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여호와를 그분의 높은 표준과 일치하게 섬기라
1. 스바냐 시대에 예루살렘 사람들은 여호와의 표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였습니까?
“여호와께서는 선을 행하지도 않으시고 악을 행하지도 않으실 것이다.” 스바냐 시대에 예루살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자기들이 어떤 특정한 표준에 달하는 생활을 할 것을 기대하지 않으신다고 추리하였습니다. 스바냐는 그들이 저장된 포도주의 바닥에 가라앉는 ‘찌꺼기 위에 응고되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하느님께서 그 백성의 일에 개입하실 것임을 아무리 선언해도 그들이 개의치 않고 자신들의 안일한 생활에 안주하고 싶어 했다는 의미였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자신이 “등불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주의 깊이 살펴볼 것”이고 자신의 표준을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울이겠다”라고 그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께서는 표준을 가지고 계시며, 자신의 백성이 그 표준을 어떻게 여기는지에 관심을 기울이십니다.—스바냐 1:12.
2. 당신이 사는 지역의 사람들은 표준을 갖는 것에 대해 일반적으로 어떻게 생각합니까?
2 오늘날에도 표준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내게 돈이 부족하거나 내 욕구가 충족되지 않고 있다면 형편이 좋아지게 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라면 무슨 일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어떻게 느끼실지, 또는 그분이 그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실지에 대해서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창조주께서 표준을 세우신다는 것을 달갑게 여깁니까?
3, 4. 표준이 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 하느님의 표준에 달하는 생활은 하기 싫어하면서도 생활상의 다양한 부면에 대한 사람의 표준은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례로, 수질(水質) 기준은 어떠합니까? 대부분의 정부들은 급수용으로 사용하려는 물에 대해 수질 기준, 다시 말해 표준을 세워 놓습니다. 그런데 그 표준이 너무 낮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설사를 비롯한 수인성 질병이 돌면서 특히 어린이들이 해를 입을 것입니다. 하지만 식수의 수질 기준 곧 표준이 높으면 필시 유익이 될 것입니다. 국제 표준 기구에서는 “표준이 없으면 금세 알 수 있다”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흔히들 잘 모르고 있는 것은 표준이 있을 때 품질, 안전성, 신뢰성, 효율, 호환성 등의 수준이 향상되고 비용 절감 같은 효과도 있다는 점이다.”
4 생활상의 여러 부면에 표준이 있을 때 유익한 것이 사실이라면, 하느님께서도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달해야 할 높은 표준을 가지고 계실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논리적이지 않겠습니까?—사도 15:14.
하느님의 표준은 달하기 어려운 것인가?
5.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표준에 달하는 것이 중요함을 아모스를 통해 어떻게 알려 주셨습니까?
5 집을 짓는 사람에게 표준은 중요합니다. 벽 하나를 수직으로 세우지 못하면 집 전체가 기울어질 수 있습니다. 또한 벽과 벽 사이가 벌어져 있어도 사람이 살 수 없는 집이 될 수 있습니다. 기원전 9세기에 예언하는 일을 한 아모스는 열 지파 이스라엘 나라의 상태에 관한 환상을 보았는데, 그 환상의 요지가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손에 다림줄’을 가지고 성벽 위에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다림줄을 드리우겠다. 내가 그들에게 더는 어떤 관용도 베풀지 않을 것이다.” (아모스 7:7, 8) 다림줄이란 추를 달아 늘어뜨린 줄로서, 수직이 똑바른지 확인하는 데 사용됩니다. 아모스가 본, 여호와께서 서 계신 비유적인 성벽은 “다림줄을 써서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 성벽은 올바르게 수직으로 서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모스 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더는 영적으로 올바른지 검사하는 표준에 부합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무너지기 전에 헐어 버려야 할 기울어진 벽과도 같았습니다.
6. (ㄱ) 열두 예언자의 기록에 나오는 핵심 사상 한 가지는 무엇입니까? (ㄴ) 하느님의 표준은 달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6 열두 예언자의 책들을 연구하면 반복해서 나오는 요점이 있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표준을 따르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이 책들에는 하느님의 높은 표준에 달하지 못한 백성을 질책하는 소식만 들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검사하실 때 그들이 분명히 자신의 표준에 달하였다고 판정하신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여호와의 표준이 달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며, 우리처럼 불완전한 사람들도 그 표준에 달할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한 가지 예를 고려해 보겠습니다.
7. 스가랴의 내용은 불완전한 사람이라도 여호와의 표준에 달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됩니까?
7 귀환한 유대인들이 성전의 기초를 놓은 후 재건 공사가 중단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예언자 학개와 스가랴를 통해 백성이 공사를 재개하도록 격려하셨습니다. 스가랴에게 주어진 한 환상에서 여호와께서는 유다 총독 스룹바벨이 성전의 머릿돌을 놓아 공사를 마무리 지을 때 그의 ‘손에 다림줄’이 있는 것으로 묘사하셨습니다. 성전은 하느님의 표준과 일치하게 지어졌던 것입니다. (스가랴 4:10) 그런데 완공된 성전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세부점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일곱은 여호와의 눈이다. 이들이 온 땅을 두루 살피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스룹바벨이 머릿돌을 제자리에 놓는 것을 보셨으며,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눈으로 그 재건된 성전이 그분의 검사 기준에 부합되고 그분의 표준에 달한 것임을 보셨습니다! 요컨대, 여호와의 표준은 높기는 하지만 사람이 달할 수 있는 표준입니다. 스룹바벨과 백성은 학개와 스가랴의 격려를 받아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스룹바벨처럼 하느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 점을 알 때 참으로 안도감을 갖게 됩니다!
여호와의 표준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8, 9. (ㄱ)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따라야 할 표준을 세우시는 것이 합당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분의 계명을 지킬 것을 요구하신 것이 타당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8 하느님께서는 창조주이시므로 인류가 따라야 할 표준을 세우고 그들이 그 표준을 따를 것을 기대할 권리를 가지고 계십니다. (계시 4:11) 여호와께서는 사람에게 양심이라는 유용한 길잡이를 주셨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일일이 명시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로마 2:14, 15) 하느님께서는 최초의 사람들에게 “선악에 대한 지식의 나무의 열매”는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나무는 선악의 표준을 세울 하느님의 권리를 상징하였습니다. 그다음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창세 2:17; 3:1-19) 호세아는 아담이 그처럼 잘못된 선택을 한 일을 염두에 두고서 “[이스라엘 백성은] 땅의 사람처럼 계약을 어겼다”라고 썼습니다. (호세아 6:7) 호세아는 그러한 말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의적으로 죄를 지었음을 알려 줍니다.
9 그들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그들은 [율법] 계약을 깨뜨렸”습니다. (신 국제역) 하느님께서는 그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출해 주셔서 그들의 소유자가 되셨으므로 분명히 그분에게는 그들이 따라야 할 표준을 세우실 권리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와 계약을 맺기로 하였으며, 그렇게 함으로 그 표준과 일치하게 살기로 하는 데 동의하였습니다. (탈출 24:3; 이사야 54:5) 그런데 많은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피를 흘리고 살인하고 음행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호세아 6:8-10.
10.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표준에 달하지 못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어떻게 하셨습니까?
10 여호와께서는 호세아와 같은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그분에게 헌신한 백성을 돕게 하셨습니다. 호세아는 자신의 예언서의 끝 부분에서 이렇게 단언하였습니다. “지혜로워서 이런 일들을 이해할 사람이 누구인가? 슬기로워서 그것들을 알 사람이 누구인가? 여호와의 길은 올바르므로 의로운 사람들은 그 길로 걸을 것이다. 그러나 범법자들은 그 길에서 걸려 넘어질 것이다.” (호세아 14:9) 호세아 14장의 앞부분에서 그 예언자는 여호와께 돌아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여호와께서 자신의 백성이 걸어야 할 올바른 길을 알려 주셨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헌신한 종으로서 분명 그 신분을 유지하면서 여호와의 길로 걷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1.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싶어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1 호세아 14:9에서는 또한 올바른 행로를 따를 때 좋은 결과가 있다는 점에도 주의를 환기시킵니다.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바에 달하면 축복과 유익을 누리게 됩니다. 그분은 창조주이시므로 우리의 구조를 아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서 기대하시는 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와 하느님의 관계가 어떠한 것인지 이해하기 위해 자동차와 그 제작자를 예로 들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자동차를 만든 사람은 자동차가 어떻게 설계되고 조립되는지를 압니다. 그는 자동차의 오일을 주기적으로 교환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만일 우리가 차가 잘 달린다고 생각하여 그러한 표준을 무시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무시하지 않았을 경우보다 엔진이 훨씬 빨리 손상되면서 결국은 못쓰게 될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조주께서는 우리에게 명령들을 주셨습니다. 그 명령들을 지키는 것은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이사야 48:17, 18)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정말로 유익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 우리는 그분의 표준과 일치한 생활을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켜야겠다는 마음을 한층 더 갖게 됩니다.—시 112:1.
12. 하느님의 이름으로 걸을 때 그분과 우리의 유대는 어떻게 강화됩니까?
12 하느님의 명령을 지키는 데 대한 가장 큰 상은 하느님과의 유대가 더 강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표준에 따라 살면서 그 표준이 달할 수 없는 것이 아니고 유익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될 때, 그 표준을 세우신 분에 대한 우리의 애정은 깊어집니다. 예언자 미가는 그처럼 돈독해진 관계를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묘사하였습니다. “모든 민족은 저마다 자기 신의 이름으로 걸을 것이나, 우리는 한정 없는 때까지, 아니, 영원히 우리 하느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걸을 것이다.” (미가 4:5) 우리가 여호와의 명성을 입증하면서 우리의 삶에 대한 그분의 권위를 인정함으로 그분의 이름으로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큰 특권입니다! 따라서 자연히 우리는 그분의 특성들을 반영하고 싶어 하게 됩니다. 하느님과 자신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우리 각자가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시 9:10.
13. 하느님의 이름을 두려워하는 것은 부정적인 두려움이나 좋지 않은 두려움이 아닌 이유는 무엇입니까?
13 하느님의 표준과 일치한 생활을 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걷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두려워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부정적인 두려움이나 좋지 않은 두려움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보증하십니다. “내 이름을 두려워하는 너희에게는 틀림없이 의로운 해가 빛나서 그 날개로 병을 고쳐 주리니, 너희가 나가서 살진 송아지처럼 발굽으로 땅을 찰 것이다.” (말라기 4:2) 이 예언의 성취에서 “의로운 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계시 1:16) 그분은 현재 빛을 비추어 영적으로 고쳐 주는 일을 하고 계시며, 결국에는 빛을 비추어 인류의 신체적인 병들까지 고쳐 주실 것입니다. 고침을 받은 사람들은, 살진 송아지가 풀려나게 되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며 ‘나가서 발굽으로 땅을 차는’ 것처럼 기뻐한다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이미 그러한 해방을 상당히 맛보지 않았습니까?—요한 8:32.
14, 15. 여호와의 표준에 고착할 때 어떤 유익을 얻게 됩니까?
14 하느님의 표준에 고착하는 것이 유익한 또 다른 면은,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하박국은 다섯 가지 화를 선언하였는데, 탐욕을 부리는 자들, 부정직한 이득을 구하는 자들, 피를 흘리는 자들, 성적 비행을 저지르기 위해 계교를 꾸미는 자들,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에게 화가 있다고 한 것입니다. (하박국 2:6-19) 여호와께서 그러한 화를 선언하셨다는 사실은, 그분이 우리가 삶을 사는 방식과 관련하여 세워 놓으신 표준이 있음을 명백히 알려 줍니다. 그런데 유의할 점은, 언급되어 있는 그 잘못된 일들 가운데 네 가지는 우리가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같은 견해를 갖게 되면 이웃을 해롭게 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과의 관계도 자연히 좋아질 것입니다.
15 유익한 세 번째 부면은 가정의 행복과 관련이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혼을 흔히 부부간의 불화에 대한 최종 해결책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예언자 말라기의 입을 통해 “하느님은 이혼하는 것을 미워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라기 2:16) 말라기 2:16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여기에서 유의할 점은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지혜에 따라 가족 성원들이 따라야 할 표준을 세워 놓으셨고, 가족 성원들은 그 표준을 따르는 만큼 평화를 누리게 된다는 점입니다. (에베소 5:28, 33; 6:1-4) 물론 우리는 다 불완전해서 문제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늘과 땅의 모든 가족이 그 이름을 빚지고 있는’ 하느님께서는 호세아서에서 실물 교수법을 통해 매우 심각한 결혼 생활 문제라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 점 역시 나중에 살펴볼 장에서 검토할 것입니다. (에베소 3:15) 이제 하느님의 표준을 따르는 일과 관련된 또 다른 점을 살펴보겠습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라’
16. 아모스 5:15은 하느님의 표준과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16 첫 사람인 아담은 선악에 대한 누구의 표준이 최상의 표준인지와 관련하여 어리석은 선택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지혜로운 선택을 할 것입니까? 아모스는 우리에게 이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도록 훈계하였습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라’라고 강력히 권고한 것입니다. (아모스 5:15) 시카고 대학교 셈어·셈어 문학 교수였던 고(故) 윌리엄 레이니 하퍼는 이 구절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모스는] 선악의 표준은 야훼의 뜻에 순응하는가 하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열두 예언자의 책에서 배우게 되는 한 가지 중심 사상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선악에 대한 여호와의 표준을 기꺼이 받아들입니까? 그 높은 표준은 우리를 위해 성서에 밝혀져 있으며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을 구성하는 장성되고 경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마태 24:45-47.
17, 18. (ㄱ) 악을 미워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악을 몹시 미워하는 마음을 어떻게 배양할 수 있는지 예를 들어 설명해 보십시오.
17 악을 미워하는 것은 하느님을 불쾌하시게 하는 일들을 하지 않는 데 도움이 됩니다. 예를 들어, 인터넷 음란물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서 그것을 보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속 사람’은 음란물 웹사이트의 내용에 대해 어떻게 느낍니까? (에베소 3:16) 그가 아모스 5:15에 나오는 하느님의 권고를 적용한다면 악에 대한 미움을 배양하기가 더 쉬워질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그는 영적 싸움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18 다른 예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 자신이 성숭배의 우상 앞에 꿇어 엎드리는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까? 생각만 해도 혐오스러운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이 프올의 바알 앞에서 부도덕을 범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민수 25:1-3; 호세아 9:10) 호세아가 그 사건을 언급한 것은 바알 숭배가 열 지파 이스라엘 왕국이 저지른 큰 죄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열왕 둘째 17:16-18; 호세아 2:8, 13)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역겨운 장면이었겠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적으로 난잡한 의식을 벌이면서 우상들에게 몸을 굽히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러한 행위를 정죄하셨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 각자는 사탄이 인터넷에 쳐 놓는 올무에 걸리지 않으려고 고투하게 됩니다. 또한 오늘날에는 인기 있는 오락물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여자들과 잘생긴 남자들을 우상화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우상 숭배에 관한 예언자들의 경고를 통해 가르침을 받아 온 사람들은 그들과 참으로 다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라
19. 요나가 큰 물고기의 뱃속에서 한 일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19 여러 가지 유혹과 문제를 겪는 가운데 하느님의 높은 표준을 옹호하려고 하다 보면, 무력하게 느껴지거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정신적으로나 감정적으로 힘이 부치는 것 같을 때, 그 절박한 상황에 어떻게 성공적으로 대처할 수 있습니까? (잠언 24:10) 결점이 있는 불완전한 사람이었던 요나에게서 배울 점이 있습니다. 그가 큰 물고기의 뱃속에서 어떻게 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여호와께 기도하였습니다. 그가 기도한 내용에 유의해 보십시오.
20. 우리는 어떻게 요나같이 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출 수 있습니까?
20 요나는 “스올의 뱃속에서” 하느님께 기도할 때 자신이 잘 알고 있던 문구들, 즉 시편에 나오는 말들을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요나 2:2) 요나는 몹시 괴로워하며 여호와께 자비를 간청하였는데, 사실 그가 한 말은 다윗이 했던 말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요나 2:3, 5의 표현과 시편 69:1, 2의 표현을 비교해 보십시오.a 그 예언자가 자신이 구해서 볼 수 있는 다윗의 시들을 잘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의 마음에는 영감받은 시편의 표현들이 샘솟듯이 떠올랐습니다. 요나는 하느님의 영감받은 말씀이 ‘그의 속에’ 있게 하였던 것입니다. (시 40:8) 우리도 감정적으로 지치는 일이 있을 때 적절한 하느님의 말씀을 떠올릴 수 있습니까? 지금 하느님의 말씀을 더욱 잘 알고 있으면, 앞으로 결정을 해야 하거나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 하느님의 표준과 일치하게 대처하는 데 필시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건전한 두려움을 가지라
21. 하느님의 표준에 고착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배양해야 합니까?
21 물론 여호와의 표준에 고착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소중히 기억해 두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예언자 미가는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적용하는 사람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통찰력을 더해 줍니다. 그는 “실용적인 지혜를 가진 사람은 당신의 이름을 두려워하리라”라고 말합니다. (미가 6:9) 실용적인 지혜를 가진 사람 즉 자신이 아는 것을 생활에 적용할 줄 아는 사람이 되려면 우리는 하느님의 이름에 대한 두려움을 배양해야 합니다.
22, 23. (ㄱ) 여호와께서 귀환한 유대인들에게 학개를 보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당신도 하느님의 표준을 따를 수 있다고 확신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2 하느님의 이름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유배 기간 이후의 예언자인 학개의 책을 살펴보십시오. 그는 38개 구절밖에 되지 않는 매우 짧은 자신의 책에서 여호와라는 이름을 35회나 사용하였습니다! 기원전 520년에 여호와께서 학개에게 예언하는 일을 맡기신 때는 예루살렘의 성전 재건 공사가 거의 진척되지 않은 채 16년이 흐른 때였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적들의 반대 때문에 낙담해 있었습니다. (에스라 4:4, 5) 그 백성은 성전을 재건할 때가 되지 않았다고 추리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이렇게 훈계하셨습니다. “너희는 자기의 길에 마음을 두고 보아라. ··· 집을 건축하여, 내가 그것을 기뻐하고 영광스럽게 되도록 하여라.”—학개 1:2-8.
23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백성의 남아 있는 자 모두가 그들의 하느님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고’ “백성이 여호와 때문에 두려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에 호응하여 하느님께서는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마음을 든든하게 해 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영의 도움으로 백성은 ‘들어와서 여호와의 집에서 일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학개 1:12-14) 하느님을 불쾌하시게 하지나 않을까 하는 건전한 두려움은 소심하던 백성이 반대에도 불구하고 행동하도록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24, 25. 이 장에서 제시하는 원칙들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해 보십시오.
24 우리는 어떠합니까? 자신의 상황에 어떤 하느님의 표준이 적용되는지 알게 되면 용기를 내어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나타낼 것입니까? 아마 젊은 여성이라면 직장 동료 중에 우리와 같은 경건한 원칙을 따르지 않는 남자가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는 친절하며 각별한 관심을 나타냅니다. 그럴 때 여호와의 표준에 대해 그리고 그 표준을 무시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에 대해 일깨워 주는 성구가 떠오를 것입니까? “음행과 포도주와 단포도주는 선한 동기를 빼앗아 간다”라는 호세아 4:11의 말씀은 어떠합니까? 그러한 성구와 더불어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은 그분의 표준에 고착하게 하여 그 남자가 사교 행사 같은 것에 초대하더라도 거절하게 할 것입니까? 만일 그가 새롱거리기 시작한다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불쾌하시게 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여 우리는 ‘도망할’ 것입니다.—창세 39:12; 예레미야 17:9.
25 이제 인터넷 음란물의 유혹을 저항하려고 하는 사람의 경우를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는 기도 형태로 되어 있는 시편 119:37의 말씀, 즉 ‘내 눈이 무가치한 것을 보지 않고 지나치게 해 주십시오’라는 말씀을 떠올릴 것입니까? 그리고 예수께서 산상 수훈에서 “누구든지 여자를 계속 바라보고 정욕을 품는 사람은 자기 마음으로 이미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되새길 것입니까? (마태 5:28)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그분의 표준과 일치한 생활을 하기를 열망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부패시킬 수 있는 것을 멀리하려는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표준을 범하는 생각이나 행동을 하려는 유혹을 받을 때에는 언제나 경건한 두려움을 한층 더 배양하려고 노력하십시오. 그리고 여호와께서 학개를 통해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26. 우리는 이제 무엇을 살펴볼 것입니까?
26 분명 우리는 여호와를 그분의 높은 표준과 일치하게 섬길 수 있으며, 그리하여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열두 예언자의 책을 계속 살펴보면 하느님의 표준을, 다시 말해 그분이 우리 각자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더욱 명확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책의 다음 부분에서는 여호와께서 뛰어난 표준을 세워 놓으신 세 가지 주요한 부면 즉 행실,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 가정생활에 대해 살펴볼 것입니다.