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우스
(Darius)
성서 기록에서 이 이름은 세 왕에게 사용되는데, 그중 한 사람은 메디아 사람이고 나머지 두 사람은 페르시아 사람이다. 일부 학자들은 “다리우스”가 적어도 메디아 사람 다리우스의 경우에는 한 개인의 이름으로보다는 칭호나 왕위에 올랐을 때 부여된 이름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1. 메디아 사람 다리우스. 페르시아 사람 키루스의 군대가 바빌론을 정복한 후 칼데아 왕인 벨사살의 왕국을 넘겨받은 사람. 당시 다리우스는 예순두 살쯤 되었다. (단 5:30, 31) 그는 “메디아 사람의 씨인 아하수에로의 아들”로도 설명되어 있다.—단 9:1.
다리우스는 행정력을 발휘하여 제국의 영토 전역에서 일하도록 120명의 태수를 임명하였고, 또한 태수들을 관할하는 세 명의 고위 관리들을 임명하여 왕의 권익을 위해 일하게 하였다. 그러한 마련에서 주로 염두에 둔 것은 재정적인 문제였을 수 있다. 태수들의 주된 임무 가운데 하나가 왕실의 재원을 위해 세금과 조공을 징수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라 4:13 비교) 세 명의 고위 관리 가운데 한 명으로 임명된 사람은 다니엘이었는데, 그는 다른 고위 관리들이나 태수들 위에 매우 돋보였기 때문에 다리우스는 그를 총리로 삼을 생각을 하였다. 다른 두 고위 관리는 태수들과 결탁하여 다니엘을 합법적으로 함정에 빠뜨릴 방도를 생각해 냈다.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시기심 때문이었던 것 같지만, 아마도 다니엘이 청렴결백하였기 때문에 초래되었을, 부패와 독직이 억제되는 상황에 대한 반감 때문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왕 앞에 무리 지어 나아간 그들은 한 칙령을 제출하여 왕이 서명해 줄 것을 탄원하는데, 외견상 그 칙령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정부 관리들(하지만 다니엘은 언급되어 있지 않음)이 찬성한 것이었다. 그 칙령은 30일 동안 다리우스 외에는 “어느 신이나 사람에게 청원”하는 것을 금하는 명령이었다. 위반하는 사람에 대한 처벌로서 제안된 것은 사자 굴에 던져 넣는 것이었다. 어느 모로 보나 그 포고령은 타국인인 다리우스가 그 나라의 왕이라는 새롭게 얻은 지위를 공고하게 다지는 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또한 그 조처를 옹호하는 정부 관리들의 충성과 지지가 표명된 것으로 생각되었다.—단 6:1-3, 6-8.
다리우스는 그 포고령에 서명하였으며 오래지 않아 그 결과를 직면하게 되었다. 그는 그 결과를 통해 이 칙령을 만든 숨은 의도를 깨달았을 것이다. 다니엘은 여호와 하느님께 계속 기도하였기 때문에 이 칙령을 위반한 첫 번째 사람으로(행 5:29 비교) 사자 굴에 던져졌다. 다리우스는 바꿀 수 없는 그 법규가 시행되지 못하게 할 방도를 찾으려고 진실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다리우스는 다니엘의 생명을 지켜 주실 수 있는 다니엘의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나타냈다. 그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단식한 후 사자 굴로 급히 달려갔으며, 다니엘이 여전히 살아 있고 해를 입지 않은 것을 알고는 기뻐하였다. 그 후 다리우스 왕은 정당한 보복 조치로서, 다니엘을 고발한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사자 굴에 던져 넣었을 뿐 아니라 제국 전역에 “내 왕국의 모든 영토에서, 사람들은 다니엘의 하느님 앞에서 떨고 두려워해야 한다”는 포고령을 내리기까지 하였다.—단 6:9-27.
역사 기록에서 알려 주는 바에 의하면, 고대로부터 메소포타미아의 왕들은 신으로 간주되었으며 또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숭배하게 하였다. 많은 주석가들은, 다리우스의 칙령에 나오는 “청원”에 대한 제재 규정은 순전히 종교적인 성격의 청원과 관련이 있는 것이며 일반적인 종류의 간청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빌론에 “사자 굴”이 있었다는 사실은 오리엔트 지역 통치자들에게는 흔히 야생 동물원이 있었음을 알려 주는 고대 비문들의 증거와 부합된다. 「손시노 성서 책들」(Soncino Books of the Bible, ‘다니엘, 에스라, 느헤미야’, 49면)에서는 이 점에 대해 평하면서 다음과 같이 알려 준다. “페르시아 사람들은 그러한 동물들을 동물원에서 키우는 관습을 아시리아의 왕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A. 코언 편, 런던, 1951년.
다니엘 6장 이후에서는 다리우스가 그의 통치 “제일 년”에 있었던 사건들과 관련해서만 더 언급된다. 그해에 다니엘은 유다의 황폐와 관련된 70년의 기한을 “분별”하였으며 예언적인 70주와 메시아의 오심에 관한 계시를 받았다. (단 9:1, 2, 24-27) “북방 왕”과 “남방 왕”의 경쟁을 묘사하는 환상을 다니엘에게 가져온 천사는 자신이 앞서 메디아 사람 다리우스 제일 년에 강하게 하는 자이자 요새인 천사로도 행동하였다고 밝혔다. (단 11:1, 6) 일반적으로 주석가들은 이 천사가 다리우스에게 그러한 지원을 베푼 것으로 생각해 왔지만, 그러한 도움이 미가엘에게 베풀어졌다는 것이 좀 더 타당성 있어 보이는 견해이다. 미가엘은 앞 구절(단 10:21)에서 바로 이 천사와 함께 싸우는 자로 언급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목적이 성취되지 못하게 막으려는 ‘페르시아의 군왕’이라는 악귀와 싸우는 일에서 천사들 간의 협조와 협력이 있었던 것이다.—단 10:13, 14.
메디아 사람 다리우스의 신분 성서를 제외한 다른 비문들에는 “메디아 사람 다리우스”가 나오는 곳이 전혀 없으며 요세푸스(기원 1세기의 유대인 역사가) 이전에 살았던 고대의 세속 역사가들도 그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한 사실을 근거나 구실로 삼아 많은 비평가들은 메디아 사람 다리우스가 가공인물이라고 주장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바빌론 정복 후 얼마 있지 않아 캄비세스(2세)가 그의 아버지 키루스에 의해 “바빌론 왕”이 되었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캄비세스는 바빌론에서 열리는 “신년” 축제 때 매년 아버지를 대리하여 참석하였던 것 같지만, 다른 때에는 시파르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설형 문자 기록의 연구를 토대로 한 조사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캄비세스는 기원전 530년 니산월 1일이 되어서야 “바빌론 왕”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 것 같다. 그리하여 그는 당시 원정을 떠난 키루스와 공동 통치자가 되었는데, 그 원정으로 인해 키루스는 죽음을 맞게 되었다. 다리우스를 키루스의 아들 캄비세스 2세와 연관시키려는 시도들은 바빌론이 함락된 때 다리우스가 “예순두 살쯤” 되었다는 사실과도 부합하지 않는다.—단 5:31.
다리우스가 키루스 자신의 또 다른 이름이었을지 모른다는 견해는 다리우스가 “메디아 사람”이었으며 “메디아 사람의 씨”였다는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메디아 사람의 씨”라는 표현은 그의 아버지 아하수에로가 메디아 사람이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키루스는 분명하게 “페르시아 사람”으로 불렸으며, 그의 어머니는 일부 역사가들의 주장처럼 메디아 사람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의 아버지는 키루스 원통 비문에 의하면 페르시아 사람인 캄비세스 1세였다.—단 9:1; 6:28.
또 다른 학자들은 다리우스가 키루스의 “삼촌”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키루스의 “삼촌”이라고 하는 이 사람은 그리스의 역사가 크세노폰이 “아스티아게스의 아들 키아크사레스”로 설명한 사람이다. 크세노폰의 말에 따르면, 키아크사레스는 메디아 왕 아스티아게스의 왕위를 계승하였지만 나중에 자신의 딸과 메디아 왕국 전체를 자신의 조카 키루스에게 주었다. (「키로파이디아」, I, v, 2; VIII, v, 19) 하지만 (크세노폰과 거의 동시대에 살았던 그리스의 역사가들인) 헤로도토스와 크테시아스는 크세노폰의 설명과 상충되는 설명을 제시하는데, 헤로도토스는 아스티아게스가 아들이 없이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나보니두스 연대기에서는 키루스가 아스티아게스를 사로잡음으로 메디아 사람들을 다스릴 왕권을 획득하였다고 알려 준다. 뿐만 아니라 이처럼 다리우스를 키아크사레스 2세와 동일 인물로 생각하려면, 아스티아게스가 아하수에로로도 알려져 있었다는 가설이 필요할 것이다. 메디아 사람 다리우스는 “아하수에로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단 9:1) 따라서 그러한 견해에는 확증할 만한 증거가 없다.
메디아 사람 다리우스는 실제로 누구였는가?
좀 더 최근에 여러 참조 문헌에서는 다리우스가, 메디아·페르시아가 바빌론을 정복한 후 그 도시의 총독이 된 구바루(일반적으로 크세노폰의 「키로파이디아」에 나오는 고브리아스와 같은 것으로 생각되는 인물)였다는 주장을 지지해 왔다. 그러한 문헌들에서 제시하는 증거는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다.
나보니두스 연대기로 알려진 고대 설형 문자 기록에서는 바빌론의 함락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구티움의 총독 [우그바루]와 키루스의 군대는 전투도 없이 바빌론으로 입성하였다”고 알려 준다. 이어서 그 비문에서는 17일 후에 키루스가 그 도시로 입성한 것에 대해 이야기한 다음, “그의 총독 [구바루]가 바빌론에 (부)총독들을 임명하였다”고 알려 준다. (「고대 근동 문헌」 Ancient Near Eastern Texts, J. 프리처드 편, 1974년, 306면. 「메디아 사람 다리우스」 Darius the Mede, J. C. 화이트콤, 1959년, 17면 비교) “우그바루”라는 이름과 “구바루”라는 이름이 같지 않은 데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 이름들은 비슷해 보이지만, 설형 문자의 서체에서는 우그바루라는 이름의 첫 음절에 해당하는 기호가 구바루의 첫 음절에 해당하는 기호와 상당히 다르다. 나보니두스 연대기에서는 구티움의 총독 우그바루가 바빌론이 정복된 지 몇 주 내에 죽었다고 이야기한다. 다른 설형 문자 기록에서 알려 주는 바에 따르면, 구바루는 그 이후로도 계속 살아 있었고, 바빌론 도시뿐만 아니라 바빌로니아 전역과 “강 저편 지역”의 총독으로 14년간 재임하였는데, 이 “강 저편 지역”에는 시리아와 페니키아와 팔레스타인에서 아래로는 이집트의 국경에 이르는 지역이 포함되었다. 따라서 구바루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 전체에 걸쳐 있는 지역, 다시 말해, 기본적으로 바빌론 제국의 영토와 같은 지역의 통치자였다. 기억할 점은, 메디아 사람 다리우스는 “칼데아 사람들의 왕국을 다스리는 왕”으로는 언급되어 있지만(단 5:31; 9:1), 키루스 왕을 가리키는 정식 칭호인 “페르시아 왕”으로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단 10:1; 라 1:1, 2; 3:7; 4:3) 따라서 구바루가 다스린 지역은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다리우스가 다스린 지역과 같을 것이다.
구바루는 어느 기록에서도 “다리우스”로 나오지 않기 때문에, “다리우스”가 그의 칭호였거나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부여된 이름이었다는 견해도 제시되고 있다. W. F. 올브라이트는 이렇게 말한다. “내 생각에는, 키루스가 동방 원정을 떠나고 없는 동안 고브리아스[구바루]가 실제 왕의 지위에 있었고 동시에 ‘다리우스’—아마도 고대 이란 왕의 칭호—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견해가 개연성이 높아 보인다.” (「성서 문헌지」 Journal of Biblical Literature, 1921년, 40권, 112면, 각주 19) 어떤 설형 문자 서판에서도 구바루를 “왕”으로 설명하지는 않는다는 이의에 대해, 구바루가 다리우스 왕이었다는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설형 문자 서판들에서는 왕이라는 칭호가 벨사살에게 사용되지 않는데도 “나보니두스 운문 기록”으로 알려진 설형 문자 문서에서는 분명하게 나보니두스가 자신의 아들에게 “왕권을 맡겼다”고 말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와 관련하여 화이트콤 교수는 다니엘 6:1, 2에서 다리우스가 “왕국에 백이십 명의 태수를 세웠”다고 알려 주는 것처럼, 구바루 역시 나보니두스 연대기에 의하면 키루스의 지역 총독으로서 “바빌론에 (지역 총독들을) ··· 임명하였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화이트콤은 구바루가 총독들을 다스리는 총독으로서 부하들에 의해 왕으로 불렸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메디아 사람 다리우스」, 31-33면) 또한 구바루(고브리아스)가 다스린 광대한 지역에 대해 언급하면서 A. T. 옴스테드는 이렇게 말한다. “광대하게 펼쳐진 이 비옥한 나라 전역에서 고브리아스[구바루]는 독립 군주나 다름없이 통치하였다.”—「페르시아 제국사」(History of the Persian Empire), 1948년, 56면.
위의 내용과 일치하게, 일부 학자들은 메디아 사람 다리우스가 실은 페르시아 제국 최고의 군주인 키루스의 부하로서 칼데아 사람들의 왕국을 다스린 부왕(副王)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A. T. 옴스테드는 이렇게 말한다. “바빌론 신민들을 대할 때 키루스는 ‘바빌론의 왕, 나라들의 왕’이었다. 그런 식으로, 오랫동안 이어져 온 군주의 대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고 주장함으로 그는 그들의 허영심을 채워 주었고 그들의 충성을 얻었다. ··· 하지만 그 왕이 떠난 다음에 왕권을 대행한 사람은 태수 고브리아스였다.” (「페르시아 제국사」, 71면) 성서에 나오는 다리우스가 정말로 그러한 대리인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리우스가 “그 왕국을 받았[다]”고 묘사되어 있다는 사실이나 그가 “칼데아 사람들의 왕국을 다스리는 왕이 된” 사람 즉 왕으로 앉혀진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증거로 지적하면서 그가 정말로 그보다 우월한 어떤 군주의 부하였다고 말한다.—단 5:31; 9:1. “지극히 높으신 분”이신 여호와 하느님께서 “거룩한 자들”에게 왕국을 주신다고 알려 주는 단 7:27 비교.
구바루에 관해 입수할 수 있는 정보들이 여러 면에서 다리우스에 관한 정보들과 유사해 보이고 다리우스가 키루스 아래에 있던 부왕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추정이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역사 기록에는 구바루의 국적이나 그의 혈통에 대해서 그가 “메디아 사람”이었다거나 “아하수에로의 아들”이었다는 정도까지 알려 주는 내용이 없다. 또한 그가 다니엘 6:6-9에 설명되어 있는 성격의 포고령이나 칙령을 내릴 수 있을 만큼의 왕권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알려 주는 역사 기록도 없다. 더 나아가, 성서 기록에서는 다리우스가 바빌론을 다스린 기간이 그리 오랜 기간이 아니었으며 그 후에는 키루스가 바빌론의 왕권을 갖게 되었음을 알려 주는 것 같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이 동시에 통치하였고 다니엘은 다리우스가 바빌론에서 탁월한 위치에 오르게 된 해에 대해서만 특별히 언급한 것일 수도 있다. (단 6:28; 9:1; 대둘 36:20-23) 구바루는 14년간 재임하였다.
역사 속에서 어떤 인물이었는지가 불확실한 이유 물론 성서 기록이 참인지의 여부가 세속 자료들의 증거에 따라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성서에 기록된 사람들이나 사건들이 한때는 비평가들에 의해 ‘역사와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배척당했다가 역사와 일치한다는 점이 나중에 가서 부인할 여지 없이 증명된 경우들이 많았으므로, 하느님의 말씀의 연구생들은 반대 비평을 지나치게 중시할 필요가 없다. (벨사살; 사르곤 참조) 중동에서 발굴된 수많은 설형 문자 서판들을 통해 밝힐 수 있는 역사는 여전히 이러저러한 결함과 공백이 있는 매우 불완전한 것이다. 또 다른 출처인 고대의 세속 역사가들의 경우, 그들의 저작물의 사본들은—지금까지도 (많은 경우 단편의 형태로) 남아 있지만—수가 적었고 대부분 그리스어로 기록되어 있었으며, 다니엘서의 사건들이 일어난 때로부터 1, 2세기 혹은 그 이상의 기간이 지나서 기록된 것들이다.
하지만 다리우스에 관한 내용이 바빌론의 기록에 나오지 않는 훨씬 더 설득력 있는 증거는 다니엘서 자체에 제시되어 있다. 다니엘서에서 알려 주는 바에 의하면, 다리우스는 다니엘을 정부의 고위직에 임명하였는데, 다른 고위 관리들은 이 일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 다니엘을 해하려던 음모는 실패로 돌아갔고 다리우스는 다니엘을 고발한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을 처형하였는데, 남아 있던 관리들은 이 일로 인해 아마도 적개심을 품게 되었을 것이다. 또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바빌론의 종교 지도자들은 왕국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니엘의 하느님 앞에서 두려워하’도록 명령하는 다리우스의 포고령 때문에 필시 많은 불만과 분노를 느꼈을 것임이 분명하다. 틀림없이 서기관들은 앞서 언급된 부류의 사람들에게 지시를 받는 입장이었을 것이므로 그들의 기록이 나중에 변조되고 다리우스에 관한 증거가 인멸된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당시의 역사에서 그와 비슷한 조처들이 취해졌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메디아·페르시아가 이중 국가의 형태로 통치하였다고 알려 주는 성서의 내용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 (단 5:28; 8:3, 4, 20) 세속 역사에서는 키루스와 페르시아 사람들을 월등하게 많이 부각시키지만, 성서 기록에서 알려 주는 바에 의하면, 메디아 사람들은 페르시아 사람들과 계속적으로 동반자 관계에 있었던 것 같으며 법률도 “메디아 사람과 페르시아 사람”의 법으로 계속 존속하였다. (단 6:8; 더 1:19) 메디아 사람들은 바빌론을 무너뜨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사 13:17-19) 바빌론을 공격할 자들 가운데 “메디아 사람들의 왕들[복수형]”도 있을 것이라고 예레미야(51:11)가 예언한 점에도 유의해야 한다. 다리우스는 그러한 왕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수 있다.
2. 다리우스 히스타스피스. 다리우스 대왕 혹은 다리우스 1세(페르시아 사람)로도 불렸다. 이 왕은 페르시아 제국의 뛰어난 통치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다리우스는 자신을 “히스타스페스의 아들이며 아케메네스 왕가에 속한 사람이며 페르시아 사람이자 페르시아 사람의 아들이며 아리아인의 후예인 아리아인”이라고 묘사한다. (「페르시아 제국사」, 122, 123면) 따라서 그는 자신이 키루스 대왕과 가계는 다르지만 그와 같은 조상에서 나온 왕실 혈통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기원전 522년에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에서 돌아오다가 죽자 페르시아의 왕위는 잠시 그의 형제인 바르디야(혹은 사제 집단인 마기에 속한 가우마타라는 인물이었을 수도 있음)가 차지하였다. 다리우스는 다른 페르시아 귀인 여섯 명의 도움으로 왕위에 있던 사람을 죽이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이 사건을 다리우스의 관점에서 설명한 것이 한 거대한 비문에 세 가지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 다리우스는 그 비문을 베히스툰에 있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새겼는데, 이 절벽이 마주하고 있는 평야에는 바그다드에서 테헤란에 이르는 주요 대상 교역로가 뻗어 있다. 그 비문에 따르면, 가우마타는 왕위 찬탈자로서, 살해된 캄비세스의 형제로 행세하였다. 대부분의 현대 학자들은 (“이것은 참되고 거짓이 아니다”라는 다리우스의 보증이 반복적으로 나오는) 이 기록을 기본적으로 사실에 기초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다리우스가 “대단한 거짓말쟁이”였으며 증거들이 밝혀 주는 바에 의하면 실제 왕위 찬탈자는 바로 그였다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다. 아무튼 다리우스는 왕권을 손에 넣자 제국 곳곳에서 일어나는 반란들을 해결해야 하였는데, 그는 그 후 2년을 영토 전역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무리들을 진압하면서 보낸 것으로 생각된다. 페르시아의 지배에서 벗어났던 이집트는 기원전 519-518년경 다리우스에 의해 다시 정복되었다. 그 후 그는 제국의 경계를 동쪽으로는 인도까지 그리고 서쪽으로는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까지 넓혔다. 그는 또한 제국 전역의 행정 조직을 효율적으로 개편하고, ‘선한 규례 규정’이라는 제국의 법전을 만들었으며, 이집트의 나일 강과 홍해를 잇는 운하를 다시 개통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다리우스 히스타스피스는 성서 기록에서 특히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과 관련하여 등장한다. 성전의 기초는 기원전 536년에 놓였지만 재건 공사는 기원전 522년에 금지되었으며 “다리우스 통치 제이 년[기원전 520년]까지 중단된 채로 있었다.” (라 4:4, 5, 24) 기원전 520년에 예언자 학개와 스가랴는 건축을 재개하도록 유대인들을 고무하였으며 그리하여 공사는 다시 진척되었다. (라 5:1, 2; 학 1:1, 14, 15; 슥 1:1) 이로 인해 유프라테스 강 서쪽 지역에서 제국의 이해관계를 맡아서 대행하는 총독 닷드내를 비롯한 관리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에게 편지를 보내는 일이 있게 된다. 이 편지에서는 다리우스에게 그 건축 공사에 대해 알렸고, 그 공사가 합법적이라는 유대인들의 주장에 대해 설명하였으며, 왕실 문서 보관소를 조사하여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 문서가 있는지 살펴볼 것을 청하였다. (라 5:3-17) 유대인들의 진술 내용에서는 칼데아 사람 느부갓네살(네부카드네자르)이 성전의 파괴자로서 취한 조처들과 대비하여 페르시아 사람 키루스를 성전 재건을 승인한 사람으로 언급하였는데, 이것은 다리우스에게 적절하고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다리우스는 그의 통치 초기에 반역자들이 각기 느부갓네살의 이름을 사칭하고(역사가들에 의하면, 느부갓네살 3세와 느부갓네살 4세로 불림) 나보니두스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면서 바빌론을 페르시아 제국에서 독립시키려고 일으킨 두 건의 반란 사건을 진압해야 했기 때문이다.
고대 메디아의 수도인 엑바타나에 있는 문서 보관소의 기록들을 공식적으로 조사한 결과 키루스가 작성한 문서가 발견되었다. 그래서 다리우스는 총독 닷드내에게 그를 비롯한 관리들이 그 성전 공사에 관섭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강’ 건너편의 세금을 모아 두는 왕의 보고”에서 건축 자금을 대주고 또한 희생 제물을 바치는 데 필요한 동물과 그 밖의 물품들을 공급해 주어야 한다고 명령하였다. 누구든지 왕의 명령을 어기는 자는 기둥에 매달리고 그의 집은 “공중 변소가 될 것”이었다.—라 6:1-12.
이러한 공식적인 협조와 예언자들의 계속적인 독려 덕분에(슥 7:1; 8:1-9, 20-23) 성전 공사는 진척되어 “다리우스 ··· 통치 제육 년, 음력 아달월 삼일에”(라 6:13-15. 기원전 515년 3월 6일에) 성공적으로 끝났다. 다리우스의 비문들에서는 그가 아후라 마즈다의 열렬한 숭배자였다고 알려 주므로, 기본적으로 그가 취한 조처는—여호와 하느님의 목적이 성취되는 데 기여하였고 분명 그분의 인도에 의한 것이었지만—변경할 수 없는 메디아·페르시아 법의 특성에 대한 존중심에 근거한 것이었으며 또한 다리우스 정부의 관용 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한 관용적인 태도에 대한 증거는 그가 만든 몇몇 비문들에도 나타나 있다.
후기 그리스 원정 새로운 세기가 시작될 무렵 이오니아에 있는 여러 그리스 도시들은 페르시아의 지배에 반기를 들었다. 그들의 반란이 평정되기는 하였지만 다리우스는 그처럼 반란을 일으킨 도시들을 지원한 데 대해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를 징벌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침공하는 일이 있게 되었는데, 그 결과는 기원전 490년에 마라톤 전투에서 다리우스의 군대의 패배로 끝났다. 다리우스는 또다시 그리스 원정을 감행하기 위해 면밀한 준비를 하였지만 원정을 실행하지 못하고 기원전 486년에 사망하였다. 그의 뒤를 이은 사람은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였다.
3. 느헤미야 12:22에서는 “엘리아십과 요야다와 요하난과 얏두아의 날에는, ··· 페르시아 사람 다리우스의 재위 때까지” 부계 가문의 우두머리였던 레위 사람들을 기록하는 일이 있었다고 알려 준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엘리아십이 대제사장이었고(느 3:1) 또한 느헤미야가 두 번째로 그 도시에 왔을 무렵에는(아닥사스다[아르타크세르크세스] 32년[기원전 443년] 후) 요야다에게 결혼한 아들이 있었기 때문에(느 13:28), 위에 언급된 “다리우스”는 기원전 423년에서 405년까지 다스린 다리우스 오쿠스(노투스로도 알려져 있음)였을 것이다.
기원전 5세기 말의 것으로 추정되는 엘레판티네 파피루스 가운데서 발견된 한 편지에서는 “요하난”이 당시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이었다고 알려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