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그리스인
(Greece, Greeks)
이 명칭들은 그리스 북서부에 살던 부족의 이름인 그라이코이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 이름(라틴어, 그라이키)을 그리스 주민들 전체를 가리키는 데 사용하였다. 나중에는 아리스토텔레스조차 자신의 저작물에서 그 명칭을 비슷한 방법으로 사용하였다.
초기에 사용된 이오니아인이라는 또 다른 이름은 기원전 8세기부터 아시리아의 설형 문자 기록에 나오며 또한 페르시아와 이집트의 기록에도 나온다. 이 이름은 야완(히브리어, 야완)이라는 이름에서 유래한 것인데, 야완은 야벳의 아들이며 노아의 손자이다. 야완은 초기에 그리스와 그 주변 섬들에 살던 민족들 가운데 야벳 계통의 조상이었다. 그는 또한 키프로스와 이탈리아 남부의 일부 지역과 시칠리아와 스페인에 살던 초기 거주민 가운데 야벳 계통의 조상이었던 것 같다.—창 10:1, 2, 4, 5; 대첫 1:4, 5, 7. 깃딤; 야완; 엘리샤 참조.
지금은 지리적으로 “이오니아”라는 말이 그리스 서부 해안을 따라 줄지어 있는 섬들을 포함하여, 이탈리아 남부 지역과 그리스 남부 지역 사이에 있는 바다를 가리키게 되었다. 하지만 이전에는 그 이름이 히브리어 성경에서 “야완”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방법과 좀 더 일치하게 더 광범위한 지역에 적용되었다. 기원전 8세기에 예언자 이사야는 돌아온 유다의 유배자들이 “두발과 야완, 먼 섬들”을 비롯하여 멀리 떨어진 나라들로 보내질 때에 관해 이야기하였다.—사 66:19.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이 지역을 가리켜 헬라스(“그리스”, 행 20:2)라고 부르며 이 지역 사람들을 헬레네스라고 부른다. 그리스인들도 통용 기원 여러 세기 전부터 그러한 이름들을 사용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계속 사용하고 있다. “헬라스”는 야완의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인 “엘리샤”와 모종의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창 10:4) 기원전 146년에 로마가 정복한 후에는 아카이아라는 이름도 그리스의 중부와 남부 지역을 가리키게 되었다.
땅과 그 특색 그리스는 산이 많은 발칸 반도의 남부 지역과 그 인근의 섬들을 지배하였는데, 그 지역은 서쪽으로는 이오니아 해가 있었고 동쪽으로는 에게 해가 있었다. 또한 그 지역의 남쪽에는 지중해가 펼쳐져 있었다. 북쪽 경계는 확실하지 않은데, 초기에 그리스에 살았던 야완 사람들은 특정한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후대에 “그리스”는 일리리아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 지역은 아드리아 해안과 마케도니아와 접해 있었다. 사실, 마케도니아인들은 나중에 그리스인들로 불리게 된 사람들과 기본적으로 같은 혈통이었을 수 있다.
당시에도 이 지역은 지금처럼 거칠고 바위투성이였으며, 험한 석회암 산들이 약 사분의 삼을 차지하고 있었다. 산비탈은 나무가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다. 기름진 평야와 골짜기가 드문 데다 토양에 암석까지 많은 것은 토지의 농업 생산성을 크게 낮추는 요인이 되었다. 하지만 온화한 기후 덕분에 올리브와 포도를 재배하기에는 유리하였다. 다른 농산물로는 보리, 밀, 사과, 무화과, 석류 등이 있었다. 경작되지 않는 지역에는 양 떼와 염소 떼가 방목되었다. 은, 아연, 구리, 납 등의 광물이 여러 곳에 매장되어 있었으며 산에서는 양질의 대리석이 많이 나왔다. 에스겔의 예언(27:1-3, 13)에는 티레와 무역하던 사람들 가운데 야완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들이 무역한 생산품 중에 “구리 물품”이 언급되어 있다.
해운상의 이점 육로 여행은 산악 지대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힘들었다. 동물이 끄는 수레는 겨울철이면 꼼짝 못하게 되기 십상이었다. 따라서 그리스에서는 바다야말로 운송과 통신을 위한 가장 좋은 길이었다. 길고 들쭉날쭉한 해안선에는 깊숙하게 육지로 굽어 들어간 만과 만입부가 있어 항구나 배들의 피난처가 될 만한 장소들이 많았다. 여러 개의 큰 만이 육지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고대 경계 내의 지역에서는 바다로부터의 거리가 60킬로미터를 넘는 곳이 거의 없었다. 펠로폰네소스라고 하는 그리스 본토의 남쪽 지역은 거의 섬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펠로폰네소스를 그리스 중앙부와 연결해 주는 것은 사론 만과 코린트(고린도) 만 사이를 지나가는 좁은 지협뿐이다. (오늘날에는 약 6킬로미터의 코린트 운하가 갑문(閘門) 없이 그 좁은 지협을 관통하고 있어 두 지역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그리스에 살던 야완 사람들은 일찍부터 바다를 활동 무대로 삼았다. “장화” 모양으로 생긴 이탈리아에서 발꿈치에 해당하는 지역은 그리스 북서부로부터 오트란토 해협 건너 160킬로미터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동쪽으로는 군도들(물속에 잠긴 산들의 정상이 수면 위로 나와서 생긴 열도)이 있어서 에게 해를 건너 소아시아에 이르는 거대한 징검다리 역할을 하였다. 에게 해의 북동쪽 모퉁이에서는 좁은 통로인 헬레스폰토스 해협(다르다넬스 해협이라고도 함)을 따라가면 마르마라 해로 들어가서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해 흑해로 갈 수 있었다. 또한 그리스 선박들은 소아시아의 남부 해안을 따라 항해하여 일찍부터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연안까지 여행하였다. 배는 낮 시간에 여행할 수 있는 거리가 최고 100킬로미터나 되었다. 마케도니아의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는 고린도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며, 따라서 그 편지를 전달하는 일은 기후 조건에 따라 (그리고 가는 도중 들른 항구의 수에 따라) 일주일이나 그 이상이 걸렸을 수 있다.
그리스인들의 영향력과 정착지는 결코 그리스 본토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이오니아 해와 에게 해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많은 섬들은 본토와 다름없이 그리스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이탈리아 남부 지역과 시칠리아는 대(大)헬라스 즉 라틴어로 그라이키아 마그나로 불리던 지역의 일부로 여겨졌다. 역사적 증거가 알려 주는 바에 의하면, 그리스의 야완 사람들은 타르시시(다시스, 스페인)의 야완 사람들과도 계속 접촉하고 교역 관계를 유지하여, 이 부면에 있어서 페니키아인들을 훨씬 능가하였다. 그리스인들과 키프로스의 야완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와 비슷한 관계를 찾아볼 수 있다.
그리스의 부족들의 기원 현대의 역사가들은 그리스의 부족들의 기원과 그들이 그 지역으로 들어온 경위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북방 부족들의 연속적인 “침입”이 관련되어 있다는 널리 알려진 설은 대체로 그리스 신화와 고고학적 추측에 근거한 것이다. 사실, 그리스와 관련된 세속 역사는 기원전 8세기경(첫 번째 올림피아드가 거행된 때는 기원전 776년)에야 시작되며, 입수 가능한 관련 기록은 기원전 5세기 이후의 것밖에 없다. 이때는 대홍수가 있은 지 여러 세기 후이며, 따라서 바벨에서 인류의 언어가 혼잡하게 되어 인간 가족들이 흩어진 지 오랜 후이다. (창 11:1-9) 이 여러 세기에 걸친 기간에 아마도 다른 부족 집단들이 야완과 그의 아들들의 원래 혈통과 섞였을 것이다. 하지만 기원전 첫 번째 천년기 이전의 기간에 대해서는 신뢰하기 어려운 이론들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스의 주요 부족 그리스의 주요 부족으로는, 테살리아와 펠로폰네소스 중부와 보이오티아에 살았던 아카이오스족, 그리스 중부의 동쪽 지역과 아이올리아라고 하는 소아시아 북서쪽 지역에 살았던 아이올리아족, 펠로폰네소스 동부와 에게 해의 남쪽 섬들과 소아시아 남서부에 살았던 도리스족, 아티카와 에비아 섬과 에게 해 중앙의 섬들과 소아시아 서부 해안에 살았던 이오니아족이 있었다. 하지만 초기 시대에 이 부족들과 마케도니아인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었는지는 확실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족장제의 전통과 도시 국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부족들은 자주적인 성향이 상당히 강하며, 심지어 부족 내에서 발전한 도시 국가들 역시 상당히 자주적이다. 여기에는 지리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였다. 그리스 사람들 중에는 섬에 사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본토의 경우에는 대다수가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골짜기들에 살았다. 그들의 초기 사회 구조에 관해 「아메리카나 백과사전」(영문)에서는 이러한 견해를 제시한다. “사회의 기본 구성 단위는 족장제 가족이었다. ··· 족장제의 전통은 그리스 문화에 굳게 뿌리 박혀 있어서, 도시 국가(폴리스)에서 사회 활동을 할 수 있는 시민은 성인 남성들뿐이었다. 족장제 가족은 씨족(게노스), 프라트리[즉 가족 군(群)], 부족순으로 확대되어 나가는 혈족 체계에서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다.” (1956년, 13권, 377면) 이것은 성서 창세기에 묘사되어 있는 대홍수 후의 족장제와 매우 잘 일치한다.
그리스의 사회 형태는 가나안과 다소 비슷한 면이 있는데, 가나안에서는 (가나안 자손으로 이루어진) 여러 부족들이 많은 경우 특정한 도시를 중심으로 소(小)왕국들을 형성하였다. 그리스의 도시 국가는 폴리스로 불렸다. 이 말은 원래 아크로폴리스 곧 주위에 형성된 정착촌의 중심이 되는 요새화된 높은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었던 것 같다. 나중에 이 말은 도시 국가를 구성하는 지역 전체와 시민들을 가리키게 되었다.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은 대부분 규모가 작아서 시민들의 수가 일반적으로 1만 명(여기에 여자, 노예, 자녀들의 수가 더해짐)을 넘지 않았다. 전성기였던 기원전 5세기에도 아테네는 남자 시민의 수가 겨우 4만 300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스파르타의 남자 시민의 수는 약 5000명밖에 안 되었다. 가나안의 작은 왕국들처럼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도 때때로 함께 동맹을 맺기도 하고 또한 서로 싸우기도 하였다.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2세)가 나타나기 전까지 그리스는 정치적으로 분열된 상태였다.
민주주의의 시도 대부분의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통치 방법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지만,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통치 방법만은 잘 알려져 있다. 그들의 정치 체제는 가나안이나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의 정치 체제와 상당히 달랐던 것 같다. 적어도 일반적으로 역사 시대라고 칭할 수 있는 시기에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에는 왕 대신에 행정관과 평의회, 그리고 시민들로 이루어진 민회(엑클레시아)가 있었다. 아테네는 직접 민주 정치(“민주주의”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democracy”[데모크라시]는 “국민”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데모스와 “다스림”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크라토스에서 유래함)를 시도하였다. 그 정치 제도에서는 시민 전체가 입법부를 구성하여 민회에서 의견을 말하고 표결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여자와 외국 출생의 거주자와 노예들은 시민권이 없었기 때문에 “시민들”은 소수 집단일 뿐이었다. 노예들은 여러 도시 국가에서 많게는 인구의 삼분의 일을 차지했던 것으로 생각되며, “시민들”이 정치 집회에 참여하는 데 필요한 자유 시간이 있었던 것은 분명 그러한 노예들의 노역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유의할 만한 점으로, 기원전 9세기경에 히브리어 성경에서 그리스에 대해 최초로 언급하는 내용에서는 유대인들이 티레와 시돈과 블레셋에 의해 “그리스인들의 자손[문자적으로 “야완 사람들” 혹은 “이오니아인들”]”에게 노예로 팔렸다고 알려 준다.—욜 3:4-6.
제조업과 수공업 그리스인들은 농경 활동을 주로 하였지만 그에 더해, 많은 상품을 생산하여 수출하였다. 그리스의 장식 항아리는 지중해 지역 전역에서 유명하였으며, 금은 물품과 모직물 역시 그리스의 중요한 상품이었다. 그리스에는 장인들이 노예나 자유인 여러 명을 일꾼으로 부리면서 운영하는 독립된 작은 상점들이 많았다. 그리스의 도시 고린도에서 사도 바울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함께 천막 만드는 일을 하였는데, 아마도 그리스에서 풍부하게 공급되는 염소 털로 된 직물을 사용하여 천막을 만들었을 것이다. (행 18:1-4) 고린도는 코린트 만과 사론 만에 가까운 전략적 요지에 있었기 때문에 주요한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다른 주요한 상업 도시로는 아테네와 아이기나가 있었다.
그리스 문화와 예술 그리스에서는 교육의 기회가 남자들에게만 주어졌으며 그 주된 목표는 “훌륭한 시민”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도시 국가마다 나름대로의 훌륭한 시민상이 있었다. 스파르타는 교육의 거의 모든 부분이 신체 단련과 관련이 있어서(디첫 4:8에 나오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조언과 대조), 어린 소년들은 일곱 살이 되면 강제로 부모 곁을 떠나서 병영에 배치되어 30세 때까지 그곳에 있었다. 아테네의 경우는 시간이 흐르면서 문학과 수학과 예술에 더 크게 역점을 두게 되었다. 파이다고고스로 불리는 신임받는 종은 아이를 데리고 학교로 가는 일을 하였는데, 학교에서는 여섯 살부터 교육을 시작하였다. (갈 3:23-25에서 바울이 모세의 율법을 파이다고고스에 비한 것에 유의하기 바람. 가정교사 참조) 아테네에서는 시가 매우 인기 있었으며 학생들은 많은 시를 암기할 것이 요구되었다. 바울은 길리기아의 타르수스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아테네에서 자신의 소식을 납득시키기 위해 간단하게 시구를 인용하였다. (행 17:22, 28) 연극은 비극과 희극 모두 인기를 얻었다.
철학은 아테네에서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리스 전역에서 크게 중요시되었다. 주요 철학 학파 중에는 소피스트가 있는데, 그들은 진리는 개인적인 생각의 문제라고 주장하였다. (힌두교의 견해와 유사한) 그러한 견해는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인 플라톤, 그리고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유명한 그리스 철학자들로부터 반대를 받았다. 다른 철학 학파들은 행복의 궁극적인 근원에 대해 논하였다. 스토아파는 행복이란 이성과 일치하게 살 때 얻는 것이고 그것만이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에피쿠로스파는 쾌락이 행복의 진정한 근원이라고 생각하였다. (고첫 15:32에서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한 말과 대조) 아테네에서 바울과 함께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 중에는 나중에 언급한 이 두 학파에 속하는 철학자들도 있었는데, 그 일로 인해 바울은 아레오바고로 끌려가 심문을 받았다. (행 17:18, 19) 또 다른 철학 학파로는 회의파(懷疑派)가 있었는데, 그들은 인생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하였다.
하나의 민족으로서 그리스인들은 늦어도 후기에는 지식욕이 강한 특성을 나타냈고 특이한 것들에 대해 토론하고 대화를 나누는 것을 기질적으로 좋아하게 되었다. (행 17:21) 그들은 인간의 논리(그리고 추측)에 근거한 사고 과정을 통해 인생과 우주에 관한 중요한 질문들 가운데 일부를 풀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이 고대 세계의 지식 계층이라고 생각하였다.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특히 이러한 말을 통해 그러한 인간적 지혜와 주지주의를 합당한 위치에 두도록 권하였다. “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자기가 이 사물의 제도에서 지혜롭다고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면 지혜롭게 될 것입니다. ··· ‘여호와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의 추리가 헛됨을 아[십니다].’” (고첫 1:17-31; 2:4-13; 3:18-20) 철학에 대한 그들의 그 모든 토의와 탐구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저술물들은 그들이 참다운 희망을 가질 만한 근거를 발견하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J. R. S. 스테럿 교수와 새뮤얼 앵거스 교수가 이렇게 지적하는 바와 같다. “인생의 비애와 사랑의 일시성과 희망의 거짓됨과 죽음의 냉혹함에 대한 슬픔에 젖은 탄식을 이보다 더 많이 담고 있는 문학도 없다.”—「펑크 앤드 왜그늘스 신 표준 성서 사전」(Funk and Wagnalls New Standard Bible Dictionary), 1936년, 313면.
그리스의 종교 그리스의 종교에 대해 알려 주는 최초의 기록은 호메로스의 서사시이다. 역사가들은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라는 두 편의 서사시를 호메로스가 쓴 시로 추정한다. 이 시들의 가장 오래된 파피루스 사본들 중에는 기원전 150년 이전의 어느 때의 것으로 생각되는 사본도 있다. 그러한 초기의 본문에 관해 그리스어 교수인 조지 G. A. 머리가 말하는 바와 같이, 그러한 본문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포본과 ‘엄청나게’ 다르다.” 다시 말해, 최근 몇 세기에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본문과 크게 차이가 있는 것이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영문], 1942년, 11권, 689면) 따라서 성서와는 달리, 호메로스의 시들은 그 내용이 온전하게 보전된 것이 아니며, 오히려 머리 교수가 입증하는 것처럼 그 내용이 극히 유동적인 형태로 존재하였다. 호메로스의 시들은 전사 영웅들이나, 사람과 매우 흡사한 신들을 소재로 하였다.
그리스의 종교에는 바빌론의 영향력이 작용하였다는 증거가 있다. 고대 그리스의 한 설화는 원작인 한 아카드어 설화를 거의 그대로 직역해 놓은 것이다.
아마도 기원전 8세기에 살았을 또 다른 시인인 헤시오도스는 그리스의 많은 신화와 전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사람으로 생각된다. 헤시오도스의 「신통기(神統記)」(Theogony)는 호메로스의 시들과 함께 그리스인들의 주요한 경전 곧 신학 자료가 되었다.
그리스 신화를 살펴보면서, 그러한 신화의 기원일 법한 일들, 아니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일들에 대해 성서에서 밝혀 주는 바를 아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창세기 6:1-13에서 알려 주는 것처럼, 대홍수 전에 하느님의 천사 아들들은—아마도 인간의 모습으로 물질화하여—땅으로 내려왔으며 매력적인 여인들과 동거하였다. 그들은 네피림이라는 자손들을 낳았는데, 네피림이란 넘어뜨리는 자들,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는 자들”을 의미한다. 이처럼 영적 피조물과 인간의 부자연스러운 결합으로 인해 그리고 그러한 결합을 통해 태어난 잡종 인종으로 인해 땅에는 부도덕과 폭력이 가득하게 되었다. (유 6; 베첫 3:19, 20; 베둘 2:4, 5 비교. 네피림 참조) 대홍수 후 시대에 살았던 다른 사람들처럼, 그리스인들의 선조인 야완도 대홍수 전 시대와 그때의 상황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아마 그는 대홍수를 살아남은 자신의 아버지 야벳으로부터 그러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이제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작품으로 알려진 기록들에서 말하는 점들에 유의해 보기 바란다.
그들이 묘사한 많은 신들과 여신들은 흔히 몸집이 매우 크거나 초인간적인 존재이지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매우 아름다웠다. 그들은 먹고 마시고 잠자고 자기들끼리 혹은 심지어 사람들과 성 관계를 가졌으며 가족을 이루어 생활하고 말다툼이나 싸움을 하고 유혹을 하여 강간을 저질렀다. 그들은 거룩하고 불멸인 존재로 여겨졌지만 못하는 속임수나 범죄가 없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나 눈에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나중에 그리스의 저술가들과 철학자들은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기록에서 이들 신들이 저지른 것으로 묘사한 좀 더 혐오스러운 행위들에 대한 내용은 삭제하려고 하였다.
비록 내용이 훨씬 늘어나고 윤색되고 왜곡되기는 하였지만 이 기록은 대홍수 전의 상태에 관해 창세기에 나오는 신뢰할 만한 기록과 일치하는 것일 수 있다. 또 다른 놀라운 유사점으로, 그리스의 전설에서는 주요 신들 외에도 신과 인간 모두의 후손인 반신반인들이나 영웅들에 대해 묘사한다. 그러한 반신반인들은 초인간적인 힘이 있었지만 멸성이었다(헤라클레스만이 그들 중에서 유일하게 불멸성을 얻는 특전을 받음). 따라서 반신반인들은 창세기 기록에 나오는 네피림과 주목할 만한 유사성을 갖고 있다.
이러한 기본적인 유사점에 대해 유의하면서, 오리엔트학 학자인 E. A. 스파이저는 그리스 신화의 주제가 메소포타미아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유대 민족의 세계사」 The World History of the Jewish People, 1964년, 1권, 260면) 메소포타미아는 바빌론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인간의 언어를 혼란시키는 일이 있은 후 인류가 퍼져 나간 기점이 된 곳이기도 하다.—창 11:1-9.
그리스의 주요 신들은 베레아 성읍의 남쪽에 있던 올림포스 산(높이 2917미터)의 높은 곳에 사는 것으로 전해졌다. (바울은 이 차 선교 여행 중에 베레아 사람들에게 봉사할 때 올림포스 산의 경사지에 상당히 가까이 간 것이었다. 행 17:10) 그러한 올림포스의 신들 중에는, 하늘의 신 제우스(로마 사람들은 주피터라고 부름. 행 28:11), 제우스의 아내 헤라(로마 사람들의 주노), 위대한 어머니로 불리는 땅의 여신 게 혹은 가이아, 태양신이며 먼 곳에서 치명적인 화살을 쏘는 돌연사의 신 아폴로,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로마 사람들의 디아나)—에베소는 다산의 여신인 또 다른 아르테미스의 숭배지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행 19:23-28, 34, 35)—전쟁의 신 아레스(로마 사람들의 마르스), 여행자와 상업과 웅변의 신이며 신들의 사자인 헤르메스(로마 사람들의 메르쿠리우스)(소아시아의 리스트라에서 사람들은 바나바를 “제우스로, 바울은 헤르메스로 불렀다. 그것은 바울이 말하는 데 앞장서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행 14:12), 다산과 사랑의 여신으로 “아시리아·바빌로니아의 이슈타르와 시로페니키아의 아스타르테와 자매 격”으로 생각되는 아프로디테(로마 사람들의 비너스)(「그리스 신화」 Greek Mythology, P. 헤믈린, 런던, 1963년, 63면) 등을 비롯하여 많은 신들과 여신들이 있었다. 사실, 각 도시 국가에도 그 지방 관습에 따라 숭배하는 자기들만의 하등 신들이 있었다.
축제와 경기 대회들 축제는 그리스의 종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운동 경기들과 더불어 연극, 희생, 기도 의식 등은 넓은 지역에서 사람들을 끌어 모았으며 그리하여 그러한 축제들은 정치적으로 분열된 도시 국가들을 결속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한 축제들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는 올림픽 경기 대회(올림피아에서 개최됨), 이스트미아 경기 대회(고린도 근처에서 개최됨), 피티아 경기 대회(델포이에서 개최됨), 네메아 경기 대회(네메아 근처에서 개최됨) 등이 있었다. 올림픽 경기 대회를 4년마다 거행하다 보니, 4년을 1올림피아드라고 하는 그리스식 연대 계산 방법이 생겨나게 되었다.—경기, 놀이 참조.
신탁, 점성술, 신당 많은 사람들은 신이 숨겨진 지식을 계시할 때 사용하는 매개자로 여겨졌던 신탁 전달자를 열렬히 신봉하였다. 가장 유명한 신탁 전달자들은 델로스와 델포이와 도도나의 신전에 있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대가를 지불하고, 신탁 전달자에게 궁금한 점들을 물어서 답을 얻었다. 그러한 답은 대개 애매모호하였기 때문에 사제가 해석해 주어야 하였다. 마케도니아의 빌립보에서 예언의 술법을 행하던 소녀(바울이 악귀를 쫓아 준 소녀)는 신탁 전달자의 일을 하여 “주인들에게 많은 이득을 안겨 주고 있었다.” (행 16:16-19) G. 어니스트 라이트 교수는 현대 점성술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리스 사람들을 거쳐 바빌론의 점쟁이들이 나온다고 주장한다. (「성서 고고학」 Biblical Archaeology, 1962년, 37면) 병 고침을 행하는 신당들 역시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불멸성에 대한 철학적 가르침 그리스 철학자들은 인생에 관한 근본적인 의문들에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그들의 견해는 사람들의 종교적 견해를 틀 잡는 데 기여하였다. 기원전 5세기의 소크라테스는 인간 영혼이 불멸이라고 가르쳤다. 플라톤은 「파이돈」(64C, 105E)에서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동료 두 사람과 나눈 대화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였다. “‘우리는 죽음과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 우리는 죽음이란 영혼이 몸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며, 죽음이라는 상태는 몸이 영혼과 분리되어 홀로 존재하고 영혼도 몸과 분리되어 홀로 존재하는 상태라고 믿지 않는가? 죽음이 그 외에 다른 어떤 것인가?’ ‘아니, 그렇지 않지’ 하고 그는 말하였다. ‘그리고 영혼은 죽음을 인정하지 않지 않는가?’ ‘그렇지.’”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영혼은 불멸인 걸세.’ ‘그렇군.’” 이 내용을 에스겔 18:4과 전도서 9:5, 10과 대조하기 바란다.
신전과 우상 신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웅장한 신전들이 건립되었고, 신전들의 신을 나타내기 위해 대리석과 청동으로 아름답게 만들어진 조각상들이 세워졌다. 그러한 신전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몇몇 곳의 폐허는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 남아 있는데, 그중에는 파르테논과 에렉테움, 그리고 프로필라이아가 있다. 바로 그 도시에서 바울은 청중에게 이야기하면서, 아테네에 신들에 대한 두려움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는 것에 관해 언급하였다. 또한 그는 듣는 사람들에게, 하늘과 땅의 창조주께서는 “손으로 만든 신전에 살지 않”으시며, 그들이 하느님의 자손으로서 창조주를 “금이나 은이나 돌처럼,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조각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하게 말하였다.—행 17:22-29.
페르시아 전쟁 시대 메디아·페르시아 제국이 (기원전 539년에 바빌론을 정복한) 키루스의 통치 아래 강성해지자 그리스는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키루스는 소아시아를 정복하였는데, 그곳에는 그리스의 식민 도시들도 있었다. 키루스 제삼 년(바빌론의 통치자로서의 연대를 계산한 것으로 보임)에 여호와의 소식을 전하는 천사는 다니엘에게 페르시아의 네 번째 왕이 “그리스 왕국을 대적하여 모든 것을 일으킬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단 10:1; 11:1, 2) 페르시아의 세 번째 왕(다리우스 히스타스피스)은 기원전 499년에 그리스의 식민 도시들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고 그리스를 침공할 준비를 하였다. 침략한 페르시아의 함대는 기원전 492년에 폭풍에 의해 난파되었다. 그 후 기원전 490년에 페르시아의 대군은 맹렬한 기세로 그리스를 공격하였지만 아테네의 북동쪽에 있는 마라톤 평야에서 소수의 아테네 군대에 패하였다. 다리우스의 아들 크세르크세스는 그러한 패배를 설욕하려는 결심을 하였다. 그는 예언된 ‘네 번째 왕’으로서 제국 전체를 일으켜 대규모의 병력을 마련하여 기원전 480년에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넜다.
그리스의 일부 주요 도시 국가들은 그러한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보기 드물게 일치단결하여 싸웠지만, 페르시아군은 그리스의 북부와 중부 지역을 가로질러 진격하여 아테네에 이르렀으며, 아테네의 높이 솟은 요새인 아크로폴리스를 불태웠다. 하지만 바다에서는 아테네인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그리스인들이 살라미스에서 페르시아 함대(와 페니키아를 비롯한 페르시아의 동맹국 함대)의 허를 찔러 괴멸시켰다. 그들은 이 승리의 여세를 몰아 플라타이아이에서 그리고 또다시 소아시아의 서부 해안에 있는 미칼레에서 벌어진 육상 전투에서 페르시아 사람들을 무찔렀으며, 그 후 페르시아군은 그리스를 단념하였다.
패권을 쥔 아테네 이제 아테네는 강력한 해군력 덕분에 그리스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기원전 431년경까지 이어지는 기간은 아테네의 “황금시대”였으며, 미술과 건축 분야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들이 만들어졌다. 아테네는 그리스의 여러 도시와 섬들로 이루어진 델로스 동맹의 맹주가 되었다. 스파르타를 맹주로 하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에서는 아테네가 우세해지는 것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에 결국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은 기원전 431년에서 404년까지 계속되었으며 아테네인들은 스파르타인들에게 참패를 당하였다. 스파르타의 엄격한 통치는 기원전 371년경까지 계속되었으며 그 후에는 테베가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아테네는 여전히 지중해 지역에서 문화와 철학의 중심지로 남아 있었지만, 그리스의 정세는 정치적 쇠퇴기를 맞았다. 결국 기원전 338년에 필리포스 2세가 통치하는 신흥 강국 마케도니아가 그리스를 정복하였으며 그리스는 마케도니아의 지배 아래 통일이 이루어졌다.
알렉산더 대왕 통치하의 그리스 일찍이 기원전 6세기에 다니엘은 메디아·페르시아 제국이 그리스에 의해 멸망될 것임을 예고하는 예언적 환상을 받았다. 필리포스의 아들 알렉산더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교육을 받았으며 필리포스가 암살되자 그리스어를 말하는 민족들의 수호자가 되었다. 기원전 334년에 알렉산더는 페르시아가 소아시아 서부 해안에 있는 그리스의 도시들을 공격한 데 대한 보복을 개시하였다. 그는 소아시아 전역뿐 아니라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와 멀리 인도까지 메디아·페르시아 제국 전역을 번개 같은 속도로 정복하여 다니엘 8:5-7, 20, 21에 묘사된 예언을 성취시켰다. (단 7:6 비교) 기원전 332년에는 유다를 지배하게 됨으로써 그리스는 이제 이스라엘 민족과 관련하여 연이어 등장한 세계 강국들 가운데 다섯 번째 강국—앞선 네 개의 세계 강국은 이집트, 아시리아, 바빌론, 메디아·페르시아였다—이 되었다. 기원전 328년에 알렉산더의 정복은 완결되었으며 그 후 다니엘의 환상의 나머지 부분이 성취되었다. 알렉산더가 기원전 323년에 바빌론에서 죽은 다음, 예언된 대로 그의 제국은 영토가 네 부분으로 나뉘어졌는데, 그중 어느 것도 원래의 제국에 비길 만큼 강성하지는 못했다.—단 8:8, 21, 22; 11:3, 4. 2권, 334면 지도; 알렉산더 1번 참조.
하지만 알렉산더는 죽기 전에 그리스의 문화와 그리스어를 광대한 영토 전역에 소개하였다. 정복한 많은 지역에는 그리스의 식민 도시들이 세워졌다. 이집트에는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가 세워져 아테네에 필적하는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하여 지중해와 중동의 많은 지역에서는 헬레니즘에 동화되는 현상(즉 그리스화)이 시작되었다. 그리스 공통어 곧 코이네는 많은 나라 출신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국제 통용어가 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 언어를 사용하여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학자들은 히브리어 성경의 번역판인 「칠십인역」을 만들었다. 나중에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은 코이네로 기록되었으며, 그 언어가 국제적으로 널리 사용된 덕분에 그리스도교의 좋은 소식은 지중해 지역 전역으로 급속하게 퍼져 나갔다.—그리스어 참조.
헬레니즘에 동화되는 현상이 유대인들에게 미친 영향 그리스가 알렉산더의 장군들에 의해 나뉘어졌을 때, 유다는 이집트를 차지한 프톨레마이오스의 통치 영역과, 시리아를 차지한 셀레우코스 왕조의 영토 사이에 놓인 경계 국가가 되었다. 유다는 처음에는 이집트의 지배를 받았지만 기원전 198년에는 셀레우코스 왕조가 그 지역을 빼앗았다. 유다를 헬레니즘 문화권 내에서 시리아와 하나로 만들기 위해 그리스의 종교와 언어와 문학과 의상 등 모든 것이 유다에서 장려되었다.
유대인의 영토 전역에는 그리스의 식민 도시들이 세워졌는데, 그중에는 사마리아(그 후 세바스테로 불림), 악고(프톨레마이스), 벳-스안(스키토폴리스) 등에 세워진 식민지들과 또한 요르단 강 동쪽으로 이전에 사람이 살지 않던 지역에 세워진 몇 개의 식민지들이 있었다. (데카폴리스 참조) 예루살렘에는 경기장이 설립되어 유대인 젊은이들을 끌어들였다. 그리스의 경기 대회들은 그리스의 종교와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경기장은 성경 원칙에 대한 유대인들의 충실성을 부패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이 기간에 헬레니즘은 제사직에까지 깊숙이 침투하였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이전에는 이질적으로 여겨졌던 신앙들이 유대인들에게 점차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데, 그러한 신앙 중에는 인간 영혼이 불멸이라는 이교 가르침이나 사후에 고초를 겪는 곳인 저승이 있다는 사상 등이 있었다.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우스 숭배를 시작함으로 그곳을 더럽혔을 때(기원전 168년), 유대인이 헬레니즘에 동화되는 현상은 극에 달하였으며, 그로 인해 마카베오 전쟁이 일어났다.
유대인 거주 구역이 도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였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도 헬레니즘에 동화되는 현상은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알렉산드리아 참조)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 중에는 그리스 철학이 인기 있다는 이유로 그 철학에 혹한 사람들도 있었다. 일부 유대인 저술가들은 유대인의 신앙을 당시의 그러한 “현대적인 사조”에 맞게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당시 그리스의 철학 사상들이 실은 히브리어 성경에 비슷한 형태로 이미 나와 있었다는 견해나 심지어 그러한 사상들이 히브리어 성경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견해를 입증하려고 하였다.
그리스 국가들에 대한 로마의 통치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알렉산더의 제국이 네 부분으로 나뉘었을 때 그중 한 부분)는 기원전 197년에 로마인들에게 넘어갔다. 그 이듬해에 로마의 장군은 그리스의 모든 도시에 “자유”를 공포하였다. 이것은 전혀 조공을 요구하지 않을 것임을 의미하였다. 하지만 로마는 자국의 요청에 전적으로 협조해 줄 것을 기대하였다. 반(反)로마 감정이 차츰 고조되었다. 마케도니아는 로마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였지만 기원전 168년에 또다시 패하였고 약 20년 후에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기원전 146년에는 고린도(코린트)가 주도하는 아카이아 동맹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로마군은 그리스 남부 지역으로 진격하여 고린도를 황폐시켰다. “아카이아” 속주가 형성되었으며 기원전 27년에는 그리스 남부와 중부의 모든 지역을 포함하게 되었다.—행 19:21; 로 15:26. 아카이아 참조.
로마의 통치 기간은 그리스의 정치적·경제적 쇠퇴기였다. 오로지 그리스의 문화만이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정복자인 로마인들에 의해 폭넓게 수용되고 있었다. 로마인들은 그리스의 조각상들과 문학을 수입하는 데 열을 올렸다. 심지어 신전 전체를 해체하여 배에 실어 이탈리아로 가져오기도 하였다. 로마의 많은 젊은이들은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학문의 중심지들에서 교육을 받았다. 한편, 그리스는 자국 내로 관심을 돌려 과거에 집착하였으며 옛것을 애호하는 태도를 발전시켰다.
기원 1세기의 “헬레네스”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봉사하던 당시 그리스에서 출생한 사람들이나 그리스계 사람들은 여전히 헬레네스(단수형은 헬렌)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그리스인이 아닌 사람들을 가리켜 “바르바로이”라고 불렀는데, 그 말은 단순히 타국인이나 외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와 비슷하게 사도 바울 역시 로마 1:14에서 “그리스인”과 “바르바로이”를 대조한다.—바르바로이 참조.
하지만 바울이 헬레네스라는 말을 좀 더 넓은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그는 유대인과 대조되는 사람들로 헬레네스 곧 그리스인들을 언급하는데, 이 경우에 헬레네스는 모든 비유대 민족을 대표한다. (로 1:16; 2:6, 9, 10; 3:9; 10:12; 고첫 10:32; 12:13) 일례로, 고린도 첫째 1장에서 바울은 “그리스인”(22절)이라는 말을 “이방 사람들”(23절)이라는 말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는 것 같다. 바울이 그렇게 한 것은 분명 로마 제국 전역에서 그리스의 언어와 문화가 널리 알려져 있고 탁월한 위치를 차지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인들은 비유대 민족들 가운데 ‘으뜸가는’ 민족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을 비롯한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의 필자들이 헬레네스를 매우 막연한 의미로 사용한 나머지 그들이 사용한 헬렌이라는 말이 일부 주석가들이 암시하는 것처럼 단지 이방인들만을 가리키게 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헬레네스가 특정한 민족을 가리키는 데에도 사용되었음을 보여 주는 예로, 바울은 골로새 3:11에서 “그리스인”을 “타국인[바르바로스]”이나 “스키타이 사람”과 구별하여 언급하고 있다.
앞서 설명한 바와 일치하게, 그리스어 학자인 한스 빈디슈는 이렇게 말한다. “[헬렌이라는 말이] ‘이방인’을 의미했다는 견해는 ··· 헬레니즘에 동화된 유대교에서나 신약에서 입증할 수 없다.” (「신약 성서 신학 사전」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 킷텔 편, G. 브로밀리 역편, 1971년, 2권, 516면) 하지만 그는 그리스 저술가들이 때로는 헬렌이라는 말을 그리스의 언어와 문화를 받아들인 다른 종족 사람들—“헬레니즘에 동화”된 사람들—을 가리킬 때에도 사용하였다는 얼마의 증거를 제시한다. 따라서 성서에서 헬레네스 곧 그리스인들을 언급하는 부분들을 고려할 때는 많은 경우, 그들이 출생이나 혈통 때문에 그처럼 헬레네스로 표현된 것이 아닐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음을 감안해야 한다.
시로페니키아 주민으로 딸이 예수에 의해 고침을 받았던 여자는 “그리스 사람”이었는데(막 7:26-30), 그 여자가 그런 식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그리스계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유월절 때 “숭배하러 올라온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인들”은 예수를 만나 보기를 청하였는데, 그들은 유대교 개종자가 된 그리스인들이었던 것 같다. (요 12:20. 예수께서 32절에서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그분에게로 이끄는 것’에 관해 하신 예언의 말씀에 유의) 디모데의 아버지와 디도는 모두 헬렌으로 불렸다. (행 16:1, 3; 갈 2:3) 이것은 그들이 그리스계 사람이었음을 의미할 수 있다. 하지만 일부 그리스 저술가들이 헬레네스라는 말을 그리스인은 아니지만 그리스어를 사용하고 그리스 문화권에 있던 사람들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주장을 고려할 때, 그리고 앞서 살펴본 것처럼 바울이 그 말을 대표 격의 의미로 사용한 점을 고려할 때, 그 사람들은 후자의 의미에서 그리스인이었을 가능성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인인 그 여자가 시로페니키아에 있었다는 사실이나, 디모데의 아버지가 소아시아의 리스트라에 살았다는 사실, 혹은 디도가 시리아의 안티오크에 살았던 것 같다는 사실이 그들이 그리스 민족이나 그리스계 사람이 아니라고 할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그리스의 식민 도시 개척자들과 이주자들은 그 모든 지역에도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자신이 “나를 보내신 분에게로 가”게 될 것이며 “내가 있[을] 곳에 여러분은 올 수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시자 그 유대인들은 자기들끼리 이렇게 말하였다. “이 사람이 어디로 가려고 하기에 우리가 그를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일까? 그리스인들 가운데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에게 가서 그리스인들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요 7:32-36) 그들이 “그리스인들 가운데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이라는 말을 통해 의미한 대상은 문자 그대로 그러한 사람들 즉 바빌론에 정착한 유대인들이 아닌 멀리 서쪽에 있는 그리스의 도시들과 영토 전체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이었던 것 같다. 바울의 선교 여행에 관한 기록에서는 그러한 그리스 지역들에 상당히 많은 유대인 이민자들이 살고 있었음을 밝혀 준다.
그리스의 도시들인 베레아와 고린도에서 있었던 사건들에 대해 설명하는 사도행전 17:12과 18:4에 나오는 사람들은 그리스계 사람들임이 분명하다. 마케도니아의 데살로니가(행 17:4)와, 소아시아 서부 해안에 위치해 있으면서 오랫동안 그리스의 식민지였고 한때는 이오니아의 수도이기도 했던 에베소(행 19:10, 17; 20:21), 그리고 심지어 소아시아 중부의 이코니온에 살았던 “그리스인들”의 경우도 그러할 수 있다. (행 14:1) 이 성구들 중 일부에 ‘유대인과 그리스인’과 같은 형태로 두 부류의 사람들이 함께 나오는 것을 보면, 바울처럼 누가도 이 성구들에서 “그리스인들”을 비유대인들을 전체적으로 대표하는 사람들로 언급한 것일 수도 있지만 사실, 지리적으로 볼 때 그리스의 원래 세력권 밖에 있던 곳은 이코니온뿐이었다.
헬레니스트 사도행전에는 일부 성경에서 “헬레니스트”로 번역하는 헬레니스타이(단수형은 헬레니스테스)라는 또 다른 표현이 나온다. 이 표현은 그리스인들의 문헌이나 헬레니즘에 영향을 받은 유대인들의 문헌에 나오지 않는 말이다. 따라서 그 의미는 완전히 밝혀져 있지 않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전 편집자들은 이 표현이 사도행전 6:1과 9:29에 나오는 “그리스어를 하는 유대인들”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이 두 성구 가운데 첫 번째 성구에서 헬레니스타이는 “히브리어를 하는 유대인들”(에브라이오이[웨스트콧과 호트 그리스어 본문])과 대조되어 있다. 기원 33년 오순절 날에는 여러 지역에서 온 유대인들과 개종자들이 참석해 있었다. 그처럼 그리스어를 하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많이 왔었다는 사실을 지지하는 증거로서 예루살렘의 오벨(오펠) 언덕에 있는 “테오도투스 비문”이 있다. 그리스어로 기록된 그 비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베테누스의 아들이자 제사장이며 또한 회당장의 손자이고 회당장의 아들이며 회당장인 테오도투스는 율법을 낭독하고 계명을 가르칠 회당을 만들었으며, 외국에서 온 사람들에게 필요한 숙소를 제공하기 위해 여관과 방과 저수조를 (만들었는데) (그 회당은) 그의 조상들과 장로들과 시모니데스가 기초를 놓은 것이었다.” (「성서 고고학」, 어니스트 라이트, 1962년, 240면) 일부 학자들은 이 비문이 “자유롭게 된 자의 모임[회당]”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회당에 속한 사람들 중에는 스데반이 순교당한 것에 대한 책임이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행 6:9; 자유롭게 된 자, 자유인 참조.
하지만 사도행전 11:20에서 시리아 안티오크의 일부 주민들과 관련하여 나오는 헬레니스타이의 변화형은, 그리스어를 하는 유대인들을 가리키기보다는 “그리스어를 하는 사람들” 전체를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키레네와 키프로스의 그리스도인들이 오기 전에는 안티오크에서 말씀을 전하는 일이 “오직 유대인들”을 상대로 이루어졌다는 내용에 그 점이 나타나 있는 것 같다. (행 11:19) 따라서 그 성구에 언급된 헬레니스타이는 그리스어를 사용하고 (또한 아마도 그리스의 관습에 따라 생활하며) 헬레니즘에 동화되어 있는, 여러 나라 출신의 사람들을 의미할 수 있다.—안티오크 1번; 키레네, 키레네 사람 참조.
사도 바울은 이 차 선교 여행과 삼 차 선교 여행에서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를 방문하였다. (행 16:11–18:11; 20:1-6) 그는 마케도니아의 주요 도시들인 빌립보와 데살로니가와 베레아에서 그리고 아카이아의 큰 도시들인 아테네와 고린도에서 봉사하는 데 시간을 바쳤다. (행 16:11, 12; 17:1-4, 10-12, 15; 18:1, 8) 그는 이 차 선교 여행 때 고린도에서 봉사하는 데 일 년 육 개월을 바쳤는데(행 18:11), 그 기간에 그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두 통의 편지를 썼다. 그는 그 기간에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도 쓴 것 같다. 또한 삼 차 선교 여행에서는 로마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고린도에서 썼다. 로마에서 첫 번째로 투옥된 이후에 바울은 기원 61년에서 64년 사이에 다시 한 번 마케도니아를 방문한 것 같다. 그는 디모데에게 보내는 첫째 편지를 아마도 그곳에서 썼을 것이며, 디도에게 보내는 편지 역시 그곳에서 썼을 가능성이 있다.
서력기원의 처음 여러 세기 동안 내내 그리스 문화는 로마 제국에 계속 영향을 미쳤으며 그리스는 자국의 지적 위업을 보존할 수 있었다. 아테네의 경우는 로마 제국 내의 유수한 대학들 가운데 하나의 소재지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교의 일부 관행과 가르침을 그리스도교와 융합시키려고 노력하였으며, 그의 행보로 인해 그러한 융합 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는 발판이 놓였다. 이로 인해 그리스는 그리스도교국의 일부가 되었다.
오늘날 그리스는 영토가 13만 1957제곱킬로미터이며 인구는 1075만 명(2000년 추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