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
(Canaan) [상인의 땅, 장사꾼의 땅], 가나안 사람 (Canaanite)
1. 함의 아들 가운데 네 번째로 나오는 사람이자 노아의 손자. (창 9:18; 10:6; 대첫 1:8) 그는 결국 지중해 동부 연안을 따라, 이집트와 시리아 사이에 있는 지역에 거주하게 된 11개 부족들의 선조였다. 그래서 그곳에는 “가나안 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창 10:15-19; 대첫 16:18. 2번 참조.
노아가 술 취한 일과 관련된 사건이 있은 뒤, 가나안은 그가 셈과 야벳 두 사람 모두의 노예가 될 것임을 예고하는 노아의 예언적 저주 아래 있게 되었다. (창 9:20-27) 기록에는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보고 그것을 밖에 있는 두 형제에게 알렸다”라고만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 함이 아니라 가나안이 그 저주의 대상이 된 이유에 관해 의문이 생긴다. 노아가 포도주에서 깼을 때 “막내아들이 자기에게 한 일을 알게 되었다”고 알려 주는 창세기 9:24에 관해 해설하면서, 로더럼의 번역판의 한 각주는 이렇게 말한다. “틀림없이 그것은 함이 아니라 가나안일 것이다. 셈과 야벳은 효심을 나타내어 축복을 받고, 가나안은 언급되지 않은 어떤 저질스러운 행동을 하여 저주를 받으며, 함은 소홀히 여기는 태도를 나타내어 소홀히 여김을 당하는 것이다.” 그와 비슷하게, 「모세 오경과 하프토라」(The Pentateuch and Haftorahs)라는 유대교 출판물에서는 그 간략한 설명이 “가나안이 연루된 것으로 보이는 어떤 혐오스러운 행위를 언급하고 있다”는 견해를 제시한다. (J. H. 헤르츠 편, 런던, 1972년, 34면) 또한 24절에서 “아들”로 번역된 히브리어가 “손자”를 의미할 수도 있음을 지적한 뒤에, 이 자료에서는 “거기서 언급하는 내용은 가나안에 대한 것으로 보인다”고 기술한다. 또한 「손시노 후마시」에서 알려 주는 바에 의하면, 일부 학자들은 가나안이 “[노아]를 상대로 변태적인 정욕을 만족시켰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막내아들”이라는 표현도 함의 막내아들이었던 가나안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A. 코언 편, 런던, 1956년, 47면.
성서 기록에서는 노아에게 행해진 모욕적인 행위에 가나안이 연관되었는지와 관련하여 아무런 세부점도 알려 주지 않으므로, 그러한 견해들은 당연히 추측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노아가 술 취한 일에 관해 말하기 직전에 가나안을 기록 가운데 갑자기 소개한 사실이나(창 9:18), 함의 행동을 묘사할 때 그를 가리켜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라고 부른 사실을 볼 때, 모종의 연관이 있었음을 보여 주려는 의도가 확실히 있었던 것 같다. (창 9:22)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보고”라는 표현이 가나안이 관련된 모종의 오용 행위나 변태적 행위를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은 합리적인 결론이다. 성서에서 다른 사람의 ‘벌거벗음을 드러낸다’거나 ‘본다’고 말할 때, 그것은 대부분의 경우 근친상간이나 그 밖의 성과 관련된 죄를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레 18:6-19; 20:17) 따라서 가나안이 무의식 상태인 노아에게 모종의 오용 행위를 저질렀거나 시도했을 수 있으며, 함은 이 사실을 알고도 그것을 막거나 그처럼 모욕적인 행위를 한 아들을 징계하는 조처를 취하지 않고 자기 형제들에게 노아가 당한 수치에 대해 알림으로 그 잘못을 한층 더 심각한 것이 되게 했을 수 있다.
그 저주의 예언적 부면 역시 고려해야 한다. 가나안 자신이 생애 중에 셈이나 야벳의 종이 됐음을 보여 주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이 일에는 하느님의 예지력이 작용하고 있었다. 게다가 노아가 묘사한 그 저주는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것이었으므로, 그리고 하느님이 정당한 이유 없이 미움을 표현하시는 일은 없으므로, 가나안은 명확히 부패한 기질, 어쩌면 정욕에 사로잡히는 본성을 이미 나타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특성이 결국 가나안의 자손들 가운데서 절정에 달하면서 나쁜 결과를 거두게 될 것을 내다보셨을 것이다. 그 이전에 카인의 경우에도 여호와께서는 그릇된 마음 자세를 보시고 죄에 압도되는 것의 위험성에 관해 카인에게 경고해 주셨다. (창 4:3-7) 하느님께서는 또한 대홍수 전에 살던 사람들 대부분에게 교정이 불가능할 정도로 악으로 치우치는 성향이 있음을 간파하시고 그들을 멸망시키는 것이 정당하다고 보셨다. (창 6:5) 따라서 가나안에게 내린 저주가 공정한 것이었다는 가장 명백한 증거는 가나안의 자손들의 후대 역사에 나타나게 되는데, 성서 역사와 세속 역사 모두가 증언하듯, 그들은 부도덕과 타락에 있어서 유달리 추잡한 기록을 남겼다. 가나안에 대한 저주는 그것이 선언된 때로부터 약 8세기 후, 가나안의 자손들이 셈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예속되고, 후에 야벳족의 강국들인 메디아·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을 때 성취되었다.
2. 가나안이라는 이름은 함의 아들에게서 나온 인종과 그들이 거주하던 땅에도 사용된다. 가나안은 팔레스타인에서 요르단 강 서쪽에 자리 잡고 있는 지역을 가리키는 데 초기에 사용된 그곳의 원래 이름이었다. (민 33:51; 35:10, 14)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정복하기 전 어느 때엔가 가나안 민족인 아모리 사람들은 요르단 강 동쪽 땅도 침략하였다.—민 21:13, 26.
경계와 초기 역사 가나안의 경계에 대해 최초로 묘사한 내용에서는 그 경계가 북쪽으로 시돈에서부터 남서쪽으로 가자 근처의 그랄까지, 그리고 남동쪽으로 소돔과 그 이웃 도시들까지 뻗어 있었음을 알려 준다. (창 10:19) 하지만 아브라함 시대에는 소돔을 비롯한 “그 ‘지역’의 도시들”이 가나안과는 별개의 지역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 (창 13:12) 아브라함과 롯의 자손들이 거주하던 후대의 에돔과 모압의 영토 역시 가나안 밖에 있는 지역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 (창 36:6-8; 출 15:15) 이스라엘 나라에게 약속된 가나안의 영토는 그 대체적인 범위가 민수기 34:2-12에 더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그 영토는 북쪽으로 시돈 너머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이집트 급류 골짜기”와 가데스-바네아까지 뻗어 있었던 것 같다. 가나안 사람들이 아닌 블레셋 사람들(창 10:13, 14)이 샤론 평야의 남쪽에 있는 해안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그곳도 이전에는 가나안 사람들의 땅으로 “여겨졌다.” (수 13:3) 겐 사람들(후에 이 부족 가운데 한 가족은 미디안과 연관되어 나옴. 민 10:29; 판 1:16)이나 아말렉 사람들(에서의 자손. 창 36:12)과 같은 그 밖의 부족들도 그 영토 안에 들어와 있었다.—창 15:18-21; 민 14:45.
바벨에서 흩어지는 일이 있은 후(창 11:9) 가나안의 자손들이 곧바로 이 땅으로 이주해서 정착했는지, 아니면 먼저 함족의 주류를 이루는 집단과 함께 아프리카로 간 다음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돌아왔는지에 대해서 성서는 알려 주지 않는다. 어쨌든 아브라함이 밧단-아람에 있는 하란을 떠나 그 땅으로 향했던 기원전 1943년 무렵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그곳에 정착해 있었으며, 아브라함은 아모리 사람들과 헷 사람들과 여러 차례 접촉하였다. (창 11:31; 12:5, 6; 13:7; 14:13; 23:2-20)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느님으로부터 그의 씨 즉 자손들이 그 땅을 상속할 것이라는 약속을 거듭거듭 받았으며, “그 땅을 그 길이로도 다녀 보고, 그 너비로도 다녀 보”라는 지시를 받았다. (창 12:7; 13:14-17; 15:7, 13-21; 17:8) 아브라함은 이 약속에 근거하여 그리고 하느님의 저주에 대한 존중심에서 우러나와, 가나안 여자가 자기 아들 이삭의 아내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였다.—창 24:1-4.
아브라함이 그리고 후에는 이삭과 야곱이 많은 소 떼와 양 떼를 이끌고 그 땅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기가 비교적 쉬웠던 것을 보면 그 지역이 아직 인구가 조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창 34:21 비교) 고고학 조사 결과 역시 그 당시에는 정착지가 다소 드물었고 대부분의 성읍들이 해안을 끼고 있는 곳이나 사해 지역, 요르단 골짜기, 이스르엘 평야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증거를 제시해 준다. 기원전 두 번째 천년기 초의 팔레스타인에 관하여 W. F. 올브라이트는, 구릉성 산지에는 대체로 아직 정착민이 살지 않았으므로, 자신들이 이용할 수 있는 땅이 아직도 많았던 중앙 팔레스타인의 구릉성 산지와 남쪽의 건조 지역을 족장들이 떠돌아다녔다는 성서의 전승은 전적으로 정확한 것이라고 말한다. (「팔레스타인 고고학과 성서」 Archaeology of Palestine and the Bible, 1933년, 131-133면) 가나안은 당시 엘람 사람들(따라서 셈족)의 영향력과 지배 아래 있었던 것 같은데, 창세기 14:1-7의 성서 기록에서는 그 점을 시사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세겜(창 12:6), 베델과 아이(창 12:8), 헤브론(창 13:18), 그랄(창 20:1), 브엘-세바(창 22:19)와 같은 성읍들 근처에 진을 쳤다. 가나안 사람들이 히브리인 족장들에게 크게 적대감을 나타내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그 족장들이 공격을 받지 않게 해 준 주요인은 하느님의 보호였다. (시 105:12-15) 일례로, 야곱의 아들들이 히위 사람의 도시 세겜을 습격한 뒤에도, “하느님으로 인한 무서움”이 이웃 도시들에 임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야곱의 아들들의 뒤를 쫓지 못하였다.”—창 33:18; 34:2; 35:5.
세속 역사는 이스라엘이 정복하기 전 약 2세기 동안 이집트가 가나안에 대해 종주권을 행사했음을 지적한다. 이 기간에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다스린 속국 통치자들이 파라오 아멘호테프 3세와 파라오 아크나톤에게 보낸 전갈들(아마르나 문서들로 알려져 있음)을 보면, 그 지역에서 도시 간의 분쟁과 정치적인 음모가 적잖았음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이 그 지역의 경계에 도착했을 때(기원전 1473년), 가나안은 도시 국가나 소규모 왕국이 많은 땅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부족들 간의 관계에 따라 여전히 어느 정도 단합된 모습도 보였다. 거의 40년 전에 그 땅을 탐지했던 정탐꾼들은 그 땅이 열매가 풍성하고 그 도시들이 견고하게 요새화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민 13:21-29. 신 9:1; 느 9:25 비교.
가나안 부족들의 분포 상황 가나안의 11개 부족들(창 10:15-19) 가운데, 그 땅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부족은 아모리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아모리 사람 참조) 아모리 사람들을 언급한 곳들을 보면, 그들은 요르단 강 동쪽의 바산과 길르앗에서 그들이 정복한 땅 외에, 가나안 본토의 산악 지역의 북부와 남부에서도 강성했음을 알 수 있다. (수 10:5; 11:3; 13:4) 두 번째로 강했던 부족은 아마 헷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아브라함 시대에는 멀리 남쪽 헤브론에 있었지만(창 23:19, 20), 후에는 북쪽의 시리아 쪽에서 주로 살았던 것 같다.—수 1:4; 판 1:23-26; 왕첫 10:29.
그 밖의 부족들 가운데, 정복 기간에 그다음으로 자주 언급되는 부족은 여부스 사람들과 히위 사람들과 기르가스 사람들이다. 여부스 사람들은 예루살렘 주위의 산악 지역을 중심으로 거주했던 것 같다. (민 13:29; 수 18:16, 28) 히위 사람들은 남쪽의 기브온에서부터(수 9:3, 7) 북쪽의 헤르몬 산 기슭에까지 흩어져 있었다. (수 11:3) 기르가스 사람들의 영토는 나와 있지 않다.
그 외의 나머지 여섯 부족 즉 시돈 사람들, 아르왓 사람들, 하맛 사람들, 알가 사람들, 신 사람들, 스말 사람들은 다른 부족들의 구체적인 이름과 함께 적잖게 사용된 “가나안 사람들”이라는 포괄적인 표현에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 표현이 단지 여러 가나안 부족들이 뒤섞여 사는 도시나 집단을 가리키는 경우는 그렇지 않다. (출 23:23; 34:11; 신 7:1; 민 13:29) 이 여섯 부족은 모두 이스라엘 사람들이 처음에 정복했던 지역의 북쪽에 주로 자리 잡고 살았기 때문에 정복과 관련된 기록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은 듯하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1권, 737, 738면 지도) 이집트에서 탈출한 후 두 번째 해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최초로 가나안의 남쪽 경계를 뚫고 들어가려고 시도했지만, 하느님의 후원이 없었으므로 가나안 사람들과 그 동맹군인 아말렉 사람들에게 패하여 도망하였다. (민 14:42-45) 40년간의 방랑 기간이 끝나 갈 무렵, 이스라엘은 다시 가나안 사람들을 향해 이동하다가 네게브에 있는 아랏의 왕의 공격을 받았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가나안 군대가 패했고 그들의 도시들은 멸망되었다. (민 21:1-3)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승리의 여세를 몰아 남쪽에서 침략한 것이 아니라 우회하여 가서 동쪽에서 접근하였다. 이로 인해 그들은 시혼과 옥의 아모리 왕국들과 격돌하게 되었으며, 이 왕들이 패배하자 바산과 길르앗 땅 전체는 이스라엘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높은 성벽과 성문과 빗장”을 갖춘 도시가 바산에만도 60개나 되었다. (민 21:21-35; 신 2:26–3:10) 이 막강한 왕들이 패배했기 때문에 요르단 강 서쪽의 가나안 왕국들은 사기가 떨어졌으며, 이어서 기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발을 적시지도 않고 요르단 강을 건너자 가나안 사람들은 마음이 ‘녹았다.’ 그래서 가나안 사람들은 많은 이스라엘 남자들이 할례에서 회복되는 동안, 그리고 이어서 유월절을 지키는 동안 길갈에 있는 이스라엘 진영을 전혀 공격하지 못하였다.—수 2:9-11; 5:1-11.
이제 길갈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요르단 강으로부터 물을 풍부히 얻을 수 있고 요르단 강 동쪽의 정복한 지역에서 식품을 공급받을 수 있었으므로, 그 땅의 정복을 계속 진행해 나갈 수 있는 훌륭한 거점을 확보한 셈이 되었다. 이제는 굳게 닫힌 인근의 변경 도시 예리코가 그들의 첫 번째 표적이었는데, 그 튼튼한 성벽은 여호와의 능력에 의해 무너졌다. (수 6:1-21) 그다음에 공격군은 예루살렘 북쪽의 산간 지방으로 1000미터 정도 올라갔으며, 처음에 한 차례 패배를 당한 뒤 아이를 함락시키고 불살랐다. (수 7:1-5; 8:18-28) 그 땅 전역의 가나안 왕국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격퇴하기 위해 대규모 동맹을 맺기 시작했지만, 히위 사람들의 여러 도시들은 계략을 사용하여 이스라엘과 평화를 구하였다. 이렇게 기브온과 그 인근의 다른 세 도시가 이탈한 것을 다른 가나안 왕국들은 전체 ‘가나안 동맹’의 연합에 위협이 되는 반역 행위로 간주한 듯하다. 그래서 가나안의 다섯 왕은 힘을 합하여 이스라엘이 아니라 기브온과 싸웠으며,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는 그 포위된 도시를 구해 주기 위해 밤새 행군하였다. 공격해 온 다섯 왕을 여호수아가 쳐부수는 과정에서 기적으로 거대한 우박이 퍼붓는 일과 하느님께서 일몰을 지연시켜 주시는 일이 있었다.—수 9:17, 24, 25; 10:1-27.
승리한 이스라엘 군대는 뒤이어 가나안의 남쪽 절반을 이루는 지역 전체(블레셋 평야는 제외)를 휩쓸고 나아가면서 세펠라와 산간 지방과 네게브의 도시들을 정복한 다음 요르단 강가의 길갈에 있는 기지로 돌아왔다. (수 10:28-43) 그러자 하솔 왕이 이끄는 북부 지역의 가나안 사람들은 군대와 병거들을 모아 갈릴리 바다 북쪽에 있는 메롬 물가의 집결지에서 동맹군을 조직하였다. 하지만 여호수아의 군대는 가나안 동맹군을 기습하여 패주시킨 뒤 계속 행군하면서 북쪽으로 멀리 헤르몬 산 기슭에 있는 바알-갓까지 그들의 도시들을 함락시켰다. (수 11:1-20) 이 원정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던 것으로 보이며, 그 후 남쪽의 산악 지역에서 또 한 번 공세를 펴는 일이 있었는데, 이 공격은 거인 같은 아나김과 그들의 도시들에 대한 것이었다.—수 11:21, 22. 아나김 참조.
이제 전쟁을 시작한 때로부터 6년 정도가 지났다. 가나안 정복은 대부분 완수되었고, 가나안 부족들은 세력이 꺾여 있어서, 그 땅을 이스라엘의 지파들에게 분배하는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경계 참조) 하지만 여전히 정복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던 지역이 얼마간 있었는데, 그 가운데는 가나안 사람들은 아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약속된 땅을 불법으로 차지하고 있던 블레셋 사람들의 영토, 그술 사람들의 영토(삼첫 27:8 비교), 시돈 부근 지역부터 그발(비블로스)까지의 영토, 레바논 지역 전체와 같은 주요한 부분들도 있었다. (수 13:2-6) 그에 더하여 그 땅 전역에는 고립된 상태로 저항을 계속한 작은 지역들이 곳곳에 있었는데, 그중에는 땅을 상속받은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후에 함락된 곳도 있었고, 정복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곳이나 존속하도록 허용되어 그 주민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 강제 노역을 하게 된 곳도 있었다.—수 15:13-17; 16:10; 17:11-13, 16-18; 판 1:17-21, 27-36.
상당수의 가나안 사람들이 주요 정복 기간을 생존했고 복종하기를 거부하며 저항하기는 했지만,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기로 맹세하신 모든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고, 그들에게 “사방에 쉼을” 주셨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집에 하신 모든 선한 약속 중에서 하나의 약속도 어긋남이 없이 다 이루어졌다”는 말은 여전히 참되다고 할 수 있었다. (수 21:43-45) 이스라엘 사람들 주위에서 적대하던 민족들은 위축되어 있었으며, 그들의 안전에 실질적인 위협이 되지 못하였다. 일찍이 하느님께서는 땅이 갑자기 황폐되어 들짐승이 많아지지 않도록 가나안 사람들을 “조금씩” 몰아내시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출 23:29, 30; 신 7:22) 가나안 사람들이 철낫이 달린 병거와 같은 더 우수한 전쟁 장비를 갖고 있기는 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최종적으로 어떤 지역들을 차지하지 못한 데 대해 여호와께서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신 것이라고 그분을 탓할 수 없었다. (수 17:16-18; 판 4:13) 오히려 기록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몇 차례 패배한 것이 그들의 불충실함 때문이었음을 알려 준다.—민 14:44, 45; 수 7:1-12.
여호와께서 가나안 사람들을 진멸하도록 명령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역사 기록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정복된 가나안 도시들의 주민이 완전히 멸망되었음을 알려 준다. (민 21:1-3, 34, 35; 수 6:20, 21; 8:21-27; 10:26-40; 11:10-14) 일부 비평가들은 이 사실을 근거로 히브리어 성경 즉 “구약”에는 잔인함과 무자비한 살육의 정신이 배어 있다고 설명해 왔다. 하지만 여기에 관련된 쟁점은 땅과 그 주민에 대한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하는가의 여부임이 분명하다. 그분은 이전에 가나안 땅의 소유권을 ‘아브라함의 씨’에게 양도하셨는데, 맹세로 보증한 계약을 통해 그렇게 하셨다. (창 12:5-7; 15:17-21. 신 32:8; 행 17:26 비교) 하지만 하느님께서 목적하신 바는 단지 그 땅에 일시적으로 살도록 허락된 자들을 축출하거나 쫓아내는 일만이 아니었다. “온 땅의 ‘심판관’”(창 18:25)으로 행동하시어 사형받아 마땅한 것으로 밝혀지는 자들에게 그러한 형을 선고하실 권리, 그리고 그처럼 선고하신 것을 이행하고 집행하실 그분의 권리 역시 관련되어 있었다.
가나안에 대한 하느님의 예언적 저주가 정당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무렵 그곳에 전개되어 있던 상황을 통해 온전히 확증되었다. 여호와께서는 ‘아모리 사람들의 잘못이 온전히 차도록’ 아브라함 시대부터 400년을 허락하셨다. (창 15:16) 에서의 아내들인 헷 여자들이 “이삭과 리브가에게 영의 비통함의 근원”이 되어 리브가가 ‘그들 때문에 자기 생명을 몹시 싫어하게 될’ 정도였다는 사실은, 가나안 사람들 가운데서 이미 악한 상태가 나타나 있었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창 26:34, 35; 27:46) 그 후 여러 세기 동안, 가나안 땅에는 우상 숭배와 부도덕과 유혈 행위 같은 역겨운 관행들이 가득하였다. 가나안의 종교는 대단히 퇴폐적이고 타락한 것으로서, 그들의 “신성한 목상”과 “신성한 기둥”은 남근의 상징물이었던 것 같으며, 그들의 “산당”에서 행해진 의식들에는 많은 경우 추잡스러운 무절제한 성행위와 타락한 관행이 관련되어 있었다. (출 23:24; 34:12, 13; 민 33:52; 신 7:5) 근친상간, 남색, 수간은 ‘가나안 땅이 행하는 방식’의 일부였으며, 그로 인해 그 땅은 부정하게 되었고 또한 그 잘못 때문에 그 땅은 “주민들을 토해 낼” 것이었다. (레 18:2-25) 주술, 주문으로 사람을 얽매는 일, 영매술, 자녀를 불태워 희생으로 바치는 일 역시 가나안 사람들의 역겨운 관행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다.—신 18:9-12.
바알은 가나안 사람들이 숭배한 신들 가운데 가장 탁월한 신이었다. (판 2:12, 13. 판 6:25-32; 왕첫 16:30-32 비교) 가나안의 여신 아스도렛(판 2:13; 10:6; 삼첫 7:3, 4), 아세라, 아낫은, 이집트의 한 문헌의 묘사에 따르면, 모신(母神)이자 신성한 매춘부이면서도, 모순되게도 종신 처녀 상태를 유지하는 존재들(문자적으로, “수태는 하지만 출산은 하지 않는 위대한 여신들”)이라고 한다. 그들의 숭배에는 언제나 신전 매춘부들의 봉사가 수반되었던 것 같다. 이 여신들은 성적인 정욕뿐 아니라 가학성 폭력과 전쟁과 같은 속성도 상징하였다. 일례로, 우가리트에서 발견된 바알의 서사시에는 아낫 여신이 남자들을 모두 살육하는 일이 일어나게 한 뒤 그 머리들을 자기 몸에 매달아 치장하고 허리띠에 그 남자들의 손들을 붙이고는 기쁨에 차서 그들의 피 속을 철벅거리며 다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팔레스타인에서 발견된 아스도렛 여신의 작은 입상들은 성 기관을 노골적으로 부각시켜 묘사한 여자의 나체상이다. 그들의 남근 숭배에 관해서 고고학자 W. F. 올브라이트는 이렇게 논평한다. “그들의 숭배 의식의 관능적인 부면은 ··· 악할 대로 악하여 ··· 사회적 퇴폐와 관련하여 극도로 더러운 수준까지 타락했음에 틀림없다.”—「고고학과 이스라엘 종교」(Archaeology and the Religion of Israel), 1968년, 76, 77면. 바알 4번; 아스도렛 참조.
그들의 타락한 관습들에는 자녀 희생의 관습도 포함되어 있었다. 메릴 F. 웅거에 의하면, “팔레스타인에서 행해진 발굴 조사에서는 유아들을 태운 재와 그 유골을 쌓아 놓은 무더기들이 이교 제단들 주위의 묘지들에서 발견되어, 이 잔인하고 혐오스러운 관습이 널리 퍼져 있었음을 보여 주었다.” (「고고학과 구약」 Archaeology and the Old Testament, 1964년, 279면) 「핼리의 성서 핸드북」(Halley’s Bible Handbook, 1964년, 161면)은 이렇게 말한다. “가나안 사람들은 그들의 신들 앞에서 종교 의식으로 부도덕한 행위를 하고 그런 다음 그 신들에게 바치는 제물로 첫아이를 죽이는 식으로 숭배 행위를 하였다. 전반적으로 가나안 땅은 민족적인 차원으로 소돔과 고모라처럼 되었던 것 같다. ··· 이처럼 혐오스러울 정도로 더럽고 잔인한 문명이 더 오래 존속할 권리가 있었을까? ··· 가나안 성읍들의 폐허를 발굴하는 고고학자들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더 일찍 멸망시키지 않으신 것을 의아하게 여긴다.”—1권, 739면 사진.
세계적인 홍수 때 여호와께서는 지구 전역의 악한 주민들에게 사형 선고를 집행할 주권자로서의 권리를 행사하셨다. 그분은 소돔과 고모라 도시들이 있는 ‘지역’ 전체와 관련해서도 ‘그 도시들에 대한 큰 불평의 부르짖음과 매우 무거운 그들의 죄’ 때문에 같은 일을 하셨다. (창 18:20; 19:13) 그리고 홍해에서는 파라오의 군대에 대한 멸망의 판결을 집행하셨다. 또한 그분은 다름 아닌 이스라엘 사람들에 속하는 고라와 그 밖의 반역자들의 집안들도 진멸하셨다. 하지만 그러한 경우에 하느님께서는 멸망을 가져오실 때 자연의 힘을 사용하셨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이제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신성한 판결의 주요한 집행자들로 섬기는 거룩한 임무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맡기셨다. 그들은 그분이 사자로 사용하신 천사의 인도를 받았고 하느님의 전능한 힘의 후원을 받았다. (출 23:20-23, 27, 28; 신 9:3, 4; 20:15-18; 수 10:42) 그렇지만 가나안 사람들이 당한 결과는 하느님께서 그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홍수나 맹렬한 폭발이나 지진과 같은 현상을 사용하는 쪽을 택하실 경우나 전혀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정죄받은 민족들에게 인간 대행자들이 사형을 집행했다고 해서—그들의 임무가 얼마나 불유쾌해 보이든 간에—하느님께서 정해 놓으신 조처의 정당성이 조금이라도 약화되는 것은 아니다. (렘 48:10) 그러한 인간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그들이 자기들보다 “인구가 더 많고 강대한 일곱 나라”에 맞서게 하신 결과, 여호와의 능력이 드높여졌고 그분의 신격이 증명되었다.—신 7:1; 레 25:38.
또한 가나안 사람들이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택함을 받은 백성이자 도구임을 보여 주는 강력한 증거에 대해 몰랐던 것도 아니다. (수 2:9-21, 24; 9:24-27) 하지만 멸망을 받게 된 사람들은 라합과 그의 가족과 기브온 사람들의 도시들 외에는 아무도 자비를 구하거나 모면할 기회를 이용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완고한 태도로 여호와께 반항하는 쪽을 택하였다. 그분은 그들을 강제로 굴복시켜서 그분이 명시하신 뜻에 억지로 복종하게 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마음이 고집스럽게 되어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전쟁을 선포하게” 내버려 두셨다. “이는 그들을 멸망에 바치기 위한 것으로, 그들이 호의적인 배려를 받지 못하게 하고, 도리어 [그들에 대한 그분의 심판이 집행되게 하여] 그들을 멸절하려는 것이었다.”—수 11:19, 20.
여호수아는 현명하게도, 가나안 사람들을 멸망시키는 일과 관련하여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에서 한 마디도 없애지 않았다.” (수 11:15)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여호수아의 훌륭한 인도를 잘 따라서 그 땅을 오염시키는 원인이 되는 존재들을 완전히 제거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가나안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계속 남아 있음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악영향을 받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러한 악영향은 모든 가나안 사람들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했을 경우보다 (범죄, 부도덕, 우상 숭배는 말할 것도 없고) 더 많은 인명 피해를 가져왔을 것임에 틀림없다. (민 33:55, 56; 판 2:1-3, 11-23; 시 106:34-43)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분의 공의와 그분의 심판은 편파적이지 않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통혼하고 연합 신앙을 행하고 그들의 종교 관습과 타락한 관행을 받아들인다면 그들도 필연적으로 멸망이라는 동일한 판결을 받게 될 것이며, 그 결과 ‘그 땅에서 토해 내어 질’ 것이라고 경고하셨다.—출 23:32, 33; 34:12-17; 레 18:26-30; 신 7:2-5, 25, 26.
재판관기 3:1, 2에서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곧 가나안 전쟁을 전혀 경험하지 않은 모든 자를 시험하시려고” 일부 가나안 나라들을 머무르게 하셨는데, “그것은 다만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들이 경험을 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으니, 그들 곧 전에 그런 일들을 경험하지 않은 자들에게 전쟁을 가르치시려는 것이었다”고 알려 준다. 이것은 이전에 하신 말씀 즉 여호와께서 그 나라들이 남아 있도록 허용하신 것이 이스라엘의 불충실 때문이며, ‘그들이 여호와의 길을 지키는 사람이 되는지 시험하’기 위해서라는 말씀(판 2:20-22)과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그러한 이유와 일치한 것이며, 후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사람들에 관한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는지를 나타낼 기회를 그런 식으로 맞게 되고, 순종심을 증명하기 위해 전쟁에서 생명을 위험에 처하게 할 정도까지 그들의 믿음이 시험받게 될 것임을 알려 준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해 볼 때, 가나안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의해 멸망된 일이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나타나 있는 정신과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는 일부 성서 비평가들의 의견은 사실과 일치하지 않음이 분명하다. 마태 3:7-12과 22:1-7과 23:33과 25:41-46, 또한 마가 12:1-9과 누가 19:14, 27과 로마 1:18-32, 그리고 데살로니가 둘째 1:6-9 및 2:3과 계시록 19:11-21과 같은 성구들을 비교해 보면 그 점이 증명될 것이다.
후기 역사 정복 기간 이후 가나안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의 상황은 비교적 평화로운 일종의 공존 관계로 점차 바뀌었다. 하지만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해가 될 것이었다. (판 3:5, 6. 판 19:11-14 비교) 시리아와 모압과 블레셋의 통치자들은 연이어 이스라엘 사람들을 잠깐씩 지배했지만, 가나안 사람들은 “가나안 왕”이라고 불린 야빈 시대에 가서야 충분한 세력을 되찾아 이스라엘을 20년 동안 복종시킬 수 있었다. (판 4:2, 3) 야빈이 결국 바락에게 패배한 후로, 이스라엘이 왕국 시대 이전 기간에 겪은 어려움은 대부분 가나안 사람 외의 다른 민족들 즉 미디안 사람들, 암몬 사람들,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왔다. 사무엘 시대에도 가나안 부족들 가운데 아모리 사람들만이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다. (삼첫 7:14) 다윗 왕이 여부스 사람들을 예루살렘에서 몰아내기는 했지만(삼둘 5:6-9), 그가 벌인 주된 군사 행동은 블레셋 사람들, 암몬 사람들, 모압 사람들, 에돔 사람들, 아말렉 사람들, 시리아 사람들을 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가나안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영토 내에서 여전히 도시들을 차지하고 땅을 소유하고 있었지만(삼둘 24:7, 16-18), 더는 군사적으로 위협이 되지 않은 듯하다. 다윗의 군대에 속한 전사 중에는 헷 사람 두 명이 언급되어 있다.—삼첫 26:6; 삼둘 23:39.
솔로몬은 통치 중에 가나안 부족들 가운데 남은 자들로 하여금 그가 벌인 많은 건축 공사에서 강제 노역을 하게 하여(왕첫 9:20, 21), 멀리 북쪽에 있는 가나안 사람들의 도시 하맛에서까지 건축 활동을 추진하였다. (대둘 8:4) 하지만 솔로몬의 가나안인 아내들은 후에 솔로몬이 몰락하고 그의 상속자가 왕국의 많은 부분을 잃고 그 나라가 종교적으로 부패해지게 하는 데 일조하였다. (왕첫 11:1, 13, 31-33) 솔로몬 통치(기원전 1037-998년) 때부터 이스라엘의 여호람 통치(기원전 917-905년경) 때까지 하나의 부족으로서 무시하지 못할 지위와 힘을 유지했던 사람들은 헷 사람들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들도 이스라엘 영토의 북쪽, 시리아 근처나 시리아 내에 살았던 것 같다.—왕첫 10:29; 왕둘 7:6.
가나안 사람들과의 통혼은 바빌론 유배 후에 돌아온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도 여전히 문젯거리였지만(라 9:1, 2), 헷 사람들의 왕국을 포함한 가나안 왕국들은 시리아와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침략의 영향으로 붕괴되고 만 것 같다. “가나안”이라는 표현은 티레에 관한 이사야의 예언에서처럼(사 23:1, 11, 각주), 그리고 예수께 가까이 간 티레와 시돈 지역 출신의 “페니키아”(문자적으로 “가나안 사람”[그리스어, 카나나이아]) 여자의 경우처럼, 주로 페니키아를 가리키게 되었다.—마 15:22, 각주. 막 7:26 비교.
상업적, 지정학적 중요성 가나안은 이집트를 아시아와,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메소포타미아와 연결하는 육상 가교 역할을 하였다. 그 지역은 경제가 기본적으로 농경에 의존하고 있었지만 무역 역시 행해졌으며, 티레와 시돈의 항구 도시들은 당시에 알려진 세계 전역에서 유명했던 선단을 보유한 주요 무역 중심지가 되었다. (겔 27장 비교) 그래서 일찍이 욥 시대에도 “가나안 사람”이라는 말은 “장사꾼”이라는 말의 동의어가 되어 있었고 번역도 그렇게 되어 있다. (욥 41:6; 습 1:11. 또한 바빌론을 가리켜 “가나안 땅”이라고 언급한 겔 17:4, 12에도 유의) 이처럼 가나안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 내에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서, 가나안의 영토를 통해 이루어지는 군사적 통행과 상업적 왕래를 통제하려고 했던 메소포타미아, 소아시아, 아프리카의 대제국들의 표적이 되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자신의 택함을 받은 백성을 이 땅에 두신 것은 여러 나라의 주의를 끌어서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지리적인 의미에서—그리고 좀 더 중요한 것으로 종교적인 의미에서—이스라엘 사람들은 “땅의 중앙에” 거주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겔 38:12.
언어 성서 기록은 가나안 사람들이 함족임을 분명히 지적하지만, 대다수의 참조 자료는 그들이 셈족 출신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분류는 가나안 사람들이 셈어 가운데 하나를 사용했다는 증거에 근거한 것이다. 가장 자주 지적되는 증거는 라스샴라(우가리트)에서 발견된 매우 많은 문헌들인데, 이 문헌들은 셈어에 속한 한 언어나 방언으로 기록되어 있고 일찍이 기원전 14세기에 기록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우가리트는 성서에서 알려 주는 가나안의 경계 내에 들어 있지 않았던 것 같다. 「성서 고고학자」(The Biblical Archaeologist, 1965년, 105면)에 실린, A. F. 레이니가 쓴 한 기사에서는 인종적, 정치적, 그리고 아마도 언어학적 근거로 볼 때, “우가리트를 ‘가나안의’ 도시라고 부르는 것은 호칭상의 착오임이 이제는 확실하다”고 알려 준다. 그는 “우가리트와 가나안 땅이 정치적으로 서로 분리된 별개의 존재들”이었음을 보여 주는 부가적인 증거를 제시한다. 그러므로 이 서판들은 가나안 사람들의 언어를 확인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명확한 판단 기준을 전혀 제시해 주지 않는다.
이집트에서 발견된 아마르나 문서 가운데 다수는 분명 가나안 본토에 있는 여러 도시의 통치자들이 보내온 것인데, 이 서판들은 셈어의 일종인 아카드어의 설형 문자로 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언어는 당시 중동 지역 전체의 외교 언어여서 심지어 이집트 궁중에 편지를 쓸 때도 사용되었다. 따라서 「해설자의 성서 사전」(The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 G. A. 버트릭 편, 1962년, 1권, 495면)에 실린 다음과 같은 내용은 매우 흥미로운 것이다. “아마르나 서한들에는 셈족에 속하지 않는 민족들이 비교적 이른 시기에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에 정착했다는 견해를 지지하는 증거가 들어 있는데, 그 가운데 몇몇 서한들에는 셈어에 속하지 않은 언어들의 영향이 주목할 만하게 나타나 있다.” (사체는 본서에서) 최초의 가나안 주민들이 사용한 원래 언어와 관련하여 여전히 불확실한 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성서 기록 자체에서도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이 통역자가 필요 없이 가나안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 주는 것 같다는 점은 사실이다. 그리고 셈어식이 아닌 형태의 지명들이 일부 사용되기는 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함락시킨 대부분의 성읍과 도시들에는 이미 셈어식 이름이 붙어 있었다는 사실도 유의할 만하다. 하지만 블레셋 왕들이 아브라함 시대에 완전히 셈어식 이름(또는 칭호)인 “아비멜렉”으로 불렸고 아마 다윗 시대에도 그랬던 것 같다고 해서(창 20:2; 21:32; 시 34 머리글), 블레셋 사람들이 셈족이었다고는 어디에서도 주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바벨에서 언어의 혼란이 있은 때로부터(창 11:8, 9) 여러 세기가 지나면서 가나안 부족들의 언어는 원래의 함 계통의 언어에서 셈 계통의 언어로 변화한 것 같다. 이것은 한동안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의 지배를 받은 결과로 그들이 아람어를 말하는 시리아 사람들과 밀접하게 접촉했기 때문이었을 수 있다. 혹은 지금은 밝혀지지 않은 다른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한 변화는 고대의 다른 나라들의 경우에 비하면 큰 변화라고도 할 수 없는데, 일례로 고대 페르시아 사람들은 인도·유럽 어족(야벳 계통)에 속했지만 후에 셈어인 아람어와 그 문자를 받아들였다.
이사야 19:18에 언급되어 있는 “가나안 말”은, 그 무렵(기원전 8세기)에 이 땅의 주요 언어였던 히브리어를 가리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