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세력 다툼을 벌이는 두 왕
1, 2. 우리가 다니엘 11장에 기록되어 있는 예언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경쟁 관계에 있는 두 왕이 총력을 다해 패권 다툼을 벌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처음에는 이 왕이, 다음에는 저 왕이 우위를 차지합니다. 이따금, 한 왕이 패권을 쥐고 통치하는 동안 다른 왕은 활동이 뜸한 경우도 있고, 다툼이 벌어지지 않는 기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다가 갑자기 전쟁이 돌발하여 다툼이 계속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드라마에 참여하는 인물들 가운데는, 시리아의 왕 셀레우코스 니카토르 1세, 이집트의 왕 프톨레마이오스 라고스, 시리아의 공주이면서 이집트의 여왕이 된 클레오파트라 1세,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 팔미라의 여왕 제노비아 등이 있습니다. 다툼이 끝나갈 때는 나치 독일, 공산권 국가들, 영미 세계 강국, 국제 연맹, 국제 연합 등도 관련되게 됩니다. 대단원의 막이 내려질 때는, 이 정치적 실체들 중 어느 누구도 예견하지 못한 일이 벌어집니다. 여호와의 천사는 약 2500년 전에, 예언자 다니엘에게 이 흥미진진한 예언을 알려 주었습니다.—다니엘 11장.
2 천사가 앞으로 등장할 두 왕 사이의 경쟁 관계를 상세히 밝혀 주는 것을 들을 때 다니엘은 틀림없이 가슴이 설레었을 것입니다! 이 드라마는 우리에게도 관심거리가 됩니다. 두 왕 사이의 세력 다툼은 우리 시대에까지도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예언의 첫 부분이 역사에 의해 참됨이 증명되는 것을 보게 되면, 이 예언적 기록의 마지막 부분도 틀림없이 성취될 것이라는 우리의 믿음과 확신이 강화될 것입니다. 이 예언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면, 우리가 시간의 흐름 속에 어디에 있는지를 명확히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동하실 때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동안, 세력 다툼에서 중립 입장을 지켜야겠다는 우리의 결심도 강화될 것입니다. (시 146:3, 5) 그러므로 여호와의 천사가 다니엘에게 말할 때, 예리하게 주의를 기울여 잘 듣도록 합시다.
그리스 왕국을 대적함
3. 천사는 “메디아 사람 다리우스 제일 년에” 누구를 후원하였습니까?
3 천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메디아 사람 다리우스 제일 년[기원전 539/538년]에 그를 위하여 강하게 하는 자로서 그리고 요새로서 일어섰다.” (다니엘 11:1) 다리우스는 더는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닌데도, 천사는 그의 통치를 예언의 소식의 시작점으로 언급하였습니다. 이 왕은 다니엘을 사자 굴에서 끌어내라고 명령한 바로 그 왕입니다. 다리우스는 또한 자기의 신민 모두가 다니엘의 하느님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포고령을 내린 사람입니다. (다니엘 6:21-27) 하지만 이 천사가 후원자로서 일어서서 도와 준 것은 메디아 사람 다리우스가 아니라, 이 천사의 동료이자 다니엘의 민족의 군왕인 미가엘이었습니다. (비교 다니엘 10:12-14) 하느님의 천사는 미가엘이 메디아-페르시아의 악귀 군왕과 싸울 때, 그처럼 후원을 하였습니다.
4, 5. 예언된 페르시아의 네 왕은 누구였습니까?
4 하느님의 천사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보라! 페르시아에 앞으로 세 왕이 일어설 것이며, 네 번째 왕은 다른 모든 자보다 더 큰 부를 축적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부로 인하여 강해지자마자 그리스 왕국을 대적하여 모든 것을 일으킬 것이다.” (다니엘 11:2) 이 페르시아의 통치자들은 정확히 누구였습니까?
5 처음의 세 왕은 키루스 대왕, 캄비세스 2세, 다리우스 1세였습니다. 바르디야(혹은 왕위를 노린 가우마타)가 통치한 기간은 겨우 7개월이었으므로, 이 예언은 그의 단명한 통치는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기원전 490년에, 세 번째 왕 다리우스 1세는 그리스를 두 번째로 침공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페르시아 군대는 마라톤에서 참패하여 소아시아로 퇴각하였습니다. 다리우스는 그리스로 한 번 더 원정을 가려고 치밀하게 준비를 하였지만, 4년 후에 사망할 때까지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습니다. 그 일은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네 번째” 왕 크세르크세스 1세에게 맡겨졌습니다. 이 왕은 에스더와 결혼한 아하수에로입니다.—에스더 1:1; 2:15-17.
6, 7. (ㄱ) 네 번째 왕은 어떻게 “그리스 왕국을 대적하여 모든 것을 일으”켰습니까? (ㄴ) 크세르크세스가 그리스로 원정을 간 결과는 어떠하였습니까?
6 크세르크세스 1세는 “그리스 왕국을 대적하여”, 다시 말해서 각기 독립되어 있는 그리스의 국가들을 한 집단으로 여겨 그것을 대적하여 참으로 “모든 것을 일으”켰습니다. 「메디아 사람들과 페르시아 사람들—정복자들과 외교관들」(The Medes and Persians—Conquerors and Diplomats)이라는 책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크세르크세스는 야심에 찬 조정 신하들에게서 충동을 받아, 육로와 해로로 공격을 시작하였다.”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다른 어떤 원정도 이것에 비하면 하찮은 것처럼 보인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은 다음과 같이 알려 줍니다. 해군 병력은 “모두 합해서 51만 7610명이었다. 보병의 수는 170만 명이었고, 기병의 수는 8만 명이었다. 거기에다가 낙타를 타고 다니는 아랍 병사들과 병거를 타고 싸우는 리비아 병사의 수를 더해야 하는데, 내가 추산한 바로는 그들의 수가 2만 명이었다. 따라서 육상 병력과 해상 병력을 모두 합하면 전체 병력의 수는 231만 7610명이었다.”
7 완전히 정복해 버리고 말겠다는 계획을 세운 크세르크세스 1세는 기원전 480년에 거대한 군대를 이끌고 그리스로 진격하였습니다. 테르모필레에서 그리스가 펼친 지연 작전을 뚫고 나아간 페르시아 군대는 아테네를 황폐시켰습니다. 하지만 살라미스에서 참패를 당하였습니다. 기원전 479년에는, 플라타이아이에서 그리스가 또 한 차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 후 143년 동안, 크세르크세스의 뒤를 이어 페르시아 제국의 왕좌에 오른 일곱 명의 왕 중에 그리스와 전쟁을 벌인 왕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리스에 한 위력 있는 왕이 일어났습니다.
넷으로 나누어진 거대한 왕국
8. 어떤 “위력 있는 왕”이 일어섰으며, 그는 어떻게 “광범위한 지배권으로 통치”하게 되었습니까?
8 천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한 위력 있는 왕이 반드시 일어서서 광범위한 지배권으로 통치하고 자기 뜻대로 행할 것이다.” (다니엘 11:3) 기원전 336년에, 20세의 알렉산더가 마케도니아의 왕으로 “일어”섰습니다. 그는 실로 “위력 있는 왕”—알렉산더 대왕—이 되었습니다. 아버지 필리포스 2세의 계획으로 자극을 받은 알렉산더는 중동에 있는 페르시아의 속주들을 점령하였습니다.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을 건넌 알렉산더의 4만 7000병력은 다리우스 3세의 25만 대군을 가우가멜라에서 격퇴하여 산산이 흩어 버렸습니다. 그 결과, 다리우스가 도망하여 살해당하는 바람에 페르시아 왕조는 끝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리스가 세계 강국이 되었고, 알렉산더는 “광범위한 지배권으로 통치하고 자기 뜻대로 행”하였습니다.
9, 10. 알렉산더의 왕국이 그의 후손에게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예언이 어떻게 참됨이 증명되었습니까?
9 알렉산더의 세계 통치권은 단명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천사가 뒤이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일어서 있을 때에 그의 왕국이 깨어져서 하늘 사방으로 나뉠 것이나, 그의 후손에게 돌아가지도 않고, 그가 통치했던 때의 지배권 정도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왕국이 뽑혀서 이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다니엘 11:4) 알렉산더는 33세도 채 안 된 때인 기원전 323년에 바빌론에서 갑자기 병에 걸려 생명을 잃었습니다.
10 알렉산더의 거대한 제국은 “그의 후손”에게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의 동생인 필리포스 아리다이오스 3세는 7년도 채 통치하지 못하고 기원전 317년에 알렉산더의 어머니 올림피아스의 요청에 따라 살해당하였습니다. 알렉산더의 아들 알렉산더 4세는 기원전 311년까지 통치하다가, 그 해에 아버지의 장군 중의 한 사람인 카산드로스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알렉산더의 서자인 헤라클레스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통치하려고 해 보았지만 기원전 309년에 살해당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알렉산더 왕조는 끝나게 되었으며, ‘그의 지배권’은 그의 가족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11. 알렉산더의 왕국은 어떻게 “하늘 사방으로 나”뉘었습니까?
11 알렉산더가 죽자, 그의 왕국은 “사방으로 나”뉘었습니다. 그의 휘하에 있던 여러 장군이 자기들끼리 영토 쟁탈전을 벌였습니다. 애꾸눈 장군 안티고노스 1세는 알렉산더의 제국 전체를 자기 지배 아래 두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프리지아의 입소스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기원전 301년쯤에는, 알렉산더의 장군 네 사람이 자기들의 사령관이 정복한 거대한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카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를 통치하였습니다. 리시마코스는 소아시아와 트라키아에 대한 지배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셀레우코스 니카토르 1세는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를 획득하였습니다. 그리고 프톨레마이오스 라고스는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을 차지하였습니다. 예언의 말씀 그대로, 알렉산더의 거대한 제국은 네 개의 그리스 왕국으로 나뉘었습니다.
경쟁 관계에 있는 두 왕이 등장하다
12, 13. (ㄱ) 네 개의 그리스 왕국이 어떻게 두 개로 줄었습니까? (ㄴ) 셀레우코스는 시리아에 어떤 왕조를 세웠습니까?
12 카산드로스가 권력을 잡은 지 몇 년 안 되어 사망하는 바람에, 리시마코스가 기원전 285년에 그리스 제국 중 유럽에 속한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기원전 281년에는, 리시마코스가 셀레우코스 니카토르 1세와 싸우다가 전사하는 바람에, 대부분의 아시아 영토에 대한 지배권은 셀레우코스에게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기원전 276년에는, 알렉산더의 한 장군의 손자인 안티고노스 고나타스 2세가 마케도니아의 왕좌에 올랐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마케도니아는 로마에 의존하게 되었고, 결국 기원전 146년에 로마의 한 속주가 되었습니다.
13 이제 네 개의 그리스 왕국 중 단지 두 개의 왕국만 뚜렷한 존재로 남게 되었는데, 한 왕국은 셀레우코스 니카토르 1세가, 또 한 왕국은 프톨레마이오스 라고스가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셀레우코스는 시리아에 셀레우코스 왕조를 세웠습니다. 그가 창건한 도시들 가운데는 안티오크—시리아의 새 수도—와 셀레우키아 항구가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후에 안티오크에서 가르쳤는데, 예수의 추종자들은 그곳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사도 11:25, 26; 13:1-4) 셀레우코스는 기원전 281년에 암살당하였지만, 그의 왕조는 기원전 64년까지 통치하였는데, 그 해에 로마 장군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는 시리아를 로마의 한 속주로 만들었습니다.
14.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언제 이집트에 세워졌습니까?
14 네 개의 그리스 왕국 중에 가장 오래 지속된 왕국은 프톨레마이오스 라고스 즉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왕국이었습니다. 그는 기원전 305년에 왕이라는 칭호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가 세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기원전 30년에 로마에 함락될 때까지 이집트를 계속 통치하였습니다.
15. 네 개의 그리스 왕국에서 어떤 두 강력한 왕이 등장하였으며, 그들은 무슨 싸움을 시작하였습니까?
15 따라서 네 개의 그리스 왕국에서 두 사람의 강력한 왕이 등장하였습니다. 시리아를 통치한 셀레우코스 니카토르 1세와 이집트를 통치한 프톨레마이오스 1세였습니다. 이 두 왕을 필두로 다니엘 11장에 묘사된 “남방 왕”과 “북방 왕” 사이의 기나긴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천사는 이 왕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 두 왕의 신원과 국적이 여러 세기에 걸쳐 계속 바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사는 불필요한 세부점은 생략하고 세력 다툼과 관련 있는 통치자와 사건만 언급하였습니다.
세력 다툼이 시작되다
16. (ㄱ) 두 왕은 각기 누구의 북쪽과 남쪽에 있었습니까? (ㄴ) 어느 왕들이 최초로 “북방 왕”과 “남방 왕”의 역할을 맡았습니까?
16 들어 보십시오! 여호와의 천사는 이 극적인 세력 다툼의 시작을 묘사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남방 왕, 곧 그의[알렉산더의] 군왕들 중 하나가 강해질 것이다. 그런데 이자가[북방 왕이] 그에 맞서 이길 것이며 반드시 그의 통치 권력보다 더 크고 광범위한 지배권으로 통치할 것이다.” (다니엘 11:5) “북방 왕”과 “남방 왕”이라는 명칭은 각기 다니엘의 백성의 북쪽에 있는 왕과 남쪽에 있는 왕을 가리킵니다. 이 때쯤 다니엘의 백성은 바빌론에 사로잡혀 있던 상태에서 해방되어 유다 땅으로 다시 돌아와 있었습니다. 최초의 “남방 왕”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1세였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와 맞서 이기고 “광범위한 지배권으로” 통치한, 알렉산더의 장군들 중 한 사람은 시리아의 왕 셀레우코스 니카토르 1세였습니다. 그는 “북방 왕”의 역할을 맡았습니다.
17. 북방 왕과 남방 왕 사이의 세력 다툼이 시작되었을 때 유다 땅은 누구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까?
17 세력 다툼이 시작되었을 때, 유다 땅은 남방 왕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기원전 320년경부터 유대인들에게 영향을 미쳐 이집트로 이주해 와 살도록 하였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유명한 도서관을 세운 알렉산드리아에는 번영하던 유대인 이민 사회가 있었습니다. 유다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기원전 198년까지 남방 왕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치하의 이집트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18, 19. 세월이 흘러, 경쟁 관계에 있는 두 왕은 어떻게 “공정한 협정”을 맺었습니까?
18 천사는 두 왕에 관하여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몇 해 후에 그들은 서로 동맹할 것이며, 공정한 협정을 맺기 위하여 남방 왕의 딸이 북방 왕에게 올 것이다. 그러나 그 여자는 자기 팔의 힘을 지니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도 서 있지 못하고 그의 팔도 그러할 것이며, 그 여자 자신이 버림을 받고, 그 여자를 데리고 온 자들과 그 여자를 낳아 준 자와 그때에 그 여자를 강하게 한 자도 그렇게 될 것이다.” (다니엘 11:6)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게 되었습니까?
19 이 예언은 셀레우코스 니카토르 1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안티오코스 1세에게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남방 왕을 상대로 장래를 결정짓는 전쟁을 벌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의 후계자인 안티오코스 2세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2세와 긴 전쟁을 치렀습니다. 안티오코스 2세와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각기 북방 왕과 남방 왕이 되었습니다. 안티오코스 2세는 라오디케와 결혼하였고, 그들은 셀레우코스 2세라는 아들을 하나 두었습니다. 한편 프톨레마이오스 2세에게는 베레니케라는 딸이 있었습니다. 기원전 250년에 이 두 왕은 “공정한 협정”을 맺었습니다. 이 동맹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 안티오코스 2세는 아내 라오디케와 이혼하고 “남방 왕의 딸”인 베레니케와 결혼하였습니다. 그가 베레니케에게서 얻은 아들이 라오디케에게서 얻은 아들들 대신에 시리아 왕좌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20. (ㄱ) 베레니케의 “팔”은 어떤 의미에서 서 있지 못하였습니까? (ㄴ) 베레니케와 “그 여자를 데리고 온 자들”과 “그 여자를 강하게 한 자”는 어떻게 버림을 받았습니까? (ㄷ) 안티오코스 2세가 “그의 팔” 즉 권세를 잃은 후에 누가 시리아의 왕이 되었습니까?
20 베레니케의 “팔” 즉 후원해 주는 힘은 베레니케의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2세였습니다. 그가 기원전 246년에 죽자, 베레니케는 남편에 대하여 “자기 팔의 힘을 지니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안티오코스 2세는 베레니케를 버리고 다시 라오디케와 결혼하여, 라오디케에게서 낳은 아들을 자기의 후계자로 지명하였습니다. 라오디케가 계획한 대로, 베레니케와 그의 아들은 살해당하였습니다. 베레니케를 이집트에서 시리아로 데리고 온 시종들—“그 여자를 데리고 온 자들”—도 똑같은 종말을 당한 것 같습니다. 심지어 안티오코스 2세까지도 라오디케에게 독살되는 바람에 “그의 팔” 즉 권세도 “서 있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베레니케의 아버지—“그 여자를 낳아 준 자”—와 베레니케의 시리아인 남편—일시적으로 그 여자를 “강하게” 한 자—이 모두 죽었습니다. 그로 인해 라오디케의 아들인 셀레우코스 2세가 시리아의 왕이 되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다음 왕은 이 모든 일에 어떤 반응을 보일 것입니까?
한 왕이 자기 누이가 살해된 것에 대해 복수하다
21. (ㄱ) 베레니케의 “뿌리”의 “싹에서 나온 자”는 누구였으며, 그는 어떻게 ‘일어섰’습니까? (ㄴ)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어떻게 “북방 왕의 요새를 치러 와서” 그를 이겼습니까?
21 천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 여자의 뿌리의 싹에서 나온 자가 그의 지위에 일어설 것이며, 그는 군대에게로 오고 북방 왕의 요새를 치러 와서 그들을 대적하여 행동하고 이길 것이다.” (다니엘 11:7) 베레니케의 부모 즉 “뿌리”의 “싹에서 나온 자”는 베레니케의 오라비였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가 죽자 남방 왕으로, 즉 이집트의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3세로 ‘일어섰’습니다. 그는 즉시 자기 누이가 살해된 것에 대한 복수를 시작하였습니다. 라오디케가 베레니케와 그의 아들을 살해하는 데 이용한 시리아의 왕 셀레우코스 2세를 향해 진격해 옴으로, 그는 “북방 왕의 요새”를 치러 왔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안티오크의 요새화된 부분을 점령하고 라오디케를 죽였습니다. 그는 북방 왕의 영토를 통과해 동쪽으로 나아가 바빌로니아를 약탈하고 계속해서 인도까지 진격하였습니다.
22.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이집트로 무엇을 가지고 왔으며, “몇 해 동안 북방 왕으로부터 떨어져 서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22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하느님의 천사는 이렇게 알려 줍니다. “또한 그는 그들의 신들, 그들의 주조한 형상들, 그들의 은과 금으로 된 보배로운 물품들과 함께, 포로들과 함께 이집트로 올 것이다. 그는 몇 해 동안 북방 왕으로부터 떨어져 서 있을 것이다.” (다니엘 11:8) 200여 년 전에 페르시아의 왕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를 정복하여 이집트의 신들 즉 “그들의 주조한 형상들”을 자기 나라로 가져간 일이 있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과거에 페르시아의 왕도(王都)였던 수사를 약탈하여 이 신들을 되찾아 이집트로 “포로”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는 또한 전리품으로 “은과 금으로 된 보배로운 물품들”을 아주 많이 가지고 왔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국내에서 일어난 반역을 진압해야 했기 때문에, “북방 왕으로부터 떨어져 서 있”었으며, 북방 왕에게 더 이상 해를 입히지 않았습니다.
시리아 왕이 보복하다
23. 북방 왕이 남방 왕의 왕국으로 들어왔다가 “본토로 돌아”간 이유는 무엇입니까?
23 북방 왕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다니엘은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남방 왕의 왕국으로 들어왔다가 본토로 돌아갈 것이다.” (다니엘 11:9) 북방 왕—시리아의 왕 셀레우코스 2세—은 반격을 가하였습니다. 그는 이집트의 남방 왕의 “왕국” 즉 영토로 들어갔지만 패배를 당하였습니다. 셀레우코스 2세는 기원전 242년경에, 소수밖에 남지 않은 패잔병을 이끌고 시리아의 수도 안티오크로 퇴각함으로 “본토로 돌아”갔습니다. 그가 죽자 그의 아들 셀레우코스 3세가 그를 계승하였습니다.
24. (ㄱ) 셀레우코스 3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ㄴ) 시리아의 왕 안티오코스 3세는 어떻게 남방 왕의 영토에 “와서 범람하여 지나”갔습니까?
24 시리아의 왕 셀레우코스 2세의 자손에 관하여는 어떤 예언이 있었습니까? 천사는 다니엘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한편 그의 아들들은 분발하여 일어나서 큰 군대의 무리를 모을 것이다. 그는 진군하여 와서 범람하여 지나갈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돌아갈 것이며, 분발하여 일어나서 자기의 요새까지 갈 것이다.” (다니엘 11:10) 셀레우코스 3세의 통치는 3년도 채 안 되어 암살로 끝났습니다. 그의 동생인 안티오코스 3세가 그의 뒤를 이어 시리아의 왕좌에 올랐습니다. 셀레우코스 2세의 이 아들은 남방 왕을 공격하기 위해 큰 군대를 모았습니다. 그 당시 남방 왕은 프톨레마이오스 4세였습니다. 시리아의 새로운 북방 왕은 이집트와의 싸움에서 성공하여, 셀레우키아 항구와 코엘레-시리아 속주와 두 도시 티레와 프톨레마이스 그리고 인근의 소도시들을 탈환하였습니다. 그는 왕 프톨레마이오스 4세의 군대를 참패시키고 유다의 많은 도시들을 점령하였습니다. 안티오코스 3세는 기원전 217년 봄에 프톨레마이스를 떠나 북쪽으로 가, 시리아에 있는 “자기의 요새까지” 갔습니다. 그러나 곧 변화가 있을 것이었습니다.
상황이 역전되다
25.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안티오코스 3세와 만나 전투를 벌인 곳은 어디이며, 이집트의 남방 왕의 “손에 넘겨”진 것은 무엇입니까?
25 여호와의 천사가 뒤이어 다음과 같이 예언할 때 우리도 다니엘처럼 기대를 가지고 잘 듣습니다. “남방 왕이 격분하여 나아가서 그와, 곧 북방 왕과 싸우고야 말 것이다. 그래서 그가 커다란 무리를 일어서게 할 것인데, 그 무리는 그 자의 손에 넘겨지고 말 것이다.” (다니엘 11:11) 남방 왕인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7만 5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나아가 적을 쳤습니다. 시리아의 북방 왕인 안티오코스 3세도 6만 8000명의 “커다란 무리”를 일으켜 남방 왕에 대항하기 위해 일어섰습니다. 그러나 “그 무리”는 이집트 국경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해안 도시 라피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남방 왕의 “손에 넘겨”졌습니다.
26. (ㄱ) 라피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어떤 “무리”가 남방 왕에게 끌려갔으며, 그곳에서 맺은 평화 조약의 조건은 무엇이었습니까? (ㄴ)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어떤 연유로 “자기의 강한 지위를 이용하지 못”하였습니까? (ㄷ) 뒤이어 누가 남방 왕이 되었습니까?
26 예언은 다음과 같이 계속됩니다. “그 무리는 틀림없이 끌려갈 것이다. 그의 마음이 높아지고, 그는 실제로 수만 명을 쓰러뜨릴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강한 지위를 이용하지 못할 것이다.” (다니엘 11:12) 남방 왕인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시리아의 보병 1만 명과 기병 300명을 ‘끌고가’ 죽였으며, 4000명은 포로로 데려갔습니다. 그 후 두 왕은 조약을 맺었는데, 그 조약으로 안티오코스 3세는 시리아의 항구 셀레우키아는 보존하였지만 페니키아와 코엘레-시리아는 잃었습니다. 이 승리로 인해 이집트의 남방 왕의 마음은 “높아”졌으며, 특히 여호와에 대하여 그러하였습니다. 유다는 프톨레마이오스 4세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시리아의 북방 왕에 대하여 거둔 승리의 여세를 몰아 “자기의 강한 지위를 이용하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방탕한 생활에 빠지는 바람에, 다섯 살 된 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안티오코스 3세가 죽기 몇 년 전에 다음 차례의 남방 왕이 되었습니다.
기회를 이용하는 자가 돌아오다
27. 북방 왕은 어떻게 ‘몇 때 후에’, 이집트로부터 영토를 되찾기 위해 돌아왔습니까?
27 안티오코스 3세는 그의 온갖 공적 때문에 안티오코스 대왕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에 관하여 천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북방 왕이 반드시 돌아와서 첫 번째보다 더 큰 무리를 일으킬 것이다. 몇 때 곧 몇 해 후에 그가 올 것인데, 큰 군대와 많은 소유물을 거느리고 그렇게 할 것이다.” (다니엘 11:13) 이 “몇 때”는, 라피아에서 이집트 군대가 시리아 군대를 패배시킨 후로 흘러간 16년 이상의 기간이었습니다. 어린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남방 왕이 되자, 안티오코스 3세는 이집트의 남방 왕에게 잃은 영토를 되찾기 위해 “첫 번째보다 더 큰 무리”를 이끌고 출발하였습니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는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5세와 힘을 합쳤습니다.
28. 어린 남방 왕은 어떤 문제들을 겪고 있었습니까?
28 남방 왕은 또한 자기의 왕국 내에서도 여러가지 문제를 겪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남방 왕을 대적하여 일어설 자가 많을 것이다”라고 천사는 말하였습니다. (다니엘 11:14ㄱ) 실제로 “남방 왕을 대적하여 일어”선 자가 많았습니다. 어린 남방 왕은 안티오코스 3세와 그의 동맹자인 마케도니아 왕의 군대와 맞서 싸워야 했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에서도 국내의 여러가지 문제와 맞서 싸워야 하였습니다. 그의 이름을 빌려 통치한 그의 후견인 아가토클레스가 이집트 사람들을 오만하게 대하는 바람에 많은 사람이 반역을 하였습니다. 천사는 뒤이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네 민족에 속한 강도들의 아들들도 환상을 이루려고 끌려다닐 것이나, 그들이 걸려 넘어지고 말 것이다.” (다니엘 11:14ㄴ) 심지어 다니엘의 민족에 속한 일부 사람들까지도 “강도들의 아들들” 즉 혁명가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국에 대한 이방인의 지배를 종식시키는 것과 관련하여 그러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어떤 “환상”도 거짓된 것이었으므로, 그들은 실패하게 즉 “걸려 넘어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29, 30. (ㄱ) “남쪽의 팔들”은 어떻게 북방 왕의 공격에 굴복하게 되었습니까? (ㄴ) 북방 왕은 어떻게 ‘‘장식’의 땅에 서’게 되었습니까?
29 여호와의 천사는 계속해서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북방 왕이 와서 포위 공격 누벽(壘壁)을 서둘러 세우고 요새들을 갖춘 도시를 함락시킬 것이다. 그러면 남쪽의 팔들도, 그의 정선된 자들로 된 백성도 서지 못할 것이니, 서 있을 힘도 없을 것이다. 그를 치러 오는 자가 자기 뜻대로 행하리니, 그 앞에 서 있을 자가 없을 것이다. 그는 ‘장식’의 땅에 설 것이며, 그의 손에는 진멸이 있을 것이다.”—다니엘 11:15, 16.
30 프톨레마이오스 5세 휘하의 군대 즉 “남쪽의 팔들”은 북방 왕의 공격에 굴복하게 되었습니다. 안티오코스 3세는 파네아스(카이사레아 빌립보)에서 이집트의 장군 스코파스와 1만 명의 정예군 즉 “정선된 자들”을 물리쳐 “요새들을 갖춘 도시” 시돈까지 쫓아갔습니다. 안티오코스 3세는 그곳에 “포위 공격 누벽(壘壁)을 서둘러 세”워 기원전 198년에 그 페니키아 항구를 점령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뜻대로” 행동하였습니다. 이집트의 남방 왕의 군대가 그 앞에 서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 안티오코스 3세는 “‘장식’의 땅”인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진격하였습니다. 기원전 198년에, 예루살렘과 유다는 이집트의 남방 왕의 지배를 받던 상태에서 시리아의 북방 왕의 지배를 받는 상태로 넘어갔습니다. 그리하여 북방 왕인 안티오코스 3세는 ‘‘장식’의 땅에 서’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에게 대적하는 모든 유대인과 이집트인들과 관련하여 “그의 손에는 진멸”이 있었습니다. 이 북방 왕은 얼마나 오랫동안 자기 멋대로 행할 수 있을 것입니까?
로마가 기회를 이용하는 자를 억제하다
31, 32. 북방 왕이 결국 남방 왕과 평화를 위한 “공정한 협정”을 맺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31 여호와의 천사는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해 줍니다. “그[북방 왕]는 자기의 온 왕국의 힘을 가지고 나아가려고 그리로 얼굴을 향할 것이며, 저와 공정한 협정을 맺고 효과적으로 행동할 것이다. 또 여자의 딸을 멸하는 것이 그에게 허락될 것이다. 그 여자는 서지 못할 것이며, 계속 그의 것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다니엘 11:17.
32 북방 왕인 안티오코스 3세는 “자기의 온 왕국의 힘을 가지고” 이집트를 지배하기 위하여 “그리로 얼굴을 향”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남방 왕인 프톨레마이오스 5세와 평화를 위한 “공정한 협정”을 맺게 되었습니다. 로마의 강력한 요구로 인해 안티오코스 3세는 계획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안티오코스 3세와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5세가 동맹을 맺고 나이 어린 이집트 왕을 대적하여 그의 영토를 차지하려고 하자,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후견인들이 로마로 향하여 보호를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로마는 자기의 영향권을 넓힐 수 있는 그 기회를 이용하기 위해 위력을 과시하였습니다.
33. (ㄱ) 안티오코스 3세와 프톨레마이오스 5세 사이에 이루어진 평화의 조건은 무엇이었습니까? (ㄴ) 클레오파트라 1세와 프톨레마이오스 5세 사이에 이루어진 결혼의 목적은 무엇이었으며, 그 계획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33 로마의 강요에 못 이겨, 안티오코스 3세는 남방 왕에게 평화의 조건을 제시하였습니다. 안티오코스 3세는 로마가 요구한 대로 정복한 지역들을 내주는 대신, 자기의 딸 클레오파트라 1세—“여자의 딸”—를 프톨레마이오스 5세와 결혼시킴으로 그 지역들을 명의상으로만 양도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장식’의 땅” 유다를 포함한 몇 개의 속주를 신부의 지참금으로 내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기원전 193년에 거행된 결혼식에서, 시리아의 왕은 이 속주들을 프톨레마이오스 5세에게 내주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이집트를 시리아에 복종시키기 위해 이루어진 정략 결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실패하였습니다. 클레오파트라 1세가 “계속 그의 것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후에 클레오파트라 1세가 남편의 편을 들었던 것입니다. 안티오코스 3세와 로마 사람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을 때, 이집트는 로마의 편을 들었습니다.
34, 35. (ㄱ) 북방 왕은 어느 “해안 지대”로 얼굴을 돌이켰습니까? (ㄴ) 로마는 어떻게 북방 왕으로 말미암은 “치욕”을 그치게 하였습니까? (ㄷ) 안티오코스 3세는 어떻게 죽었으며, 누가 다음 차례의 북방 왕이 되었습니까?
34 천사는 북방 왕이 겪을 패배를 언급하여, 뒤이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안티오코스 3세]는 얼굴을 다시 해안 지대로 돌이켜 실제로 많은 곳을 함락시킬 것이다. 그러나 한 지휘관[로마]이 그로 말미암은 치욕을 자기[로마]를 위하여 그치게 할 것이니, 그가 입힌 치욕[안티오코스 3세가 입힌 치욕]이 없어질 것이다. 그 지휘관[로마]은 그 치욕을 그에게 돌려줄 것이다. 그리하여 그[안티오코스 3세]는 얼굴을 다시 자기 땅의 요새들로 돌릴 것이며, 마침내 걸려 넘어져 엎드러져서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다니엘 11:18, 19.
35 “해안 지대”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와 소아시아의 해안 지대였습니다. 기원전 192년에 그리스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안티오코스 3세는 그리스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스에 더 많은 영토를 확보하려는 시리아 왕의 시도를 불쾌하게 여긴 로마는 그에게 공식적으로 선전 포고를 하였습니다. 시리아 왕은 테르모필레에서 로마 사람들의 손에 패배를 당하였습니다. 기원전 190년에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패배를 당한 뒤 일 년쯤 후에, 그는 그리스와 소아시아에서 그리고 타우루스 산맥 서쪽에 있는 지역들에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였습니다. 로마는 매우 많은 조공을 바치도록 요구하였고, 북방 왕인 시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였습니다. 그리스와 소아시아에서 쫓겨나고 자기의 함대를 거의 모두 잃어버린 안티오코스 3세는 “얼굴을 다시 자기 땅[시리아]의 요새들로 돌”렸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그가 자기들에게 입힌 치욕을 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안티오코스 3세는 기원전 187년에, 페르시아의 엘리마이스에 있는 한 신전을 강탈하려고 하다가 사망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죽음 가운데 “엎드러”졌고, 그의 아들 셀레우코스 4세가 그의 뒤를 이어 다음 차례의 북방 왕이 되었습니다.
세력 다툼이 계속되다
36. (ㄱ) 남방 왕은 어떤 노력을 계속하였으며, 하지만 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ㄴ) 셀레우코스 4세는 어떻게 죽임을 당했으며, 누가 그를 계승하였습니까?
36 남방 왕인 프톨레마이오스 5세는 클레오파트라의 지참금으로 자기에게 왔어야 했던 속주들을 차지하려고 했지만, 그의 노력은 독살로 인해 중단되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가 그를 계승하였습니다. 셀레우코스 4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로마에 빚진 매우 많은 조공을 바치기 위해 돈이 필요하게 되자, 예루살렘 성전에 비축되어 있다는 소문이 도는 재물을 탈취해 오도록 자기의 재무관 헬리오도로스를 파견하였습니다. 왕좌를 탐냈던 헬리오도로스는 셀레우코스 4세를 살해하였습니다. 하지만 페르가몬의 유메네스 왕과 그의 동생 아탈로스는 살해된 왕의 동생 안티오코스 4세를 왕좌에 앉혔습니다.
37. (ㄱ) 안티오코스 4세는 어떻게 자신이 여호와 하느님보다 더 위력 있음을 과시해 보이려고 하였습니까? (ㄴ) 안티오코스 4세가 예루살렘 성전을 모독한 행위로 인해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37 새로운 북방 왕 안티오코스 4세는 여호와의 숭배 마련을 없애버리려고 함으로써, 자기가 하느님보다 더 위력 있음을 과시해 보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여호와에게 도전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제우스 즉 주피터에게 바쳤습니다. 기원전 167년 12월에, 여호와께 매일 번제물을 바치던 성전 뜰의 거대한 제단 위에 이교의 신을 위한 제단이 세워졌습니다. 열흘 후에, 그 이교의 신을 위한 제단에 제우스를 위한 희생이 바쳐졌습니다. 이러한 신성모독적 행위로 인해 마카베오가(家)의 주도하에 유대인의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안티오코스 4세는 유대인들과 3년간 전쟁을 벌였습니다. 기원전 164년, 그 신성모독적 행위를 기념하던 날에, 유다 마카베오는 성전을 다시 여호와께 바쳤고, 그리하여 봉헌 축제—하누카—가 제정되었습니다.—요한 10:22.
38. 마카베오가의 통치는 어떻게 끝나게 되었습니까?
38 마카베오가는 아마 기원전 161년에 로마와 조약을 맺은 것 같으며, 기원전 104년에는 왕국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마카베오가와 북방 왕인 시리아 사이에는 계속 마찰이 있었습니다. 마침내 로마는 개입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로마의 장군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63년에, 석 달간의 포위 공격 끝에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습니다. 기원전 39년에, 로마의 원로원은 에돔 사람 헤롯을 유대의 왕으로 임명하였습니다. 헤롯은 기원전 37년에 마카베오가의 통치를 종식시키고 예루살렘을 차지하였습니다.
39. 다니엘 11:1-19을 고려해 봄으로 어떤 유익을 얻었습니까?
39 세력 다툼을 벌이는 두 왕에 관한 예언의 첫 부분이 자세히 성취되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가슴 설레는 일입니다! 예언의 소식이 다니엘에게 전달된 후 약 500년 동안의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며 북방 왕과 남방 왕의 지위를 차지한 통치자들이 누구인지 식별할 수 있다니 참으로 흥분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 두 왕 사이의 세력 다툼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 위를 걸어다니셨던 때를 거쳐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됨에 따라, 그들의 정치적 실체도 바뀌어 갑니다. 역사상의 사태 발전을 이 예언을 통해 밝혀지는 흥미를 자아내는 세부점과 맞추어 보면, 세력 다툼을 벌이는 그 두 왕이 누구인지 식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점을 알게 되었습니까?
● 그리스 왕국들에서 어느 두 강력한 왕조가 등장하였으며, 그 두 왕조는 어떤 싸움을 시작하였습니까?
● 다니엘 11:6에 예언된 대로, 두 왕은 어떻게 “공정한 협정”을 맺었습니까?
● 다음에 나오는 두 왕들 사이에서 어떻게 세력 다툼이 계속되었습니까?
셀레우코스 2세와 프톨레마이오스 3세 (다니엘 11:7-9)
안티오코스 3세와 프톨레마이오스 4세 (다니엘 11:10-12)
안티오코스 3세와 프톨레마이오스 5세 (다니엘 11:13-16)
● 클레오파트라 1세와 프톨레마이오스 5세 사이에 이루어진 결혼의 목적은 무엇이었으며, 그 계획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니엘 11:17-19)
● 다니엘 11:1-19에 주의를 기울임으로 어떤 유익을 얻었습니까?
[228면 도표와 삽화]
다니엘 11:5-19에 나오는 왕들
북방 왕 남방 왕
다니엘 11:5 셀레우코스 니카토르 1세 프톨레마이오스 1세
다니엘 11:6 안티오코스 2세 프톨레마이오스 2세
(아내 라오디케) (딸 베레니케)
다니엘 11:7-9 셀레우코스 2세 프톨레마이오스 3세
다니엘 11:10-12 안티오코스 3세 프톨레마이오스 4세
[삽화]
프톨레마이오스 2세와 그의 아내를 묘사한 동전
[삽화]
셀레우코스 니카토르 1세
[삽화]
안티오코스 3세
[삽화]
프톨레마이오스 6세
[삽화]
프톨레마이오스 3세와 그의 후계자들이 지은, 이집트 상부의 이드푸에 있는 호루스 신전
[216, 217면 지도와 삽화]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북방 왕”과 “남방 왕”이라는 명칭은 각기 다니엘의 백성의 북쪽에 있는 왕과 남쪽에 있는 왕을 가리킨다
마케도니아
그리스
소아시아
이스라엘
리비아
이집트
에티오피아
시리아
바빌론
아라비아
[삽화]
프톨레마이오스 2세
[삽화]
안티오코스 대왕
[삽화]
안티오코스 대왕이 공식적으로 내린 법령이 새겨져 있는 돌판
[삽화]
프톨레마이오스 5세를 묘사한 동전
[삽화]
이집트의 카르나크에 있는 프톨레마이오스 3세의 문
[210면 전면 삽화]
[215면 삽화]
셀레우코스 니카토르 1세
[218면 삽화]
프톨레마이오스 1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