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공의가 흐르게 하여라’—그래야 하느님을 알게 된다
1. 우리에게 공의감이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역사가 흘러 내려오면서 공의로운 세상을 이루려는 활동으로 이름을 떨친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공의가 우리의 마음을 끄는 것은 사람이 하느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는 공의감을 갖고 있으며 다른 사람이 우리를 공의롭게 대해 주기를 바랍니다. 공의를 ‘좋아하시는’ 여호와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예레미야 9:24; 창세 1:27; 이사야 40:14.
2, 3. 여호와의 공의에 관해 배우기 위해 열두 예언자의 책을 살펴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성서의 여러 책들을 읽으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공의를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특히 열두 예언자의 책을 검토해 보면 큰 유익을 얻을 것입니다. 그 책들에서 공의를 매우 두드러지게 다루기 때문에, 한 성서 공회에서 발행한 호세아, 아모스, 미가를 다룬 책은 제목을 「바로 지금 공의를!」(Justice Now!)이라고 했을 정도입니다. 일례로, 아모스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의가 항상 흐르는 급류처럼 흘러가게 하여라”라고 촉구합니다. 그리고 미가가 우리의 의무 가운데 첫 번째로 꼽은 것이 무엇인지도 유의해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고 계신 것은 다만 공의를 행하고 친절을 사랑하고 겸허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아모스 5:24; 미가 6:8.
3 그러므로 여호와를 더 잘 알고, 그래서 그분을 본받을 수 있으려면 우리는 확실히 그분의 공의를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공의는 그분의 본질적인 특성의 한 부면이며, 따라서 그분의 공의를 인식하지 못하면 그분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고대에 그분의 종들도 “여호와는 공의를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시 33:5; 37:28.
4. 열두 예언자의 기록이 하느님의 공의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강화시킬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해 보십시오.
4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심판을 집행하시기 얼마 전에 예언자 하박국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오 여호와여, 언제까지 제가 도와 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까?] ···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전혀 시행되지 않습니다. 악한 자가 의로운 자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이유로 공의가 구부러지게 시행됩니다.” (하박국 1:2, 4) 충실한 하박국은 당시에 구할 수 있었던 성경과 자기 자신의 경험을 통해 여호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이 공의를 옹호하고 촉구하는 분이심을 확신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예언자는 여호와께서 왜 악을 허용하시는지 의아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박국에게 자신이 충실한 사람들을 공의롭게 대할 것임을 확언하셨습니다. (하박국 2:4) 하박국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이 그러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면 우리는 더더욱 그러한 확신을 갖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금은 완성된 성서가 있으므로,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대하면서 하신 일들이, 그리고 공의를 비롯하여 자신의 특성들을 나타내신 표현들이 더 방대하게 담긴 기록을 살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를 알고 그분의 완전한 공의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더 좋은 입장에 있습니다.
5. 우리는 이제 공의의 어떤 부면에 특히 관심을 기울일 것입니까?
5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에 사자들을 보내셔서 공의로워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이사야 1:17; 10:1, 2; 예레미야 7:5-7; 에스겔 45:9) 그분은 분명 열두 예언자를 통해서도 그 점을 부각시키셨습니다. (아모스 5:7, 12; 미가 3:9; 스가랴 8:16, 17) 그 예언자들의 기록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그 예언자들이 매일의 생활에서 공의를 행하도록 촉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열두 예언서에 들어 있는 교훈을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만, 그 예언자들이 강조한 두 가지 분야에서의 공의를 검토해 보고 우리가 배우는 점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직업과 금전 문제에서 공의를 행함
6, 7. 직업과 금전 문제에 있어서 공의를 행하는 데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6 예수께서는 “사람이 빵으로만 살아서는 안 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4:4; 신명 8:3) 그분은 사람에게 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즉 사람은 먹어야 산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일을 하거나 가족 중 누군가가 일을 해서 식품을 마련해야 합니다. 고대에 하느님의 참 종들도 그렇게 해야 하였습니다. 그들 중에는 농사를 짓거나 옷, 가구, 요리 기구 등을 만드는 일과 같은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사람들을 고용하여 농작물을 수확하거나 밀가루, 올리브유, 포도주 등을 생산하는 고용주들도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상품을 매매하는 상인들도 있었습니다. 또한 지붕 수리나 악기 연주와 같은 서비스업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탈출 35:35; 신명 24:14, 15; 열왕 둘째 3:15; 22:6; 마태 20:1-8; 누가 15:25.
7 우리 자신의 생활이나 우리의 벗과 친척들의 생활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물론 오늘날 직업들의 세부적인 면은 그때와 다르겠지만 그러한 문제와 관련된 공의에 대한 하느님의 견해는 그때와 동일하지 않겠습니까? 여호와께서 열두 예언자를 통해 전하신 소식을 보면, 그분은 자신의 백성이 생활의 그런 부면에서 공의를 행할 것을 기대하십니다. 그러한 몇 가지 예를 고려하면서 경건한 공의를 어떻게 나타낼 것이 요구되어 있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시 25:4, 5.
8, 9. (ㄱ) 말라기 3:5의 정죄하는 말씀이 특히 심각한 의미가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성경은 직업과 일에 관해 어떤 균형 잡힌 견해를 갖도록 권장합니까?
8 하느님께서는 말라기를 통해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가까이 가겠다. 마술사들, 간음하는 자들, 거짓 맹세하는 자들 그리고 품꾼의 삯[을] ··· 사기 치는 자들[을] ··· 상대로 신속히 증언하는 증인이 되겠다. 그들은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말라기 3:5) 그렇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고용인들 즉 품꾼들을 불공정하게 대하는 사람들을 정죄하셨습니다. 그것은 얼마나 심각한 문제였습니까? 사실 그분은 일꾼을 기만하는 행위를 영매술, 간음, 거짓말과 함께 언급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서 ‘음행하는 자들과 영매술을 행하는 자들과 모든 거짓말쟁이들’을 심판하실 것임을 압니다.—계시 21:8.
9 일터에서 어떻게 하는가 하는 것은 단순히 인간적 윤리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여호와의 공의가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그분은 ‘품꾼의 삯을 사기 치는 자들’의 사악한 행위 때문에 자신이 ‘심판하러 그들에게 가까이 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고용주가 고용인이나 일꾼들이 그때그때 요구하는 대로 다 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포도원에 고용된 일꾼들에 대한 예수의 예를 보면, 고용주는 삯과 작업 조건을 정할 권한이 있었습니다. (마태 20:1-7, 13-15) 유의할 만한 점으로, 예수의 예에서 모든 일꾼들은 온종일 일했든 그렇지 않았든 계약대로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또한 우리는 그 고용주가 고용인들에게 피해를 주면서 더 많은 이윤을 남기는 부정직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에도 유의해야 합니다.—예레미야 22:13.
10. 우리가 고용인을 어떻게 대우하는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0 우리가 고용인이 딸린 사업체를 소유하고 있을 경우에—혹은 그저 누군가를 고용하여 일을 시킬 경우라 하더라도—임금이나 요구 사항, 그리고 금전 관계 등에서 말라기 3:5이 밝혀 주는 표준에 어느 정도나 달하고 있습니까? 이 점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은 이유는, 품꾼을 공의롭게 대우하지 않는 문제를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 야고보는 그런 일들을 불공정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 “그분[여호와]이 여러분을 대적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고 질문하였습니다. (야고보 5:1, 4, 6) 그러므로 이렇게 결론 내리는 것은 타당합니다. “품꾼의 삯”에 대해 불공정하게 행하는 사람들은 여호와의 공의를 본받지 않고 있는 것이므로 그분을 참으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11, 12. (ㄱ) 호세아 5:10에서는 어떤 불공정한 행위에 주의를 환기시킵니까? (ㄴ) 호세아 5:10에 나오는 원칙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습니까?
11 이제 여호와께서 호세아 시대에 일부 탁월한 자들을 대적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읽어 보십시오. “유다의 방백들은 경계를 뒤로 옮기는 자들처럼 되었다. 그들 위에 내가 나의 진노를 물같이 쏟을 것이다.” (호세아 5:10) 호세아는 어떤 잘못을 질책한 것입니까? 유다의 농부들은 토지에 의지하여 생계를 꾸려 나갔는데, 각자의 토지는 돌이나 말뚝으로 경계가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경계를 뒤로 옮기는” 것은 농부의 땅이 줄어들게 해서 그의 생계 수단의 일부를 빼앗고 그를 강탈하는 행위였습니다. 호세아는 공의를 옹호해야 했을 유다 방백들을 경계표를 뒤로 옮기는 자들에 비하였습니다.—신명 19:14; 27:17; 욥 24:2; 잠언 22:28.
12 부동산을 거래할 때 매입하는 사람을 속이기 위해 ‘경계를 뒤로 옮기려는’ 유혹을 느끼는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원칙은 상인이든, 고용주든, 고용인이든, 고객이든 계약에 관계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적용됩니다. 잘 알다시피 사업계에는 계약을 문서화하는 것을 꺼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해야 나중에 원래 합의한 것보다 계약 의무를 적게 이행하거나 새로운 요구를 하기가 쉬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하면 계약서를 작성하기는 하지만 세부 사항들을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글씨로 남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상대편에게 부당한 피해를 입히게 되더라도 계약의 의미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왜곡할 심산으로 그렇게 합니다.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사람이라면—상인이든 고객이든 고용주이든 고용인이든—공의의 하느님을 참으로 아는 사람이겠습니까?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말씀에서 이렇게 밝히셨습니다. “[아버지 없는 소년들의] 경계를 뒤로 옮기지 말[아라]. 그들의 구속자께서 강하시니, 그분이 너를 상대로 그들을 위해 변호하실 것이기 때문이다.”—잠언 23:10, 11; 하박국 2:9.
13. 미가 6:10-12에 의하면, 고대에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 어떤 불공정한 행위가 있었습니까?
13 미가 6:10-12에서는 공의에 대해 또 다른 점을 이렇게 밝혀 줍니다. “악한 자의 집에 아직도 악의 보물이 있느냐, 비난받을 축소시킨 에바가 있느냐? 내가 악한 저울과, 속이는 돌 저울추가 들어 있는 자루를 가지고서 도덕적으로 깨끗할 수 있느냐? ··· 그 주민들은 거짓을 말하며, 그들의 혀는 입 안에서 간사하구나.” 오늘날에는 식품의 양을 헤아릴 때 에바가 아닌 리터 단위를 사용합니다. 또한 물건의 무게도 돌 저울추로 달지 않고 킬로그램으로 표시합니다. 그렇다 해도 미가가 말하고자 하는 점은 명백합니다. 당시의 상인들과 사업가들은 사기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표준에 맞는 도량형기를 사용하지 않음으로 사람들을 불공정하게 대하였습니다. ‘입이 간사하고’ 사업 거래를 간사하게 하는 사람들을 하느님께서는 ‘악한 자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신명 25:13-16; 잠언 20:10; 아모스 8:5.
14. 미가의 경고는 오늘날의 어떤 불공정한 행위에 빠지지 않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까?
14 속이는 도량형기에 관해 미가가 한 말이 우리가 사업을 하는 방식이나 고용인으로서 하는 일과 관련이 있습니까? 이것은 깊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고객들과 구매자들을 상대로 하는 사기 행위가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자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도급업자들 중에는 콘크리트를 배합할 때 정상적인 양이나 법정 규정량보다 시멘트를 적게 넣는 비양심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한 잘 보이지 않을 것 같은 부분에는 공사비에 책정된 것보다 값싼 재료를 사용하는 기술자들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일부 상인들은 실상은 중고품을 갓 출고된 제품인 양 판매합니다. 그리고 이른바 장사 요령이라고 하는 그 밖의 속임수로 이윤을 늘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 자신도 그러한 방법들을 사용해 보고 싶은 유혹을 느낍니까? 개인의 사생활을 보호하는 법을 다루는 한 근간 서적에서는 평하기를, 여호와의 증인들은 “창조주가 자기들을 지켜보고 있다고 믿으며 대부분은 도둑질을 하느니 차라리 죽는 편을 택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책에서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거액의 돈을 다루는 사업체들에서는 여호와의 증인을 선호한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참 그리스도인들은 여호와께서 자신들에게 직업이나 재정 문제 등에 있어서도 ‘공의를 행할 것을 요구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미가 6:8.
‘공의를 위한 방백’
15, 16. 미가 시대의 지도자들은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였습니까?
15 열두 예언자의 책을 보면 공의가 심각하게 무시된 시기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권위 있는 사람들은 공의를 행하는 데 본이 되었어야 했는데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탈출 18:21; 23:6-8; 신명 1:17; 16:18) 미가는 이렇게 호소하였습니다. “부디 들어라, 너희 야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집의 명령자들아. 공의를 아는 것, 그것이 너희의 일이 아니냐? 선한 것을 미워하고 악을 사랑하는 자들아, 백성에게서 그 가죽을, 그들의 뼈에서 그 살을 벗겨 내는 자들아.”—미가 3:1-3; 이사야 1:17.
16 농촌 생활에 대해 잘 알고 있던 백성은 이 말에 충격을 받았어야 했습니다. 이따금 목자는 자신이 돌보고 보호하는 양의 털을 깎았습니다. (창세 38:12, 13; 사무엘 첫째 25:4) 하지만 ‘공의를 알았어야’ 했던 “이스라엘 집의 명령자들”은 양의 가죽과 살을 벗겨 내고 뼈를 부서뜨리듯 하느님의 목초지의 백성을 착취하였습니다. (시 95:7) 미가는 농촌 생활에서 이끌어 낸 예를 다른 예로 바꾸면서 ‘대가를 바라며 재판’하는 방백들이 가시나무나 가시나무 울타리와 같다고 말하였습니다. (미가 7:3, 4) 가시나무와 가시나무 울타리로 가득한 지역을 통과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몸이 긁히고 옷이 찢어지게 될 것입니다. 지도자들은 하느님의 백성에게 바로 그러한 영향을 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형제들을 공정하게 대하지 않았으며 믿을 수 없는 부패한 사람들이었습니다.—미가 3:9, 11.
17. 스바냐 3:3에 의하면, 지도자들의 태도는 어떠하였습니까?
17 스바냐도 그와 비슷한 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습니다. “그 안에 있는 그의 방백들은 울부짖는 사자였다. 그의 재판관들은 뼈를 아침까지 남겨 두고 씹는 일이 없는 저녁 이리였다.” (스바냐 3:3) 하느님의 백성의 지도자들이 욕심 많고 사나운 사자와도 같이 의를 무시하는 모습은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재판관들이 게걸스럽게 끝없이 먹어 대는 이리처럼, 있는 대로 다 삼켜서 아침에 보니 뼈밖에 남기지 않는 모습도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입니까?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공의가 설 수 있었겠습니까? 백성을 돌보기는커녕 자기 먹이로 삼은 지도자들로 인해 공의는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습니다.
18. 이스라엘의 재판관들은 하느님의 백성을 어떻게 대했어야 하였습니까?
18 분명 하느님께 헌신한 민족의 그 지도자들은 그분을 알지 못했습니다. 만일 알았다면 그들은 스가랴 8:16의 이러한 말씀에 순종했을 것입니다. “너희가 해야 할 일은 이러하다. 서로 진실하게 말하여라. 너희 성문에서 진리와 평화의 재판으로 재판하여라.” 이스라엘의 연로자들은 성문에 모여서 소송을 처리하였는데, 첫인상이나 마음이 이끌리는 바에 따라 처리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생각과 일치하게 처리해야 하였습니다. (신명 22:15)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부자나 탁월한 인사와 같은 사람들에 대해 편파적인 태도를 나타내지 않도록 경고하셨습니다. (레위 19:15; 신명 1:16, 17) 재판관들은 문제의 당사자들 사이에 평화를 회복시키려고 노력함으로 “평화의 재판”을 해야 하였습니다.
19, 20. (ㄱ) 그리스도인 장로들이 열두 예언자로부터 많은 점을 배울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장로들은 여호와와 그분의 공의를 안다는 것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습니까?
19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할 때 스가랴 8:16의 일부를 인용하였습니다. (에베소 4:15, 25) 따라서 우리는 공의에 대한 열두 예언자의 경고와 교훈이 오늘날의 회중에도 적용된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연로자들 곧 감독자들은 여호와를 알고 그분의 공의를 반영하는 일에서 본이 되어야 합니다. 이사야 32:1에서는 그들을 ‘공의를 위한 방백’이라고 묘사함으로 신선함을 느끼게 합니다. 열두 예언자의 책에 들어 있는 경고와 교훈 가운데서, 그러한 장로들과 관련된 어떤 실용적인 점들을 식별할 수 있습니까?
20 그리스도인 장로들은 성경에 들어 있는 진리와 여호와의 생각을 알려 주는 내용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그들은 그에 근거하여 판결해야 하며 단순히 자신의 견해나 이른바 직감이라고 하는 것에 근거해서 판결해서는 안 됩니다. 성서는 문제가 까다로운 경우도 있을 수 있음을 알려 줍니다. 그러한 경우에는 따로 시간을 내어 준비하면서, 성서와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 반열의 현명한 교훈을 담고 있는 출판물을 개인적으로 조사해야 할지 모릅니다. (탈출 18:26; 마태 24:45) 장로들은 그렇게 노력을 기울일 때 하느님의 관점에서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기가 더 쉬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장로들은 “성문에 공의가 굳게 자리잡게” 하여 ‘참된 공의로 재판을 하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아모스 5:15; 스가랴 7:9.
21. 장로들이 편파성을 나타내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하지만 무엇 때문에 편파성의 유혹을 받게 될 수 있습니까?
21 판결할 책임이 있는 사람이 성서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편파성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말라기는 지식을 베풀어야 할 제사장들이 ‘율법에 있어서 편파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을 개탄하였습니다. (말라기 2:7-9)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습니까? 미가는 일부 우두머리들이 ‘단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고, 제사장들은 오직 삯을 위하여 교훈’한다고 말하였습니다. (미가 3:11) 장로들에게 어떻게 그와 같은 생각이 들 수 있습니까? 자신이 처리할 일에 관련된 사람이 과거에 자신에게 관대함을 보인 사람이라면, 혹은 앞으로 자신에게 어떤 이익을 줄 수도 있을 것 같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혹은 자신의 친인척과 관련된 일을 다룬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장로는 가족 관계에 치우칠 것입니까, 아니면 영적 원칙을 중시할 것입니까? 장로가 범행 문제를 다루거나 어떤 사람이 회중에서 부가적인 봉사의 특권을 받을 성경적 자격이 있는지를 고려할 때에도 편파성의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사무엘 첫째 2:22-25, 33; 사도 8:18-20; 베드로 첫째 5:2.
22. (ㄱ) 공의와 관련하여 장로들에게는 어떤 책임이 있습니까? (ㄴ) 장로들은 잘못한 사람들의 문제를 다룰 때 그 밖에 어떤 경건한 특성들을 나타내야 합니까?
22 심각한 죄를 지은 사람이 있으면 회중의 영적 목자들은 위험스럽고 부패시키는 영향력으로부터 회중을 보호하기 위해 조처를 취합니다. (사도 20:28-30; 디도 3:10, 11) 하지만 잘못한 사람이 진심으로 회개하면 장로들은 ‘그런 사람을 온화한 영으로 바로잡아’ 주고 싶어 합니다. (갈라디아 6:1) 그들은 거칠고 몰인정한 태도가 아니라 이러한 지침을 적용합니다. “너희는 참된 공의로 재판을 하여라. 서로에게 사랑의 친절과 자비를 행하여라.” (스가랴 7:9) 고대 이스라엘에서 소송을 다루는 방법에 관한 여호와의 규정들은 그분의 공의와 자비를 돋보이게 합니다. 임명된 재판관들은 많은 경우 어느 정도 재량권을 가지고 결정하였습니다. 그들은 상황과 범죄자의 태도에 따라 자비를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감독자들도 “참된 공의로” 재판하고 “사랑의 친절과 자비”를 나타내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여호와를 알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23, 24. (ㄱ) 장로들은 어떻게 “평화의 재판”이 이루어지게 할 수 있습니까? (ㄴ) 당신은 열두 예언자를 통해 공의와 관련하여 무엇을 인식하게 되었습니까?
23 “너희 성문에서 진리와 평화의 재판으로 재판하여라”라는 스가랴 8:16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재판할 때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평화의 재판”을 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살아 있을 때에도 일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개인 간의 갈등과 다툼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도와주었던 것처럼, 오늘날의 장로들도 도움을 베풀어야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빌립보 4:2, 3) 분명 장로들은 문제의 당사자들 사이에 평화를 회복시키려 함으로 “평화의 재판”을 하려고 진실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장로들이 베푸는 성경적 교훈과 그러한 교훈을 베풀면서 나타내는 태도는 회중 내의 평화와 하느님과의 평화를 증진시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들이 참으로 여호와와 그분의 공의를 알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 될 것입니다.
24 지금까지 언급한 두 가지 부면은 열두 예언자가 기록한 공의에 관한 조언을 일상생활에 반드시 적용해야 함을 잘 예시해 줍니다. 우리와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 ‘공의가 흐르게’ 할 때 참으로 큰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