그분의 자비가 동기가 되어 베푸시는 과분한 선물입니다. 그것은 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로마 3:23, 24.
11. (ㄱ) 유배된 유대인들 대부분은 어떤 건전하지 못한 영적 상태에 있으며, 그렇게 된 이유는 무엇인 것 같습니까? (ㄴ) 유배 기간 중에 믿음의 뛰어난 모범이 되는 사람들로 어떤 사람들이 있었습니까?
11 미래를 생각하고 앞을 바라보니, 이사야의 눈에 무엇이 보입니까? 예언자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고, 당신을 붙잡으려고 일어나는 자도 없습니다. 당신이 우리에게서 얼굴을 감추셨고, 우리 잘못의 힘에 우리를 녹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64:7) 그 나라의 영적 상태는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을 정도까지 이르렀습니다. 백성은 기도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습니다. 더는 우상 숭배와 같은 심각한 죄를 짓고 있지는 않지만, 숭배를 소홀히 하고 있는 것 같으며, 여호와를 ‘붙잡으려고 일어나는 자가 없습니다.’ 창조주와의 건전한 관계를 즐기고 있지 못함이 분명합니다. 아마 기도로 여호와께 나아갈 자격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여호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않고 자기들의 일상생활에만 몰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유배된 사람들 가운데는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와 에스겔과 같은 사람들도 있으며, 이 사람들은 믿음의 훌륭한 모범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히브리 11:33, 34) 포로 생활을 하는 70년 기간이 끝나감에 따라, 학개와 스가랴와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같은 사람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사야의 예언적 기도는 유배된 사람들 대다수의 상태를 묘사하는 것 같습니다.
‘순종하는 것이 희생 제물보다 낫다’
12. 이사야는 회개한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행동을 기꺼이 변화시킬 의사가 있음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12 회개한 유대인들은 기꺼이 변화되고자 합니다. 이사야는 그들을 대표하여 여호와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제 오 여호와여, 당신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진흙이요, 당신은 우리를 빚으신 도공이십니다. 우리는 모두 당신의 손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이사야 64:8) 이것은 아버지 즉 생명의 수여자로서의 여호와의 권위를 다시 한 번 인정하는 말입니다. (욥 10:9) 회개하는 유대인들은 빚을 수 있는 진흙에 비유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징계에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들은, 비유적으로 말해서, 하느님의 표준과 일치하게 틀 잡혀지고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은 오로지 도공이신 여호와께서 용서를 베푸실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사야는 두 번째로 여호와께, 유대인들이 그분의 백성임을 기억해 달라고 호소합니다. “오 여호와여, 극도로 분개하지 마시고, 우리의 잘못을 영원히 기억하지 마십시오. 이제 제발 보십시오. 우리는 모두 당신의 백성입니다.”—이사야 64:9.
13. 하느님의 백성이 유배되어 있는 동안 이스라엘 땅의 상태는 어떠합니까?
13 유배되어 있는 동안 유대인들은 단지 이교 나라에서의 포로 생활만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인내해야 합니다. 예루살렘과 그 성전의 황폐된 상태는 그들과 그들의 하느님에게 치욕을 돌리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회개의 기도는 그러한 치욕을 가져다 주는 일 몇 가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거룩한 도시들이 광야가 되었습니다. 시온도 삭막한 광야가 되고, 예루살렘도 황무지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조상이 당신을 찬양하던, 우리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집이 불에 탄 바 되었으며, 우리의 보배로운 것들이 모두 황폐하였습니다.”—이사야 64:10, 11.
14. (ㄱ) 여호와께서는 지금과 같은 상태가 초래될지 모른다고 어떻게 경고하신 적이 있습니까? (ㄴ) 여호와께서 성전과 그곳에서 드리는 희생 제물을 기뻐하기는 하셨지만, 그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14 물론, 여호와께서는 유대인들의 조상의 땅의 상태를 잘 알고 계십니다. 예루살렘이 멸망되기 420년 전쯤에,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백성에게 그들이 그분의 계명을 떠나서 다른 신들을 섬긴다면 그들을 “땅의 표면에서 끊어 버리고” 아름다운 성전도 “폐허 더미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열왕 첫째 9:6-9) 여호와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주신 땅과 여호와께 영예를 돌리기 위해 지은 웅장한 성전과 여호와께 드리는 희생 제물을 기뻐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물질적인 것들보다, 심지어 희생 제물보다 충성과 순종이 더 중요합니다. 예언자 사무엘은 적절하게도 사울 왕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번제물과 희생 제물을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하는 것만큼 좋아하십니까? 보십시오! 순종하는 것이 희생 제물보다 낫고,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사무엘 첫째 15:22.
15. (ㄱ) 이사야는 예언적으로 여호와께 어떤 탄원을 하며, 그러한 탄원이 어떻게 응답됩니까? (ㄴ) 어떤 일 때문에 여호와께서 결국 이스라엘을 국가적으로 배척하시게 되었습니까?
15 하지만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자신의 회개한 백성에게 닥친 재난을 보시고도 불쌍히 여기시지 않을 것입니까? 이사야는 자기의 예언적 기도를 끝내면서 바로 그러한 질문을 합니다. 그는 유배된 유대인들을 대표하여 다음과 같이 탄원합니다. “오 여호와여, 이러한 일들을 보시면서도 당신은 아직도 스스로 억제하실 것입니까? 당신은 가만히 계시어 우리가 극도의 괴로움을 당하도록 하시렵니까?” (이사야 64:12) 결국,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참으로 용서해 주시며, 기원전 537년에 그들을 그들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여 그곳에서 다시 순결한 숭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요엘 2:13) 하지만 여러 세기 후에, 예루살렘과 그 성전은 또다시 멸망되고,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나라는 결국 그분에게 배척당하게 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백성이 그분의 계명에서 벗어나 메시아를 배척하였기 때문입니다. (요한 1:11; 3:19, 20) 그런 일이 일어나자,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새로운 나라, 즉 영적 나라인 “하느님의 이스라엘”로 대치하셨습니다.—갈라디아 6:16; 베드로 첫째 2:9.
여호와, “기도를 들으시는 분”
16. 성서는 여호와의 용서와 관련하여 어떤 점을 가르쳐 줍니까?
16 이스라엘에 일어난 일로부터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선하시고 기꺼이 용서하시”는 분임을 알게 됩니다. (시 86:5) 불완전한 피조물인 우리는 그분의 자비와 용서에 의존해서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의 행위가 이러한 축복을 벌게 도와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무분별하게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 아닙니다.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고 돌아서는 사람들만 하느님의 사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사도 3:19.
17, 18. (ㄱ) 여호와께서 우리의 생각과 감정에 진정한 관심을 나타내신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ㄴ) 여호와께서 죄 많은 인간들에게 참을성을 나타내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7 또한, 기도로 여호와께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면 그분이 우리의 생각과 감정에 깊은 관심을 나타내신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여호와는 “기도를 들으시는 분”입니다. (시 65:2, 3)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이렇게 보증합니다. “여호와의 눈은 의로운 사람들 위에 있고 그분의 귀는 그들의 간구로 향하[십니다].” (베드로 첫째 3:12) 그에 더하여, 회개의 기도에는 죄를 겸손하게 고백하는 것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점도 알게 됩니다. (잠언 28:13)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이용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느님의 과분한 친절을 받아들이고서 그 목적에서 빗나가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경고합니다.—고린도 둘째 6:1.
18 마지막으로, 하느님께서 자신의 죄 많은 백성에 대해 참을성을 나타내시는 목적을 알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여호와께서 참으시는 이유가 “아무도 멸망되기를 바라지 않으시고 모두가 회개에 이르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베드로 둘째 3:9) 하지만 계속해서 하느님의 참으심을 악용하는 사람들은 마침내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와 관련하여 이러한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한 일에 따라 갚으실 것입니다. 곧 선한 일에 인내함으로 영광과 영예와 부패하지 않는 것을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으로 갚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다투기 좋아하고 진리에 불순종하면서 불의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진노와 분노[가 있을 것입니다].”—로마 2:6-8.
19. 여호와께서는 언제나 어떤 변함없는 특성들을 나타내실 것입니까?
19 하느님께서는 고대 이스라엘을 바로 이런 방법으로 대하셨습니다. 오늘날 여호와와 우리의 관계도 동일한 원칙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분은 변하시지 않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마땅히 받아야 할 처벌은 꼭 내리시지만, 언제나 “여호와, 자비롭고 은혜롭고, 분노하기를 더디 하고 사랑의 친절과 진리가 풍부한 하느님,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사랑의 친절을 보존하고, 잘못과 범법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분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탈출 34:6, 7.
[362면 네모와 삽화]
다니엘의 회개의 기도
예언자 다니엘은 유대인들이 포로로 잡혀 있는 70년 기간 내내 바빌론에서 살았다. 유배된 지 68년째 되는 해의 언젠가, 다니엘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억류되어 있는 기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분별하였다. (예레미야 25:11; 29:10; 다니엘 9:1, 2) 다니엘은 여호와께로 향하여 기도—유대 나라 전체를 대표하여 하는 회개의 기도—를 드렸다. 다니엘은 이렇게 기술한다. “나는 얼굴을 참 하느님 여호와께로 향하여, 기도와 간청으로, 단식과 자루천과 재로 그분을 찾았다. 나는 나의 하느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고백[하였다].”—다니엘 9:3, 4.
다니엘이 이러한 기도를 한 때는, 이사야가 그의 책 63장과 64장에 나오는 예언적 기도를 기록한 지 약 200년 후였다. 틀림없이, 유배되어 있는 힘든 기간에 많은 진실한 유대인들이 여호와께 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하지만 성서에 특별히 다니엘의 기도가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마도 그의 기도가 많은 충실한 유대인들의 감정을 잘 대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그의 기도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이사야의 예언적 기도에 표현된 감정이 사실은 바빌론에 있는 충실한 유대인들의 감정이라는 것이다.
다니엘의 기도와 이사야의 기도 사이의 몇 가지 유사점에 유의하기 바란다.
[366면 네모]
‘눈으로 보지 못하였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이렇게 썼다. “‘하느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준비하신 것들은 눈으로 보지 못하였고 귀로 듣지 못하였으며,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았다’라고 기록된 바와 같습니다.” (고린도 첫째 2:9)a 바울의 말이나 이사야의 표현은 모두, 여호와께서 자신의 백성을 위하여 하늘의 상속 재산이나 미래의 지상 낙원으로 준비하신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바울은 1세기에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누리고 있는 축복들, 이를테면 하느님의 더 깊은 것들을 이해하는 것이나 여호와로부터 영적 계몽을 받는 것에 이사야의 말을 적용하고 있다.
영적인 깊은 것들은 여호와께서 그것들을 밝히기로 정하신 때가 되어야만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때가 되었어도, 여호와와 친밀한 관계를 누리고 있는 영적인 사람이라야만 이해할 수 있다. 바울의 말은 영성이 거의 혹은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그들의 눈은 영적인 진리를 볼 수 없다. 즉 분별할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의 귀는 그러한 것을 들을 수 없다. 즉 이해할 수 없다. 하느님께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준비하신 것들에 대한 지식은 그런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하지만 바울처럼 하느님께 헌신한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영을 통해 그러한 것들을 밝혀 주신다.—고린도 첫째 2:1-16.
[각주]
a 히브리어 성경에는 바울의 말이 그가 인용하는 그대로 나오는 곳이 없다. 바울은 이사야 52:15과 64:4과 65:17에 표현된 사상을 한데 뭉뚱그려서 말하고 있는 것 같다.
[367면 삽화]
하느님의 백성은 예루살렘과 그 성전을 “잠시” 소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